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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둥이와 금복이 아빠(友空) 메모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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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24 Jun 2026 04:27:1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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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우공(友空)</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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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둥이와 금복이 아빠(友空) 메모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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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불교계의 신흥종단 성립과 현황 / 윤승용</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50</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0&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77729791743&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한국 불교계의 신흥종단 성립과 현황 / 윤승용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1. 시작하는 말삼국시대에 전래한 한국불교는 고려 때는 5교9산(五敎九山)과 11종(十一宗)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로 인해 7종(七宗)에서 선교양종(禪敎兩宗)으로 축소되었&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kr&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0&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kr/news/articleView.html?idxno=20990&quot; data-og-image=&quot;&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0&quot;&gt;
&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국 불교계의 신흥종단 성립과 현황 / 윤승용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시작하는 말삼국시대에 전래한 한국불교는 고려 때는 5교9산(五敎九山)과 11종(十一宗)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로 인해 7종(七宗)에서 선교양종(禪敎兩宗)으로 축소되었&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kr&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 , 밑줄 강조는 내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4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한국의 신종교 지형과 미래&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시작하는 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삼국시대에 전래한 한국불교는 고려 때는 5교9산(五敎九山)과 11종(十一宗)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로 인해 7종(七宗)에서 선교양종(禪敎兩宗)으로 축소되었고, 결국 선종 중심으로 단일화되기에 이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과정에서 불교의 기능은 거의 피폐하여져 &lt;u&gt;사찰은 산중화되고 승려는 천민으로 떨어져 도성 출입마저 금지&lt;/u&gt;되었다. 이처럼 무불(無佛) 시대에 가까운 조선 말엽, 일단의 불교도들에 의해 새로운 불교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강오의 《한국신흥종교총감》,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의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類似宗敎)》에는 광복 이전 10여 개의 불교계 단체가 열거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묘련사(妙蓮社)를 들 수 있다. 묘련사는 1872년에 보월 최성환(1813~1891) 거사와 그를 따르는 정극경, 유성종 등 100여 명이 서울 삼각산 감로암에서 &amp;lsquo;관세음보살 칭명염불&amp;rsquo; 정진을 위해 조직한 신행 모임이었다. 보월 거사는 《제중감로》를 지어 관음신앙을 강조했다. 묘련사는 선음즐교, 법련사, 정일교 등으로도 불렸다. 법주인 최성환은 무인 출신임에도 문학과 지리학에 밝았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경세가로 알려졌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광복 이전의 불교 단체로는 3&amp;middot;1 만세운동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 스님이 불교 현대화를 꾀하며 창건한 대각교(大覺敎)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다만 《조선의 유사종교》는 대각교를 유사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이 자료집에는 영각교, 불교극락회, 감로법회, 원융도, 원각현원교 등의 이름도 보이는데 이는 모두 전통 사찰의 포교당들이다. 이 밖에도 1916년에 시작된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와 1874년에 창시된 금강도(현 金剛大道)는 독립적인 교단이었고, 정도교(正道敎)는 각세도(覺世道)라는 신종교 계통이며, 광화교(光華敎)와 같은 단체의 이름도 보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광복 이후 불교계는 1962년 제정된 &amp;lsquo;불교재산관리법&amp;rsquo;에 따라 18개 종단으로 연합체를 구성했다. 그 중심은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이었으며, 나머지 16개 종단은 신흥 불교 계열이었다. 이들은 대략 법화, 화엄, 미륵, 밀교, 정토, 약사, 비구니 계열로 구분된다. 그러나 1987년 &amp;lsquo;전통사찰보존법&amp;rsquo;이 시행되면서 새로운 종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종지&amp;middot;종풍&amp;middot;종체를 구비한 곳은 드물다. 심지어 무교(巫敎) 계통이 혼입되거나 종단의 명칭이 중복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를 상세하게 거론하기 어려우므로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신흥종단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불교계 주요 신흥종단의 현황&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법화계 종단&lt;/b&gt;&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843&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pKKQj/dJMcadV8VDd/GmIxA1kfEot5LZEraegR8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pKKQj/dJMcadV8VDd/GmIxA1kfEot5LZEraegR8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pKKQj/dJMcadV8VDd/GmIxA1kfEot5LZEraegR8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pKKQj%2FdJMcadV8VDd%2FGmIxA1kfEot5LZEraegR8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843&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843&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본디 천태종은 중국의 지자(智者) 대사가 천태산에서 득도한 후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킨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개종한 데서 비롯된다. &lt;u&gt;대한불교천태종은 의천을 종조(宗祖)로 삼고 있으며, 현대 종단을 실질적으로 건설한 상월원각(上月圓覺, 朴上月, 1911~1974) 스님은 중창조(重創祖)로 불린다.&lt;/u&gt; 상월 대조사는 일찍이 15세에 구도의 길에 나서 전래의 선도(仙道)를 닦았으나, 선도가 현대 과학을 능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불법(佛法)에 귀의했다고 전한다. 1942년에는 중국에 건너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고, 1945년 귀국하여 소백산에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1951년 그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수복불교(受福佛敎), 구세불교(救世佛敎), 생산불교 등을 내세우며 새불교 운동을 전개했으며, 오늘날 종단의 3대 지표인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선포하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천태종은 1966년 대각불교(大覺佛敎)로 창립되었으나, 1969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했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과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이며, 개인적 완성과 불국토(佛國土) 건설 및 법성체결합(法成體結合)을 종지(宗旨)로 한다. 본사인 구인사(救仁寺)는 한국 최대 규모의 사찰이며, 치병(治病)과 소원성취에 영험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조직은 종정(宗正) 중심제이며 승려들은 &lt;u&gt;주경야선(晝耕夜禪)&lt;/u&gt;의 승풍을 견지한다. 구인사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신도들이 기도&amp;middot;염불할 수 있는 현대식 회관을 건립하고 있다. 전국에 200여 사찰이 있고, 스님 500여 명이 소속되어 있다. &lt;u&gt;학교법인 금강대학교&lt;/u&gt;와 사찰별 불교대학을 운영 중이며, 격주간 〈금강신문〉과 월간지 《금강》을 발행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나라에서 법화 계열 종단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것은 1945년, 대원광(大圓光) 김정운이 조직한 &amp;lsquo;대승불교법화회&amp;rsquo;이다. 이 최초의 법화종단은 2파 3회 4종으로 분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1965년 이홍선(李泓宣, 1905~1978) 스님이 서울 숭인동 묘각사에서 독자적으로 대한불교불입종을 세웠다. 홍선 스님은 1932년 조선불교 선교양종의 교정인 김경운 스님에게 득도하고, 1940년 법화 신앙의 근본 도량으로 묘각사를 세웠다. 그는 법화 종단의 분열 과정에서 통합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민족사관이 강했던 인물이었다고 전하며, 《불입종의 생활신조》 《불종대의》 《원비경》을 비롯해서 17권의 저술을 남겼다. 대한불교불입종이라는 명칭은 1972년에 정해졌고 1988년 5월에 &amp;lsquo;대한불교관음종&amp;rsquo;으로 종명을 변경하였다. 법화계 종단에서는 모두 법화경 제목을 봉창(奉唱)하는데 이 종단에서는 독특하게 법화경의 범음(梵音)인 &amp;lsquo;나모 살달마 푼다리카 수트람&amp;rsquo;을 주문으로 염송한다. 주요 행사는 다른 불교 종단들과 유사하나 음력 10월에 지내는 &amp;lsquo;신곡제(新穀祭)&amp;rsquo;가 특징적이다. 1973년부터 발행한 월간지 《범성(梵聲)》이 있고, 법화사상 연구원과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85개 사찰에 승려 230여 명이 소속되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승불교법화회에서 분열된 일승회, 정각회, 현정회의 삼회(三會) 중 대한불교정각회의 비구니 혜일(正覺, 金甲烈, 1904~1982) 스님이 1946년 5월에 서울 성북동 무량사(無量寺)에서 창립한 종단이다. 혜일 스님은 해방 후 법화사 등에서 법화 신앙을 공부했고, 대승불교법화회에서 유일한 여성 지도자로 참여했다. 이후 법화계 종단의 분열 속에서 남녀평등권을 주장하며 1956년 자신이 건립한 성북동 무량사(1946년 창건, 1971년 대법정사로 개명)에서 &amp;lsquo;대한불교정각회&amp;rsquo;를 세웠다. 특히 기도를 중시하는 승풍으로 유명했다. 1960년에는 대한불교법화종 유지재단으로 법인화하였으며, 전통사찰보존법 이후 199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변경했다. 1999년, 원융학림을 창립하여 《법화경》 일승 사상을 계승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총무원은 대전광역시 소재 대각사에 있으며 1983년부터 〈법화종보〉를 발간해 왔다. 전국에 1,500여 사찰과 1,500여 스님이 소속해 있고,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 본존불은 십계만다라(十界曼多羅)로 하고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이며, 신도들은 &amp;lsquo;나무묘법연화경&amp;rsquo;을 염송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승불교법화회에서 갈라져 나온 북파의 김혜선(속명 金云雲, 1904~1989) 스님이 창립했다. 혜선 스님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법화 신앙에 귀의한 후, 일본의 법화 종단인 본문법화종(本門法華宗) 본능사 포교당을 개설하고 본화회(本華會) 등의 신행단체를 만드는 등 활발한 법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대승불교법화회에서 함께하던 친형 김혜운(속명 金正雲)이 1947년에 입적한 뒤, 북파를 이끌고 한국불교법화종을 세웠다. 1969년에는 불교재산관리법에 따라 &amp;lsquo;한국불교법화종 총본원(總本院)&amp;rsquo;으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했다. 그는 법화 신앙에 재래의 불교 신앙이나 민간신앙이 결부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등 정통의 법화 종단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는 가입하지 않았고, 종단 총본원은 1949년에 창건된 돈암동 법화사(法華寺)였다가 현재는 강화도 길상면 법화사로 이전하였다. 이 절의 불단(佛壇)에는 삼보(三寶)라 하여 왼편에 다보불(多寶佛)을, 중앙에는 &amp;lsquo;묘법연화경&amp;rsquo; 제자(題字)를 탑 형태로, 그&amp;nbsp; 오른편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 《무량의경》 《관보현보살행법경》이다. 소속 사찰 60여 개소에, 스님은 60여 명으로 알려진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대한불교일승종(大韓佛敎一乘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법화계 종단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가장 늦은 1968년에 창립된 종단이다. 창립자는 1939년 일본 법화계 종단인 본문법화종의 본능사에서 공부하며 법화 신앙에 귀의한 혜정(惠正, 최호민)과 예혜교 (藝惠敎)로, 두 사람이 종정과 총무원장을 맡아 이끌었다. 혜정 법사는 법화계 종단이 남/북파로 나뉘고, 그중 남파 계통의 스님들이 서울 성북동 일승사(一乘寺)에서 일승불교현정회(一乘佛敎顯正會)를 만들었을 때 이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amp;lsquo;대한불교일승종포교원&amp;rsquo;으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하였고 1973년에는 &amp;lsquo;대한불교일승종&amp;rsquo;으로 명칭을 바꾸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되어 있지는 않다. 총본산인 일승사는 1972년 2대 종정에 취임했던 송묘익(宋妙翊)이 1945년 창건한 원구사(圓俱寺)를 1952년 일승사로 이름을 바꾸어 종단에 기증한 것이다. 불단(佛壇)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그 위로 삼보불(三寶佛)을 모시고 오른편에 따로 4대 보살을 모셨다. 사단법인 대한불교일승종총무원 산하에 약 350개 사찰과 500여 명의 승려가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화엄계 종단&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대한불교원효종(大韓佛敎元曉宗)&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63년 김경택(金敬澤) 스님을 대표자로 하여 &amp;lsquo;대한불교원효종포교원&amp;rsquo;을 창립하고 문공부에 등록하였지만, 조직의 체계가 정비된 것은 2대 종정 해인(海印) 정수용(丁壽鎔, ?~1972) 스님 때부터였다. 해인 스님은 경주 기림사(祇林寺) 주지를 역임했고,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의 제정 이후 등록이 어려워지자 법화종에 가입했다가 1965년 원효종의 종정이 되었다. 1967년에는 총본산을 경상북도 월성군의 망월사(望月寺)로 옮겼고, 1977년 &amp;lsquo;대한불교원효종&amp;rsquo;으로 개명하였다. 창종 초기부터 세력이 급속히 팽창했는데, 이는 당시 불교계 내부의 고질적인 분쟁과 달리 원효 사상을 중심으로 종지(宗旨)를 뚜렷이 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 학식, 원력을 겸비한 이법홍(李法弘) 스님을 영입했던 것도 교세 팽창의 요인이었다. 그러나 1968년 종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던 법홍 스님이 도일(渡日)한 이후로 10여 년에 걸쳐 종권(宗權) 다툼에 휘말렸다. 이 분쟁은 종단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던 역술인들과의 갈등 양상을 띠었으나, 법홍 스님의 귀국 이후 정상화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소의경전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기신론해동소》 《법화종요》 《열반종요》 등이며, 율전은 《보살계본지범요기》이다. 총무원은 서울의 안양암(安養庵)이며, 총본산은 망월사(望月寺)이다. 특히 각 도의 교구에 비구니 교구를 설치하고 있으며 &amp;lsquo;원효불교대학&amp;rsquo;을 인가받아 운영하고 있다. 산하에 원효학연구소와 원효사상실천승가회가 있다. 전국적으로 700여 사찰과 1,100여 명의 승려가 있으며,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원 종단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대한불교화엄종(大韓佛敎華嚴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65년에 능해(凌海 한석영, 1892~1970) 스님 등이 인천 해광사(海光寺)에서 창종했다. 1966년에 &amp;lsquo;대한불교화엄종포교원&amp;rsquo;으로 등록했으며 1973년에 &amp;lsquo;대한불교화엄종&amp;rsquo;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능해 스님은 21세 때 개성에서 화엄 법주(法主) 이회명(李晦明, 日昇)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929년 인천에 약사암(藥師庵)을 짓고 화엄종 창종의 기틀을 닦았으며, 해방 후에는 일본 화엄종 사찰 해광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이 시행되자 대한불교법화종에 가입했으나 1966년, 독자적으로 화엄종을 창설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는 원효와 의상의 화엄 종맥을 되살리고 화엄 법주 이회명의 유훈을 받들어서 종(宗)을 부활한다고 주창했다. 소의경전은 《화엄경》이며, 대승불교 보살행 실천과 대중 교화, 지관(止觀) 수행과 견성성불(見性成佛), 염불문(念佛門)의 별개(別開)와 왕생 발원을 종지로 표방하고 있다. 능해 스님은 독신 비구였으나 비구－대처의 구분에 매이지 않고 생활불교의 길을 택하여 대처(帶妻) 종단 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된 것으로 나오지만 종단 홈페이지에 연동되지 않고, 총본산 약사사 미타전[추모관]만 공개되고 있다. 화엄승가장학재단과 대한불교화엄종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속한 사찰은 70여 개소에 승려는 9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대한불교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50~60년대에 걸쳐 지속된 비구와 대처의 분규를 종식하고 이들을 화동(和同)시키려는 목적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결성된 &amp;lsquo;대한불교화동위원회&amp;rsquo;에서 비롯된 종단이다. 이 위원회는 비구－대처 분규에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1960년 4월의 화동회 창립 이후에도 분규가 가라앉지 않자, 모든 종파와 제휴하고 종파를 초월하여 현실과 진리가 일치하는 생활불교의 구현을 기치로 내걸고 같은 해 12월 &amp;lsquo;대한불교총화회&amp;rsquo;라는 명칭의 불교 단체를 등록함으로써 종단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9년 후인 1969년 추강(秋岡)&amp;nbsp; 최득연(1893~ ?) 스님이 &amp;lsquo;대한불교총화종&amp;rsquo;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문공부에 등록했다. 1998년 남양주시 천마산 수진사로 이전했던 총무원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고, 총본산은 충북 영동의 실상사이다. 전국에 1,000여 개의 교당과 1,300여 명의 교직자가 있고,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도 교당을 두고 국제 포교에 힘쓰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밀교계 종단&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lt;u&gt;대한불교진각종(大韓佛敎眞覺宗)&lt;/u&gt;&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밀교계 종단인 진각종은 회당 손규상(孫珪祥) 대종사에 의해서 1947년 6월 개종되었다. 종단 측은 &amp;ldquo;이 땅의 풍토성(風土性)과 혈지성(血智性)에 맞는 전통 종교를 이 시대 대중의 근기에 맞도록 새롭게 한 밀교 중흥&amp;rdquo;의 종단이라고 자평한다. 손규상이 자신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구병(救病) 행각에 올랐다가 대각(大覺)한 후, 1947년 경북 영일군에 참회원(懺悔院)을 설립하였다. 이 참회원은 &amp;lsquo;옴마니반메훔&amp;rsquo; 육자진언(六字眞言)을 염송하고 참회하면 병이 낫는다는 그의 경험에서 따온 명칭이라고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 후 교세가 확장되자 1949년 &amp;lsquo;밀교금강승심인불교재가보살정도회(密敎金剛乘心印佛敎在家菩薩正道會, 약칭 心印佛敎)&amp;rsquo;를 설립하였고, 1954년에는 진각종보살회(眞覺宗菩薩會) 유지재단을 설립하였다. 1963년에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해서 문화공보부에 등록했고 1973년에 &amp;lsquo;대한불교진각종&amp;rsquo;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신라시대 명랑(明郞)법사가 개창한 신인종(神印宗)을 그 연원으로 하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비롯하여 《대일경》 《대승장엄보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 부처님 가피에 의해서 삼밀관행(三密觀行)을 실천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여타 종단들과 달리 불상을 모시지 않고 육자진언을 한글로 새겨 모신다.&lt;/u&gt; 이 종단의 교역자[정사&amp;middot;전수]는 &lt;u&gt;삭발하지 않으며&lt;/u&gt; 전통 승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생활한다. 특히 불교의 현대화&amp;middot;생활화를 주창하여 음식 불공(佛供) 대신 현금을 희사하는 불공을 장려하고, 조성된 불상에 예불하는 대신 우주에 충만한 법신불(法身佛)에 때와 장소를 구애받지 않는 시시불공(時時佛供), 처처불공(處處佛供)을 강조한다. 남녀 구별하지 않는 교역자 임명이나 관혼상제의 간소화 등 재가 생활불교를 지향한다. &lt;u&gt;포항의 위덕대학교&lt;/u&gt;를 비롯하여 중고등학교&amp;middot;유치원 등의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이 활발하다. 월간 《진각종보(眞覺宗報)》를 발행하며, 소속 사찰(심인당)은 120여 개소, 교역자(정사&amp;middot;전수)는 250여 명 수준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대한불교진언종(大韓佛敎眞言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54년 진각종(眞覺宗)에서 갈라져 나온 손해봉(孫海捧)이 울산에 대한불교참회당(懺悔堂)을 세우고 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시작되었다. 1963년에 &amp;lsquo;대한불교진언종포교원&amp;rsquo;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72년에 &amp;lsquo;대한불교진언종&amp;rsquo;으로 등록했다. 손해봉은 당숙인 손규상이 1948년 포항에 참회원을 개설할 때부터 밀교적 신앙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으나, 1954년 견해의 차이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종지(宗旨)나 소의경전은 진각종과 대동소이하나, 진언수행(眞言修行)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 진언으로 &amp;lsquo;옴 아비라움캄 바쥬라아두밤&amp;rsquo;을 암송하는 점이 다르다. 종단의 3대 지표로서 불법(佛法)수호, 생활불교, 생산불교를 표방하고 재가(在家) 방편을 수행 원칙으로 지켜왔으나, 2010년 혜천(惠天) 대종사 이후 출가 승려 중심 체제로 혁신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진언종의 독특한 의례로 &amp;lsquo;호마목(護摩木)&amp;rsquo;으로 불을 피우고 그 안에 공양물을 던져 넣음으로써 대일여래에게 공양하는 호마 의식, 가지기도(加持祈禱), 관정(灌頂) 등이 있다. 조직으로는 종정, 종리원(宗理院), 종회(宗會), 감사원 등 중앙 조직과 말사(末寺)인 진광원(眞光院)이 있다. 사찰 20개소에 승려 28명 규모이며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해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미륵계 종단&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42년 9월 전라남도 광산에서 홍원(洪原) 김계주(金桂朱)가 강증산(姜甑山)의 계시를 받고 무교(戊敎)라는 이름으로 창종한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였다. 김계주는 해방을 예언하고 일제(日帝)의 징용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등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전하며, 1946년에는 무을교(戊乙敎)로 교명을 바꾸고 활동하다가 1950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무을교는 종통을 잇는 교주가 없어 활동을 중단했다가, 무을교 본부에서 수도 중 심령이 통하고 말문이 열린 김홍현(金洪玄) 스님이 1959년에 교주로 추대되면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1964년&amp;nbsp; &amp;lsquo;대한불교미륵종중앙포교원&amp;rsquo;으로 개명하여 문공부에 등록하였고, 1977년 &amp;lsquo;대한불교미륵종&amp;rsquo;으로 종단 명칭을 바꾸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본존은 미륵불이고, 소의경전은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이며, 본산은 전북 고창에 있다. 초대 종정 김홍현은 특히 치병(治病)에 용하여 많은 신도를 확보하였으며, 초기에는 미륵불 외에도 강증산과 김일부(金一夫) 등을 신앙 대상으로 하여 증산교 계통의 신앙을 유지하였다. 미륵불을 주신으로 하여 불교 종단의 외형을 갖추었으나 미륵불이 실제로는 강증산을 의미했다. 1997년 말 통계에 의하면 소속한 사찰 127개소에 승려 134명으로 집계되었으나, 현재는 교세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제강점기 대종교(大倧敎)와 관련이 있던 춘강 전영동(春岡 全永東, 1896~1973)과 증산교 계통 미륵불교를 이끌던 최선애(崔善愛) 등이 1969년 전라북도 금산사에서 &amp;lsquo;대한불교법상종포교원&amp;rsquo;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1970년 같은 이름으로 문공부에 등록했고, 1977년에는 &amp;lsquo;대한불교법상종&amp;rsquo;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전영동은 대종교에서 활동했지만, 불교&amp;middot;정역(正易)&amp;middot;증산 사상 등에 두루 밝았다고 한다. 초대 종정 전영동이 사망하자 1974년 홍해(弘海) 남궁규(南宮圭, 1894~1976)를 2대 종정으로 추대했다. 남궁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국의 명산에서 수도하는 한편, 충남 신도안의 불암사(佛岩寺) 및 서울 삼각산의 구복암(龜福庵) 등 사찰을 건립하고 미륵 기도로써 여러 가지 영험을 보여주었고, 한열(寒熱) 사상으로도 유명하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열 사상이란, 인간과 천지가 모두 찬 기운과 뜨거운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기운들이 탁해져서 천지간에 객화객냉(客火客冷)이 가득 차 세상이 말세오탁(末世汚濁)에 빠졌다는 것이다. 소위 &amp;lsquo;객화객냉&amp;rsquo;을 없애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천지인(天地人)이 고르게 상합(相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의경전은 《미륵삼부경》 《해심밀경》 《유식법상종요》 《점찰선악업보경》 등이다. 본산은 고려 초기에 개창되고 1970년에 중창된 경기도 안성시 쌍미륵사이며, 소속한 사찰 332개소에 400여 명의 스님이 있다. 〈법상종 종보〉를 발행하며,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원 종단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대한불교용화종(大韓佛敎龍華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진공(眞空) 서백일(徐白一, 1888~1966)이 1931년 전라남도 구례에 구성사(九聖寺)를 짓고 &amp;lsquo;미륵불교 포교소&amp;rsquo;를 세운 데서 유래한다. 1935년 하동에 포교당을 짓고 1943년에 상불사와 총림(叢林)을 세웠으며, 1955년 김제에 용화사를 창건하였다. 서백일은 어려서부터 참선(參禪), 준제주송(准提呪誦), 술학(術學) 등을 연마하다가 39세에 강증산의 화현(化現)인 미륵세존을 친견하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는 절을 짓고 남녀 수좌(首座)들을 양성하며 1960년대 초반까지 미륵불 출현을 위한 운도공사(運度公事)를 행했다. 그러나 그는 미륵불 출현 이전에 큰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하며 많은 신도에게 가산을 정리하고 김제 용화사(龍華寺) 주변으로 이주케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한편, 후천곤운(後天坤運)의 음양공사(陰陽公事)라는 명목으로 여러 여성 수좌를 희생시켰으며 1966년에 남성 수좌에게 피살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63년에 &amp;lsquo;대한불교용화종포교원&amp;rsquo;으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했고, 198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용화종의 본산은 1950년에 서백일이 창건하여 비구니 교육 도량이 된 전주 원각사(圓覺寺)이다. 서백일의 사망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큰 곤란을 겪으면서도 오직 재건에 힘쓴 비구니들에 의해서, 현재 원각사는 전주에서 가장 큰 사찰로 변모했다. 또, 용화종 관계자들은 서백일과의 관계를 굳이 거론하지 않고 전통적인 미륵신앙과 의식을 행하며 미륵종단의 길을 걷고 있다. 소의경전은 《미륵삼부경》이며 그 외 모든 경전을 참고하며 수행한다. 15개 내외의 사암이 소속되어 있고,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이다. 본산인 서울 보문동 소재 보문사는 1115년 고려시대 담진(曇眞) 국사에 의해서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창건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여러 비구니에 의해서 개축된 기록들이 있다. 1936년에 이긍탄(李亘坦, 1885~1980) 스님이 주지에 취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송은영(宋恩榮, 1910~1981) 스님이 주지에 취임하여 눈부신 중흥불사(中興佛事)를 이루었다. 그런데 1962년에 출범한 통합종단을 둘러싸고 비구－대처 승가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소위 &amp;lsquo;불교정화운동&amp;rsquo; 시기에 보문사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에 처하자, 긍탄&amp;middot;은영 두 스님은 1971년에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비구니의 수행 환경을 지키고 여성의 권익과 위상을 높여 사회발전에 공여할 목적으로 1972년에 대한불교보문종을 창종하였다. 석가모니불을 교주로 하고 부처님의 이모이면서 최초의 비구니였던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 Mahapajapati-Gotami)를 원조(元祖)로 한다. 설월당 긍탄 스님이 종조이며, 보암당 은영 스님은 중흥조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주지 은영 스님이 30여 년간 불사 중흥과 건물 중창에 전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경주 석굴암을 본뜬 모형 석굴암을 보문사 경내에 조성하면서 큰 부채를 지게 되자 1981년에 자진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전국에 말사가 있으나 운영은 대부분 독자적이다. 독보적인 비구니 종단을 유지하면서도 종풍이나 법요의식 등은 조계종과 비슷하며 다른 종단 비구니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으로 하되, 기타 대승 경전의 연구도 제한하지 않는다. 계율은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하며, 비구와 관련된 계율은 제외하고 있다. 일찍부터 양로원, 어린이집 등 복지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 왔고, 소속된 사찰은 40여 개이며 20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있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도 국제 포교를 위해 6개소의 사찰을 운영하고 있다. 간행물로 월간 《보문》이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6) 원불교(圓佛敎)&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동학 최제우, 증산교 강일순 이후 또 하나의 민족종교로 탄생한 신흥종교이다&lt;/u&gt;. 소태산(少太山) 박중빈(1891~1943)이 26세 되던 1916년 자수자각(自修自覺)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전라남도 영광에서 창설하였다. 그는 &amp;ldquo;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amp;rdquo;고 선언하여 불교 교리의 시대화&amp;middot;대중화&amp;middot;생활화를 주장하였다. 교단 창설 초기인 1917년에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금주, 금연, 소비 절약, 공동 출역, 시미운동(匙米運動)을 전개하여 상당한 기금을 모았다. 그 자금으로 간척사업을 하여 원불교 창립의 재정적 기초를 다지고 &amp;lsquo;동정일여 영육쌍전(動靜一如 靈肉雙全)&amp;rsquo;의 정신을 구현하였다. 초기 교단 작업을 이룬 후 5년에 걸쳐 교리를 정리하고 1924년에 &amp;lsquo;불법연구회&amp;rsquo;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lt;u&gt;제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 송규가 1945년에 &amp;lsquo;원불교&amp;rsquo;로 교단명을&lt;/u&gt; &lt;u&gt;바꾸었다&lt;/u&gt;. 1946년에 유일학림(현 원광학원재단)을 설립하여 &lt;u&gt;교육사업에 주력&lt;/u&gt;하였고, &amp;lsquo;동원도리(同源道理)&amp;middot;동기연계(同氣連契)&amp;middot;동척사업(同拓事業)&amp;rsquo; 등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제시하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원&lt;u&gt;불교는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의 진리를 종지로 한다&lt;/u&gt;.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문과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으로 정각정행(正覺正行), 지은보은(知恩報恩), 불법활용(佛法活用), 무아봉공(無我奉公)의 4대 강령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 불상을 신앙 대상으로 하지 않고, 시주&amp;middot;불공을 폐지하여 &lt;u&gt;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교화사업을 전개&lt;/u&gt;한다. 주요 경전으로는 《정전》 《대종경》 《불조요의》 《원불교예전》 등이 있다. 전국에 500여 개 교당과 9천여 명의 교직자가 있다.&lt;u&gt; 원광대와&lt;/u&gt; 영산대학을 비롯해서 중고등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고 각종 사회복지사업에 참여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불교계 신흥종단의 성격&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국에서 불교 종단을 언급할 때 &amp;lsquo;신흥종교&amp;rsquo;라는 범주를 적용하는 것은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있다. 그러나 실제로 조계종, 태고종을 제외한 여타 종단의 발생과 그 신행 양식을 보면, 단순히 불교 전통을 계승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또, 역사적으로 불교가 무속이나 민간 도교 등의 기층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이들 &lt;u&gt;기층 신앙의 담지자들이 종교단체를 만들 때는 자연스럽게 불교 종단을 표방하는 경우도 많았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예컨대 혹자는 조선조 말 삼각산 감로암에서 결성된 묘련사를 신종교의 효시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국 불교사에 유구한 신행 결사였을 뿐이지, 신종교의 성격은 희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제하에 조직되었던 대각회나 선학원 등도 신종교 범주에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기본적으로 해방 전후 한국 불교계 자체의 혁신운동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단, 해방 후 소속이 불분명한 많은 사설 사암이 대각회나 선학원 소속임을 표방함으로써 공인을 받으려던 경향이 있었으므로, 현실적인 공인 장치로서의 측면에서 그들도 불교계 신종교 단체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제강점기에 유입된 일본 불교계 신종교들을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외래 신종교의 범주에 들 뿐, 한국에서 발생한 신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본의 법화계&amp;middot;정토계 신종교들은 조선인을 상대로 포교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교사를 상당수 배출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해방 후 법화계 등의 불교 종단을 창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다른 한편에서, 일제 치하 우리 신종교들 특히 &lt;u&gt;증산계의 많은 분파들이 &amp;lsquo;미륵불교&amp;rsquo;를 표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역시 불교계 종단의 창립으로 볼 수는 없다.&lt;/u&gt; 물론 그들도 해방 후 사회 적응 과정에서 때로는 공인된 종교의 힘에 의탁할 필요성이 있었고, 때로는 불교로의 개종을 통해서 새로운 종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용화종&amp;middot;미륵종&amp;middot;법상종 등의 증산계 종단들이라고 하겠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계 신종교들의 창립은 해방 후 특히 1950년대 이후 비구－대처의 분규 과정에서 빈번했다. 전통적인 선(禪) 수행 불교를 표방하는 비구들이 수행처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심정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때로는 물리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전통 사찰들을 장악했던 데 많은 이유가 있다. 한국불교에서 장자 교단의 위치를 확보한 대한불교조계종이 그 내부에 끊임없는 분규가 이어지면서 승려들이 이탈해 나간 과정과도 연관이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새롭게 교단을 세우고자 하면서도 수행법, 소의경전, 신행 양식 등에서 전통을 답습하였기 때문에 불교계 신종교라고 볼 수 없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80년 당시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한 종단은 18개였고 현재는 28개 종단이 가입해 있으나, 1990년대쯤 종단 수가 60개를 넘었다는 자료도 있다. 《한국불교총람》에도 40여 개 종단이 공식적으로 게재된 바 있으나, 모두가 불교 종단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며 종교적 뿌리나 신행 양식에서도 상당한 편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불교와 전혀 무관한 신종교들이 불교 종단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계룡산 신도안의 경우처럼 무당들의 사설 암자가 성장하면서 교단을 이룬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교 종단의 숫자가 많다는 점은 차치하고, 그처럼 종단들이 생겨나는 배경이나 신행 의례(儀禮) 등에 관한 분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컨대 근현대 불교 신흥교단의 특성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불교의 정체성이 모호할 만큼 혼합주의적 교리를 지닌다는 점이다. 둘째, 교단의 역사를 과거로 소급하여 창건을 &amp;lsquo;중흥&amp;rsquo;의 관점에서 서술하며 정통성을 확보한다. 셋째, 종주의 카리스마에 기반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조직 결속과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신비체험과 영험 등 기복적 신앙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lt;/p&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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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 May 2026 22:51:16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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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민족종교 계통 신흥교단의 출현과 전개 / 조성환</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77729605862&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민족종교 계통 신흥교단의 출현과 전개 / 조성환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1. 들어가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한국 철학사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amp;lsquo;공백기&amp;rsquo;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amp;lsquo;위정척사 사상&amp;rsquo;이나 &amp;lsquo;개화사상&amp;rsquo;이 다루어지는데, 양자는 모두 서&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kr&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kr/news/articleView.html?idxno=20991&quot; data-og-image=&quot;&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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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민족종교 계통 신흥교단의 출현과 전개 / 조성환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들어가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한국 철학사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amp;lsquo;공백기&amp;rsquo;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amp;lsquo;위정척사 사상&amp;rsquo;이나 &amp;lsquo;개화사상&amp;rsquo;이 다루어지는데, 양자는 모두 서&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kr&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4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한국의 신종교 지형과 미래&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들어가며&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lt;/u&gt;는 &lt;u&gt;한국 철학사&lt;/u&gt;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amp;lsquo;공백기&amp;rsquo;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amp;lsquo;위정척사 사상&amp;rsquo;이나 &amp;lsquo;개화사상&amp;rsquo;이 다루어지는데, 양자는 모두 서구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찬반양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lt;u&gt;하지만 한국 종교사&lt;/u&gt;로 눈을 돌리면, 이 시기야말로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한국 종교가 우후죽순으로 탄생한 일종의 &amp;lsquo;제자백교(諸子百敎)&amp;rsquo; 시기에 해당한다. 현대 한국을 &amp;lsquo;종교백화점&amp;rsquo;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현상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흔히 &amp;lsquo;민족종교&amp;rsquo; 내지는 &amp;lsquo;민중중교&amp;rsquo;라고 일컬어지는 이 신흥종교들은 그때까지 &amp;lsquo;성인의 가르침[聖敎]&amp;rsquo;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던 한국 &lt;u&gt;민중의 세계관을&lt;/u&gt; 유감없이 드러냈다. 특히 민족종교의 물꼬를 튼 동학(東學)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을 통해 민(民)이 주인이라는 &amp;lsquo;민주(民主)&amp;rsquo; 의식을 드높였고, 원불교에서는 &amp;ldquo;모든 것이 고통이 아니라 은혜이다&amp;rdquo;라고 하는 독특한 불교 교리를 제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인 &amp;lsquo;사회참여&amp;rsquo; 역할을 수행하였다. &lt;u&gt;동학을 이은 천도교&lt;/u&gt;는 1920년에 《개벽》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lt;u&gt;대종교&lt;/u&gt;는 같은 해에 만주에서 종교적 수양과 항일 투쟁을 겸하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을 실천하였다. 이처럼 근현대 한국의 민족종교는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문화적, 사상적 정체성을 알려주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에서는 동학을 비롯한 근현대 한국 민족종교의 탄생 과정과 그것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민중이 서구적 근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신흥종교의 출현&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동학, 민족종교의 시작을 알리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동학은 가히 &amp;lsquo;민족종교의 서막&amp;rsquo;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lt;u&gt;동학은 천도교, 시천교, 상제교 등 다양한 신종교로 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 이외에도 강증산이나 소태산(원불교 창시자)과 같이 동학이 제창한 개벽의 이념을 표방하는 민족종교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lt;/u&gt; 이들 신종교는 하나같이 &amp;lsquo;서세동점&amp;rsquo;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성격을 띠고 있다. &lt;u&gt;특히 동학이 탄생한 1860년은 동아시아가 일대 전환을 맞이한 해였다&lt;/u&gt;.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amp;lsquo;베이징조약&amp;rsquo;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세계정세를 발 빠르게 내다보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국으로 견문을 떠나고, 1868년에는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amp;lsquo;메이지유신&amp;rsquo;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의 국운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당시의 정세를 동서 문명의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요청되는 &amp;lsquo;다시개벽&amp;rsquo;의 시기로 인식하고, 종래의 유학을 대신해서 &amp;lsquo;나라를 돕고 백성을 살릴[輔國安民]&amp;rsquo; 새로운 신념 체계[道]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amp;lsquo;도&amp;rsquo;를 추구하는 방식에서도 조선 성리학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amp;lsquo;&lt;u&gt;성인의 가르침[聖敎]&amp;rsquo;이 아닌 &amp;lsquo;하늘의 가르침[天敎]&amp;rsquo;&lt;/u&gt;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동학을 창시하기 전에 시도했다고 하는 천제(天祭), 즉 &amp;lsquo;하늘에 대한 제사와 기도&amp;rsquo;는 이 점을 시사한다. 최제우가 보기에 당시 문명의 위기는 하늘님을 모시고 공경하는 인간의 &lt;u&gt;원초적 영성&lt;/u&gt;이 약화한 데에서 초래된 인간 이기주의[各自爲心]의 결과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런 고민을 하던 1860년 4월, 마침내 그는 &lt;u&gt;신비체험&lt;/u&gt;을 통해 하늘님으로부터 계시를 얻고, 그것으로 새로운 &amp;lsquo;학&amp;rsquo;과 &amp;lsquo;도&amp;rsquo;를 창도했다. 그 이름은 하늘님을 모신다는 점에서는 &amp;lsquo;천도&amp;rsquo;이고, 그 도를 한반도에서 받았다는 점에서는 &amp;lsquo;동학&amp;rsquo;이다. &amp;lsquo;동학&amp;rsquo;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고, &amp;lsquo;천도&amp;rsquo;는 1905년에 손병희가 동학을 &amp;lsquo;천도교&amp;rsquo;로 개칭할 때의 개념적 근거가 된다. 최제우가 동학=천도를 창도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한 일이었다. 이것은 그가 종래의 유교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을 실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새로운 도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로서의 &amp;lsquo;윤리 도덕&amp;rsquo;이 아니라, 인간과 하늘 사이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amp;lsquo;하늘 도덕&amp;rsquo;이다. 구체적으로는 내 안에도 하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섬기는 &lt;u&gt;시천주(侍天主&lt;/u&gt;)의 도덕이다. 시천주의 인간관을 깨달은 최제우는 그것의 구현 일환으로 노비를 해방하였고, 이런 그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은 민중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유학자나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정부가 보기에는 종래의 질서를 뒤흔드는 이단(異端)에 불과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지 4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 뒤를 최시형이 잇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해월 최시형(1827~1898)&lt;/u&gt;은 한편으로는 동학의 조직과 체제를 체계화하고 확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체험과 시대의 변화에 맞게 &lt;u&gt;재해석했다. &amp;lsquo;다시개벽&amp;rsquo;을 &amp;lsquo;후천개벽&amp;rsquo;으&lt;/u&gt;로 개념화하면서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amp;lsquo;물질 개벽&amp;rsquo;에 대비되는 &amp;lsquo;인심 개벽&amp;rsquo;으로 제시했다(&amp;lsquo;인심 개벽&amp;rsquo;은 이후에 원불교에서 &amp;lsquo;정신 개벽&amp;rsquo;으로 개념화된다). 또한 &amp;lsquo;하늘님&amp;rsquo;의 의미를 &amp;lsquo;천지(天地)&amp;rsquo;로 재해석하고, 천지야말로 인간과 만물의 부모라고 하는 &amp;lsquo;천지부모설&amp;rsquo;을 제창했다. 나아가서 도덕의 범위를 비인간 존재(nonhuman)로까지 확장하여, &amp;lsquo;사물을 공경하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도덕이 완성된다&amp;rsquo;라고 하는 경물(敬物) 도덕을 설파했다. 제사의 형식에서도 천지부모의 시조론(始祖論)과 시천주의 인간관을 근거로, 죽은 조상이 아닌 산 나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는 &amp;lsquo;향아설위(向我設位)&amp;rsquo; 법을 제기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조직의 측면에서도 종래의 &amp;lsquo;접(接)&amp;rsquo; 이외에 그보다 더 큰 &amp;lsquo;포(包)&amp;rsquo; 조직을 창시했는데, 이것은 이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데 물리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당시에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amp;lsquo;기포(起包)&amp;rsquo; 즉 &amp;lsquo;포를 일으켰다&amp;rsquo;고 부른 점이 이를 방증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금까지 동학의 탄생 배경과 창시자 최제우와 후계자 최시형의 사상적 특징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들은 당시를 구질서에서 신질서로 넘어가는 문명 전환기로 인식하면서 종래에 &amp;lsquo;천지개벽&amp;rsquo;을 의미하던 &amp;lsquo;개벽&amp;rsquo;을 사상 용어로 재해석하였다. 나아가서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하늘님을 모시는 영성의 실천을 강조하는 신도덕(新道德)을 제창하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측면들은 20세기까지만 해도 학계나 시민사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20세기는 개벽이 아니라 &amp;lsquo;혁명&amp;rsquo;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amp;lsquo;동학&amp;rsquo; 하면 &amp;lsquo;동학농민혁명&amp;rsquo;을 떠올릴 정도로 동학은 사상이나 종교보다는 &amp;lsquo;역사적 사건&amp;rsquo;으로만 주목받았다. 다만 1980년대 중반에 선구적으로 &amp;lsquo;한살림&amp;rsquo; 운동가들에 의해서 최시형의 사상이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철학으로 부각되었고, 학계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최시형의 생태철학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 2019년에 삼일독립운동 100주년을 전후로 &amp;lsquo;개벽사상&amp;rsquo;이 학계와 시민사회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amp;lsquo;&lt;u&gt;개화파&amp;rsquo; 이외에도 &amp;lsquo;개벽파&amp;rsquo;가 있었다&lt;/u&gt;는 인식이 확산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뿐만 아니라 동학을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지지를 받으면서, &amp;lsquo;동학농민혁명－삼일독립운동－4&amp;middot;19－5&amp;middot;18－촛불혁명&amp;rsquo;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보는 역사 인식도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사회에서는 &amp;lsquo;사상으로서의 동학&amp;rsquo;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여, 종래와 같은 동학 기념행사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동학 텍스트를 읽거나 배우는 동학 공부 모임이 활성화되는 상황이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51&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VX6Ur/dJMcafGtHax/KWBmgSuvtzkV8LF3Oj22S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VX6Ur/dJMcafGtHax/KWBmgSuvtzkV8LF3Oj22S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VX6Ur/dJMcafGtHax/KWBmgSuvtzkV8LF3Oj22S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VX6Ur%2FdJMcafGtHax%2FKWBmgSuvtzkV8LF3Oj22S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51&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51&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천도교, 근대화 운동에 뛰어들다&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898년, 최시형이 35년간의 도망자 생활을 마감하고 최제우의 뒤를 따라 처형당하자, 의암 손병희(1861~1922)가 동학 교단을 이끌었다. 손병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의 최고 지도자였고, 일본군에게 패한 이후에는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1905년에는 &amp;lsquo;동학&amp;rsquo;을 &amp;lsquo;천도교&amp;rsquo;로 개칭하면서 근대적인 종교 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하였다.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교단 조직을 새롭게 하였으며, 사범강습소를 운영하여 교리와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lt;u&gt;최제우의 &amp;lsquo;시천주&amp;rsquo; 인간관을 &amp;lsquo;인내천&amp;rsquo;으로 재해석&lt;/u&gt;하여(〈대종정의〉 1907), &amp;lsquo;인내천&amp;rsquo;을 천도교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을 살려서 삼일독립운동을 기획하였고, 체포된 후에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천도교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종교였다. 신자 수가 100~300만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기독교 인구는 대략 20~30만 명 정도였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1910년에는 본격적인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하여, 한편으로는 천도교 교리를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잡지에는 &amp;lsquo;교리부&amp;rsquo; 외에도 &amp;lsquo;학술부&amp;rsquo;를 두어서 &amp;lsquo;물리학&amp;rsquo; &amp;lsquo;화학&amp;rsquo; &amp;lsquo;지리학&amp;rsquo; &amp;lsquo;경제학&amp;rsquo; &amp;lsquo;양돈학&amp;rsquo; &amp;lsquo;삼림학&amp;rsquo;과 같은 신학문을 소개하였다. 또한 순한글로 쓴 원고 중에서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amp;lsquo;하&amp;rsquo;과 &amp;lsquo;하님&amp;rsquo; 개념에 변화가 나타난다. 1911년을 전후로 &amp;lsquo;한울&amp;rsquo; 개념이 정착되고, 이어서 동학 창도 60주년이 되는 1920년에는 &amp;lsquo;한울님&amp;rsquo;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또한 1920년에는 천도교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대중적인 《개벽》 잡지를 창간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개벽》의 주필을 역임한 소춘 김기전은 방정환 등과 함께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 여성해방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니체나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같은 서양의 현대철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개벽》의 편집인 이돈화는 《천도교회월보》와 《개벽》에 다수의 글을 발표하면서 &amp;lsquo;천도교의 철학화&amp;rsquo; 작업의 선봉에 섰다. 특히 1931년에는 자신의 생각을 종합한 《신인철학(新人哲學)》을 출간하여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amp;lsquo;철학&amp;rsquo;이라는 틀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던 &amp;lsquo;한울&amp;rsquo;의 철학화를 시도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16a085;&quot;&gt;한울은 &amp;lsquo;큰 우리&amp;rsquo;를 의미하는데, 그것의 철학적 의미는 &amp;lsquo;우주&amp;rsquo;와 &amp;lsquo;대아(大我)&amp;rsquo;를 나타냄과 동시에 &amp;lsquo;지기(至氣)&amp;rsquo;와 생명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한울은 한편으로는 내가 곧 하늘이라는 &amp;lsquo;인내천&amp;rsquo; 명제를 함축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물의 생성과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본체의 역할을 수행한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같이 이돈화는 &amp;lsquo;한울&amp;rsquo;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만물, 우주를 통합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동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amp;nbsp; &amp;nbsp;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돈화의 이러한 작업은 해방 이후에 &amp;lsquo;한사상&amp;rsquo;이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천도교 사상가 백세명은 1956년에 쓴 《동학사상과 천도교》에서 &amp;ldquo;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amp;lsquo;한&amp;rsquo;이다&amp;rdquo;라고 하면서, &amp;lsquo;한&amp;rsquo;을 천도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 사상 전반으로까지 확장하였다. 나아가서 &amp;ldquo;한은 만물의 본체&amp;rdquo;를 말하는데, 그것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인격화해서 &amp;lsquo;한님&amp;rsquo;이라고 불렀고, 이후에 &amp;lsquo;한&amp;rsquo;은 &amp;lsquo;한울&amp;rsquo;이나 &amp;lsquo;한울&amp;rsquo;로, &amp;lsquo;한님&amp;rsquo;은 &amp;lsquo;하느님&amp;rsquo;이나 &amp;lsquo;한우님&amp;rsquo; 등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로 〈단군신화〉를 들면서, 환인(桓因)은 &amp;lsquo;한&amp;rsquo;의 한자어 표현이고, &amp;lsquo;환웅대왕(桓雄大王)&amp;rsquo;은 &amp;lsquo;한우님&amp;rsquo;을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amp;lsquo;한&amp;rsquo;이나 &amp;lsquo;한울&amp;rsquo;을 한국 철학사 전체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서, 이후에 실학자 이을호나 신학자 김상일, 공공철학자 김태창 등으로 계승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최시형의 수제자 중에는 손병희 이외에도 이용구(1868~ 1912)와 김연국(1857~1944)이 있었는데, 이들은 손병희가 &amp;lsquo;천도교&amp;rsquo;로 개칭하자 독자적으로 시천교(侍天敎, 1906)와 상제교(上帝敎, 1907)를 창건했다. 최초의 동학 분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 시천교, 상제교 등은 &amp;lsquo;신동학&amp;rsquo; 내지는 &amp;lsquo;후기 동학&amp;rsquo;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천도교와 달리 시천교나 상제교에서는 &amp;lsquo;하&amp;rsquo;에서 &amp;lsquo;한울&amp;rsquo;과 같은 천명(天名)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사상을 현대화하거나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힘쓰기보다는 동학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대종교, 수행과 전쟁을 병행하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시천교나 상제교가 탄생한 직후에 동학과는 또 다른 계열의 민족종교가 호남에서 탄생했는데, 바로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하는 신종교로, 창시자는 홍암 나철(1863~1916)이다. 나철은 손병희와 동시대의 인물로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제우와 마찬가지로 유학적 소양이 풍부하였다. 10세 무렵에는 구례의 왕석보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0대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구한말의 고관(高官) 김윤식에게 직접 배웠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나철은 대부분의 민족종교 창시자들과는 달리 관직에 올라 벼슬까지 하였다. 29세 때(1891)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 권지부정자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05년에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자 해학 이기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연대를 촉구하는 등 대일 외교를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amp;lsquo;을사오적&amp;rsquo;을 처단하는 비밀조직인 &amp;lsquo;자신회(自新會)&amp;rsquo;를 조직하였다. 의거가 실패하자 무안군으로 유배되었는데 고종의 특사로 5개월 만에 풀려났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무렵 나철은 단군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대종교 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단군 신앙을 전개하던 백봉신사(白峯神師) 주변 인물들과 교류하며 수도하던 중, 46세가 되던 1908년 12월에 영적 계시를 받는 체험을 한다. 이어 1909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amp;lsquo;단군대황조&amp;rsquo;의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례를 봉행한 뒤 &amp;lsquo;단군교&amp;rsquo;의 포명(佈明)을 선포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자 나철은 교명을 &amp;lsquo;대종교(大倧敎)&amp;rsquo;로 개칭했다. 여기서 &amp;lsquo;대(大)&amp;rsquo;는 우리말의 &amp;lsquo;한&amp;rsquo;을 의미하고, &amp;lsquo;종(倧)&amp;rsquo;은 &amp;lsquo;검&amp;rsquo;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amp;lsquo;대종&amp;rsquo;은 &amp;lsquo;한얼&amp;rsquo;이나 &amp;lsquo;한검&amp;rsquo;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amp;lsquo;한글&amp;rsquo;이라는 개념도 탄생하였는데, 1911년 천도교에서 &amp;lsquo;하&amp;rsquo;을 &amp;lsquo;한울&amp;rsquo;로 변경한 것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최제우의 &amp;lsquo;다시개벽&amp;rsquo;에 해당하는 대종교의 개념은 &amp;lsquo;중광(重光)&amp;rsquo; 또는 &amp;lsquo;개천(開天)&amp;rsquo;이다. &amp;lsquo;중광&amp;rsquo;은 &amp;lsquo;다시 빛낸다&amp;rsquo;는 뜻으로,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중흥시킨다는 의미이다. &amp;lsquo;다시개벽&amp;rsquo;이 태초의 인간의 영성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잇듯이, &amp;lsquo;중광&amp;rsquo;도 단군 신앙을 부활시킨다는 의미이다. 백봉신사의 제자들이 썼다고 하는 〈단군교포명서〉에 의하면 &amp;ldquo;단군교는 4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다.&amp;rdquo; 그동안 〈단군신화〉와 같이 이야기의 형태로만 전해지던 단군이 한 교단의 교조로 격상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동학이 시천주, 천도교가 인내천의 신관을 취하고 있다면 대종교의 신관은 &amp;lsquo;삼신일체(三神一體)&amp;rsquo;이다.&lt;/u&gt; 삼신일체란 환인&amp;middot;환웅&amp;middot;단군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amp;lsquo;삼위일체&amp;rsquo;에 해당한다. 하지만 작용의 측면에서는 각각 조화(造化)와 교화(敎化) 그리고 치화(治化)의 역할을 담당한다. 조화는 생성에, 교화는 도덕에, 치화는 정치에 각각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삼신의 관계는 체용으로 설명된다. 나철이 쓴 《신리대전(神理大全)》에 의하면, 삼신은 체(體)의 측면에서는 하나이지만 용(用)의 측면에서는 셋이다. 삼신의 호칭도 순한글을 사용하여 &amp;lsquo;한인&amp;middot;한웅&amp;middot;한검(한배검)&amp;rsquo;이라고 부른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천지인 삼재를 원방각(圓方角)으로 이미지화하는데 원은 동그라미를, 방은 정사각형을, 각은 삼각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배검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의 모양은 모두 원방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천도교와 마찬가지로 대종교도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종교는 천도교와는 다른 대응 방식을 취했다. 1914년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길림성 청파호로 총본산을 옮기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확장하여 교도 수가 3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포교규칙〉(일종의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의 종교 활동을 차단하자, 이듬해 1916년에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올라가 제천의례를 행한 뒤에 스스로 호흡을 끊어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구월산은 단군이 수도로 삼아서 나라를 다스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나철이 죽기 전에 남긴 〈순명삼조(殉命三條)〉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amp;ldquo;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한배검 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고 한겨레의 멸망을 구하지 못하여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amp;rdquo; 나철의 죽음에 대해 종교학자 박광수는 &amp;ldquo;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나라와 대종교를 구하고자 했던 일종의 &amp;lsquo;희생제의&amp;rsquo;였다&amp;rdquo;라고 해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나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6년에는 나철이 태어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amp;lsquo;홍암나철기념관&amp;rsquo;이 건립되었는데, 나철이 죽기 전에 한글로 딸에게 쓴 유서가 전시되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나철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식도 국권회복 운동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노길명은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나철의 순명(殉命)이었다고 본다. &amp;ldquo;제천의례와 홍암의 순명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온건한 방법에서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급격히 전환되기 시작한다.&amp;rdquo;&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제2대 교주 김교헌은 1919년 12월에 대종교인들로 구성된 대한군정서(일명 &amp;lsquo;북로군정서&amp;rsquo;)를 조직하고, 교단의 지도자인 백포 서일을 총재로 임명하였다. 서일은 1920년에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후에 시베리아에서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을 겪고 마적단의 습격을 당해 큰 타격을 입자 서일 역시 나철의 뒤를 따라서 자결하였다(1921).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amp;ldquo;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amp;rdquo;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김교헌도 사망하였다. 길림성 화룡현에는 나철과 김교헌 그리고 서일의 무덤이 한자리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나철과 함께 서일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에는 김교헌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일은 독립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이자 사상가였다. 그가 쓴 《회삼경(會三經)》이나 《삼일신고강의》 《삼문일답(三問一答)》 등은 대종교의 핵심 교리인 &amp;lsquo;삼일철학&amp;rsquo;을 해설한 주석서이다. 특히 《회삼경》은 중국철학에 나오는 &amp;lsquo;회삼귀일&amp;rsquo;의 방법론을 빌려 와서 대종교의 삼신일체 사상을 철학적으로 풀이한 경전이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61&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GlS9G/dJMcaarDup3/vAXkYWUwhZHkX9u8bWI1x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GlS9G/dJMcaarDup3/vAXkYWUwhZHkX9u8bWI1x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GlS9G/dJMcaarDup3/vAXkYWUwhZHkX9u8bWI1x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GlS9G%2FdJMcaarDup3%2FvAXkYWUwhZHkX9u8bWI1x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61&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61&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lt;u&gt;강증산, 해원상생(解冤相生&lt;/u&gt;)의 길을 찾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증산 강일순(1871~1909)은 손병희나 나철보다 약 10여 년 뒤에 전북 고부에서 태어났다. 고부는 지금의 정읍으로, 1894년에 전봉준의 봉기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던 증산은 31세 때인 1901년, 전라도 모악산 대원사에서 득도하였다. 하지만 최제우나 나철과는 달리 교단이나 종교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모악산 아래 구릿골에서 &amp;lsquo;광제국(廣濟局)&amp;rsquo;이라는 조그마한 한약방(일명 &amp;lsquo;동곡약방&amp;rsquo;)을 차리고 병든 중생들을 치유하였다. 이 활동을 증산은 &amp;lsquo;&lt;u&gt;천지공사(天地公事)&amp;rsquo;라고 하였는데, 천지공사란 선천의 상극의 질서를 후천의 상생의 질서로 바꾸는 종교적 행위를 말한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증산은 선천의 질서를 &amp;lsquo;묵은 하늘&amp;rsquo;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16a085;&quot;&gt;&amp;ldquo;나는 타고난 모습대로 소탈하게 살 것을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고, 나는 의례가 간소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예절이 번잡하고, 나는 웃고 기쁘게 대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위엄을 주장하느니라. 나는 다정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정숙하고 점잖은 것을 높이고, 나는 진실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허장성세를 세우고, 나는 화락(和樂)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싸워 이기기를 주장하느니라. 앞 세상에는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없어 천하는 대동세계가 되고, 모든 일에 신명이 수종 들어 이루어지며 따뜻한 정과 의로움이 충만하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리라. 묵은 하늘은 이것을 일러 상놈의 세상이라 하였느니라.&amp;rdquo;&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의하면 선천의 질서에서 &lt;u&gt;&amp;lsquo;상놈의 세상&amp;rsquo;&lt;/u&gt;이라고 부르던 사회가 오히려 &amp;lsquo;대동&amp;rsquo;의 이념이 이루어진 &amp;lsquo;새 하늘&amp;rsquo;에 해당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증산은 동학과도 관련이 깊은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김개남 부대를 따라서 청주까지 진격하였다.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amp;ldquo;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amp;rdquo;고 말했다고 한다. 아울러 일본군에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의 산더미 같은 주검들을 보고서 몇날 며칠을 대성통곡하였다. &lt;u&gt;득도한 후에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amp;lsquo;상제&amp;rsquo;라고 칭하면서,&lt;/u&gt; 자신의 가르침이야말로 &amp;lsquo;참동학&amp;rsquo;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자신이 세상에 보낸 사자(使者)인데, 세상을 구원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직접 내려왔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증산의 가르침의 핵심은 &amp;lsquo;원한을 풀고 서로를 살린다&amp;rsquo;고 하는 &amp;lsquo;&lt;u&gt;해원상생(解冤相生)&lt;/u&gt;&amp;rsquo;으로 집약된다. 이 외에도 앞으로의 시대는 하늘이나 땅보다 사람이 존귀한 &amp;lsquo;인존(人尊) 시대&amp;rsquo;라고 하면서, 남녀의 권리를 동등하게 해야 한다는 &amp;lsquo;남녀동권(男女同權)&amp;rsquo;을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실천의 하나로 부인 고판례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1907년 고판례와 혼인하였는데, 혼례를 마친 뒤 증산은 &amp;ldquo;천지대업을 너에게 밝히리라&amp;rdquo;라고 하였다. 실제로 증산 사후 2년 뒤인 1911년, 고판례는 증산 성령이 접령하는 신비체험을 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고판례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고판례는 &amp;lsquo;선도교(仙道敎)&amp;rsquo; 또는 &amp;lsquo;태을교(太乙敎)&amp;rsquo;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했다. 여기에 이종 동생인 차경석의 도움으로 교단이 점점 확장되었는데, 1914년 무렵에는 차경석이 실질적인 교주로 등극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무렵부터 &lt;u&gt;여러 교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lt;/u&gt;났는데, 1914년에는 증산의 첫 제자인 김형렬이 이끄는 미륵불교가 등장하였고, 1921년에는 차경석이 자신을 &amp;lsquo;천자&amp;rsquo;로 자처하며 천제(天祭)를 행하였고, 이듬해에는 &amp;lsquo;보천교&amp;rsquo;로 개명하였다. 1923년에는 조철제가 이끄는 태극도가 등장하였고, 1927년에는 강순임의 선불교, 1928년에는 이상호의 동화교, 1970년대에는 박한경이 이끄는 &lt;u&gt;대순진리회&lt;/u&gt;, 안경전이 이끄는 &lt;u&gt;증산도&lt;/u&gt; 등으로 분화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중에서 차경석의 &lt;u&gt;보천교&lt;/u&gt;는 일제강점기에 천도교와 더불어 민족종교계를 양분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 보천교 연구자 안후상에 의하면, 일명 &amp;lsquo;워싱턴회의&amp;rsquo;(1921)를 앞두고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amp;lsquo;대(對)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amp;rsquo;에 보천교 대표 2명이 참가하였고, 1922년에는 김좌진에게 자금 지원을 한 정황이 있다. 1923년에는 보천교 간부 2명이 상하이에서 열린 &amp;lsquo;국민대표회의(독립운동단체회의)&amp;rsquo;에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김원봉의 권유로 &amp;lsquo;의열단&amp;rsquo;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에는 실력 양성 운동에 뛰어들어,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인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하였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교세가 커진 만큼 일제의 견제도 심하였다. 특히 1920년대 초에 경상북도 안동과 청송 등지에서 보천교의 조직이 빠르게 확장되자, 일제는 이들을 &amp;lsquo;종교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amp;rsquo;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보천교 간부 이정립은 이것을 &amp;lsquo;청송사건(靑松事件)&amp;rsquo;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기소된 보천교 관계자들은 222명에 달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견제와 함께 교단의 분열도 일어나서 결국 보천교는 1936년 차경석의 사망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안후상의 연구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추서된 보천교와 보천교계 신종교 관련 독립유공자는 150명에 이른다. 최근에는 보천교를 정읍의 정체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2023년에는 정읍에서 &amp;lsquo;보천교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동학농민운동의 변현(變現),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amp;rsquo;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원불교,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조화를 꾀하다&lt;/b&gt;&lt;/p&gt;
&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250&quot; data-origin-height=&quot;350&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Sprw6/dJMcaarDup2/x4ffAsY8gxHZuHvAogBBK1/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Sprw6/dJMcaarDup2/x4ffAsY8gxHZuHvAogBBK1/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Sprw6/dJMcaarDup2/x4ffAsY8gxHZuHvAogBBK1/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Sprw6%2FdJMcaarDup2%2Fx4ffAsY8gxHZuHvAogBBK1%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50&quot; data-origin-width=&quot;250&quot; data-origin-height=&quot;350&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원불교는 1916년에 전남 영광에서 소태산 박중빈이 시작한 &amp;lsquo;저축조합&amp;rsquo; 운동에서 기원한다. 이후 1924년에 전북 익산으로 옮겨와서 &amp;lsquo;불법연구회&amp;rsquo;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 오늘날의 &amp;lsquo;원불교&amp;rsquo;(1948)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lt;u&gt;원불교의 슬로건(개교 표어)은 &amp;ldquo;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amp;rdquo;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원불교가 천도교나 증산계 신종교와 마찬가지로 최제우의 &amp;lsquo;개벽사상&amp;rsquo;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관련해서 원불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16a085;&quot;&gt;김기천이 여쭙기를 &amp;ldquo;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최제우)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강일순) 선생의 행적은 그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박중빈)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amp;rdquo;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amp;ldquo;그럴듯하니라.&amp;rdquo;&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이 대화는 당시의 원불교 내부에서 동학&amp;middot;천도교－증산교－원불교를 하나의 &amp;lsquo;개벽파&amp;rsquo;로 보는 인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들은 서양과 근대에 대한 대응에서 &amp;lsquo;개화파&amp;rsquo;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유학과는 다른 질서를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개화파와 입장이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불도 삼교의 수양론을 적극 수용하였고, 그동안 불교나 유교에 가려졌던 &amp;lsquo;하늘님&amp;rsquo;이나 &amp;lsquo;단군&amp;rsquo;과 같은 토착 전통을 발굴하였다. 또한 서구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일방적인 수용이나 찬양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위험성을 경계하자는 입장이었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amp;lsquo;주체성&amp;rsquo;을 강조하였다. 그것의 힘이 강력한 만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도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lt;u&gt;원불교가 다른 민족종교에 비해 수양을 강조하는 이유&lt;/u&gt;도 여기에 있다. 원불교는 유불선 삼교의 수양론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체계적인 수양법을 갖고 있다. &amp;lsquo;물질 개벽&amp;rsquo; 시대에는 정신의 힘을 기르는 &amp;lsquo;정신 개벽&amp;rsquo;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는 이것을 도학과 과학의 병행이라고 말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지막으로 원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amp;lsquo;&lt;u&gt;천지의 은혜&amp;rsquo;&lt;/u&gt;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천지가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lt;u&gt;보은(報恩)의 삶&lt;/u&gt;을 살 것을 권하는데, 그런 점에서 원불교는 가장 생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본질이 아닌 &amp;lsquo;조건&amp;rsquo;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그런 점에서는 최시형의 &amp;lsquo;천지부모설&amp;rsquo;과 상통한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맺으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금까지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대표적인 민족종교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들 민족종교는 당시의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두된 개념이 &amp;lsquo;개벽&amp;rsquo;인데(대종교의 경우에는 &amp;lsquo;중광&amp;rsquo;이나 &amp;lsquo;개천&amp;rsquo;), 개벽은 역성혁명(유학)이나 시민혁명(유럽)과는 달리 정신적 수양과 영성의 수련을 강조하였다. 대종교와 같이 무장투쟁을 전개한 그룹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그것을 상징하는 개념이 &amp;lsquo;도덕&amp;rsquo;이다. 민족종교에서 말하는 &amp;lsquo;도덕&amp;rsquo;은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物],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天]의 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동학은 만물까지도 공경하라는 경물 도덕을 설파하였고, 전봉준은 &amp;ldquo;적과 싸울 때는 가급적 살생하지 말라&amp;rdquo;는 규율을 내렸다. 천도교에서는 기독교와 연합하여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원불교에서는 정신과 마음의 수양을 쌓아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도덕 문명을 건설할 것을 제언하였다. 또한 이승여(1874~1934)가 창시한 금강대도에서는 도덕으로 세상을 개화한다는 의미에서 &amp;lsquo;도덕 개화&amp;rsquo; 사상을 설파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외에도 &lt;u&gt;제천의례는 민족종교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요소&lt;/u&gt;이다. 동학, 증산계 신종교, 대종교, 원불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구도 과정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고 하늘에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lt;u&gt;원래 중국에서는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제천이 국가 행사의 하나로 전래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중단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민족종교에 의해서 부활된 것이다. 이것은 권력에 의해 독점되었던 &amp;lsquo;하늘&amp;rsquo;을 민중들이 되찾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과정에서 한글의 &amp;lsquo;하늘&amp;rsquo;과 그것의 변형어인 &amp;lsquo;한&amp;rsquo; 개념이 대두되었다. 종래에는 한자어로 철학을 했는데, 민족종교에 들어와서는 한글을 사용해서 최고 존재를 가리키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amp;lsquo;한울&amp;rsquo;이나 &amp;lsquo;한얼&amp;rsquo;과 같은 새로운 개념도 탄생하였다. 이 외에도 &lt;u&gt;최고 존재를 지칭하는 공통 개념으로 &amp;lsquo;님&amp;rsquo;이 사용되기 시작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lt;/u&gt; 조운의 〈님에 대하여〉(1925)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은 &amp;lsquo;&lt;u&gt;님&amp;rsquo; 개념에 새로운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lt;/u&gt;한 작품이다. 이 경우에 &amp;lsquo;님&amp;rsquo;은 서양어의 &amp;lsquo;God&amp;rsquo;에 해당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같이 신이 아닌 존재에게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lt;u&gt;다르다&lt;/u&gt;. 그런 점에서는 &amp;lsquo;님&amp;rsquo;은 존재론적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상대방을 대하는 종교적, 윤리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는 서양의 &amp;lsquo;신학(Theology)&amp;rsquo;과 대비되는 한국의 &amp;lsquo;님학(Nimology)&amp;rsquo;이 태동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250&quot; data-origin-height=&quot;295&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AlkER/dJMcadaKaGh/gMRodOvuwPySuMDbhp0kS1/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AlkER/dJMcadaKaGh/gMRodOvuwPySuMDbhp0kS1/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AlkER/dJMcadaKaGh/gMRodOvuwPySuMDbhp0kS1/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AlkER%2FdJMcadaKaGh%2FgMRodOvuwPySuMDbhp0kS1%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295&quot; data-origin-width=&quot;250&quot; data-origin-height=&quot;295&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조성환 hansowon70@nate.com&lt;/b&gt;&lt;br /&gt;&lt;span style=&quot;color: #16a085;&quot;&gt;서강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원광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기후인문학연구소 소장, 《사상계》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근대의 탄생》 《K－사상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인류세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다.&amp;nbsp;&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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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 May 2026 22:48:2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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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 가전제품 버리는 방법</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8</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a href=&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출처&amp;nbsp; 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67184704803&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2026 가전제품 버리는 방법&quot; data-og-description=&quot;모르면 과태료 나옵니다 2026년 1월 1일부터 모든 가전제품은 절대 일반 쓰레기로 버리면 안 됩니다. 환경...&quot; data-og-host=&quot;blog.naver.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 data-og-url=&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bFixeE/hyZQuHt7Jw/G2P82GxyEEmMng185FdMuk/img.jpg?width=743&amp;amp;height=655&amp;amp;face=0_0_743_655&quot;&gt;&lt;a href=&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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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2026 가전제품 버리는 방법&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모르면 과태료 나옵니다 2026년 1월 1일부터 모든 가전제품은 절대 일반 쓰레기로 버리면 안 됩니다. 환경...&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blog.naver.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 id=&quot;SE-55a202e4-06bb-4f6c-a43f-ec1171db9101&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left;&quot;&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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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color: #0000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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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id=&quot;SE-2b766fef-9f5a-45e4-8027-1d836400e954&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2026 가전제품 버리는 방법&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90&quot; data-origin-height=&quot;90&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LSke5/dJMcajt3BWQ/PsrulNUNJETvOcwqKDUK7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LSke5/dJMcajt3BWQ/PsrulNUNJETvOcwqKDUK7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LSke5/dJMcajt3BWQ/PsrulNUNJETvOcwqKDUK7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LSke5%2FdJMcajt3BWQ%2FPsrulNUNJETvOcwqKDUK7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90&quot; height=&quot;90&quot; data-origin-width=&quot;90&quot; data-origin-height=&quot;90&quot;/&gt;&lt;/span&gt;&lt;/figure&gt;
&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amp;nbsp;&lt;/span&gt;&lt;span&gt;&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dyfltkek&quot;&gt;그섬에가고싶다&lt;/a&gt;&lt;/span&gt;&lt;span&gt;&amp;nbsp;&lt;/span&gt;&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quot;&gt;2025. 12. 12. 7:10&lt;/span&gt;&lt;/div&gt;
&lt;div&gt;&lt;a id=&quot;copyBtn_224095382167&quot;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yfltkek&amp;amp;logNo=224095382167&amp;amp;redirect=Dlog&amp;amp;widgetTypeCall=true&amp;amp;topReferer=https%3A%2F%2Fsearch.naver.com%2F&amp;amp;trackingCode=nx&amp;amp;directAccess=false#&quot;&gt;URL 복사&lt;/a&gt;&lt;span&gt;&amp;nbsp;&lt;/span&gt;&lt;a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center;&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yfltkek&amp;amp;logNo=224095382167&amp;amp;redirect=Dlog&amp;amp;widgetTypeCall=true&amp;amp;topReferer=https%3A%2F%2Fsearch.naver.com%2F&amp;amp;trackingCode=nx&amp;amp;directAccess=false#&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이웃추가&lt;/a&gt;&lt;span&gt;&amp;nbsp;&lt;/span&gt;
&lt;div&gt;&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yfltkek&amp;amp;logNo=224095382167&amp;amp;redirect=Dlog&amp;amp;widgetTypeCall=true&amp;amp;topReferer=https%3A%2F%2Fsearch.naver.com%2F&amp;amp;trackingCode=nx&amp;amp;directAccess=false#&quot;&gt;&lt;span&gt;본문 기타 기능&lt;/span&gt;&lt;/a&gt;&lt;/div&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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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left;&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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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id=&quot;SE-ea60f489-3e92-433d-a527-5fa93796296d&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모르면 과태료 나옵니다&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512c3345-5756-4909-b079-0b5847306ea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2026년 1월 1일부터 &lt;/span&gt;&lt;span&gt;&lt;b&gt;모든 가전제품&lt;/b&gt;&lt;/span&gt;&lt;span&gt;은 절대 일반 쓰레기로 버리면 안 됩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38600d2b-4d14-4a77-9454-5bae06b1347c&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환경부가 &amp;lsquo;생산자 책임 재활용제(EPR)&amp;rsquo;를 전면 확대하면서, 이제 대형 가전뿐 아니라 소형 가전까지 전부 &amp;lsquo;분리배출 대상&amp;rsquo;이 되기 때문이에요.&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1e5eff8a-d7a8-43c6-bbe5-ce331ce7f5f7&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d96acb2b-eafd-4528-b754-ef3e50b2756e&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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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580&quot; data-origin-height=&quot;511&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b4Nbdo/dJMcah38aCW/VWXOSJfgvZLujljaIMtdb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b4Nbdo/dJMcah38aCW/VWXOSJfgvZLujljaIMtdb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4Nbdo/dJMcah38aCW/VWXOSJfgvZLujljaIMtdb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4Nbdo%2FdJMcah38aCW%2FVWXOSJfgvZLujljaIMtdb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580&quot; height=&quot;511&quot; data-origin-width=&quot;580&quot; data-origin-height=&quot;511&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55207162-5561-40b2-a64e-5df63b9a37d7&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quot;&gt;소형가전 버릴때&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17236a65-7117-4233-a865-9e8a79a7aec9&quot;&gt;
&lt;div&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9da4ff26-6205-4bff-b6b0-3a213b368561&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f1e2e5b7-1556-43fe-a87c-e10b20aaa21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c716ef56-5a31-4d11-955c-59257b9b021b&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1. 왜 갑자기 소형 가전까지 규제가 생기나?&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733b1c60-d70a-456f-9577-9c26c0a38d5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과거엔 냉장고&amp;middot;세탁기&amp;middot;TV 등 &lt;/span&gt;&lt;span&gt;&lt;b&gt;대형 가전만 재활용 의무 대상&lt;/b&gt;&lt;/span&gt;&lt;span&gt;이었지만&lt;/span&gt;&lt;/p&gt;
&lt;p id=&quot;SE-a537b33f-b5f8-430e-a227-a0d9a119f29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이어폰&amp;middot;스마트워치&amp;middot;전동칫솔 같은 소형 가전은 대부분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려졌습니다.&lt;/b&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154915f5-8d39-4de5-8e86-4cd7a9d2f5b8&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문제는 여기 들어 있는 &lt;/span&gt;&lt;span&gt;&lt;b&gt;리튬이온 배터리&lt;/b&gt;&lt;/span&gt;&lt;span&gt; 때문입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c4d557fa-f542-40c5-a9ba-0667e537e3d1&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 발생한 문제들&lt;/b&gt;&lt;/span&gt;&lt;/p&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매립 시 &lt;/span&gt;&lt;span&gt;&lt;b&gt;폭발&amp;middot;화재 위험&lt;/b&gt;&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납&amp;middot;카드뮴&amp;middot;수은 같은 &lt;/span&gt;&lt;span&gt;&lt;b&gt;유해물질 누출&lt;/b&gt;&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니켈&amp;middot;코발트 같은 &lt;/span&gt;&lt;span&gt;&lt;b&gt;희귀 금속이 그대로 폐기&lt;/b&gt;&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토양&amp;middot;지하수 오염&lt;/span&gt;&lt;/li&gt;
&lt;/ul&gt;
&lt;p id=&quot;SE-d91f84fd-9336-499b-ae03-4fce2914674c&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이걸 막으려고 2026년부터 &lt;/span&gt;&lt;span&gt;&lt;b&gt;소형 가전 전체가 재활용 의무 체계&lt;/b&gt;&lt;/span&gt;&lt;span&gt;에 들어갑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d198a333-7181-4b92-ad5c-92204c658622&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62467016-abee-4c46-bb23-812432bc57a5&quot;&gt;
&lt;div&gt;
&lt;div&gt;
&lt;div&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406&quot; data-origin-height=&quot;534&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SlhYv/dJMcaajDPBp/tH689UkGdPQOcSbbQC4Am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SlhYv/dJMcaajDPBp/tH689UkGdPQOcSbbQC4Am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SlhYv/dJMcaajDPBp/tH689UkGdPQOcSbbQC4Am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SlhYv%2FdJMcaajDPBp%2FtH689UkGdPQOcSbbQC4Am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6&quot; height=&quot;534&quot; data-origin-width=&quot;406&quot; data-origin-height=&quot;534&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17d029a1-abcb-457b-9f24-9462719b099e&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quot;&gt;손선풍기&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26280472-779d-40a9-90ec-b5d284c5e14a&quot;&gt;
&lt;div&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5c2e6d53-4507-439f-97cb-8f69f708e88f&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e259f35b-0a88-44bb-8745-33c9cf69e27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2. 2026년부터 적용되는 규정 (핵심)&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157a3a8f-9c9a-4292-b9e3-246f95201db1&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 모든 가전제품 = 분리배출 의무&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783462ec-0dbc-418a-94eb-d98add2cf22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대형 + 소형 전부 포함됩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f7cbadf-1413-4b01-86b1-b2218069e3d2&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포함되는 소형 가전 예시&lt;/b&gt;&lt;/span&gt;&lt;/p&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무선 이어폰&amp;middot;헤드셋 (에어팟 등)&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스마트워치&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전동칫솔&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전자담배 기기&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손선풍기&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블루투스 스피커&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소형 건조기&amp;middot;미니 청소기&lt;/span&gt;&lt;/li&gt;
&lt;li style=&quot;list-style-type: inherit;&quot;&gt;&lt;span&gt;각종 배터리 내장 전자기기&lt;/span&gt;&lt;/li&gt;
&lt;/ul&gt;
&lt;p id=&quot;SE-c4fcb91f-c95c-4790-b743-82d4df0b19f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이제 &lt;/span&gt;&lt;span&gt;&lt;b&gt;&amp;ldquo;작으니까 그냥 일반 쓰레기!&amp;rdquo;&lt;/b&gt;&lt;/span&gt;&lt;span&gt; 절대 안 됩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1f21b2be-ec37-41d6-9e49-bb780d5dbd28&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e41bf12f-7976-47db-8b15-ebfbfe333aa2&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24144473-730a-480c-accb-02b7f1f42908&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 3.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리면?&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2511631a-2841-4fcb-b15c-ea13ba97d8ab&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공식 세부 과태료 규정은 최종 고시 중이지만,&lt;/span&gt;&lt;/p&gt;
&lt;p id=&quot;SE-a7978988-7b6a-420c-9621-04aacac3ffa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환경부와 지자체들에서 안내한 내용에 따르면 아래와 같습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9c8d3e9c-5690-4674-b05a-6bb734c15431&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 일반 쓰레기봉투 투입 / 재활용함에 섞이면 &amp;rarr; 과태료 최대 10만 원&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95264319-a5e0-48a8-829c-63171bb736d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지자체별로 5~10만 원 수준 논의 중)&lt;/span&gt;&lt;/p&gt;
&lt;p id=&quot;SE-5f23acad-9f28-4179-a34f-4dfaed3134fd&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시행 초기라 단속이 강해질 수 있으니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e22656d4-6fe8-4105-af97-4c6c66ceb680&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c45e9f76-4862-436f-adcd-ce5ad0460b72&quot;&gt;
&lt;div&gt;
&lt;div&gt;
&lt;div&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580&quot; data-origin-height=&quot;408&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b2opMG/dJMcafrIxhk/sHTc42zBHlkQl6flkkSFl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b2opMG/dJMcafrIxhk/sHTc42zBHlkQl6flkkSFl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2opMG/dJMcafrIxhk/sHTc42zBHlkQl6flkkSFl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2opMG%2FdJMcafrIxhk%2FsHTc42zBHlkQl6flkkSFl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580&quot; height=&quot;408&quot; data-origin-width=&quot;580&quot; data-origin-height=&quot;408&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9bc9736f-d26c-43eb-8eb8-ab8846ca20d7&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quot;&gt;폐수거함&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SE-e4055687-d2d9-4705-a9a7-3f7e49b36a03&quot;&gt;
&lt;div&gt;
&lt;div&gt;
&lt;div&gt;
&lt;p id=&quot;SE-37a1b26d-3c6a-48f4-832b-9afac19099b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6a0c5716-c133-4037-862b-33d2d686bdc9&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4. 앞으로 이렇게 배출해야 합니다 (정리)&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bb0536e9-6823-4b32-9bea-33ddea76c853&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① 동 주민센터, 아파트, 편의점 등에 설치될&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9397e47c-8a1b-4fb9-9069-a4a05866503b&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소형 가전 전용 수거함에 배출&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7ec76407-e6f4-4534-8e1d-1ce80dc817b2&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② 또는 제조사 회수 프로그램 이용&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99903d2a-c50c-45fb-96f0-58521dcb6381&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삼성&amp;middot;LG 등은 이미 회수 서비스 운영 중)&lt;/span&gt;&lt;/p&gt;
&lt;p id=&quot;SE-45282371-db2c-48c3-90e7-39df34a33e6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③ 배터리 분리 가능한 제품은 &amp;lsquo;배터리 &amp;rarr; 폐건전지함&amp;rsquo;&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a0006153-5b44-472a-91c1-dd3d31fbb653&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제품 본체는 &amp;lsquo;소형 가전함&amp;rsquo;에 배출&lt;/span&gt;&lt;/p&gt;
&lt;p id=&quot;SE-3e3f2bda-fb13-46bb-8c66-f8d04e1fefe7&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④ 공동주택은 의무적으로 전자제품 분리수거함 확충 예정&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d99c5484-f8e4-440e-93c7-8a0cdceb819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지자체 예산 반영 중)&lt;/span&gt;&lt;/p&gt;
&lt;p id=&quot;SE-a2d725f4-ca48-41bf-9d56-a0c3c834763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1e72b8d5-5606-4bed-88d1-3c52ffb8b5e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id=&quot;SE-85f03cfd-644b-440c-bd95-3dd605897cce&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lt;b&gt;@ 시행까지 한 달 남았습니다&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455c2bd0-a8d5-46fc-b25c-2aac4fc568d9&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1월 1일부터 바로 전면 시행되기 때문에&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5eeba6c0-2979-4906-b9c2-47cc7b4131d8&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0010;&quot;&gt;&lt;b&gt;지금 사는 곳 주변에 소형 가전 수거함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lt;/b&gt;&lt;/span&gt;&lt;/p&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lt;b&gt;[출처]&lt;/b&gt; &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dyfltkek/224095382167&quot;&gt;2026 가전제품 버리는 방법&lt;/a&gt;&lt;span&gt;|&lt;/span&gt;&lt;b&gt;작성자&lt;/b&gt; &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s://blog.naver.com/dyfltkek&quot;&gt;그섬에가고싶다&lt;/a&gt;&lt;/b&gt;&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a href=&quot;https://www.15990903.or.kr/&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15990903.or.kr/&lt;/a&gt; &amp;nbsp;&lt;b&gt;&lt;br /&gt;&lt;b&gt;폐가전제품&lt;/b&gt; 무상방문수거서비스&lt;/b&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생활&amp;middot;건강</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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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1 Dec 2025 21:41: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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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FREE hasleo 시스템복제</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64504932434&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SSD 마이그레이션 무료 프로그램 hasleo 사용법 (D드라이브 윈도우 복사)&quot; data-og-description=&quot;안녕하세요. 개발자준생입니다. C드라이브 용량이 부족해서 SSD를 추가 설치한 경험 있으시죠? 이럴 때...&quot; data-og-host=&quot;blog.naver.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quot; data-og-url=&quo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sXtQ1/hyZNwS37aI/w5q5BRK3mKyezdbpRwfypk/img.png?width=743&amp;amp;height=743&amp;amp;face=0_0_743_743&quot;&gt;&lt;a href=&quo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blog.naver.com/cjs0308cjs/224050802022&quot;&gt;
&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https://scrap.kakaocdn.net/dn/sXtQ1/hyZNwS37aI/w5q5BRK3mKyezdbpRwfypk/img.png?width=743&amp;amp;height=743&amp;amp;face=0_0_743_743');&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SSD 마이그레이션 무료 프로그램 hasleo 사용법 (D드라이브 윈도우 복사)&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안녕하세요. 개발자준생입니다. C드라이브 용량이 부족해서 SSD를 추가 설치한 경험 있으시죠? 이럴 때...&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blog.naver.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다수의 무료 프로그램이 백업과 복구만 무료인데, hasleo 는 복제도 무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 id=&quot;postListBody&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left;&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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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PC&amp;middot;스마트폰</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2002daebak.tistory.com/747</guid>
      <comments>https://2002daebak.tistory.com/747#entry747comment</comments>
      <pubDate>Sun, 30 Nov 2025 21:22: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불교와 과학-불교평론 2024 가을호 6편의 글</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31718194859&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불교와 과학,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장회익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들어가는 말《네 발 위의 부처님(Der Buddha auf vier Pfoten)》(Dirk Grosser 지음)이란 책이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는 제호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다. 이 책은 한 젊은 &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AVILo/hyXzWx3Gjt/Yu8msKTxGopLa0m1z9C7F1/img.png?width=600&amp;amp;height=356&amp;amp;face=0_0_600_356,https://scrap.kakaocdn.net/dn/N7Ws1/hyXzSoLQ5M/mFo0h7VnWjNmBF8nDFKg9K/img.png?width=600&amp;amp;height=356&amp;amp;face=0_0_600_356&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4&quot;&gt;
&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https://scrap.kakaocdn.net/dn/AVILo/hyXzWx3Gjt/Yu8msKTxGopLa0m1z9C7F1/img.png?width=600&amp;amp;height=356&amp;amp;face=0_0_600_356,https://scrap.kakaocdn.net/dn/N7Ws1/hyXzSoLQ5M/mFo0h7VnWjNmBF8nDFKg9K/img.png?width=600&amp;amp;height=356&amp;amp;face=0_0_600_356');&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와 과학,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장회익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들어가는 말《네 발 위의 부처님(Der Buddha auf vier Pfoten)》(Dirk Grosser 지음)이란 책이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는 제호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다. 이 책은 한 젊은&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7&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7&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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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진화생물학과 불교 / 전중환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머리말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amp;lsquo;과학은 유교가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유교의 경전인 《주역(周易)》에는 만물의 근원이 음과 양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분자생물학자들은 DNA&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출처&amp;nbsp;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70&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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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https://scrap.kakaocdn.net/dn/cb63Fo/hyXzUAfl06/ZLXk3vvI9BdVRIO0LvK1s0/img.png?width=600&amp;amp;height=396&amp;amp;face=0_0_600_396,https://scrap.kakaocdn.net/dn/bfBOtv/hyXwrT0twD/WtckFojN7Prc9OBRbs1Sik/img.png?width=600&amp;amp;height=396&amp;amp;face=0_0_600_396');&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과학과 불교 : 본다(見)는 것을 중심으로 / 신승철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인간 뇌에 대한 개략적 이해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복잡한 구조가 인간의 뇌라고 한다. 잘 알려졌듯 뇌는 수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들이 유전형에 따라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뇌 전체는 860&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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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6&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6&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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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역학과 불교 :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과 무아의 연기(緣起) / 양형진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개요양자역학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양자컴퓨터와 양자정보이론을 포함하여 현대물리학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된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갖는데, 그 대부분은 측정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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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들어가며불교와 화학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현대 화학을 불교를 통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주의해야 함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화학&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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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와 천문학 / 강승환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사겁(四劫)《화엄경》의 4겁《화엄경》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나고 죽음을 반복하듯이 우주도 성주괴공으로 나고 죽음을 반복한다는 것이&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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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아래는 각각의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lt;/u&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불교와 과학,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장회익&lt;/h3&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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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장회익&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0:50&lt;/li&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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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6&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K0QUt/btsKMapNyyo/5TI89kaXKbLMkYPCzk5YK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K0QUt/btsKMapNyyo/5TI89kaXKbLMkYPCzk5YK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K0QUt/btsKMapNyyo/5TI89kaXKbLMkYPCzk5YK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K0QUt%2FbtsKMapNyyo%2F5TI89kaXKbLMkYPCzk5YK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56&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6&quot;/&gt;&lt;/span&gt;&lt;/figure&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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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들어가는 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네 발 위의 부처님(Der Buddha auf vier Pfoten)》(Dirk Grosser 지음)이란 책이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는 제호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다. 이 책은 한 젊은 철학도가 떠돌이 개를 입양해 14년을 함께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담고 있다.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저자의 눈에는 &amp;lsquo;보바&amp;rsquo;라고 이름을 붙인 이 개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불교의 참뜻을 깨달은 성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amp;ldquo;네 발 위의 부처님&amp;rdquo;이라는 다소 불경스러운(?) 제목으로 그들이 함께해 온 생활을 차분히 서술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강아지도 이렇게 불심(佛心)을 보이고 있는데, 사람은 어째서 이 경지에 도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 해답으로 강아지에게는 제거해야 할 번뇌가 없지만 사람에게는 번뇌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맞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강아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서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는 강아지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인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면 &amp;lsquo;제거해야 할 번뇌&amp;rsquo;가 되겠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amp;lsquo;주체적 삶의 소지&amp;rsquo;라 할 수 있다. 단지 많은 사람이 이 주체적 삶의 소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lt;u&gt;그날그날의&lt;b&gt; 관성적 삶&lt;/b&gt;&lt;/u&gt;에 이끌려 살아가다가 소중한 생애를 마감하고 있을 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그렇다면 &lt;b&gt;주체적 삶&lt;/b&gt;에 대한 자각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한마디로 &amp;lsquo;나는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amp;rsquo;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lt;/u&gt;. 근원적으로 보자면 불교의 가르침이나 자연과학의 탐구 내용도 결국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강조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 물음은 &amp;lsquo;나는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떠한 존재인가?&amp;rsquo; 하는 앞부분과 &amp;lsquo;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amp;rsquo; 하는 뒷부분으로 구성되는데, &lt;u&gt;자연과학이 앞부분의 물음에 강조점을 둔다면 불교는 뒷부분에 강조점을 둔다&lt;/u&gt;. 그러나 본래 물음에서 이 두 부분이 &amp;lsquo;그렇기에&amp;rsquo;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었듯이, 이 두 부분이 각기 독자적으로만 추구된다면 삶에 대한 진정한 주체적 자세라 할 수 없다. 이상적으로는 이 두 부분이 정합적으로 연결되어 누구에게나 공감이 되고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해답이 주어져야겠지만 현실은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바탕에 깔고, 불교와 과학에서 각각 추구하는 깨달음의 방식과 내용에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가 있는지를 불교의 몇몇 중심 사상을 기준으로 살펴 나가기로 한다. 특히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와 무아(無我)의 개념은 삶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심층적 이해로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중도와 무아의 개념이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lt;u&gt;현대 과학에도 이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있는지&lt;/u&gt;,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 개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 초기 경전에 중(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깟짜야나여, &amp;lsquo;모든 것이 있다&amp;rsquo;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amp;lsquo;모든 것이 없다&amp;rsquo;라고 하는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 두 극단으로 가지 않고 여래는 중(中)에 의해 법을 설한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amp;hellip; 생(生)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老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남김 없는 소멸로부터 행(行)의 소멸이, &amp;hellip; 생(生)의 소멸로부터 노사(老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amp;lsquo;모든 것이 있다&amp;rsquo;라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리키며, 반면 &amp;lsquo;모든 것이 없다&amp;rsquo;라는 것은 이것이 실은 모두 허상이어서 아무것도 있지 않다는 견해를 말하는데, 이 두 견해는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므로 이러한 극단에서 벗어날 지혜가 바로 &amp;lsquo;중(中)&amp;rsquo;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저 가운데 자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너머에 있는 더 큰 이치를 깨우치라는 이야기이다. 위의 사례는 특히 12연기라는 모습으로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치를 일깨우는 가운데 언급된 것인데, &amp;lsquo;있다&amp;rsquo;는 것에만 매여서는 &amp;lsquo;소멸&amp;rsquo;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amp;lsquo;없다&amp;rsquo;는 것에만 매여서는 &amp;lsquo;발생&amp;rsquo;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amp;lsquo;무명(無明)&amp;rsquo;을 통해 괴로움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서 괴로움이 소멸된다고 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남 곧 깨우침에 이르는 것이 최상의 지혜임을 말하는데, 중(中)에 의한다는 것이 곧 깨달은 눈으로 본다는 것임을 암시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초기 경전에는 중도(中道)를 언급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비구들이여, 수행자는 이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저급하고 천하고 속되고 고귀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적 삶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고귀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으로 가지 않고 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중도(中道)는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것이며, 적정과 뛰어난 지혜와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그렇다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바르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것이며, 적정과 뛰어난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사례에서 보다시피 초기 경전에서 &amp;lsquo;중(中)에 의한다&amp;rsquo;는 말과 중도라는 말은 치우침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으로 거의 동의어로 쓰이면서도, 중도의 경우에는 특히 수행의 방식과 그 지침에 관련된 내용 즉 중을 통해 깨달은 자가 가지게 될 지혜의 내용과 바른 삶의 자세가 강조되고 있다. 한편 중도의 개념은 초기불교에서 대승 경전과 중관학파를 거쳐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에 이르면서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진다. 여기서는 특히 삼론종의 《대승현론(大乘玄論)》에 나오는 사중이제(四重二諦)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 개념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대승현론》에는 앎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세상에서 통용되는 앎을 세제(世諦)라 하고 이를 넘어서는 한층 심층적인 앎을 진제(眞諦)라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하여 이제(二諦)라 부르는데, 이러한 이제가 네 개의 층위에 걸쳐 형성된다고 하는 이른바 사중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저쪽은 단지, 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유(有)와 공(空)을 모두 세제(世諦)로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라야 비로소 진제(眞諦)라 부르게 됨을 밝힌다. 셋째 단계에서는, 공(空)과 유(有)를 이(二)라 하고 비공유(非空有)를 불이(不二)라 칭할 때, 이(二)와 불이(不二)는 모두 세제(世諦)이고, 비이비불이(非二非不二)를 진제(眞諦)라 부르게 된다. 넷째 단계에서는, 이 세 가지 이제(二諦)가 모두 가르침(敎門)에 속하는 것이어서 이 셋이 불삼(不三: 진제가 아닌 셋)임을 깨달아 알게 된다. 더 이상 기댈 것과 얻을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 이치(理)라고 불리게 된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대승현론》에는 이러한 이제를 각각 설정해 내는 지혜를 이제각론중도(二諦各論中道)로, 그리고 이러한 이제를 현명하게 결합해내는 지혜를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로 부른다. 이렇게 규정된 이제합명중도는 앞에서 설정된 사중이제 구조와 대략 다음과 같은 연결을 가진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선 사중이제에서는 유(有)와 공(空) 개념을 대응시켜 이제를 말하고 있음에 비해,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생(生)과 비생(非生)을 대응시켜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중이제에서는 &amp;ldquo;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amp;rdquo;고 하는 내용에 대해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이를 이미 중도의 하나로 보면서 비생비불생(非生非不生)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중이제에서 말하는 세제가 유(有)만을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를 가유(假有)로 보아 공(空)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면 이는 이미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진제 또한 공만을 내세우지 않고 최소한 가유로서의 유를 인정한다면 이 또한 일정한 중도의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 이들이 각각 이제각론중도(二諦各論中道)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이제는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바탕은 여전히 세제와 진제에 두고 있어서 엄정한 의미의 중도에는 아직 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둘을 함께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중도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이제합명중도라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제는 &amp;lsquo;진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세제&amp;rsquo;여서 진정한 세제일 수 없고, 진제 또한 &amp;lsquo;세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진제&amp;rsquo;여서 진정한 진제일 수 없으니, 이 둘을 완전한 하나로 엮는 중도 그것이 바로 이제합명중도라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앞에 소개된 사중이제 구조는 네 단계에 걸쳐 점점 심화되는 이제합명중도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하필 네 단계냐 하는 점이다. &lt;u&gt;사실 이러한 진행은 굳이 네 단계에 그쳐야 할 이유가 없다.&lt;/u&gt; 실제로 선종에서는 이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흔히 사구백비(四句百非)라 하는데, 백 번을 부정해도 역시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중이제론에서는 같은 논리를 무한히 되풀이한다는 것을 피해, 넷째 단계에서 나머지 모두를 아우르는 최종적 진리의 가능성 곧 &amp;ldquo;더 이상 기댈 것과 얻을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 이치[理]&amp;rdquo;라는 언설로 대변되는 목표치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처럼 《대승현론》에 제시된 사중이제 구조를 이제합명중도와 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이 형성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1 단계: 유(有)1: 세제(世諦), 공(空)1: 진제(眞諦)&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2 단계: 유2(새로운 유와 공1 포함): 세제, 공2(새로운 공): 진제&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비공2 비유2(非空2 非有2): 이제합명중도&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3 단계: 유3(새로운 유와 공2 포함): 세제, 공3(새로운 공): 진제&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비공3 비유3(非空3 非有3): 이제합명중도&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4 단계: 이들은 모두 상대적 진리이다. 참 이치는 오직 가능성으로만 남는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현대 과학에 나타난 중도 개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살펴본 중도의 논리는 특정 대상에 대한 어떤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적용 범위에 어떤 제한을 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패턴이 현대 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중이제의 논리가 물리학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특징짓는 시간과 공간 개념의 발전단계에도 관련됨을 볼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인들은 거의 누구나 공간이 3차원 구조를 가졌음을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고전 역학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수평 방향의 평면과 수직 방향의 높이를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지평면을 구성하는 수평 방향의 평면 위에도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지만, 이는 지형지물과 천체운동 등 우연적인 여건에 기인하는 것일 뿐 원천적으로는 평면상의 모든 방향은 서로 대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위 쪽 방향은 물체를 낙하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수평 방향과는 원천적으로 구분되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보기 쉽다. 이를 현대의 차원 개념에 맞추어 말한다면 수평 방향의 평면은 2차원 공간을 형성하며, 수직 방향은 이와 독립된 별도의 1차원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일상적 경험에서 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 개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실 이러한 일상적 공간 개념과 좀 더 세련된 3차원 공간 개념은 자연의 &amp;lsquo;실재&amp;rsquo;를 반영하기보다는 우리가 자연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진 바탕 관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어느 관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묻게 되는 물음의 성격이 달라진다. 우리가 일상적 공간 관념을 취할 경우,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이때 만일 우리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amp;ldquo;이것이 왜 안 떨어지느냐?&amp;rdquo; 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실제로 중세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해 왔다. 반면 우리가 일단 3차원 공간 개념을 수용하게 되면,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된다. 수평 방향과 수직 방향은 원천적으로 대등한 것인데, 왜 유독 수직 방향에는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다. 이것이 바로 &amp;lsquo;사과는 왜 떨어지는가?&amp;rsquo;라는 유명한 뉴턴의 물음이다. 그리고 뉴턴이 이 물음에 대해 흡족한 해답을 제시했기에 오늘 우리는 3차원 공간 개념을 어렵지 않게 수용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이 상황을 《대승현론》에 나타난 중도의 개념과 연결해 해석해 보자. 실제로 우리가 지닌 일상적 공간 개념을 세제(世諦)라 하고 좀 더 세련된 3차원 공간 개념을 진제(眞諦)라 할 때, 이것이 사중이제의 제1단계 즉 &amp;ldquo;유(有)를 세제로 하고, 공(空)을 진제로 삼는다.&amp;rdquo;는 언명에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amp;lsquo;유&amp;rsquo;는 수직 방향의 공간이 &amp;ldquo;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有]&amp;rdquo;는 주장에 해당한다면, &amp;lsquo;공&amp;rsquo;은 &amp;ldquo;그러한 성질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非有], 혹은 그러한 성질의 자리는 비어 있다[空]&amp;rdquo;는 주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러한 성질은 다른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겉보기 현상[假有]에 해당하므로 이를 세제중도(世諦中道)라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성질이 본질적으로는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나타나므로 이를 단순한 비유(非有)가 아니라 숨겨진 비유[假非有]로 보아 이것을 진제중도(眞諦中道)라 할 수도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세제와 진제가 모든 면에서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2차원+1차원 관점으로 해석하던 현상들을 3차원 관점으로 보게 된 것은 이해의 폭을 한 차원 넓힌 새로운 깨달음에 해당한다. 세제에 대비해 진제라는 용어를 쓴 것이 이 점을 말해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에 나타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 공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한 단계의 이제(二諦)에 그치지 않고, 그다음 단계 곧 &amp;ldquo;유와 공을 모두 세제로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라야 비로소 진제라 부르게 됨&amp;rdquo;을 밝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인데, 여기서는 3차원 공간 개념마저도 가유(假有) 곧 겉보기 관념의 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한 단계 뛰어넘는 4차원 시공간의 개념이 좀 더 적절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것이 곧 사중이제의 둘째 단계인데, 이를 유와 공의 관점에서 풀이해 보면, 앞 단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3차원 공간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을 가지고[有] 있었던 것임에 반해, 새 관점에서는 이것마저도 공간의 한 성분일 뿐 그 독자적 내용이 비었다[空]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유 안에는 이 시간의 개념과 함께, 앞 단계에서 진제라 생각했던 3차원 공간 개념이 포함되며, 새로운 공으로서 4차원 시공간이 새 진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대등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간의 한 축을 실수(實數)에 대응시킨다면 시간 축은 허수(虛數) 축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만큼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것은 다시 비공비유(非空非有)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두 관점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 이르게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셋째 단계의 사중이제 곧 양자역학을 통한 도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자역학 이전의 단계에서는 4차원 시공간 이외에 이와는 별개로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있는[有] 것으로 상정해 왔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이 독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이 지닌 또 다른 측면 즉 이것의 푸리에(Fourier) 변환 공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 또한 시공 개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사중이제의 셋째 단계에 맞추어 해석해 볼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즉 둘째 단계에서의 공(空)인 4차원 시공간과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새로운 유(有)로 떠올라 모두 세제를 구성하게 되고, 이들과 구분되는 4차원 겹－공간이 새로운 공이 되어 진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서 4차원 겹－공간이라는 것은 푸리에 변환으로 연결된 특별한 관계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기왕의 세제와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를 다시 이제합명중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8)&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은 현대 과학의 공간 개념이 여기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을 넘어 더 높은 단계의 진제, 그리고 더 높은 단계의 이제합명중도로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현대 과학에서는 한층 더 높은 단계도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가 공인되고 있지는 않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앞에서 말했듯이 사중이제론에서는 이 넷째 단계에서 또 하나의 상대적으로 진전된 합명중도를 제시하기보다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수용된 세 단계의 이제(二諦)가 모두 우리가 설정한 상대적 진리 즉 &amp;lsquo;가르침[敎門]&amp;rsquo;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아직 진정한 진리[理]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더 이상의 &amp;lsquo;유(有)&amp;rsquo;가 발생하지 않을 완결된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대 과학 또한 이러한 성취를 궁극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으나 어떤 완성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게 볼 때 현대 과학의 공간 개념 확장에 관한 이러한 도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중이제의 이제합명중도 구도 도식과 매우 잘 일치하는 것이며, 이는 불교적 직관과 현대 과학의 사고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개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번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경전에 나오는 개념들이 우리의 일상적 개념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특히 무아의 개념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그 한 예로 붓다가 초기에 무아를 설하여 다섯 비구를 해탈로 이끌었다는 《무아상경(無我相經)》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이다.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이 색이 자아라면 이 색은 고통으로 이끌어지지 않을 것이고, 색에 대해서 &amp;lsquo;나의 색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기를&amp;rsquo;이라고 하면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색은 무아이기 때문에 색은 고통으로 이끌어지고, 색에 대해서 &amp;lsquo;나의 색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기를&amp;rsquo;이라고 해도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 수(受)는 무아이다&amp;hellip; 상(想)은 무아이다&amp;hellip; 행(行)은 무아이다&amp;hellip; 식(識)은 무아이다&amp;helli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는 생멸 변화의 바탕을 이룬다는 오온(五蘊)의 다섯 요소 즉 색, 수, 상, 행, 식 하나하나를 거론하며 이들이 모두 무아임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색이 자아라면, 자기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고, 특히 고통으로 이끌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색이 무아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첫째 자아 즉 아(我)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며, 둘째 무아 즉 아가 없으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lt;u&gt;&lt;b&gt;이 말은 우리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난다&lt;/b&gt;&lt;/u&gt;. 우리는 아가 없으면 고통받을 리도 없을 것이며 설혹 아가 있더라도 자기의 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이 점을 해명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자아의 뜻을 어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lt;/u&gt; 자아를 뜻하는 attā(빨리어)와 ātman(산스끄리뜨어)은 모두 본질, 호흡, 영혼 등의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영원불변, 상주불멸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오온 안에 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 불변하고 영원한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를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amp;lsquo;나&amp;rsquo;라는 집착을 일으켜 탐욕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고통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논리에 따르면 오온이 무아(위에 말한 의미)이고 &amp;lsquo;나&amp;rsquo;가 오온이라면 그 &amp;lsquo;나&amp;rsquo;가 진정한 의미의 무아 곧 아(我)=무아(無我)라고 하는 이상한 등식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우선 &lt;u&gt;경전에서는 &amp;lsquo;나&amp;rsquo;와 오온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lt;/u&gt;. 《왓차곳따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왓차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는 색(色)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색(色)을 지닌 자로, 나에게 색(色)이, 색(色)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수(受)를 나로 간주하지 않고&amp;hellip; 상(想)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amp;hellip; 행(行)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amp;hellip; 식(識)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amp;hellip; 식(識)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이는 곧 오온과 &amp;lsquo;나&amp;rsquo;가 무관하다는 이야기이다&lt;/u&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경전에 언급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오온을 자아로 여기면서 이것이 영구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미망을 깨우쳐 주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렇다면 오온을 자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자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즉 오온과 무관하게 오직 주체로서의 자아만을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러한 자아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난다경》에는 이 점과 관련해 생각해 볼 만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한 곁에 앉아 있던 왓차곳따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ldquo;고따마 존자시여, 그런데 자아는 있습니까?&amp;rdquo; 이렇게 말하자 세존께서는 침묵하셨다. &amp;ldquo;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자아는 없습니까?&amp;rdquo; 두 번째에도 세존께서는 침묵하셨다. 그러자 왓차곳따 유행승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왓차곳따 유행승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ldquo;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왜 왓차곳따 유행승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amp;rdquo; &amp;helli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ldquo;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amp;lsquo;자아는 있습니까?&amp;rsquo;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amp;lsquo;자아는 있다.&amp;rsquo;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amp;lsquo;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amp;rsquo;라는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과 부합하는가?&amp;rdquo; &amp;ldquo;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amp;rdquo;&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ldquo;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amp;lsquo;자아는 있습니까?&amp;rsquo;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amp;lsquo;자아는 없다.&amp;rsquo;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미혹에 빠져 있는 왓차곳따 유행승은 &amp;lsquo;오, 참으로 이전에 있던 나의 자아가 지금은 없구나.&amp;rsquo;라고 하면서 다시 더 크게 미혹하게 되었을 것이다.&amp;rdquo;&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이야기에서는 물음의 성격상 &lt;u&gt;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amp;lsquo;그렇다&amp;rsquo; 또는 &amp;lsquo;아니다&amp;rsquo;라고 해야 할 것임에도, 붓다는 오히려 묻는 이의 정황을 고려하여 &amp;lsquo;그렇다&amp;rsquo;라고도 &amp;lsquo;아니다&amp;rsquo;라고도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lt;/u&gt; 즉 그 사람이 대답을 들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냐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가지 답변이 다 불완전한 것인데, 어느 한쪽의 대답을 한다면 듣는 자는 결국 그로 인한 편견에 빠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온이 무아라든가, 내가 오온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면서도 자아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중도의 길을 널리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무아 또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무아를 &amp;lsquo;실천적 무아&amp;rsquo;와 &amp;lsquo;형이상학적 무아&amp;rsquo;로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amp;lsquo;모든 법은 무아다[諸法無我]&amp;rsquo;라는 주장은 실천적 무아이며, 이것이 붓다의 주된 관심사이다. 반면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물음은 형이상학적 자아에 관한 물음이며 붓다에게 이는 사실상 부차적인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굳이 이것에 답해야 할 상황이라면 여타의 많은 물음에서나 마찬가지로 중도의 지혜로 대처함이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위에 인용된 《아난다 경》의 이야기는 붓다가 이러한 중도의 지혜를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온생명 관점에서 살펴본 무아(無我)의 의미&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보았듯이 불교 경전에는 아(我)와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이들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아, 무아 개념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대 과학 특히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는 &amp;lsquo;나[我]&amp;rsquo;의 개념 또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amp;lsquo;나&amp;rsquo;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온생명에서 보는 &amp;lsquo;나&amp;rsquo;의 개념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 혹은 무아의 개념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지는 않을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점은 학문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가 되겠지만 특히 실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과학이 담고 있는 개념들은 사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지만, 삶의 지향성 문제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논의가 삶의 주체인 &amp;lsquo;나&amp;rsquo;와 관련될 때는 곧바로 &amp;lsquo;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amp;rsquo;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amp;lsquo;나&amp;rsquo;라고 하는 문제는 생명의 이해라는 과학적 관심의 주제와 관련이 되면서도 또 삶의 지향이라고 하는 실천적 과제와 연관을 맺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여기서는 먼저 현대 과학 특히 온생명 이론에 나타나는 &amp;lsquo;나&amp;rsquo;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것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와 무아 개념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squo;나&amp;rsquo;라는 관념 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바로 &amp;lsquo;내 생명&amp;rsquo;이며 또 나에게 있어서 이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이 논의는 결국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는 흔히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살아 있는 존재가 지닌 &amp;lsquo;살아 있음&amp;rsquo;이란 성격을 추상화하여 이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 예컨대 다람쥐나 소나무는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 본다. 그런데 문제는 고립된 다람쥐나 소나무가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먹이 그리고 햇빛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생명은 이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모든 인과관계의 그물에 엮여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생명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어디까지 뻗는가를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게 해서 인과의 실타래가 더 이상 밖으로 뻗어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전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생명은 바로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지구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 생명은 바로 이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lt;u&gt;이처럼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하나의 기본 단위로 보아 필자는 이를 &amp;lsquo;온생명&amp;rsquo;이라 부르고 있다.1&lt;/u&gt;3) 이렇게 할 때, 다람쥐나 소나무와 같은 각개의 생명체들은 &amp;lsquo;온생명&amp;rsquo;과 구분해 &amp;lsquo;낱생명&amp;rsquo;이라 부르며, 이들은 모두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할 때에 한해 생명의 구실을 하게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은 이러한 온생명과 그것의 생리를 밝힘으로써 생명에 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안에는 여전히 과학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 즉 이 안에 &amp;lsquo;나&amp;rsquo;라고 하는 존재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물들이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온생명을 형성할 수 있음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아무리 심오한 물리학 법칙으로도 그 안에서 &amp;lsquo;주체로서의 나&amp;rsquo;가 발생하리라는 사실을 이끌어 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이를 설명할 가장 적절한 방식은 일원이측면론(一元二側面論)을 택하는 길이다. 즉 이를 기존의 객체적 현상들과 같은 반열에 놓인 또 하나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현상 그 자체의 이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amp;lsquo;숨겨진&amp;rsquo; 속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모든 객체적 현상의 모습을 이것이 지닌 외적 혹은 표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amp;lsquo;나&amp;rsquo;라는 존재는 현상의 내부에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게 되는 내적 혹은 이면적 속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둘은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지는 두 양상 곧 &amp;lsquo;&lt;u&gt;객체적 양상&amp;rsquo;과 &amp;lsquo;주체적 양상&lt;/u&gt;&amp;rsquo;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amp;lsquo;나&amp;rsquo;가 굳이 어떤 제한된 범위의 실체 곧 &amp;lsquo;내 몸&amp;rsquo;과 연계를 짓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 의식이 내 몸에 국한된 신경조직망을 통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고, 더 중요하게는 이것의 활동을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이 &amp;lsquo;내 몸&amp;rsquo;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경조직망은 외부의 정보도 입수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개별 신체를 넘어서기도 한다. 우리는 또 &amp;lsquo;나&amp;rsquo;와 다른 &amp;lsquo;너&amp;rsquo;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amp;lsquo;너&amp;rsquo;와 &amp;lsquo;나&amp;rsquo;를 다시 아울러 &amp;lsquo;우리&amp;rsquo;라는 &amp;lsquo;집합적 주체&amp;rsquo;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 곧 &amp;lsquo;나&amp;rsquo;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amp;lsquo;작은 나&amp;rsquo;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를 인식함에 따라 &amp;lsquo;더 큰 나&amp;rsquo;로 그리고 &amp;lsquo;더욱더 큰 나&amp;rsquo;로 내 주체성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도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의 집합적 주체 안에 담겨 있던 자아의 내용은 &amp;lsquo;인류&amp;rsquo; 곧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을 &amp;lsquo;자연&amp;rsquo;이라 부르며 이를 오히려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아, 자연을 극복 혹은 활용해 인간의 자리를 넓혀 가는 것을 발전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은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의 자아 또한 온생명에로까지 확장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이러한 상황을 &amp;lsquo;생명의 주체적 양상&amp;rsquo;이라고 할 &amp;lsquo;삶&amp;rsquo;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lt;u&gt;우리에게 만일 주체가 없다면, 현상으로서 생명의 일부는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amp;lsquo;삶&amp;rsquo;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lt;/u&gt;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는 &amp;lsquo;나&amp;rsquo; 속에 어떠한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어떠한 의미의 삶을 사느냐를 말할 수 있다. 낱생명으로의 &amp;lsquo;내 몸&amp;rsquo;을 &amp;lsquo;나&amp;rsquo;로 의식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며 불가피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머문다면 가장 작은 &amp;lsquo;삶&amp;rsquo; 곧 소인(小人)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amp;lsquo;인류&amp;rsquo;로서의 &amp;lsquo;나&amp;rsquo;까지 의식한다면 이는 전통적 윤리에 부합되는 &amp;lsquo;삶&amp;rsquo; 곧 군자(君子)의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 안에 온생명까지 담길 때에 비로소 대인(大人) 또는 성인(聖人)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요소를 주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배합을 얼마나 조화롭게 이루느냐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lt;u&gt;온생명 관점에서&lt;/u&gt; 보는 이러한 &amp;lsquo;나&amp;rsquo;와 불교 경전에 나오는 &amp;lsquo;나&amp;rsquo;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또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불교 경전에서는 앞에서 보았듯이 &amp;lsquo;무아&amp;rsquo;와 &amp;lsquo;자아&amp;rsquo;를 말하는 과정에서 &amp;lsquo;나&amp;rsquo;의 성격을 다분히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즉 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무아 사상이 가진 진정으로 중요한 면모가 바로 주체로서의 &amp;lsquo;나&amp;rsquo;를 부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amp;lsquo;나&amp;rsquo;의 한 중요한 요소를 부정하는 데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무아 사상이 부정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대상은 개체 생명으로서의 &amp;lsquo;나&amp;rsquo;, 좀 더 정확히는 개체 생명으로의 &amp;lsquo;나&amp;rsquo;를 전부로 여기는 그 생각 자체에 해당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생명은 오히려 온생명이며 낱생명은 그저 온생명을 바탕으로 하여 잠시 조건부적으로 머무는 것인데, 이를 생명의 전체로 보아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바른 삶을 살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수많은 고통과 재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도로서 깨우침을 얻어 이 작은 &amp;lsquo;나&amp;rsquo;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진정한 무아 사상의 본질이며, 이 점에서 경전의 가르침은 온생명을 진정한 생명 그리고 진정한 &amp;lsquo;나&amp;rsquo;로 생각하는 현대 과학의 관점과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온생명 관점에서는 온생명을 위주로 한 여러 단위에서의 &amp;lsquo;나&amp;rsquo; 즉 동심원적으로 조화된 &amp;lsquo;나&amp;rsquo;의 의미를 긍정하고 이 안에서 삶의 뜻을 찾아 나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는 데에 반해, 불교 경전에서는 이 작은 &amp;lsquo;나&amp;rsquo;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는 데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인 차이일 뿐 그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강조점을 온생명에 두고 이를 진정한 &amp;lsquo;나&amp;rsquo;라고 할 경우 자연히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이것이 초래하는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날 것이고, 반대로 강조점을 무아(無我)에 두어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하면 자연히 더 큰 의미의 삶 곧 온생명을 지향하는 삶으로 그 중심점을 옮겨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은 온생명에 대한 어떤 직관적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그 실천적 내용을 설파한 것이라 보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맺는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상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개념과 무아 개념이 현대 과학의 사상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lt;u&gt;주목할 점은 현대 과학 안에 이러한 개념들이 반영된 것이 불교 사상의 영향에서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독자적 발전을 통해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lt;/u&gt;. 이는 곧 중도의 방법 그리고 중도의 지혜라는 것이 종교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도 진리를 깨우쳐 가는 근원적 방식임을 각각 독자적으로 입증해 내었음을 의미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람들은 아직도 주체적 삶을 위한 근원적 물음의 중요한 실마리가 경전의 오래된 가르침과 현대 과학의 새로운 조명을 통해 밝혀지리라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깨우침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몇몇 선각자들이 아무리 외쳐본들 쇠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못한다. 결국은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러한 깨우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중도와 무아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방법론의 신빙성을 불교에서뿐 아니라 과학에서 함께 입증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이는 곧 주체적 삶에 이를 하나의 확실한 방편이 될 것이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장회익 zm530@hanmail.net&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0여 년간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 &amp;lsquo;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amp;rsquo;에서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한성학원 이사장, 경희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물질, 생명, 인간》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amp;nbsp;&lt;/p&gt;
&lt;/div&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진화생물학과 불교 / 전중환&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전중환&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0:56&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수정 2024.11.11 22:21&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 0&lt;/li&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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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머리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amp;lsquo;과학은 유교가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유교의 경전인 《주역(周易)》에는 만물의 근원이 음과 양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분자생물학자들은 DNA가 두 가닥의 사슬이 꼬여 있는 이중나선임을 밝혀냈거든요!&amp;rsquo;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응수한다. &amp;lsquo;과학은 기독교가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혼돈으로부터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고 나와 있는데요. 물리학자들은 우주 전체가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 법칙에 의해 작동함을 밝혀냈거든요!&amp;rsquo;&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에 호의적인 독자 여러분은 물론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수천 년 전에 성립된 기성 종교의 교리 가운데 일부가 현대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우연히 부합한다고 해서 그 종교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대다수 저명한 과학자가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자연법칙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는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없다.(몇몇 기독교 신자는 &amp;lsquo;아니, 어떻게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설계가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통해 드러남을 한사코 외면하는 거지?&amp;rsquo; 하고 답답해하겠지만, 다행히 이 글은 그런 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흥미롭게도, 불교의 핵심 사상이 현대 과학에 의해 뒷받침되므로 불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최근 들어 서구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지식인은 《불교는 왜 진실인가》(2017)를 쓴 과학저술가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 《나는 착각일 뿐이다》(2015)를 쓴 신경과학자이자 철학자 샘 해리스(Sam Harris), 《불교 이후》(2015)를 쓴 불교학자 스티븐 배철러(Stephen Batchelor) 등이다. &amp;lsquo;불교 예외주의(Buddhist exceptionalism)&amp;rsquo;를 주장하는 이들에 따르면, 불교는 그 본성이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 불교는 만물을 창조한 신을 무조건 따르는 종교라기보다는, 각자의 마음에 대한 실증적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치료법, 생활 방식, 혹은 &amp;lsquo;마음 과학&amp;rsquo;이다. 해리스는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 의식의 본성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결과를 탐구자가 상세히 적은 보고서나 실험실 매뉴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불교 예외주의는 속 편하고 경솔한 믿음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해리스는 몇몇 동양 전통은 예외적으로 실증적이고 예외적으로 현명하므로,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예외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맞선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특히 라이트의 저서 《불교는 왜 진실인가》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 라이트(2017)에 의하면, 불교의 자연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중심 사상이 진화심리학, 신경과학 같은 현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로 탄탄하게 확증되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윤회와 환생을 강조하는 불교의 초자연적, 신비적인 측면이 아니라,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하는 불교의 자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적 불교의 핵심은 이렇다.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까닭은 우리가 세상을 명료하게 보지 못해서 갈망과 집착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세상을 더 명료하게 봄으로써, 주인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핵심 사상은 인간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생물학의 통찰과 겹친다. 개체의 건강, 수명, 혹은 행복을 감소시키더라도,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사고와 정서가 자연선택되었다. 왜 마음이 미망(迷妄)과 괴로움에 시달리기 쉽도록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진화심리학의 진단은 어떻게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일깨우는 불교의 처방과 잘 맞물린다고 라이트는 역설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어느 특정한 기성 종교의 가르침이 현대 과학이 이룩한 연구 성과와 어쩌다 부합한다고 해서 그 종교의 위엄(?)이 더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불교에 문외한인 필자가 불교가 정말로 합리적이고 실증적이어서 불교 예외주의가 정당화되는지 엄밀히 검토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lt;u&gt;이 글의 목표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진화심리학이라는 경험 과학에 의해 확증된다는 라이트의 주장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lt;/u&gt; 우선, 마음을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전문화된 다수의 심리적 적응(모듈, module)의 집합으로 보는 진화적 관점을 알아본다. 다음으로, 인간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살도록 진화한 이유를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 나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의 자아가 애초에 진화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마음의 모듈성 이론&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오직 자연선택만이 인간의 마음과 같은 복잡한 적응을 만든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첫 회에는 자폐증 환자인 주인공 우영우가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아빠의 얼굴 사진 수십 장을 벽에 붙여 놓고 정서를 학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컨대, 두 눈썹이 올라가고 눈이 커진 표정은 &amp;lsquo;놀람&amp;rsquo;이다. 윗입술이 올라가고 코를 찡그린 표정은 &amp;lsquo;역겨움&amp;rsquo;이다. 공부해야 하는 표정은 그 외에도 많다.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다는 우영우가 왜 저렇게 쉬운 걸 열심히 공부할까?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내면 정서를 짐작하는 일은 어린이에게도 식은 죽 먹기 아닌가?&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유기체를 둘러싼 환경에는 정보가 가득 들어 있고, 유기체는 정보를 그냥 다 받아들이면 된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틀렸다! 특정한 유형의 정보를 잘 탐지하도록 &amp;lsquo;설계된&amp;rsquo; 기구가 미리 내장되어 있어야만 그 정보는 유기체에 비로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누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고 하자. 그가 놀랐다는 정보는 보통의 일반인에게만 입력된다. 바로 옆에 있는 자폐증 환자에게는 입력되지 않는다. 타인의 표정으로부터 정서를 읽어내는 탐지 기구가 결핍된 자폐증 환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악전고투를 겪는 모습을 보면, 표정으로부터 내면의 정서를 추론하는 일을 수행하는 심리 기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얄궂게도, 우리의 마음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를 너무나 능숙하게 처리해서 적절한 반응을 척척 내놓기 때문에 정작 우리는 마음의 위대한 &amp;lsquo;설계&amp;rsquo;를, 그 천문학적인 복잡성을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한다. 눈을 뜨면 온 세상이 내 앞에 순식간에 펼쳐진다. 욕구가 생기면 실행 계획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수립된다. 움직이고 싶으면 팔다리가 내 뜻대로 순식간에 움직인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력이 흐려지거나, 초록과 빨강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일에 극도의 공포를 경험한다면? 그제야 우리는 마음이 천문학적으로 복잡하게 &amp;lsquo;설계된&amp;rsquo; 걸작품임을 실감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간의 마음만 복잡한 것이 아니다. 동식물의 특성에서도 복잡한 &amp;lsquo;설계&amp;rsquo;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광자를 포획하여 외부 세계의 상을 두뇌에 전달하는 눈,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유선형으로 미끈하게 생긴 고래, 나뭇잎을 쏙 빼닮아서 포식자를 피하는 잎사귀 벌레 등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복잡하다. 생명의 복잡한 &amp;lsquo;설계&amp;rsquo;는 어떻게 생긴 걸까?&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859년에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amp;lsquo;설계&amp;rsquo;를 만들었음을 입증했다. 태초에 복제자(replicator), 즉 자신의 복제본을 만들 수 있는 실체가 있었다. 완벽한 복제는 없다. 세대가 이어지면서 복제자들은 서로 조금씩 달라진다.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더 많이 남기는 특성을 지닌 복제자는 그렇지 못한 복제자보다 세대를 거쳐 그 빈도가 높아진다. 이게 전부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각기 다른 복제자 사이의 차등적 번식이다. 어떠한 목표도, 의도도, 계획도 없다. 유전, 변이, 그리고 차등적 번식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면 무조건 자연선택이 일어난다. 덕분에 개체군은 당장 처한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지구 행성에서 번성한 복제자는 오늘날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진화를 일으키는 엔진은 자연선택 외에도 더 있지만, 자연선택은 특별하다. 오직 자연선택만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듯한 복잡한 적응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를 일으키는 다른 과정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댄다. 반면에, 자연선택은 주어진 유전적 변이 가운데 현재 처한 환경에서 복제본을 가장 잘 퍼뜨리는 변이를 일관되게 &amp;lsquo;골라내는&amp;rsquo; 유일한 기제다. 자연선택은 무작위적인 변이 사이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이 누적됨에 따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조상의 번식 성공도에 영향을 끼쳤던 적응적 문제에 대해 자연선택은 꼭 맞는 해결책을 만든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고래의 유선형 몸매를 예로 들어 보자. 포유류지만 바다로 영구 이민을 결심한 고래의 먼 조상들은 물의 저항을 되도록 줄여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고래 몸의 형태에 원래 존재했던 유전적 변이 가운데, 물의 저항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변이가 후대에 복제본을 더 많이 남겼다. 선택이 여러 세대를 거쳐 누적되었다. 결국 앞부분은 매끈하고 뒷부분은 날카로워서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유선형 몸매가 고래에게 장착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약하자.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잘 남기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amp;lsquo;이기적&amp;rsquo;이라고 은유하는 유전자를 줄기차게, 무덤덤하게 골라내는 맹목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적응을 만들었다. 전지전능한 신, 더 높은 질서, 우주적 섭리 같은 초자연적인 설계자는 필요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마음은 먼 과거의 적응적 문제들의 해결책인 수많은 심리적 적응(모듈)의 집합이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운동을 통제하는 우리의 마음은 눈, 심장, 간, 허파, 팔다리 같은 신체 기관 못지않게 복잡하고 정교하다. 심리적 적응은 어떤 진화적 기능을 잘 수행하게끔 자연선택이 빚어냈을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음의 기능은 정보처리다. 마음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여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조상의 번식에 도움이 된 행동을 산출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의 조상이 길을 걷다가 뱀과 마주쳤다고 하자. 이때 우리의 조상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한 가지였다. 뱀을 보고 군침을 삼킬 수도, 뱀을 짝사랑할 수도, 뱀을 보고 박장대소할 수도, 뱀을 보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이 중 뱀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편이 번식에 가장 유리했다. 즉, 뱀을 두려워했던 이들이 뱀을 귀여워했던 이들보다 다음 세대에 후손을 더 많이 남겨서 오늘날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뱀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적응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수십, 수백만 년 전에 소규모 사회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우리의 먼 조상이 풀어야 했던 적응적 문제는 위험한 동물 피하기 외에도 많았다. 자식을 무사히 낳기, 식물성 음식의 위치를 기억하기, 동물을 사냥하기, 배우자의 바람을 방지하기, 심장 박동 조절하기,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읽기, 우정을 지키기, 언어를 습득하기, 자연재해를 피하기, 길을 잃지 않기, 체온 조절하기 등등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이처럼 제각각 다른 적응적 문제에 맞추어 전문화된 다수의 심리적 적응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즉, 우리의 머릿속에는 무엇이든 잘 해결해 내는 요술 방망이 하나만 덜렁 담겨 있지 않다. 각기 다른 용도에 맞추어 특수하게 제작된 연장들이 수백, 수천 개 빼곡히 담겨 있다. 어느 한 문제에만 특화된 해결책은 다른 문제에는 젬병이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신체 기관을 떠올려 보자. 우리의 몸 안에는 소화, 순환, 내분비, 면역, 근육, 신경, 번식, 호흡, 배설, 골격 등을 한꺼번에 담당하는 범용 기관 하나만 들어 있지 않다. 각 기능에 특화된 신체 기관이 빽빽하게 들어 있다. 정신 기관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음식 선호와 배우자 선호라는 두 적응적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영양가가 많고 독소와 병원체가 없는 음식을 고르는 데 필요한 심리 기제(예: 역겨운 냄새가 나는가?)는 젊고 건강하고 매력적인 이성을 고르는 데 필요한 심리 기제(예: 피부가 깨끗한가?)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화심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은 각기 다른 입력 정보에 의해 활성화되는 다수의 전문화된 심리 기제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컨대, 진화심리학자는 마음의 적응적 설계를 밝히고자 한다. 아래에서 왜 우리의 삶이 괴로움으로 가득한가에 대한 진화적 설명을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왜 인생은 괴로움으로 넘치는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의 경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설탕으로 코팅되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도넛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절로 군침이 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가 도넛에 대해 품는 긍정적인 느낌은, 슬프게도 환영이다. 눈앞에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한다. 의사들은 당류가 넘치는 초가공식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우울증, 당뇨병, 암에 걸리기 쉽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했듯이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는 높은 에너지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달고 기름진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심리는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 현대의 산업사회 환경에서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은 우리에게 백해무익하지만, 우리는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환영의 세계에 산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도넛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은 돈, 건강, 사회적 지위, 성관계, 고학력, 일류 직장, 해외여행, 명예 등 외부적 조건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성취하면 커다란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기대한다. 다음번의 도넛, 다음번의 성관계, 다음번의 명품 백, 다음번의 명문대 진학, 다음번의 대기업 입사, 다음번의 승진을 위해 전력투구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라이트(2017)에 따르면 우리가 구하는 쾌락은 빠르게 사라지며 결국엔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다.&lt;u&gt; 실제로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간절히 바라던 대상을 마침내 얻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불과 2~3주 안에 사라짐을 반복해서 보고했다&lt;/u&gt;. 그 무엇을 얻어도 행복감은 쳇바퀴를 돌듯이 원래 수준으로 빠르게 복귀함이 알려져 있다. 말할 필요 없이, 현대의 긍정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경험적 사실은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며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딴하(tanha), 즉&lt;b&gt;&lt;u&gt; 만족&lt;/u&gt;&lt;/b&gt;을 모르는 갈애라고 설파한 붓다의 진단과 겹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자연선택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일에만 &amp;lsquo;관심&amp;rsquo;을 기울인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왜 행복은 일시적인가? 왜 우리는 욕망을 채우고도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면서 불만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이미 살펴보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수백만 명의 낯선 대중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산업사회가 아니라, 백 명이 채 안 되는 가족, 이웃, 친구로 이루어진 협소한 수렵－채집 사회에 맞추어서 자연선택에 의해 &amp;lsquo;설계&amp;rsquo;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선택은 개체의 건강이나 행복을 증진하는 데는 일체 &amp;lsquo;관심&amp;rsquo;이 없다. 개체가 외부의 실재를 정확히 인식하게 해주는 데에도 &amp;lsquo;관심&amp;rsquo;이 없다. 자연선택의 유일한 &amp;lsquo;목표&amp;rsquo;는 우리 조상들이 진화한 먼 과거의 환경에서 번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를 맹목적으로 골라내는 것이다(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어떠한 의도도 계획도 없는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과정임을 꼭 유의하길 바란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잠시 자연선택을 의인화했을 따름임을 강조하기 위해 따옴표를 쳤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반인들은 종종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인류의 먼 조상들은 탐욕도, 근심도, 걱정도, 폭력도 없는 고상한 삶을 살았고, 모든 분란과 갈등은 서구 문명이 뿌린 병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잠시 자연선택이 마치 행위자인 것처럼 가정하여 사고실험을 해 보자. 유전자를 후대에 많이 남기는 개체를 &amp;lsquo;설계&amp;rsquo;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음식을 구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이성과 짝짓기하고, 자식을 돌보고, 안전하게 지내고, 질병을 피하고, 배우자의 바람을 방지하고, 부족 간 전쟁에서 승리하고,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등의 목표를 잘 달성하는 개체를 &amp;lsquo;설계&amp;rsquo;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첫째,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목표를 성취하면 쾌락을 느끼게끔 뇌를 &amp;lsquo;설계&amp;rsquo;해야 한다. 반면 번식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건을 경험하면 불쾌감을 느끼게끔 &amp;lsquo;설계&amp;rsquo;해야 한다. 애인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외식을 하면, 그리고 그 사진을 SNS에 올려서 &amp;lsquo;좋아요&amp;rsquo;를 많이 받으면 큰 행복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둘째, 목표를 달성해 얻는 쾌락이 금세 사라지게끔 뇌를 &amp;lsquo;설계&amp;rsquo;해야 한다. 가령, 어떤 조상이 성관계했더니 그 쾌락이 몇 달 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다고 하자. 그는 나무 그늘에서 흐뭇하게 쾌락을 만끽하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반면에, 쾌락이 금방 사라진 다른 경쟁자 조상은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새로운 짝짓기 기회를 찾아 고단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시달린 끝에 결국 번식에 성공한 조상들의 직계 후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셋째, 목표를 달성해도 쾌락은 바로 사라짐을 깨닫지 못하고 목표를 달성해서 얻을 쾌락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게끔 뇌를 &amp;lsquo;설계&amp;rsquo;해야 한다. 신경과학자들은 달콤한 주스 방울을 원숭이 혀에 떨어뜨리고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을 조사하였다. 예상대로, 주스가 혀에 떨어지자마자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다음에는 녹색 불이 켜지면 잠시 후에 주스가 혀에 떨어짐을 원숭이에게 반복해서 학습시켰다. 놀랍게도, 불이 켜진 바로 그 순간에 원숭이의 두뇌에서 더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실제로 주스가 떨어진 순간에는 비교적 적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주스가 실제로 혀에 떨어졌을 때보다, 주스가 곧 주어질 것이라 잔뜩 기대하는 바로 그 순간에 원숭이들은 더 큰 쾌락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찜해 둔 신상품을 가격 때문에 망설이다 마침내 &amp;lsquo;구매하기 버튼&amp;rsquo;을 눌렀을 때의 쾌락이 나중에 그 신상품을 실제로 착용하고 다닐 때의 쾌락보다 더 큰 격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약하자. 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에 인생이 괴로움으로 넘치는 까닭은 자연선택은 오직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에만 &amp;lsquo;관심&amp;rsquo;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개체의 행복과 불행은 자연선택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목표가 아니다. 자연선택은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 기제라면, 그것이 개체를 행복하게 하건 불행하게 하건 간에 묵묵히 그것을 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성욕, 식욕, 재물욕, 명예욕처럼 끈질긴 욕망이나 질투, 시기심, 분노, 불안, 공포, 혐오, 비탄, 슬픔, 우울 같은 &lt;u&gt;부정적 정서는 우리를 정말로 괴롭히고 할퀴고 쇠약하게 하지만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는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나를 다스리는 주인인 자아는 존재하는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의식적인 자아와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진정한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보세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라. 나다운 선택을 해라.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조언이다. 자기 계발, 여행, 심리치료, 체험 등을 다루는 광고, 강연, 서적, 방송에서는 우리의 두뇌 안에 참된 &amp;lsquo;나&amp;rsquo;가 있다고 하루가 멀다고 외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실, 우리는 두뇌 안에 우리의 행동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특별한 누군가가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가끔은 무분별한 욕망이나 감정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를 꼼꼼히 검토하여 올바른 선택을 항상 일관되게 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amp;lsquo;의식적 자아(conscious self)&amp;rsquo;가 두뇌 안에 있다고 믿는다. 2014년의 나와 2024년의 나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진짜 &amp;lsquo;나&amp;rsquo;, 영혼, 혹은 의식적 자아 덕분이다. 일반인이 흔히 품는 이러한 믿음에 따르면, 마치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이나 국정을 지휘하는 대통령처럼 의식적인 자아가 내 두뇌 안에서 내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미 수천 년 전에 붓다는 나를 다스리는 총사령관, 내 모든 선택의 주체, 혹은 의식적인 자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아경》에서 붓다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오온, 五蘊), 즉 색(色, 신체), 수(受, 기본적 감정), 상(想, 지각), 행(行, 정서, 사고, 성향, 습관, 의사결정을 포함하는 선택), 식(識, 의식) 가운데 과연 &amp;lsquo;자아&amp;rsquo;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붓다는 흔히 자아가 지녔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속성인 통제 가능성과 시간적 지속성의 측면에서 오온을 하나씩 검토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통제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오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가령, 신체를 크게 다쳤을 때 우리가 고통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란다 해도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분노나 두려움 같은 불쾌한 감정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계속 우리를 따라다닌다. 시간적 지속성은 어떨까? 《무아경》에서 붓다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오온 역시 예외가 아님을 비구들에게 설파한다.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신체, 감정, 지각, 선택, 의식이 나의 참된 자아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신체, 감정, 지각 등의 속박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나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 사상에도 불구하고, 뇌 안에 작은 뇌가 들어 있다는, 즉 뇌 안에서 특별한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을 일관되게 관장하고 통제한다는 믿음은 지금까지도 지식 대중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이채롭게도, 뇌 안에 총사령관 자아가 들어 있다는 시각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실증적 증거가 현대의 자연과학에서 최근 들어 쏟아지고 있다. 바로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의식적인 자아가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뇌 안의 통제실을 작은 인간(호문쿨루스, homunculus)이 차지하고 앉아서 합리적인 선택을 일관되게 내린다는 믿음은 논리적인 오류라고 비판했다. 그 호문쿨루스는 어떻게 우리를 통제하는가? 호문쿨루스의 뇌에 더 작은 호문쿨루스가 들어 있어서 호문쿨루스를 통제하는가? 그 더 작은 호문쿨루스는 어떻게 호문쿨루스를 통제하는가? 이 무한 연쇄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뇌 안에는 뇌만큼 똑똑한 작은 뇌가 들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라, 뇌는 뇌보다 덜 똑똑한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 안에 특별한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은 논리적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실증적인 증거가 인지 신경과학과 사회심리학에서 보고되었다.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괄한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고 하자.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왜 하필 그것을 선택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한 이유를 명시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왜 우리가 특정한 선택지를 택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지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로 1977년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과 티머시 윌슨(Timothy Wilson)이 수행한 실험을 들 수 있다. 실험 참여자들에게 일렬로 놓인 스타킹 네 켤레를 잘 살펴본 다음에 그중 가장 품질이 우수한 스타킹을 하나 골라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이 스타킹들은 모두 똑같은 제품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참여자들은 저마다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하는 스타킹을 골랐다. 실험 결과, 맨 오른쪽에 놓인 스타킹이 가장 많이 선택되었다. 즉, 순전히 대상의 위치가 선택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참여자들에게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물었더니, 아무도 &amp;lsquo;이게 가장 오른쪽에 있으니까요.&amp;rsquo;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참여자들은 &amp;lsquo;이게 감촉이 제일 좋아요&amp;rsquo;나 &amp;lsquo;이게 빛깔이 가장 선명해요&amp;rsquo;처럼 스타킹의 원단, 촉감, 색깔 등의 이유를 열심히 주워섬겼다. 요컨대,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한 스타킹을 선택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엉뚱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꾸며서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항상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사람인 양 남들 눈에 보이려 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괄하는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이른바 &amp;lsquo;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amp;rsquo;에 관련된 실험이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한 일반인을 몇몇 사람이 앉아 있는 방으로 안내한 다음, 그들과 함께 옆 방에 있는 누군가와 스피커폰으로 대화하게 했다. 사실 옆 방에 있는 사람은 연구진의 일원이고, 대화 도중에 갑자기 심하게 발작하는 연기를 한다. 연구진은 참여자가 옆 방으로 바로 달려가서 간질 환자를 직접 돕는지, 아니면 남들이 나서 주길 기대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지 관찰했다. 실험 결과, 방 안에 함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참여자가 직접 옆 방으로 뛰어가서 환자를 도울 가능성은 뚜렷이 낮아졌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놀라운 대목은 이렇다. 연구진이 참여자들에게 방 안에 다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간질 환자를 도울지 여부를 결정할 때 영향을 주었냐고 물었을 때, 참여자들은 다소 불쾌해하며 그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참여자들은 &amp;lsquo;발작이 그리 심한 것 같지는 않아서 좀 지켜보려고 했어요.&amp;rsquo; &amp;lsquo;옆의 사람들은 무관했어요.&amp;rsquo; 등으로 답했다. 요컨대, 간질 환자를 도울지 말지를 실제로 결정한 뇌의 부위는 따로 있고, 우리가 총사령관이라고 믿었던 의식적인 자아는 응급 구조를 남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사람으로 주변에 비치지 않기 위해 그럴듯한 가짜 이유를 적당히 꾸며내는 언론 홍보 담당관처럼 보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는 실증 연구는 인지 신경과학자들이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환자를 대상으로 수행한 실험을 비롯해서 그 밖에도 많다. 만일 의식적인 자아가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이 아니라면, 마음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의식적인 자아는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언론 당당관 모듈이다&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간의 마음은 먼 과거의 진화적 조상이 겪었던 수많은 적응적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amp;lsquo;설계&amp;rsquo;한 다수의 심리 기제(모듈)의 집합임을 상기하자. 마음이 수백, 수천 개의 전문화된 모듈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은 종종 각각의 모듈이 우리의 두뇌에서 공간적으로 구획화되어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않다. 휴대전화에 있는 수많은 앱을 떠올려 보자. 각각의 앱은 기능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달력을 표시하거나 음악을 틀어 달라는 특정한 요구에 의해서만 활성화되어 그에 알맞은 반응을 내놓는다. 그러나 각각의 앱이 휴대전화의 기판에서 경계를 지어 나뉘어 있지는 않다. 보드의 어떤 부위를 송곳으로 쑤시면 다른 앱들은 멀쩡하고 달력 앱만 고장 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구성하는 수많은 모듈도 구획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만약 여러분이 모든 선택을 총괄하는 총사령관 자아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마음을 구성하는 수많은 모듈 가운데 다른 모듈들로부터 보고를 받아 심사숙고 끝에 의사결정을 내리는 &amp;lsquo;총사령관 모듈&amp;rsquo;도 있지 않겠냐고 제안할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뇌 안에 작은 뇌가 들어 있다는 발상은 논리적으로 오류임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계통발생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마음은 38억 년 전 최초의 생명이 새로운 적응적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차곡차곡 서서히 진화시킨 결과로 만들어졌다.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자연선택이 &amp;lsquo;모듈을 총지휘하는 대장 모듈도 있으면 좋겠군!&amp;rsquo;이라고 생각해서 당장 번식 성공도를 높여 주지도 않는 대장 모듈을 굳이 만들지는 않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렇다면, 마음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 뇌에는 언제나 수많은 모듈이 활발히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중 아주 일부의 모듈만 의식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눈 뜨자마자 외부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생물과 무생물, 표정과 감정, 색깔과 질감, 밝기와 어둡기, 정지와 동작을 식별하는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의 수준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얻어진 시각적 이미지를 의식할 따름이다. 모듈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다른 모듈과 상호작용한다. 마음이 수많은 모듈의 집합이고 그중 극히 일부만 우리가 의식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어느 한 모듈을 가리켜 이것이 진짜 나 혹은 진정한 자아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이렇게 말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마음은 행위자(agent)들의 공동체이다. 각각의 행위자는 제한된 힘을 가지며 몇몇 특정한 행위자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 행위자 가운데 그 누구도 유의미한 지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힘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생긴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 뇌 안에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 &amp;lsquo;나&amp;rsquo;가 있는 것 같다는 직관을 여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왜 자연선택은 뇌 안에 총사령관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게끔 우리의 뇌를 &amp;lsquo;설계&amp;rsquo;한 것일까?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커즈번(Robert Kurzban)은 저서 《왜 모든 사람은 (나만 빼고) 위선자인가》에서 우리가 &amp;lsquo;총사령관&amp;rsquo;이라고 믿어온 자아는 실은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남들에게 우리 자신을 유능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홍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 담당관 모듈이라고 설명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백여 명 남짓한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평생을 보냈던 우리의 진화적 조상은 자신이 착하고, 유능하고, 믿을 수 있고, 장래가 밝고, 오래 살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광고해야, 실제로 그러한가와 관계없이 높은 평판을 얻어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파트너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고기 같은 귀중한 음식을 함께 나누거나, 공동 사냥이나 공동 방어에 나서거나, 여생을 함께할 배필을 구하거나, 질병이나 재난이 닥쳐서 도움이 급히 필요한 상황 등에서 사회적 평가나 위신이 낮아서 남들에게 배우자나 동료로 선택받지 못한 조상의 말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의식적인 자아는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내 사회적 평판을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 담당관 모듈이라는 가설은 왜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한 진짜 이유를 종종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럴듯하게 꾸며내는지도 잘 설명해 준다&lt;/u&gt;.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끔 결정한 모듈이 그 진짜 이유를 언론 담당관 모듈에게 언제나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알려주지 않는 편이 평판 관리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론 담당관 모듈로서는 번지르르한 이유를 사후에 꾸며낼 수밖에 없다. 방관자 효과에 대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이 간질 환자를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은 진짜 이유는 &amp;lsquo;자신 말고도 도와줄 사람이 옆에 많이 있음&amp;rsquo;이었다. 그러나 이를 입 밖에 내면 자기 잇속만 챙기는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이 하락할 것이기 때문에, &amp;lsquo;환자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음&amp;rsquo;이 자신이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은 이유라고 진심으로 발언했던 참여자들처럼 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맺음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은 불교의 자연적, 실증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핵심 사상이 진화심리학, 인지 신경과학, 사회심리학 같은 현대 과학으로 잘 뒷받침된다는 라이트(2017)의 주장을 요약 설명했다. 붓다는 인생이 괴로움의 연속인 까닭은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감정을 곧 &amp;lsquo;나&amp;rsquo;의 것으로 동일시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한다면, 나아가 나를 주관하는 주인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집착에서 벗어나 더 행복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이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인류의 조상들이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amp;lsquo;설계&amp;rsquo;한 심리적 적응의 집합이라는 현대 진화과학의 통찰과 겹친다. &lt;u&gt;우리가 미망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까닭은 개체의 건강, 수명, 혹은 행복을 감소시키더라도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사고와 정서가 자연선택되었기 때문이다&lt;/u&gt;. 나를 다스리는 총사령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총사령관이라 믿었던 모듈은 진화적 환경에서 사회적 평판을 관리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amp;lsquo;설계&amp;rsquo;된 언론 담당관 모듈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자연적인 측면이 진화생물학과 심리학의 많은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는 의미에서 불교는 진실일까? 라이트(2017)는 윤회처럼 불교의 초자연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책에서 논의하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했지만, 자연적 불교와 초자연적 불교를 구분하는 라이트의 접근이 과연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철학자 이반 톰슨(Evan Thompson)은 어떤 사건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lt;u&gt;우연(偶然)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불교의 교리&lt;/u&gt;는 우연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연의 역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 현대 자연과학과 크게 어긋남을 지적한다.33)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자연적 불교의 가르침이 자연과학에 의해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불교는 진실이 아닌 걸까? 보다 근본적으로, 수천 년 전의 농업 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라는 틀 안에서 여러 사람이 쓴 종교 경전에 나온 내용 가운데 일부가 현대의 자연과학이 이룩한 발견과 우연히 부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전중환 evopsy@gmail.com&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행동생태학 석사를, 텍사스대학교(오스틴) 심리학과에서 진화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족 내의 갈등과 협동, 성적 혐오, 도덕 심리 등의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오래된 연장통》 《본성이 답이다》 《진화한 마음》 옮긴 책으로는 《욕망의 진화》 《적응과 자연선택》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국제캠퍼스) 정교수로 재직 중.&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뇌과학과 불교 : 본다(見)는 것을 중심으로 / 신승철&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신승철&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1:02&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수정 2024.11.10 12:02&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 0&lt;/li&gt;
&lt;/ul&gt;
&lt;span&gt;&amp;nbsp;&lt;/span&gt;
&lt;div&gt;&lt;i&gt;&lt;span&gt;바로가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복사하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본문 글씨 줄이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본문 글씨 키우기&lt;/span&gt;&lt;/i&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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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96&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x8HMi/btsKK09k2E6/NQdXRmIg2yxl1KIzwzuEv0/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x8HMi/btsKK09k2E6/NQdXRmIg2yxl1KIzwzuEv0/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x8HMi/btsKK09k2E6/NQdXRmIg2yxl1KIzwzuEv0/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x8HMi%2FbtsKK09k2E6%2FNQdXRmIg2yxl1KIzwzuEv0%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96&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96&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인간 뇌에 대한 개략적 이해&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복잡한 구조가 인간의 뇌라고 한다. 잘 알려졌듯 뇌는 수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들이 유전형에 따라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뇌 전체는 86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신경세포는 5천~1만 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어, 공간적으로는 여러 차원으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많은 뇌신경세포의 조합 결과, 작동 여부에 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면 10의 100만 제곱이다. 우리가 결코 이를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우리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상태의 수를 추정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런 잠재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우리의 뇌는 우주의 크기만큼 광대하다고 볼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과학 일반에서는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서, 많은 중앙처리장치가 서로 긴밀히 연결된 슈퍼컴퓨터로 보고 있다. 뇌는 어느 순간에도 수천억 개의 시냅스(신경연접부위)가 활동하고 있다.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 정보는 시냅스의 말단으로부터 수 밀리초 내에 거의 동시적으로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연결된 다음, 신경세포에 전기 폭격을 가해 전기적 전달, 곧 하나의 활동전위를 발생시킨다. 뇌는 이런 식으로 즉 시냅스를 통해 전기적－화학적－전기적 신호를 보내면서 서로 간의 영역 간 의사소통을 한다. 시냅스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신경전달물질)은 그 종류가 수십 가지에 이르고, 뇌의 영역별로 다르게 분포되어 있다. 어느 화학물질은 신경계에서 억제 작용을 하고, 어느 것은 흥분 작용을 한다.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들은 이런 원리/메커니즘을 바탕에서 연구되고 개발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음/정신이란 것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자는 뇌 신경회로에 활동전위가 흐르면서 &lt;u&gt;마음이란 것은 창발적으로 생성된다는 의견&lt;/u&gt;을 내놓고 있다. 신경세포는 서로 연결이 더해지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기능이 발휘된다. 수많은 신경세포 간 연결이 복잡한 회로를 맺으며 활동하게 되면, 이전에 세포 하나가 갖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새로운 기능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두고 &lt;u&gt;창발(創發, emergence&lt;/u&gt;)이라 부르는데, 이렇듯 뇌 신경회로의 활성화로 마음이란 것이 창조적으로 발생된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뇌과학의 기본 입장&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간 눈부신 뇌과학의 발전은 뇌의 건강, 특히 뇌질환 관련 새로운 병리적 인과의 발견과 치료 방법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불교 수행(修行)이 인지기능이나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 주기도 했다. 이제 명상이나 수행 관련 뇌과학 영역에서의 논문은 여러 방면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뇌과학의 발전은 인공지능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크나큰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뇌과학은 아직 풀어내지 못한 숙제가 많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실 뇌과학은 주로 인지/인식 관련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뇌 연구에서, 불교적 관점의 이해나 검토를 한 것은 인지/인식 영역에 제한된 편일 수밖에 없다. 뇌과학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성의 문제라든가, &amp;lsquo;내&amp;rsquo;가 뇌의 어느 곳에 있느냐 등의 문제와 같은, 사변적/주관적 성격의 문제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 뇌 신경학적 상관물(neurological correlates)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lt;u&gt; 뇌과학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되는 인간의 심리적 양상이나 행동 특성에 대해, 그것의 뇌 신경학적인 상관성을 밝히려는 게 주목적이다&lt;/u&gt;. 그러므로 우리가 뇌과학과 불교적 이해와의 관련성을 찾는다면, 가령 전오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이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뇌의 어느 회로를 거쳐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밝히는 범위 정도의 일이 된다. 물론 감정이나 장단기 기억 등의 신경회로를 밝힌 것도 뇌과학의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거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의식/마음/정신이란 것의 연구에 대해선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에 와서 의식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뇌 신경학적 상관물의 근거를 찾아냈다고 보기 어렵다. 아직 의식에 대한 연구 결과는 대개가 가설에 불과할 뿐, &amp;lsquo;검증&amp;rsquo;이 되지 않은 추론에 불과한 실정이다. 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뛰어든 일군의 신경철학자들이 있지만, 이들도 뇌 연구 결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견해가 분분하다. 신경과학 철학자들 가운데는 마음/정신이란 것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마음/의식의 확실한 뇌 신경학적 상관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배경이다. 뇌과학자 가운데, 특히 행동주의 신봉자들은 그런 의식/마음은 검증이나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것은 있다고 해도 하나의 환상이라는 주장을 한다. 다른 경우라 해도 실험적으로 반복하여 입증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뭐라 결론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의지나 의식 수준 또는 가치 같은 문제는 뇌과학 영역에서는 논외의 주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본다는 것에 대한 뇌과학적 소견&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과학 연구 성과의 일부를 간단히 소개한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간략히 언급한다 해도 그 주제의 범위나 내용은 어마어마하다. &lt;b&gt;&lt;u&gt;여기선 뇌과학의 대표적 연구라 볼 수 있는 본다는 것[見]을 중심으로 뇌과학적 지견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려 한다&lt;/u&gt;&lt;/b&gt;. 그런 연후에 본다는 것의 전통 불교적 입장(불교인식론)과 그 맥락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간단한 비교 검토를 했다. 그리고 본다는 것[見]의 함의를 넓혀, 다시 말해 대승불교/선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觀]의 의미를 함께 검토해 봤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본다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은 이유는 이런 배경도 있다. 과거 불교인식론에서는 다섯 감관 가운데 시각을 흔한 예로 삼아 논증을 편 전통이 있다. 그리고 예부터 시각 관련 인식 논증을 통해 나머지 다섯 감관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는 주장을 펴 왔다. 사실 본다는 것, 본다는 마음은 불교 이해의 핵심이다. 불교 전통에서 본다는 말에는 단지 눈으로 본다는 것[見],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이해를 한다는 것[解]. 헤아린다는 것[思]을 포함하는 함의도 있었고, 심지어 느낌[受]이나 인식[識]도 본다는 의미에서 풀이가 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본다는 것[觀]을 제일로 중요한 지혜로 여겼다. 뇌과학에서도 시각에 대한 연구가 가장 많았고 활발했다. 시각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이라는 이유도 있어, 뇌 연구의 중요 핵심 과제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본다는 것에 대한 최근 뇌과학 연구의 결과를―일반에서 이해를 하기에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보이나―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다는 것[眼識]은 사물에서 발산되는 빛 에너지를 눈[眼根]이 활동전위라는 전기로 변환하면서 시작된다. 사물에 대한 시각정보처리는 맨 먼저 망막에 상이 잡힘으로써 시작된다. 망막의 세포에서는 빛이 광색소 분자를 때리면 광 에너지가 흡수되고, 분자는 전기전류를 변화시킨다. 망막에서 변화된 활동전위는 시각로(optic tract)를 따라 외슬핵(lateral geniculate nucleus)으로 보내진다. 외슬핵이란 망막과 피질의 중간에 있는 핵이다. 이는 망막 정보를 받아들여 이 정보를 뇌 후두부에 있는 일차시각피질(약자로, V1)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외슬핵에 있는 신경섬유는 상구(superior colliculus)를 향한 커다란 투사를 하고, 여기서 수많은 비주류 신경절세포들은 시각적 정보를 여러 작은 핵들의 잡다한 집합에 중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곧 눈 깜빡임, 응시, 동공 조절, 일상의 리듬 등을 조절하는 기능들을 매개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다시 말해 눈에서는 50가지가 넘는 망막의 세포들이 시각정보를 받아들인다. 이 세포의 축삭들은 여러 개의 나란한 통로를 따라, 일련의 일시적인 전기 펄스들로 부호화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lt;u&gt;허술한 비유&lt;/u&gt;를 들자면, 이들은 흑/백, 적/녹, 청/황 대립 정보를 전송하는 사진기 한 대씩, 시간에 따라 명암이 변화되고 위치를 강조하는 통로 등, 십여 대의 사진기로 구성된 한 세트라 할 수 있다. 이 모두는 외슬핵으로 보내지면서 의식적 시각 &lt;u&gt;경험의 토대&lt;/u&gt;를 이룬다. 여기서 한 묶음의 소수 신경절세포는 뇌간의 외진 곳으로 투사 되어 주시, 동공의 직경 등 기본적 기능들을 조절하게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시각정보처리 과정에서, 외슬핵의 신경세포들은 그들의 신호를 일차시각피질(V1)로 보내는데, 이곳은 피질 시각영역의 첫 번째 장소로, 다시 말해 시신경의 신호들은 외슬핵, 시상 등을 거쳐 V1에서 안정되고 균질하고 그럴듯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말할 것도 없이 만일 시각피질이 없거나 손상을 입게 되면, 시각적 인식은 불가능해진다. &lt;u&gt;&lt;b&gt;만일 눈이 없거나 눈 기능을 상실했다 해도, 컴퓨터 칩을 통해 시각피질에 시각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면 보는 일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의 중요 관문은 일차시각피질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lt;/b&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부연 설명을 하면, 좌측 외슬핵은 좌반구의 V1에 투사하고, 우측 외슬핵은 우반구 V1에 투사한다. 시야의 중심과 부분은 후두엽(뇌의 뒤쪽 피질)의 맨 뒤쪽으로 표상되고, 시야의 주변 부분들은 후두엽의 맨 뒤보다 좀 더 앞쪽으로 표상된다. 따라서 좌측 V1은 전체 우측 시야에 대한 망막형 지도를 가지며, 우측 V1은 전체 좌측 시야의 지도를 갖게 된다. 이처럼 시각피질에 시각정보들이 온전히 투사가 되어야, 비로소 시각 지도가 만들어진다. 망막에서 시작된 세포의 발생전위를 통해, 여러 경로를 거쳐 결국 시각피질에 시각 지도가 만들어져야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V1 신경세포들은 사물의 윤곽과 모습을 구성하는 시각 특징의 방향에 대한 신경 표상을 담당하지만, 이곳 신경세포들은 다른 여러 고위 시각영역들 쪽으로도 신호를 보내는데, 예컨대 색채지각에 특히 중요한 피질 쪽으로 보내기도 하고, (그 정보를) 다시 물체 재인(recognition)과 관련된 복측(腹側) 시각경로라 부르는 고위 시각영역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아울러 중측두(中側頭) 영역이라 불리는 영역으로도 보내지는데, 이 영역은 움직임 지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쪽 일부 신경세포들은 다른 많은 움직임 방향을 통합하여, 물체의 전체적인 움직임 방향을 계산한다. 다시 말해, V1에서 더 높은 영역으로 가는 투사 경로에서, 복측 시각경로란 V1에서 측두엽으로 가는 경로로서 물체가 &amp;lsquo;무엇&amp;rsquo;이냐를 표상하는데, 배측(背側) 경로란 V1에서 두정엽으로 가는 것으로, 물체가 &amp;lsquo;어디에&amp;rsquo; 위치해 있는지를 표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V1에서 온 신호는 배측(동쪽) 경로를 거쳐, 중측두 영역이나 배측 외선조 영역으로 가고, 그곳에서 다시 두정엽의 많은 영역으로 전파된다. 배측 경로는 시각계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사물의 위치를 표상하는 데 중요하다. 중측두 영역이나 배측 외선조 영역은 시각적 움직임과 입체 길이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반면, 두정엽의 특정한 영역들은 안구의 움직임이나 시각 공간에서의 특정한 위치로서 손의 움직임을 안내하는 데 특수화되어 있다. 후두엽의 외측 표면에 놓여 있고 중측두 영역 바로 뒤쪽에 외축후두 복합체(lateral occipital complex)라는 곳이 있는데, 이 영역은 물체 재인에 강력하게 관여돼 있다. 이 근처엔 방추얼굴 영역이라 불리는 영역도 있는데, 이곳은 사물의 다른 범주에 대한 반응보다는 얼굴에 대한 반응에 훨씬 강하다. 이 영역은 얼굴의 의식적 지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해마 위치 영역은 또 다른 강력한 범주의 선택적 영역으로서 집, 지형물, 집 안 풍경, 집 밖 풍경에 반응을 제일 잘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약하면, 뇌의 일차시각피질(V1)은 의식적으로 사물을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피질 시각영역들은 의식적 시각 경험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데 곧 방향성, 움직임, 얼굴, 사물들의 특정 시각적 자극들을 처리하는 데 관여하는 많은 뇌 영역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많은 신경세포들도, 의식적 자각 활동에서 역시 똑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 인식/의식에서는 혼자 감당하는 단일한 영역이 따로 있지 않다. 대신 많은 뇌 영역이 같이 일하며 의식적 자각/인식을 해내고 있다는 게 일반적으로 일치된 의견이다. 또 주의집중에 관여하는 뇌 영역들도, 시각이나 다른 감각 입력에 반응하고 지각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본다는 것은 뇌의 일차시각피질에 시각 지형이 생긴다는 것으로, 그것으로써만 시각적 자각/인식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차시각피질에서 시작된 감각의 분석은 고차원으로 올라가면서, 즉 정보의 분석이 깊어지면서 다른 감각 정보와 연결되고 혼합된다. 이런 뇌의 영역을 연합영역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망막에서 시작된 시각정보는 중간에 감각, 운동, 감정 등 여러 가지를 중계하는 시상이라는 곳도 거쳐 가는데, 감각을 맡는 시상 세포에서는 두 갈래로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 하나는 편도체로, 다른 하나는 대뇌의 감각 피질로 전달이 된다. 편도체는 느낌[受] 곧 감각질(qualia)을 생성하는 물질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요컨대 편도체를 통해 우리는 보는 대상에 대한 느낌이라는 정신적 인식이 가능케 된다. 또 시각정보는 편도체에서 시상하부 및 뇌줄기로 퍼져 가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 편도체에서 감지된 느낌도, 몸의 반응을 바탕으로 한 감정도, 그 정보는 이어 전대상 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전전두엽으로 전달이 되어야, 소위 의식/인식이 가능케 된다. 다른 말로 이런 일련의 신경회로의 연합과 동시에 뇌 활성화로, 이 영역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대상을 알아보고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상에 대한 의식/인식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차시각피질에 생성된 뇌 활성은 측두엽의 아래쪽을 따라 앞쪽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해마에서 그 대상에 대한 모양새가 완전히 분석된다. 즉 표상(representation, percept)이 생성된다. 전전두엽에 (정보 전달이 되어) 포섭된 이 표상에 대해, 전전두엽은 &amp;lsquo;기억 데이터베이스&amp;rsquo;에 있는 정보들과 대조를 하여, 이 표상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판단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想]. 우리가 보고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대상을 안다는 말이고, 이 아는 과정에서 기존의 경험에 의한 기억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볼 때, 그 즉시 어떤 느낌과 함께 자신의 과거 경험(기억과 감정)을 투사함은 대상에 대한 생각이며 판단이라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신경회로에서, 우리는 거의 동시에 다음에 어떻게 무슨 행동[身口意]을 할까를 진행[行]시키기도 한다. 시각정보는 앞서 말했듯 대뇌의 운동피질로도 정보가 전달되어, 수많은 운동신경 세포가 프로그램에 따라 시간적 순서를 지키면서 그 작동을 격발시킨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신경회로의 이 같은 측면을 생각하면, 우리는 보는 대상에 상응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 즉 기억을 불러들인다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따라서 사물을 &amp;lsquo;있는 그대로&amp;rsquo;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보고 있는 대상에 무의식적/비의식적으로 개인의 과거 감정에 뒤얽힌 &amp;lsquo;기억을 투사하여 보게 되는 것&amp;rsquo;이 필연적인 뇌신경회로의 작동이기에,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사물을 보고는 바로 이것이 옳다, 그르다, 어떻다고 판단하는 일이 평범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 패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식이란 인식 대상에 대한 앎을 말한다. 인식이란 대상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하는 과정을 포함시키고 있다.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흔히 지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지란 인식보다 넓은 뜻으로 안다는 의미로 통용이 된다. 뇌과학에서는 보다 깊은 의미의 앎이나 통합적 앎, 곧 지혜라는 것은 전전두엽에서 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생각/사유라는 것은 인식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떠올라야 진행이 된다. 이런 생각/사유/인식의 무더기를 불교에서는 식온(識薀)이라 부른다. 통상 우리는 이 식온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사실 육식(六識)에서 식은 대상을 감각한 의식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고, 오온 가운데 식온(識薀)은 수온, 상온, 행온을 거쳐서 일어나는 심(心)의식이기에, 우리는 통상 이 식온을 마음이라고 부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전통적 불교인식론과 뇌과학적 소견을 비교해 볼 때&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유부와 관련된 견해다. 유부는 수, 상, 행, 식이 함께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성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갖춰진 성품/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자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관점은 뇌과학의 입장과 비교할 때, 그 이해에서 차이가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인식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과로서 연기가 되는 조건이나 여건들에 대해선 그것들이 &amp;lsquo;실재&amp;rsquo;하는 것으로 언급이 되어야 형식상의 언술이 가능해진다. 뇌과학에서도 마찬가지 이치로, 흔히 원자나 분자, 신경세포, 신경회로 등을 흔히 언급하는데, 이때 이런 요소요소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기술되고 있다. 뇌과학의 기본 입장은 유물론이기에 요소요소를 마땅히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제반 감정/인지/행동은 그러한 신경세포나 신경회로들의 작용 내지 표현인 것으로 해석이 되는 바이고, 여기서 그 신경학적 상관물은 그 인과에서 중요한 매개체인 것이며, 그것을 &amp;lsquo;실재&amp;rsquo;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유부에서는 수, 상, 행, 식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과 비교할 때, 뇌과학과는 그런 관점에서 방향의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유부와 달리 뇌과학에서는 (주관적으로 보이는) 상, 행, 식을 실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연기적 그물망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다시 말해 경(境)과 근(根)과 식(識)이 하나가 됨에 일어나는 것으로, 요컨대 수, 상, 행, 식은 뇌 안에서의 연기의 산물인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예시했듯 안식도 그런 양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뇌과학에서는 수, 상, 행, 식에 각자 따로 자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요소의 실재를 인정하는 뇌과학이나 불교인식론의 입장에 대해, 대승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요약/정리될 수 있을 법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lt;b&gt;길장(吉藏)은 《성실론》 202품을 살펴보면서, 불교인식론(소승불교)의 특징에 대해 &amp;ldquo;(그들은) 단지 실(實)로서 가(假)를 분석하여, 공(空)만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서) 실(實)을 간과할 뿐이다.&amp;rdquo;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른 말로, &amp;ldquo;(그들은) 색(色)이 소멸하여 공(空)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그들 논증/해석에 따르면) 색의 자성이 그대로 공인 것에 대해서는 해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거기(소승불교)에는 불이(不二)가 없다는 말이다.&amp;rdquo;&lt;/b&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실(實)이란 요소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봄이요, 가(假)라 함은 주/객 등을 말함이고, 그런 논증을 하는 가운데 공(空)의 작용을 말함, 다시 말해 요소들이 실재한다는 가정의 실로서 가, 즉 주/객이 실체가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니, 그게 바로 색이 소멸하여 공이 된다는 논증을 편 꼴이 되는 셈이다. 즉 색이 곧 공이라는 불이(不二)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다시 돌아가,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 유부의 인식은 마음, 마음 작용이 동시상응(同時相應)한다는 주장을 한다. 다른 말로 이것은 감각여건인 색경(色境), 안근과 인식의 결과인 안식이 시간적으로 동시적으로 발생, 즉 동시적 인과관계에서 생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경량부의 주장은 다르다. 마음과 마음 작용은 차례로 계기할 뿐, 서로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모든 마음 작용은 차례로 생기하는 것이지 동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인과는 동시적인 영역 속에 있는 두 사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시적(異時的)인, 즉 시간을 달리하는 두 사건에 대한 관계다. 그리고 경량부에서는 본다는 것에는 안근과 색경 등의 객체적 여건 그리고 빛과 같은 간접적 조건 등이 모여서 본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런 직접적 경험에는 보는 주체도 없거니와 보이는 대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법의 인과뿐이다. 여기서 &amp;lsquo;본다&amp;rsquo;는 사실은 결과[眼識], 여건으로서의 안근과 색경은 원인, 그리고 이 둘은 &lt;u&gt;시간을 달리(異時的으로)하여 인과를 맺는다는 것&lt;/u&gt;, &lt;u&gt;그리하여 주체나 대상은 단지 &amp;lsquo;본다&amp;rsquo;라는 사실의 두 측면의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는&lt;/u&gt; 주장이다. 즉, 경량부에선 이처럼 이시적 인과관계를 근, 경－안식 관계에서는 물론 촉－수의 관계에까지 확장하여 적용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앞서 언급했듯, 뇌에서 시각정보처리는 각 단계마다 전기적 신호가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식하기 불가능한 정도인 수 밀리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코흐는 빛으로 유발된 활동의 물결파는 망막을 떠나 35밀리초 안에 V1의 거대세포 입력 층에 도달한다고 했다. 각 상으로부터 한 비트의 정보를 추출해야 하는 하측 피질과 그 너머의 주변에 있는 그물망을 자극하기 까지는 100밀리초가 약간 더 되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럴진대 뇌과학은 색경과 보는 과정과 안식의 결과인 &amp;lsquo;봄&amp;rsquo;에는, 이시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안식이 성립된다는 결론에 이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유부의 동시상응설에 대한 주장이 틀린 것이라 볼 수도 없다. 최근 뇌과학에선 시각정보는 그런 이시적 인과관계의 맥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뇌의 전두부는 비상하게 확장된 의식의 광활한 작업 공간이다. 이곳은 의식하는 대상을 둘러싼, 정신적 감각을 보완하는 신경계이다. 이는 뇌의 넓은 영역들 사이를 가로질러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초당 30~80번 맥동하는, 안정되고 멀리 뻗어가는 감마파로 동기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지금 무엇을 &amp;lsquo;본다&amp;rsquo;고 할 때, 뇌는 여러 부분들이 동시에, 함께 초당 30~80번 맥동하며 동조화(진동 개념임)/동시상응이 일어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동조화 현상은 깊은 수행이나 명상을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밝힌 바도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유부나 경량부의 이런 관점의 차이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은 사변적으로 다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뇌의 동조화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를 한다면 인과의 동시성이요, 봄의 과정을 신경회로 측면에서 구성적으로 분석해보자면 이시적인 인과관계도 성립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누가 보는가 vs 무엇이 보는가의 문제&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무엇을 본다고 할 때,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전통적인 불교인식론에선 보는 주체도, 객관의 대상도 &amp;lsquo;봄&amp;rsquo;에 관여되는 연기적 조건일 뿐인 것이며, 결과는 &amp;lsquo;봄&amp;rsquo;을 의식하는 앎만 있을 뿐, 주체와 대상을 별도의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뇌과학 역시 보고 있는 &amp;lsquo;내&amp;rsquo;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amp;lsquo;나&amp;rsquo;라고 하는 것의 뇌 신경학적 상관물을 입증할 수 없어서다. 다만 가아(假我)로서의 신경망, 즉 이야기하는 가상으로서의 주체, 이야기로 꾸며진 &amp;lsquo;나&amp;rsquo;가 이러저러한 신경회로에 잠복해 있을 거라는 추정은 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앞서 언급했듯 시각정보처리 과정의 신경회로에서, 우리는 보는 대상에 상응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 즉 기억을 불러들인다는 일이 동시에 (신경회로에서) 격발이 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봄에 있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amp;lsquo;봄&amp;rsquo;에 내가 본다는 수, 상, 행, 식이 (자연스럽게) 동시에 끼어드는 신경망 활성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듯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해, 무의식적/비의식적으로 개인의 과거 감정에 뒤얽힌 기억을 투사하여 보게 된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주객(主客)의 분리/의식이 자연스레 생기게 되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하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개체는 생명 유지와 종족보존이라는 욕망이 최우선이기에, 생존을 위해 오랜 세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뇌의 구조나 기능적 측면에서) 여러 층위에서의 진화를 거듭해 왔을 터이고, 인간 역시 그런 두려움이 개체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에게 &amp;lsquo;나&amp;rsquo;라고 하는 개체의식은 특히 언어를 통해 발달되고 더욱 공고화됐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습에 젖어 우리는 흔히 무엇을 볼 때, &amp;lsquo;내가 그것을 본다&amp;rsquo;는 앎에 자연스레 체질화가 된 것이리라.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에서도 이런 자아의식/개체의식을 부정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상의 우리의 자아의식을 참나[眞我]가 아닌 가아(假我)로서 수긍하고 있다. 천태지의 대사는 이를 &amp;lsquo;가립(假立)의 나&amp;rsquo;라고 수긍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시각인식에 관한 뇌과학의 소견은 본다는 과정에 대한 신경회로/신경학적 상관물에 대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amp;lsquo;시각에 대한 의식&amp;rsquo;이 정작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뇌과학은 아직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의식이 없다면 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일련의 시각신경회로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만 작동되는 것이고, 의식/마음이 깔려 있기에 시각정보에 대한 자각/인식도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amp;lsquo;시각에 대한 의식&amp;rsquo;이 있어야, 본다는 것이 가능하고 본다는 말도 성립된다. 보고 있다는 것은 이 의식/마음의 바탕으로, 이 마음을 씀으로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직관적/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뇌과학은 이런 직관적 앎/의식을 과학의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아 왔다. 그러므로 뇌과학은 &amp;lsquo;봄[見]&amp;rsquo;에서, 더 나아가 보는 것, 다시 말해 그 너머를 본다는 것[觀[에 대해선 어떻게 표현할지 그 과학적 단서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뇌과학에서 의식/마음 관련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의식/마음 자체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한 수준이다. 뇌과학 일반에서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란 말에는 주로 깨어 있음/주의 집중하는 힘이란 의미가 다분하다. 반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의식/마음의 개념은 그것의 광대무변함이나 그것의 본질적 성품이 어떻다는 등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실 대승불교/선불교에서는 시각으로 본다[見]는 것에 &amp;lsquo;진실성&amp;rsquo;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상을 시각적으로 본다는 일상적인/일차적인 봄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 봄보다는 오히려 의식/마음으로 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런 각찰(覺察)의 봄, 깊이 잘 살펴본다는 뜻에서 봄[觀]이 그것이다. 즉 시각이라는 시각적 관점을 빌리지만, 실은 직심(直心)으로 사물/법을 본다는 말이다. 뇌과학에선 없는 표현/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선(禪)에선 &amp;rsquo;본다[見]&amp;rsquo;는 말을 빌려, 이와 같이 말한다. 진심/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觀]은 결국 본래의 우리 마음이 진공(眞空)이라는 것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엔 동시에 묘유(妙有)로서, 온갖 공덕들이 원래부터 원만히 갖춰져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누구나 알 수 있는 이것을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면, 초월/자비/사랑의 마음이 우리 안에 능히 갖춰져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만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관(觀)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는 바로 관심/관법을 줄인 말이다. 관법이란, 가령 의식의 대상 경계[六境]로 들리는 소리(예를 들어 &amp;lsquo;관세음보살&amp;rsquo;이라고 칭명(稱名)하는 염불수행을 포함하여)를 진여본성이 듣고 자각하는 것, 다시 말해 중생심의 소리를 자각하여, 듣고 있음 그 자체의 주인공이 바로 진공/불성/불심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도 한다. 또 시각적 봄을 관한다는 것은, 봄 자체를 자각하는 순수 의식이 활달하게 살아 있음을 알아채 &amp;lsquo;이놈&amp;rsquo;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앎에 이른다는 말인데, 그럼으로써 바야흐로 대상 경계가 사라지는(사물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은 幻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아), 진여일심의 지혜를 터득도 하게 된다는 도리를 두고, 관 혹은 관심/관법이라 부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dquo;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지 않는 상태[不見相]가 아니다.&amp;rdquo; 즉, 본다고 하는 시각적인 작용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사물을 대상으로 본다[見]는 그 자체를 대상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도[不見]도 볼 수가 없다. 만약 대상 경계로 보지 못하는 곳[不見處]을 본다면, 그것은 보지 않는 상태[不見相]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말을 더듬듯 다시 살펴보자. 즉, 보지 못하는 곳(眞空, 진여본심)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見]와 못 본다[不見] 하는 일을 모두 초월하는 일로, 보지 못하는 곳을 보게 되면, 바야흐로 (그 직접적 체험으로 말미암아) 자아(개체)의식/통상의 지각작용/중생심으로 대상경계를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치 환화(幻化)와 같아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법한 한 어구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잘 알려졌듯 중생심/뇌의 지각작용으로 보고서 판단하는 일은 근본적인 인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지(無智)다.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하는 시각적 앎이란, 물론 안다와 모른다고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바른 앎이 아닌 것이다. 뇌 신경회로에서 보듯, 시각적 인지의 과정에서 부해마 영역에서 비롯된 개인적 감정이나 왜곡된 기억의 투사로, 대상 경계/사물에 대한 바른 인지/인식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이는 마치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오인한다는 옛 비유를 연상시키는데, 우리의 시각 신경 체계로는 늘 세계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이런 시각정보[見]에 대한 무지는 뇌과학 연구에서 보듯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을 드러낸 것이며, 대승불교에서는 이미 그런 봄(사적인 투사가 된 봄)에 편견/무지가 있음을 오래전부터 많은 비유를 통해 드러내 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경전에 &amp;ldquo;만약 내가 대상 경계로 보지 않는 곳을 그대도 대상 경계로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것은 대상 경계의 사물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 아니겠느냐?&amp;rdquo;라고 했다. 이미 보지 않는 곳을 대상 경계로 볼 수 없다고 한다면, 보는 주체인 본성은 객관적인 대상 경계의 사물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존은 아난에게 진여본성은 객관적인 대상 경계의 사물이 아니고, 사물을 보는 시각 인식의 주체가 &amp;ldquo;바로 그대의 진여본성이다.&amp;rdquo;라고 설했다. 자아의식(주, 객이 분리된 개체의식)의 견해로 대상 경계를 볼 때, 자신의 견해로 보는 것은 진정한 정법안목의 견해가 아니다. 진정한 정법안목의 견해는 마치 자아의식의 삿된 견해를 여의고, 삿된 견해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인데, 어찌 다시 인연(因緣)이다, 자연(自然)이다, 화합(和合)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amp;lsquo;봄&amp;rsquo;에 대해 이런 중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인과를 중요 법으로 여기는 소승불교(전통 인식론)와 인과를 무시하진 않지만 인과를 초월한 대승불교의 차이를 이와 같이 드러내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진심/(순수)의식만이 실재한다는 게 대승/선의 입장이다. 일체는 실재하지 않고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대승/선에서는 &amp;lsquo;봄&amp;rsquo;의 주인은, 개체의식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진심/의식이라는 것이다. 관[觀]을 통한 체험으로 진실성/믿음은 보다 확고해진다. 관자재보살도 오온이 공한 것을 관한 즉, 오온에 일체 자성이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나서 온갖 고(苦)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amp;lsquo;봄&amp;rsquo;의 주인을 불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다른 경우 현존 혹은 전체성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어떤 말로 &amp;lsquo;이것&amp;rsquo;을 부르든 &amp;lsquo;거기&amp;rsquo;에는 물론 그런 용어/의미/흔적도 없을 터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승기신론》에서 진여법신의 지혜는 일체의 언어(言說相), 명칭(名字相), 중생심의 반연(心緣相)을 초월한 경지라고 설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식(眞空, 진여법신)을 두고, 선종(禪宗)에서는 신령스러운 거울로 비유한다. 거울은 자아의식과 대상 경계에 대한 망심(妄心)을 텅 비운 무심의 경지에서, 보는 작용[見]과 보지 않는 작용[不見], 비추는 작용[照]과 비추지 않는 작용[不照], 즉 지(知)와 무지(無知), 긍정과 부정, 사량(思量)과 불사량(不思量)을 모두 초월하여, 여여부동(如如不動)한 경지에서, 자기 본분사의 묘용으로 일체의 사물을 여실하게 비춘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공(空)의 마음/순수 의식은 단멸/허무의 공이 아닌 것이다. 직심은 봄[見]과 각찰하여 봄[觀] 둘 다를 포함하여 봄이다. 보는 마음의 주체는 견문각지로 일상의 지혜로 늘 활동한다는 것을 앎이다. 일체를 포섭하면서 이를 초월하되 항시 이 자리에 뚜렷하게 현전하여 항상 성성적적(星星寂寂)하게 깨어 있는 하나인 &amp;lsquo;그것&amp;rsquo;뿐임을 스스로 앎이다. 마땅히 이런 관[觀]에 관하는 자가 있을 리 없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6. 맺는말&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과학에서 본다는 일은 비유컨대 우리의 눈은 10여 대의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사진기들이 계속 &amp;lsquo;풍경&amp;rsquo;을 찍어대는 것이다. 사진기들은 시간 차이를 두고 정보를 여러 경로를 통해 상위단계로 전송한다. 영화는 1초에 20여 장의 정지된 화면을 연속으로 돌리게 되어, 하나의 동영상으로 보이게 한다. &lt;u&gt;우리의 뇌는 영화의 동영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각기 &amp;lsquo;풍경&amp;rsquo;을 찍어낸다&lt;/u&gt;. 우리 역시 그 연속된 정지화면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떤 일정한 지각이나 &amp;lsquo;풍경&amp;rsquo;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컨대 실은 밖의 사물이 연속해서 바뀐 게 아니고, 우리 마음 안의 인지/인식이 찰나로 나타났다가 찰나로 사라짐을 의식하지 못한 채, 대상 경계가 마치 지속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 보는 것은 정적인 것이다. 밖의 세계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마음 안에 표상되는 바를 통해, &amp;lsquo;나름 세계를 알게 된다.&amp;rsquo;는 것이 우리의 봄[見]의 실상이다. &lt;u&gt;뇌를 통해 우리는 마음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된 세계, 대개가 그런 &amp;lsquo;허상&amp;rsquo;을 보는 것이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승불교는 시각적 봄을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시각적 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다. 시각적 봄이라는 가능한 봄을 통해 그 봄 자체를 보는 것, 다시 말해 시각 인식의 주체를 주의 깊게 각찰(覺察)/관(觀)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 삶의 주인공은 &amp;lsquo;누구&amp;rsquo;가 아니며,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시각적 봄에는 진정 내가 보는 아니라 가아(假我)인, 이야기하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채게 됨이다. 들음에서도, 느낌에서도, 생각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하는 &amp;lsquo;나&amp;rsquo; 너머에서 보고, 듣고 있는 자가 무엇인지를 자각/관(觀)해야 한다는 것이 대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신승철 igu1848@hanmail.net&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미국 텍사스의대 정신보건 연구교수, 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 등 역임. 정신건강 전문의, 신경과 전문의이며 시인. 주요 논문으로 〈한국인의 자살〉 등과 저서로 《연변조선족 사회정신의학 연구》 역서로 《아직도 가야 할 길》 등 다수와 시집 《기적 수업》 수필집 《나를 감상하다》 등이 있음. 현재 블레스병원 원장이며 연세대 의대 외래교수&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양자역학과 불교 :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과 무아의 연기(緣起) / 양형진&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양형진&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0:54&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수정 2024.11.11 22:21&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 0&lt;/li&gt;
&lt;/ul&gt;
&lt;span&gt;&amp;nbsp;&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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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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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1&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W3kzB/btsKKqAHFXv/mIgLDeFCMc3AoqjchnkJk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W3kzB/btsKKqAHFXv/mIgLDeFCMc3AoqjchnkJk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W3kzB/btsKKqAHFXv/mIgLDeFCMc3AoqjchnkJk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W3kzB%2FbtsKKqAHFXv%2FmIgLDeFCMc3AoqjchnkJk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51&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1&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개요&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역학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양자컴퓨터와 양자정보이론을 포함하여 현대물리학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된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갖는데, 그 대부분은 측정과 연관돼 있다. 이 글에서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duality)과 스핀 측정에서 나타나는 측정 결과의 범주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 범주는 대상과 무관하게 관측자의 의도로 설정된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자가 측정 결과의 범주를 설정하고 그 범주 안에서 대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대상의 상태를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측정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믿음은 여기서 무너진다. 이에 이어, 관측자가 참여하는 측정의 이런 구조는 양자역학뿐 아니라 일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로써 &lt;u&gt;&lt;b&gt;현상은 대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이 객관과 어떤 연기적(緣起的) 맥락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lt;/b&gt;&lt;/u&gt; 그러므로 연기에 의해 색성향미촉법(色聲響味觸法)이 또렷이 나타나도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響味觸法)이고, 업(業)에 의해 수많은 현상이 나타나도 업자(業者)가 없는 무아(無我)의 연기공(緣起空)임을 논하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양자가설과 양자역학&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영(Thomas Young)이 이중슬릿을 이용하여 빛이 간섭(inter-ference)한다는 사실을 밝힌 이후, 빛이 파동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빛이 전자기 파동이라는 사실은 고전 전자기학인 맥스웰 방정식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되고, 헤르츠의 실험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빛은 파동의 전형적인 현상인 간섭과 회절(diffraction)을 보여주므로,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나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 콤프턴 효과(Compton effect)처럼 고전 전자기학의 파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플랑크(Max Planck, 1858~1947)는 1900년에 양자(quantum)가설을 제안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는 우리말로는 &amp;lsquo;덩어리&amp;rsquo; 혹은 &amp;lsquo;알갱이&amp;rsqu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 소립자, 원자, 빛 알갱이인 광자(光子, photon) 등이 모두 양자다. 양자역학은 우주가 이런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탄소 2kg에 10조 곱하기 10조 개의 탄소 원자가 들어 있을 정도로 양자는 아주 작다. 원자가 이렇게 작으므로 우리 감각기관을 통해 원자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구가 30와트의 노란빛을 발산한다면 1초 동안에 100억 곱하기 100억 개의 광자가 방출된다. 이처럼 광자 수가 많다는 것은 광자 하나의 에너지가 그만큼 작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세하므로 우리는 빛을 알갱이라고 느끼지 못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가설에서 출발하는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서의 동역학(dynamics)을 기술하는 물리학의 기본 이론이며, 지금까지 인류가 알아낸 가장 정확한 과학이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양자역학은 입자물리, 원자물리, 고체물리, 양자장(quantum field) 이론, 양자화학 등 거의 모든 물리학 분야의 기초가 된다. 양자가설을 이용하여 흑체복사와 광전효과와 콤프턴 효과가 설명됐다. 이런 현상은 빛을 양자라고 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양자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제공하고, 양자암호와 양자통신을 아우르는 양자정보이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파동과 입자의 이중성&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고전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은 그 물리적 속성이 전혀 다르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어서, 입자는 파동처럼 행동할 수 없고 파동은 입자처럼 행동할 수 없다. 입자인 전자는 파동처럼 행동할 수 없고, 파동인 빛은 입자처럼 행동할 수 없다. 이와 전혀 다른 상황이 양자역학에서 전개됐다. 양자역학은 빛을 입자라고 가정하는 양자가설에서 출발한다.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때로는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전에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회절무늬를 보이면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처럼 어떤 상황이나 맥락에서 관측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를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고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광전효과에서는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더라도, 이중슬릿 실험을 하면 빛은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는 빛이 사실은 입자인데, 과거에 파동이라고 잘못 알았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고전물리학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이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빛이 입자라는 것이 아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처럼 행동하는 현상만 알았지만,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플랑크가 양자가설을 세우면서 양자역학이 시작됐지만, 지금도 거의 모든 상황에서 빛은 파동처럼 행동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입자이기 때문에 입자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광전효과를 통해 이중성을 살펴보자. 광전효과란 빛을 쪼이면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다. 원자에 갇혀 있던 전자가 빛 에너지를 받아서 원자를 탈출하고, 이 자유전자가 움직이면서 전류가 흐른다. 만약 빛이 파동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빛 에너지를 모아야 전자가 탈출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빛을 쬐고 10억분의 1초가 지나지 않아 전자가 튀어나온다. 빛 에너지가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입자처럼 한 점에 모여 있다가 고스란히 전자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광전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에 빛이 입자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 빛은 이 순간 이전엔 파동처럼 행동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입자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빛이 입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입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순간 입자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상적 세계와 달라진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상적 세계에서 측정은 잔고 확인과 같다. 백만 원의 잔고를 확인한다는 것은 확인 전에 백만 원이 계좌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상 세계에서 측정은 측정 이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 명백한 일이 양자역학에서는 달라진다. 지금 입자로 측정됐다고 해서 조금 전에도 입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측정하기 전에 입자여서 입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입자여서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입자로 행동했을 뿐이다. 파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측정하기 전에 파동이었던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파동인 것도 아니며, 단지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파동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이를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다시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이중슬릿 실험에서의 이중성과 본질&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광자로 이중슬릿 실험을 한다고 하자. 빛의 세기를 줄여서 1초에 광자 하나를 방출하는 정도로 지극히 약한 빛을 보낸다고 하자. 슬릿 두 개를 모두 열어 놓으면, 하나의 광자만 슬릿을 지나도 두 파동이 더해지는 것처럼 간섭무늬가 생긴다. 이는 실험적 사실이다. 이 경우엔 두 슬릿이 모두 열려 있으므로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를 모른다. 이처럼 광자의 경로를 모르면 간섭무늬가 생기면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와 달리, 슬릿 하나를 닫고 하나만 열어 놓으면 광자는 열린 슬릿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광자의 경로를 알면 간섭무늬가 생기지 않으면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 역시 실험적 사실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정리해 보자. 슬릿 하나만 열어 놓으면, 간섭무늬가 사라지면서 입자성이 드러난다. 슬릿 둘을 모두 열어 놓으면, 간섭무늬가 생기면서 파동성이 드러난다. 장치를 바꾸는 데 따라 입자나 파동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빛을 본질적으로 파동이나 입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스핀으로 보는 양자 측정의 구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우리 주변에 널린 자석, 자기쌍극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전하는 전기장을 만들고 전류는 자기장을 만든다. 전하의 움직임이 전류이므로, 정지한 전하는 전기장을 만들고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장을 만든다. 움직임의 특별한 경우가 원운동이다. 전하가 원운동을 하거나 원형 회로에 전류가 흐르면 자기장이 만들어지면서 막대자석 같은 자석이 된다. 전자석이 좋은 예다. 지구 자기장도 지구 외핵을 흐르는 유체가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구가 큰 자석이라면 나침반은 작은 자석이다. 지구나 전자석과는 다르게, 나침반은 구성 요소의 양자역학적 특성 때문에 자석이 된다. 어떤 경우건, N극과 S극의 두 자극이 만들어지면 이를 자기쌍극자(magnetic dipole moment)라고 한다. 자기쌍극자는 우리 우주에 아주 흔히 존재한다. 가까이에는 나침반 같은 영구자석, 전자석, 지구 등이 있다. 멀게는 수많은 항성과 행성, 위성에서 자기쌍극자가 관측된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양자역학에서 나왔다.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의 기본입자가 자기쌍극자를 갖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회전하지 않는 작은 자석 스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역학에서는 기본입자의 자기쌍극자를 기술하기 위해 스핀각운동량(spin angular momentum) 혹은 줄여서 스핀이라는 물리량을 도입한다. 각운동량은 회전하는 물체에 나타나는 물리량이다. 스핀이란 단어에도 회전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정황과 달리, 스핀은 회전과 전혀 상관이 없다. 전하가 공전(revolution)하거나 자전(rotation)한다는 것이 아니다. 크기가 점처럼 작은 전자는 아무리 빨리 자전해도, 관측되는 자기쌍극자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스핀이 공전이나 자전과 상관없다는 것은 중성자에서 명확해진다. 전하가 없는 중성자는 어떤 회전운동으로도 자기쌍극자를 만들 수 없지만, 양성자나 전자처럼 자기쌍극자를 갖는다. 이처럼 전하의 회전운동으로는 스핀을 설명할 수 없다. 양성자, 중성자, 전자 같은 기본입자는 그 자체로 자기쌍극자다. 그래서 스핀을 본질적 각운동량(intrinsic angular momentum)이라고도 한다. 스핀은 철저하게 양자역학적인 개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관측자의 의도에 따라 정해지는 측정치의 범주&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기본입자인 전자의 스핀 측정을 통해 양자 측정의 특성을 살펴보자. 전자의 스핀이 향하는 방향을 측정한다고 하자. 3차원 공간에는 무한히 많은 방향이 있지만, 나를 기준으로 &amp;lsquo;전후&amp;rsquo; &amp;lsquo;좌우&amp;rsquo; &amp;lsquo;상하&amp;rsquo;의 세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3차원 공간에서 x, y, z의 세 축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측정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도 측정 이전에 측정할 대상과 측정할 물리량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이는 관측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치타의 속도나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려는 경우, 치타나 전자가 측정할 대상이고 속도나 스핀이 측정할 물리량이다. 측정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일상적인 측정과 같지만, 물리량을 측정하는 데서는 양자역학이 일상적인 측정과 상당히 다르다. 이를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전자의 스핀이 &amp;lsquo;상하&amp;rsquo;의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를 측정한다고 하자. 스핀의 &amp;lsquo;상하&amp;rsquo; 방향을 측정하면, &amp;lsquo;위&amp;rsquo; 혹은 &amp;lsquo;아래&amp;rsquo;의 방향이 관측된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amp;lsquo;up&amp;rsquo;과 &amp;lsquo;down&amp;rsquo;이라고 한다. 왜 두 값만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전자를 측정하면 언제나 &amp;lsquo;up&amp;rsquo;과 &amp;lsquo;down&amp;rsquo;의 두 값만 나온다. 이는 다른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핀의 &amp;lsquo;전후&amp;rsquo; 방향을 측정하면 &amp;lsquo;앞&amp;rsquo; 혹은 &amp;lsquo;뒤&amp;rsquo;라는 방향이 관측되고, 스핀의 &amp;lsquo;좌우&amp;rsquo; 방향을 측정해도 &amp;lsquo;좌&amp;rsquo; 혹은 &amp;lsquo;우&amp;rsquo;라는 방향이 관측된다. 이런 식으로 관측된다는 사실이 얼핏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고전역학과는 아주 다르다. 고전역학이라면 스핀이 위를 향하고 있을 때, 전후나 좌우 방향을 측정하면 그 갑이 0이어야 한다. 고전역학에서는 전후나 좌우 방향을 측정한다고 해서 위로 향한 스핀의 방향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측정이 대상의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는 이 전제가 양자역학에서는 전적으로 무너진다. 양자역학은 이 점에서 고전역학과 전혀 다르다. &amp;lsquo;위&amp;rsquo;로 향한 스핀에 대해 &amp;lsquo;전후&amp;rsquo; 방향을 측정하면, &amp;lsquo;앞&amp;rsquo;이나 &amp;lsquo;뒤&amp;rsquo;를 향한 스핀이 관측된다. 양자역학에서 &amp;lsquo;상하&amp;rsquo;나 &amp;lsquo;전후&amp;rsquo;나 &amp;lsquo;좌우&amp;rsquo; 중의 하나를 관측하면, 각각 &amp;lsquo;위/아래&amp;rsquo;나 &amp;lsquo;앞/뒤&amp;rsquo;나 &amp;lsquo;좌/우&amp;rsquo;로 관측된다. 이처럼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와 전혀 상관없이, 지금 무엇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측정 결과가 나온다. 고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지금 무엇을 측정하는지만이 중요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어떤 특정한 방향을 관측하려고 하는 관측자 의도에 따라 관측 결과인 스핀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관측이라면 관측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상의 물리적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 무너진다. 양자 측정에서는 관측자의 의도에 따라 측정치의 범주가 설정되고, 관측을 통해 그 범주 중의 하나가 측정치로 나타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lt;b&gt;양자 측정과 힐베르트 공간&lt;/b&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런 실험적 사실을 체계적이고 수학적으로 정리한 것이 양자 이론이다. 이런 점에서 양자 이론이란 관측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 체계라고 볼 수 있다. 이 체계의 출발점은 관측자가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려고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에 따라 측정하려는 물리량에 대응하는 에르미트 연산자(Hermitian operator)가 정해지고, 이 연산자의 고유치(eigenvalue)의 집합(set)과 고유치에 대응하는 고유벡터(eigenvector)의 집합이 정해진다. 이 고유벡터의 집합으로 전개되는 벡터의 집합을 &lt;u&gt;힐베르트 공간(Hilbert space&lt;/u&gt;)이라고 한다. 고유치의 집합 중의 하나가 측정치가 된다. 이 측정된 고유치에 대응하는 고유벡터가 측정 후의 상태가 된다. 이는 &lt;u&gt;측정치의 범주(category)가 고유치의 집합으로 한정된다는 것&lt;/u&gt;이며, 측정 후의 상태는 고유벡터의 집합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한마디로 줄이면, 측정하려는 물리량이 결정되면 이에 따라 측정치의 범주와 측정 후 양자 상태의 범주가 정해진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떤 물리량을 측정할지, 즉 &amp;lsquo;전후&amp;rsquo; &amp;lsquo;좌우&amp;rsquo; &amp;lsquo;상하&amp;rsquo; 중에 어떤 측정을 할지는 관측하기 전에 관측자가 판단해서 정하는 것이다. &amp;lsquo;전후&amp;rsquo; 측정을 하겠다고 결심하면 &amp;lsquo;앞&amp;rsquo;이나 &amp;lsquo;뒤&amp;rsquo;라는 측정값이 나타나고, &amp;lsquo;상하&amp;rsquo; 측정을 하겠다고 결심하면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라는 측정값이 나타난다. 관측자가 &amp;lsquo;전후&amp;rsquo; 측정을 하려고 하면, &amp;lsquo;앞&amp;rsquo;이나 &amp;lsquo;뒤&amp;rsquo;라는 측정값의 범주가 결정되고 이 둘 중의 하나가 측정을 통해 나타난다. 이처럼 측정값은 관측을 통해 드러나지만, 측정값의 범주는 관측자가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연속적인 스핀 측정&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측정값의 범주가 관측 전에 정해진다는 사실 때문에 연속적인 측정에서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다. 처음에 &amp;lsquo;전후&amp;rsquo;를 측정했고, 측정값이 &amp;lsquo;앞&amp;rsquo;이었다고 하자. 다시 &amp;lsquo;전후&amp;rsquo;를 측정하면 &amp;lsquo;앞&amp;rsquo;이라는 측정값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 실험적 사실 때문에, 측정 후의 양자 상태를 &amp;lsquo;앞&amp;rsquo;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전자의 스핀은 앞으로 향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상태에 대해 &amp;lsquo;전후&amp;rsquo;가 아닌 다른 측정을 하면 일상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squo;앞&amp;rsquo; 방향은 &amp;lsquo;위/아래&amp;rsquo;도 아니고 &amp;lsquo;좌/우&amp;rsquo;도 아니다. &amp;lsquo;앞&amp;rsquo; 방향이 &amp;lsquo;위/아래&amp;rsquo;가 아니므로, 고전적으로 보면 두 번째로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했을 때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라는 측정값이 나오면 안 된다. 그러나 &amp;lsquo;상하&amp;rsquo;의 2차 측정을 하면 이 측정이 설정하는 측정값의 범주인 &amp;lsquo;위/아래&amp;rsquo; 중의 하나가 관측된다. 이는 &amp;lsquo;좌우&amp;rsquo; 측정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amp;lsquo;좌/우&amp;rsquo; 중의 하나가 관측된다.&lt;u&gt; 어떻게 &amp;lsquo;앞&amp;rsquo;으로 향했던 스핀이 &amp;lsquo;위/아래&amp;rsquo;나 &amp;lsquo;좌/우&amp;rsquo;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고전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세 번째로 &amp;lsquo;전후&amp;rsquo; 측정을 한 번 더 한다고 하자. &amp;lsquo;전후&amp;rsquo;의 1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이 관측됐고, &amp;lsquo;상하&amp;rsquo;의 2차 측정에서 &amp;lsquo;위&amp;rsquo;가 관측됐다고 하자. &amp;lsquo;전후&amp;rsquo;의 3차 측정을 하면 &amp;lsquo;앞&amp;rsquo;과 &amp;lsquo;뒤&amp;rsquo;가 관측될 확률이 50%로 같다는 것이 실험적 사실이다. 처음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으로 관측됐던 전자가 세 번째 측정에서는 &amp;lsquo;앞&amp;rsquo;과 &amp;lsquo;뒤&amp;rsquo; 어느 방향으로도 관측된다는 것이다. &lt;u&gt;1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이 관측됐는데, 3차 측정에서 어떻게 &amp;lsquo;뒤&amp;rsquo;가 관측될 수 있는가? 이 역시 고전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엔 두 가지 원리가 개입한다. 하나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관측자에 의해 측정치의 범주가 설정됐기 때문이다. &amp;lsquo;상하&amp;rsquo;의 2차 측정에서 &amp;lsquo;위&amp;rsquo;가 관측됐다거나, &amp;lsquo;전후&amp;rsquo;의 3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이나 &amp;lsquo;뒤&amp;rsquo;가 관측된다는 것은 무엇을 측정할지를 결정하면서 측정값의 범주가 만들어졌고 이 범주 안에서 측정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양자 측정과 불확정성 원리&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태양 주위를 행성이 공전하고,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돈다. &lt;u&gt;얼핏 보면 이 둘은 아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행성과 달리 전자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둘의 궤도는 전혀 다르다.&lt;/u&gt; 왜 그런가? 수만 년 후에 행성의 위치가 어딘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이는 행성이 어떤 원리로 운행되는지를 몰랐던 뉴턴 이전의 시대에도 가능했다. 지금까지의 관측 자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전자는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때문에 위치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이에 따르면 위치와 속도를 명확하게 아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lt;u&gt;위치를 명확하게 알면 알수록 속도의 불확정성이 커지고, 속도를 명확하게 알면 알수록 위치의 불확정성이 커진다.&lt;/u&gt; 고전역학이 전제하는 것처럼 위치를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되면 속도의 불확정이 커져서 운동에너지가 무한대가 될 수도 있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측정 대상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궤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자의 위치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전자구름(electron cloud)처럼 확률분포로만 표시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불확정성원리는 스핀 측정에도 적용된다. 서로 연관된 두 물리량의 상태를 동시에 알거나 규정할 수 없으므로&lt;/u&gt;, 스핀의 어느 한 방향이 &amp;lsquo;up&amp;rsquo;이나 &amp;lsquo;down&amp;rsquo;이라는 것을 안다면 스핀의 다른 성분이 어느 방향인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amp;lsquo;전후&amp;rsquo;의 1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이 관측됐다 하더라도, &amp;lsquo;상하&amp;rsquo;의 2차 측정에서 &amp;lsquo;위&amp;rsquo;가 관측됐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1차 측정에서 얻은 &amp;lsquo;앞&amp;rsquo;이라는 정보는 사라진다. 이는 1차 측정에서 얻었던 &amp;lsquo;앞&amp;rsquo;이라는 정보가 관측자에게만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다. 관측자만 모른다는 게 아니라, 스핀 자체를 &amp;lsquo;앞&amp;rsquo;이면서 동시에 &amp;lsquo;위&amp;rsquo;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lt;u&gt; 2차 측정을 하면 1차 측정의 결과가 말 그대로 사라진다는 것이다&lt;/u&gt;. 그러므로 3차 측정 결과는 1차 측정 결과와 전혀 상관없다. 1차 측정 결과는 3차 측정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amp;lsquo;전후&amp;rsquo;의 1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 상태라는 정보를 얻었다 하더라도, 3차 측정에서 1차와 같은 &amp;lsquo;전후&amp;rsquo; 측정을 하더라도 &amp;lsquo;뒤&amp;rsquo; 상태가 관측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연기(緣起)로 나타나는 현상에서의 무색성향미촉법&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나 스핀의 측정 등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고전물리학이나 일상 세계에서의 측정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lt;u&gt;일상의 측정에서는&lt;/u&gt; 측정이 측정하기 바로 전의 상태를 보여줘야 한다. 잔고 확인은 잔고를 확인하기 바로 전의 잔고를 보여준다. 특&lt;u&gt;히 측정 자체가 측정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면 안 된다&lt;/u&gt;. 잔고를 확인했다는 사실에 의해 잔고가 달라지면 안 된다.&lt;u&gt; 일상의 측정에서는 특이한 돌발 상황이 없는 한, 조금 전의 상태가 지금의 상태와 같고&lt;/u&gt; 지금의 상태가 조금 후의 상태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측정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 양자 세계가 당혹스러운 것은 이 믿음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 양자 세계가 일상 세계와 다른 또 하나는 어떤 맥락에서 누가 관측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측정 결과로 나타난 상태가 지속돼야 한다는 첫 번째 차이점과 깊이 연관돼 있다. 양자 측정에서의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논의해 보자.&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양자는 파동으로 나타나도 파동이 아니고 입자로 나타나도 입자가 아니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나의 빛이 이중슬릿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고 흑체복사나 광전효과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중슬릿에서 파동처럼 행동하면서 흘러나온 그 빛을 금속에 쪼이면 광전효과를 일으키면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고전물리학이나 일상적 세계관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우리는 어떤 존재자의 본질(essence)에 의해 그 존재자의 행동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그러므로 그런 행동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파동이기 때문에 파동처럼 행동하고, 입자이기 때문에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빛이 파동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빛을 파동이라고 단정하고,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빛을 입자라고 단정하려고 한다. 행동을 보고 존재를 규정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이 당연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중슬릿 실험을 포함하여 대부분 상황에서 빛이 파동처럼 행동하더라도, 광전효과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하므로 빛을 파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빛이 파동이라면 광전효과에서도 파동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빛이 파동이기 때문에 대부분 상황에서 파동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광전효과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광전효과에서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더라도, 대부분 상황에서 파동처럼 행동하므로 빛을 입자라고 할 수는 없다. 빛이 입자라면 대부분 상황에서도 입자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빛이 입자이기 때문에 광전효과에서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경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해서 파동이라고 할 수 없고,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해서 입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빛은 무엇인가?&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스핀은 위로 나타나도 위가 아니고 아래로 나타나도 아래가 아니다&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빛을 통해 본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문제와 정확하게 같은 맥락에서 스핀 측정을 살펴보자. 스핀 측정은 이중성보다 더 명확하게 본질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스핀이 어느 방향인지 모르는 전자의 스핀을 측정한다고 하자. 삼차원 공간에서 스핀이 향할 수 있는 방향은 무한히 많으므로, 스핀이 정확하게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 방향을 향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러나 관측에 의하면, &amp;lsquo;상하&amp;rsquo; 측정을 하여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 방향이 관측될 확률이 각각 2분의 1이다. 이는 스핀의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하여 &amp;lsquo;위&amp;rsquo; 방향이 관측됐다 하더라도, 측정 전에 &amp;lsquo;위&amp;rsquo; 상태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빛이 이중슬릿에서 파동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빛을 파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lt;u&gt;이중성이나 스핀 측정이나 모두 측정이 측정 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lt;/u&gt; 고전역학이나 일상적인 측정과는 다르게, &amp;lsquo;위&amp;rsquo; 방향이었기 때문에 &amp;lsquo;위&amp;rsquo; 방향으로 관측되는 것이 아니고 파동이기 때문에 파동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다. 이는 연속적인 측정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전과 같이 처음에 &amp;lsquo;전후&amp;rsquo;를 측정했고 &amp;lsquo;앞&amp;rsquo;을 관측했다 하자. 다시 &amp;lsquo;전후&amp;rsquo;를 측정하면 &amp;lsquo;앞&amp;rsquo;이라는 측정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실험적 사실 때문에, 이 스핀은 &amp;lsquo;앞&amp;rsquo;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한다고 하자. &lt;u&gt;고전 측정이라면 &amp;lsquo;앞&amp;rsquo;은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의 방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했을 때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로 측정되면 안 된다&lt;/u&gt;.&lt;u&gt; 그러나 양자 측정에서는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로 측정될 확률이 각각 50%다.&lt;/u&gt; &amp;lsquo;위&amp;rsquo;의 상태였기 때문에 &amp;lsquo;위&amp;rsquo;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amp;lsquo;앞&amp;rsquo;의 상태였는데도,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로 관측된다. 주인이 부르면 그 방향으로 개가 달려오듯이, &amp;lsquo;상하&amp;rsquo; 측정을 하면 스핀이 &amp;lsquo;위&amp;rsquo;나 &amp;lsquo;아래&amp;rsquo;로 정렬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amp;lsquo;전후&amp;rsquo;의 1차 측정에서 &amp;lsquo;앞&amp;rsquo;이 관측됐고, &amp;lsquo;상하&amp;rsquo;의 2차 측정에서 &amp;lsquo;위&amp;rsquo;가 관측된 상황에서 &amp;lsquo;전후&amp;rsquo;의 3차 측정을 다시 한다고 하자. 3차 측정에서 &amp;lsquo;아래&amp;rsquo;가 50%로 관측된다는 실험적 사실은 3차 측정의 결과가 이전의 측정 결과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내가 보는 것은 객관 자체가 아니라 주관이 참여하면서 드러나는 객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나 스핀 측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고전역학이나 일상에서의 측정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빛은 광전효과라는 상황을 만나면 입자처럼 행동하고 이중슬릿 장치를 만나면 파동처럼 행동한다. 전자의 스핀은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하는 상황에서는 &amp;lsquo;위/아래&amp;rsquo;로 나타나고, &amp;lsquo;전후&amp;rsquo;를 측정하는 상황에서는 &amp;lsquo;앞/뒤&amp;rsquo;로 나타나며, &amp;lsquo;좌우&amp;rsquo;를 측정하는 상황에서는 &amp;lsquo;왼쪽/오른쪽&amp;rsquo;으로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중슬릿 장치에 변화를 주면 빛의 행동이 달라진다. 두 슬릿을 모두 열어 놓으면 빛은 언제나 파동처럼 행동한다. 두 슬릿 중의 하나를 닫으면, 파동처럼 행동하던 빛이 입자처럼 행동을 바꾼다. 이처럼 내가 관측 장치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빛의 행동이 바뀐다.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가 관찰자의 개입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lt;u&gt;양자역학의 관측 결과는 객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주관이 관여한 객관의 모습이다&lt;/u&gt;. 주관이 참여하면서 그 참여하는 방식에 따라 객관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주관과 객관 사이에 설정된 관계의 맥락, 연기(緣起)의 맥락에 따라 객관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양자역학의 이론 체계다. 스핀의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하려고 하면 &amp;lsquo;상하&amp;rsquo; 측정에 대응하는 힐베르트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lt;u&gt; 벡터 공간은 측정 결과의 범주를&lt;/u&gt; &amp;lsquo;위/아래&amp;rsquo;로&lt;u&gt; 한정한다&lt;/u&gt;. 무엇을 측정하려는 것인지 관측자의 의도에 따라 측정 결과의 범주가 결정된다. 관측자가 &amp;lsquo;상하&amp;rsquo; &amp;lsquo;전후&amp;rsquo; &amp;lsquo;좌우&amp;rsquo; 중의 어느 방식으로 측정을 하려는지에 따라 측정 결과의 범주가 각각 다르게 설정된다. &lt;u&gt;전자의 스핀 자체가 측정 결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관측자의 의도에 따라 설정된 범주 중의 하나가 측정 결과로 나타난다&lt;/u&gt;.&lt;u&gt; 관측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 측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이 양자역학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관측자의 의도에 따라 측정값의 범주가 정해지는 것이 스핀만은 아니다. 양자역학이 다루는 물리량이 전부 그렇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의 측정은 대상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주관이 측정값의 범주를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한 영역 안에서 대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객관적 관측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하면서 참여하는 관측이라고 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측정을 더 타당하게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7)&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남도봉과 북도봉으로 나타나는 참여하는 관측&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도봉산이 나타나는 모습과 같다. 도봉은 하나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산의 모습이 달라진다. 하나의 도봉이 북한산 백운대에서 보면 남도봉이 되고, 의정부에서 보면 북도봉이 된다. 양자는 상황에 따라 입자나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한 측정에서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스핀은 상황에 따라 &amp;lsquo;위/아래&amp;rsquo; &amp;lsquo;앞/뒤&amp;rsquo; &amp;lsquo;왼쪽/오른쪽&amp;rsquo;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한 측정에서 여러 모습이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남도봉과 북도봉이 나타나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 남도봉과 북도봉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백운대에서 남도봉이 나타나면 북도봉이 사라지고 의정부에서 북도봉이 나타나면 남도봉이 사라지는 것처럼, 광전효과에서 입자성이 보이면 파동성이 사라지고 이중슬릿에서 파동성이 보이면 입자성이 사라지며, 스핀을 &amp;lsquo;상하&amp;rsquo;로 측정하면 &amp;lsquo;앞/뒤&amp;rsquo;나 &amp;lsquo;왼쪽/오른쪽&amp;rsquo;의 모습이 사라진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느 곳에 가서 도봉을 보느냐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양자를 측정하느냐와 같다. 광전효과를 측정할 때는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이 나타나고 이중슬릿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는 빛이 나타나며, 스핀의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하면 &amp;lsquo;위/아래&amp;rsquo;로 향한 스핀이 나타나는 것처럼, 의정부에서 보면 북도봉이 보이고 백운대에서 보면 남도봉이 보인다. 내가 어떤 측정을 하느냐에 따라 빛이나 스핀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내가 어디에 가서 도봉을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봉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측정을 하느냐는 대상과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는 일인 것처럼, 어디에 가서 도봉을 보느냐는 도봉과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는 일이다. 내가 어떤 실험적 맥락, 어떤 상황적 맥락, 어떤 연기적 맥락을 맺으면서 대상을 보려는지에 따라 입자나 파동이 나타나고, &amp;lsquo;위/아래&amp;rsquo;나 &amp;lsquo;앞/뒤&amp;rsquo;가 나타나며, 남도봉이나 북도봉이 나타난다. 양자의 세계와 같이 일상 세계에서도 어떤 참여를 하느냐, 어떤 연기적 맥락을 맺느냐에 따라 대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동을 만나려면 이중슬릿 실험을 해야 하고, 입자를 만나려면 광전효과를 보면 되고, 스핀이 &amp;lsquo;위/아래&amp;rsquo;로 향한 것을 보려면 &amp;lsquo;상하&amp;rsquo;를 측정하면 된다. 남도봉을 보고 싶으면 백운대에 오르고 북도봉을 보고 싶으면 의정부로 가면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사과와 무지개와 양자가 보여주는 무색성향미촉법&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앞에 놓인 빨간 사과를 본다고 하자. 사과를 본다는 과정은 사과에서 붉은색 파장의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가 나오면서 시작된다. 전자기파가 내 눈의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도달하고, 그 에너지가 망막 신경을 자극하고, 이 자극을 시신경이 뇌로 전달하고, 이를 시각중추가 해석함으로써 물체의 모습과 색이 나타난다. 시각중추가 해석하기 전까지는, 전자기파의 파동과 시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자극이 있을 뿐 붉은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자기파라는 인(因)이 수정체, 망막, 시신경, 뇌 등의 연(緣)을 거치면서 안식(眼識)이라는 과(果)가 나타난 것이다. 시각중추가 해석할 수 있는 색깔이 가시광선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안식도 그 관측 결과의 범주가 정해진다. &lt;u&gt;이 관측 범주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다. 빨간색을 볼 수 없는 생명체에게는 사과가 빨갛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lt;/u&gt; 그렇다면 사과는 빨간 것인가? 아니다. 빨갛게 보이더라도 사과는 빨간 게 아니다. 우리에게 빨갛게 보일 뿐이다. 빨갛게 나타난 그건 빨간 게 아니라 우리 시각중추가 빨갛게 그려낸 것이다. 빨간 사과는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무지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태양에서 온 빛이 하늘에 떠 있는 물방울 안에서 두 번 굴절하고 한 번 반사하면서 빛이 분리된다. 이 분광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빛깔의 빛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어느 물방울이든 모든 색의 빛을 다 뿜어내지만, 나와 태양과 물방울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어느 한 물방울에서 나온 여러 색 중에서 오직 한 가지 색만 보게 된다. 그 기하학적 위치 설정에 따라 무지개가 나타난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나타나더라도 각각의 물방울은 모든 색을 다 뿜어내므로, 빨갛게 보이는 하늘의 물방울은 빨간색이 아니고 보라색으로 보이는 하늘의 물방울도 보라색이 아니다. &lt;u&gt;무지개가 7가지 색으로 보여도, 무지개를 만드는 물방울은 그 어느 색도 아니다.&lt;/u&gt; 모든 색이 포함된 무색(無色)이다. 빨강도 보라도 아닌 무색이지만 맺어진 연기의 맥락에 따라 빨강으로 보이기도 하고 보라로 보이기도 한다. 무색이지만 무지개가 나타난다. 무지개가 나타나는 바로 그 자리가 무색이고, 무색인 바로 그 자리에서 무지개가 나타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업(業)은 있어도 업자(業者)는 없는 무아의 연기공&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주관이 설정한 범주 안에서 객관의 모습이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감각이 세상을 보는 데에도 측정값의 범주가 존재한다. 우리 눈은 가시광선 영역의 빛만 볼 수 있고, 우리 귀는 가청주파수 영역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lt;u&gt;모든 감각기관이 다 그렇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측정값의 범주 안에서 드러나는 대상의 모습이다&lt;/u&gt;. 감각 경험의 한계를 설정하는 이 범주는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각 경험에는 수십억 년 동안 진행돼 온 감각기관의 진화 과정이 스며들어 있다. 서로 다른 생명체는 각기 다른 진화의 경로를 밟아왔기에, 감각기관이 감지하는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비가 볼 수 있는 색을 우리는 볼 수 없고, 박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하고, 돌고래나 고등어에게 짜지 않은 바닷물이 우리에게는 짜다. &lt;u&gt;양자역학에서만 힐베르트 벡터 공간으로 관측의 범주가 설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경험에서도 감각의 범주가 설정돼 있다&lt;/u&gt;. 백운대나 의정부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감각 범주다. 이렇게 몸에 각인된 감각 범주로 우리는 세상을 본다. 이렇게 일상적인 감각 경험에서 주관이 참여하는 정도는 양자역학에서 주관이 참여하는 정도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업은 있어도 업자는 없는 무아의 연기공&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중슬릿 실험에서 빛이 파동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빛을 파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파동으로 보일 뿐 파동은 아니다. 광전효과에서 빛이 입자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빛을 입자라고 할 수는 없다. 입자로 보일 뿐 입자는 아니다. 스핀의 &amp;lsquo;상하&amp;rsquo; 측정에서 &amp;lsquo;위&amp;rsquo;로 관측돼도 스핀 자체가 &amp;lsquo;위&amp;rsquo;는 아니다. 단지 &amp;lsquo;위&amp;rsquo;로 보일 뿐이다. 남도봉으로 나타나도 남도봉이 아니고 북도봉으로 나타나도 북도봉이 아니다. 다만 도봉일 뿐이다. 바닷물은 짜게 느껴지지만 짠 게 아니고, 사과는 빨갛게 보이지만 빨간 게 아니며,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나지만 그런 색깔의 물방울은 어디에도 없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lt;u&gt; 모두는 맥락이 설정되는 관측 경험의 범주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연기(緣起)로 나타난 것이다.&lt;/u&gt; 나타나는 그게 어디에도 없으므로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響味觸法)의 무아(無我)이고, 단지 연기에 의해 나타나므로 공(空)이다.8) 오온(五蘊)이 연기이고 오온이 공이다. 이게 세간(世間)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파동으로 나타나도 파동인 건 없고, 입자로 나타나도 입자인 건 없으며, &amp;lsquo;위&amp;rsquo;로 나타나도 &amp;lsquo;위&amp;rsquo;인 것은 없다. 빨갛게 보여도 빨간 건 없고, 짜게 느껴져도 짠 게 없으며, 남도봉과 북도봉이 나타나도 남도봉과 북도봉은 없다. 파동, 입자, 빨강, 짬, 남도봉, 북도봉이 모두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업이다. 그 모든 업이 언제나 나타나도 업자는 없다. 무아의 연기공이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양형진 yangh@korea.ac.kr&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울대 물리학과(학사,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이론물리학 박사) 졸업. 양자정보이론 전공. 주요 논문으로 〈선과 과학에서의 평등과 차별, 중도〉 〈상대성이론과 무아와 무상〉 〈법계 연기에 대한 과학적 해석〉 〈진화하는 자연의 시공간적 연기 구조와 중도〉 등과 주요 저서로 《산하대지가 참빛이다－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불교와 화학 / 강종헌&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강종헌&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0:59&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수정 2024.11.11 22:21&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 0&lt;/li&gt;
&lt;/ul&gt;
&lt;span&gt;&amp;nbsp;&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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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들어가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와 화학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현대 화학을 불교를 통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주의해야 함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화학은 물리적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원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개창하고, 그를 활용하여 현상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순수 자연과학이다. 반면, 불교는 기본적인 마음챙김(sati)과 수행을 통하여 괴로움(dukkha)의 원인을 이해하여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를 넘어서 보편적 중생을 구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불교는 일차적으로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 자연과학이 아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따라서 이 글은 화학적 현상 그 자체를 단순히 불교의 관점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아님을 밝히며, 그러한 태도는 큰 논리적 비약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먼저 강조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화학이라는 자연과학 분야의 특성과 초기불교와 상호작용한 화학과 관련된 당대의 힌두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먼저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화학의 다양한 측면 중 화학자의 일과 삶이 불교적 관점, 특히 《숫따니빠따》와 같은 초기불교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호혜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팔정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amp;lsquo;수행으로서의 화학(chemistry as practice)&amp;rsquo;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학문으로서 화학의 특성&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amp;lsquo;불교와 화학&amp;rsquo;을 논하기 전에 화학의 학문적 특성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화학은 물질적인 현상을 원자 및 분자 수준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다양한 물질들의 물리화학적 물성, 원자 수준의 미시적 구조, 그리고 화학결합이 끊어지고 생성되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화학반응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과학으로서의 화학은 옹스트롬(&amp;Aring;) 수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현상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현상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공학적으로도 비료, 이차전지, 제약, 반도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다양한 화학산업까지 인류의 삶에 큰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은 크게 화학 현상들이 기반하는 물리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lt;u&gt;&amp;lsquo;물리화학&lt;/u&gt;&amp;rsquo;, 탄소가 포함된 유기화합물들의 화학 현상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amp;lsquo;&lt;u&gt;유기화학&lt;/u&gt;&amp;rsquo;, 금속이나 광물과 같은 결정부터 유기금속 화합물까지 다양한 소재를 연구하는 &lt;u&gt;&amp;lsquo;무기화학&lt;/u&gt;&amp;rsquo;, 화합물이나 화학반응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들을 연구하는 &amp;lsquo;&lt;u&gt;분석화학 및 분광학&lt;/u&gt;&amp;rsquo;, 생체 내 화학 현상들을 연구하는 &amp;lsquo;&lt;u&gt;생화학&amp;rsquo;&lt;/u&gt;, 양자역학 및 분자동역학에 기반한 컴퓨터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다양한 화학적 현상들을 설명하는 &amp;lsquo;&lt;u&gt;계산화학&lt;/u&gt;&amp;rsquo;과 같은 세부 분야들로 나누어진다. 이들 분야는 모두 유구한 학문 탐구의 역사가 있고, 각각의 과목명이 들어간 박사학위가 수여될 정도로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분야 간의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아가 유체역학이나 전자기학, 전달 현상 등 물리학의 세부 학문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융합하여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lt;u&gt;화학공학이나 재료공학&lt;/u&gt;과 같은 공학 전공들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기도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은 흔히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인 물리학과 생물학의 중간에 자리한 학문으로 인식된다. 화학은 관심의 대상인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물리학의 이론을 활용하며, 생물학의 관심 분야인 생명현상의 기본이 되는 화학적 현상들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화학이 물리학의 하위 분야이고 생물학의 상위 분야라는 의미는 아니다. 화학은 인류의 복지와 생태와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있어 순수 이론물리학과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고, 생물학의 모든 영역이 화학에 들어가는 것 또한 결코 사실이 아니다. &lt;u&gt;화학은 태생부터 학제 간 융합에 기초&lt;/u&gt;하고 있으며 기초의학, 환경과학, 재료과학에도 기여하고 있고, 인류의 생존 및 편의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 화학의 위치는 단순히 &amp;lsquo;중간 학문(intermediate science)&amp;rsquo;이라기보다, 많은 분야를 연결하는 허브의 역할을 하는 &amp;lsquo;중심 학문(central science)&amp;rsquo;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는 실제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은 태생부터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은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 학문 분야들을 막론하고 &amp;lsquo;스스로 그러한 것들(自然)&amp;rsquo;을 연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를 통하여 &amp;lsquo;세상의 모습&amp;rsquo;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위와 같이 학문 분야가 구분되는 것은 과학사적 배경과 함께 사람들의 편의와 이해를 돕기 위한 기능적 목적이 있으며, 일종의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의 방법론에서 화학은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과 궤를 같이한다. 20세기 들어 양자역학과 복잡계 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그 경향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긴 했지만, 화학은 그 시초부터 수학적으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르네 데카르트(Ren&amp;eacute; Descartes)의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sm), 그리고 정신(res cognitans)과 존재(res extensa)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에 상당 부분 기초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불교는 무상(anicca), 무아(anatta), 그리고 인연(pratītyasa-mutpāda)에 기반한 인식론을 바탕으로 탐진치를 끊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대승불교에서 공(sūnyatā)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불교는 현대 자연과학이 기초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이나 환원론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화학과 불교는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기본이 되는 전제와 인식, 그리고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화학이 세상의 모습에 대한 물리적인 이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불교는 이보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습, 즉 법(dharma)을 이해하여 수행자가 언제든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알게 하는 것을 추구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더욱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던 당시 현대 화학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대와 목적과 방법론이 다른 양자를 직접 병치하는 것은 유의미하고 직관적인 결론을 정리하기에 곤란한 측면이 있다. 이에 &lt;u&gt;이 글에서는 초기불교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힌두교의 자연관, 특히 현대 화학과 유사한 인식론에 근거한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을 먼저 병행하여 소개하&lt;/u&gt;여 그 간극을 줄이고 이해를 돕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바이셰시카 학파와 화학, 그리고 불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후기 베다 시대(later Vedic period, 기원전 11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는 갠지스강 유역의 인도 문명이 상당한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갠지스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비롯되는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들이 출현하였고, 인도 철학의 중추를 이루는 다양한 철학 학파들이 등장하였다. 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원형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베다 시대에서 십육대국 시대로 넘어가는 기원전 5세기는 사문(沙門, 큦ramaṇa)으로 대표되는 수행 계층이 확립되었고, 베다를 인정하는 힌두교의 6정통파와 더불어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롯, 인도 철학에 바탕을 둔 여러 종교의 교단이 실체를 갖추기 시작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시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실재(reality)에 대하여 각 학파와 교단별로 다양한 인식론적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집중되었다. 화학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학파는 힌두교의 6정통파 중 하나로서, 승론(勝論)학파로도 널리 알려진 바이셰시카(Visesikā) 학파이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카나다(Kanada) 또는 카샤파(Kashapa)로 알려진 힌두교 승려를 교조로 하고 있으며, 다원주의적 원자론에 기초한 형이상학을 핵심 이론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주제인 &amp;lsquo;불교와 화학&amp;rsquo;을 논함에서, 불교의 태동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물질적 구성을 인식하였는지 이해하기 위해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을 소개하고 불교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맥락상 적합하다고 판단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바이셰시카 학파는 기본적으로는 만물에 내재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 즉 아트만(atman)을 상정한 힌두교의 분파이며, 그 아트만의 일면으로서 초기 원자론을 주창하였다. 바이셰시카 사상은 관찰과 논리에 기반한 과학적 논증을 전개한다는 측면과 세상이 변하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단위 입자(원자, paramanu)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측면에서 현대 화학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원자는 &amp;lsquo;땅&amp;rsquo; &amp;lsquo;물&amp;rsquo; &amp;lsquo;불&amp;rsquo; 그리고 &amp;lsquo;공기&amp;rsquo;라는 4종류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원자들이 둘, 셋, 또는 그 이상&lt;u&gt; 결합&lt;/u&gt;하여 더 복잡한 물질, 나아가 만물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발상은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원자론을 한 세기 이상 앞선 것이며, &lt;u&gt;현대 화학에서 입증된 원소(element) 및 분자(molecules)의 존재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라는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은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서 잘 정의된 환경에서 수행된 실험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큰 한계를 가진다. 바이셰시카 학파의 세계관을 실험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전자현미경이나 입자가속기가 필요하나, 이는 모두 20세기에 개발된 것으로 당대에는 이를 입증할 여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 양자물리학 및 분석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자보다 작은 아원자(subatomic) 입자들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존재가 입증되었고, 이는 바이셰시카 학파나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하였던 &amp;lsquo;쪼개지지 않는 원자&amp;rsquo;라는 고대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반박한다. 또한 바이셰시카 학파는 당대 인도와 그리스에 공통적으로 만연하였던 4원소설을 채택하였지만, 현대 화학에서 다루는 원소는 100종을 훨씬 넘는다. 바이셰시카 사상은 기본적으로 관찰과 논리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현대 화학과 일맥상통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인해 여전히 입증되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셰시카 사상은 과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상응하는 만큼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불교는 시대적으로 힌두교의 바이셰시카 학파와 거의 같은 시기인 기원전 5~6세기경에 태동하였다. 초기불교는 기존 힌두교의 다양한 교단의 사상과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모든 것은 변화하며(무상),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 즉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으며(무아), 만물과 그의 생멸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인연)는 것을 핵심 교리로 하였다. 특히 불교는 상기한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바이셰시카 학파, 나아가 당대의 지배사상이었던 힌두교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바이셰시카 학파가 원자들의 성질과 그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불교는 세상의 모습을 이해함으로써 탐진치를 끊어내고 궁극적으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열반(nirvana)을 추구하기 때문에 수행의 일차적 목적도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불교에도 자연과학적 차원의 세계관이 존재하며, 현대 화학에서 관심을 갖는 현상들을 불교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도 그 내용과 결과적인 의미의 경중을 떠나 충분히 가능하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의 변화에 대한 학문이며, 모든 물질의 변화는 불교에서 말하는 &amp;lsquo;무상(anicca)&amp;rsquo;과 일맥상통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반적으로 화학반응들은 열역학적으로 평형을 이룰 때까지 진행된다. 이는 수면의 높이가 다른 수조 두 개를 수로로 연결하면 수면의 높이가 같아져 수압의 평형이 이뤄질 때까지 물이 이동하는 것과 같다. 열역학적 평형이 달성된 이후에도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들의 총량이 &lt;u&gt;겉보기로만 변하지 않을 뿐 분자 차원에서는 계속해서 화학적 변화가 진행된다. 화학 평형은 정반응과 역반응이 동일한 속도로 끊임없이 양방향으로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기 때문이다.&lt;/u&gt; 위의 수조 비유에서 수면의 높이는 맞춰졌지만, 그 이후에도 물 분자들은 정지하지 않고 수로를 통해 양 수조를 계속 왕래하는 것과 같다.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원자들이 쪼개지지 않는 단위로서의 실체라 하더라도 이들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진다. 예를 들어 탄소(C) 원자는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서 흑연이 될 수도 있고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흑연상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연결된 양상에 따라서 광물로서의 흑연이 될 수도 있지만, 신소재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s)나 그래핀(graphene), 또는 풀러렌(fullerene) 분자로 발현될 수 있다. 산소(O)나 수소(H), 질소(N)와 같은 다른 종류의 원자들과 결합되는 경우 주요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CO2)부터 천연가스나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탄화수소들(CxHy)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단순한 당류인 포도당(C6H12O6)부터 생명의 근간을 이루는 단백질과 핵산의 뼈대를 이루기도 한다. 이 물질들은 동일하게 탄소를 중심 원소로 한 분자구조를 가지지만, 각각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화합물들의 성질들은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lt;u&gt;선형적(linear) 조합이 아니라,&lt;/u&gt; 분자 전체의 전자&lt;u&gt;구조로부터 &amp;lsquo;창발&amp;rsquo;된 비선형적 결과&lt;/u&gt;이기 때문에, 화합물들의 거시적 성질에서 탄소의 역할만을 환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예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amp;lsquo;무아(anatta)&amp;rsquo;와 모든 성질은 관계에서 발현된다는 &amp;lsquo;연기(pratītyasamutpāda)&amp;rsquo;의 비유로서 적합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이와 같은 비유들은 불교만의 고유한 관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무아, 무상 그리고 연기는 초기부터 성립된 불교의 핵심 교리이긴 하지만 불교가 발생하면서 새로이 개발된 고유한 개념이 아니다. 기존 힌두교의 여러 학파에서 이미 다양하게 논의되어 온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서 높은 합리성을 갖도록 정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초기 우파니샤드인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에는 &amp;ldquo;소금 덩어리를 물에 넣으면 그 물에서는 짠맛이 나지만 소금을 다시 건져내는 것은 불가능하듯, 개인의 자아도 브라흐만에 녹아들면 구분 지을 수 없다&amp;rdquo;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힌두교에서도 개인의 자아 형(form)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amp;lsquo;무상&amp;rsquo;의 관점을 견지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amp;lsquo;변하지 않는 자아 본성의 존재&amp;rsquo;에 대한 논의 등 두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철학적 주제를 제외하면, 실재 세계관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관점을 완전히 구분하여 기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 있는 작업도 아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서두에서 밝혔듯, 화학적 현상들을 포함하여 자연과학적인 관찰 결과들을 불교의 이론을 통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 나쁘게는 고정된 관점에 천착하게 될 위험성 또한 지니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비유가 화학적 현상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 개념을 미시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예시의 기능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lt;u&gt;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제공되는 비유 이상의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lt;/u&gt;다. 왜냐하면 이는 &amp;lsquo;화학적 현상을 불교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amp;rsquo;라는 명제의 단편적인 입증에 불과하며, 반증 가능한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가르침은 단순히 화학적 현상의 물리적 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화학을 수행하는 &amp;lsquo;화학자의 일과 삶&amp;rsquo;에도 적합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아트만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힌두교와 달리, 불교는 자아를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고정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오온의 집합(즉, 무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세계(즉, 무상)와 연속적이고 여러 차원의 상호작용(즉, 연기)을 하는 외부 세계와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amp;lsquo;일체가 공하다&amp;rsquo;는 원리로 잘 정립되었다.&amp;nbsp;&lt;/p&gt;
&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562&quot; data-origin-height=&quot;768&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7PHb/btsKLwmlYav/aOAg41RpwbkYaf8vgO2kK1/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7PHb/btsKLwmlYav/aOAg41RpwbkYaf8vgO2kK1/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7PHb/btsKLwmlYav/aOAg41RpwbkYaf8vgO2kK1/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7PHb%2FbtsKLwmlYav%2FaOAg41RpwbkYaf8vgO2kK1%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350&quot; height=&quot;478&quot; data-origin-width=&quot;562&quot; data-origin-height=&quot;768&quot;/&gt;&lt;/span&gt;&lt;/figure&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코 그를 수행하는 화학자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화학과 화학자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개별 화학적 현상을 넘어서 화학을 탐구하는 화학자, 화학공학자의 삶과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연구를 수행하여 건전한 결과를 도출하는 데 윤리와 사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건전한 과학적 결과를 도출하는 측면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같은 측면에서 다음 절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화학자의 일과 삶을 어떻게 질적으로 향상시켜서 궁극적으로 화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 《숫따니빠따》의 게송에 나타나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논하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화학자의 일과 삶, 그리고 불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의 세계에는 다양한 원소들이 있으며, 여러 환경에서 그 원소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조합을 이루고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여전히 규명되지 않거나 발견되지 않은 현상들이 너무나도 많고, 새로운 화학적 발견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화학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가설 또는 접근방법을 언제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학문연구의 배경에서 알려진 가설이나 자신의 생각에 천착하는 것은 과학적인 발전을 크게 저해한다. 이런 집착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amp;lsquo;화학자의 욕망&amp;rsquo;이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특히 화학은 인간의 삶에 밀접한 중심 학문으로서, 산업적으로는 순수 물리학이나 생물학에 비하여 인류의 복리를 증진하여 직접적인 부를 창출하는 데 가깝기 때문에 화학자들은, 특히 응용화학자나 공학자들은 명성이나 부에 접근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실제로 엑손모빌(ExxonMobil)이나 다우케미칼(Dow Chemical), 화이자(Pfizer)와 같이 많은 화학 관련 거대 회사들이 기업 규모 및 매출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위치하며, 인류 전체 경제에 실시간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정유 및 석유화학과 같은 화학산업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산업과 함께 한국이 세계적인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으며, 화학은 탄소중립과 같이 시급성 높은 시대적 요구에도 직접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 이차전지, 수소 등 신사업 분야에서도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같은 이유로 화학 분야의 연구개발은 독보적으로 경쟁이 격한 특성을 갖는다. 새로 게재되는 학술논문들 또한 양적으로 전례가 없는 수준이며, 국가와 기업 모두 연구개발을 주도하며 이 경쟁을 끝없이 독려하고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교수와 연구원, 학생을 막론하고 새로운 발견, 실험의 진행, 특허 및 논문의 획득, 다음 연구의 계획 등 연구개발의 모든 차원에서 성과 달성의 높은 압력에 노출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환경 아래에서 연구자들은 원하는 결과를 보고자 하는 집착, 더 좋은 저널에 게재하기 위한 욕망, 그리고 윤리의 경계선에 서게 하는 유혹까지 미혹에 빠지고 연구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수 있는 큰 위험에 항상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와 같은 맥락에서 불교는 화학자들의 삶과 일을 궁극적으로 개선하고 나아가 화학 자체의 학문적 발전을 지속 가능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화학과 화학자는 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학자들의 삶과 일은 일체의 화학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보편적 대중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다양한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서 쓰인 불경은 실로 그 양이 방대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경쟁적 환경에서 연구하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국한하여 서술된 텍스트를 발췌하기보다는 &lt;u&gt;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진 보편성 높은&lt;/u&gt; 텍스트인 《숫따니빠따》로부터 화학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화학을 발전시킬 방안을 도출하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숫따니빠따》는 상좌부불교의 빨리 정전(Pali Canon)에 속한 경으로, 쿳다카 니까야(Khuddaka-nikāya)의 일부를 이루며, 같은 니까야에 속한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과 함께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불교 텍스트 중 하나로 꼽힌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시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간결한 경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경집(經集)이라고도 불린다. 시와 금언 형식으로 서술되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으며, 12연기, 무아, 무상, 탐진치, 사성제 등 불교철학에서 핵심적으로 여겨지는 개념들의 초기 모습 또한 엿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는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결되는 하나의 줄거리가 아닌 짧은 경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읽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중 가장 시대적으로 앞서며 초기불교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장은 제4장인 &lt;u&gt;앗타까 왁가(Aṭṭhaka vagga, Snp 4)&lt;/u&gt;로, 각각의 구성 경전이 8줄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어로는 &amp;lsquo;the Chapter of Octets&amp;rsquo;라고도 번역되고, 한자 문화권에서는 &amp;lsquo;&lt;u&gt;의품(義品)&amp;rsquo;&lt;/u&gt;이라 일컬어진다. 특히 이 앗타까 왁가는 《숫따니빠따》에 등장하는 경전과 게송 중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앗타까 왁가는 16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교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욕망과 집착이 어떻게 괴로움으로 귀결되는지, 욕망과 집착을 초월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움을 주는지, 실체와 자아의 성질은 무엇인지 등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8줄의 게송들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나아가 앗타까 왁가의 가르침들은 불교를 공부하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화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를 행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사상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아래 인용되는 《숫따니빠따》의 게송들은 호주의 아잔 수자토(Ajahn Sujato) 스님이 빨리어를 영문으로 번역한 영역본을 참고하여 국문으로 중역했음을 밝힌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기존의 관점에 집착하여 전체 학문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화학자는 학문적 권위가 높을수록 동료 연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특정한 이론이나 생각에 매몰되어 개방성을 잃어버리면 학문 전체의 진보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다.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Friedrich W&amp;ouml;hler)가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urea)를 합성한 결과가 실험 결과의 적합성과 명확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 받아들여지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당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온 과학철학적 관점인 생기론(vitalism)이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생기론은 생체와 생물, 유기물은 생기(vital force)라는 특성이 있어서 무생물/무기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이론이다.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당대에는 가장 저명한 화학자들도 받아들이는 보편적 관점이었다. 당시 유럽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농학자이자 유기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비히 또한 위대한 화학자였지만, 생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뵐러의 반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뵐러의 연구가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앗타까 왁가의 두 번째 경은 &amp;lsquo;동굴의 8게송(Guhaṭṭhaka sutta)&amp;rsquo;이라 불린다. 육신, 욕망, 그리고 아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변화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집착, 무지, 그리고 고정된 관점에 천착하는 것을 &amp;lsquo;정신적 동굴&amp;rsquo;로 비유하여 경계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초월해야 함을 강조한다. 동굴의 경의 6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무언가에 집착하여 메마른 개울의 웅덩이에 갖힌 물고기처럼 허둥대는 자들을 보라. 이를 보고 미래의 삶에 대한 집착을 놓으면서 사심을 버려야 한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가르침은 끊임없는 혁신을 창출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연구하는 화학자가 열린 마음을 갖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항상 깨어 있고 동료 연구자들과 협력해야 하며, &amp;lsquo;정신적 동굴&amp;rsquo;에 갇히지 말아야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전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화학자에게는 연구 윤리를 수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화학이 복잡한 실험과 정교한 측정에 기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 연구 결과물이 사람들의 삶과 다양한 산업, 그리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환경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화학 연구에서 연구 윤리 준수는 과학적 발견의 신뢰성 담보, 연구자와 대중의 안전 보장, 그리고 책임 있는 자원 활용으로 이어진다. 화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1999년 빅터 니노프(Victor Ninov)의 &amp;lsquo;118번 원소 조작 사태&amp;rsquo;는 경쟁적 환경하에서 연구 윤리 위반이 어떤 파급효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입자가속기의 적극적 활용으로 기존에 보고되지 않았던 새로운 원소를 형성하여 보고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니노프는 이 과정에서 데이터를 조작하여 &amp;lsquo;118번 원소&amp;rsquo;를 학계에 보고하였고, 처음에는 큰 찬사를 받았지만 재현성의 부재로 인한 여러 차례의 검증에서 데이터 조작이 드러났다. 이로 인하여 학계는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여 연구 동력을 크게 상실하였으며, 동료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니노프의 소속기관이었던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까지 명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앗타까 왁가의 세 번째 경은 &amp;lsquo;분노의 8게송(Duṭṭhaṭṭhaka Sutta)&amp;rsquo;으로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욕망에 의해 부패나 거짓된 관점과 같은 잘못된 길에 빠질 것을 경계하고, 비판적 견지에서 참된 이해와 지혜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분노의 경의 7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특정한 선호에 끌리고 특정한 믿음에 교조적 태도를 취하는 자가 어떻게 자신의 관점을 초월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믿음대로 말할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욕망은 선호를 만들고, 그 선호는 결국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국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져 본인의 관점을 버리지 못하게 되어 큰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가 놀랍고 가치 있을수록 화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언제나 자신의 연구 결과에 자아를 덧씌우는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자신의 생각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자세, 즉 개방성과 유연함&lt;/u&gt; 또한 화학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자가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경쟁적인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달성된 연구 성과일수록 그 결과에 자신의 고정된 아상을 투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가 더 쉬워진다. 이를 극복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이라는 짐을 많이 진 학자일수록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를 행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학계 전체의 큰 진보로 이어질 수 있다. 올레핀 복분해(olefin metathesis)의 메커니즘 규명 과정에서 미국의 화학자인 로버트 그럽스(Robert Grubbs)가 보인 태도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산업적으로 중요한 화학반응인 올레핀 복분해는 1950년대 후반부터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용되었으나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 석유연구소의 이브 쇼뱅(Yves Chauvin)은 프랑스 국내 학술지에 그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옳게 규명된 결과였지만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읽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미국에서 해당 반응의 연구를 선도하던 저명한 화학자였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의 그럽스 교수는 나중에 쇼뱅의 논문을 접하고 곧바로 자신이 제안한 메커니즘을 파기하고 쇼뱅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쇼뱅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럽스 교수와 MIT의 리처드 슈락(Richard Schrock) 교수는 고성능의 올레핀 복분해 촉매를 설계 및 합성할 수 있었고 쇼뱅, 그럽스, 슈락 모두 2005년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숫따니빠따》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집착의 매듭을 풀고 흘려보내야 함을 경 전체에 걸쳐 여러 번 강조한다. 앗타까 왁가의 네 번째 경은 &amp;lsquo;청정의 8게송(Suddhaṭṭhaka Sutta)&amp;rsquo;이다. 스스로의 청정함과 정당함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집착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청정함에 집착하고 추구하거나 심지어 &lt;u&gt;자부하면서 다른 이들을&lt;/u&gt; 청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미혹에 빠지는 첩경임을 경고한다. 다음은 청정의 경의 7번째 구절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그들은 무언가를 꾸며내거나 받들지도 않고, 최상의 청정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착의 단단한 매듭을 풀어버리고 세상의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처럼 세상의 모습을 연구하는 학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내 것은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며 연구 결과에 아상을 씌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전술한 그럽스 교수의 사례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학계 전체에 순기능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을 연구하는 자가 자신의 삶과 임무를 건전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인류를 이롭게 하는 성과를 지속 가능하게 창출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의 가장 오래된 제4장을 바탕으로 논의하였다. 소위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며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을 하는 화학자에게도 《숫따니빠따》를 통해 전해지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은 학문의 목적과 학자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바들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특히 화학자는 학문적 특성으로 인하여 환경적 압력과 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더욱이 많은 화학자들이 스스로 상당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평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 비하여 욕망이나 아상, 그로 인한 미혹에 더욱 빠지기 쉽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건전한 학문의 발전과 지속 가능한 성과의 달성을 위하여 화학자들은 연구 현장에서 스스로를 더욱 잘 관찰하고, 자신과 학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릇된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나의 생각과 이론이라 여겨지는 것도 나의 오로지함이 아님을 아는 것이 권장된다. 그를 통하여 세상의 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나아가 세상을 해석하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수행으로서의 화학, 그리고 불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dquo;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조용히 앉아서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amp;rdquo; 조계종 제8대 종정에 오르신 서암 스님이 후일 정토회를 일으킨 젊은 시절의 법륜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집착을 내려놓고 세상의 모습을 바로 보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 원리를 지극히 간결하게 설법한 것으로, 대중에 널리 회자되는 명언으로 전해져 온다. 승려와 사찰이 외형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듯, 수행 또한 정해진 형(形)이 있는 것이 아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응용하자면 &amp;ldquo;그 마음을 청정히 하고자 행하는 모든 것이 수행&amp;rdquo;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수행은 탐진치를 끊어내고 일상에서 오는 괴로움과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여 참된 진리를 얻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행하는 것이다. 참선이나 고성염불(高聲念佛) 정근 등 불교에서 널리 행해지는 다양한 수행의 방식이 있지만, 수행의 목적만 옳다면 반드시 그런 모습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사찰에 들어가서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충분히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이를 흔히 &amp;lsquo;생활 속의 수행&amp;rsquo; 또는 &amp;lsquo;&lt;u&gt;수행으로서의 생활&lt;/u&gt;&amp;rsquo;이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이 기존에 널리 활용되어 온 수행의 형태인 참선이나 정근에 비하여 효과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lt;u&gt;길거리에서 걸어 다니며 독서하는 것이 조용한 방의 책상에 앉아서 독서하는 것에 비해 더 효과적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방법과 방향만 바람직하다면 일상을 살아가며 모든 순간을 수행으로 활용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다는 것이며, 긴 시간을 내기 어려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현실적으로 더 적합할 수 있다.&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 분야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화학자로서 삶과 일을 수행으로 삼을 수 있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정리하고, 원하는 특정된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성패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태도를 갖고자 발원하는 것이 수행의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연구 과정에서 올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적합한 연구 방향 제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 즉 수행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잘 체계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오래된 가르침에 속하는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여덟 가지 길을 따름으로써 탐진치를 끊고 괴로움과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져 맑고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본 절에서는 &amp;lsquo;수행으로서의 화학&amp;rsquo;을 화학의 학문적 특성을 반영하여 팔정도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화학자가 삶과 일의 모든 맥락에서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팔정도의 첫 번째 길은 정견(正見)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것은 어떠한 도덕에 근거한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편견이나 고정된 관점에 근거하지 않고 &amp;lsquo;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amp;rsquo;을 말한다. 화학자 개개인이 자신의 가설에 집착하지 않고, 실험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편견 없이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어떻게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앞 절에서 앗타까 왁가의 동굴 8게송과 청정 8게송을 논하며 다루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논의는 생략한다. 두 번째 길은 정사유(正思惟)로, 올바른 생각과 의도를 갖는 것이다. 화학 연구는 인류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연구의 목적을 건전히 설정하고, 윤리적 기준을 견지하면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경쟁심, 출세욕, 과시욕 등 다양한 욕망의 원인을 알고 그에 끌려가는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팔정도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길인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연구자－수행자의 계율과 윤리적 기준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한다. 정어는 바른말을 의미하며, 진실하고 유익한 말로 동료들과 소통하여 신뢰를 확보하고 논문을 보고할 때도 정직하게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정업은 바른 행동을 의미하며, 환경안전 및 연구 윤리의 엄격한 준수를 통하여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연구 활동을 궁극적으로 돕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명은 바른 생활방식을 말하며, 특정 주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탐닉을 지양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피하여 종합적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팔정도의 마지막 세 길은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연구자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정정진은 올바른 노력을 지속하여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정념은 마음을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여 매 순간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깊은 집중 상태를 유지해서 연구에 대한 몰입도와 완성도를 향상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실험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서, 화학자는 실험을 수행하면서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들, 실험 결과에 대한 욕망들, 그리고 결과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이는 생각 등을 집중하여 놓치지 않고 &amp;lsquo;볼&amp;rsquo; 수 있다. 이와 같이 &amp;lsquo;보는 것&amp;rsquo;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욕심에서 비롯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원인을 찾아 분석할 수 있다. 또한, 그로부터 유래될 수 있는 괴로움을 사전에 관리하고 더 깊은 통찰을 얻는 발판을 확보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상과 같이 &amp;lsquo;수행으로서의 화학&amp;rsquo;을 팔정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행자와 연구자 양면에서 본질에 가까운 수행 방향이 도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amp;lsquo;일반적인 연구&amp;rsquo;와 &amp;lsquo;수행으로서의 연구&amp;rsquo;가 차이가 있다면, 수행으로서 연구는 모든 순간에 깨어서 보고, 가치판단이나 편견 없이 보고, 모든 관찰에 대한 마음의 일어남을 보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지막으로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도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홀로 수행하는 것은 자기 생각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크다. 효과적인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주는 동료 연구자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비판적으로 토의하는 활동이 필수적이다. 모든 연구자가 수행을 연구 활동에 잘 녹아들게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할 수 있다면 연구 내 &amp;middot; 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여 지속 가능하고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마치며&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학은 자연과학 분야의 &amp;lsquo;중심 학문&amp;rsquo;으로서 그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불교와 화학을 세계관과 원자론, 화학자의 삶과 일, 수행으로서의 화학, 이렇게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먼저 화학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당대의 바이셰시카 학파의 세계관을 함께 소개하며 논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관점에서는 화학과 화학자가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불교가 화학자의 삶과 일을 개선함으로써 화학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화학 연구의 수행적 측면을 팔정도의 관점에서 논의하여 현실적인 수행 방안을 간략히 제시하였다. 필자는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해 화학 연구와 불교 수행이 상호 호혜적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연구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연구 성과를 이루길 희망한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강종헌 jonghunkang@snu.ac.kr&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 화학공학 공학박사.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 지도교수&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불교와 천문학 / 강승환&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i&gt;&lt;span&gt;기자명&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강승환&lt;span&gt;&amp;nbsp;&lt;/span&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입력 2024.09.06 21:06&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수정 2024.11.11 22:21&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 0&lt;/li&gt;
&lt;/ul&gt;
&lt;span&gt;&amp;nbsp;&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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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lt;/h4&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9&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bP6lmT/btsKML3Tn1r/ePKINyWKWviZmEFFrLG6n0/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bP6lmT/btsKML3Tn1r/ePKINyWKWviZmEFFrLG6n0/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P6lmT/btsKML3Tn1r/ePKINyWKWviZmEFFrLG6n0/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P6lmT%2FbtsKML3Tn1r%2FePKINyWKWviZmEFFrLG6n0%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59&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359&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사겁(四劫)&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화엄경》의 4겁&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엄경》은 성주괴공&lt;u&gt;(成住壞空&lt;/u&gt;)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생로병사(&lt;u&gt;生老病死&lt;/u&gt;)로 나고 죽음을 반복하듯이 우주도 성주괴공으로 나고 죽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우주가 처음 생겨나서는(成) 머물다가(住) 무너져서는(壞) 결국 비게 된다는(空) 것이다. 머문다는 것은 현 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곧 성주괴공은 우주의 생성과 유지와 소멸을 설명하는 이론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성주괴공의 온전한 말은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이다. 성주괴공에 겁을 합친 말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겁(劫)을 계산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오랜 기간이라고만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쨌든 이 성주괴공 넷을 합쳐 4겁이라 한다. 그러나 순서를 바르게 하자면 공을 앞세워 공성주괴(空成住壞)라 하는 것이 좋다. 처음 비었는데(空) 무엇인가 생겨나서는(成) 어느 정도 머물다가(住) 결국 무너진다는(壞) 뜻이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무너진 뒤에는 어떻게 될까? 그대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다시 비워진다. 그리고 다시 생겨나, 머물다가, 무너져서는, 다시 비워진다. 이와 같은 과정을 무한히 반복한다. 일종의 우주 순환론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대붕괴&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본 것처럼 한번 생겨난 우주는 그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소멸한다. 종교적 견해는 대체로 우주의 소멸론이 우세하다. 종말론, 말세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의 소멸에 대한 과학적 견해는 분명치 않다. 우주 생성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하면서도 우주 소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이는 우주 소멸이 별로 유쾌한 주제가 못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현대 과학도 은연중 우주의 소멸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붕괴(大崩壞) 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대파괴(大破壞), 대함몰(大陷沒)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lt;u&gt;빅 크런치(big crunch)&lt;/u&gt;이다. 우주가 언젠가는 모두 붕괴되어 소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에 소멸에 대해서는 불교나 과학이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사륜(四輪)&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상&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우주는 성주괴공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느 시기일까? 마지막 순환기라 추정하고 이 순환기만을 살펴보기로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석가모니가 우주를 마음으로 관조해 보니 지금의 우주 모습은 연꽃처럼 둥글었다. 또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의 상태였다. 이를 빈 모습 즉 공상(空相)이라 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다가 무엇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있었다. 이를 바람의 모습, 풍상(風相)이라 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다음에는 바람이 더 발전하여 다소 구체적인 물질이 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인지 확고하지는 않았다. 이를 물의 모습, 수상(水相)이라 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물의 모습이 더욱 발전하여 결국은 굳고 단단한 모습이 되었는데 이를 쇠 모습 즉 금상(金相)이라 했다. 현재 우리 우주의 모습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우리 우주의 전체적 모습은 연꽃이나, 처음에는 텅 빈 것과 같았고, 다음에는 바람과 같았으며, 그다음에는 물과 같았고, 마지막에는 쇠와 같았다. 처음 빈 것에서 무엇이 생겨나 점점 구체화하여서는 결국 굳어지는 점진적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이 4단계 사이에도 무수한 단계가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위에 말한 빈 것, 바람, 물, 쇠의 4가지 모습이다. 이를 4상(四相)이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말하는 바람, 물, 쇠 등은 꼭 바람, 물, 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의 생존 당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이런 것들뿐이어서 이런 말을 들어서 비유로 삼은 것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바람은 무엇인가 있어서 느낄 수는 있지만 잡거나 만질 수는 없는 것이고, 물은 다소 구체화되었지만 확고하지 않은 것이며, 쇠는 확고히 굳어진 것 등 말이다. 만약 현대적 용어를 알았더라면 좀 더 정확히 표현을 썼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마지막 쇠의 모습 금상(金相)에서 큰 연꽃이 피어나며 큰 바다가 생겨난다. 이 바다 위에 수미산이 솟아 있고 주변에 사대주(四大洲)가 있어 중생들이 사는 땅이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륜과 인다라망&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처음 석가모니께서 우주의 변천 과정 곧 4상을 설명하자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연꽃같이 둥근 우주를 늘어놓거나 한 줄로 세워서는 그 변천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범망경》에서 수레바퀴와 그물망을 들어서 비유로 설명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꽃같이 둥근 우주를 양옆에서 손바닥으로 힘을 주어 힘껏 눌렀다. 그랬더니 수레바퀴처럼 납작하게 되었다. 이 납작한 모습을 쌓아 놓으니 그 변천 과정이 잘 나타났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맨 아래는 빈 바퀴인데 빈 모습을 뜻하고, 그 위는 바람 바퀴인데 바람 모습을 뜻하며, 그 위는 물 바퀴인데 물의 모습을 뜻하고, 맨 위는 쇠 바퀴인데 쇠의 모습을 뜻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lt;u&gt;공륜(空輪) 풍륜(風輪) 수륜(水輪) 금륜(金輪)&lt;/u&gt;이라 하며, 통틀어 4륜(四輪)이라 한다. 이때 바퀴는 말할 것도 없이 우주를 뜻한다. 물론 이들 사이에 무수한 단계가 있지만 그중 4가지를 대표로 든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번에는 이 바퀴를 더 납작하게 눌렀다. 그랬더니 그물망같이 얇게 되었다. 이 얇은 그물망을 겹겹이 쌓아 놓으니 수없이 많은 변천 과정이 잘 표현되었다. 이를 중중루망(重重累網) 곧 겹겹이 겹친 그물망이라 한다. 이때 그물망은 우주를 뜻하고 그물 매듭은 은하를 뜻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중중루망에서 그물망 하나는 제망찰해(帝網刹海) 또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 한다. 흔히 제석천에 드리워진 그물망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렇지 않다. 제석천을 포함한 모든 하늘을 그물에 비유했다. 곧 우주를 비유했다. 제석천은 그 일부일 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평행우주와 중첩우주&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에 평행우주(平行宇宙, parallel universe)라는 말이 있다. 우주가 평행하며 평평하다는 말인데 이는 위에 말한 4륜이나 중중루망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가 공륜 풍륜 수륜 금륜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포개 놓았을 때 이를 옆에서 보면 평행하게 보이기 때문이고, 그물망을 겹겹이 쌓아 놓았을 때 이를 옆에서 보면 평행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곧 평행우주는 우주의 변천 과정을 통틀어 나타내는 개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현대 과학에 중첩우주(重疊宇宙) 중복우주(重複宇宙) 다중우주(多重宇宙) 다차원우주(多次元宇宙) 등의 말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말로는 겹쳐 있는 우주, 합쳐진 우주, 포개진 우주, 다져진 우주, 숨겨진 우주, 말려진 우주, 구겨진 우주, 뒤틀린 우주, 숨겨진 차원, 여분의 차원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모두 비슷한 뜻으로 겹쳐진 우주의 모습을 뜻한다. 이것도 위에 말한 4륜이나 중중루망의 뜻으로 평행우주와 같은 뜻이라 생각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연화와 연화장&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연화&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의 모습이나 변천 과정을 관조하거나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우주를 마음의 눈 심안(心眼)으로 봐야 한다. 곧 우주를 빛과 보석처럼 밝고 투명하게 꿰뚫어 봐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래서 불교에서는 명(明), 광명(光明), 대광명(大光明) 등 갖가지 빛과 금강, 영락, 수정, 유리, 마노, 파리 등 갖가지 보석이 등장한다. 《화엄경》이 특히 그러하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그 모습은 어떨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연꽃이다. 곧 현재 우주의 모습은 연꽃처럼 둥근 모습이다. 이를 연화세계(蓮華世界)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주의 모습도 실제로 우주의 전체적 모습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모습만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않다. 단지 어느 것으로 보든 그 모습은 같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은 우주의 전체적 모습에 대한 견해가 없다. 육안으로 보는 당연한 결과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연화장과 중중루망&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화세계는 다 형성된 우주 곧 현재 우주, 육안의 우주, 겉모습 우주라 할 수 있다. 4상의 마지막 단계인 금상(金相)의 모습, 4륜의 마지막 단계인 금륜(金輪)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그 앞의 형성 과정이나 변천 과정은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위에 말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우주의 형성 과정과 변천 과정 전부를 봤다. 갖가지 빛과 보석으로 관조해서 말이다. 만약 석가모니처럼 우주의 생성과 소멸 등 성주괴공 전 과정을 꿰뚫어 보면 그 모습은 어떨까?&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꽃이 중첩된 모습, 연꽃이 겹쳐진 모습이 될 것이다. 우주가 처음 옅은 것에서, 다음은 다소 짙은 것으로, 끝에는 아주 짙은 것으로 변천되었다면, 연꽃의 모습도 처음 옅은 연꽃에서, 다음은 다소 짙은 연꽃으로, 종국에는 아주 짙은 연꽃으로 변천될 것이다. 만약 보석처럼 본다면 옅은 보석에서, 다소 짙은 보석으로, 아주 짙은 보석으로 변천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이 겹겹이 변천된 모습을 마지막 단계에서 거꾸로 바라보면 그 모습은 어떨까? 매우 장엄하고 찬란할 것이다. 옅은 보석의 연꽃에서, 다소 짙은 보석의 연꽃으로, 끝에는 아주 짙은 보석의 연꽃까지 겹겹이 겹쳐서 찬란히 빛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의 형성 과정이 차곡차곡 겹쳐 보인다고 해도 되고 공륜, 풍륜, 수륜, 금륜이 차곡차곡 겹쳐 보인다고 해도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화장세계(華藏世界) 연화장세계(蓮華藏世界)라 한다. 화려한 연꽃이 숨겨진 세계라는 뜻이다. &lt;u&gt;&amp;lsquo;숨을 장(藏)&amp;rsquo;을 쓴 것&lt;/u&gt;은 앞의 과정이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앞서 말한 중첩우주, 중복우주, 다중우주와 같은 뜻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어디에 겹쳐지고 숨겨졌을까? 말할 것도 없이 현재 우주에 겹쳐지고 숨겨졌다. 육안의 우주, 겉모습 우주에 겹쳐지고 숨겨졌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실은 이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 숨겨진 우주 곧 연화장(蓮華藏)은 보지 못하고, 육안의 우주 곧 연화(蓮華, 蓮花)만 본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쨌든 여기서는 연화와 연화장을 구분한다. 연화라 했을 때는 현재 우주, 육안의 우주, 겉모습 우주를 뜻하고, 연화장이라 했을 때는 그 변천 과정 전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앞서 그물망을 겹겹이 쌓으면 우주의 변천 과정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중중루망(重重累網)이라 해서 그물망은 하늘을 뜻하고 그물 매듭은 은하를 뜻한다고 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것도 연화와 연화장처럼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얇은 그물망을 죽 걸어 놓는다. 그러면 처음은 옅은 보석의 그물망이 되고, 다음은 다소 짙은 보석의 그물망이 되며, 끝에는 아주 짙은 보석의 그물망이 된다. 이들이 순차적으로 늘어서서 찬란하게 빛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를 앞에서 바라보면 그 찬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중중루망 곧 겹겹이 겹친 그물망이란 뜻으로 우주의 변천 과정을 통관한 견해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때 그물망 하나 특히 마지막 그물망 하나를 인다라망이라 한다. 곧 중중루망은 연화장의 개념이고, 인다라망은 연화의 개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squo;염화미소(拈華微笑)&amp;rsquo; &amp;lsquo;염화시중(拈華示衆)&amp;rsquo;이란 말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모두 가만히 있었는데 가섭(迦葉)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염화미소 염화시중이 바로 연화장세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연화장세계&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세계해&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연화 곧 현재 우주, 육안의 우주, 겉모습의 우주만을 보기로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엄경》 〈여래현상품〉에는 세계해(世界海)라는 생소한 말이 나온다. 우리말로는 세계 바다인데, 이 우주에는 수없이 많은 세계해가 있다고 하면서 그중 11개를 예로 들고 있다. 예를 들면 가운데에는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가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에는 또 무슨 무슨 세계해가 있다는 식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우주 전체를 세계해라 했는데 이를 나눈 부분도 세계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수없이 나뉜 세계해가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해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연꽃이란 뜻으로 해석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나눠진 세계해에는 각각 국토 부처가 있다. 예를 들면 가운데 있는 화장장엄세계해에는 연화장이라는 국토가 있고, 비로자나불이라는 부처가 있다는 식이다. 이 화장장엄세계해가 연꽃이 숨겨진 장엄한 세계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른바 연화장세계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성취품〉은 세계해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수없이 많은 세계해의 모습이 있다고 하면서 그중 &lt;u&gt;둥근 모습(圓) 모난 모습(方)&lt;/u&gt; 등 11개를 예로 들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세계해 모습 11가지: 둥근 모습(圓), 모난 모습(方),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은 모습(非圓方), 차별이 한량없는 모습(無量差別), 물이 도는 모습(水旋形), 산의 불꽃 모습(山焰形), 나무 모습(樹形), 꽃 모습(華形), 궁전 모습(宮殿形), 중생 모습(衆生形), 부처님 모습(佛形).&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위에 말한 11개 세계해의 모습이 각각 어떤 모습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느 세계해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가운데 있는 화장장엄세계해 곧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연화장세계의 모습은 알 수 있다. 위에 말한 것처럼 연꽃(연화)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장세계품〉은 이 화장장엄세계해에 대해서만 상세히 설명하고, 다른 세계해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도 화장장엄세계해만을 본다.&amp;nbsp;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화장장엄세계해&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장세계품〉에 의하면 우리의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는 향수해(香水海) 향수하(香水河) 세계종(世界種) 세계(世界)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생소한 말인데 향수 바다, 향수 하천, 세계 씨, 세계로 풀이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장장엄세계해 전체를 향수해라 하는데 이를 나눈 부분도 향수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강이나 하천같이 생긴 모습을 특히 향수하 곧 향수 하천이라 한다. 또 향수해 안에 있는 은하를 세계종이라 하며, 세계종 안에 있는 별을 세계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향수해와 향수하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없다. 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화장장엄세계해가 연꽃 모양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세계종에 대한 설명은 있으며 그 모습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종의 모습이 수없이 많다고 하면서 그중 수미산 모습, 강 모습 등 20가지를 예로 들고 있다. 세계종을 은하로 보면 은하의 모습이 20개가 되는 셈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종 모습 20가지: 수미산 모습, 강 모습, 회전하는 모습, 소용돌이치는 모습, 수레바퀴 모습, 전단 향나무 모습, 나무 수풀 모습, 높은 다락집 모습, 산당 모습, 넓게 모난 모습, 태아 모습, 연꽃 모습, 대나무 소쿠리 모습, 중생 모습, 구름 모습, 부처님 모습, 가득 찬 밝은 빛의 모습, 갖가지 구슬 그물 모습, 여러 문(門) 모습, 장엄구 모습.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각각의 세계종에는 각각 수많은 세계와 부처가 있다. 이른바 백천억화신(百千億化身)의 개념이다. 그러면서 세계의 모습도 이야기한다. 역시 수없이 많다고 하면서 그중 회전하는 모습, 강이나 하천 모습 등 18가지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모습은 대체로 위에 말한 세계종과 비슷하다. 만약 세계를 별들로 본다면 그 모습이 18개가 되는 셈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 모습 18가지: 회전하는 모습, 강이나 하천 모습, 소용돌이 모습, 수레바퀴 모습, 벽돌 모습, 나무숲 모습, 누각 모습, 시라당(보배 옥) 모습, 보만(보물의 주위에 치는 장막) 모습, 자궁 모습, 연꽃 모습, 구륵가(용의 이름) 모습, 갖가지 중생 모습, 불상 모습, 둥근 빛 모습, 구름 모습, 그물 모습, 문 모습.&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은하&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 말한 향수해, 향수하, 세계종, 세계 등의 개념을 현대 과학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재미있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 우주에 3,000억 개의 은하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에는 3,000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한다. 물론 3,000억 개라는 숫자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 숫자는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숫자가 아닌 현대 과학이 본 것과 불교가 본 것을 비교한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과학은 이 3,000억 개 은하의 전체적 분포 상태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곧 연꽃이다. 이는 이 우주에 은하들이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몰려 있음을 뜻한다. 몰려 있는 곳은 몰려 있지만, 드문 곳은 드물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그 몰려 있는 모습은 어떨까? 강이나 하천처럼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마치 연꽃의 꽃잎과 같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향수하(香水河) 곧 향수 하천이라 했다. 이 향수하들이 모이면 당연히 연꽃이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연꽃잎 하나를 살펴보자. 사실 이는 수십억 수백억 개의 은하를 보는 것이다. 이 많은 은하가 모여 연꽃잎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번에는 연꽃잎 하나를 잘라서 본다. 아주 작게 말이다. 그러면 하나의 은하를 보는 것이다. 사실 이 하나의 은하도 3,000억 개의 별들이 모인 것이다. 이 엄청난 별들이 모여 연꽃잎의 작은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따라서 비록 3,000억 개의 별이 모였다고 하지만 우주 전체로 봐서는 별것 아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숫제 작은 씨(種)라고 표현했다. 위에서 말한 세계종의 종(種)이 그것이다. 곧 씨는 3,000억 개의 별이 모인 은하이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번에는 별 하나를 본다. 그러면 이 별 하나에도 많은 위성이 있다. 마치 우리 태양에 화성, 수성, 지구, 목성, 금성, 토성 등 많은 행성이 있는 것과 같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때 별 하나 또는 태양 같은 것을 《화엄경》에서는 그냥 세계라 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연꽃을 이룬다. 어찌 보면 불교와 현대 과학의 견해가 비슷한 점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은하 모습&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세계종의 모습 20가지와 세계의 모습 18가지를 들었는데 그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고 했다. 현대 천문학도 은하의 모습을 설명한다. 막대 모습, 나선형 모습(바람개비), 수레바퀴 모습, 타원 모습, 안테나 모습, 소리굽쇠 모습 등등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지 않다. 대여섯에 불과하다. 육안으로 보는 결과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본 모습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불교가 말한 강이나 하천 모습은 현대 과학이 말한 막대 모습과 비슷하고,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은 모습(非圓方)은 타원 모습과 비슷하며,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나선형 모습(바람개비)과 비슷하고, 수레바퀴 모습은 말 그대로 수레바퀴 모습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은하 미리내(은하수)를 옆에서 보면 가운데가 볼록한 접시 모습이고, 위에서 보면 4개의 날개가 회전하는 바람개비 모습이다. 그런데 《화엄경》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4천하 티끌 수만큼의 향수하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휘감아 돈다(有四天下微塵數 香水河 右旋圍遶).&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 말하는 4천하를 4개의 날개로 보고, 오른쪽으로 휘감아 돈다는 말을 바람개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불교와 현대 과학이 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한편 현대 과학은 은하의 크기에 따라 은하,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 등의 용어를 쓰지만, 불교는 위에서 본 것처럼 세계, 세계종, 향수하, 향수해 같은 단어를 쓴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공간의 두께&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현재에 겹침&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중첩됐다, 중복됐다, 겹쳐졌다, 포개졌다 등등의 표현을 했는데 그러면 어디에 겹쳐지고 포개졌을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말할 것도 없이 현재 우주, 육안의 우주, 겉모습 우주이다. 4겁 중 주겁(住劫)이라 할 수도 있고, 4륜 중 금륜(金輪)이라 할 수도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어떻게 겹쳐지고 포개졌을까? 현재 우주에 각 단계의 형상(形狀)이 그대로 겹쳐지고 포개졌을까, 아니면 각 단계의 성질(性質)이 겹쳐지고 포개졌을까?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하다. 모르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만약 형상이 그대로 겹쳐지고 포개졌다면 현재 우주에서 초기 우주를 그대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질이 겹쳐지고 포개졌다면 초기 우주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에서는 이 둘을 모두 인정하는 것 같다. 형상이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은 석가모니처럼 수행에 따라 성주괴공을 그대로 꿰뚫어 보기 때문이고, 성질이 들어 있다는 것은 수행에 따라 점점 더 깊은 공(空)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둘이 같은 뜻일 수도 있다.&amp;nbsp;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는 사실과학이고 사실이론이다. &lt;u&gt;막연한&lt;/u&gt; 것도 아니고&lt;u&gt; 신비한&lt;/u&gt; 것도 아니며 &lt;u&gt;허황된&lt;/u&gt; 것도 아니다.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뿐이다. 단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공간의 두께&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공간의 두께(Space Dugge), 우주의 두께(Cosmos Dugge)라 했지만 적절한 표현인지 알 수가 없다. 물질의 두께(Matter Dugge), 만물의 두께라 할 수도 있다. 삼라만상 일체 만물에 두께가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영어로는 두께(thickness)가 좋지만 너비(width, breadth), 깊이(depth), 길이(length), 부피(volume) 등이 될 수도 있고, 한자로는 폭(幅)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두께를 표현할 마땅한 용어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화장세계가 연꽃들이 숨겨진 세계라면 연화장에는 연꽃들이 숨겨질 곳이 있다는 이야기이니 이는 숨겨질 두께가 있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4겁, 4륜 등 변천하는 과정이 마지막 단계에 겹쳐 있다면, 마지막 단계에는 두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겹쳐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께가 없으면 겹쳐질 곳이 없다. 나아가 4겁, 4륜 등이 존재할 곳도 없고 변천할 곳도 없다. 이를 공간의 두께, 물질의 두께라 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실 불교뿐만 아니라 이기론(理氣論)이나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 모두 두께를 전제로 하고 있다. &lt;u&gt;이(理), 기(氣), 질(質)로 변하는&lt;/u&gt; 것, 무극(無極), 태극(太極), 음양(陰陽), 오행(五行) 물질(物質)로 변하는 것 모두 적어도 마지막 단계인 물질에 두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4겁이나 4륜처럼 변천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중첩됐다, 중복됐다, 겹쳐졌다, 포개졌다 등도 모두 그럴 곳이 있다는 이야기니 이는 그럴 수 있는 두께가 있다는 뜻이다. 두께가 없으면 그럴 곳이 없기 때문이다. 더 들어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현실이 다른 외부 세계가 우리 세계에 투영되어 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정보는 현재의 순간에 모두 각인되어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하늘의 실체는 우주의 복잡한 구조를 덮고 있는 얇은 천에 불과하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막이 아주 방대한 영역에 퍼져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중력파는 시공간에 주름을 만든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시간과 공간은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주어진 조건에 따라 고무처럼 휠 수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의 이야기는 중첩우주 나아가 우주의 두께를 뜻한다. 투영, 각인, 얇은 천, 막, 주름, 휘어짐 같은 말이 특히 그러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투영되고 각인되는 것은 그럴 곳이 있다는 이야기이니 이는 그럴 두께가 있다는 이야기이고, 얇은 천은 막(膜, 브레인(brane), 멤브레인(membrane)) 이론임은 말할 것도 없다. 막이 곧 두께이다. 주름 역시 평평한 면에 굴곡을 이루는 것이니 두께를 뜻하며, 휜다는 말 역시 공간의 두께를 뜻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홀로그램, 곡률반경(曲律半徑), 스펀지 등의 말도 쓰는데 역시 두께를 뜻한다. 곧 위의 이론들은 모두 두께의 어느 특정 성질을 나타내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개념을 명확히 함&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럼에도, 모두들 두께란 개념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리고는 구멍, 터널 등 신비한 말까지 등장시킨다. 이는 두께가 잘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이나 글로써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고, 있는 곳을 현실에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을 건 오직 듣는 이의 지혜뿐이다. &lt;u&gt;미비한 설명을 듣고 스스로 이해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가령 두께가 물질의 안에 있다, 밖에 있다, 위에 있다, 아래 있다, 너머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있다 해도 정확한 표현이 못 된다. 물질의 안에 들어 있다, 내포되어 있다, 포함되어 있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이 못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두께는 실물에서 나타낼 수 없다. 부피를 가진 실물에서 이 두께를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의 견해로는 그렇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대 물리학에 끈 이론(string theory, super-string theory)이 있다. 필자는 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만약 끈의 두께를 세로로 아주 얇게 자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공간의 두께를 뜻하는 것이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질을 입자로 파악하면 두께가 표현되지 않지만, 끈으로 파악하면 두께가 잘 표현된다. 끈 자체가 두께이기 때문이다. 입자는 연화(蓮華)를 뜻하고 끈은 연화장(蓮華藏)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어쨌든 여기서는 공간의 두께, 만물의 두께라는 개념을 명확히 한다. 불교와 현대 과학은 물론 모든 종교와 문화가 만나는 중요한 길목(접점)이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6. 공색(空色)&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문화&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공간의 두께는 정신세계, 성질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승과 저승에서 저승이 형성되는 곳이고, 천당과 지옥이 있을 수 있는 곳이며, 우리 마음이 머물러 미련과 원한이 머무는 곳이고, 선업과 악업이 축적되는 곳이다. 또 사물의 성질이 거처하는 곳이고, 만유인력에서 인력이 머무는 곳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같이 두께에는 여러 성질이 한데 어우러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amp;lsquo;있다, 없다(有無)&amp;rsquo; &amp;lsquo;살았다, 죽었다(生死)&amp;rsquo; &amp;lsquo;움직인다, 고요하다(動靜)&amp;rsquo; &amp;lsquo;오고, 간다(去來)&amp;rsquo; &amp;lsquo;&lt;u&gt;물들었다&lt;/u&gt;, 깨끗하다(染淨)&amp;rsquo; 등 서로 상반되는 두 상황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고,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amp;lsquo;양극 음극&amp;rsquo; &amp;lsquo;양자 전자&amp;rsquo; &amp;lsquo;물질 반물질&amp;rsquo; 등 서로 상반되는 두 상황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런 성질의 두께를 나름대로 설명한 것이 위에서 말했듯이 각종의 문화, 종교, 철학, 과학이 된다. 이 중 조금 더 체계적이고 뛰어나게 설명한 것이 각종의 뛰어난 문화와 종교, 철학, 과학이 되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곧 불교는 석가모니가 이 두께를 공색, 3계 10계 등으로 나눠서 설명한 것이고, 이기론은 성리학자들이 이 두께를 이기질, 음양 5행 등으로 나눠서 설명한 것이며, 유일신은 신학자들이 이 두께를 신과 인간 등으로 나눠서 설명한 것이다. 현대 과학도 마찬가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은 모두 두께의 무한한 성질 중 어느 일부를 설명하는 데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설명은 못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지금의 종교나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하고 인류를 구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이 외에도 새로운 설명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반증이 된다. 인류를 구제할 참신한 설명법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공의 뜻&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공색(空色)은 공간의 두께를 크게 이등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과 물질, 본질과 현상의 뜻도 된다. 참과 거짓, 진실과 허망이라 해도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눈 것이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불교 이론이 그렇든 공색도 방편이다. 이제 공과 색을 나눠서 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색은 항상 한계에 도달한다. 움직이고 변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변하는 것에는 불변의 진리가 없다. 이른바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항상함이 없다. 결국 허망하다. 따라서 불교는 색으로 나아가지 않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공은 이해하기 쉬운가? 만만찮다. 우선 공은 어떤 형상이나 모습이 있는가? 아니다. 어떤 현상(現狀)이나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곧 한결같고 균일하며 평등하고 변함없는 그런 상태이다. 어떤 &lt;u&gt;기복(起伏&lt;/u&gt;)도 없다. 이런 공은 물질로 다뤄질 수 없다. 공은 색깔이 있는가? 있다면 무슨 색깔인가? 잘 모른다. 공의 모습을 모르니 색깔도 알기 어렵다. 어떤 이는 희다(白) 밝다(光) 검다(黑)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필자의 수준을 뛰어넘으므로 논외로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불교의 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공(眞空) 곧 우주의 진공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는 다른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주의 진공은 진공이라는 물질이다. 원래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어야 할 물질이 몰려서 별이 된 후 남은 것이 진공이다. 따라서 진공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진공이라는 그 어떤 물질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위에서 우주는 성주괴공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했는데 이때의 공들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잘 알 수가 없다. 단지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切同) 곧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여래는 모두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 성주괴공의 공과 불교에서 수행을 통해 들어가는 공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것도 확언할 수가 없다. 모두 실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주괴공의 공도 아직까지 객관적으로 실증하지 못했고, 수행해서 들어가는 공도 적어도 필자는 실증하지 못했다. 따라서 뭐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먼저 성주괴공의 공을 무엇인가 있는 공 또는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진짜 진공(true vacuum)으로 보고, 수행도 초기 단계로 본다. 그렇다면 이는 같을 수도 있다. 이때는 불교의 공과 현대 과학의 공이 같다. 이는 곧 불교와 과학이 서로 통하며 불교의 공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니 연구실에서 어느 정도의 깨침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초보 단계일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성주괴공의 공을 아무것도 없는 공 또는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가짜 진공(false vacuum)으로 보고, 수행도 깊은 단계로 보자. 그러면 이는 과학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 실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수행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맑은 마음으로만 가능하지 생각과 사고로는 이르지 못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는 이 2가지 개념을 모두 아우르는 것 같다. 곧&lt;u&gt; 불교의 공은 무언인가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공의 유형&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무엇인가 있는 공은 무엇인가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우리는 이 공을 중시한다. 이 공을 거쳐야 없는 공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점이 된다. &lt;u&gt;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lt;/u&gt; 이렇게 말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빈 것(공)에는 &amp;hellip;&amp;hellip;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진리가 가득 채워져 있다(不空者&amp;hellip;&amp;hellip;常恒不變 淨法滿足).&lt;/span&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곧 공은 비지 않았고 어떤 맑은 진리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맑은 진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물론 물질적 개념이 아닌 정신적 개념일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현대 과학에도 이런 견해가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텅 빈 공간이라 해도 거기에는 영혼이 존재한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우리가 사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함께 영적인 물질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와 같은 말들은 공(空)이 말 그대로 텅 빈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다는 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무것도 없는 공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일체의 움직임과 사유를 뛰어넘는다. 움직임과 사유가 없으니 시간과 공간도 없다. 이런 개념도 없다. 이런 것이 없으니 그 이후 아무것도 없다. 적멸(寂滅), 적정(寂靜), 고요 그런 상태다. 삼천대천세계가 무너진다. 부처의 삼매나 열반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quot;&gt;&lt;b&gt;인법유무제등(人法有無齊等)&lt;/b&gt;&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공과 현실, 진실과 허망 사이에서. 일찍이 원효대사는 《이장의(二障義)》에서 이렇게 말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사람과 우주의 있고 없음이 &lt;u&gt;가지런히 같다&lt;/u&gt;(人法有無&lt;u&gt;齊等).&lt;/u&gt;&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법유무제등. 이 말은 원효대사 《이장의》의 총결 구절이다. 있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이 있다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이 없다는 것이다. 있다는 것은 허깨비라도 있다는 뜻이고, 없다는 것은 그것도 빈 것이란 뜻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성주괴공 중 성주괴(成住壞)가 &amp;lsquo;있다&amp;rsquo;에 속하고, 공(空)이 &amp;lsquo;없다&amp;rsquo;에 속할 수도 있고,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이 &amp;lsquo;있다&amp;rsquo;에 속하고, 죽은 뒤가 &amp;lsquo;없다&amp;rsquo;에 속할 수도 있으며, 깨치지 못해서 육도를 헤매는 것이 &amp;lsquo;있다&amp;rsquo;에 속하고, 깨쳐서 공에 이른 것이 &amp;lsquo;없다&amp;rsquo;에 속할 수도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결국 환상이고 헛것이다. 결국은 무너지고 부서지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바탕 &lt;u&gt;꿈이고 연극이다. 결국은 죽고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지금 현실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lt;/u&gt; 이 세상과 나 자신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이 둘을 아우를 필요가 있다. 이것이 &amp;lsquo;있고 없음이 가지런히 같다&amp;rsquo;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같다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에 거리낌 없는 행동이 나온다. 도무지 거리낄 것이 없다. 집착할 것도 없고 미련 둘 것도 없다. &lt;u&gt;일체가 무대이고 나는 배우인데 무엇을 거리끼는가?&lt;/u&gt; 배우가 무대에서 어찌 노래하고 춤추지 않겠는가? 이에 노래하고 춤춘다, 곧 무애가(无㝵歌), 무애무(无㝵舞)다. 거리낌 없는 노래, 거리낌 없는 춤이다. 통틀어 무애행(无㝵行)이라 한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위대한 철학가 신라 원효대사가 한바탕 살다 간 모습이다. 생사를 뛰어넘는 자유를 대자유(大自由), 무애(无㝵)라 한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강승환 kp8046@naver.com&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졸업. 생업에 종사하다가 40세가 넘어 원효대사를 비롯, 우리 문화 연구에 매진하였고 틈틈이 관련 저서를 펴냈다. 소설 《땅따먹기》 《이야기 원효사상》 《우리도 잊어버린 우리문화 이야기》 《불교에서 본 우주》 《죽음이란 무엇인가?》 《한 권으로 만나는 원효전서》 《원효의 눈으로 바라본 반야심경》 등의 저서가 있다&lt;/p&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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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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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2002daebak.tistory.com/745#entry745comment</comments>
      <pubDate>Sat, 16 Nov 2024 09:58:3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대승은 끝났다 /시현 스님</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25932277246&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금강경의 권위에 맞선 치열한 비판 의식 - 불교언론 법보신문&quot; data-og-description=&quot;남들이 칭찬할 때 덩달아 칭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들이 돌 던질 때 함께 던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들이 칭찬하는 일을 전면 비판하거나 남들이 비난할 때 막아서는 일은 웬만한 &quot; data-og-host=&quot;www.beopbo.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quot; data-og-url=&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bFI814/hyW2QZehgm/nQdAVK7pMR6pIMPPSpbyN1/img.jpg?width=180&amp;amp;height=267&amp;amp;face=0_0_180_267&quot;&gt;&lt;a href=&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quot;&gt;
&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https://scrap.kakaocdn.net/dn/bFI814/hyW2QZehgm/nQdAVK7pMR6pIMPPSpbyN1/img.jpg?width=180&amp;amp;height=267&amp;amp;face=0_0_180_267');&quot;&gt;&amp;nbsp;&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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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금강경의 권위에 맞선 치열한 비판 의식 - 불교언론 법보신문&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남들이 칭찬할 때 덩달아 칭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들이 돌 던질 때 함께 던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들이 칭찬하는 일을 전면 비판하거나 남들이 비난할 때 막아서는 일은 웬만한&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eopbo.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
&lt;h3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3&quot;&gt;금강경의 권위에 맞선 치열한 비판 의식&lt;/h3&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span&gt;기자명&lt;/span&gt;&lt;span&gt;&amp;nbsp;&lt;/span&gt;&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amp;amp;sc_area=I&amp;amp;sc_word=mitra33&quot;&gt;이재형 대표&lt;/a&gt;&lt;/div&gt;
&lt;span&gt;&amp;nbsp;&lt;/span&gt;
&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i&gt;&lt;span&gt;본문 글씨 키우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본문 글씨 줄이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바로가기&lt;/span&gt;&lt;/i&gt;&lt;span&gt;&amp;nbsp;&lt;/span&gt;&lt;i&gt;&lt;span&gt;기사저장&lt;/span&gt;&lt;/i&gt;&lt;/div&gt;
&lt;/div&gt;
&lt;ul style=&quot;list-style-type: disc; color: #1e1e1e;&quot; data-ke-list-type=&quot;disc&quot;&gt;
&lt;li style=&quot;color: #000000;&quot;&gt;&lt;a style=&quot;color: #000000;&quot; href=&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amp;amp;sc_sub_section_code=S2N10&quot;&gt;불서&lt;/a&gt;&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입력 2024.02.16 21:03&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수정 2024.02.21 16:00&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호수 1717&lt;/li&gt;
&lt;li style=&quot;color: #707070;&quot;&gt;&lt;span&gt;&amp;nbsp;&lt;/span&gt;댓글&lt;span&gt;&amp;nbsp;&lt;/span&gt;&lt;a style=&quot;color: #707070;&quot; href=&quo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792#reply&quot;&gt;1&lt;/a&gt;&lt;/li&gt;
&lt;/ul&gt;
&lt;/div&gt;
&lt;div id=&quot;snsAnchor&quot;&gt;
&lt;h4 style=&quot;color: #000000;&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비움과 금강경&lt;br /&gt;시현 스님 역주 / 사유수 / 266쪽 / 2만원&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남들이 칭찬할 때 덩달아 칭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들이 돌 던질 때 함께 던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들이 칭찬하는 일을 전면 비판하거나 남들이 비난할 때 막아서는 일은 웬만한 용기가 아니면 어렵다. 하물며 오랜 세월 받들어 온 경전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squo;불교 사상사는 개념 왜곡의 역사였다&amp;rsquo;는 저자는 대승불교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독송 되는 &amp;lsquo;금강경&amp;rsquo;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비판 수준과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에 대한 분석과 언어학, 해석학, 논리학까지 적극 활용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저자 시현 스님은 &amp;lsquo;대승은 끝났다&amp;rsquo; &amp;lsquo;비구 급선무&amp;rsquo; 등 저술로 대승불교를 통렬히 비판해 왔다. 대승이 근본불교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그 사상은 근본불교와 일치하는지, 수행 방법과 결과물은 근본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간화선 수행 내용과 깨달음은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법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 등 독한 질문을 던져왔다.&lt;/p&gt;
&lt;div id=&quot;AD170831572565&quot;&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div&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번 비판은 &amp;lsquo;금강경&amp;rsquo;과 대승의 공사상을 향하고 있다. 저자가 밝히듯 처음부터 &amp;lsquo;금강경&amp;rsquo;에 비판 의식을 가졌던 건 아니다. 1997년 출가 초기 &amp;lsquo;금강경&amp;rsquo;에 심취했고, 매일 &amp;lsquo;금강경&amp;rsquo;을 21번씩 100일 동안 암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경전을 접하면서 근본 경전(니까야)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롯이 전승했음을 알았고 이를 연구해 부처님 말씀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나아가 대승 경전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담기도 하지만 심각한 변형과 왜곡을 초래했음도 간파했다고 말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저자는 이 책에서 아비담마 철학이라는 초기불교에 대해서도 대승불교만큼이나 비판한다. 예컨대 아비담마의 3대 과오로 법의 자성화, 심의식의 동일시, 명색(名色)에 대한 오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법의 자성화를 핵심적으로 다루면서 그것이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격발시켰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승의 공사상은 아비담마 철학의 다원론적 실체인 자체성질(自性)을 부정했지만 비었음(空)의 추상적인 존재 상태인 공성(空性, 빈 상태)이라는 새로운 일원론적 실체를 상정하는 모순에 빠졌다. 또 공의 존재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관념적 일원론의 실체들인 진여, 불성, 일심, 여래장 등과 동의어로 합일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승불교의 시조격인 용수에 대한 비판에도 가차 없다. 공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고 공성을 앞세워 윤회와 열반을 동일시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amp;lsquo;번뇌가 열반이다&amp;rsquo; &amp;lsquo;번뇌가 곧 보리다&amp;rsquo; &amp;lsquo;생사와 열반이 하나다&amp;rsquo; &amp;lsquo;주색잡기가 다 반야행이다&amp;rsquo; 등등 궤변을 양산하게 됐다는 것. 이렇듯 공성, 연기, 윤회, 열반의 동일시는 아비담마 철학에서 심의식의 동일시와 더불어 후대 불교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게 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또 관념적 일원론의 실체로 왜곡된 공성은 브라만교의 신성과 같은 위상을 갖게 돼 대승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불교와 유일신교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서 &amp;lsquo;진리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를 뿐&amp;rsquo;이라는 견해에 도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책의 구성은 근본 경전에서 유일하게 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맛지마니까야의 &amp;lsquo;소공경(小空經)&amp;rsquo;과 &amp;lsquo;대공경(大空經)&amp;rsquo;, 대승 경전인 &amp;lsquo;금강경&amp;rsquo;과 &amp;lsquo;반야심경&amp;rsquo;을 새롭게 해석한 번역문과 상세한 해설 부분, 그리고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amp;lsquo;끝마무리&amp;rsquo;로 이뤄졌다. 저자가 공의 다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기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본적인 개념과 번역어를 찾아내는 방법인&amp;nbsp;격의법(格義法)을 활용하는 점과 &amp;lsquo;열반&amp;rarr;꺼짐&amp;rsquo; &amp;lsquo;명색&amp;rarr;명칭과 방해물&amp;rsquo; &amp;lsquo;사티&amp;rarr;상기&amp;rsquo; &amp;lsquo;삼매&amp;rarr;고정됨&amp;rsquo; 등 기존 불교 용어 대신 각각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또 &amp;lsquo;금강경&amp;rsquo;과 &amp;lsquo;반야심경&amp;rsquo;의 새로운 번역문도 자못 흥미롭다. 특히 시종일관 전통의 무게 앞에 주눅 들지 않고 치열한 비판 의식과 진리를 향한 진지함은 숙연하게까지 한다.&lt;/p&gt;
&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180&quot; data-origin-height=&quot;267&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FVdes/btsJw4Yka5V/uzdhLHr0HE8n3XE1LzlX91/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FVdes/btsJw4Yka5V/uzdhLHr0HE8n3XE1LzlX91/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FVdes/btsJw4Yka5V/uzdhLHr0HE8n3XE1LzlX91/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FVdes%2FbtsJw4Yka5V%2FuzdhLHr0HE8n3XE1LzlX91%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7&quot; data-origin-width=&quot;180&quot; data-origin-height=&quot;267&quot;/&gt;&lt;/span&gt;&lt;/figure&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검증돼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외면과 침묵은 저자가 주장하는 대승불교의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며&amp;nbsp;불신을 확산시킬 뿐이다. 이제 대승을 연구하는 학자와 학승들이 답할 차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lt;/p&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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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2002daebak.tistory.com/744#entry744comment</comments>
      <pubDate>Tue, 10 Sep 2024 10:38:35 +0900</pubDate>
    </item>
    <item>
      <title>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 합리적인 종교, 성스러운 철학 / 권서용</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24244579137&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 합리적인 종교, 성스러운 철학 / 권서용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1. 낡은, 새로운 철학과 종교이 세상 모든 흐름에는 &amp;lsquo;낡은 것&amp;rsquo;과 &amp;lsquo;새로운 것&amp;rsquo;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cRrQf5/hyWSjH3ie5/ylwNti9d48kEVLYKKWnsZ1/img.png?width=200&amp;amp;height=200&amp;amp;face=0_0_200_200&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quot;&gt;
&lt;div class=&quot;og-image&quot; style=&quot;background-image: url('https://scrap.kakaocdn.net/dn/cRrQf5/hyWSjH3ie5/ylwNti9d48kEVLYKKWnsZ1/img.png?width=200&amp;amp;height=200&amp;amp;face=0_0_200_200');&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 합리적인 종교, 성스러운 철학 / 권서용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 낡은, 새로운 철학과 종교이 세상 모든 흐름에는 &amp;lsquo;낡은 것&amp;rsquo;과 &amp;lsquo;새로운 것&amp;rsquo;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밑줄, 강조는 내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4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 낡은, 새로운 철학과 종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세상 모든 흐름에는 &amp;lsquo;낡은 것&amp;rsquo;과 &amp;lsquo;새로운 것&amp;rsquo;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감소는 생명에로의 약동(躍動)이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죽음에로의 고사(枯死)이다. 철학과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에도 낡은, 새로운 철학이 있으며,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낡은, 새로운 종교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철학이 낡은 철학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도 새로운 종교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덥다 춥다, 밝다 어둡다, 아름답다 추하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 신과 인간, 부처와 중생과 같은 것들은 상대적 개념을 사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이 상대적 개념은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정도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니체의 언급처럼, &amp;lsquo;낡은 것&amp;rsquo;과 &amp;lsquo;새로운 것&amp;rsquo;도 언어유희에 의한 상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주관적 느낌의 정도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낡은 철학과 종교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amp;lsquo;실체적 존재&amp;rsquo;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amp;lsquo;관계적 양상&amp;rsquo;에 대한 느낌의 정도 차이를 표현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그렇다면 낡은, 새로운 철학은 무엇이며, 무엇이 낡은, 새로운 종교인가? 우선&lt;b&gt; 존재론의 측면에서&lt;/b&gt; 보면, 낡은 철학과 종교는 &amp;lsquo;실체(我, 아트만)&amp;rsquo;를 궁극적 존재로 인정하는 반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생성 중인 &amp;lsquo;과정(無我, 비실체)&amp;rsquo;을 궁극적 존재로 간주한다.&lt;/u&gt; &lt;u&gt;다음으로 &lt;b&gt;인식론의 관점&lt;/b&gt;에서 보면&lt;/u&gt;, 낡은 철학과 종교는 &amp;lsquo;인식&amp;rsquo;을 선재(先在)하는 주관에 의해 객관이 파악되어 구성된다는&lt;u&gt; &amp;lsquo;주객 인식&amp;rsquo;&lt;/u&gt;을 표방한다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객관에 의해 주관이 생성된다는 &amp;lsquo;&lt;u&gt;객주 인식&lt;/u&gt;&amp;rsquo;을 피력한다. &lt;u&gt;마지막으로&lt;b&gt; 종교론의 위상&lt;/b&gt;에서 보면&lt;/u&gt;, 낡은 철학과 종교는 &amp;lsquo;신&amp;rsquo;을 부동의 동자이자 탁월하게 실재적인 초월적 &amp;lsquo;존재&amp;rsquo;로 보는 반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amp;lsquo;신&amp;rsquo;을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여러 계기에 의해 구성되고 실현되며,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는 &amp;lsquo;생성&amp;rsquo;이라는 과정적 존재로 본다. 또한 전자는 &amp;lsquo;신&amp;rsquo;을 시간 밖의 절대적 초월자로서 해석하는 반면, 후자는 &amp;lsquo;신&amp;rsquo;을 시간 속의 사물에 내재하며 그들을 완고한 사실로부터 초월하게 하려는 초월적 내재자로 해석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7세기의 인도불교 인식논리학을 완성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도불교 철학을 집대성한 다르마키르티(600~660)와 20세기 유기체 철학을 완성한, 진정한 의미에서 서구의 극단적인 철학적 입장을 화쟁(和諍)하고 회통(會通)한 화이트헤드(1861~1947)는 새로운 종교와 철학을 추구한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실체(아트만, 我)존재가 아니라 과정(無我)존재를 근거로 새로운 존재론, 주객 인식이 아니라 객주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인식론, 탁월하게 실재적이고 전지전능한 초월적 존재로서 신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내재자로서 신을 해석하는 새로운 종교론을 모색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 존재－실체존재와 과정존재&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와 자기를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론에서 묻게 되는 근본적 질문이다. 또한 &amp;lsquo;&lt;u&gt;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amp;rsquo;라는 질문은 &amp;lsquo;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amp;rsquo;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된다.&lt;/u&gt; 이러한 궁극적 존재의 본질과 존재 방식을 근거로 철학의 체계를 분류한 뿔리간들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mp;ldquo;철학은 실체와 과정 즉 존재와 생성의 철학으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다. 외견상의 변화와 다양성, 그리고 존재의 다수성 저변에 놓인 불변의 영구적인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을 &lt;u&gt;&amp;lsquo;실체존재론&lt;/u&gt;&amp;rsquo;이라 한다. 다른 한편 인간 내면이건 외부이건 간에 영구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amp;lsquo;&lt;u&gt;과정존재론&amp;rsquo;&lt;/u&gt; 혹은 &amp;lsquo;양태존재론&amp;rsquo;이다.&amp;rdquo; 그에 의하면 존재론에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실체존재론이며, 또 하나는 과정존재론이다. 전자는 존재인 &amp;lsquo;실체&amp;rsquo;를 궁극적 존재로 간주하는 한편, 후자는 &amp;lsquo;생성&amp;rsquo;인 과정[적 존재]을 궁극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대체로 실체존재론에 입각한 철학을 실체철학이라 부르는데, 인도적 버전으로는 아트만 철학 즉 아론(ātma vāda, 我論)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과정존재론에 입각한 철학을 비실체 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안아트만 철학 즉 무아론(anātma vāda, 無我論)이라 부를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뿔리간들라는 철학을 실체존재론에 입각한 실체철학과 과정존재론에 근거한 비실체철학으로 나눈 다음,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의 주요 철학자와 흐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amp;ldquo;서양에서는 파르메니데스 &amp;middot; 아리스토텔레스 &amp;middot; 데카르트 &amp;middot; 라이프니츠 &amp;middot; 스피노자 &amp;middot; 로크 &amp;middot; 칸트의 철학이 실체존재론의 몇 가지 사례이며, 반면 &lt;u&gt;헤라클레이토스 &amp;middot; 베르그송 &amp;middot;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과정존재론의 예들이&lt;/u&gt;다. 인도철학의 무대에서는 자이니즘 &amp;middot; 상키야학파 &amp;middot; 베단타학파가 실체존재론의 대표이며, &lt;u&gt;붓다의 가르침[佛敎]은 과정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lt;/u&gt;.&amp;rdquo; 사실 서양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칸트까지는 주류철학의 철학자들이며, 인도철학에서 상키야나 베단타 그리고 그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요가 &amp;middot; 니야야 &amp;middot; 바이세시카 &amp;middot; 미망사 등도 실체철학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들 학파 도 모두 인도의 정통 주류철학들이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철학이나 베르그송의 생명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등은 서양에서 비주류철학이며, 인도불교도 인도 정통 육파철학의 내도(內道)가 아닌 외도(外道)로 취급되었다. 철학이 기원전 5세기에 발생했다고 한다면, 인류 정신사에서 거의 2천 년간이나 실체철학이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서양과 인도의 상부구조를 형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이러한 실체철학의 사변적 연원을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다&lt;/u&gt;. &amp;ldquo;원리(인 것, 제1원인)는, 그리고 &amp;lsquo;있는 것(사물)들 중 으뜸가는 것&amp;rsquo;은 그 자체로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딸린 방식으로도 움직이지(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단일한 으뜸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움직여지는 것은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amp;rdquo; 여기서 제1원인이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로서의 제1실체이다. &lt;u&gt;이것은 &amp;lsquo;어떠한 주체에 대해서도 술어가 되지 않으며&lt;/u&gt;, 다른 어떠한 주체 속에도 들어가지 않는&amp;rsquo; 궁극적 존재이다. 이러한 제1실체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신학을 넘어 데카르트와 칸트의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용되면서 존속해 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실체존재에 대해서 과정존재를 피력한다. 그는 자신의 주저&lt;u&gt; 《과정과 실재》에서 &amp;ldquo;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궁극적 존재, actual entity)의 생성이라는 것&amp;rdquo;이라고 세계를 설명한다&lt;/u&gt;. 그는 과정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lt;u&gt;&amp;ldquo;&lt;b&gt;현실적&lt;/b&gt; 존재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lt;b&gt;실재적&lt;/b&gt; 사물이다&lt;/u&gt;. &lt;u&gt;&lt;b&gt;보&lt;/b&gt;&lt;b&gt;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lt;/b&gt;&lt;/u&gt;&amp;rdquo;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그냥 &amp;lsquo;있는 것&amp;rsquo;이 아니라 부단히 &amp;lsquo;생성하는 것&amp;rsquo;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lt;u&gt;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에 의해 생성되는 타자 의존적 존재&lt;/u&gt;이며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실체철학의 연원은 &amp;lsquo;베다의 끝&amp;rsquo;이라고 명명되는, 베다문학에서 철학적 사유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에 있다. 그 가운데 《&lt;u&gt;찬도기야 &amp;middot; 우파니샤드》에 있는 웃다라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인도 실체철학의 연원을 잘 보여 준다.&lt;/u&gt; &amp;ldquo;아들이여! 태초에 이 세계는 &amp;lsquo;있는 것(sat)&amp;rsquo;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자로서 존재하고 두 번째를 지니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amp;lsquo;태초에 이 세계는 없는 것(asat)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자로서 존재하고 두 번째를 지니지 않았다. 그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겼다&amp;rsquo;라고.&amp;rdquo; &lt;u&gt;여기서 &amp;ldquo;&amp;lsquo;없는 것&amp;rsquo;은 비존재가 아니라&lt;/u&gt; 근원적 일자로서의 없는 것, 요컨대 그것으로부터 질서 지어진 세계(코스모스)가 생겨난 바의 &lt;u&gt;&lt;b&gt;구별이 없는 혼돈&lt;/b&gt;&lt;/u&gt;의 실체&amp;rdquo;이자 &amp;lsquo;원초적 일자&amp;rsquo;이다. 이 &amp;lsquo;근원적 일자&amp;rsquo;는 &amp;ldquo;우파니샤드 사상에서 우주 최고 원리로 간주되며, 뒤의 인도 사상 전개 속에서도 항상 절대적이며 영원불변의 실재로서 위치를 점하는 &amp;lsquo;브라흐만&amp;rsquo;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브라흐만과 함께 중요한 것은 &amp;lsquo;아트만&amp;rsquo;이다. &amp;lsquo;아트만&amp;rsquo;은 근원적인 존재로서 &amp;lsquo;브라흐만&amp;rsquo;의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오로지 현상계의 사물들 각각이 가진 개체로서의 본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체에 대한 &amp;lsquo;혼&amp;rsquo;, 타자에 대한 &amp;lsquo;자기&amp;rsquo; &amp;lsquo;그것 자신&amp;rsquo; &amp;lsquo;개아&amp;rsquo;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파니샤드 사상의 중심에 있는 것은 브라흐만(梵)과 아트만(我)의 동일화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말해지지만,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원리와 개체의 원리의 일체화라는 것과 다름없다.&amp;rdquo; 이러한 범아일여 사상은 그 뒤 인도 정통 주류철학의 실체철학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반&lt;u&gt;면 다르마키르티는 존재를 &amp;lsquo;있는 것&amp;rsquo;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amp;lsquo;생성하는 것&amp;rsquo;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생성하는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본질을 찰나멸(소멸)이라 간주한다.&lt;/u&gt;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mp;ldquo;일반적으로 어떠한 것도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은 모두 소멸(찰나멸)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amp;rdquo; &lt;b&gt;&lt;u&gt;이 언명은 &amp;ldquo;모든 것은 무상이다(諸行無常).&amp;rdquo;라는 명제에 대한 다르마키르티의 재해석이다&lt;/u&gt;&lt;/b&gt;. 여기서 &amp;lsquo;일반적으로 어떠한 것&amp;rsquo;은 &amp;lsquo;모든 것(諸行)&amp;rsquo;을, &amp;lsquo;모두 소멸하는 속성(찰나멸)을 갖는 것&amp;rsquo;은 &amp;lsquo;무상(無常)&amp;rsquo;을 재해석한 것이다.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란 모든 존재는 과정적 &amp;middot; 연기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한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궁극적 존재, vastu)이며, 소멸을 성질로 하는 것이란 찰나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의 명제는 &amp;lsquo;현실적 존재는 찰나멸이다.&amp;rsquo;라고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amp;lsquo;현실적 존재가 찰나멸&amp;rsquo;이라고 할 때, 현실적 존재와 찰나멸의 관계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가 곧 찰나멸이라는 의미이다.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mp;ldquo;(소멸은) 그 (존재하는 사물의) 어떤 것(속성)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amp;lsquo;존재하지 않는 것&amp;rsquo;일 뿐이다.&amp;rdquo; 소멸(찰나멸)은 사물의 &lt;u&gt;&lt;b&gt;속성&lt;/b&gt;이 아니라&lt;/u&gt; 사물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 존재는 생성하자마자 소멸하는 찰나멸을&lt;b&gt; 본성&lt;/b&gt;으로 한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는 모두 실체철학의 기반이 되는 실체존재를 부정하고, 부단히 생성하고 생성하자마자 찰나멸하는 과정존재를 근간으로 비실체적 존재론을 구축한다.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모두 &amp;lsquo;과정의 원리&amp;rsquo;와 &amp;lsquo;상대성 원리&amp;rsquo; 그리고 &amp;lsquo;연기의 원리&amp;rsquo; 를 근간으로 실체철학의 실체존재를 비판하고 과정존재, 연기존재를 통해 비실체철학(무아철학) &amp;middot; 과정철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사유를 근거로 다음 절에서는 인식의 문제로 넘어가 실체철학과 비실체철학이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해 가고자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3. 인식－주객인식과 객주인식&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상주하는 불변의 실체를 궁극적 존재라 하는 실체철학은, 필연적으로 선재하는 인식주관이 대상을 인식한다는 주객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실체철학에 기반 한 주객 인식은 칸트철학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주객 인식을 피력한다. &amp;ldquo;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감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 직관은 오성에 의해 사유되며, 이로부터 개념이 생겨난다.&amp;rdquo; 주객 인식이란 인식주체(주관)가 인식 대상 즉 객관에 선재하며 이 선재하는 인식주체에 의해 인식 대상이 알려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칸트는 인식 대상 즉 객관은 감성이라는 우리의 주관적 능력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이렇게 선재하는 주관에 의해 객관이 파악되어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 주객 인식론이다. &lt;u&gt;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을 성립시키는 것은 객관 즉 외계 대상이 아니라 인식주관의 능력인 감각 인상이다&lt;/u&gt;. 이 감각에서 유래되고 인식 질료와 순수직관이라는 감성의 형식과 순수사유라는 오성의 형식을 근거로 개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개념과 관련하여 그 유명한 &amp;lsquo;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amp;rsquo;이라고 할 때, 그에게서 개념을 떠난다면 인식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lt;u&gt;유아주의적 주관주의&lt;/u&gt;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는 칸트의 인식론을 그의 과정철학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amp;ldquo;칸트에 있어 경험을 성립시키는 과정은 주관성으로부터 현상적인 객관성으로의 과정이다. 유기체 철학은 이러한 분석을 역전시킨다. 그래서 과정을 객체성으로부터 주체성에로, 즉 외적 세계를 여건으로 만드는 객체성으로부터 하나의 개체적 경험을 성립시키는 주체성에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유기체 철학에 따르면 어떠한 경험의 행위 속에도 &lt;b&gt;&lt;u&gt;인식을 위한 객체가 있는 셈이 된다&lt;/u&gt;&lt;/b&gt;.&amp;rdquo; 따라서 인식에 있어 화이트헤드와 칸트의 본질적 대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amp;lsquo;칸트에 있어 세계는 주관으로부터 출현하지만, 유기체철학(화이트헤드)에 있어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는 것&amp;rsquo;이다. &amp;lsquo;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는 것&amp;rsquo;은 인식론 상에서 말하면 인식주관은 인식객관(대상)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주관은 이미 선재하는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라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이러한 과정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 인식론에서는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종래의 인식론과 달리 의식이 경험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화이트헤드도 경험의 주객 구조를 반대하고 경험의 객주 구조를 취한다.&lt;/u&gt; 그에 의하면 주관이 먼저 실체로서 있고, 그것이 객관을 구성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객관이 주관을 한정하는 데서 경험이 시작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도의 정통 주류철학도 마찬가지로 실체철학을 전제로 주객 인식을 피력하는데, 대표적으로 상키야철학의 인식론을 통해 주객 인식의 구조를 확인해 보자. &amp;ldquo;상키야에 따르면 자아(아트만)는 감관과 마나스(manas) 그리고 마하트(mahat)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식을 갖게 된다. 감각과 인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 결과로써 일어난다. 마나스는 감각과 인상을 갖가지로 분석하여 마하트로 넘긴다. 그리하여 마하트는 특수한 대상의 형태로 변형된다. 그러나 마하트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의식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인식을 생성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마하트는 사트바적인 성질이 지배적이므로 자아 즉 푸루샤의 의식을 반영한다.&amp;rdquo; 상키야철학에서 궁극적 존재로서 자아(아트만)는 순수정신이자 순수의식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존도 하지 않으며, 불변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 순수자아는 관조자이기 때문에 현상적 사물에 대한 인식은 순수물질 원리인 프라크리티의 자기 전변인 감관과 마나스 그리고 마하트라는 수단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인식주관에 해당되는 감관, 마나스, 마하트라는 인식 수단 내지 인식주체는 이미 선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 이러한 감관과 대상이 접촉하여 감각과 인상이 결과로써 발생한다는 주객 인식을 제시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서&lt;u&gt; &amp;lsquo;감각과 인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lt;/u&gt;&amp;rsquo;이라는 언급이 중요하다. 감각과 인상은 직접적 인식인 지각의 내용에 해당되는데, 이 지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 결과라는 것이 상키야의 인식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인식론에 의하면 대상과 감관과 인식(지각)이 동시에 존재하여 발생한다는 &amp;lsquo;인식과 대상의 동시설&amp;rsquo;에 입각해 있다. 이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제1찰나 : 감관지각의 대상 + 감관 + 주의집중 &amp;rarr; 감관지각(인식)&lt;/span&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amp;lsquo;인식과 대상의 동시설&amp;rsquo;에 대해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은 &amp;lsquo;인식과 대상의 이시설&amp;rsquo;을 주장한다. &amp;ldquo;모든 원인들은 [결과의 생성보다] 이전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결과의 생성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과의 생성에 대해서 인과적 효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결과의 생성과 동시에 있는 것은 자기의 생성과 동시에 결과도 생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뒤에 작용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amp;rdquo; 지각(인식)의 원인은 대상과 감관과 빛 등의 여러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결과인 지각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들은 시간적으로 결과인 지각보다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지각이라는 결과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제1찰나 : 감관지각의 대상 + 감관 + 주의집중&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amp;nbsp;↘ &amp;darr; ↙&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lt;span style=&quot;color: #d35400;&quot;&gt;&lt;b&gt;제2찰나&lt;/b&gt; : 감관지각(인식)&lt;/span&gt;&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금 보고 있는 하얀 종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식하는 나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종이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순간 전의 과거의 찰나에 존재했던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종이가 빛과 함께 나의 망막 속에 진입하고 그것이 뇌수를 거쳐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되어 역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종이에 투사하고 있는 형상 그것을 우리는 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lt;u&gt;요컨대 종이는&lt;b&gt; 과거의 대상&lt;/b&gt;이며 이 종이에 대한 지각은 &lt;b&gt;현재의 인식&lt;/b&gt;&lt;/u&gt;이다. 이렇게 해서 다르마키르티도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객주 구조에 입각해 그의 인식론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4. 존재로서 신과 생성으로서 신&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기원전 5세기 이전 신화의 시대에서 신은 자연이었다.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하는 자연현상 내지 힘 그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자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외계의 자연현상이나 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자각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가져온 기원전 5세기 이후는 인문의 시대였다. &lt;u&gt;이 시대는 성인의 시대이기도 하며 철학이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하다&lt;/u&gt;. 이 성인들의 사유에 의해 인격 종교와 인격신이 배양된다. 이 인격신의 관념에는 부동의 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이 깔려 있다. 부동의 동자이자 탁월하게 실재적인 것으로 기술되는 이러한 신의 관념은 기독교 신학이 애호하는 학설이다. 탁월하게 실재적이며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에 대한 관념이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황제와 같은 이미지로서의 신의 출현이 바로 기독교의 하느님 즉 신이었다. 이러한 실체이자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중세신학의 주된 과제였다. 신의 존재 증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논증 가운데 하나가 안셀무스의 다음 논증이다. &amp;ldquo;완전한 것은 존재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amp;rdquo; 완전한 것만이 존재하며 오직 신만이 완전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성은 그의 완전성에 있고 그의 완전성은 그의 존재성에 있다는 순환논리에 입각한 안셀무스의 신의 존재 논증은, 이미 신은 절대적으로 그 어떠한 존재와도 관계없이 독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amp;lsquo;존재로서 신&amp;rsquo;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현실 세계와 현실적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mp;ldquo;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이라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피조물이며 현실적 계기라 불린다.&amp;rdquo; 이 세계는 궁극적 존재인 현실적 존재들로 구성된다. 신도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다. &amp;ldquo;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의 현존도 현실적 존재이다.&amp;rdquo; 먼지와 같은 &amp;lsquo;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의 현존&amp;rsquo;도 현실적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다. 따라서 신도 현실적 존재인 한,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일 뿐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는 신도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임을 신의 본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amp;ldquo;모든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의 본성은 양극적이다. 신은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갖고 있다. 신의 본성의 한 측면(원초적 본성)은 신의 개념적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험은 그것이 전제하는 어떠한 현실태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세계 내의 원초적 사실이다. 신의 본성의 이러한 측면은 자유롭고 완전하며 원초적이고 영원하며 현실성을 결하고 있고, 또 무의식적이다. 다른 한쪽의 측면(결과적 본성)은 시간적 세계에서 파생된 물리적 경험과 더불어 생겨나고 이어서 원초적 측면과 통합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고, 불완전하며, 결과적이고, 영속적이며 완벽하게 현실적이면서 의식적이다.&amp;rdquo; 시간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여건으로서 계기들에 대한 물리적 파악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시간적인 세계의 현실적 존재인 신은 영원한 객체들의 비시간적 영역에 대한 그의 개념적 파악과 더불어 생겨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신도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여러 계기에 의해서 구성되고 실현된다. 요컨대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도 선재(先在)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되는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도의 정통 육파철학도 무신론을 제외한 유신론을 표방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신을 &amp;lsquo;존재&amp;rsquo;로 이해하고 &amp;lsquo;생성&amp;rsquo;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육파철학 가운데 불교 인식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인식논리학을 중시한 니야야학파의 우다야나는 다음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amp;ldquo;질료인은 질료인에 대한 지식과 그 질료인이 지향하는 목적, 그 목적을 실현할 힘을 부여받은 목적인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 그 목적인은 또한 전지전능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각 불가능하고 극미한 원자에 대해 직접적이고 완벽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그 질료인을 지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목적인이 바로 신이다.&amp;rdquo; 그런데 &lt;u&gt;씨앗이 싹이 되고, 싹이 성장하여 줄기와 잎 그리고 가지를 형성하여 마침내 꽃과 열매를 맺는 생명현상은 질료인인 원자의 힘에 의해서는 설명 불가능하다.&lt;/u&gt; 씨앗에서 싹이, 싹에서 꽃과 열매가 맺는 생명의 질적 변화는 비정신을 본질로 하는 원자가 아니라, 정신을 본질로 하는 작인의 목적적 의지가 개입되어야 가능하다. 그 생명의 결실에로의 목적으로 추동해 가는 지적인 작인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신들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하며 불변인 절대적 &amp;lsquo;존재&amp;rsquo;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다르마키르티는 기본적으로 신의 &amp;lsquo;존재&amp;rsquo;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부처라는 신적 존재는 긍정한다. 그렇지만 그가 긍정하는 부처는 &amp;lsquo;존재&amp;rsquo;로서 이미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amp;ldquo;그것(지각과 추론)과 마찬가지로 세존은 인식 수단(종교적 권위)이다. &amp;lsquo;생성&amp;rsquo;이라는 말은 불생(不生, 상주)인 존재의 배제를 위한 것이다. 인식 수단은 결코 상주[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상(찰나멸)을 본질로 하는]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인식 수단이기 때문이다.&amp;rdquo; 일반적으로 인식은 대상에 의해 구성되는 인과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식의 정합성과 새로움을 갖추어야만 인식 수단이 되듯이 신적 존재인 붓다가 바른 인식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상주를 본질로 하는 &amp;lsquo;존재&amp;rsquo;가 아니라 무상을 본질로 하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amp;lsquo;인식 수단이 된&amp;rsquo; 세존이란 바로 불변하고 상주하는 본질을 가진 절대적 고정적 &amp;lsquo;존재&amp;rsquo;가 아니라 변화하고 무상한 찰나멸을 본질로 하는, 현실적 존재에 의해 생성됨과 동시에 찰나멸하는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붓다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5. 절대적 초월자로서 신과 초월적 내재자로서 신&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세계는 다음과 같은 역설, 즉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친숙했던 것들과 사랑했던 것들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과거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한시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끊임없이 소멸해 가는 무상한 시간 속에서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잊기 위해서 유동의 시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존재지만, 그는 시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여야 한다. &lt;u&gt;왜냐하면 시간 속에 있는 존재가 시간 속에 있는 존재를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lt;/u&gt;. 따라서 시간 밖의 존재가 시간 속의 존재를 구원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시간 밖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념과 결합한다. 하나는 &amp;lsquo;부동의 동자&amp;rsquo;이며 또 하나는 &amp;lsquo;탁월하게 실재적인 존재&amp;rsquo;이다. 이 두 관념이 결합되어 초월적이며 탁월하게 실재적인 창조주인 신이 탄생하게 된다. 신의 명령으로 세계가 존재하게 되고 그의 의지에 의해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 창조주라는 관념은, 서구의 종교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된다. 이러한 신의 관념에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황제와 같은 &lt;u&gt;이미지가 덧씌워져&lt;/u&gt; 신은 절대적 힘을 가진 현실 권력 속에 구현된다. 이러한 신은 구원의 주체이고 창조주이며 완전하고 불변이며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하는 일체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시간적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우상숭배의 유신론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거부한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은 여타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 존재의 하나이다. 신이 현실적 존재인 한 타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lt;u&gt;왜냐하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lt;/u&gt;. 여기서 의존적이라는 것은 내재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amp;ldquo;개개의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내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되 외적으로는 자유롭&amp;rdquo;듯이, 신은 원초적 본성에서 세계 속에 객체화되고 내재하지만, 결과적 본성에서 세계를 심판함과 동시에 구원한다. 여기에 신의 초월성이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초월적 내재로서의 신과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amp;ldquo;세계가 신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amp;rdquo; 요컨대 세계는 신에 있어서 의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며, 신은 세계에 있어서 의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월적 존재라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인도 육파철학 가운데 가장 정통적 학파인 베단타는 신을 2종으로 나눈다. 하나는 속성을 지닌 브라흐만이며, 또 하나는 속성을 여읜 브라흐만이다. 전자인 신은 저차적 &amp;middot; 인습적 &amp;middot; 상대적인 인격신이다. 이슈바라로 상징된다. 반면 후자인 신은 언어의 규정을 떠나고 사유의 한정을 넘어선 절대적 초월자이다. 이 신은 순수존재이며 순수의식이며 순수희열인 유일실재이다. 두 신 모두 전지와 전능과 편재와 불변을 본질로 하는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다르마키르티는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은 &amp;lsquo;마음의 현현[唯識]&amp;rsquo;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철학에 입각해 있다. 유식이란 오직 존재하는 것은 식뿐이라는 사유체계이다. 이 식이 전변하여 &amp;lsquo;나&amp;rsquo;와 &amp;lsquo;세계&amp;rsquo;가 현현한다고 하는 것이 유식의 식전변설 혹은 심상속설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수 없이 많은 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종자가 계기적으로 다음 종자를 낳으며 현행을 낳는데, 만약 그 마음이 선한 종자로 충만해 있다면 그것의 현행은 인격으로 말하면 선한 사람이 될 것이요, 그 마음이 악한 종자로 충만해 있다면 그것의 현행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는 존재를 &amp;lsquo;부처&amp;rsquo;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amp;lsquo;중생&amp;rsquo;이라 한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은 마음의 현현의 두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는 심상 속의 현현 속에 내재하지만, 일체의 고로부터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존재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이러한 윤회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인 사제(四諦)라는 인과법을 체득한 불(佛)은 자비와 지혜를 근거로 그것을 중생에게 설하는 존재이다. &amp;ldquo;자비를 증대하고 나서 타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에서] 솟아나는 대비자(dayāvān)는 [중생의] 고통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방책을 궁구한다. 얻어야 할 것(고의 소멸)과 그 원인(고를 소멸하는 길)을 보지 못하는 자가 그것을 설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amp;rdquo; 불은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하는 자비의 마음을 본성으로 할 뿐만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는 길을 아는 지혜를 본성으로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다르마키르티에 의하면 지혜의 구체적 내용은 고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과 고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인식이다&lt;/u&gt;. 고의 발생은 존재가 &amp;lsquo;나&amp;rsquo;와 &amp;lsquo;나의 것&amp;rsquo;이 아닌데 &amp;lsquo;나&amp;rsquo;라고 하고 &amp;lsquo;나의 것&amp;rsquo;이라고 하는 잘못된 아견(我見) 및 아소견(我所見)에 기인한다고 아는 것이 고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바른 인식이며, 고의 소멸은 일체의 존재가 무아(無我)와 공(空)을 본질로 한다고 아는 것이 고를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쉽게 말하면 아견과 아소견을 원인으로 고가 발생하고, 무아견과 공견에 의해서 고가 소멸된다고 아는 것이 지혜이다. 만약 이러한 자비의 마음과 지혜의 마음이 없다면, 중생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사제(四諦)를 설할 수가 없을 것이다. &amp;ldquo;[불은] 자비에 의해서 가장 수승한 것을 설하고, 지혜에 의해서 추론인을 동반한 진실을 설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려고 노력하는 분이기 때문에 바른 인식(종교적 권위)이 되는 것이다.&amp;rdquo; 모든 고통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스스로 체득하는 것은 불의 자리(自利)일 뿐 이타(利他)가 아니다. 자리를 넘어 이타로 나아갈 때 진정한 불 즉 깨달은 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제의 진리를 중생의 고통의 구제를 위하여 몸소 실천하는데, 그 실천을 위한 내재적 덕목이 바로 불의 자비와 지혜이다. 결국 불은 사제를 아는 일체지자일 뿐만 아니라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와 무아견과 공견을 내용으로 하는 지혜를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컨대 이 세상과 인간을 벗어난 다른 세상이나 다른 존재에로의 전변을 초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상태에서 지혜로운 상태에로의 인식의 근본적 전환을 초월로 본다는 점에서 붓다의 초월은 내재적 초월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 머물고자 서원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초월적 내재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는 공통적으로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부정하고 초월적 내재자이자 내재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긍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6. 합리적 종교와 성스러운 철학&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는 앞에서 인간 정신이 품기 쉬운 불변의 실체라는 관념, 주관 중심의 주객 인식이라는 관념, 초월적 신의 관념을 전제하는 철학과 종교를 &amp;lsquo;낡은 철학&amp;rsquo; &amp;lsquo;낡은 종교&amp;rsquo;라 규정했다. 이러한 철학과 종교는 상호 간에 내재적 관계를 부정하고, 종교가 전제되지 않는 철학, 철학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 종교로 이분화해 버린다. 이렇게 이분화될 때 고립무원의 철학, 독단적인 종교가 되기 십상이다. 또한 이러한 낡은 철학과 종교는, 현실에 대해, 개개인의 삶에 대해 무기력하게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철학과 종교가 무기력하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내재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amp;ldquo;철학은 종교나 과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때, 무기력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철학은 종교를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한다. &lt;u&gt;종교란 본래 관념적 사고에만 속하던 저 무시간적 보편성을 정서의 집요한 특수성 속에 주입시키려는 근원적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lt;/u&gt; 고등 유기체에 있어, 이와 같은 지고한 융합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정서와 관념적 경험 사이의 템포 차이는 삶의 권태를 낳게 된다. 이러한 유기체의 두 측면은 정서적 경험이 개념적인 것에서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은 정서적인 것에서 예시되는 그런 화해를 필요로 한다.&amp;rdquo;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두 가지 경험의 복합체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하나는 정서적 경험이며 또 하나는 개념적 경험이다&lt;/u&gt;. 그런데 이 두 경험이 분리되고 갈등하고 반목할 때, 철학과 종교는 무기력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반면 그러한 두 경험이 화해될 때 무기력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amp;lsquo;정서적 경험이 개념적인 것에서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이 정서적인 것에서 예시될 때&amp;rsquo; 화해가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lt;u&gt;정서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종교가 개념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철학에 의해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철학이 정서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종교에 의해 예시될 때, 종교와 철학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공동체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amp;nbsp;&lt;/u&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다르마키르티도 정서적 경험과 개념적 경험의 상호 내재적 연관을 다음과 같이 갈파한다. &amp;ldquo;그것(고통)은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무아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무아의] 공견에 근거하는 것이야말로 해탈이 있는 것이며, 그 외의 수습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은] 실로 그런 까닭에 무상성에 근거하여 고통을, 그리고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다.&amp;rdquo; 인간이 직면한 현재의 고와 그러한 고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적 경험이며 또한 어떤 것을 취하려고 하거나 버리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정서적 경험들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이러한 정서적 경험인 고통과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존재에로의 귀의나 맹목적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는 그러한 욕망 즉 고를 야기하는 욕망 일체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인연에 의해 소멸한다는 연기의 진리에 대한 무지, 일체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또한 &amp;lsquo;나&amp;rsquo;와 &amp;lsquo;나의 것&amp;rsquo;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는 진실에 대한 무지, &amp;lsquo;일체가 공&amp;rsquo;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초래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가 연기이며, 무아이며, 공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가 지양해야 할 모든 욕망과 증오와 같은 정서적 경험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경험과 개념적 경험의 완벽한 화해를 실현한 존재가 부처임을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mp;ldquo;[붓다=세존은] 자비에 의해서 가장 오묘한 것을 말하고 지혜에 의해서 [고와 고의 소멸이] 성립하는 요인을 포함한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하시려고 노력하시기 때문에 [붓다=세존은 중생에 있어서의] 인식 수단(종교적 권위)이다.&amp;rdquo;31)&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u&gt;자비는 깨달은 존재의 정서적 경험이며, 지혜는 깨달은 존재의 개념적 경험이다.&lt;/u&gt; 이렇게 붓다 속에서 두 경험은 화해되고 서로 의존하여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서적 경험이 개념적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이 정서적인 경험에서 예시되는, 고가 올바른 인식에 의해 정당화되고 올바른 인식은 다시 자비라는 정서적 경험에 의해 예시되는, 일상적 삶 속에서 그러한 삶을 초월하려는, 삶의 수레바퀴를 초월한 깨달음에서 다시 현실적 일상적 삶 속에서 다시 보임(保任)하려는, 내재적 초월의 철학과 초월적 내재의 종교가 화해될 때, 비로소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과 종교에서는 합리적이면서 성스러운 인간, 성스러우면서도 합리적 인간이 구현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인간상을 가장 잘 구현한 철학자가 바로 다르마키르티와 화이트헤드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미래의 철학자이자 종교인이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권서용&lt;span&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16a085;&quot;&gt;jungy5182539@hanmail.net&lt;/span&gt;&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amp;middot; 박사). 주요 논문으로 〈원시불교의 오온설 연구〉(석사), 〈다르마끼르띠의 인식론 연구〉(박사), 〈다르마키르티와 화이트헤드 사상의 접점(1)〉 등이 있다. 저 &amp;middot; 역서로 《무상의 철학》 《인도인의 논리학》 《티베트불교철학》 《다르마키르티와 불교인식론》 《불교인식론과 논리학》 《아포하》 《인식론평석－지각론》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평석－종교론》 《깨달음과 자유》 등 다수. 현재 다르마키르티사상연구소 소장&lt;/p&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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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2002daebak.tistory.com/743#entry743comment</comments>
      <pubDate>Wed, 21 Aug 2024 21:50: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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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데리다와 불교 -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20220523226&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데리다와 불교 -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 / 박진영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들어가는 말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8년에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라는 저서를 필두로 데&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b6Y4nk/hyWvPUWj0w/Rhp4A6U3sYAI84mEKFisOK/img.png?width=200&amp;amp;height=200&amp;amp;face=0_0_200_200&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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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와 불교 -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 / 박진영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들어가는 말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8년에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라는 저서를 필두로 데&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4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lt;/h4&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들어가는 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8년에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라는 저서를 필두로 데리다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철학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건축학, 교육학 등 학문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흔히 &amp;lsquo;해체철학&amp;rsquo;으로 불린다. &amp;lsquo;해체&amp;rsquo;라는 한글 번역은 사실상 불어의 &amp;lsquo;deconstruction&amp;rsquo;의 절반만을 해석한 것이다. 해체(destruction)와 건설(construction)이 동시에 일어나야 해체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시성은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데리다 철학의 주요한 요건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2024년은 데리다가 작고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말년에 췌장암으로 고생한 데리다는 2004년 10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기 몇 개월 전인 2004년 8월, 프랑스 유명 일간지인 〈르 몽드〉는 데리다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 인터뷰는 데리다 사후 《마침내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Apprendre &amp;agrave; vivre enfin)》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사는 것에 대한 숙고이지만, 데리다가 질문하듯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 가능할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 철학과 불교철학의 비교철학은 오래전부터 일군의 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그의 초기 철학에 나타나는 차연(diff&amp;eacute;rance)과 흔적(trace)을 불교의 연기 사상, 무아, 공 등과 유사점을 관찰하는 면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맥락에서 데리다의 철학과 용수의 불교사상이 많이 비교되어 왔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에서는 데리다의 사는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명상을 그의 후기 철학이 보여주는 정치철학과 연결시키고 이를 불교의 삶과 사회에 대한 사상과 연결해, 불교의 사회 &amp;middot; 정치사상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0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에서 정치철학을 논의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 자체가 개인의 수행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의 참여불교, 그리고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불교와 법, 불교와 통치 사상 등에 관한 관심은 불교의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은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불교의 사회 &amp;middot; 정치철학의 모습을 내보이려는 한 시도이며, 또한 비교철학, 혹은 최근 들어 사용되는 표현인 상호문화 철학(intercultural philosophy)의 의미에 대한 한 고찰이기도 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가 2004년 인터뷰에서 말한 &amp;ldquo;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amp;rdquo;이라는 표현은 1991년에 출판된 그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에 이미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된 이 책은 사실상 데리다의 사상 전개에서 주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책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60년대부터 활발한 저작 활동과 강연을 해온 데리다이지만, 그는 1991년 이 책을 출판할 때까지는 마르크스 철학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공사상이 사회적 학문적 배경에 있는 한국이나 미국의 학계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20세기 프랑스 지식인에게는 극히 드문 일이다. 마르크스 사상은 유럽대륙 철학의 사회 &amp;middot; 정치 사상의 주요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 철학이 마르크스 철학뿐 아니라, 정치철학적 문제를 표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정치 &amp;middot; 사회적 비판이 전혀 없는 말장난이라고 비난하는 학자들도 있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온 데리다가 전면에 마르크스를 내세우고 민주주의 등 그의 정치철학 사상을 펼친 책이다. 그런 책에서 왜 뜬금없이 &amp;lsquo;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amp;rsquo;을 들춘 것일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제목 그대로 유령에 관한 글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유령은 이 저서가 주로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햄릿 아버지의 유령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책의 서두에서 유령을 말하면서 삶과 죽음, 윤리, 책임감,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짐짓 문학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는 햄릿의 유령과 이러한 사회 &amp;middot; 정치적 문제들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미국 정치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1992)에 대한 데리다의 대응이기도 하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또한 동유럽권이 무너지면서, 후쿠야마는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대결이 자유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았다. 그 이후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일은 있겠지만, 결국 자유 진영이 지배하는 역사이기에 사실상 역사의 종언을 고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대해 데리다는 묻는다. 과연 어떤 한 사건이 물리적 시간에서 끝났다고 해서, 진정으로 끝이 나고 사라질 수 있는지.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동유럽권도 무너졌지만, 과연 그 역사적 사건이 다음에 오는 인간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의 근간이 되었던 마르크스 사상이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없어질 수 있을까?&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좀 더 쉬운 예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결국 헤어지는 상황이 생겼다고 하자. 2024년 1월 10일에 헤어졌다고 하면, 그 헤어진 사람이 1월 11일부터는 나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질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좋은 기억, 아픈 기억, 사랑한 기억, 미워한 기억이 모두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마음 깊이 잠겨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거의 환영들을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 두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나의 과거의 사건, 감정들은 오늘의 나에 이렇게 저렇게 영향을 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이 모든 것의 통합체를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단순하게만 보아도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 세계관이 어떻게 불교와 연결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교에서 우리는 이 유령을 업이라고 부른다. 유식불교에서는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식(識)에 대한 연구로 보여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는 유식불교 철학처럼 과거의 유령과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를 다루지는 않는다. 데리다는 이를 윤리, 책임감,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연결시킨다. 여기에 데리다와 불교철학이 함께했을 때 태어날 수 있는 정치철학이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가 햄릿 아버지의 유령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현존성은 그의 철학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그의 해체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초기 저서 《문자학에 대하여》와 그의 논문 〈차연(Diff&amp;eacute;rance)〉에서 차연, 흔적의 개념으로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는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의 실체를 가지고 있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유럽 철학의 근간에 제동을 걸고, 존재자는 사실상 차연과 흔적에 의하여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알파벳의 A는 A 자체의 독립적 실체와 의미가 있어서 A로 존재하고 A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A가 알파벳 내의 다른 25글자와 다르기 때문에 A는 A가 되는 것이며, 다른 25글자도 마찬가지이다. A는 다른 글자와의 &amp;lsquo;다름&amp;rsquo; 때문에 A가 되는 것이고, A 안에는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25개 알파벳이 &amp;lsquo;흔적&amp;rsquo;으로 들어 있다. 이 흔적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는 햄릿의 유령을 빌려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화엄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데리다의 차연과 흔적이 분명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 불리는 법장(法藏, 643~712)이 1에서 10까지의 수를 통해서 화엄의 상호 연기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화엄오교장》에서 법장은 화엄에서 정체성의 형성을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예로 설명한다. 1에서 10까지 10개의 숫자가 숫자계의 모든 수라고 가정하고, 그중 한 숫자, 예를 들어 3이 어떻게 3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고 법장은 말한다. 3은 3 자체의 독자적 정체성이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3은 2가 아니고 4가 아닌 것(즉 차이)에 의해서 3이 된다. 그리고 3은 나머지 아홉 숫자가 존재해야만 3이 존재하기 때문에 3 이외의 아홉 숫자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3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흔적의 개념이다. 화엄불교는 이러한 현상을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설명한다. 서로가 서로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의 정체성, 존재, 가치, 의미를 형성한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국 화엄의 시조로 불리는 의상(義湘, 625~702)은 이를 더욱 확장시키는 개념으로 &amp;ldquo;하나의 먼지 안에 전 세계가 들어 있다&amp;rdquo;라고 그의 〈법성게〉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화엄 불교의 주요 사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연기, 공, 상즉상입의 논리는 개인의 불교 수행 근간으로 사용된다. 불교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고통을 없애는 것이라면 연기, 공, 상즉상입의 가르침은 왜 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타인의 고통도 없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흔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홍서원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중생이 연기적으로, 아니면 차연과 흔적을 통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중생을 구해야 하는 명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불교학이나 수행에서는 이를 정치 &amp;middot; 사회사상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많지 않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의 경우 차연과 흔적은 그대로 그의 후기 정치사상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성을 민주주의, 사회정의, 책임감 등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데리다의 차연과 흔적의 또 다른 변모를 살펴보자. 1997년에 발표된 《동물이다. 고로 존재한다(L&amp;rsquo;animal que donc je suis)》라는 글에서 데리다는 인간존재를 동물과 대비해서 다룬다. 글의 제목에서부터 &amp;ldquo;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amp;rdquo;는 유럽대륙 철학의 근간인 데카르트의 명제를 희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사고하는 이성을 가진 것을 인간의 정체성 규정의 절대적 요소로, 또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절대적 성격으로 논의되어 왔다. 데리다는 이러한 대륙 근대 철학의 근거에 제동을 걸고, 인간과 동물이라는 분류법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책은 데리다와 그의 고양이와의 관계로 시작된다. 데리다는 욕실에서 나체로 있는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를 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인 철학 저서를 생각하는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amp;ldquo;이게 뭐지?&amp;rdquo; 하고 반응할 수도 있다. 나체인 인간과 털을 &amp;lsquo;입고&amp;rsquo; 있는 동물; 쳐다봄을 당하는 인간과 쳐다봄을 행하고 있는 동물. 나체성이란 무방비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보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위계질서적 위치에서 하위에 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amp;lsquo;&amp;lsquo;나&amp;rsquo;는 나무를 본다&amp;rsquo;라고 말할 때, 인간인 &amp;lsquo;나&amp;rsquo;는 대상이며 비인간인 나무에 대한 이해를 형성해내는 능동자이다. 그 반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amp;lsquo;나무가 나를 본다&amp;rsquo; 혹은 &amp;lsquo;의자가 나를 본다&amp;rsquo;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주체와 객체의 위계질서화는 근대사회의 특징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이 관계는 따라서 인간이 나체인 동물을 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것이 문제 되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즉각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간의 정의는 무엇일까? 인간 스스로 만든 인공지능의 위협을 느끼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또한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몇몇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인간은 생각한다). 인간은 의식을 사용한다.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인간은 생각한다). 인간은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고,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는 근거로 사용되고 나아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법은 모순되게도 인간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규정하는 데, 생명을 가진 비인간 존재자와 비교하는 것으로만 가능해진다는 현실을 만난다. 인간은 비인간(동물)에 의존해서만 인간존재를 정의하고 인간존재 가치를 확인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간과 동물을 위계질서하에서 보는 태도는 사실상 인간과 동물 간의 문제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인간 사회 안에서 힘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때 흔히 힘없는 주변인을 동물과 동일화하곤 한다. 노예를 비인간으로 취급하여, 소유가 가능하고 매매가 가능했던 시기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노예의 소유자인 인간과 인간으로 취급되기를 거부당한 노예로서의 인간이 있다. 여기서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인간과 동물에 대한 데리다의 숙고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르친 세미나인 《야수와 군주(La b&amp;ecirc;te et le souverain)》에서 좀 더 정치철학적 성격을 띤다. 이 세미나에서 데리다는 야수와 군주의 동질성을 말한다. 야수라는 표현은 동물 중에서도 하위적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군주는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둘은 법과의 관계에서는 같은 위치에 있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야수와 군주는 둘 다 법의 밖에 있다는 것이다. 야수는 법 아래 있어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고, 군주는 법 위에 있어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동일성은 또한 그들 위치의 동일성이 되기도 한다. 존재의 위계질서에서 군주는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야수는 가장 하위에 있겠지만,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진 군주의 힘은 또한 어느 때라도 군주를 야수와 같이 만든다. 야수인 군주는 군주의 특권이 만든 폭력이자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보다 더 거리감이 있는 야수와 군주가 사실은 절대적으로 다른 두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군주가 야수가 되어가는 과정, 혹은 군주의 야수화는 역사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오늘날의 정치에서 역시 현현이 보이는 현상이다. 데리다는 라퐁텐의 〈늑대와 어린 양〉을 인용하며 야수가 된 군주의 논리를 제시한다. 이 우화의 시작에서 한 어린 양이 흐르는 냇물로 목을 축이고 있다. 좋은 먹잇감을 본 늑대는 양에게 다가가서 감히 자신이 마시는 물을 흐린다고 양을 다그친다. 겁먹은 어린 양은 자신은 어르신보다 냇물의 아래쪽에서 물을 마시는데 어떻게 물을 흐릴 수 있냐고 변명한다. 논리에서 밀린 늑대는 양에게 그럼 네가 작년에 자신을 욕하고 도망갔다고 다시 호령한다. 어린 양은 작년에는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늑대는 그럼 너의 형이 그랬다고 다시 호령한다. 어린 양은 자신은 형제가 없다고 답한다. 다시 말문이 막힌 늑대는 그러면 너의 양치기, 아니면 너의 개가 그랬다고 다그치면서 결국, 어떻게 되었든 너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고 결론짓고 어린 양으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우스운 소리일 수도 있지만, 논리는 분명하고 메시지 역시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힘의 논리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두 권의 책으로 출간된 데리다의 이 세미나 《야수와 군주》는 그러나 힘 있는 자는 옳다는 야수가 된 군주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책의 주요 주제를 잡지 않았다. 야수가 된 군주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근간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amp;lsquo;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amp;rsquo;이라는 질문이 데리다에게 그의 생 마지막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amp;nbsp;&amp;nbsp;&amp;nbsp;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간과 짐승, 군주와 야수는 모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이 같음과 다름의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데리다는 묻는다. 존재자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따라서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각자의 세계는 또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불교는 이를 진속이제(眞俗二諦)라는 사상으로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일반적인 삶, 즉 속세적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 사람과 짐승, 야수와 군주가 다 각자 다르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세계, 즉, 화엄의 인드라망과 같이 관계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가 야수와 군주가 한 세계 안에 살면서 또한 각자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속세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현실적 속세에서 역시 소외되어 살고 있는 인간존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각자가 사는 삶은 다르다. 하나의 몸뚱어리를 가지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갖은 유한자로서의 소외가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 없는 자, 남성중심주의에서 소외되는 여성, 백인중심주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유색인종 등, 인간의 관념과 힘에의 지향에 의해서 형성되는 소외는 실존적 소외만큼이나 이 삶에서 절실히 느껴지는 현실이며 고통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인간 사회가 만든 소외를 법에 의한 소외라고 부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차연과 흔적의 철학에서, 야수와 군주의 정치철학을 이끄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을 미국의 흑인불교와 급진적 참여불교에서 본다. 한국에서 한때 활발했던 민중불교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실존적으로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독재적 정치로 인한 고통, 자본주의의 착취에 의한 고통, 차별에 의한 고통 등, 한 사회 안에 사는 존재자로서 개인이 겪는 고통의 극복 역시 불교의 목표라고 규정하고 사회 개혁과 불교 사상을 맞물린 바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활발히 전개되는 미국 불교학과 불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의 수행, 마음 훈련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억압, 즉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주의 등에 의해 형성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주요 불교 수행의 일환이며, 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미국 흑인 불교는 수 세기 동안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받아왔고, 아직도 진행되는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들의 마음과 삶 깊이 지속적으로 들어차고 있는 분노와 고통의 치유제로 불교 수행을 보고 있다. 그러한 수행은 단지 개인의 차원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뿐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더 분명하게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인종차별 사회에 대항하는 집단적 항쟁의 의미를 띠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흑인 불자들뿐 아니라, 미국 일군의 불교학자와 불자들 또한&amp;nbsp;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미국불교가 백인 엘리트 계층의 불교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걸고, 미국불교 자체의 인종차별, 계급주의 등을 재검토한다. 하버드 신학대학은 &amp;lsquo;불교와 인종&amp;rsquo;에 관한 강연 시리즈를 몇 년에 걸쳐 실시한 바 있으며, 2021년의 이 강연 시리즈는 &amp;lsquo;급진적 재방향 설정&amp;rsquo;이라고 그 학회의 성격을 규정했다. 종교학자 찰스 롱이 말하는 방향 설정(오리엔테이션)으로서의 종교 개념을 이용해, 방향 설정이란 한 개인이 세계 안에서 자신 위치의 궁극적 의미를 타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급진적 재방향 설정이란, 미국 불자로서 현실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이며, 여기서 급진적이란,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라고 학회 주관자는 말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런 의미의 불교는 더 이상 단지 개인의 마음 챙김에서 끝나지 않고, 개인의 마음 챙김은 필연적으로 그 개인이 사는 사회, 사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수행은 항상 우리가 몸담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나의 몸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 사회, 문화, 물질과 연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불교에서 오래된 사상이다. 단지, 불교학과 불교 수행자들은 이러한 불교의 사상을 사회 &amp;middot; 정치적으로 담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는 마르크스 철학 정신이 남긴 가장 큰 자산은 해방의 가능성을 확인해 준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 정신은 현실에서 공산주의로 변화된 마르크스주의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아가 마르크스 철학의 해방 가능성을 &amp;ldquo;메시아주의가 없는 메시아에의 확신&amp;rdquo;이라고 표현한다. 메시아주의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체제이다. 어떤 사상이든 체제화되고 이데올로기화하면 이미 배제의 논리에 근거하고, 배제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기성화된 종교, 제도화된 체제로서의 교회, 혹은 사찰이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이미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희망의 메시지이다. 정치 역시 희망의 메시지이다.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종교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삶에서의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절이나 교회에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정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사람들은 제도화된 종교, 그리고 현 정치인과 정치에 대한 실망을 한 아름 안고 있다. 그 근본에 체제화되고 고착화된 종교와 정치가 있다. 이데올로기화된 종교와 정치의 메시지는 이미 삶의 유동성을 정복하려는 의도에 의해 실패해가는 종교와 정치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글의 서두에서 데리다의 해체철학에서 해체와 건설(deconstr-uction)의 동시성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고착화된 사고, 이념, 체제를 흔드는 것과 거기에서 새로운 사고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의 동시성은 고착화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제동으로 데리다가 제시한 장치다. 동시성이란, 그런 의미에서 끝없는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해체철학은 언제나 기존의 현실에서 시작한다. 데리다의 글이 대부분 기존의 글 읽기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 신화로 시작하는 기독교 사상과 달리 불교는 창조를 다루지 않는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와 사상은 창조를 다루지 않는다. 세계의 시작, 인류의 시작은 모순 없이는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amp;lsquo;이것이 시작이다&amp;rsquo;라고 제시하는 순간, 그 시작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될 뿐 대답이 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는 &amp;lsquo;무시이래(無時以來)&amp;rsquo; 즉 시작 없는 시작점이라는 현명한 표현으로 지칭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리는 업을 말할 때 흔히 어떻게 업이 시작되는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에 대칭되는 질문, 언제 어떻게 업이 끝나는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과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고 이 직선의 한 끝에는 시작점이 있고, 다른 한 끝에는 종착점, 혹은 목적지가 있다는 사고는 근대 이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진보의 개념을 중시하는 이유도 이러한 시간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를 이러한 일직선상에서 보지 않고, 하나의 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그 점들이 모여서 연속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일직선적 물리적 시간관에 근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한 점이 데리다 철학이 말하는 해부와 구축, 파괴와 건설이 함께 일어나는 동시성의 순간이다. 데리다는 이런 순간순간을 사건(&amp;eacute;v&amp;egrave;nment)이라고 부르곤 한다. 인드라망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보석과 같은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 안에는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차연과 흔적의 세계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사고다. 복수적－단수의 세계인 것이다. 이 한 점은 단수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연기적으로 연결될 사건들, 혹은 데리다가 말하는 흔적이 들어 있기에, 고착화될 수 없는 유동성의 한 점이다. 이 유동성의 한 점이 고착화될 때, 우리는 가치의 고착화를 만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20세기 중 &amp;middot; 후반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투쟁한 한국 진보의 주축이었던 세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세대가 아니라 정의 장사를 하는 세대로 각인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체된 정의, 정체된 민주주의는 정의일 수 없고 민주주의일 수 없다. 데리다는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amp;ldquo;다가올 민주주의(la d&amp;eacute;mocratie &amp;agrave; venir)&amp;rdquo;라고 정의한다. &amp;lsquo;다가올 민주주의&amp;rsquo; 혹은 &amp;lsquo;도래할 민주주의&amp;rsquo;란 일정 시간이 되면, 아니면 일정한 조건이 맞으면 이루어질 민주주의라는 일직선적 구조의 의미가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한 동시성의 공간감적 민주주의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흔히 말하듯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 체제라면, 그리고 국민은 절대 동질성의 집단일 수 없으며, 수도 없이 많은 다양성을 지닌 개개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현실적 민주주의도 그 많은 다양한 국민의 의사와 목소리를 반영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엄의 인드라망에 있는 개개의 보석이 인드라망의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보석의 모습도 고착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보석 모습은 다른 보석들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화할 것이고, 각개 보석의 정체성이란 그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변화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amp;lsquo;정의&amp;rsquo;에도 적용된다. 정의의 한자 &amp;lsquo;正義&amp;rsquo;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는 뜻일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누구나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우받는다는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을 이룬다. 서구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의 양측이 공평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도 눈을 가리고 저울질을 할 수도 없고, 양팔 저울의 양측을 완전히 똑같고 공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어떠한 정의의 현실도 완전한 정의가 될 수 없으면, 그 정의는 끊임없이 계속 공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계속적으로 양쪽의 저울을 재고, 한번 거의 비슷한 공정성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현실과 존재를 계속적으로 차연과 흔적, 혹은 연기적 입장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본다면 정의 역시 고착될 수 없다. 정의는 부단하게 현실 안에서 재정의되고,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정의가 진실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정의인지 항상 숙고해야 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정의를 &amp;ldquo;다가올 정의(la justice &amp;agrave; venir)&amp;rdquo;라고 말한다. 이는 언젠가 확정될 목적론적 정의가 아니라, 현재의 정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정의가 정의이기 위해서는 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생각하고 이를 공평하게 저울질해야 하는데, 한 사건을 그저 단순히 단독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연기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니면 차연과 흔적을 통해서 이해한다면, 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정의는 항상 정의이지 시간이 변한다고 정의가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amp;lsquo;정의&amp;rsquo;란 하나의 개념이다. 정의는 그 자체로써 그 모습을 보일 수 없고, 실현될 수도 없다. 정의의 실현은 그 실현을 위한 제도와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한 사회는 법이 있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 그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는 모두 인간이 만든 제도이기에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런 의미에서 &amp;lsquo;정의&amp;rsquo;는 계산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법은 계산될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둘을 구분한다. 고착화된 정의는 정의의 고착화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을 위해 이루어진 제도의 고착화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선불교 전통은 이러한 고착화된 진리, 고착화된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를 보내왔다. 선불교의 핵심 저서 중 하나인 《무문관》 2칙은 업에 관해 잘못된 이해를 해서 오백 년 동안 여우로 산 수행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세기 중국 선사 백장이 설법할 때마다 그가 알지 못하는 한 노인이 나타나서 설법을 듣고 나서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설법이 끝난 후 노인은 남아서 백장에게, 자신은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서 오백 년을 여우로 사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백장에게 다시 묻는다.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서부터 자유로운지. 백장은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 우매하지 않다고 답한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그로부터 여우의 업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깨침을 얻은 자는 불교 수행의 목적을 이룬 자이다. 목적론적이고 비연기적인 사고에서 보면, 우리는 불교 수행의 최고점에 이른 깨친 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연기와 업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침을 얻었다고 해서 세계의 구성 원리가 변하지는 않는다. 깨침은 한 개인이 얻은 것이고, 그 개인이 깨침을 얻든 아니면 중생으로 남아 있든 세계는 그대로 연기의 법대로 진행되며, 그 안에서 깨침을 얻었다는 것은 그 세계의 법칙에 대해 깨침을 얻었고, 따라서 이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 사건의 연기적 성격을 깨닫는 것을 불교는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연기적 성격의 깨달음은 나와 타인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 자비의 행위로 나타난다고 불교는 말한다. 이 자비의 행동이 불교의 가장 사회적 성격일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데리다는 물론 자비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 철학에서 차연과 흔적, 유령의 만연은 상속과 책임감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된다. 유령은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모인 이 지점, 지금 여기가 바로 현재라는 이름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은 모두 그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든 삶을 상속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의 개념이 한 시간대에서 공간적인 삶의 공유를 의미한다면, 상속은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말한다. 그 상속을 받은 존재자인 우리의 삶은, 유산을 상속받은 자가 그 유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삶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상속인이 상속받은 유산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존재자 개개인은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연과 흔적의 세계에서 이 책임은 개인의 삶에서 끝날 수 없다. 이 책임은 타인과 함께 사는 삶에서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중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중생을 구하겠다는 사홍서원은 무엇에 근거해서 하는 것인가? 중생과 나는, 중생과 보살은 무슨 연관이 있기에 보살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가? 더욱이 왜 끝도 없이 많은 그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원을 세우는가? 중생인 나, 그리고 보살인 나는 모두 연기의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의 삶의 상속을 받은 자들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교는 이를 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상속과 나를 분명히 가르는 순간 중생과 보살을 분명히 가르고, 그 개별화가 고착화되는 순간 나는 이미 연기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말한다. 여래가 아무리 많은 중생을 구했다고 해도 사실은 구할 중생이 없다고.&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상호문화 철학과 불교 민주주의&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불교의 많은 가르침은 중생과 보살이 둘이 아닌 세계, 속제와 진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수행자가 삶에서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데리다 철학은 진제와 속제의 불이성을 &amp;lsquo;다가올 민주주의&amp;rsquo; 혹은 &amp;lsquo;다가올 정의&amp;rsquo;라고 이론화해주지만, 어떻게 그 &amp;lsquo;다가올 민주주의&amp;rsquo;를 실행해 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정의의 고착화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서 &amp;lsquo;다가올 정의&amp;rsquo;의 모습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할지 그 방법을 말하는 데 인색하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에서 비교철학, 혹은 상호문화 철학의 가치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비교철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A 철학과 B 철학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유사점을 2,500년 역사를 가진 동양사상인 불교와 20세기 프랑스 철학인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이 유사점을 찾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곧 묻게 된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고. 불교와 해체철학이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상호문화 철학의 중요성이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글이 보이고자 했던 것처럼, 불교와 해체철학의 비교철학적 접근은 두 철학이 가진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혹자는 불교와 해체철학의 유사점을 보고, 동양에서 2,500년 전에 생각한 것을 서양에서는 20세기에 와서 생각했으며, 따라서 동양사상이 서양사상보다 우월하다는 힘의 논리적 태도로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자기모순적이다. 불교는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지난 2,500년 동안 데리다가 전개한 사회 &amp;middot; 정치사상을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관은 절대 평등을 가르치지만, 불교를 수천 년 동안 전개해온 동양은 그러한 세계를 현실화해내지 못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최근 20여 년 동안 유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동양사상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20세기 중반부터 미국 대학에서 강의가 시작되면서, 불교와 도가는 자유를 구가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서구 사상의 한계를 느낀 미국인들에게 환영을 받아왔다. 반면, 서구인에게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준 유교 사상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작고한 페미니스트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가 그녀의 책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에서 제시했듯이 어떠한 사상이나 전통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가부장제적일 수는 없다. 최근 유교 학자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 비판받은 유교에서 민주주의를 재활시킬 불씨를 찾아내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존재의 절대 평등성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전통적으로는 왕권과 연결되는 것 외에는 다양한 정치철학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제는 새롭게 불교 민주주의, 불교의 사회 &amp;middot; 정치철학을 구사해서 나날이 힘을 잃어가는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기를 보태야 할 시기이다.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박진영&lt;/b&gt;&lt;span&gt;&amp;nbsp;&lt;/span&gt;jypark@american.edu&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연세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석사). 뉴욕대학에서 석사,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Buddhism and Postmodernity, 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 등 다수. 현재 아메리칸대학 철학 &amp;middot; 종교학과 교수 겸 학과장, 미 종교학회 회장 및 북미한국철학회 회장.&lt;/p&gt;</description>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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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l 2024 08:02: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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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title>
      <link>https://2002daebak.tistory.com/74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lt;/a&gt;&lt;/p&gt;
&lt;figure id=&quot;og_1720218156968&quot; contenteditable=&quot;false&quot; data-ke-type=&quot;opengraph&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 data-og-type=&quot;article&quot; data-og-title=&quot;세계의 불교학자 34.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 박성일 - 불교평론&quot; data-og-description=&quot;2017년 일본의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인 &amp;lsquo;인도학불교학연구회(印度學佛教學研究會)&amp;rsquo;는 &amp;lsquo;인도불교 연구의 미래&amp;rsquo;라는 패널 발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고회의 부제가 바로 &amp;lsquo;포스트 &quot; data-og-host=&quot;www.budreview.com&quot; data-og-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quot; data-og-url=&quot;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quot; data-og-image=&quot;https://scrap.kakaocdn.net/dn/e46DL/hyWvO9zPYH/9q6whjRoFLBTeIf8ndvkX0/img.png?width=282&amp;amp;height=376&amp;amp;face=75_59_222_250,https://scrap.kakaocdn.net/dn/Kp0A5/hyWvOuYqcl/tFezxhW14muYSFczsj7ya0/img.png?width=600&amp;amp;height=484&amp;amp;face=0_0_600_484,https://scrap.kakaocdn.net/dn/OBeGe/hyWvP8tsPq/9kegeUhAyKWG3272BkJq31/img.png?width=600&amp;amp;height=431&amp;amp;face=0_0_600_431&quot;&gt;&lt;a href=&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quot; data-source-url=&quot;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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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og-text&quot;&gt;
&lt;p class=&quot;og-title&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세계의 불교학자 34.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 박성일 - 불교평론&lt;/p&gt;
&lt;p class=&quot;og-desc&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2017년 일본의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인 &amp;lsquo;인도학불교학연구회(印度學佛教學研究會)&amp;rsquo;는 &amp;lsquo;인도불교 연구의 미래&amp;rsquo;라는 패널 발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고회의 부제가 바로 &amp;lsquo;포스트&lt;/p&gt;
&lt;p class=&quot;og-hos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www.budreview.com&lt;/p&gt;
&lt;/div&gt;
&lt;/a&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4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0&quot;&gt;대승의 기원, 율장 연구의 이정표를 세우다&lt;/h4&gt;
&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282&quot; data-origin-height=&quot;376&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sUyKc/btsIpTD9mwz/WmzR5BmkaEy0E9D0QHUE8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sUyKc/btsIpTD9mwz/WmzR5BmkaEy0E9D0QHUE8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sUyKc/btsIpTD9mwz/WmzR5BmkaEy0E9D0QHUE8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sUyKc%2FbtsIpTD9mwz%2FWmzR5BmkaEy0E9D0QHUE8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282&quot; height=&quot;376&quot; data-origin-width=&quot;282&quot; data-origin-height=&quot;376&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2017년 일본의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인 &amp;lsquo;인도학불교학연구회(印度學佛教學研究會)&amp;rsquo;는 &amp;lsquo;인도불교 연구의 미래&amp;rsquo;라는 패널 발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고회의 부제가 바로 &amp;lsquo;포스트 히라카와 아키라 시대의 불교학이 나아갈 방향&amp;rsquo;이었다. 대승불교의 새로운 기원을 주창한 히라카와 아키라의 학설과 그에 대한 비판을 회고하고, 대승 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 및 불경의 사본(寫本)과 율장(律藏)의 전문가 4인을 초청하여 인도불교 연구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을 넘어 전 세계 불교학계의 거두로 인정받은 히라카와 아키라는 현재까지도 커다란 학문적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생애와 주요 저작 및 활동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학문적 태동기: 율장 연구로의 착목&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는 1915년 아이치현(愛知縣) 아쓰미군(渥美郡) 오이쓰무라(老津村), 현재의 아이치현 토요하시시(豊橋市)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6년 제8고등학교 문과 을류(乙類)를 졸업한 후 1939년 도쿄대학(東京大學) 문학부 인도철학범문학과(印度哲學梵文學科)에 입학했다. 이후 학부의 졸업 논문으로 〈아함(阿含)의 핵심 사상에 대하여〉를 작성했다. 1942년 대학원 입학하고 나서 그는 아비달마 연구를 하기 위해 《대비바사론》 등을 읽었으나, 도쿄제국대학 교수 미야모토 소손(宮本正尊, 1893~1983)에 의해 대학원 특별연구생으로 추천받아 본격적으로 계율을 연구하게 되었다. 히라카와는 &amp;lsquo;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amp;rsquo;이 활발히 언급되고 있었기에 시국에 도움될 연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미야모토의 분부에 따라 계율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종전 후 대동아를 외치던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어 율장 연구를 그만두려 했다가 미야모토에게 꾸지람을 듣고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이는 문부성령(文部省令) 제74호 &amp;lsquo;대학원 또는 연구과의 특별연구생에 관한 건(大学院又ハ研究科ノ特別研究生ニ関スル件)&amp;rsquo;과 관련된 &amp;lsquo;도쿄제국대학의 대학원 특별연구생 후보자의 연구사항 해설서&amp;rsquo;를 보면, 더욱 명확해지는 지점이 있다. 히라카와가 접한 연구는 &amp;lsquo;동아 제 민족의 생활과 계율(東亜諸民族ノ生活ト戒律, 18－2－文03)&amp;rsquo;이라는 제하로 인도철학과에서 1943년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바로 히라카와의 스승인 미야모토 소손과 동 대학 조교수인 하나야마 신쇼(花山信勝)가 지도하는 일종의 연구과제였다. 해당 연구사항의 해설에는 인도의 종교적 행법 이외에도 미얀마와 타이의 계율도 살피며, 또한 대승불교국인 중국과 일본의 계율 문제가 대승과 소승의 관계를 고찰함에 긴요한 사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해당 연구의 목적은 &amp;ldquo;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 국민의 정신 기타 동아 제 민족의 생활에 미친 불교의 감화(感化)를 이제 특별히 계율의 시점에서 연구하려는 것이다&amp;rdquo;(p.48)라고 밝혔다. 히라카와는 1943년에서 1945년 9월까지 대학원 특별연구생의 신분으로, 1946년 3월부터는 해당 연구조사에 촉탁받으며 본격적으로 계율 연구를 접하게 된 것이리라. 결국 히라카와의 전 생애에 걸친 연구범위를 고려할 때, 미야모토 소손이 마련한 연구가 그의 모토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후 도쿄제국대학 조수를 거쳐(1946년), 홋카이도대학 조교수로 발령받은(1950년) 이후에도 히라카와는 계율 연구에 더욱 천착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1952년 〈불교에서 종교적 실천의 이중성(仏教に於ける宗教的実践の二重性)〉에서는, &amp;ldquo;종교로서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적 실천의 의의를 오류 없이 파악해야만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여 갖가지 교설이 설해지고 있기에, 그 종교적인 실천도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 근본을 말한다면, 그것은 계(戒)와 율(律)의 문제로 귀착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amp;rdquo;(p.153)라고 밝히며 불교 연구의 실마리를 계와 율에서 찾고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도쿄대학 문학부의 조교수로 전환 배치를 명받은 1954년 이후에도 히라카와는 계율 연구를 지속하며 자신의 학설을 구축해 나갔다. 대표적으로 1956년에 발표한 〈카로슈티 비문과 대승교단(カロシュティー碑文と大乘教團)〉에서는 109종의 비문을 분석하여(p.271), 부파교단에 헌납된 불탑보다도 부파에 속하지 않은 불탑 쪽이 훨씬 많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불멸 400년경에는 소승불교의 사원이 훨씬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보다 약간 이전의 시대에 사정이 급변했을 리는 없다고 추론한 것이다. 따라서 불탑에 한정해서는 본래 소승불교와 관련이 적고, 불탑을 소의로 하는 종교 신자들은 소승불교와는 별도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에 대승불교의 보살이 생활하는 소의처가 불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p.274).&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이러한 그의 학문적 초점은 율장으로의 연구로 집약된다. 1958년 9월에 탈고하여 학위청구논문으로 도쿄대학교에 제출했던 《율장의 연구(律蔵の研究)》가 그것이다. 이후 그는 1959년 3월에 도쿄대학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해당 논문은 1960년 9월에 산키보(山喜房)에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특히 율장의 자료론적 의의를 다룬 그의 논문 제1장에서는, 현존 율장에서 원시적인 부분을 선별하여 원시율장(原始律藏)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천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시교단의 의미와 내용 및 연대 추정을 다르게 만든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연구방법론은 주로 아함경 중심으로 연구되어 아함경에서 얻은 결론을 율장에도 적용해 왔으나, 이는 옳지 않다고 한다. 아함경에 대한 연구 성과는 이본(異本)이 적어 엄밀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범본과 빨리 율장 및 티베트역본과 한역본까지 이본이 많은 율장 그 자체만을 면밀히 검토하고, 율장 중 어떤 조문이나 내용이 &amp;lsquo;고형(古形)&amp;rsquo;, 즉 오래된 것인지를 가능한 한 확정하고자 한다고 밝힌다(pp.3-7).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율장을 부수적으로 경장(經藏)과 논장(論藏) 연구에 활용하던 당시의 경향과는 달리 전면적으로 율장 그 자체를 학문 영역으로 선포한 것이라 이해해 볼 수 있겠다.&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25&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dpbBo1/btsIpstt0Bt/IXGGiuaQsv7afvIcaGOKt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dpbBo1/btsIpstt0Bt/IXGGiuaQsv7afvIcaGOKt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dpbBo1/btsIpstt0Bt/IXGGiuaQsv7afvIcaGOKt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dpbBo1%2FbtsIpstt0Bt%2FIXGGiuaQsv7afvIcaGOKt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25&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25&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히라카와설의 주창: 재가자 중심의 불탑 숭배가 대승불교의 기원&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방법론을 통해 히라카와는 불교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바로 그가 1968년에 발표한 《초기대승불교의 연구(初期大乘佛敎の硏究)》 때문이다. 그는 대승의 기원을 교리(敎理)와 교단(敎團)으로 구분하고, 교단으로서의 기원에 연구의 방점을 찍었다. 대승불교의 성립에서 직접적인 사회 배경은 바로 &amp;lsquo;불탑 숭배&amp;rsquo;라는 것이고, 그 경제적 기반을 불탑에 기부된 보시 등이라고 추정하여, 재가자 중심의 불탑신앙 집단이 대승불교를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즉, 대승불교는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한 &amp;lsquo;재가 보살&amp;rsquo;과 &amp;lsquo;출가 보살&amp;rsquo; 들이 &amp;lsquo;자리이타(自利利他)&amp;rsquo;의 종교적 이념을 실천하자는 재가자 중심의 불교 혁신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기에 결국 불전문학(佛傳文學)과 불탑신앙(佛塔信仰)이 대승불교의 원류가 된다고도 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그 당시까지 주류설이었던 대승불교의 대중부 기원설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7~1930)은 《대승불교사론(大乘佛敎史論)》(1903년)에서 &amp;lsquo;대중부 기원설&amp;rsquo;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승불교 기원 논쟁의 효시에 해당하는 이 학설은 대중부가 제시하는 &amp;lsquo;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amp;rsquo;이 대승불교 간에 교리적 유사점이 있고, 《부집이론소(部執異論疏)》에 보이는 &amp;ldquo;대중부가 법화 &amp;middot; 열반 등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amp;rdquo;라는 기술 등을 근거로 &amp;lsquo;대승불교 대중부 기원설&amp;rsquo;을 주장하였다. 히라카와는 대중부 기원설 및 대승불교의 창시자는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일 것이라는 가설까지도 전면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소위 &amp;lsquo;히라카와설(平川說)&amp;rsquo;이라고 불린 이 가설은 30년간 강력히 지지받게 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출가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다는 재가자, 더 나아가 기존 승단 출가자보다 뛰어나서 아라한이 아닌 불타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는 발상, 이에 기존 출가자들의 승단이 아닌 불타의 유골이 있는 불탑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대승불교라는 대담한 발상은 여러 학자에게 비판받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연구방법론은 히라카와와는 달리, 대체적으로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대승의 기원을 찾고 있다. 대표적으로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폴 해리슨(Paul Harrison), 조나탄 실크(Jonathan A. Silk),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등이다. 이들은 대중부 혹은 다른 진취적인 사상을 가졌던 부파불교의 승가 집단에서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되었다고 했다. 특히 쇼펜과 해리슨은 비문의 증거를 바탕으로 대승불교 운동은 출가수행자 집단에서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시모다 마사히로는 쇼펜의 연구방법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헌적 중심의 연구가 간과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특히 사사키 시즈카의 경우, 아쇼까왕 파승(破僧) 비문과 《마하승기율》 등의 율장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의견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amp;lsquo;①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계(戒)의 조문집인 바라제목차를 읽고 계율을 범한 자는 다른 승려에게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포살(布薩)&amp;rsquo; 및 &amp;lsquo;② 승가 내에서의 의결이나 쟁사 발생 시 승가 구성원의 의견을 확인하는 갈마(羯磨)&amp;rsquo; 등 중요한 행사를 같이한다면 승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사사키는 규명하였다. 이는 곧 붓다 교설을 상반되게 이해하더라도 함께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히라카와가 1958년 논문인 〈율장에서 본 대승교단(律藏より見たる大乘教團)〉에서 익히 밝혔듯이, &amp;lsquo;갈마에는 자기 부파의 비구 이외에는 추가될 수 없고, 부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율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부파의 비구들이 모여서 한 번에 갈마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p.35)&amp;rsquo;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오래된 학문적 전제에 대한 반론이 되는 것이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렇다면 현재 히라카와설은 구설(舊說)로서 의미가 퇴색된 것인가. 사사키 시즈카가 지적하였듯이, 학설의 최종 결론만을 보자면 현재 연구자들의 경향은 다시 대승을 소승의 연장선상에 두는 예전의 학설로 회귀한 것으로 보이지만, 히라카와설을 근간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불교학의 최신 국면을 맞이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대승을 대중부의 가지 끝에 위치시킨다는 단순한 구도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승불교라는 긴 전통을 가지는 고정화된 세계에서 대승과 같은 혁신적 종교운동이 왜 광범위하게 동시에 발생했는지를 연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라카와의 주장 중 대승이 불탑신앙에서 시작했다는 측면은 아직 크게 부정되지는 않고 있다. 이처럼 히라카와 아키라의 대승 기원설은, 현재까지도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승불교 기원론의 주요한 전제이자 이정표가 되고 있다.&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84&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tSHCN/btsIpHYf2Zr/TDSzNOajmBCzunq8VQWzOK/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tSHCN/btsIpHYf2Zr/TDSzNOajmBCzunq8VQWzOK/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tSHCN/btsIpHYf2Zr/TDSzNOajmBCzunq8VQWzOK/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tSHCN%2FbtsIpHYf2Zr%2FTDSzNOajmBCzunq8VQWzOK%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84&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84&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율장 연구의 교과서 《이백오십계의 연구(二百五十戒の研究)》&amp;nbsp;&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상에서 소개한 《율장의 연구》 및 《초기대승불교의 연구》 등은 모두 《히라카와 아키라 저작집(平川彰著作集)》으로 슌주샤(春秋社)에서 1999년까지 총 17권 분량으로 발간된 바 있다. 저작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집 &amp;lsquo;불교사상 연구&amp;rsquo; 부문에는 전체 8권이 배속되고 있다. 한국어 제목만 간단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법과 연기》 ② 《원시불교와 아비달마 불교》 ③ 《초기대승불교의 연구 Ⅰ》 ④ 《초기대승불교의 연구 Ⅱ》 ⑤ 《대승불교의 교리와 교단》 ⑥ 《초기대승과 법화사상》 ⑦ 《정토사상과 대승계》 ⑧ 《일본불교와 중국불교》가 그것이다. 한편 제2집인 &amp;lsquo;불교의 계율&amp;rsquo; 부문으로는 ⑨ 《율장의 연구 Ⅰ》 ⑩ 《율장의 연구 Ⅱ》 ⑪ 《원시불교의 교단조직 Ⅰ》 ⑫ 《원시불교의 교단조직 Ⅱ》 ⑬ 《불교교단의 의식주》 ⑭ 《이백오십계의 연구 Ⅰ》 ⑮ 《이백오십계의 연구 Ⅱ》 ⑯ 《이백오십계의 연구 Ⅲ》 ⑰ 《비구니율의 연구》까지 총 9권이 해당한다. 이와 같은 방대한 저작 규모를 보았을 때, 히라카와 아키라는 인도불교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불교에 중요한 법화와 정토까지 연찬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율장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중 히라카와 아키라가 가장 만년에 지은 저작인 《이백오십계의 연구(二百五十戒の研究)》(저작집 제14~16권)는 계율 연구의 요핵(要核)이자 초석이 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물론 앞에서 소개한 저작들이 모두 현재에도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바라이법(波羅夷法) 4개 조부터 멸쟁법(滅諍法) 7개 조까지 조문별로 총망라하여 비교 &amp;middot; 대조 분석하여, 그 의미를 깊이 연찬하고 있다는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250계 가운데 220여의 조문은 부파불교의 분열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것들은 석가모니의 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율장 연구의 획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는 비구 250계와 비구니 500계라고 언급되어 비구니율은 조문의 수가 많다고 생각된다고 하면서도, 비구계와 비구니계에는 공통의 조문인 공계(共戒)가 상당히 있어서, 이를 제하면 비구니계 고유의 조문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대만의 불교와 한국의 불교에 비구니 교단이 존재한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비구니 승가의 조직과 비구니계의 내용을 분명히 해석해 둘 필요가 있다고 한다(p.ⅱ).&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서장에서는 비구의 250계와 바라제목차에 대해 서술한다. 즉, 250계를 엄밀하게는 &amp;lsquo;바라제목차&amp;rsquo;라고 불러야 바른 것이지만, 250계 역시도 학술용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p.ⅱ). 진제(眞諦)가 &amp;lsquo;바라제목차(婆羅提木叉)&amp;rsquo;라는 음역으로 번역한 &amp;lsquo;prātimokṣa&amp;rsquo;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협의(狹義)로는 비구와 비구니의 계율 조문을 모은 것이라고 하며, 광의로는 비구계, 비구니계, 정학녀(正學女)의 육법계(六法戒), 사미와 사미니의 십계(十戒), 우바새와 우바이의 오계(五戒), 게다가 신자(信者)의 팔재계(八齋戒)까지 8종의 계를 말한다고 한다(p.3). 또한 &amp;lsquo;prātimokṣa&amp;rsquo;를 현장(玄奘)은 &amp;lsquo;별해탈(別解脫)&amp;rsquo;로 번역하며, 불교의 수증론(修證論)에서 삼계(三界)를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힘이 불교의 계에 있어서 &amp;lsquo;바라제목차(별해탈)&amp;rsquo;라고 부른다고 그는 설명한다. 또한 아함경의 시대에는 &amp;lsquo;prātimokṣa&amp;rsquo;가 비구와 비구니의 계율 조문만을 일컬었으나, 아비달마 시대가 되면 &amp;lsquo;칠중의 별해탈계(prātimokṣasaṃvara)&amp;rsquo;와 같이 재가자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amp;lsquo;prātimokṣa&amp;rsquo;가 사용된다(p.4)는 것이다. 이처럼 히라카와는 율장 연구의 핵심 개념들을 하나씩 짚어나가며 연구를 진행하였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　또한 이 책에서 노정되는 히라카와의 연구방법론에는 빨리 율장에서부터 한역된 광율(廣律)에 이르기까지 각 조문의 내용을 설명하고 율장 간 비교분석을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바일제(波逸提, prāya큦cittika) 제51조에서 제60조까지의 10개 조항인 &amp;lsquo;음주품(飮酒品, surāpānavagga)&amp;rsquo;의 내용을 히라카와는 개괄적으로 서술한다(p.537). 특히 빨리율 기준으로 제51조가 바로 &amp;lsquo;음주계(飮酒戒)&amp;rsquo;이다. 다만 《사분율》(제51조), 《오분율》(제51조), 《마하승기율》(제76조), 《설출세부계경(說出世部戒經)》(제76조), 《해탈계경(解脫戒經)》(제79조), 《십송율》(제79조), 《근본유부율》(제79조)로 설해져 있다는 대조표(p.538)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히라카와의 면밀한 분석은 율장 연구자를 비롯한 불교학자들의 학문적 의지처가 되고 있다. 따라서 율장 각 조문의 해석과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면, 학자들은 언제나 이 《이백오십계의 연구》를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31&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di7P7k/btsIphZZwH2/M6K3HD33o8Yni27POV1Cr1/img.pn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di7P7k/btsIphZZwH2/M6K3HD33o8Yni27POV1Cr1/img.pn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di7P7k/btsIphZZwH2/M6K3HD33o8Yni27POV1Cr1/img.pn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di7P7k%2FbtsIphZZwH2%2FM6K3HD33o8Yni27POV1Cr1%2Fimg.pn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31&quot; data-origin-width=&quot;600&quot; data-origin-height=&quot;431&quot;/&gt;&lt;/span&gt;&lt;/figure&gt;
&lt;/div&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율장을 바탕으로 현대의 윤리 문제까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만년에 이르러 히라카와는 자신의 관심사를 넓혀 선불교와 계율, 더 나아가 뇌사(腦死)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였다. 1986년 《규슈치과학회잡지(九州歯科学会雑誌)》 40(3)호에 게재된 뇌사에 관한 히라카와의 입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불교학 분야를 대표하여 일본학술회의(일본 총리실 산하 독립연구기관) 제13기에 히라카와가 참가하여 발언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뇌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종교계와 종교학계에 어떠한 의견이 있는가. 종교학회에서 취급한 적이 없기에 불분명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시급히 조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사견을 말한다. 일본인의 종교심에는 육체를 부처로서 숭배하는 것과 유골을 그 자체로 신불(神佛)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선조에 대한 공양을 중시하여 이를 태만히 하면 재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 이렇듯이 사체(死體)를 종교적으로 중시하기에 이것이 장기이식에 지장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차라리 인도주의나 박애 &amp;middot; 자비 정신의 방향으로부터 모색함에 의해, 장기이식과 일본인의 종교심 간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p.733).&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관심은 1988년 홋카이도대학에서의 제41회 일본인도학불교학 학술대회에 &amp;lsquo;장기이식문제검토위원회(臟器移植問題檢討委員會)&amp;rsquo;를 설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학회의 이사장이던 히라카와는 &amp;lsquo;뇌사 &amp;middot; 장기이식 문제 및 생명윤리(脳死 &amp;middot; 臓器移植問題および生命倫理)&amp;rsquo;라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20명으로 구성된 장기이식문제검토위원회의 수차례에 걸친 토의 결과는, &amp;lsquo;뇌사에 대하여&amp;rsquo; &amp;lsquo;장기이식에 대하여&amp;rsquo; &amp;lsquo;병(病)과 죽음에 대한 불교의 입장&amp;rsquo;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되어 공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이에 관해서는 마에다 에가쿠(前田惠學)의 1990년 보고 논문 〈臓器移植問題検討委員会の歩み〉를 참조할 것). 1989년 《뇌사와 장기이식(脳死と臓器移植)》에 발표된 〈일본인의 사생관으로부터의 배려를(日本人の死生観からの配慮を)〉이라는 글에서도 뇌사자의 장기이식에 대하여 일정 조건하에 찬성하는 히라카와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처럼 히라카와는 단지 과거의 율장에 관한 연구만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 목전에 닥친 윤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불교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심하는 실천가적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마치 율장의 수범수제(隨犯隨制)와도 비견될 만한 일이다. 불교의 율은 교단에서 혹은 출가자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석가모니불이 새롭게 제정하며 구성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당면한 새로운 문제인 뇌사와 장기이식 문제에 대하여 불교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불교계의 의견을 내려는 그의 의지는 율장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나가며: 율장의 위대한 연구자이자 교육가&lt;/b&gt;&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1975년 도쿄대학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히라카와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곧바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동년 도쿄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또한 그간의 학문 업적을 바탕으로 1975년 한국의 문화훈장 격인 &amp;lsquo;자수포장(紫綬褒章)&amp;rsquo;을 받았다. 이후 《아비달마구사론색인》(공동연구)에 대하여 일본학사원(대한민국학술원 격으로 일본 문부과학성의 특별 기관)에서 주는 일본학사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3년, 일본 불교학을 대표하는 학회인 일본인도학불교학회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85년에는 와세다대학에서 퇴직하고 일본학술회의(일본 총리실 산하 독립연구기관)의 제13기와 제14기 회원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학교법인 국제불교학원(國際佛敎學院) 설립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993년에는 일본학사원의 회원이 되어 학자로서의 영예를 모두 이루었다. 그 뒤로도 학문적 명망이 드높았던 히라카와 아키라는 1996년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國際佛敎學大學院大學)의 교수로 취임하여 평생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매진하다가, 2002년 별세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만년의 히라카와는 불교 교육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990년(76세)부터 &amp;lsquo;천태삼대부 모임(天台三大部の会)&amp;rsquo;를 시작하고 《마하지관(摩訶止觀)》을 한 달에 한두 번씩 강의를 한 점도 그의 교육자로서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일반인도 가입이 가능했던 이 강좌는 2001년까지 12년간 110회 정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지은 저술 중 슌주샤(春秋社)에서 1992년 출간된 《불교입문(佛敎入門)》 등은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불교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그는 일찍이 일본인도학불교학회(日本印度學佛敎學會)의 이사장이 된 1983년부터 컴퓨터에 의한 논문 검색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현재 일본에서 발간된 정기 간행잡지, 기념 논문집, 일반 논문집 등 중 3만 편 이상의 인도학과 불교학 논문이 탑재된 &amp;lsquo;인도학불교학 논문 데이터베이스(INBUDS: &lt;a href=&quot;http://www.inbuds.net)&quot;&gt;www.inbuds.net)&lt;/a&gt;&amp;rsquo;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학문의 홍포와 후학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는 전산화가 필수라는 점을 이미 1980년대부터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장경의 내용을 통째로 외워서 살아 있는 만물박사[生き字引]로도 불린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처럼 율장의 위대한 연구자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헌을 학계와 사회에 회향하였다. ■&amp;nbsp;&lt;/p&gt;
&lt;p style=&quot;color: #000000;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start;&quot;&gt;박성일 yumede@snu.ac.kr&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start;&quot;&gt;성균관대학교 유학 &amp;middot; 동양학부 및 법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석사 &amp;middot; 박사).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교육원 수학.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대학원 동양학 연구장학생 및 BDK Fellowship 장학생으로 선발됨.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 &amp;middot; 객원연구원, 경남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 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범망경》 계율의 윤리관 연구－남북조 수당 시기의 사회적&amp;nbsp;현실과의 연관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amp;nbsp;&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7f7f7; color: #1e1e1e; text-align: start;&quot;&gt;출처 : 불교평론(&lt;a href=&quot;http://www.budreview.com)&quot;&gt;http://www.budreview.com)&lt;/a&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관심통/인문&amp;middot;예술&amp;middot;종교&amp;middot;철학</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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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l 2024 07:23: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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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무연고 무빈소 장례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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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출처&amp;nbsp; &lt;a href=&quot;https://cuba.tistory.com/387&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opener&amp;nbsp;noreferrer&quot;&gt;https://cuba.tistory.com/387&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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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관심통/생활&amp;middot;건강</category>
      <author>우공(友空)</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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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8 May 2024 10:29: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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