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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하늘사람 [욕계 색계 무색계]

우공(友空) 2017. 3. 27. 10:49


http://blog.daum.net/bolee591/16155818

축산농가[고기] 사육실태, 불교의 세계관 도표. 수명. 맹구우목, 하늘사람과 하느님,제석천과 마라와 범천,

하느님이 되는 방법,



http://blog.daum.net/bolee591/16155320

(무상유정천, 깔라마경 )

우연발생론자의 탄생,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

 

 

 

카페테리아에서

 

수백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손님이 직접 날라다가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식당을 말한다. 그런데 메뉴를 보면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매일 매끼 마다 고기가 등장하지 않은 때가 없다. 고기가 빠지면 손님이 오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렇게 매일 고기를 먹으니 매일 잔칫날이고 매일 파티 하는 것과도 같다.

 

거의 매일 고기를 먹다시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생활방식인 것 같다. 그러나 돼지와 닭, 소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안다면 고기좋아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TV에서 가축의 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이제까지 전에 보지 못하던 내용이다. 광우병이나 AI 등이 이슈 될 때마다 산업화된 축산농가를 보여 주었으나 이번 프로를 보면 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대규모로 사육되는 소나 돼지, 닭을 보면 온통 똥범벅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좁은 사육장에서 똥을 제때에 치워 주지 않다 보니 바닥에는 똥이 질펀하다.

 

이렇게 똥범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똥을 치울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똥을 별도로 모아 저장해 두는 탱크가 생겨나고 그것 마저 넘쳐 나서 이제 똥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축산업을 하는 농촌에 가면 똥냄새로 가득하고 파리, 모기 등 온갖 해충들이 창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국이 똥천지가 된 것은 가축의 숫자만 늘리는 데만 열중한 탓이다. 사료를 주면 일부는 고기로 변환되지만 나머지는 똥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똥처리를 소홀히 한 것이다. 이런 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카페테리아에서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똥범벅이 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잔칫상을 받듯이 고기를 즐긴다. 그러나 똥범벅이 되고 잔뜩 스트레스 받은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살생계가 무력화 되고 있는 현실

 

산업화된 축산농가를 보면 생명의 존엄함이 느껴 지지 않는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 찍어 내듯이 출하되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보면 인간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불살생계가 무력화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닭이나 돼지도 하나의 생명이고 유정체이다. 그런 유정체를 중생이라 하고, 심지어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도 성불이 가능함을 말한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축생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입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산업화된 농가에서 사육되고 있는 축생들은 태어나자 마자 인간의 먹이가 될 비참한 운명을 태어난 것이다. 대체 축생은 어떤 운명을 타고 났길레 살코기가 되는 것일까?

 

인간과 축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에서는 육도윤회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단계로 나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감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축생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축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도올 김용옥교수의 강연에서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발성의 체계를 반복해서 그 발송의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키죠. 그 발성의 체계를 의미의 체계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하게 어린 영아가 서너살 때 이걸 다 해냅니다.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축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유하는 능력이다. 이는 언어로써 표현 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인간의 경우 불과 서너 살 때 발성체계를 의미체계와 결합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물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라 한다. 이처럼 사유하고 말을 하는 능력으로 인하여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오늘날 놀라운 문명을 이루어 내었다.

 

축생은 사유하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당연히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과 똑같은 능력이 있다. 그것은 먹고 싸는 것이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함으로써 몸집이 커져 가는데, 바로 이런 것 역시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다.

 

소를 키우는 장면을 보면 끊임 없이 먹이를 준다. 그 먹이라는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니다. 풀이나 건초 같은 것이다. 풀을 먹고서 뼈도 만들어 내고 장기도 만들어 내고 살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 살코기로 변한 것이다. 물론 일부는 똥으로 나온다. 이렇게 풀이 소의 입으로 들어 가면 단백질과  똥 이렇게 두 가지로 변한다. 이런 변화의 과정 자체가 신비롭기만 하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적은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밥이든 고기이든 입으로 들어 가면 뼈와 살이 되고 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축생이나 인간이나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축생과 인간이 다른 것은 사유능력이다. 이는 곧 말하는 능력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없는 축생은 천지차이 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일까 축생은 인간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먹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면

 

초기경전을 보면 유난히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법구경에서도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Dhp8)”라 하였고, 숫따니빠따에서도 라훌라에게 “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7)”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부처님이 음식절제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음식에 지나치게 탐하는 것은 축생과 다름 없는 삶이라는 것을 뜻한다. 오로지 먹기만 하는 축생에게 있어서 먹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살찌우고 발정기가 되면 후손을 남기는 것, 이것이 동물들의 살아 가는 방식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축생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싸는 행위를 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인간 역시 동물에 속한다. 더구나 먹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면 더욱 더 동물의 본성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식사절제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축생들은 어떻게 그런 비참한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부모는 하느님이고

 

불교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이를 삼계라 한다. 가장 낮은 단계부터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기 까지 도표로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가장 안전지대가 천상이라 볼 수 있다. 천상에 태어나면 축생과 같은 비참한 운명은 면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천상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이를 세분화 하면 무려 28천이 된다. 이렇게 천상이 많다 보니 천상이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마치 과장이라도 같은 과장이 아닌 것과 같다. 지은 업에 따라 적합하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천상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Brahmāti mātāpitaro pubbācariyāti vuccare,

Āhuneyyā ca puttāna pajāya anukampakā.

 

부모는 하느님이고

부모는 최초의 스승이라 하니

자식들에게 존귀한 님,

자손들을 어여삐 여기는 님이네.

 

(Sabrahmasutta-하느님과 함께 경, A3.31,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 대한 번역을 보면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불자들에게 있어서는 불편하게 생각하는 용어이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우리민족 고유의 용어임에도 기독교에서 선점함에 따라 이제는 생소하게 보이는 용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전재성님의 경우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함에 있어서 과감하게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브라흐마(Brahma)’에 대하여 한역경전에서는 범천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경우 하느님이라 한 것이다. 마치 새술은 새부대에 넣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한역경전의 용어를 답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번역태도를 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주번역의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똑 같은 브라흐마에 대하여 초불연의 경우 아들들에게 부모는 범천이요(A3.31, 초불연)”라고 번역함에 따라 기존 한역경전용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하느님을 재해석하여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브라흐마에 대하여 왜 하느님이라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이유를 각주에서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brahmakāni bhikkhave tāni kulāni : 하느님은 브라흐마[梵天:brahma]라고 하는데, 바라문교에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최고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느님을 재해석하여 미세한 물질의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에 사는 신들의 부류에 바라문교의 신들을 집어 넣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梵天界]라고 한다. 이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 각각의 차원에 그에 상응하는 정신세계가 있다. 이 책의 부록 ‘불교의 세계관’을 참고하라.

 

하느님들은 그들의 동료와 함께 그들의 차원의 세계에 살며 위대한 하느님(Mahabrahma)이 그들의 지배자이다. 이 하느님의 모음에서 하느님은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영원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뭇삶들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들의 세계에 태어나는 길은 미세한 물질계나 비물질계의 특수한 차원과 일치하는 선정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때로는 청정한 삶이라고 번역되는 하느님의 삶[梵住]이 있는데, 그것은 자애(metta)와 연민(karuna)과 기쁨(mudita)과 평정(upekkha)의 삶을 말한다.

 

(각주, 전재성님)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각주에서 눈여겨 본 것은 첫번째 문단에 있는 브라흐마에 대한 재해석이다. 부처님 당시 최고신 브라흐마를 불교의 세계관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천계라 불리우는 하느님의 세계는 미세한 물질의 세계(색계)와 비물질적 세계(무색계)에 사는 신들의 부류라 한다.

 

사실 이런 분류 방식은 니까야를 보고서 알았다. 이전에는 단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있고 그에 합당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알았으나 부처님이 새롭게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신들은 모두 하느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계천상의 신들은 하느님이 아니다. 천상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하늘사람과 하느님

 

인간과 똑같이 남녀 구분이 있고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욕계천상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다. 단지 천상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 데와따상윳따나 데와뿟따상윳따에 등장하는 존재를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사람또는 하늘아들이라 불렀다고 본다. 이렇게 욕계천상의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 취급을 안해 주는 것은 그들이 인간과 똑같이 남녀구분이 있고 또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라 불리우는 색계와 무색계는 남녀구분이 없다. 모두 중성이라 볼 수 있다. 또 욕심이 없는 곳이다. 이는 선정삼매의 경지와 똑같기 때문이다. 선정삼매에 들면 오장애가 극복 된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이 극복 된다.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존재들은 남녀구분이 있을 수 없고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천상은 욕계천상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를 하느님의 세계[梵天界]’라 한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

 

부처님이 새롭계 해석한 것이 브라흐마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하느님이라고 초지일관 모든 니까야 번역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니까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왜 하느님이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불교의 세계관을 잘 이해 하지 못함에 따른 혼란으로 본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브라흐마(범천)는 색계와 무색계를 모두 아우른다.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존재를 브라흐마(범천, 하느님)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세상도표를 다음과 같다.

 

 

불교의 세계관

 

형성

조건

생성

방식

  

수명

분류

No

무형상

화생

비상비비상처천

(非想非非想處天)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신들의 하느님 세계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84,000

33

무소유처천

(無所有處天)

아무것도 없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kiñcaññāyatana

60,000

32

식무변처천

(識無邊處天)

무한의식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viññāañāyatana

40,000

31

공무변처천

(空無邊處天)

무한공간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kāsānañcāyatana

20,000

30

형상 또는 물질의 소멸

불환자

의 청정

(四禪)

화생

색구경천

(色究境天)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하느님 세계

akaniṭṭ

16,000

29

선견천

(善見天)

관찰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sudassī

8,000

28

선현천

(善現天)

선정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sudassā

4,000

27

무열천(無熱天)

타는 듯한 고뇌를 여읜 신들의 하느님 세계

atappā

2,000

26

무번천(無煩天)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avihā

1,000

25

四禪

화생

무상유정천

(無想有情天)

지각을 초월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assañña-satta

500

24

광과천(廣果天)

위대한 경지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

veha-pphalā

 

500

23

복생천(福生天)

Puññappasava

공덕이 생겨나는 하느님 세계

大乘

22

무운천

(無雲天)

Anabhaka

번뇌의 구름이 없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大乘

21

三禪

화생

변정천

(遍淨天)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subhaki

64

20

무량정천

(無量淨天)

한량없는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appāmāasubhā

32

19

소정천

(小淨天)

작은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parittasubhā

16

18

二禪

화생

광음천

(光音天)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bhassarā

8

17

무량광천

(無量光天)

한량없이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appamā ābhā

4

16

소광천(小光天)

작게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Parittābhā

2

15

初禪

화생

대범천

(大梵天)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mahā-brahma

1

14

범보천

(梵輔天)

하느님을 보좌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brahma-purohitā

1/2

13

범중천

(梵衆天)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

brahma-pārisajjā

1/3

12

다섯 가지 장애의 소멸

믿음

보시

지계

화생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남이 만든 존재를 지배하는 신들의 하늘나라

paranimmita-vasa-vatti

16,000 천상년

(9216백만년)

11

화락천

(化樂天)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

nimmāna-rati

8,000 천상년

(2304백만년)

10

도솔천

(兜率天)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tusitā

4,000 천상년

(576백만년)

9

야마천(耶麻天)

축복받는 신들의 하늘나라

yāmā

2,000 천상년

(144백만년)

8

삼십삼천

(三十三天)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

tāvatisa

1,000 천상년

(36백만년)

7

사천왕천

(四天王天)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

cātu-māha-rajikā

500 천상년

(9백만년)

6

오계

태생

인간

(人間)

manussa

비결정

 

5

성냄

화생

아수라

(阿修羅)

Asura

비결정

 

4

우치

탐욕

 

태란

습화

축생

(畜生)

tiracchāna

비결정

 

3

인색

집착

 

화생

아귀

(餓鬼)

peta

비결정

 

2

잔인

살해

화생

지옥

(地獄)

niraya

비결정

 

1

 

근거: 성전협 상윳따니까야 권말부록   2014-01-29 진흙속의연꽃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docx

 

 

 

 

Lotus

 

 

 

위 표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권말 부록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참고로 성전협의 니까야에는 각권마다 권말 부록에 33개의 세상도표가 실려 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려면

 

표를 보면 모두 33개의 세상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로 지옥에서부터 위로 비상비비상처천에 이르기 까지 모두 33개의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 수명이 결정되어 있는 곳이 있다. 천상의 존재들은 수명이 명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낮은 수명은 인간 바로 위에 있는 하늘나라인 사대왕천(cātu-māha-rajikā)이다. 이 하늘나라의 경우 인간으로 따졌을 때 무려 9백만년을 산다. 이렇게 9백만년의 수명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에 9백만년동안 천상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욕계천상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 타화자재천 (paranimmita-vasa-vatti)’의 수명은 9216백만년이다. 이는 92억년에 달한다.

 

이렇게 수명이 오랫동안 보장되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락을 누리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형성조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을 하면 이와 같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하늘나라는 ‘욕계천상’을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형성조건을 보면 ‘오계’라고 되어 있다. 오계를 준수하면 인간으로 태어날 조건이 성립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명은 비결정이다. 수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인간 이하의 세계는 모두 공통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이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천상과 다르다.

 

믿음, 지계, 보시의 삶을 사는 자들은 천상행이 보장 되어 있어서 수명 대로 살지만, 오계준수만으로 인간이 된 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렇게 인간과 천상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적합하다고 한다. 비록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희로애락을 겪음에 따라 더 빨리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상에 나는 것 보다 인간으로 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나는 자들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형성조건을 보면 우치탐욕으로 되어 있다. 오로지 먹을 것 밖에 모르고 쌀 줄 밖에 모르는 자들이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동물처럼 사는 자들은 동물과 같은 업을 짓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아귀계에 태어나는 자들은 인색하고 집착이 강한 자들이다. 지옥에 태어나는 자들은 잔인하고 살해를 많이 하는 자들이다. 이들 역시 수명이 결정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번 악처에 떨어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왜 그럴까? 축생을 예를 든다면 부처님이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살생업을 지었을 때 빠져 나오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라 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었다.

 

이렇게 한 번 악처로 타락하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오계를 준수하고,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최소한 인간으로는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되려 한다면

 

표를 보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범천계(梵天界)이다. 대승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범천에 대하여 색계초선천으로 한정 지은 듯하다. 그래서 범천 하면 색계초선천인줄 알았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범천은 더 확장 된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고 있다. 이를 노랑면칠로 표기 하였다.

 

색계 초선천인 범중천에서부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 까지를 범천계로 본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존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느님’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브라흐마(brahma)’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역경전을 그대로 답습하여 ‘범천’이라 하였다.

 

그런데 선정삼매를 닦으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사람’이 되지만, 선정삼매를 닦거나 불환자가 되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사람이 되는 것과 하느님이 되는 길이 다르다.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욕계천상에 태어나 하늘사람이 될 수 있고, 선정수행을 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환자가 되면 그에 대한 과보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사람과 하느님은 어떻게 다른가?

 

천상이라고 하여 같은 천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 욕계천상과 범천계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초기불전에서 신으로 언급이 되는 범천(Brahma,브라흐마)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를 뜻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주석서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DPPN은 범천을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사는 자들로 정리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색계초선천부터 삼선천까지의 9가지 천상과 4선천의 무상유정천과 광과천과 다섯 가지 정거천과 네 가지 무색계 천상- 이 20가지 천상을 모두 범천의 세상(brahma-loka)으로 부르고 있다. (VibhA.521 등) 

 

마라는 욕계의 가장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에 거주하는 신인데 반해, 범천은 이러한 마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색계 이상의 천상에 거주하는 신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해제 글에 따르면 범천계가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주석서의 근거한다고 하였다. 색계 초선천에 대하여 범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주석서에 따르면 색계이상의 천상에 머무는 신들을 통칭하여 브라흐마라 칭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말로 범천또는 하느님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욕계천상의 정점에 있는 타화자재천신이 마라라는 사실이다. 이를 악마로 번역한다. 부처님과 대척점에 있고 대조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깨달음을 방해하는 그 악마를 말한다. 이런 하늘사람과 하느님(브라흐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한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 전조가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디가니까야에서는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제석천]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

 

 

제석천은 욕계천상인 도솔천(뚜시따)의 왕이다. 이 제석천은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다. 천상이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나타날 때 전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태양이 떠오를 때 일출이 먼저 성립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출현하기 전에 먼저 광대한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위력인데 경에서는 devānubhāvanti로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 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이렇게 욕계천상의 존재와 브라흐마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출현할 때 예전에 보지 못하던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 빛으로 전조를 보이지만 이를 뛰어 넘는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무변한 빛이 구석구석을 비춘다고 하였다. 특히 아직까지 한번도 빛이 들어 가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까지 빛이 도달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이 부처가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하느님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다. 이런 빛이 출현 할 때가 있는 부처님이 모태에 들 때, 그리고 모태에서 나왔을 때, 또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라 한다.

 

하느님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색계와 무색계를 총칭하여 브라흐마로까라 하였다. 이를 범천계 또는 하느님의 세계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자들을 브라흐마라 하고, 이를 범천 또는 하느님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 하느님들은 욕계천상처럼 남녀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의 구분이 없으므로 중성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욕심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사는가?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 세상이 괴멸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불교의 33개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천상 역시 제행무상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성주괴공하게 되는데 불에 의하여 색계 초선천까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것으로 본다. 그 기간이 1겁이라 한다. 이는 색계 초선천의 수명 1겁과 일치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물에 의하여 색계 2선천까지 파괴 되고, 바람에 의하여 색계 3선천 까지 파괴된다고 한다. 불환자들과 사선정을 닦은 자들이 가는 색계 4선천은 파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것은 겁화가 일어 나기 때문이라 한다. 겁화는 탐진치가 치성하였을 때 일어난다고 한다.

 

세상이 파괴 되어 텅비게 되었을 때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 (ābhassarā)’에 한 존재가 태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는 색계 2선천으로서 광음천 또는 극광천을 말한다. 이 존재가 하느님이다. 그런데 이 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쁨을 먹고 살고 빛을 내고 날아 다닌다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브라흐마(범천, 하느님)은 기쁨이라는 음식을 먹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기쁨, 희열, 행복의 존재이기 때문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울 것이라 본다. 그리고 빛이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타나면 동트기 전의 하늘처럼 전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욕계천상의 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경에 따르면 누구나 하느님(브라흐마)이 될 수 있다. 선정삼매 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된다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되기 보다 하느님이 되려 한다면 선정삼매를 닦거나 불환자가 되면 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전재성님의 각주에 “때로는 청정한 삶이라고 번역되는 하느님의 삶[梵住]이 있는데, 그것은 자애(metta)와 연민(karuna)과 기쁨(mudita)과 평정(upekkha)의 삶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Sattavassāni metta citta bhāvetvā sattasavaṭṭavivaṭṭakappe  nayima loka punarāgamāsi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는데,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 오지 않았다.”

 

(Māpuññabhāyi sutta-공덕에 두려워 하지 않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닦았다고 하였다. 그 과보로서 우주가 파괴 될 때에는 빛이 흐르는 하느님의 세계(극광천 또는 광음천)’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색계 이선천을 말한다.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우주의 성주괴공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에 있었음을 말한다.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

 

그런데 우주가 생성 될 때 텅빈 공간이 하나 생겨 났다고 하여싸. 그래서  그곳에서 최초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Tatra suda bhikkhave, (sattakkhattu) brahmā homi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 daso vasavattī. Chattisakkhattu kho panāha bhikkhave sakko ahosi devānamindo. Anekasatakkhattu rājā ahosi cakkavatti dhammiko dhammarājā cāturanto vijitāvi janapadatthāvariyappatto sattaratanasamannāgato.

 

수행승들이여, 거기서 나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이었다. 수행승들이여, 서른 여섯 번이나 나는 신들의 제왕인 제석천이었고, 수백번이나 나는 전륜왕, 정법자, 법왕, 사방의 정복자, 왕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 일곱 가지 보물을 갖춘 자이었다.

 

(Māpuññabhāyi sutta-공덕에 두려워 하지 않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동물로도 태어나 스스로 먹이가 되었다는 보살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경에 보여지는 전생담은 하느님으로서 이야기이다. 이는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이다.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과보를 가져 오는지 알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불교?

 

부처님이 재해석한 불교관을 보면 모두 33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천상의 경우 수명까지 명기 되어 있다. 이는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사대왕천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오십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 달이고,…(A8.42)”라고 되어 있어서 표의 어느 것 한 가지라도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33가지 세상에 대한 도표가 작성된 것이다.

 

이런 도표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믿거나 말거나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도표 하나가 모든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도표에는 하늘사람이 되는 방법이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이 설명 되어 있다.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면 하늘나라, 즉 욕계천상에 태어나지만 하느님 나라(범천계, brahma loka)에는 태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하느님과 하늘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도표를 보면 모두 윤회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33개의 새상을 돌도 도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자애수행을 하여 하느님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

 

돌고 도는 곳이 삼사라(윤회)’이다. 따라서 그 어디에도 영원히 머무는 곳이 없다. 가장 오래 산다는 비상비비상처정도 84천겁이라는 수명이 있다. 그렇다면 84천겁은 오랜 기간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십년이 하루 같다는 말이 있듯이 선정삼매 상태에서 84천 겁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짧은 생을 사는 지옥에서의 삶이 84천 겁이나 될 정도로 길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일 수 없다. 즐겁고 행복한 것은 단지 느낌으로서 순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계라는 것은 숨을 곳이 못 된다. 특히 영원주의자나 허무주의자에게 그렇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 어느 하늘사람은 부처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게송을 읊었다.

 

 

(Devatā:)

 Ekamūla dvirāvaṭṭa timala pañcapatthara,
Samudda
dvādasāvaṭṭa pātāla atarī isīti.

(Ekamūlasutta, S1.44)

 

 

[천신]

“하나의 뿌리와 두 개의 회오리와

세 개의 더러움과 다섯 개의 바윗덩이와

열두 개의 소용돌이 품고 있는 큰 바다-

그 심연을 선인(仙人)은 건넜습니다.

 

(하나의 뿌리 경, S1.44,각묵스님역)

 

 

[하늘사람]

“한 뿌리, 두 회오리,

세 티끌, 다섯 돌맹이,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

선인은 그 지옥을 건넜네.”

 

(한뿌리의 경, S1.44, 전재성님역)

 

 

[A devata:]

"The seer has crossed over the abyss

With its one root, two whirlpools,

Three stains, five extensions,

An ocean with twelve eddies."

 

(One Root, S1.44,빅쿠 보디역)

 

 

게송에서 한뿌리무명(avijja)’를 말한다. ‘두 회오리는 영원한 자아에 기초를 둔 영원주의와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견해를 말한다.

 

세 티끌탐진치 삼독을 말한다. ‘다섯 돌맹이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말한다. ‘열 두 소용돌이육내입처육외입처를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에 대하여 pātāla라 하였는데, 이를 전재성님은 지옥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심연’, 빅쿠 보디는 abyss(심연)이라 하였다. PECD194에 따르면 pātāla는 지옥(地獄)과 심연()의 뜻이 있다. 따라서 하늘사람은 부처님에 대하여 삼계를 뛰어 넘는 위대한 선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삼계에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축생의 삶은 비참하다. 특히 산업화 된 축생들은 말로가 비참하다. 마치 전자조립공장에서 콘베이어 벨트 돌아 가듯이 생명이 상품화 되어 나온다. 그것을 도시사람들은 매일 먹는다.

 

오로지 먹고 싸는 일만 하여 살만 찌는 축생은 더 이상 불성을 가진 중생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식품일 뿐이다. 이처럼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있는 것을 잡아 먹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장식 축산을 하는 농가나 이를 소비하는 도시사람들이나 모두 살생하는 데 있어서 공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오계가 무력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계를 준수하면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더 좋은 곳에 태어나려면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된다고 한다.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선정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계준수도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으로 나기도 힘들 것 같다. 요즘 같이 대량으로 사육되고 상품화 되고, 전염병이 돌면 수십만,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 하는 시대에 모두 공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천상에 태어나면 안심일까?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듯이 84천 겁을 살아도 순간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악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삼계 어느 곳을 보아도 갈 데도 없고 숨을 데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삼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라 본다.

 

 

 

2014-01-29

진흙속의연꽃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깔라마(Kalama)경 다시 읽기

 

 

 

 

 

교조적 글쓰기라는데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상적인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그런데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과 주석에 근거한 글쓰기이다. 그래서 경전이나 주석의 문구를 인용한 글쓰기 위주가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경전이나 주석에 갇혀 글쓰기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이라 볼 수 있다.

 

불자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보(三寶)’이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성스런 상가(Sangha)를 말한다. 하지만 불자들이 현실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뿐이라 볼 수 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에 모두 실려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원음이라 일컬어 지고 있는 빠알리경전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담마)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은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였는데, 아직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가르침(Dhamma)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열어 보게 되는데, 단지 경만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을 설명해 놓은 주석을 보아야 한다. 마치 천년고찰의 안내판과도 같기 때문이다. 천년고찰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 나면 그 절에 대하여 속속들이 잘 알게 되듯이, 주석을 읽으면 경에 대한 이해를 매우 쉽게 해 준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주석이 없다면 매우 허전하게 여기고, 마치 앙꼬  없는 빵을 먹는 것처럼 느껴지지기도 한다. 그런 주석서 중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 있다.

 

회의론자들은

 

어떤 이는 말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읽어 볼만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문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석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온갖 희론으로 가득차 있다고 결론을 내 버린다. 과연 그럴까.

 

아비담마나 청정도론에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았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종교를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31가지 세상에 대한 것이다.

 

아미담마와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31가지 세상은 모두 부처님이 말씀 하신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 sañña, 산냐)’이 없는 중생

 

31가지 세상 중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sañña-satta)이 있다. 색계 사선천에 속해 있고, 수명은 500대겁이고, 화생으로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문자 그대로 (, sañña, 산냐)’이 없는 중생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라 생각하여 인식에 대한 탐욕을 혐오 하고, 이를 제거 하는 수행의 공덕으로 태어나는 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생명이 있는 육체(생명의 9원소)만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마음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죽은 듯이 산다고 한다. 마치 나무로 만든 조각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인간과 달리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치 죽은듯이 아무생각 없이 500대겁 동안 수명대로 살다가 공덕이 다하여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때 깨어나는 것이다. 죽어서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 비로서 마음이 생겨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들은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논사들이 만든 허구이자 희론이라 주장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무상유정천의 경전적 근거

 

부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주석한다고 하였다. 무상유정천에 대한 이야기 역시 경전을 근거로 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실려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들 인데 두 가지 경우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들이 되어 두 가지 경우로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무상유정(無想有情)이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인식이 생겨나면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중생들이 그 무리로부터 죽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태어나서는 집을 떠나 출가한다. 집을 떠나 줄가하여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이 삼매를 얻는다마음이 삼매에 들어 (재생연결)의 인식이 생겨난 것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가 되어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한다.”

 

(브라흐마잘라경, 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 각묵스님역)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D1).docx

 

 

 

부처님은 우연론자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연론자는 일종의 회의론이라 볼 수 있고 또 단멸론의 범주에 들어 간다.

 

논장에 대해 의심한다면

 

경에 따르면 무상유정천에서 수명이 다한 자가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 새로운 세상에 태어 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바로 이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전 생에서 마음이 아예 일어나지 않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연론이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하여 무상유정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전적 근거에 의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은 주석을 달았고,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체계화 하기 위하여 일종의 지도역할을 하는 참고서를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이다. 특히 아비담마 논장은 율장, 경장과 함께 빠알리 삼장을 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들이 논장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의 깜냥에 벗어난 것은 모두

 

회의론자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눈과 귀 등 감각기관으로 확인 되지 않는 한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깜냥에 벗어난 것은 모두 회의적으로 보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 볼 수 있다.

 

 

1) 4색계선정(초선, 2, 3, 4)

2) 4무색계선정(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3) 상수멸정

4) 육신통(신종통, 타심통,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누진통)

5) 사쌍팔배의 성자(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

6) 열반

7) 천상, 지옥등 자신의 현상세계를 제외한 불교의 세계관

8) 윤회

 

 

8개의 사항중 1번부터 6번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수행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경지이고, 7번과 8번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계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덟가지 사항은 현대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수행의 경지에서나 가능하고 불교적 지혜의 눈으로나 확인 가능한 여덟가지 사항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자신들의 감각적 인지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 대면서 대체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7번과 8번의 육도 윤회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그러다 보니 이들 여덟가지 사항이 들어가 있는 경에 대하여 회의적 입장을 보이고, 이를 주석한 주석서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아 볼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경의 문구를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한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

 

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 경- Kālāma Sutta , 앙굿따라니까야-A3:65, 대림스님역)

 

  깔라마 경(A3-65).docx

 

 

 

깔라마경에서 부처님은 열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라는 문구를 들어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들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신통이나 육도윤회 같은 것들이 타겟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거두절미하고 깔라마경의 한구절만을 토대로 초기경전이나 주석서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각자의 판단대로 결정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경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지 않은 단견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석이 필요한 것이다.

 

회의론자들의 견해는 단편적이고 단멸론적인 경향이 있다. 또 그들의 주장은 미확인 된 것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 하다. 그래서 경을 올바로 해석한 주석서가 필요 한 것이다. 그런 예를 다음과 같은 글에서 볼 수 있다.

 

 

 

Tipitaka

 

 

 

 

불교와 합리주의 –‘깔라마 경다시 읽기

불교와 합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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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라마 경』다시 읽기 -

 

사나트 나나야까라 지음
이순주 옮김

 


How Free is Freedom of Thought

Sanath Nanayakkar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156)

 

 

*모든 주는 역주(譯註)

 


불교와 합리주의
-
『깔라마 경』다시 읽기 -


불교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에 기반한 합리적 가르침이라는 인식이 최근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지식층 불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런 관점을 구체화시키고자 많은 저술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 저술로 인해 그 견해가 더욱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지부』의 「깔라마 경」1)을 끌어내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물로 삼고 있다. , 불교가 완벽한 과학적 기반 위에 성립한 합리주의적 가르침이며, 부처님이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로서 합리주의적 접근 방식을 설파하셨다는 것이다.

 

「깔라마 경」을 이처럼 ‘자유로운 탐구를 위한 헌장’이나 되는 듯이 부각시킨 것은 서구의 학계라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서구 교육을 받은 당시 불교학자들은 이를 ‘새로운 발견’으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강하게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새삼 조명을 받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맹신과 독단을 강력하게 비난하셨으며 그 대신 자유로운 질문과 탐색을 격려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들 학자들은 부처님이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신 점, 자유 의지를 수용하셨던 점, 인간이 처한 제반 곤경에 대하여 인간중심적으로 접근하셨다는 점,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셨다는 점, 당신이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당신이 주장한 깨달음에 대해서마저도 추종자들이 묻고 확인하도록 요청하셨다는 점 등을 적극 인용해 자신들의 견해를 한층 더 확고히 하였다.

 

한편 신중한 불교학자들은 사고의 자유와 질문의 자유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에 대해서, 이런 자유가 어떤 변수 내에서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깔라마 경」을 열심히 검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열된 불자들은 여전히 앞서 말한 ‘새로운 발견’에 도취되어 불교를 순전히 과학적 사실에만 근거를 둔 철저하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단정하고는, 「깔라마 경」을 그러한 의도에서 무분별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시도를 해나가던 중에 이들은 완강한 합리주의자들의 강력한 뒷받침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들 합리주의자 역시 부처님께서도 자유로운 질문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창하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깔라마 경」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전적으로 합리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견해를 강력히 견지하게 된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 주저 없이 다음 두 가지 중대한 결론을 서둘러 내렸다.

첫째, 불교의 접근 방식은 참으로 합리적인데, 「깔라마 경」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통용되었던 열 가지 지혜의 방편, 어떤 가르침이나 견해가 진실하고 건전한지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던 방편을 「깔라마 경」에서는 완전히 거부할 것을 주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결론은, 「깔라마 경」에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만이, 종교적이거나 다른 일이거나 간에 모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하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주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결론은 불교의 교리와 실수행, 양쪽 모두와 중대한 연관이 있으므로 차제에 신중하게 검토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깔라마 경」을 편견 없이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안에는 부처님께서 열 가지 지혜(진리)의 방편(판단 기준)‘거부하도록’ 권고하셨음을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진실을 가려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부처님께서는 이들 열 가지 방편을 거의 모두 다 적절하게 활용하신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깔라마 경」에 많이 있으며, 이 점에 대해 여러 주석서들 또한 지지하고 있다.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과 일반적 뜻은 다음과 같다.

 

1. 전통(Anussava) - 베다 성전의 전통에 의해
2.
전승(Parampar?) -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전승되어 온 온전한 전통에 의해
3.
소문(Itikir?) -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
4.
장경구족(藏經具足, Pi?akasampad?) - 공인된 문헌상의 전통이 그러하므로
5.
논리(Takkahetu) - 추측에 의해
6.
추론(Nayahetu) - 공인된 도리(공리)가 그러하므로
7.
논거의 연구(?k?raparivitakka) - 가르침에 들어 있는 논거의 타당성에 의해
8.
견심체인(見審諦忍, Di??hinijjh?nakkhanti) - 가르침과 개인적 견해들 간의 일치에 따라
9.
유능한 형상(Bhabbar?pat?) - 스승의 권능에 미루어보아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10.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Sama?o no gar?) -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 열 가지 기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2, 3, 4, 9, 10은 밖으로 권위에 의존하는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이고, 나머지 넷인 5, 6, 7, 8은 자신의 이성에 의한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몇몇 사문 스승들과는 달리 베다를 어리석은 허튼소리라 해서 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으셨다. 그 대신 『장부』의 「떼윗자 경2)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다른 견지에서 베다를 비판하시며 그 한계와 단점을 지적하셨다. 그러고는 베다를 무오류의 절대 진리를 담은 것으로 생각하여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도록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베다뿐 아니라 ‘권위’의 범주에 속하는 다른 방편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대하셨다.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끊이지 않고 전승되어 온 전통과 성전이든지, 아니면 그 밖의 전통이든지 가릴 것 없이 모든 전통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거니와, 맹종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관점이었다.

 

예를 들어『장부』의 「대반열반경」에 언급되어 있는 ‘네 가지 권위의 원천’에 대한 가르침3)은 부처님께서 그러한 전통들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잘 보여준다. 『장부』의 「빠야시 경」4)은 모든 종류의 전통에 대한 부처님의 전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부처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바로 전통을 맹종하는 태도이다. 그 경에는 심지어 소문(Itikir?)까지도 검증해 보면 쓸모가 있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무턱대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증거는 경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중부』의 「산다까 경」5)에서 보듯이 논리와 이성은 둘 다 본래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못 박으시고, 그렇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이 때로는 끝없는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밝히셨다.

 

『숫따니빠따』의 「깔라하위와다 경」, 「쭐라위유하 경」, 「마하위유하 경」 등에서의 가르침6)은 소위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지혜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들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가치 없고 쓸데없는 짓이라 하여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셨다는 점 또한 경전이 증명해 준다. 『중부』의 「우빨리 경」7), 「아빠나까 경」8), 「쭐라말룽꺄 경」9)을 보면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의 한계성, 그리고 이들을 분별없이 쓰는 사람들이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을 유념하시면서 어떻게 이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계시는지 잘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권위의 원천’을 검토해 보면 ‘스승의 권능,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해서도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스승의 권위를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신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스승의 가르침과 지도를 포함한 외부로부터의 가르침을 ‘남의 발언(paratoghosa)’이라 하여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데 긴요한 두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하셨다. 나머지 한 요소는 ‘적절한 주의(yoniso manasik?ro)’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깔라마 경」에서 부처님이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을 거부하라고 주창하셨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주창하시는가. 부처님께서 어떤 특정한 종교적 가르침, 특히 윤리 도덕에 관한 가르침일 경우, 그 가르침의 질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 내지 표준이나 척도로서 열 가지 지혜의 방편 중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의존하지 말도록 깔라마인들에게 충고하셨다는 것은 경의 내용상 분명하다.

 

어떤 가르침이, 신성하다고 소중히 여기는 성전에 들어있다거나,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스승이 가르쳤다거나, 논리와 이성에 완전히 부합된다든가 하는 등의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그것이 참되고 건전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충분하고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각자가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 그 가르침을 직접 시험해보라는 새 기준을 제시하신다.

 

『중부』의 「바히띠까 경」10), 「암발라티까 라훌로와다 경」11)에서도 이러한 새 기준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쉽게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깔라마인들에게 앞서 언급한 열 가지 기준들 중 그 어느 것에도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말라고 하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깔라마인들이여,

‘이것들은 무익하며, 이것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이것들은 지혜로운 이들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며, 이것들을 시행하고 수용하면 손해 보고 괴롭게 된다’는 것을 너희 스스로 알게 될 때, 실로 그때야말로 너희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버려야 하리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부언하신다.

 

“너희가 ‘이것들은 이롭고 비난할 점이 없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할 일이고, 시행하고 수용했을 때 이익과 행복에 도움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때 그 일들을 수용하고 계속 준수해 나아가라.

 

, 그러면 이러한 부처님의 새 기준에서 볼 때 합리주의자들의 두 번째 결론, 즉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만이 모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하고 타당한 방법이라는 주장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이는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새 기준을 어떤 범위까지 적용시켜도 되는가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범위를 넓게 잡을 경우, 이 새 기준의 적용 범위에 관해서 두 가지 관점이 성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문자로 표기되는 담마(dhamma), 즉 세상 모든 것에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문자 담마(dhamma)를 포함하여 대문자로 표기되는 담마(Dhamma), 즉 붓다의 가르침에까지도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깔라마 경」이 설해진 구체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경에 보면 이런저런 여러 종교의 스승들이 마을을 방문하여 자기의 가르침만을 자랑하고 그 밖의 다른 가르침들은 모두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깔라마인들이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부처님께서 께사뿌따 마을을 방문하셨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깔라마인들이 부처님께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께사뿌따에 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 이론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랑하면서 다른 이론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헐뜯고 멸시하고 저주만 합니다. 존자시여,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들 중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특정한 ‘의심과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렇듯 혁신적인 새 기준을 제시하시고 그런 가르침을 직접 몸으로 시험해 보게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주신 해답으로 미루어 볼 때, 부처님께서는 문제의 핵심을 윤리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깔라마인들에게 주신 부처님의 훈계는, 요컨대 그러한 가르침이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증대시키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탐욕?성냄?어리석음, 이 세 가지야말로 악의 뿌리요 원인이며, 이들을 피하는 것이 도덕적 삶을 사는 확실한 길이며, 이 길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스스로 깨달을 때(attan? va j?neyy?tha)’라는 훈계는 이런 맥락 속에서만 이해해야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Dhamma)과 관련된 것이나, 또는 그 밖의 모든 것에 「깔라마 경」의 가르침을 확대 적용하도록 정당화해 주는 어떤 빌미도 경에서 찾을 수 없다.

 

합리주의자들의 두 번째 가정은 분명히 억지이다. 세상에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그래도 그 알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 무어라고 견해를 표명하는 이들의 권능을 믿고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날마다 당면하게 되는 어려운 문제나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일상적 삶의 자잘한 일조차 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식견이 높고, 여러 분야의 전문지식이 있는 이들의 충고와 도움을 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합리주의자들의 첫 번째 결론, 즉 「깔라마 경」에서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을 완전히 거부하도록 하였다는 것만을 바탕으로, 불교는 합리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주장 역시 의문의 여지가 너무나 많다.

 

부처님께서는 이 훈계를 일반적인 범부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러한 범부들이 높은 전문적 지식이나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상적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 상황이 그들을 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이끌 것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상식과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고하신 것이었다.

 

궁극의 지혜는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점진적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중부』의 「끼따기리 경」12)에서 분명하게 설하셨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기본 원리들이 담겨 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초심자나 공부가 미진한 사람들의 이해범위를 넘어선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해탈을 성취한 큰 제자 스님들까지도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근본적 문제점들에 대한 설명을 구하는 장면이 경에도 꽤 자주 나온다. 그 장로스님들은 부처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와 같은 쟁점들에 관해 지혜가 밝아져 분명한 통찰력을 얻고 있다.

 

(), 윤회 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출세간 지혜의 형태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런 지혜는 일반인들의 능력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큰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이런 법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모든 사람이 자유 탐구라는 방법을 써서 붓다의 가르침(Dhamma)에 관한 일체의 지혜를 얻도록 「깔라마 경」이 백지위임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깔라마 경」뿐 아니라 다른 어떤 주석서에서도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 해서 이런 기본 쟁점들에 대해 우리가 탐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조급하게 진리에 도달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되며, 그래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거나 다른 모든 견해는 다 그릇된 것이라고 비방하면서 자기 것을 선양해서도 안 된다.

 

자의적인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경우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럴 때 그 사람의 결론은 ‘자신만의 견해’가 되어버리며, 그런 경우 자기 견해를 선전하고, 자기 견해를 방어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자 한다. 이런 전개과정은 한편으로는 갈등을 가져오고 또 한편으로는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경우 양쪽 다 그 결과는 해롭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원시적인 것이며 덜 발달된 종교의 특징이라는 신념과, 서양에서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던 불교가 모든 형태의 믿음을 배척하고 있다는 신념, 이 두 가지가 많은 이들이 자유로운 탐구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싶어 하는 강한 이유이다. 이 또한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삿다’(Saddh?, )를 확신, 믿음, 신앙 등 그 어떤 용어로 옮기든, 이 ‘삿다’가 불교 수행의 본질적인 특질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삿다’는 맹목적 믿음(am?lik? saddh?) 같은 것이 아니고 합리적 토대위에 세워진 믿음(?k?ravati saddh?)을 말한다.

 

‘삿다’를 계발하기 위하여서는 절대적인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증거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탐구는 우선 ‘삿다’가 있고 난 다음 그 보다 훨씬 뒤에 오는 것이다.

 

『중부』의 「짱끼 경」13)에는 이 자유로운 탐구를 적용하는 적절한 절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절차는 ‘삿다’에서 시작해서 ‘빤냐(지혜)’로 끝난다.14) 그 사이에는 진리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고 이 과정들은 유익하고도 건전한 것이다.

 

불교가 수행에 있어서 근본적이고도 아주 중요한 요소로서 ‘삿다’의 유용함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불자들이 꺼려할 이유는 없다. ‘삿다’는 우리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중부』의 「알라갓두빠마 경」15)에서 불법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그 경에는 뱀의 몸뚱이나 꼬리를 잡는 사람이 뱀에 물리게 되는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그와 같이 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고 나와 있다.

 

자유로운 탐구는 불자들 사이에 거의 유행이 되었다. 그 결과 흥미를 끌 만하고 신기한 해석을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억지소리를 하거나 전혀 엉뚱하게 전하는 것들도 많다.

 

일부 편견 없는 저술가들이 「깔라마 경」의 진정한 중요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 : BPS 소식지 No. 9, 1988, 봄호)16) 지나치게 열성적인 포교자들에게 경고를 주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이러한 시도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무제한적 사고의 자유가 마치 불교의 등록상표인양 야단스레 떠들어 대면서, 잘못된 해석을 더 많이 쏟아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 45
불교와 합리주의
-
『깔라마 경』 다시 읽기

 2005 12 15일 초판 1쇄 발행

 

 

 

 

각주)-----------------

「깔라마 경」 (『증지부』Ⅲ 대품 65)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 께사뿌따 마을의 깔라마인들에게 해주신 법문이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께사뿌따 마을에 와서 자신들의 이론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이론들은 비난하기 때문에 깔라마인들은 누구의 말을 진리로 믿어야 할지 몰라 심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호소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의 질을 판단함에 있어 당시 통용되던 열 가지의 가치 판단기준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실제 체험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도록, 즉 그 가르침을 따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신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여읜 사람은 자(), (), (), ()로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살며, 바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네 가지 편안한 마음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 내생이 있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드러난다면 자신은 선을 행한 만큼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 틀림없다는 첫 번째 편안한 마음, 만일 내생과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 해도 자신은 지금 세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두 번째 편안한 마음, 악행을 한 사람이 악한 과보를 받는다 해도 자신은 악행을 하지 않았으므로 괴로움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세 번째 편안한 마음, 악행을 한 사람이 악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청정해졌음을 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우니 마음 쓸 것 없다는 네 번째 편안한 마음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깔라마인들은 크게 환희심을 내며 부처님께 귀의했다.
    

 법륜?둘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참조.

 

「떼윗자(삼명) 경」 (『장부』 13)
    

여기서 삼명(tevijj?, 三明)은 불교의 숙명, 천안, 누진의 삼명이 아니라 세 가지 베다(리그, 아유르, 사마)에 대한 지식을 갖춘 바라문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의 한 시골 읍 근처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두 젊은 바라문이 찾아와 여쭈었다. 자기네 마을에 수많은 바라문 스승들이 와서 제각기 진리를 설하며 그 길을 따라만 가면 브라흐마와의 합일이라는 바라문 최고의 목표에 도달한다고들 말하는데 마을의 골목길도 아니고 최고 경지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그렇게 여러 갈래일 수 있느냐며 자기들 역시 각자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 견해가 상충하여 부처님께 판정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 베다에 능통한 많은 스승들 중에 브라흐마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있다더냐. 없다면 그들의 스승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더냐. 그도 없다면 그들의 스승의 스승, 7()로 소급해 올라가면서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또한 아니라면 옛 성구(聖句)를 모아 베다서를 편집한 초기의 성자들 중에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본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브라흐마가 출현했는지를.’ 하고 말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들이 선언하는 진리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들은 앞 못 보는 장님들의 행렬이나 마찬가지로 맨 앞에 선 사람도 중간에 선 사람도 맨 뒤에 선 사람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들어 세 베다의 권위만 맹종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시고, 브라흐마와 합일하려면 브라흐마처럼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없는 청정한 사람이 되는 길 밖에 없으니, 세속에 매여 오욕락에 물들지 말고 출가의 청정한 길을 걸으라며 구체적 공부 길을 적시해 주신다.

 

 

네 가지 권위의 원천(Mah?padese) :「대반열반경」(『장부』16)에 나오는 이야기
     

 비구나 불자들이 새로운 경이나 율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내세울 때, 그것의 근거로 다음 네 가지 출처를 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①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② 모처에서, 장로와 뛰어난 스승들이 있는 승가(조실 스님 회상(會上))로부터 들었다. ③ 모처에서, 아함을 전승받아 법과 율과 논모(論母)를 수지하는 학식 높은 장로 비구들(대덕스님들)에게서 들었다. ④ 모처에서, 아함을 전승받아 법과 율과 논모를 수지하는 학식 높은, 한 장로 비구(대덕스님)에게서 들었다.

 

 따라서 ‘이것은 법이며, 이것은 율이며,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이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경우, 함부로 거부하거나 수용하지 말고 확립된 경과 율에 비추어 면밀히 검토한 후 판단하라고 가르치신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해에 라자가하로부터 암발라티까, 날란다, 웨살리 등을 지나 꾸시나가라까지 유행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수록한 경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말씀들을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꼬띠가마에서는 사성제를, 나디까에서는 진리의 거울을, 벨루바에서는 ‘자신을 섬(등불)으로 삼고, 법을 섬(등불)으로 삼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는 마지막 유훈을 남기신다.

 

「대반열반경」의 제4장에서는 반다가마에서 설하신 ‘, , , 해탈 이 네 가지를 이해하지도 붙잡지도 못해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윤회의 길을 걸어왔다’는 가르침을 주시고, 보가나가라에서는 ‘네 가지 권위의 원천(Mah?padese)’에 관해 설하신다.

 

「빠야시 경」 (『장부』23)
     

꼬살라 국의 빠야시 왕자는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은 없다. 화생(化生:신이나 지옥 중생들처럼 모태를 빌리지 않고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로 받는 탄생 과정 및 그 존재)은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열매나 과보라는 것도 없다.’라고 하는 삿된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마을에 온 꾸마라 까사빠 비구가 여러 가지 비유로써 그 견해의 잘못됨을 일깨워 주고 버릴 것을 충고하지만 갖가지 이유를 들어 버티다 마침내 승복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비유를 줄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 남자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삼[] 더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 삼은 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둘이 나누어서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다시 삼으로 만든 실 더미를 줍게 된다.

 

한 남자는 삼실을 주웠으므로 삼더미는 필요 없고 무거우니 버리고 삼실만 가지고 가자고 하지만, 다른 한 남자는 이미 여기까지 오랫동안 무겁게 삼더미를 지고 온데다 그 삼더미는 단단히 잘 묶여져 있으므로 버리지 않고 그냥 그걸 지고 가겠다고 한다.

 

다른 마을 앞을 지나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차례로 삼옷감, 좀 더 나은 아마, 아마실, 아마천, 목화더미, 목화 실, 면 옷감, , 구리, , 은 등을 발견하다가, 결국 금덩이를 발견하게 된다.

 

한 남자는 더 나은 가치의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낮은 가치의 것은 버리고 새로 주운 물건들을 지고 가다가 결국 금덩이를 지고 집에 돌아가게 되고, 다른 한 남자는 처음 주운 삼더미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고 집에 돌아간다.

 

금덩어리를 지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 친지, 동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었지만, 삼더미만을 지고 온 남자는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동료들에게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주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이 부딪히는 경험을 향상의 계기로 살려내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언제나 향상의 기회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처럼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나서도 향상을 이루지 못한 채 기존 전통이나 관념, 편견 따위에 매인 채 헛된 삶을 살고 만다는 점을 절절이 가르치고 계시다.

 

 

「산다까 경」 (『중부』76)
    

부처님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승원에 계실 때, 아난다 존자가 떠돌이 수행자 산다까에게 설한 법문이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성스러운 삶[梵行]을 부정하는 외도들의 네 가지 견해를 통해서는 올바른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자세히 가르쳐준다. 또한 성스럽되 궁극적으로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네 가지 가르침에 대해서도 설한다.

 

이와 같은 외도들의 견해나 가르침을 통해서는 올바른 범행을 닦아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산다까는 아난다 존자에게 현명한 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묻게 되고 아난다 존자는 바른 공부길을 일러준다. 그러자 유행자 산다까는 기뻐하며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다.
     

 위의 네 가지 견해와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스러운 삶을 부정하는 외도들의 네 가지 견해 : ① 어리석은 자든 현명한 자든 죽은 후에는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단멸론(허무주의)].  ②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고 아무리 좋은 일(계행, 보시, 수행)을 해도 공덕이 없다[인과의 부정].  ③ 정진, 노력은 필요 없고 운명과 팔자대로 고와 낙을 누릴 뿐이다[운명론].  ④ 일곱 가지 요소[地身, 水身, 火身, 風身, , , 靈魂]의 부동의 존재만 있을 뿐이고, 어떤 변화도 선악의 행위도 없다[유물론].
     

성스럽되 궁극적 평안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네 가지 가르침 : 자신은 항상 지견이 현전해 있으며, 신상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전해들은 바를 진리라고 알고 이를 설하는 경우, 그 전해들은 기억이 바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추론과 심찰(審察)에 따라 가르치는 스승의 경우, 잘못 고찰할 수도, 잘못 추론할 수도 있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④ 어떤 스승의 경우, 삶은 청정하지만 지혜가 없어서 자문을 받게 되면 모호하게 대답하거나 궤변을 일삼는다.

 

「깔라하위와다(언쟁과 논란에 관한) 경」 (『숫따니빠따』IV 11게송)
     

언쟁, 논란, 비탄, 자만, 중상 등은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서 일어나고 존재와 비존재, 쾌락과 불쾌는 접촉에서 일어나고 접촉은 명색(名色)에서 일어나며 일체 희론적 개념은 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명색(名色)과 상()의 차원을 떠나 해탈의 경지에 들면 논쟁에 끼어들지 않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쭐라위유하(다툼에 관한 작은) 경」 (『숫따니빠따』IV 12게송)
    

서로 자기가 현명하고 상대방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주관적인 상()을 고집하기 때문이며 독단을 버리면 다툼은 없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마하위유하(다툼에 관한 큰) 경」 (『숫따니빠따』IV 13게송)
    

구하는 바가 있으면 욕망이 일어나고 도모하는 바가 있으면 두려움이 일어나며, 명색과 식()에 입각한 주장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툼을 떠날 수 없지만 성자는 견해에 흐르지도, 지식에 묶이지도 않고 성찰을 통해 평정을 누리기 때문에 일체 다툼에서 초연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결국 이 경들은 모두 해탈분상에서 볼 때 식과 명색은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이성’이라는 것 역시 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적 범주를 탈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빨리 경」 (『중부』56)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뿌따는 신업(身業)이 가장 무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의업(意業)을 중시하는 불교와 대립한다.

 

그의 제자인 재가자 우빨리는 자신이 직접 부처님을 논파하겠다며 부처님께 찾아온다. 부처님께서 ‘몸에 열이 있는 사람이 찬물을 먹지 않고 따뜻한 물만 먹다 죽으면(자이나교에서는 찬물에 유정물이 살고 있으므로, 살생을 피하기 위해 찬물을 먹지 못하게 한다고 함), 어디에 태어난다고 자이나교에서는 가르치는가’라고 물으셨다.

 

이에 대해 우빨리는 ‘의()에 속박된 채 죽었으므로 ‘의중생천(意衆生天)’에 태어난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로도 문답이 계속 이어지지만 우빨리는 이 첫 문답에서 이미 자기가 논쟁에서 패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 계속 버티다가 충분한 확신을 얻고 승복하여 부처님께 귀의한다.

 

「아빠나까(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경」 (『중부』60)
    

부처님께서 환대를 받으며 꼬살라 국 바라문 마을인 살라 마을에 도착하셨다. 부처님께서 바라문들에게 이치에 합당한 믿음을 가르쳐준 스승이 있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그런 스승을 갖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런 스승을 못 만났으면 논란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법을 찾아 취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며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기 상반되는 두 입장을 부각시키신다.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론자와 그 반대론자, ② 결과를 부정하는 자(무결과론자)와 그 반대론자, ③ 원인을 부정하는 자(무원인론자)와 그 반대론자, ④ 무색계를 부정하는 자(무무색계론자)와 그 반대론자, ⑤ 멸()을 부정하는 자(무멸론자)와 그 반대론자.

 

이들 상반된 두 입장들 중 전자의 입장이 틀리고 후자의 입장이 맞는 것은, 사실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는 바로서 더 이상 논란할 여지가 없으므로 맞는 쪽을 택함으로써 향상 해탈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설하신 후 이 세상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자, 남들을 괴롭히는 자,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자 등의 어리석은 세 부류와 자신과 남 모두를 괴롭히지 않는 현명한 자들이 있으니, 마땅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법을 누리는 자는 이런 현명한 자가 될 것임을 가르치셨다.

 

「쭐라말룽꺄(말룽꺄 작은) 경」 (『중부』63)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몸과 마음은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부처님의 사후세계는 있는가 없는가 등의 문제에 해답을 주시지 않으면 수행을 포기하겠다는 말룽꺄 비구의 다그침에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의문을 풀어줄테니 수행을 하라고 권하신 적은 없노라 하신 후,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룽꺄 비구의 태도가 잘못임을 일깨워 주셨다.
     

“말룽꺄뿟따여, 그것은 마치 독을 잔뜩 바른 화살에 맞은 사람이 있어 그 친구와 친척들이 의사를 데려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에게서 상처를 입었고 내가 맞은 화살의 성질은 어떤 것인지 등 모든 것을 상세히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게 하지 않겠다.’ 그 사람은, 말룽꺄뿟따여, 그런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숨지고 말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왜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지 설명해주셨다.

 

“나는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유한한 것인지 무한한 것인지 밝히려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논의들은 이익됨이 없고 성스러운 삶[梵行]의 기초와 관계가 없으며, 염리(厭離), 이욕(離欲), (, nirodha), 적지(寂止, upas?ma), 증지(證智, abhi???), 등각(等覺, sambodhi), 열반(涅槃, nibb?na)에 도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말룽꺄 비구는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에 만족하고 기뻐했다

 

「바히띠까(겉옷) 경」 (『중부』88)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이 아찌라와띠 강가에서 아난다존자를 만나 왕이 묻고 아난다 존자가 이에 답하며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눈다.
   

“부처님께서는 신()?()?() 삼면에서 현자와 바라문들이 비난할 만한 행위를 할 수도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몸으로 하는 어떤 행위가 비난받게 되는가?
   

“불건전한 행위가 비난을 받는다.
   

“불건전한 행위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행위란 아픔을 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픔을 주는 행위는 고통의 과보를 맺는 행위이며, 이는 자신을 아프게 하고 남을 아프게 하고, 또는 나와 남 모두를 아프게 하여 그로 인해 불건전한 상태가 증대하고 건전한 상태가 줄어드는 것, 그것이 현자나 바라문들이 비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불건전한 것을 끊고 버리도록만 가르치      시는가?
   

“부처님께서는 불건전한 법은 끊고 버리고, 건전한 법은 성      취하도록 가르치신다.
     

왕은 위와 같은 아난다 존자의 대답을 듣고 크게 기뻐하      , 어떤 보물이라도 아낌없이 보시하고 싶은데 비구에게는      보물이 닿지 않을 것이므로, 마가다 국왕이 선물로 보내온      겉옷(바히띠까)을 보시하겠다고 한다.

 

아난다 존자가 그것마      저도 거절하자, 이 옷으로 비구의 삼의(三衣)를 능히 만들 수      있으니 받아 주십사고 간청한다. 아난다 존자는 그것을 받      아서 부처님께 돌아가 바친다. 그러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빠세나디 왕은 아난다를 만날 수 있었고 공경을 바칠 수 있      었으니 그 이득이 컸다고 말씀하신다.

 

「암발라티까 라훌로와다 경」 (『중부』61)
    

부처님께서 암발라티까에 머물고 있던 일곱 살 사미이자 당신의 아들인 라훌라에게, 특히 거짓말을 경계하시며 신중한 처신으로 거짓말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간절히 신칙(申飭)하신 법문이다.

 

코끼리가 전쟁터에서 코를 내두르며 싸우기에 이르면 이미 더 이상 못 할 일이 없듯이, 수행자가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면 못할 악이 없게 된다는 것을 비유하여 고의로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타이르셨다. , 코끼리에게 코가 생명이듯 사문에게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의 삼업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거울로 비추어 보듯 ‘내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장차 하고 싶어 하는 일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과거에 했던 일이 자신을 해치는 일은 아닌가, 남을 해치는 일은 아닌가, 나와 남 모두를 해치는 일은 아닌가. 이 행위가 불선한 것, ()를 일으키는 것, 고의 과()를 맺는 것이 아닌가’ 신중히 살펴 만일 그러하면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와 남 모두를 해치지 않고, 선하며, ()을 일으키며, 낙의 과()를 맺으면’ 그런 행위는 계속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미 저지른 잘못은 스승이나 도반들 앞에 드러냄으로써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각오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끼따기리 경」 (『중부』70)
     

부처님께서는 오랜 경험에 비추어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끼따기리에서 수행 중인 아싸지 비구(초전법륜 때의 다섯 비구 중 하나인 아싸지 비구가 아니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여섯 비구군에 드는 비구임. 뿌나빠숫까 비구 역시 그러함)와 뿌나빠숫까 비구는 장래의 이익을 위해 지금 당장의 이익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며 하루 세끼 식사를 고집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비구를 불러서 당신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닌 불분명한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신 후, 이 세상에는 심?혜 양면에서 해탈한 자, 지혜로 해탈한 자, 몸으로 실증(實證)한 자, 법에 이른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불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의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해탈열반은 ‘점진적 공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해 주신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믿음이 있으면 스승을 찾게 되고, 스승을 찾게 되면 존경을 표하게 되고, 존경을 표하게 되면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귀를 기울이면 법을 듣게 되고, 법을 들으면 법을 기억하게 되고, 법을 기억하면 그 의미를 궁구하게 되고, 그 의미를 궁구하면 그 가르침을 성찰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면 열정이 솟아나게 되고, 열정이 솟아나면 뜻이 확고히 서게 되고, 뜻이 확고히 서면 정사(精査)하게 되고, 정사(精査)하면 열심히 정진하게 되고, 정진하면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고 구경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시며 공부의 길에 든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스승에 대한 믿음(삿다)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짱끼 경」 (『중부』95)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왕의 영지인 오빠사다에 방문하셨을 때였다. 그곳에 살고 있던 대 바라문인 짱끼가 여러 바라문들과 같이 부처님을 찾아뵈었을 때, 십육세 바라문 소년 까빠티까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하여 바라문들 가운데 높은 평판을 누리고 있었다.

 

까빠티까는 부처님께, 바라문들은 구전이나 성전으로 내려오는 옛 바라문들의 성구(聖句)를 두고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명확하게 결론지어 버리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나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바라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없다는 대답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럼 7()를 거슬러 올라가는 스승 중에는 있느냐, 그도 없다면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사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브라하다와자, 와세타, 깟사빠, 브하구 등 옛 성전의 편찬자들 중에는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러고 나서, 그도 없다면 믿음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이 책의 주 2, 「떼윗자 경」에서처럼) 장님의 행렬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진지한 청년 바라문은 진리의 보존에 대해, 진리의 발견에 대해,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대해, 다시 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에 관해 차례로 묻고 부처님의 자세한 대답에 크게 환희심을 발하여 마침내 부처님께 귀의한다. 앞의 주 12 「끼따기리 경」의 셋째 문단 참조.

 

「알라갓두빠마(뱀의 비유) 경」 (『중부』22)
    

독수리 사냥꾼 출신 아리타 비구가 ‘부처님께서 장애라고 가르치신 법들이 반드시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삿된 견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이런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없었던 다른 비구들이 부처님께 이 사실을 고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 아리타 비구를 불러 꾸짖으신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과 근심과 재난이 많다고 열 가지 비유로써 말씀해주셨던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며, 불법을 배우고는 그 의미를 슬기롭게 궁구하지 않고 불법에 관한 지식을 잘못 파악하고 남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함부로 남용하는 것은 뱀을 잡을 때 몸뚱이나 꼬리를 잘못 잡다가 해를 입는 것처럼 위험한 일임을 지적하신 후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위의 열 가지 비유,

 

갖가지 욕망은 맛없는 것이 살 없는 뼈와 같고,

뭇사람들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고기 덩어리와 같고,

끊임없이 불타는 것이 건초 횃불과 같고,

뜨겁기가 숯불 구덩이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꿈과 같고,

남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빌린 물건과 같고,

다치기 쉬운 것이 열매 딸 때 잎과 줄기가 상하기 쉬운 나무와 같고,

도살장과 같고,

몸을 난자하는 칼과 창 같고,

위험하기가 독사의 머리 같다는 비유이다.
     

이 경에는 또 유명한 ‘뗏목의 비유’도 나온다. 아리타 비구가 자신의 견해에 너무나 집착하는 것을 딱하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유용한 뗏목도 버려야 할 때에는 버려야 마땅한데, 하물며 유용하지 못한 견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깔라마 경」에 대한 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비구 보디는 「깔라마 경」의 한 구절만을 토대로 부처님이 일체의 원리와 믿음을 포기하고 진리탐구에 있어서 각자의 판단대로 결정하라고 하신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에 대해 과연 이 경을 그렇게 해석해도 좋은지를 묻고 있다.

 

이 경의 ‘너희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은 일반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시 깔라마인들이 당하고 있었던 특수한 혼란상황에 대처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 깔라마인들이 바른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들임을 전제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이를 도덕적으로 미숙한 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비구 보디는 보고 있다. 또 당시 깔라마인들은 아직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한 불자들이 아니라 부처님께 단지 자신들의 혼란한 입장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묻고 있는 속인들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에 본격적으로 귀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처음부터 심오한 가르침을 펴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누구든 실제 체험으로 확인될 수 있는 도덕률, 즉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을 다스리는 쪽이 이에 끌려가는 쪽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부터 스스로 확인해 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부처님에의 신뢰야말로 믿음을 지혜로, 신념을 확신으로 발전시켜 일체 고로부터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데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devamitta/2341727)

 

  불교와 합리주의 –깔라마 경 다시 읽기 .docx

 

 

 

2012-08-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