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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 번역 비교 - >>> 오역 <<<

우공(友空) 2016. 12. 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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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각의 원문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수단

 

확실히 예전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옛날이라고 한 것은 불과 삼사십년전의 일을 말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컴퓨터라는 것이 없었다. 전화가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그것도 귀한 물건 이었다. 컴퓨터가 대중화 된 것은 이십여년전이다. 2000년에 들어 서면서부터 인터넷이 일반화 되었다. 그것도 매우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런 영향이어서인지 카페나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이 생겨 났다. 이후 전개 되는 소통수단을 보면 거의 광속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디지털기기에 따른 소통수단이 당연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마치 철도가 놓여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기차 타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지켜 보았던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한다. 인터넷에서 소통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살아 온지 10년이 되었다. 2005년 처음으로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십일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동안 수 많은 글을 쓰고 익명의 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여 왔다.

 

오로지 필명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실명을 알고자 한다거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넷상에서 그 사람에 대하여 알려고 하려거든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남겨진 글을 보고서 그 사람의 인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남겨진 글과 사진 등은 사실상 그 사람의 얼굴과도 같고 그 사람의 인격이라 볼 수 있다.

 

인터넷에 여러 가지 소통수단이 있다. 가장 많이 즐겨 찾는 카페나 블로그 또는 게시판 뿐만 아니라 메일도 있다. 그런데 메일은 일대일 소통수단이다. 그래서 좀 더 심도 있게 견해를 주고 받을 수 있다.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진흙속의연꽃필명이

 

최근 메일을 하나 받았다.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대한 것이다. 메일에 따르면 최근 발간된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거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책을 발간할 때 머리말을 보면 후원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또 편집을 하는데 도움을 준 봉사자의 이름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책의 서두에 그것도 권위를 갖는 경전의 번역서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도 후원한 적이 없고 더구나 전재성박사와 일면식도 없는데 필명이 실려 있다고 하니 매우 의아해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아마 잘못 보았겠지라며 넘겼다. 그런데 이어지는 메일에서 필명이 들어 있는 페이지까지 알려 주었다.

 

선물로 받은 단행본 상윳따니까냐야를 열어 보았다. 메일에서 알려 준대로 정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언급되어 있다. 책의 서두에 전집해제가 있는데  필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리고 이번에 통합개정판에서는 진흙속의 연꽃 님의 지적 고양이의 경의 우화에서 생쥐와 고양이의 위치가 역전되지 않았나 하는 점에 대해 검토한 결과 역자가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고, 이전의 번역은 사실상 이전 번역은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기 때문에 빠알리어로 환원하여 퇴현 판본을 만들어 주석에 집어넣어서 이전의 번역도 함께 고려 하도록 실었습니다.

 

(전집해제 32p,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전재성박사)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32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필명이 거론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왜 그런가? 번역작업하기도 어렵지만 후원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번역서가 출간되기 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을 실어 주는 것이 하나의 예의인 것 같다.

 

이번 통합본에서도 후원자의 명단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성균대학교 유필화 교수의 추천사를 볼 수 있다. 머리말에는 1999년부터 2007년 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월주, 청화, 도법, 수경, 동진, 상원, 성타, 원해, 일연, 일철, 정대, 지홍, 명성, 학담스님이 언급되어 있다. 또 재가자로서는 황경환, 김광하, 최훈동, 전현수, 유필화, 박승관님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번 통합본 출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분의 스님을 소개 하고 있다. 머리말에 따르면 통합본 출간에 필요한 비용 일체를 부담한 벽안스님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까밀라, 박은현, 이준용, 김현수 님에게도 감사 한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고귀한 성보 같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보통불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한다. 한번 보고 마는 소설책이 아니라 늘 수지독송하는 성보로서 책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무척 자랑스런 일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한번도 후원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책을 내는데 도움을 준 적이 없건만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실려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격하였다.

 

시공을 초월한 강력한 소통수단

 

성보 같은 경전에 필명에 실려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비록 실명은 아니고 필명일지라도 이렇게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소통의 산물이라 본다. 만일 인터넷과 같은 소통수단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확실하게 변하였다.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 시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그 변화를 실감한다.

 

인터넷시대에 한사람의 생각이 영향을 줄 수 있다. 인터넷의 속성상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네트워크만 깔려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하다. 올려진 글이 십년전의 것이라도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종종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수 년전에 올려진 글임에도 소감에 대하여 짤막하게 코멘트 해 놓은 것을 보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시공을 초월하여 누군가에는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실린 고양이의 경에 대한 이야기 역시 시공을 초월한 강력한 소통수단으로서의 인터넷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가 언급한 고양이의 경은 어떤 내용일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고

 

전재성박사는 전집해제글에서 고양이 경(Biālasutta, S20.10)’에 대하여 생물학적 관점으로 접근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빠알리원문과는 정반대의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간된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원문대로 번역되어 있다. 과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빠알리 원문에 따르면 초불연 번역이 맞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전재성박사가 맞다. 이렇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고 상당한 혼란의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두 번역을 비교 하였다. 그것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2013-10-15)’라는 제목의 글과,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2013-10-19)’라는 제목을 가진 두 개의 글이다.

 

첫 번째 글이 올려지자 넷상에서는 반응이 뜨거웠다. 이른바 댓글 공방이 벌어진 것이다. 빠알리 원문을 직역한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번역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공방이다.

 

빠알리 원문을 있는 그대로 번역한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의견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보디스님과 초불연 두곳에서 동일한 번역이고 한분이 다른 번역이면, 당연히 그 한분이 "왜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지?"라고 해야 올바른 접근이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보디스님과 초불연 번역이 훨씬 합리적으로 말이 되는것 같아요.

(수카 법우님)

 

 

두 번역서에서 정반대의 번역이 실려 있는 것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이유는 빠알리원문대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빅쿠보디의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쥐가 씹어 먹히는 와중에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기에 쥐를 '노리고 있던' 고양이가 고통을 당한다?
쥐도 음식이 필요하고 고양이도 음식이 필요하고 수행승도 그러하지만, 생존을 위해 먹을것을 구하는 문제나 먹을 때 급하게 먹고 천천히 먹고 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봅니다.

(수행자 법우님)

 

 

글을 보면 고양이에 씹혀 먹힌 쥐가 고양이의 내장에 들어가 창자를 갉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한다. 이는 앞서 언급된 전재성박사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합리적 의문과 같은 것이라 본다. 

 

이렇게 서로 다른 번역에 대하여 댓글공방이 이어지자 어느 법우님은 중간의 위치에서 양시론적 견해를 내 놓았다.

 

 

학문적 규명을 꼭 해야만 하겠다 라면 모르겠으나 두 분의 번역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감에 있어서 문제삼을 필요까진 없다고 봅니다. 고양이를 수행자로 비유했다고 읽든 쥐를 수행자로 비유했다고 읽든지 간에 결론은 수행자는 싸띠를 잘 해야 된다는 의미니까 말이죠.

(금강승)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둘 다 모두 맞다는 양시론적 견해이다. 중요한 것은 사띠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물었는지, 반대로 쥐가 고양이를 물었는지에 대하여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의 문맥을 보아야 함을 말한다. 왜냐 하면 두 개의 번역서의 내용이 상반되는 것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행자가 감각적 대상을 만났을 때 잘 사띠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두 번역서에서 고양이의 경을 보면 정반대의 번역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일까?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원문

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2) 전재성님역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3) 각묵스님역

그때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S20.10)

4) 빅쿠보디역

Then that mouse came out for food, and the cat grabbed it and swallowed it hastily, without chewing it. Then that little mouse ate the cat's intestines and mesentery, and on that account the cat met with death and deadly suffering. (S20.10)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른 부분은 빠알리어“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문구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번역과 빅쿠보디의 번역은 일치 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은 정반대이다.

 

빠알리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양이가 생쥐를 통째로 삼키고, 삼켜진 생쥐는고양이의 창자를 긁어 먹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쥐가 고양이의 뱃속에 들어 가는 순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서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채로 먹힌 생쥐가 고양이 몸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깔라마의 경에서

 

이와 같은 정반대의 번역에 대하여 댓글공방이 치열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의 글에서는 깔라마의 경(A3.65)’의 비유를 들어 합리적 추론에 따른 의심을 할 수 있음을 밝혔다. 물론 깔라마의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라는 말은 없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라고 한다면 자등명법등명이 성립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귀의에서 법귀의에 대한 것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A3.65)”라 한 것은 외도의 견해를 말한다. 여기서 성전은 부처님 당시 베다를 뜻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더라도 합리적으로 의심하라고 말한다. 이를 더 확장해서 니까야에 쓰여 있다고 해서 모두 믿지 말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니까야를 의심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경을 읽으면서도 과연 부처님이 정말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라며 의심 할 것이다. 더구나 악마나 하늘사람 등 초월적 존재가 나타난다든가, 마치 굽혔다가 편사이에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표현 되었다면 역시 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경전의 내용에 대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여 취사 선택한다면 남아 있을 경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어 결국 남는 것은 대념처경과도 같은 수행관련 경만 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부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소중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상식적으로 고양이의 창자에 들어가 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는 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빠알리원문에는 그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을 잘 분석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빠알리원문에서 ‘땃사(tassa)’라는 대명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명사 땃사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면 초불연 번역에서와 같이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가 된다. 반면 땃사에 대하여 쥐로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대로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가 된다. 따라서 인칭대명사 ‘땃사(tassa)’ 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느냐 쥐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글이 나온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가장 최근에 댓글을 주신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려 놓았다.

 

 

제 생각 또한 전재성님의 번역이 맞다고 여겨지지만 판단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빨리어를 알고 직접 해석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지식에 의하면 쥐는 아마 고양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즉시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되고(!) 있을 것이기에 고양이의 창자를 물어뜯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볼딱지법우님, 2015-02-26)

 

 

가장 최근에 글을 주신 법우님에 따르면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하였다. 합리적으로 추론 하였을 때 전재성님의 번역이 맞긴 하지만 빠알리어 원문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오역을 시인하고

 

인터넷시대를 살고 있다. 사이버세상과 현실세상의 구별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으면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와도 소통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에 올려 놓았던 고양이 경에서의 정반대 번역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 영향을 이번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전집해제글에서 보게 되었다.

 

전재성님은 해제글에서 생물학적 관점신화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해제글을 보면 생물학적 관점에 대하여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 하여 사실상 번역에 무리가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라 하였다.

 

생물학적 관점에 따른 번역이 오늘날 과학적 상식에 맞는다. 그럼에도 빠알리 원문을 중시하여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통합본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변경전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개정판)

2)변경후

그때 생쥐가 먹이를 구하로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씹지 않고 먹었다.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통합본 개정판)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전의 개정판에서는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로 되어 있는데, 통합본 개정판에서는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라고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변경한 것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 이 문장에 관한 한, 종래의 역자의 번역은 논리적이나 문법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오역이다. 그러나 번역은 종래의 전통적인 빠알리본은 생물학적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래서 빠알리원전에서 밑줄 그은 세 군데는 역자가 고쳐서 퇴현 판본을 만들어 번역한다면, 종래와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biālo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ā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2914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놀랍게도 오역을 시인하고 있다. 이전 번역에 오류가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다른 번역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러는 한편 퇴현본에서는 빠알리 문구를 바로 잡아 이전 번역처럼 적용하였다고 하였다.

 

빠알리원문과 퇴현본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원문 번역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2) 퇴현본 번역

Tassa biālo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ā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퇴현본에서 바뀐 것은 Tassa 다음에 mudumūsi(생쥐)가 아니라 biālo(고양이)임을 알 수 있다.

 

사띠를 놓쳤을 때

 

사람들은 상식에 근거하여 살아 간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하여 이상하고 수상하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종종 일반상식과 맞지 않는 내용도 발견된다. 그렇다고 경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면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원문을 보면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은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고양이는 극심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그것도 죽을 정도의 고통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왜 고양이의 비유를 들었을까? 경에서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Biālasutta-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야하게 옷을 걸쳐 입은 여인은 생쥐로 비유된다. 그리고 여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빅쿠는 고양이로 비유 된다.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이지만 고양이는 생쥐를 통째로 삼키고, 삼켜진 생쥐는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어 고양이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오전에 탁발 나간 빅쿠가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고 욕정이 일어난다. 이 욕정으로 인하여 빅쿠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사띠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죽음이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한다.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하러 가리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Biālasutta-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전재성님역)

 

 

계율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과 마주쳤을 때 감각적 욕망에 끄달린다면 계율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마음은 오염원에 의하여 오염되고 마는데 이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야기 하고 말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해야 함을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사띠(알아차림)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띠가 중요할까?

 

여인 보기를 가족보기처럼

 

종종 댓글을 받는다. 그런 글중에서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글이 있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진다. 최근 사띠의 중요성에 대하여 인상적인 글을 보았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기에, 일상에서 사띠수행이 중요한 것입니다..사띠가 마음을 지켜주니까요. 결국 계행을 깨끗하게 해주는 역할과 사띠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의 고요를 얻게 되면서, 선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상태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사띠수행이 계행이라는 덕행도 지키고 마음도 고요하게 해주는 역활을 하기에 사띠가 불법수행의 기본이고 토대이다라는 것입니다.

 

(J법우님)

 

 

J법우님이 올린 글의 일부이다. 사띠는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계행이다. 항상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계행은 자동으로 지켜 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띠수행이 계행이라는 덕행도 지키고 마음도 고요하게 해주는 역활을 하기에 사띠가 불법수행의 기본이고 토대이다.”라 하였다.

 

오전에 탁발을 나간 빅쿠가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았어도 사띠를 유지한다면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는 듯한 극심한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띠를 유지하여야 할까? 초기경 주석에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자매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자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딸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Smv.582-583)”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여인 보기를 가족보기처럼 하라는 것이다.

 

불량품은 구매 하지 않듯이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필명 진흙속의연꽃이라는 이름이 실린 것에 대하여 우스개 소리로 가문의 영광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경전이 다른 책과는 달리 성보(聖寶)’와 같이 소중하게 다루어 하는 것이기에 서문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은 감격스런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후원을 해서 올라 간 것도 아니고 교정 등 봉사를 해서 올라 간 것이 아니다. 단지 블로그에 비교번역을 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유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오역을 바로 잡게 되었고 세상에 필명도 알려 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번역자의 태도라 본다. 이는 번역자의 양심에 속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였을 때 뒷탈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일일이 오류를 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전집해제글에 따르면  배우고배운다.’에 대하여 전념하고전념한다.’는 식으로 그 밖에 어떤 표현은 소리 없이 조용히 바로 잡았다.”라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마치 끊임 없이 상품을 개량해 나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십년가 상품개발을 이십년 하였다2005년 까지 이십년간 셋톱박스를 개발하였는데 회로설계를 비롯한 하드웨어를 담당하였다.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로 변환이 이루어진 시기에 이르기 까지 위성방송과 케이블과 관련된 각종 셋톱박스를 수 없이 개발하였다.

 

제품이 개발되면 생산이 되고 필드에 깔린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첫 개발제품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 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점이 필드(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필드에서 발생된 문제점을 취합 하여 수정과 보완 작업에 들어 간다. 이렇게 끊임 없이 개량하는 것이 시장에서 팔린다.

 

오늘날 명품은 끊임 없이 보완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번역서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부피도 방대하기도 하지만 내용도 심오하기 때문에 오역이나 탈역, 오타 등이 일어 날 수 있다. 그래서 초판본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개정판이 나올수록 점점 나아진다.

 

소비자는 불량품을 사지 않는다. 그래서 불량품은 시장에서 도태 되고 만다. 전자제품처럼 번역서도 끊임 없이 교정해 나가야 한다. 또한 오류가 있으면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번역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오류 없는 번역서를 가지게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승리 하는 것이다. 이번에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의출간에 심혈을 기울인 전재성박사님에게 감사 드린다.

 

 

 

2015-03-13

진흙속의연꽃





 

상윳따니까야 1시와 함께 모음번역비교를 마치고

 

 

상윳따니까야 1권에 대한 번역비교를 마쳤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 했다. 두 번역서에 대하여 한번역서가 오류투성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그럴까?”라며 의구심을 가지고 번역한 것이다. 결과는 정 반대이었다. 물론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비교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경에 대하여 번역비교를 했는데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번역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문자만 우리말로 옮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이 없이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보통불자가 주제넘게 번역비교를 했다. 2013 9월부터 시작 했으니 만으로 3년이 다 되어 간다. 상윳따니까야 1시와 함께 모음(Sagatha Vagga)’에 대하여 3년동안 모두 185개의 글을 올렸다. 지나고 보니 책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가 되었다. 책에는 노랑형광메모리펜 자국이 가득하다. 어떤 경우라도 책에는 펜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노랑형광메모리펜하나만 허용한다. 그러다 보니 중요포인트는 노랑색이 덧칠되어 있다.

 

 


 

 

 

 


번역비교를 하면서 오역과 탈역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를 그대로 블로그에 올렸다. 혹시라도 번역자들이 보았다면 다음 개정판에 바로 잡아 올린다면 보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 불자들은 번역된 경전을 이용하여 신행생활을 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서 근거로 사용한다. 그런데 잘못된 번역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정반대로 번역되어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필업을 짓게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빠알리원문대로 읽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시대라 빠알리원전을 인터넷으로 볼 수도 있고 다운 받아 볼 수도 있다. 특히 ‘PCED194’라 하여 인터넷에서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누구나 다운 받을 있는 빠알리 경전과 전자사전,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2013-07-0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에서 美洲下点一를 클릭하면 빠알리사전과 빠알리삼장을 다운 받을 수 있다.

 

다운받은 PCED194는 번역비교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빠알리어를 모르고, 빠알리어를 배워 본 적이 없음에도 다운 받은 PCED194를 활용하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비록 영어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실력 정도이면 독해가 가능하다. 더구나 사전에서는 해당 단어가 사용된 경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해당단어가 사용된 인연담 뿐만 아니라 간단한 해설도 겸하고 있어서 이 PCED194 하나만 있으면 빠알리원전을 읽을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을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빠알리원문과 번역서를 함께 읽는 것이다. 상윳따니니까야 1권 번역비교할 때 빠알리원문, 전재성님번역(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묵스님번역(초기불전연구원), 빅쿠보디영역(CDB) 이렇게 다섯 가지 문헌을 비교했다. 그 결과 어떤 번역이 오류가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통불자의 번역비교에 대하여 칭찬도 있지만 비난도 받는다. 깜냥도 되지 않는 자가 주제넘게 번역비교한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름의 방식대로 번역비교했다. 그 결과는 인터넷에 그대로 남아 있다. 불교종단에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능력껏 번역비교했다. 그러나 오류가 발견되어 이를 지적했을 때 번역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다소 거친 표현이 있어서일까 어느 카페에서는 강퇴당하기도 했다. 그 카페에 글을 올리지 않았음에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강제탈퇴이유를 보니 욕설, 인신공격 등이라 되어 있다. 욕설도 인신공격도 한 적이 없다. 다만 오역이나 탈역 등에 대하여 책임을 강조했을 뿐이다.

 

개발자가 개발한 제품을 끊임 없이 업그레이드 하듯이 번역자 역시 끊임 없이 보완하여 개정판을 내어 놓아야 한다. 이를 똥싼 사람이 똥 치우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윤문하는 것에 대하여 번역자 자신이 직접 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들에게 맡겨 놓았을 때 똥싼 사람 따로 있고 똥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격이라 표현했다. 아마 이런 표현이 과한 것 같다. 혹시라도 과한 표현이라면 사과한다.

 

번역자마다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 같다. 오역을 지적했을 때 내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전재성님은 스스로 오역을 인정하고 오역에 대한 설명문까지 내었다. 한권으로 된 상윳따니까야에 머리말에서 고양이의 경(S20.10)’을 예로 들면서 신화적 번역과 생물학적 번역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오역을 바로 잡았다. 이전에는 생물학적 번역을 했으나 원문대로 신화적 번역으로 바로 잡는다고 했다. 그리고 필명을 거론하며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상윳따니까야 1시와 함께 모음편을 번역비교 하면서 많은 것을 스스로 배웠다. 주로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 1권을 보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못지 않은 아름다운 게송으로 가득하다. 모두 56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상윳따니까야가 한권의 모음에 요약되어 있는 듯 하다. 모두 7권의 상윳따니까야에서 1권을 뺀 2권부터 7권까지는 56개 주제별로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산문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1권은 주로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치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접하는 듯하다. 실제로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우다나, 장로게 등의 게송이 일부 소개 되어 있기도 하다.

 

상윳따니까야 1권을 번역비교하면서 행복했다. 글을 쓸 때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까?”라며 긴장을 하지만 막상 글을 쓰다 보면 글쓰기 삼매에 빠진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흘러 간다. 이것 저것 들추어 보고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면 책상에는 책으로 가득하고, 두 개의 모니터에는 검색된 사이트로 가득하다. 이렇게 약 다섯 시간 정도 몰입하면 A4 12폰트 사이즈로 하여 10페이지가 쓰여진다. 이를 다듬어서 블로그에 올리면 해야 할 일을 마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강한 성취감을 맛 본다. 여러 시간 투자한 보람이 글로서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성된 글이 지난 3년동안 185개에 달한다.

 

앞으로 번역비교는 계속할 것이다. 1권을 마쳤으니 2권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번역비교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일없이 하는데 까지 하려 한다. 다만 제대로 공부한 학자나 스님들이 이런 일에 나서 주었으면 한다. 교육받지 않은 보통불자의 글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는 만큼 알려 줄 뿐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거나 배우고 싶다면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 가면 된다. 부디 강호의 숨은 고수들은 명예를 생각하는 것 보다 세상사람들의 가르침에 대한 갈증을 해소 해주기 바란다.

 

 

2016-07-17

진흙속의연꽃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갈팡질팡 번역을 보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요즘은 교회뿐만 아니라 성당에서도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늘 지나다니는 생태하천 길에서 어깨띠를 두른 성당사람들이 휴지를 줍고 있다. 일부는 길목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길을 막고 커피나 과자, 사탕, 과일을 제공하며 권유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한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교회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 그런 사람들을 목격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지나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전단지를 나누어 주려 제스처를 취하면 퉁명스럽게 지나가는 사람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 고개만 까닥이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 없이 지나친다.

 

왜 부처님은 피곤하다고 하였을까?

 

통행로를 막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을 대하면 피곤하다. 특히 자신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종교를 믿기 위해서는 내 종교를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전도사를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청원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Brahma Sahampati Mengunjungi Buddha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성취한 진리에 대하여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사함빠띠 브라흐마(하느님)의 거듭된 간청에 따라 마침내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S6: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나 사상을 먼저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진리를 설해 보았자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S6:1)”라 하였다.

 

정반대의 번역이 있는데

 

위 게송과 관련하여 현재 두 가지 정반대의 번역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성스런 구함의 경(M26)’에 똑 같은 게송이 있는데 초불연과 성전협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

Vihi
sasaññi pagua na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 ti.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성스런 구함 경, M26, 초불연 대림스님역)

 

 

[세존]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성스런 구함의 경(M26), 성전협 전재성님역)

 

 

‘Open for them are the doors to the Deathless,

Let those with ears now show their faith.

Thinking it would be troublesome,

O Brahma, I did not speak the Dhamma subtle and sublime.’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역)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문구가 ‘pamuñcantu saddha’ 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정반대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각주를 보면

 

이 문구에 대한 각주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

성전협

pamuñcantu saddha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각주

“’믿음을 보여라.’는 것은 불사라고 불리는 열반의 문인 성스런 도를 설했으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는 말씀이다.”(MA.ii.181)

‘예전에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뜻이다.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서(MA.ii.181)를 인용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주석서 인용없이 “예전에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뜻이라 하였다.

 

그런데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가 공동으로 번역한 MDB 에 따르면 문제의 문구에 대하여 “show their faith(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초불연의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와 일치 한다.

 

그렇다면 ‘pamuñcantu saddha’의 뜻은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초불연)”일까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성전협)”일까? 대체 어느 번역이 맞는 것일까?

 

마성스님의 글에

 

‘pamuñcantu saddha’문구에 대한 마성스님의 글이 있다. 범천의 권청(勸請)이라는 글이다.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4 4월호), pp.13-20에 게재된 것이라 하였다. 스님의 글은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마성스님의 홈페이지에서 글을 열심히 퍼 나른 것이다. 그 홈페이지는 폐쇄 되었지만 그 때 퍼나른 글은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범천의 권청에 대한 게송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
不死)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범천의 권청(勸請), 마성스님)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고 하였다. 이는 스님의 글에 따르면 “팔리어 <율장>의 [대품]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율장 대품에도 똑 같은 게송이 있음을 말한다.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마성스님의 글에서는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잘 반영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의 타락이 극에 달해 대규모 동물희생제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 사실은 숫따니빠따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바라문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소를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은 ‘불법적인 일이다’고 소리쳤습니다.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의의 폭력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지내는 자들은 정의를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어느 바라문이 예전의 바라문은 어떠 하였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자 부처님이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바라문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살생으로 이루어진 제사에 대하여 천상의 존재들은 불법적인 일이다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바라문들은 대규모 동물희생제 만 지낸 것은 아니다.  경에서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핀을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Sn2.7)”라는 문구로 보아 ‘인간 희생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동물희생제나 인간희생제 모두 살생하는 것이다. 후손들이 죽은 자가 하늘에 태어나도록 동물희생제나 인간희생제를 지내는 것은 정의를 파괴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은 청원경에서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 하였을 것이다.

 

후박나무님의 글에서

 

이처럼 ‘pamuñcantu saddha’의 뜻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전재성님역)”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님역)”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후박나무님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만약 [믿음을 내어라]라고 해석한다면 붓다는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믿어라 라는 말이 되어서 “와서 보라”는 붓다의 설법자세와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라는 깔라마경과도 위배되는 가르침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라고 번역한 것은 그 믿음이란 것이 그 당시 제사 지내는 브라흐만사상이라고 이해 해서 그렇게 의역한 것 같습니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후박나무님에 따르면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번역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라는 것인데 먼저 믿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가르침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왜 초불연 번역이 오역인가?

 

먼저 믿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이 예천불지  부르짓는 것과 같다. 그런 전도사를 대하는 것은 피곤할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법을 청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도 세 번 청해야 법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법을 설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일부로 다가가서 말해 주는 것은 길거리 전도사들 수법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이 ‘pamuñcantu saddha라고 말한 것은 먼저 믿어라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 즉 근거없는 제사에 대한 믿음,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더 넓게 말하면 부처님 당시 브라만으로 대표 되는 영원주의와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허무주의나 숙명론 등 삿된 견해, 62가지 사견을 먼저 내려 놓으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삿된 견해를 가진자에게 무조건 먼저 믿음을 내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삿된 견해를 가진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불연의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초불연)”이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라 본다. 또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의 “show their faith(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영역한 것도 역시 오역이라 본다.

 

게송인가 산문인가?

 

후박나무님의 글은 2008년에 올려진 글이다. 인용한 글은 각묵스님이 번역한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대전기경, D14)이다. 초불연에서 상윳따니까와 맛지마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지 이전의 번역된 것이다. 참고로 상윳따니까야 청원경의 게송은 모두 세 군데서 보여진다. 상윳따니까야 권청경(S6.1),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대전기경, D14),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  이렇게 세 군데 똑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각묵스님이 최초로 번역한 디가니까야 대전기경(D14)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믿음을 내어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각묵스님역, 디가니까야 대전기경, D14)

 

 

디가 니까야에서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앞서 지적한대로 오역이다. 더구나 ‘Vihisasaññi pagua na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 ti.’라는 문구에 대하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하여 길게 번역하였다. 번역이 너무 길고 산문형식이라서 게송이 맛이 아지 않는다. 주석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올라 온 듯 하다. 그런데 이 번역도 오역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문제의 문구를 원문과 함께 전재성님역과 최봉수님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Vihisasaññi pagua na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 ti.

 

1)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전재성님역)

 

2)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최봉수님역)

 

3)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각묵스님역)

 

4) Thinking it would be troublesome, O Brahma, I did not speak the Dhamma subtle and sublime.(빅쿠 보디와 냐나몰리 역)

 

 

문제의 번역문구는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각묵스님)”라는 구절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라고 하였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누가 상처 받았나?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

 

 

[의견]

이 번역은 크게 상처받는 것이 붓다인가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vihimsasaññī는 vihimsā(해로움)+saññin(산냐를 가진자)인데 saññin의 주격 단수가 saññī입니다. 그래서 “해롭다는 생각을 가진 자인 (나는) ” 의 뜻입니다.

 

여기서 망설여지는 부분은 붓다가 어떻게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ī)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ī)는 이미 앞에서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말을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받는 다는 산냐란 앞에서 붓다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라고 3번 생각한 적이 있는 “붓다의 산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도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a)는 성가심(vīhesā)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번역에서 곤란, 피로, 상처, troublesome 등이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곤란하고, 누가 피로하고, 누가상처 받고, 누구 귀찮은(troublesome)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고 함으로서 인간들이 상처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처받은 자가 부처님인 이유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왜 오역인가? 상처받는 자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맥으로 파악하면 알 수 있다. 게송 바로 전에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세존]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한다.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하면,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

 

(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인용된 문구에 따르면 마지막에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연기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법을 설해 보았자 부처님만 피곤할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문맥으로 파악하면 게송에서 왜 부처님이 곤란을 예견하고(전재성님역)”이라든가,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최봉수님역)”이라고 번역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한 게송에서 두 번 오역한 각묵스님

 

그러나 각묵스님은 과도하게 긴 문장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 하여 마치 피곤한 대상이 인간들인처럼 오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짤막한 게송에서 두 번 오역하였다. 디가니까야 대전기경(D14)에서 믿음을 내어라라 하여 한 번 오역을 하였고, 이어서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고 함으로서 두 번째 오역을 하였다. 이렇게 하나의 게송에서 연달아 두 번 오역을 하였다.

 

놀라운 입장변화

 

디가니까야 대전기경에서 무려 두 군데나 오역이 발견되었다. 그런 디가니까야는 각묵스님의 최초의 번역으로서 2006년에 출간 되었다. 그러나 오역된 부분이 바로 잡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번역비교를 하기 위하여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1권을 구입하였는데, 청원경(S6.1)에는 디가니까(D14)와 맛지마니까야(M26)에서 보던 것과 정반대의 번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불사의 문들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았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S6.1, 각묵스님역)

 

 

게송을 보면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믿음을 내어라(각묵스님)”과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대림스님)”역과 정반대이다. 왜 이렇게 입장이 변했을까? 아쉽게도 설명이 없다. 오역이 되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역이 있었다면 해명을 해야

 

이는 전재성님과 매우 대조적이다. 전재성님은 자신의 오역에 대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재성님이 밝힌 오역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초역 전집에는 <<쌍윳따니까야>> 전 5편을 초판본 한글판 11권 전집으로 엮어내어 순차적으로 낼 때만 하더라도 번역조건이 너무나 열악한 나머지 교정진 조차 없이 발간하는 바람에 많은 오타, 착간뿐만 아니라 간혹 오역이 발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고귀한 부처님 말씀을 잘못 훼손하지나 않았나 하는 송구스러움이 있는데, 이 책을 사랑하여주신 많은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초판본 완간 4년 만에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꼼꼼히 교정하고 편집을 새로 하고 주석을 증보한 개정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머리말)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을 발간하면서 오타, 오역 등에 대하여 사과 하였다. 그리고 오역이 있었던 경의 각주에서 오역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바로 잡은 것에 대한 설명을 허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오역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독자를 햇갈리게 하는 각주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2013년 판을 보면 놀랍게도 맛지마니까야(M26)에서 보던 각주 내용과 정반대이다. 게송의 내용이 180도 바뀌었기 때문에 각주의 내용 또한 180도로 바뀐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각주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각주

pamuñcantu saddha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각주

“’믿음을 보여라.’는 것은 불사라고 불리는 열반의 문인 성스런 도를 설했으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는 말씀이다.”(MA.ii.181)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는 pamuñcantu saddha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모두는 자신의 믿음을 내버려야 한다.”로 설명하고 있다. (SA.i.203)

번역자

초불연 대림스님

초불연 각묵스님

판본

2012년

2013년

 

 

초불연에서 출간된 맛지마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똑 같은 게송에 대하여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다. 대림스님이 번역하고 각묵스님이 감수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라 할였는데, 똑 같은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전의 디가니까야에서와 180도 다르게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하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각각 주석서를 인용하였는데 각주 또한 180도 다르다. 그래서 주석서 맛지마니까야 주석서(MA.ii.181)를 인용한 것을 보면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는 말씀이다.”라 되어 있고, 상윳따니까야 주석서(SA.i.203)를 인용한 설명을 보면 자신의 믿음을 내버러야 한다라고 되어 있어서 정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대체 어떤 것이 맞는 번역이고, 어떤 주석이 맞는 것일까? 이를 읽는 독자는 햇갈리기만 한다.

 

초불연의 갈팡질팡 번역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갈팡질팡 하는 것 같다. 니까야마다 용어가 다르고 번역이 다르고 각주 또한 다르다. 이에 비하여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은 초지일관 같은 패턴을 유지한다. 이는 한 번역자가 4부 니까야를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두 번역승이 번역한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번역승 마다 다르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번역승이 서로 감수를 했음에도 같은 내용을 두고 정반대의 번역이 일어 났다는 것이다.

 

번역 모음을 보면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번역과 달리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은 초지일관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이런 번역 모음을 표로 정리허였다.

 

 

 

 

 

  

 

빠알리 원문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

Vihi
sasaññi pagua na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 ti.

pamuñcantu saddha

초불연

디가니까야(D14)

2006년판,

각묵스님역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믿음을 내어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믿음을 내어라.

(오역)

 

 

초불연

맛지마니까야(M26)

2012년판,

대림스님역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믿음을 보여라.

(오역)

 

 

 

초불연

상윳따마니까야(S6.1)

2013년판(초판2),

각묵스님역

그들에게 불사의 문들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았다.

믿음을 버려라

성전협

맛지마니까야(M26) 

2009년 개정 초판,

전재성님역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신앙을 버려라

성전협

디가니까야(D14) 

2011년 초판,

전재성님역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신앙을 버려라

성전협

상윳따니까야(S6.1)

2006년 개정 초판,

전재성님역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신앙을 버려라

영역

맛지마니까야(M26)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 공역

 

‘Open for them are the doors to the Deathless, Let those with ears now show their faith.

Thinking it would be troublesome,

O Brahma, I did not speak the Dhamma subtle and sublime.’

show their faith.

(믿음을 보여라)

 

(오역)

 

 

영역

디가니까야(D14)

 

 

Open to them are the Deathless doors!  Let those that hear now put forth faith.  For fear of trouble I did not preach at first

The excellent Dhamma for men, Brahma!

put forth faith

(믿음을 내어라)

 

(오역)

 

 

영역 CDB

상윳따니까야(S6.1)

 

빅쿠 보디 영역

Open to them are the doors to the Deathless: Let those who have ears release faith. Foreseeing trouble, 0 Brahrna I did not speak The refined, sublime Dharnma among human beings.

release faith.

(믿음을 내어라)

 

(오역)

 

 

율장 대품

최봉수님역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한역 아함경

第六 梵天相應

第一  梵天品

[] 第一 勸請

(일본사이트)

見已以偈答梵天沙巷婆提

於彼等眾   甘露門

有耳之眾人   捨離其他信

梵天我思惑   不說微妙法

 

捨離其他信

(다른 믿음을 버려라)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번역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못 마땅해 하는 것 같다. 일개 블로거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번역승들이 목숨걸고 번역한 성과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지적을 해 주어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Dhp 76)”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의 영역에 크게 의존하였나?

 

게송에 대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문제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잘못 사용된 단어가 있는 가 하면 오역이 많다. 그것도 디가니까야에서는 두 개나 보인다. 더구나 상윳따니까야와 비교하면 180도 다른 내용이어서 어느 것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이렇게 오역과 갈팡질팡 번역이 되어 중구난방으로 보이고 죽도 밥도 아니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역(英譯)’을 답습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는 빅쿠 보디의 영역 CDB를 참고 하였다고 써 놓았다. 또 초불연의 맛지마니까 약어편을 보면 냐마몰리스님/보디스님이라는 이름과 함께 맛지마니까야 영역본과 상윳따니까야 영역본이 초불연에서 간행된 청정도론, 아비담마길라잡이와 함께 소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에서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의 영역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영향에서인지 이들 영역승들의 번역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빅쿠 보디의 “Let those who have ears release faith.(S6.1)”와 빅쿠 냐마몰리의 “Let those with ears now show their faith.(M26)”가 있는데, 기초적인 영어실력을 가진 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귀를 가진자 믿음을 내어라라고 누구나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에서도 역시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D14, M26)”라고 번역하여 초불연 번역이 영역을 답습하였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영역승들은 공통적으로 믿음을 내어라(release faith)”라거나  “show their faith(믿음을 보여라)”라는 식으로 믿음을 강조하였을까?

 

왜 영역승들은 믿음을 강조하였을까?

 

영역승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는 서양인들이다. 서양에서 태어나 교육받았기 때문에 서구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빠알리니까야 영역에서 종종 ‘존재론’적 번역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에 바탕을 둔 유일신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 믿음은 거의 맹목적 맹신에 가깝다. 이치를 따져 믿거나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믿음으로는 유일신교 교리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기지 않아도 우선 믿고 보아야 되는 것이 유일신교의 믿음관이다. 이는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이 예천불지를 외치며 믿음을 먼저 강요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철학의 특징은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서양의 유일신교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역승들은 빠알리어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 release faith.(믿음을 내어라, S6.1)” 와 “show their faith.( 믿음을 보여라, M26)”로 번역하였다.  이를 답습한 한국의 번역승들 역시 “믿음을 보여라.(M26)” 또는 “믿음을 내어라.(D14)”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문제의 빠알리어 ‘pamuñcantu saddha’에서 ‘빠문짠뚜(pamuñcantu)’ 의 뜻은 무엇일까?

빠문짠뚜(pamuñcantu)의 뜻은?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Pamuñcantu의 원어는 Pamuñca이다. 그래서 Pamuñcantu는 Pamuñca에 대한 삼인칭 명령어 복수로 쓰인다. 그렇다면 Pamuñca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muñca

Loosening, setting free or loose,

 

 

Pamuñcati

To emit, utter; to loose, release; to cast off

す, 解脫, , ; , 自由にす

 

 

Pamuñca는 형용사로서 느슨한(loosening), 풀어진의 뜻이다. Pamuñcati는 동사형이다. 그래서 방출하다(emit), 양도하다(release), 벗어나다()’의 뜻이 있다.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단순하게 빠알리사전의 뜻대로 번역하면 영역승의 번역대로  ‘release faith’ ‘show their faith’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깨달은 부처님이 믿음을 내어라또는 믿음을 보여라라는 식의 번역이 되고 만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번역

 

하지만 이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번역이다. 문맥으로 파악하였을 때 부처님이 처음부터 믿음을 내라고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와서 보라’고 초대할 만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뜸 ‘믿음부터 내어라’식의 가르침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백번 양보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하였다고 치자. 그럴 경우 심각한 모순이 된다. 왜 그런가? 이제 금방 깨달은 부처님이 한 번도 설법을 한적이 없음에도 믿음을 내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황으로 보았을 때나 이치적으로 보았을 때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믿음을 보여라라고 말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pamuñcantu 가 들어 간  두 개의 경을 보면

 

그렇다면 pamuñcantu 가 들어 가는 경은 어떤 것이 있을까? 후박나무님의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두 경우를 들고 있다.

 

 

1)수따니빠따 5장

 

1067. Ta ta namassāmi samantacakkhu

Pamuñca(미래수동분사) ma sakka kathakathāhi

 

널리보는 눈을 가지신 샤끼야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저를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게 해주십시오.

 

1151. Evameva tvampi pamuñcasasu(수동명령형 2인칭 단수) saddhaṃ

Gamissasi tva pigiya maccudheyyassa pāra.

 

그대도 믿음을 버리시오.

삥기야여 그대는 죽음의 영역의 저쪽으로 갈 것입니다.

 

 

2)상윳따니까야 (SN.1.51.Candimasutta)

 

Rāhu canda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

 

그때 세존께서는 하늘아들 짠디마에 관해서 아쑤라의 왕 라후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 하늘아들 짠디마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짠디마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Tathāgata arahanta suriyo saraa gato,

Rāhu suriya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세존] "하늘아들 쑤리야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쑤리야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숫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에서 pamuñcantu가 실린 글을 보면 모두 ‘버리라, 놓아라’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전과 주석서, 그리고 숫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 등에서 pamuñcantu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아서 ‘pamuñcantu saddham’는 ‘(삿된) 믿음을 버려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믿음을 내어라이든 믿음을 버려라 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마치 고양이의 경(S20.10에서 쥐가 고양이를 먹었다또는 고양이가 쥐를 먹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띠이기 때문에 누가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든가 그게 그거 아니냐’식으로 하야 결과만 중요시 한다면 가르침이 크게 왜곡 되고 변질 될 가능성 매우 크다. 그래서 결국 가르침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보듯이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역이 된다.

 

오역이 되었을 때 독자들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고귀한 부처님 말씀을 잘못 전달하고 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잘못된 번역, 오역, 갈팡질팡 번역, 영역을 답습한 듯한 번역,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듯한 번역, 주석에나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있는 주석적 번역 등을 지적한다.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라는 대명제에 기인한다.

 

 

 

2013-10-21

진흙속의연꽃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

 

 

 

어느 법우님이 글을 주셨는데

 

상윳따니까야에 고양이의 경(S20.10)’이 있다. 감각적 쾌락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경을 근거로 하여 글(스님의 시대에서 빅쿠의 시대로)을 작성하였는데,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고양이의 경 가운데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원문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같은 단락을 "비구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곳을 잡아서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성전협의 번역을 따르면 쥐가 고통을 받지만, 초불연의 번역을 따르면 고양이가 고통을 받습니다.

 

(H법우님)

 

 

이글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과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빠알리원문을 확인해 보았더니

 

빠알리원문을 확인해 보았다. 문제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1.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4 ajjhohari.

2.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3.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원문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큰 차이 없는 첫번째 구절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 ajjhohari.

1)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초불연 각묵스님역)

2)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첫번째 구절을 보면 번역이 크게 차이가 없다. ‘고양이가 그것을 먹었다라는 내용이다. 다만 씹지도 않고 삼켰다(초불연)’뜯어 먹었다(성전협)’의 차이이다.

 

원문에 ‘asakhāditvā가 있는데 이는 씹지도 않고라는 뜻이다. ajjhohari‘swallowed(삼키다)’의 뜻이다. 그래서 ‘asakhāditvā ajjhohari’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는 초불연 번역이 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구절이다.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1)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초불연)
2)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성전협)

 

 

정반대의 번역이다. 초불연에서는 생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반대로 고양이가 생쥐를 잡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반대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첫 구절에서 비롯된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생쥐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양이 뱃속에 들어간 생쥐가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전협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생쥐를 잡아 물어 뜯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양이가 생쥐의 창자를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빠알리어 문구를 보면 생쥐(mudumūsi)’에 대한 것은 보이지만 고양이 (biālo)를 지칭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땃사(Tassa)’가 보인다. 땃사(Tassa)인칭대명사이다. 그런데 두 번역을 보면 이 땃사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았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라 하였고, 성전협의 번역에서는 정반대로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라 하였다. 이는 땃사에 대하여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고통받는 대상도 정반대

 

이렇게 정반대의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일까? 세번째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1)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초불연 각묵스님역)
2)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세 번째 구절에서는 고통받는 대상이 나온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고, 성전협 번역을 보면 생쥐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 구절에서 기인한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고통을 받는다. 뱃속에 들어간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은 고양이는 강자이고 생쥐는 약자이다. 그래서 쥐를 잡는 것은 고양이이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거꾸로 되어 있다. 고양이가 약자이고 쥐가 강자이다. 더구나 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 창자를 뜯어 먹어서 고양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하니 일반적 상식을 뒤엎는다. 마치 손오공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손오공의 파초선(芭蕉扇)이야기를 보는 듯

 

지난 6월 실크로드 여행을 하였다. 투르판 근교에 화염산이 있었는데, 화염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손오공과 파초선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천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던 손오공은 때아니게 날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을철인데도 선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사방 800리에 이르는 거대한 산에서 불이 난 것이다. 그래서 불을 끄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우회하는 방법도 있지만 손오공은 정면돌파하기로 한다. 그래서 화염산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나찰녀의 파초선(芭蕉扇)’ 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찰녀는 빌려 주기는커녕 부채질 하였다. 그러자 화염산은 더욱 더 맹렬히 타올랐다. 그러자 손오공은 작게 둔갑하여 나찰녀의 몸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나찰녀의 몸 속 여기저기를 마구 찌르고, 건드렸다.  나찰녀는 견디지 못하고 파초선을 내놓았다. 하지만 ´가짜´ 부채였다. 부채질을 할수록 불길은 오히려 더욱 타올랐다. 손오공은 엉덩이 털만 모두 태우고 말았다.

 

(손오공의 파초선이야기)

 

 

고양이경은 부처님이 하나의 예로 든 것이다.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았을 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재난을 경고하기 위하여 예로 든 이야기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마치 손오공이 나찰녀 뱃속에 들어가 괴롭히듯이, 통째로 집어 삼킨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물어 뜯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묘사는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상소설이나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 보여 진다. 부처님이 고양이와 쥐의 예를 들었지만 상식에 벗어난 이야기를 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초불연과 정반대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왜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을까?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이와 같은 번역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CDB의 영향때문이라 본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밝혔듯이 번역자는 빅쿠 보디의 CDB를 참고 하였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의 번역에 대한 빅쿠 보디의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Then that mouse came out for food, and the cat grabbed it and swallowed it hastily, without chewing it. Then that little mouse ate the cat's intestines and mesentery and on that account the cat met with death and deadly suffering.

 

(빅쿠 보디역, CDB)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쥐가 음식을 구하러 밖에 나왔다. 그때 고양이는 쥐를 잡았다. 그리고 씹지도 않고 성급하게 삼켜버렸다. 그때 작은 쥐는 고양이의 장과 장간막을 먹었다. 그런 이유로 고양이는 죽음과 죽음과 같은 고통과 마주쳤다. (진흙속의연꽃역)

 

 

영어에 대한 보통의 지식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번역가능한 문구이다. 번역을 하여 놓고 보니 놀랍게도 초불연 번역과 일치 되는 것이었다. 초불연 번역을 다시 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초불연 각묵스님역)

 

 

생쥐를 집어 삼킨 고양이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빅쿠 보디의 영역과 구성면이나 단어사용이 동일하다. 이것이 성전협 번역과 180도 다른 이유일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재난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고양이와 생쥐를 예로 들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bhikkhu pubbahasamaya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gāma vā nigama vā piṇḍāya pavisati, arakkhiteneva kāyena arakkhitāya vācāya arakkhitena cittena anupaṭṭhitāya satiyā asavutehi indriyehi.

 

So tattha passati mātugāma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tassa mātugāma disvā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rāgo citta anuddhaseti.

So rāgānuddhasena cittena maraa vā nigacchati, maraamatta vā dukkha.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는 오전에 옷매뮤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채 걸식하러 마을이나 성읍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본다.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보고서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게 한다. 그는 마음이 애욕에 물들어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된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수행승들이여,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어떤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성전협 전재성님역)

 

 

So too, bhikkhus, here some bhikkhu dresses in the morning and, taking bowl and robe, enters a village or town for alms with body, speech, and mind unguarded, without setting up mindfulness, unrestrained in his sense faculties. He sees women there lightly clad  or lightly attired invades his mind. With his mind invaded by lust he meets death or deadly suffering.

 

(CDB, Bhikkhu Bodhi)

 

 

 

(Laos, Luang Prabang)

 

 

 

비구가 탁발을 나갔을 때 겪을 수 있는 재난에 대한 것이다. 비구가 여인과 마주쳤을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따른 욕정이 일어나 그의 마음을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재난을 경고 하였다.

 

욕망을 일으키는 여인의 가벼운 옷차림

 

경에서는 비구에게 감각적 욕망을 일이킬 수 있는 요인으로 여인의 옷차림을 들었다. 빠알리원문에서는 ‘dunnivattha vā duppāruta로 표현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여인으로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여인으로 묘사하였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lightly clad  or lightly attired(가볍게 입거나 가볍게 차려입은)”으로 하였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원문 ‘dunnivattha vā duppāruta은 무슨 뜻일까?

 

두 단어에 공통적으로 들어 가는 접두어는 (du)’이다. 두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惡的(악한), 不好的(좋지 않은)’뜻으로 부정적이다. dunnivattha을 보면 duvattha의 합성이이다. 여기서 vatthaa cloth(), garment(의류)’의 뜻이다. 그래서 dunnivattha에 대하여 직역하면  나쁜 옷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vattha와 유사한 vaṭṭha가 있다. 빠알리사전에는 vattha와 함께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vaṭṭha의 뜻은 wet with rain(비에 젖은)’의 뜻이다. 그래서 dunnivattha비에 젖은 여인의 옷이라는 뉘앙스이다. 그런 모습을 탁발 나간 비구가 보았을 때 욕정이 일아날 것이라는 말이다.

 

duppāruta라는 말은 着衣した(나쁘게 입었다), 不適着衣せる(부적당하게 입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mātugāma dunnivattha vā duppāruta비에 젖은 옷이나 몸매가 비치는 옷을 걸친 여인이라고 의역을 할 수 있다.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을 보았을 때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않는 비구는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할(rāgānuddhasena cittena)’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욕정으로 인하여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를 고양이와 쥐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숲을 볼 것인가, 나무를 볼 것인가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서 정반대의 번역을 보았다. 이런 일이 발생된 것은 두 번역자의 번역스타일때문이라 본다. 전재성님의 경으 해제글에서 밝혔듯이 나무 보다는 숲을 보듯이 문맥을 통해경을 볼 것을 강조 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주석서에 의존하고 주석서를 존중하는 바탕하에 번역을 하였다. 이와 같은 두 번역자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 것이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서 정반대의 번역으로 나타난 것이라 보여진다.

 

문맥을 통해서 비교해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에 대하여 문맥을 통해 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가해자

경전적 근거

피해자

경전적 근거

고양이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S20.10)

 

생쥐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S20.10)

여인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한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S20.10)

수행승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S20.10)

 

 

경을 보고 문맥을 통해서 파악하면 위의 표와 같이 된다. 고양이가 가해자이고 쥐는 피해자이다. 그리고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이 가해자가 되고 알아차림을 확립하지 못한 수행승은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경의 문맥에 따르면 여인의 예를 든 것이 고양이이고, 수행승의 예를 든 것이 생쥐이다. 그래서 피해자 격인 생쥐와 수행승은 죽음이나 죽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렇게 대조를 해 보면 정확하게 일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반대로 되어 있다. 빅쿠 보디의 영역을 답습한 초불연의 번역 역시 반대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초불연의 번역이 빅쿠보디의 영역 CDB를 답습하였다는 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고양이의 경에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Maraa heta bhikkhave, ariyassa vinaye yo sikkha paccakkhāya hīnāyāvattati. Maraamatta heta bhikkhave, dukkha yadida aññatara sakiliṭṭha āpatti āpajjati, yathārūpāya āpattiyā. vuṭṭhāna paññāyati.

 

비구들이여, 여기서 죽음이란 성자의 율에서 공부지음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이란 오염된 계를 범한 것인데 계를 범한 것에 대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For this, bhikkhus, is death in the Noble one's Discipline: that one gives up the training and returns to the lower life. This is deadly suffering: that one commits a certain defiled offence of a kind that allows for rehabilitation.

 

(CDB, Bhikkhu Bodhi)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재난을 경고 하고 있다. 만약 비구가 알아차림을 확립하지 못하여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에게 욕정을 품어 계율을 어긴다면 죽음 아니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경에서 말하는 죽음(Maraam)’이란 다름 아닌 바라이(Pàràjika , 波羅夷)’죄를 어기는 것을 말한다. 성행위를 하여 계율을 어기면 승단추방에 해당되는 바라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승단의 패배자들

 

바라이죄를 짓는 자는 패배자이다. 자신과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승단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승단에서 추방된 자는 패배자이다. 그런 패배자들을 한국불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종교전문기자의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은처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신문 기사 하나를 살펴보자. 1996 8 1 <<경향신문>> 종교면 “도박-은처승 징계 첫 거론, 월하종정 총무원장 보고 받고 척결지시”라는 제목의 기사내용은 이러하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비구종단이다. 여색을 가까이 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결혼은 더더욱 안된다. 재물을 탐내서도 안 되며 도박을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부인을 몰래 두거나 도박을 즐기고 개인재산을 챙겨 놓은 스님들도 있나 보다.

 

…은처승과 도박승 문제는 불교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 하지만 청정비구교단임을 내세워온 조계종으로서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아킬레스건으로 인식돼왔다. 문제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알면서도 쉬쉬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김나미 기자가 언급한 내용은 1996년도 경향신문 기사로서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의 일이다. 16년 전에도 이미 승려들의 도박과 은처문제가 매우 심각한 승단의 병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1996년 시점에서 “은처승과 도박승 문제는 불교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도박과 은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상화 된 고질병이라 볼 수 있다.

 

바라이죄 무풍지대

 

책에서 승려의 성문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 언급된 것은 다음과 같다.

 

 

20여 년 전 막 불교에 입문할 당시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신도회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중구의 한 경찰서장이 한 말이 퍼져 내 귀까지 온것이었다.

 

1970~80년대 서울역 앞 양동 홍등가 지역을 급습해보면 방에서 나오는 반이 승려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지만 한때 그곳에서 승려가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 수계 절차없이 외양만 삭발하고 승복을 갖춰 입은 땡중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승려들이 고급 요정에  드나든다는 말이 매체를 통해 흘로나온 적이 있다. 본사이든 말사이든 다른 종교에 비해 주머니가 두둑하고 시간 여유가 많은 주지라면 딴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승려에게는 대처가 가능한 종단으로 옮기라고 권하고 싶다.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막행막식을 하는 승려 대부분이 땡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위직 승려들이 룸살롱 출입을 하였다면 이는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부의 문제일 수 있다. 영남에 있는 모교구 본사의 스님은 페인터(화가)로 위장하여 미국에서 사실혼을 입증하는 혼인 증명서가 있었고, 충남에 있는 모교구본사에서는 전주지가 여인의 유혹에 걸려 들어 피해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이미 언론에 회자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출마를 선언하였다가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말을 바꾸어 다시 총무원장이 된 승려가 있다. 그는 승단 추방에 해당되는 망어죄  뿐만 아니라 은처의혹과 도박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렇게 룸살롱을 출입하고 사실혼 증명서가 있고 여인과 스캔들이 있어도 한국불교에서는 바라이죄로 추방되는 일은 결코 없다. 또 거짓말을 하고 은처를 하여도 추방되기는 커녕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승단은 패배자들의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왜 부처님이 사띠하라고 하였을까?

 

경에서 바라이죄를 지은 자에 대하여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S20:10)”라고 한 것이다. 바라이죄를 지은 자는 한마디로 패배자인 것이다.

 

설령 바라이죄를 짓지 않고 마음속으로 욕정을 품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S20:10)”라 하였다. 여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리라.”라고 말씀 하신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항상 사띠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띠는 어떤 것일까?

 

사띠가 단순하게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김하는 것일까?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사띠는 사념처에 잘 표현 되어 있다. 특히 몸에 대한 관찰에 대한 것을 보면 부정관으로 표현 되어 있다. 32가지  신체 부위와 10가지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항상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래서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인과 마주쳤을 때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대상에 대해서만 마음챙김한다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왜 부처님이 사띠하라고 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될 것이다.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다고?

 

경에서 키 포인트는 죽음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대한 것이다. 죽음은 바라이 죄를 저질러서 승단에서 추방된 것을 의미하고 죽음과도 같은 고통은 비록 바라이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으로 인한 욕망이 발동하였을 때 겪게 되는 괴로움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 각묵스님은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이란 오염된 계를 범한 것인데 계를 범한 것에 대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S20:10)”라고 번역하였다.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더구나 출죄제장이라는 한자용어까지 들어 있어서 난해하기만 하다.

 

경전에서 한줄이 빠지면

 

경전에서 한줄이 빠지면 난해해진다. 그리고 심오해진다. 그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 금강경에서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가 좋은 예이다. 초심자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심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마라습이 번역한 금경경에서는 약이색견아 구문 다음에 이어지는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는 말이 빠져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의 왁깔리경에서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는 문구와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빠진 문구를 보충하여 해석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번역을 아주 어렵게 하였을 때

 

그런데 번역을 아주 어렵게 해 놓은 경우 역시 심오해진다. 더구나 뜻도 모르는 한자용어까지 사용하였을 때 그렇다. 초불연의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가 대표적이다. 아직도 이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라 하여 누구나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번역인지 승가사회 등 특수계층을 위한 번역인지 드러난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은 빅쿠보디의 영역 allows for rehabilitation.(갱생을 허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빠알리어 yathārūpāya āpattiyā에 대한 것인데, yathārūpāya벗어난 것이라는 뜻이고, āpattiyā성직자의 계율위반이라는 뜻으로서 죄악에서 벗어남의 뜻이다.

 

그럼에도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라는 번역을 대하였을 때 난해함과 동시에 심오함을 느낀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반대로 심오하게 보기 때문이다.

 

번역의 자주화가 실현 되기를

 

같은 문장을 두고 정반대의 번역을 종종 본다. 그럴 경우 독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과연 어떤 번역이 맞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원문을 찾아 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각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알기 힘들면 문맥을 통해서파악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경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양이와 쥐의 입장에 대하여 정반대의 번역을 보았지만 문맥을 통하여 파악하였을 때 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성전협과는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빅쿠보디의 CDB의 번역을 답습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하루 빨리 번역의 자주화가 실현 되기를 바란다.

 

 

 

2013-10-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