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잘 요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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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마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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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론에 대한 현대적 해석, 불확정성의 원리[배우이자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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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의 한계[신에의 귀의], 이어령, 길희성, 연기[조건성과 상의성], 무시윤회
아래는 각각의 원문
중도와 십이연기의 관계는? 초기불교의 일곱가지 중도사상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
전하는 뉴스에 따르면 누군가 교황에게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랑리본을 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라 한다. 이에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취지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립은 어떤 의미일까?
중립(中立)이라는 말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 입장을 지킴’을 뜻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교황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말한 사람은 좌와 우의 이념논리에서 중간을 지키라는 말과 같다. 아마 세월호리본을 단 사람들을 좌로 보고 달지 않은 사람을 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이런 충고를 거절 하였다. 이번 만큼은 유족들의 고통을 들어 주겠다는 의지로 보여 준다. 이런 교황의 조치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정치권에서 중도는?
중립과 유사한 말이 있다. ‘중도(中道)’이다. 흔히 중도라고 하면 정치권용어로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중도를 표방하면 대게 ‘사쿠라’논쟁에 휘말린다. 이때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간의 입장을 뜻한다. 마치 박쥐가 새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은 것처럼, 정치권에서 중도를 표방하면 ‘기회주의자’라고 낙인 찍히기 쉽다.
구경론으로서의 중도
중도라는 말은 정치용어로 알고 있지만 불자들에게는 중도라는 용어는 매우 익숙하다. 부처님이 중도의 가르침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라 알려져 있는 초전법륜경에서도 잘 표현 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Yocayā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ete te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에떼 떼 빅카웨, 우보 안떼 아누빠감마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아누라다푸라
초전법륜경에서 중도라는 말은 ‘두 번’ 나온다. 위 문장은 앞서 나온 중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 중도는 빠알리로 맛지마빠띠빠다(majjhimā paṭipadā)라 한다. Majjhimā가 ‘middle; medium; moderate; central’의 뜻이고, paṭipadā가 'Road', 'path'를 의미하므로, 이를 합치면 한자어로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위 문장은 ‘고락중도(苦樂中道)’에 대한 것이다. 극단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의 양극단은 성현의 가르침도 아니고 동시에 무익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서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중도를 깨달았다 (majjhimā paṭipadā abhisambuddhā”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빠알리어 ‘abhisambuddhā’의 의미는 abhisambujjhati의 과거분사(p.p)형태이다. 그래서 ‘gained the highest wisdom’라고 번역된다. ‘최상의 지혜를 얻었다’라는 뜻이다. 이 최상의 지혜에 대하여 경에서는 1)궁극적인 고요(upasamāya), 2)곧바른 앎(abhiññāya), 3)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 4)열반(nibbānāya)이라 하였다. 고락중도의 길을 가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첫 번째로 언급된 중도는 ‘목적론’ 또는 ‘구경론’이라 볼 수 있다.
방법론으로서의 중도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두 번째로 언급된 중도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ṃ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까따마 짜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꾸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따띠: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삼마딧티 삼마산깝뽀 삼마와짜 삼마깜만또 삼마아지오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아양 코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이 문장에서도 역시 ‘중도’가 등장한다. 이전 문장에 이어 두 번째 이다. 그런데 고락중도에 대하여 부처님은 팔정도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고락중도에 대하여 왜 팔정도라 하였을까? 이는 앞 문장과의 관계로 유추 할 수 있다.
이전 문장에서는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 중도가 설명되어 있다. 그와 관련된 말이 1)궁극적인 고요(upasamāya), 2)곧바른 앎(abhiññāya), 3)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 4)열반(nibbānāya)이다. 그런데 이번 문장에서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실천항목이 소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중도의 방법론’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중도가 목적론 또는 구경론을 거론 하였다면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법을 제시한 것이 ‘팔정도’라 보여진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는?
이렇게 본다면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는 다음과 같이 표로 요약할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
중 도 | 내 용 | 비 고 |
구경론 (목적론) |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 열반의 성취 |
방법론 (실천론) |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 팔정도 실천 |
표를 보면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구경론으로 중도가 설명되었고, 이어서 방법론으로서 중도가 설명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구경론과 방법론 모두를 설한 것이다.
성철스님의 중도론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오로지 구경론으로서 중도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중도의 목적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백일법문, 4 원교(圓敎)의 중도설,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법문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목적론(구경론)임을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을 보면 분명히 목적론(열반)과 실천론(팔정도)이 언급되어 있다.
성철스님의 중도관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마성스님은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에 나타난 中道思想)”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중도는 바른길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좌와 우의 중립 또는 가운데 길을 뜻하는 중도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왜 그런가? 바른길이 있으면 바르지 않은 길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치권에서 누군가 자신의 중도주의자라 말하였을 때 좌와 우의 중도의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좀더 확대 해석하여 중도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바른길을 가는 자와 바른 길을 가지 않는 자, 이렇게 이분법적인 편가르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다양한 부처님의 중도사상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르지 않은 것을 가정하여 바른길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명백하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에서 표현 된 것처럼 목적론이고 실천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도라는 말은 초전법륜경에만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빠알리니까에는 부처님의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가 지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참고하여 표를 만들었다.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No | 구 분 | 내 용 | 경전적 근거 |
1 | 유무중도 (有無中道) | 유(有)는 무조건적인 유일 수가 없고, 무(無)는 무조건적인 무일 수가 없다. 존재인 유(有)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無)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S12:15) |
2 | 자타중도 (自他中道) | 자기원인설은 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가 결과함을 말한다. 타자원인설은 비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성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합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 (S12:17) |
3 | 단상중도 (斷常中道) |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발생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괴로움을 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S12.17) |
4 | 일이중도 (一異中道) | 인과의 동일론과 차별론은 부정된다. 현상계가 완전히 동일하다던가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인과성의 원리는 성립할 수 없다. | 1)“존자 고따마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하는 것도 세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 “존자 고따마여, 모든 것은 다양합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다양하다는 것도 네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 바라문이여, 이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48)
2)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35) |
5 | 거래중도 (去來中道) | 어디서 오는 것(래)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거)도 아니다.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는 연기법칙에 따른다. 인과성에 공간적 접근성이 수반되지 않는다. | 1) "수행승들이여, 시각(眼)이 생길 때 어떤 다른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제일의공경, 산스크리트어본)
2)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M72) |
6 | 생멸중도 (生滅中道) | 우다나에서 생멸의 부정이 다른 중도설에서 부정되는 양 극단과 함께 등장하고 있어 후대에 용수가 생멸의 부정을 왜 팔부중도에 포함시켰는지 추측하게 할 수 있다.
|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1) |
7 | 고락중도 (苦樂中道) | 초기불교에서 연기설과 관련된 고락중도는 다른 중도사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고락중도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수행적 인과관계에 관련된 특수한 속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 |
(출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전재성박사)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_140822.docx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일곱 가지 중도가 나온다. 이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1번항 ‘깟짜야나곳따경(S12.15)’의 유무중도(有無中道)와 7번항 ‘초전법륜경(S56.11)’의 고락중도(苦樂中道)일 것이다.
용수의 팔부중도(八不中道)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중도사상은 용수의 ‘팔부중도(八不中道)’보다 더 다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의 팔부중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생(生)-멸(滅)-거(去)-래(來)-일(一)-이(異)-단(斷)-상(常)’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가지가 그릇된 망념을 일으키므로 이를 깨뜨리기 위하여 일체현상이 자성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 불멸, 불거, 불래, 불일, 불이, 부다, 불상의 팔불의 정관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따르면 용수의 팔부중도는 이미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위 표에서 6번항 생멸중도가 그것이다.
우다나 열반의 경(Ud81)에서
표에서 6번항을 보면 우다나 ‘열반의 경(Ud81)’이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의 게송이 있는데 이 게송의 문구가 용수의 팔부중도에 해당되는 문구가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일불이(不一不異)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2) 불래불거(不來不去)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3) 불상부단(不常不斷)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4)불생불멸(不生不滅)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1)
불일불이(不一不異)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란 무엇일까? 그것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성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우다나에서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와 유사한 문구가 있다. 그것은 우다나 게송에서 지수화풍과 사무색처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라는 말이 열반을 뜻한다. 그런 열반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다. Uda.391에 따르면 꿈속에서조차 경험 해 보지 못한 세계라 한다. 가장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부드럽고 미세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지극히 고요하고, 현자에게만 알려지고, 지극히 미묘한 불사의 세계가 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지수화풍 사대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설명에 따르면 현상세계의 다양성의 부정을 뜻한다. 이는 다름 아닌 차별성의 부정을 뜻한다. 이것이 ‘불이(不異)’이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사무색처의 부정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설명에 따르면 내적 본질의 자기동일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동일성의 부정’이다. 이것이 불일(不一)이다.
이와 같은 불일불이는 열반의 속성이 분명히 드러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불래불거(不來不去)
용수의 불래불거(不來不去)가 있다. 이 말은 일체중생이 무명망상으로 윤회하여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 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불래불거에 해당되는 말이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neva āgatiṃi, na gatiṃ).”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래불거(不來不去)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불상부단(不常不斷)
용수의 불상부단(不常不斷)은 무엇일까? 모든 밥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는고 하는데, 영원히 상주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구절이 우다나에서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na gatiṃ, na ṭhiti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상부단(不常不斷)을 말한 것이 아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마지막으로 용수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법의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생멸에 대한 착각과 집착을 고쳐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 불생불멸에 대한 것이 우다나에서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na cutiṃ, na upapatti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다나의 게송이 용수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다나의 게송에는 용수의 팔부중도에 대한 대강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용수의 팔부중도가 우다나에서 표현된 네 가지 중도에 대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초기불교 일이중도(一異中道)사상의 예를 보면
초기경전에서는 용수의 팔부중도 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많다. 그런 부처님의 중도중에 4번항 ‘일이중도(一異中道)’가 있다. 그런데 용수의 불일불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Katamaṃ jarāmaraṇaṃ? k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aññaṃ jarāmaraṇaṃ aññ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ubhayametaṃ ekatthaṃ. Byañjanameva nānaṃ.
"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세존]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하거나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과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른 것이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
(Avijjādipaccaya desanā sutta-무명을 조건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5, 전재성님역)
경에서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No kallo pañho)”라 하였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한마디로 질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한 것은 한수행승이 “세존이시여, 늙음과 죽음이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수행승의 질문이 적절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악취나는 질문
왜 이와 같은 질문이 잘못 된 것일까? 그것은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질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접시 위에 똥덩어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황금쟁반 위에 맛있는 음식을 담은 접시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약간의 똥덩어리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먹지 않고 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은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물어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악취’나는 질문이라 볼 수 있다. 마치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질문자가 유아임을 가정하며 무아윤회론의 모순을 지적하고자 함은 음식에 똥덩어리가 떨어진 것처럼 악취 나는 질문이고, 동시에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인 것이다.
극단적 견해를 가졌을 때
부처님은 ‘늙음과 죽음’ 그리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에 대하여 육체와 영혼의 비유를 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늙음과 죽음은 ‘육체’,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영혼’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육체(물질)를 강조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영혼(정신)을 강조하다 보면 영원론자가 된다. 이는 ‘없다’와 ‘있다’와 같은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서로 같은 것(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으로 본다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육체가 파괴되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반대로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으로 본다면 영원주의자가 된다.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정신만은 죽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적 견해와 극단적인 영원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두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하였다.
팔정도가 없는 삶
그렇다면 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견해를 가지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Srp.II.68-69에 따르면, 여기서 청정한 삶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을 가는 삶을 말한다. ‘영혼과 신체가 같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영혼도 단멸한다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 고귀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영혼과 신체가 다르다.’는 것은 신체만이 파괴되고 영혼은 새장에서 날아가는 것 같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으로 영원주의자의 견해이다. 하나의 형상이라도 지속적이고 견고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고귀한 길을 닦아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2권 189번 각주, 전재성님)
청정한 삶을 살아 가기 위한 조건으로 팔정도를 들고 있다. 그러나 허무주의자나 영원주의자들에게는 팔정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팔정도를 통하지 않고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보는 자들이 허무주의 자들이라 한다. 허무주의자들은 단지 육체적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본다. 이런 견해를 가졌을 때 보시의 공덕 등 인과가 무력화 된다.
영원주의자들이 팔정도를 닦지 않는 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형성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기 마련임에도 변치 않고 죽지도 않는 영혼이 있다고 본다면 결코 윤회를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중도와 십이연기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중도를 보면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양극단에 대한 중도이다. 그 양극단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고락, 유무, 단상, 일이, 자타, 생멸, 거래 등이다. 그런데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양극단에 대하여 부처님은 중도의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팔정도와 십이연기이다. 특히 십이연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일곱가지 중도사상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중도와 십이연기
No | 중 도 | 구 분 | 초기경전 |
1 | 유무중도 (有無中道) |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 “깟짜야나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깟짜야나곳따,S12.15) |
2 | 자타중도 (自他中道) |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아쩰라 깟싸빠의 경, S12.17) |
3 | 단상중도 (斷常中道) |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아쩰라 깟싸빠의 경, S12.17) |
4 | 일이중도 (一異中道) |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
| “바라문이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소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세속철학의경 , S12.48) |
5 | 거래중도 (去來中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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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생멸중도 (生滅中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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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고락중도 (苦樂中道) | 팔정도 |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초전법륜경, S56.11) |
표를 보면 중도사상은 십이연기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무, 자타, 단상, 일이 중도의 경우 양극단을 설명하고 난 다음 반드시 조건발생에 따른 십이연기정형구가 삽입 되어 있다. 고락중도로 설명되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는 십이연기정형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팔정도 정형구가 소개 되어 있다.
중도에서 십이연기를 설한 세 가지 이유
그렇다면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십이연기를 말씀 하셨을까?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순관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뒤이어 일어나는 법을 관찰하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과 무관하게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 보는 영원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역관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 무너진다. 이처럼 양극단이 모순이고 거짓임은 연기법으로 밝혀진다.
부처님이 양극단에 대한 중도로서 십이연기를 설한 두 번째 이유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를 설명할 때 십이연기의 순관 뿐만 아니라 역관도 함께 설하고 있다. 연기의 역관으로 관찰해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양극단에 대한 중도로서 십이연기를 설한 세 번째 이유는 ‘단멸론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 보여진다.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열반을 설하는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오해 하였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을 함께 설한 것이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부처님이 설한 중도는 목적론(열반)과 실천론(팔정도)으로서의 중도라 볼 수 있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확인 된다. 그런데 초전법륜경 외에도 니까야에는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가지로 정리 된다. 이런 중도사상은 용수의 팔부중도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도사상을 설하면서 대부분 십이연기를 함께 설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설한 이유로서 세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이고, 세 번째는 단멸론자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견해는 주석을 근거로 한 개인적인 견해이다.
2014-08-21
진흙속의연꽃
인연상윳따의 다양한 중도사상
초기경전을 니까야라 부른다. 그런 니까야에는 사부니까야라 해서 순서대로 나열하면 디가니까야(Dīghanikāya), 맛지마니까야(Majjhimanikāya),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 이렇게 사부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중 상윳따니까야에 대하여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윳따니까야에 대하여
요즘은 빠알리 경전이 번역되어서 초기경전이라고 말하면 보통 빠알리니까야를 뜻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으로서 아함경이 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 아함경 중에 ‘잡아함경’이 빠알리 니까야의 상윳따니까야에 대응된다.
그런데 왜 ‘잡아함경’이라고 하였을까.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경전인데 그경전의 이름앞에 ‘잡(雜)’자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재성박사의 글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에 대한 경이름 설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쌍윳따는 쌍쓰끄리뜨어의 sam-√yuj의 빠알리어형 과거분사로 ‘[주제에 따라] 함께 묶인 것, 연합된 것, 상응(相應)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한역 대응경에서는 ‘잡(雜)’이라고 번역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한역 잡아함경의 분류방식이 각 권의 주제와는 상응하지 않는 잡다한 편집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빠알리 성전을 번역한 일본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에서 ‘상응(相應)’이란 한역술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유가(瑜伽, yoga)와 관계된 많은 전문술어의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라서 착오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는 쌍쓰끄리뜨적인 어원 자체가 Nikāya로 ‘모임, 모음, 종류, 신체, 주거, 부집(部集)’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에 해당하는 것이 북전에서는 아함(阿含)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아함은 쌍쓰끄리뜨어로 아가마(āgama)를 음사한 것으로 ‘유래, 기원, 재산, 전통, 전승’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는 ‘[주제에 따라] 함께 엮은 [가르침 또는 경전들의] 모음’이란 뜻을 지닌다.
(전재성박사, 우리말 상윳따니까야)
전박사의 상윳따니까야의 이름에 대한 어원 분석에서 한역 잡아함경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잡아함경에서 ‘잡’이라는 문자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함경의 편집방식이 주제별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 문자그대로 중구난방이 된 듯한 모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빠알리니까야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주제별로 서로 상응되어 있고 경의 이름또한 상응과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에 이름을 ‘상응부경전’으로 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상윳따니까야는 서로 관계가 있는 경을 주제별로 모아 놓은 것인데, 총 56개라 한다. 그래서 56상윳따라고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윳따 니까야는 5왁가(vagga, 卷), 56상윳따(saṁyutta, 編), 203왁가(vagga, 品), 2,889숫따(sutta, 經)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별로 분류된 56개의 상윳따중에 두 번째가 인연상윳따이다. 이 인연상윳따에 대한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 박사의 해제글에서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쌍윳따니까야 인연모음 해제
불교는 결코 신비주의를 요청하지 않는다. 불교적인 세계는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반영하는 그야말로 '와서 보라(ehipassika)' 고 할 만한 존재에 대한 경험적 체험에 의해 산출된다. 특히 그것은 마음과 세계에 대한 정신적 수행의 산물로서 인과적 과정의 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법성(法性 : dhammata)
우주적인 인과적 과정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계(法界 : dhammadhatu)라고 한다.
[무외 왕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차를 모는 자로서 전차의 각 부품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전차의 모든 부속품들은 저에게 완전히 숙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즉시 나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왕자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 왕족의 현자, 바라문의 현자, 재가의 현자, 사문의 현자가 질문을 준비해서 여래에게 찾아와 질문하면 그것들은 즉시 여래에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왕자여,
진실로 법계는 여래에게 숙지되어 있으며 여래는 법계를 숙지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곧바로 여래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법계는 인류역사상 붓다에 의해 최초로,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 철저하게 통찰되었다. 붓다는 인과적 작용을 속성으로 하는 사물의 본성을 법성(法性 : dhammata)이라고 표현했다.
공사상(空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
그러나 이러한 붓다의 심오한 진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우 다양한 해석학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때로는 형이상학적으로 잘못 오해되기가 쉬웠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파불교적이고 아비달마적인 많은 시도들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찰나멸론(刹那滅論)’이나 ‘원자론’ 쪽으로 기울어지고 우주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서 작용하게 되어, 대승불교적인 공사상(空思想)이 체계화되어 스스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공사상은 연기사상을 더욱 심화시킨 공로는 있으나 지나치게 상대론적 의존관계를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인 생성과 소멸의 인과관계마저 부정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공사상과 상보적(相補的)으로 나타나 유식사상(唯識思想) 또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통해 법계에 대하여 심오한 해석을 부가했으나,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제와 연관된 사실의 세계를 ‘관념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사상은 인과론적이라기보다는 나타나는 대로 모든 것이 진리라는 ‘현상론자’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기가 쉽다.
연기(緣起)에 관한 오해
오늘날 불교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조차 붓다가 가르친 인과적 과정의 세계, 즉 연기(緣起)에 관해 종종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해왔다.
불교의 인과사상을 연구한 대부분의 서양학자들, 예를 들어 케이스, 케른, 올뜨라마르, 뿌쌩, 토마스, 스체르바스키 등은 불교의 정형화된 인과사상을 단순히 괴로움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불합리성을 갖고 있다.
첫째, 불교에서의 괴로움은 법계의 해탈론적 속성으로 조건이나 조건지어진 ‘연생(緣生)’이라는 사실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는 불교적 인과관계를 단순히 경과의 인식론적 규칙인 이유에서 찾는다면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의한 논리적 관계를 이야기할 뿐이지 존재론적이고 구체적인 생성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불교적 인과관계를 단순히 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 했던 우이 하큐주(宇井伯壽)와 같은 동양의 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불교적 인과에 대한 오해
한편 불교를 연구한 또 다른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케른, 야코비, 피셀, 샤에르 등은 불교적인 인과의 조건연쇄를 쌍키야(sankhya)철학과 비교해서 '우주적인 진화형식' 으로 설명했는데, 이것도 역시 그들이 설정한 최초의 원리가 무명(無明 : avijja)이 아니며 ‘무명조차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빚어진 오해이다.
이러한 붓다의 연기론에 대한 오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면 '인과연쇄는 본질적으로 괴로움의 설명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물리적 원인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 케이스 같은 학자의 견해일 것이다.
붓다와 불교의 제 문헌은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포함한 과학적 인과론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까. 불교가 우주적인 법성의 원리를 가르친다면 불교적인 인과론이 가장 과학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과학혁명이 시작된 이래
역사적으로 과학의 혁명은 17세기 서구에서 그 이전의 우주에 대한 신 중심의 세계관을 뒤엎으면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새로운 천체물리학적인 우주관으로 바꾸어 놓았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창조라는 세계관을 자연의 다양한 인과적 과정에 의한 진화로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드에 의한 새로운 심리학의 대두는 불변의 영혼을 찾아내는 대신 인과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심리적 요소에 의한 역동적인 흐름으로서의 마음을 발견했다.
과학은 인격적인 신을 가정하는 신학적인 설명을 배제한 채 우주적인 인과법칙을 발견했고 그에 따라 진보해왔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도덕 자체도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로써 윤리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가치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진리가 되었다.
이러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신이나 자아와 같은 불변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 불교적 인과론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자연과학적 인과론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할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과학적 인과론적 진리는 그것이 낳은 1,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환경오염이라는 비극적 결과 때문에 그것이 가져온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밝은 전망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물론 현대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과거의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에 바탕을 둔 거친 유물론은 퇴조하고 있다. 특히 미시세계에서는 강한 인과적 결정이 부정되고 반드시 정신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이 배제되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서 드러나는 자연이다. 삶의 조화에 대한 추구에서 삶이라는 연극 중의 우리는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연과학적 인과론은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한 ‘무도덕적인’ 우주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아마도 과학에서 발견되는 인과론 자체를 반성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붓다는 과학적 인과관계를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우주 자체를 전적으로 인간의 입김을 배제하는 무도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현상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작용하는 윤리적 우주의 필연적 귀결이다.
쌍윳따 니까야 2권의 내용
불교에서 이러한 인과의 원리는 연기(緣起 : paticcasamuppada)라고 하는 붓다의 가르침 속에 표현된다.
이 용어는 대 소승을 막론한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는 물론 인도의 비불교학파에서조차 정통성과 역사성을 갖는 인과성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양철학적인 전통에서 발견되는 인과론과 구별되는 불교고유의 인과성의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인과의 세계는 강한 인과적 결정론과 비결정론, 즉 우연을 주의깊게 배격한다.
붓다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자유의지는 결코 있을 수 없고 도덕적 정신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 모든 것이 비결정적이고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실제의 세계에서 가능한 도덕적 정신적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이러한 중도적 인과작용을 통해서만 물리적 세계에서도 참다운 생성과 소멸의 구체적 세계가 전개된다고 본다.
이러한 원리를 부처님의 직설로써 전개하고 있는 초기의 경전군을 모아 놓은 것이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이다.
붕게의 준인과론(semicausalism)
최초의 불교적 전통과는 동떨어진 서양의 현대 과학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붕게는 강한 인과적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난점을 피하기 위해 비록 인과율이 타당한 영역이라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제한하고 결정론과 우연론도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준인과론(semicausalism)’을 주장했다.
그는 근 현대의 경험과학의 법칙과 이론을 연관지어 [인과성과 현대과학]이라는 저술에서 인과율은 전통적인 인과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그렇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버려야 할 신화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과관계는 흄 자신이 스스로 주장했듯이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의 범주와 연관된 문제이므로 선험적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경험적으로 다루었지만 감각인상만을 인정하여 인과관계를 순전히 논리적 필요성의 문제로 환원시킨 것은 흄 자신의 자가당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들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논리실증주의 이후 인과관계는 논리적이고 언어분석적으로 다루어져왔지만, 그 결과 하나의 신화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붕게는 인과관계에 관해서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경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그는 결정론과 우연론의 중도로서 다소 절충주의적이긴 하지만 준인과론적 입장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의 준인과론은 보다 포괄적으로 다루어진다면 붓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조건발생과 조건소멸
그는 흄의 인과율에 관한 공식인 '만일 C이면 언제나 E이다' 에 산출성의 원리인 '만일 C가 생겨나면 그것에 의해 언제나 E가 생겨난다' 를 부가하여 구체적인 존재론적 생성의 세계의 인과관계를 정초시켰다.
이러한 원리는 붓다가 초기경전에 조건적 발생, 즉 연기의 원리를 설명한 '만약에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다. 만약에 이것이 생겨나면 곧 저것이 생겨난다(若有此卽有彼 若生此卽生彼)의 원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뿌생은 이러한 서양의 과학적 인과론과 불교 사이의 유사성에 관해 '고대의 황색 법의를 입은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은 인간에 대한 현대적 이론들, 흄이나 트레인같은 많은 과학자들의 이론과 아주 가깝게 일치한다' 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적 연기론에서는 과학적 인과론에서 단순히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취급되는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저것이 없으며, 만약에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이 소멸된다(若無此卽無彼 若滅此卽滅彼)의 원리가 인과율의 공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 그것은 인과의 의존성을 강화시키는 원리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조건연쇄의 소멸에 적용되는데, 자연과학적 인과론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것은 불교적 인과관계가 물리적 현상을 고립시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을 수반하는 정신물리적 전체의 인과를 해탈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생겨난다.
여기에 바로 인과성의 원리가 수반론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그렇게 해서 바로 사성제(四聖諦)의 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주석서에 의지하지 않아도
이러한 초기불교에서의 인과원리는 부수적으로 과학철학이 당면하고 있는 무도덕적 인과율의 위기를 해소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 독일의 인도학자 그라제납은 붓다가 세계의 자연적 질서는 곧 도덕적 세계와 동일하다는 깊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붓다가 설한 인과론과 붕게의 과학철학적 인과분석의 개념적 도구를 원용하여 불교의 인과개념을 분석한 것이 본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한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이란 책이다.
여기서 필자는 초기불교의 경장에 나타난 인과론을 다루기 위해 주석적인 아비달마 전통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새로운 관점에서 과학철학적인 몇몇 개념을 사용하여 경장을 직접 다루었다.
까루나라뜨네는 초기불교의 인과성에 대한 연구에 관해 '정통적인 초기불교의 인과론적 가르침을 발견하는 일은 주석서에 주어진 아주 발전된 이론을 연구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고 했다. '진정한 역사적 방법은 [빠알리 경장(Nikaya)]에 나타난 가능한 초기불교적 인과론을 연구하면서 주석서의 해석을 될수 있는 대로 최소한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라고 언급한 것은 필자를 매우 고무시키는 일이었다.
호프만이 심지어 초기불교를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주석서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제한이 아니라 방법론적인 불가피성이다' 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가장 오래된 초기의 경전군 가운데 하나이며 불교의 중심사상을 다루고 있는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의 위대한 가치를 더욱 드러내는 것이다.
인연상윳따의 다양한 중도사상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은 [제12쌍윳따 인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연 쌍윳따]는 12연기의 인과연쇄에 대한 설명과 비유로 구성된 93개 경전의 모음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핵심사상인 연기설을 설명하고 있는 경전군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압권이다. 특히 연기의 일반적 원리인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과 12연기, 그리고 그러한 연기의 원리가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초기경전에서 붓다가 제시하는 중도사상은 대승불교에서 용수(龍樹)가 제시하는 팔부중도(八不中度)보다 다양하고 풍요롭다. 이 쌍윳따니까야 2권을 비롯한 초기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의 다양한 중도사상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유무중도(有無中道)
첫째 유무중도(有無中道)가 언급되고 있다.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존재인 유(有)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無)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자타중도(自他中道)
둘째 자타중도(自他中道)가 언급되고 있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이와 같은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lineality)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단상중도(斷常中道)
셋째 단상중도(斷常中道)의 연기가 언급되고 있다.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일이중도(一異中道)
넷째 일이중도(一異中道)의 연기가 언급된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다른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바라문이여, 이들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는 현상계의 동일성과 차별성이 모두 부정된다.
거래중도(去來中道)
다섯째 그밖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의 쌍쓰끄리뜨 복원본 가운데 거래를 부정한 거래중도(去來中道)의 연기가 나타나 있다.
"수행승들이여, 눈(眼)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
여기서 분명히 인과관계가 궁극적으로 거래(去來)라고 하는 근접성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요즈음 발달된 과학철학의 이론에서도 드러난다.
생멸중도(生滅中道)
여섯째 다른 초기경전인 [우다나]에서는 생멸중도(生滅中道)가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생기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의처(依處)가 없고 전기(轉起)가 없고 대상(對象)이 없으므로 이것이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나는 설한다"
고락중도(苦樂中道)
일곱번째 [초전법륜경]에는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원리가 팔정도와 관련해 잘 나타나 있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의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두번째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은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적정, 승지(勝智), 등각(等覺), 열반으로 이끈다."
이처럼 초기경전의 연기법은 대승불교의 용수의 중도설보다 풍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철학박사 전재성 識
2011-12-06
진흙속의연꽃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세계를 보는 두 가지 관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삼천대천세계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몇 년전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동국대 J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선뜻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삼천대천세계에서 항하사에 불과한 한 존재의 고통일 뿐이라고 일축한 것이 못 마땅 했던 것이다.
세계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고, 또 하나는 “나는 세계의 주체자이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받아 들인다. 특히 주류종교에서 그렇다. 대표적으로 유일신교를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초기불교적 입장이라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을 세계의 일부로 받아 들이는데 익숙할까. 이에 대하여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김정빈님의 글(내가 날 구제 가능할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공간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 세계, 또는 우주가 펼쳐져 있습니다(그리고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세계(나 자신을 포함)를 읽는 독도법(讀圖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으로 읽는 법이고, 두 번째는 실존을 걸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는 법입니다(이 두 번째 독도법으로부터 부처님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은 무심결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읽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으로 세계를 읽게 되면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에서 볼 때 이 세계가 나를 태어나게 하였고, 나는 이 세계의 일부입니다. 이 관점은 일견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습니다. 또, 나는 내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것은 곧 나는 이 세계에 대하여 후차적인 존재, 또는 종속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본 나와 세계의 관계입니다만, 시간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한 추론이 성립합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간이 있었습니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해서도 후차적인 존재, 종속적인 존재입니다.
이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공간적으로는 우주 전체를 거쳐 우주를 만든 신을 상정하게 되고, 시간적으로는 태초에 이르러 역시 시간을 출발시킨 원동자(原動者), 또는 제일동인(第一動因)으로서의 신을 상정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상정된 신을 원동자로 하는 세계관이 우리 자신을 객체로 만들고, 피구제자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같은 관점이 근현대인으로서의 자기 독립주의, 이성 중심주의와 배치됩니다.
(김정빈님, 내가 날 구제 가능할까?, 미디어붓다 2010-10-15)
자신을 세계의 일부라고 보는 견해에 대하여 김정빈님은 공간적요인과 시간적 요인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관점이 무심결에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세계를 읽는 방식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가 나를 태어 나게 하였고 나는 이 세계의 일부이고, 후차적 존재이고, 종속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외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교가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 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종교다원주의자이자 기독교 신학자인 길희성교수는 “다양한 이름(道, 梵 Brahman, 太極, 하느님, 空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라고 표현 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동국대 교수가 한 말인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삼천대천세계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받아 들이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와 같은 관점을 부정하였다. 이 세상이 있게 한 제일의 원인으로 다양한 이름의 궁극적 실재 또는 존재의 근원을 상정한 것은 인과법을 무시한 것이고 연기법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읽는 방식을 말씀 하셨는데 이는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잘 나타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세상의 생성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며,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며,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로까경-Lokasuttaṃ- The World-세상 경, 상윳따니까야 S12.1.5.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에 대하여 조건발생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는데, 이는 세상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눈과 눈의 대상인 형상이 부딪치면 이를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데 이를 거의 동시적으로 보고 ‘삼사화합’이라 한다. 즉 눈과 대상과 시각인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사화합에 의하여 ‘감각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이 세상의 시작의 시작이라 본다.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연기법의 정형구에 따른다. 그래서 경에서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lokassa samudayo, To this is called the arising of the world)”라고 표현하였다.
세상의 발생과 둑카(苦)의 발생
부처님은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발생은 둑카(고통)의 발생과 같은 말이다. 세상의 발생과 둑카의 발생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상의 소멸과 둑카의 소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정신과 사물을 조건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상의 소멸이다."
(로까경-Lokasuttaṃ- The World-세상 경, 상윳따니까야 S12.1.5.4,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둑카(고통)의 생성과 소멸의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라는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왜 기독교에 귀의 하였나?
김정빈님은 미디아붓다 기고문에서 이어령교수의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어령 교수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는 왜 기독교에 귀의 하게 되었을까.
이어령 교수가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사실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이교수의 가족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미 블로그에서 ‘나약한 지성 이어령’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는데 언론에서 말하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딸 민아(장민아 변호사)가 있는데 그 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입니다. 수술을 두 번 받았지만 암이 재발했고,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 아들이 특수 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서 “지난 10년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을 때 자신의 망막이 파열되어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망막박리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딸의 전화를 받고 급히 하와이로 가서 딸이 하와이 원주민들이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를 가자고 하여 거절하지 않고, 아버지로서 딸을 위해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교회 바닥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신론자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라 한다.
이성의 펜대를 꺽고
그러나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김정빈님의 글을 보면 이와 다르다. 이 땅의 최고지성이자 무신론자인 이어령 교수의 기독교 귀의한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설명 해 놓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르네상스적 기초 위에서 궁극 관심을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지성(이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현대인은 나 자신이 주인인 상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궁극 관심 문제를 풀려고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지성을 꺾고 믿음을 받아들이며, 주체성을 포기하고 신을 받아들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인 또한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김정빈님, 내가 날 구제 가능할까?, 미디어붓다 2010-10-15)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이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성은 데카르트적인 사유에 가깝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를 풀어 보려 하지만 한계에 부딛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은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고 해석해야 될 것도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통절하게 느낄 수 밖에 없고, 그 통절함이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적인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손쉬운 해결책을 찾게 되는데, 이는 ‘완전지’ 또는 ‘절대지’를 가진 분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신 또는 창조주, 그 밖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道, 梵 Brahman, 太極, 하느님, 空 혹은 法身)을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존재는 절대지 그자체이지만, 그에 비하여 나의 지, 인간의 지는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지로 본다. 절대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지성은 매우 무력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앎에 대한 목마름, 무지에 대한 무력감, 절망감 끝에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이성의 펜대를 꺽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께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신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삶은 문제투성이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짜증이 나고, 상처 받기도 한다. 삶이 나를 지치게 하고 힘겹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은 10밖에 되지 않는데 100에 해당되는 문제가 나타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자신의 한계를 넘어 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를 말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신에게 의지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신에 의지하다기 보다 차라리 ‘떠 넘긴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세상을 있게 한 창조주가 책임 질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뜻대로”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신의론(神意論)’이 나왔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연론, 숙명론 등에 의지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육사외도는 ‘단멸론’으로 설명된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한계를 넘는 고통에 대하여 육체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본다. 우연론, 숙명론 등도 허무주의적 단멸론에 포함 된다.
영속론과 단멸론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하지만 부처님은 신의론이나 단멸론은 삶의 방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신의론으로 대표되는 영속론과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단멸론은 양극단으로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송’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의 해제에 따르면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 무(無, natthita)는 성립하지 않고,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有, atthita)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상견과 단견을 논파한 것이다. 연기법으로 영속론과 단멸론이 거짓임을 밝힌 것이다.
한역 연기송의 폐해
그런데 이와 같은 연기송이 종종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역된 연기송의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역 연기송 중에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라 고 번역된 문구가 있다. 이를 단순하게 번역해 보면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만약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다”가 된다. 이런 식의 한역은 “C, 그러므로 E” 또는 “E, 왜냐하면 E” 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조건발생적 연기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약유차즉유피 약생차즉생피 약무차즉무피 약멸차즉멸피(若有此卽有彼 若生此卽生彼 若無此卽無彼 若無此卽滅彼)라고 번역한 한역은 예외이다. 이는 빠알리문과 같이 조건성과 인과성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을 ‘상의성(相依性)’이라 하는데
스마트폰으로 금오 김홍경 선생의 여민동락 강의를 들었다. 불교TV에서 제공하는 앱을 이용해서이다. 강의에서 김홍경 선생은 연기송을 낭송하였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한 것이다.
김홍경 선생이 해설 하기를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다”라고 매우 단순하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김홍경 선생은 이 연기송을 설명하면서 ‘상의성(相依性)’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 상의성은 다름 아닌 ‘서로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단멸론자들의 주장과 동일 하였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의 바이블이라 불리우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2연기법 중 3번째 4번째에 위치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식’을 재생연결식, 혹은 전생의 업식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 )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저자 훤일 스님은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가 연기법”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조건 발생에 따른 연기와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먹혀 들어 간다면 부처님은 졸지에 단멸론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왜 그럴까. 단멸론자들은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하여 “육체가 있을 때 정신이 있으며, 육체가 소멸됨으로서 정신도 소멸된다”라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소멸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연기송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정확한 연기송은 어떤 것일까.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 (若生此卽生彼)
약무차즉무피 (若無此卽無彼)
약멸차즉멸피 (若無此卽滅彼)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
When this is not present, this does not come to be,
when this does not arise, this does not arise.
(다사발라경-Dasabalasuttaṃ- Ten Powers I, 열 가지 힘 1 경, 상윳따니까야 S12. 1.3.1, 전재성님역)
다사발라경(열 가지 힘 1 경-S12.1.3.1).docx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연기송’ 정형구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연기의 인과성과 조건성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부처님은 이 연기송 다음에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연기의 순관과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역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이처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다사발라경-Dasabalasuttaṃ- Ten Powers I, 열 가지 힘 1 경, 상윳따니까야 S12. 1.3.1,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연기송다음에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말씀하셔서 연기법이 조건발생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법이다.
현재 내가 처한 상태를 보면
삶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 풀 수 있는 문제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볼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이럴 경우 신에 의지하거나 자포자기 하기 쉽다. 상견(常見) 이나 단견(斷見)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견해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연기적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인과와 조건발생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즉,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과’라 한다. 이는 현재 내가 처한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모두 과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에 따른다. 이것이 ‘먼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을 인(因, hetu)이라 본다. 그렇다면 ‘가까운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주변환경적 요인’으로 본다. 먼 원인이 익을 만한 조건을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연(緣, patticca)으로 본다. 이런 인과 연이 만나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를 과(果, phala)로 본다. 이처럼 인연과(因緣果, hetu-paticca-phala) 로 설명되는 것이 연기법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인과에 따른 조건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희론(papañca, 빠빤짜)이 되는 경우
이렇게 연기법적으로 관찰하면 고정된 자아나 영혼은 있을 수 없다. 법이 일어나서 사라지면서 조건을 남기고, 그 조건으로 다시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상속하는 연기적인 나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연기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사고는 ‘희론(papañca, 빠빤짜)’이 될 것이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희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매우 경계하였다. 초기경 도처에 이와 같은 희론은 번뇌만 증장시킬 뿐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희론에 탐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구성된 존재 즉, 오온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초기경에서 설명된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따라서 희론에 대한 답은 있을 수 없다. 설령 존재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고 할지로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결국 펜대를 꺽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보는 신에게 귀의 할 것이다. 그런 예를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로 부터 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결국 ‘나약한 지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은 빠알리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둑가따경-Duggatasuttaṃ- In Unpleasantness- 불행경, 상윳따니까야 S14.2.1,전재성님역)
2012-08-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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