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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아래는 원문, 밑줄 및 강조는 내가
율장을 통해 본 성욕과 성윤리 / 이자랑 | ||||||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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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나도 그랬어’, 일명 ‘미투(Me too) 운동’이 최근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성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안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언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 같다는 누군가의 푸념이 어찌 한 사람만의 일일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비교적 가벼운 언어적 · 신체적 성적 수치심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성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기본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성욕은 다른 욕망과 달리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예로 보아도,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가하고 있다. 상대방이 겪을 심리적 · 육체적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하다. 절제되지 못한 성욕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도 성적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재가불자의 기본 실천 규범인 오계에서는 ‘불사음계(不邪婬戒)’라고 하여, 자신의 배우자 이외 사람과의 성행위를 금지한다. 사음은 자신의 배우자를 배신하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배우자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 모든 생류에 대한 자애심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용납될 리 없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율장(律藏)을 보면 출가자의 경우에는 모든 성관계, 나아가 이성과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나 음담패설 등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 더구나 그것은 모두 중죄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가장 중대한 죄로 분류되는 바라이의 경우 제1조가 ‘음행’, 즉 성관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비구 ·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구족계(具足戒) 첫머리를 ‘음계’가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 성욕을 가장 강렬하고 위태로운 욕망으로 인식하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지만, 이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갖가지 환난(患難)은 수행자로서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 이 글에서는 율장에 나타난 성 관련 조문과 그 인연담 등을 검토하며 불교가 출가자의 성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성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 규정을 고찰하고자 하는데, 이 규정은 출가자의 성적 범계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히고 있다. 출가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욕이라는 욕망이 갖는 특징과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성에 관한 모든 행위는 중죄인 바라이와 승잔에서 취급한다. 이로 보아 율장에서 성문제는 중대한 범계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관련 조문인 바라이 제1조 ‘음계(婬戒, methuna-dhamma)’를 먼저 살펴보며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 조문은 ‘음을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음을 행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하며,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암컷, 심지어 비인녀(非人女)까지 포함된다. 율이 수범수제(隨犯隨制), 요컨대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행동을 금지하는 형태로 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행이 승가에서 나타난 최초의 악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행자에게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본능적으로 무엇보다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문의 인연담에 의하면, 수딘나(Sudinna)라는 비구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걸식이 어려워지자 친족을 찾아 고향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가 환속하여 보시 등을 통해 공덕을 쌓으며 재가자로 살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수딘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후손이 없으면 모든 재산을 왕이 몰수해 간다며, 대를 이을 후손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애원하였다. 수딘나는 차마 그 청까지 거절하지는 못하고 출가 전의 처와 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조문이 아직 제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딘나의 행위는 불범(不犯)이었지만, 그는 심한 자책과 후회에 시달리며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료 비구들의 질문에 수딘나는 음행 사실을 고백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비구 승가를 소집한 후 “음욕법을 행하는 비구는 바라이이다.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학처를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한 비구가 음식으로 암컷 원숭이를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금지한 것은 인간과의 음행일 뿐 축생과의 음행은 대상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붓다는 “어떤 비구라도 음욕법을 행한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조문에 추가했다. 조문 해설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내지’에는 축생만이 아닌 비인녀, 3종의 황문(黃門), 3종의 이근자(二根者), 3종의 남자 등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다 포함된다. 황문과 이근자는 각각 성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가지거나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갖춘 자를 가리킨다. 남자란 비구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남자, 즉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종의 황문이란 인(人)황문 · 비인(非人)황문 · 축생황문을 가리키며, 3종의 이근자 역시 인이근 · 비인이근 · 축생이근을, 3종의 남자도 인남 · 비인남 · 축생남이라고 하여 사람(女 · 男)과 비인, 축생으로 분류한다.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다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의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제되지 못한 인간의 성욕이 어디까지 대상을 넓혀가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웨살리에 머물고 있던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원하는 대로 먹고 자고 씻었다. 욕망대로 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국 난잡한 마음으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 결과 친족도 재산도 잃고 병까지 들자 후회하며, 아난다 존자에게 만약 자신들이 다시 구족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열심히 수행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그들을 위해 이미 제정한 학처를 번복할 수는 없다고 하며, 대신 한 구절을 추가하여 음계 학처를 확정한다. 사계의 과정은 간단하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저는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버립니다.” “저는 법을 버립니다.”라는 등의 간단한 말을 하면 된다. 누군가 특정인의 동의도 승가의 동의도 필요치 않으며, 본인이 결심하고 그 뜻을 타인에게 전달하면 된다. 다만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 앞에서 한 사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계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비구로서 수행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은 본인의 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처 사계하지 못하고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범계 후 숨기려는 마음 없이 곧바로 승가에 참회의 뜻을 밝히면 ‘바라이학회(波羅夷學悔)’라는 신분으로 승가에 머물러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비구의 신분이 아닌, 사미와 유사한 낮은 신분으로 머물게 되므로 사실상 비구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면 원래의 비구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원칙에는 변함없다. 이상의 인연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음계는 수딘나 비구의 부정행→축생과의 음행→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이라는 세 단계에 걸쳐 완성되고 있다. 이는 성욕이 매우 강렬한 욕망으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 규정은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 그리고 율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출가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이상, 성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바라이라는 극중죄로 다스려질 만큼 출가자의 성행위는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사미 역시 음행을 저지르면 멸빈(滅擯)당한다. 다만, 사미의 경우 멸빈당한 후의 재출가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출가자의 직접적인 성행위 외, 성욕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갖가지 행위 역시 율장에서는 금지한다. 바라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죄로 간주되는 승잔에서는 제1조부터 제4조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행위가 총 네 가지 금지된다. 승잔 제1조 고출정계(故出精戒), 제2조 촉여신계(觸女身戒), 제3조 추악어계(麤惡語戒), 제4조 구음욕공양계(求婬欲供養戒)이다. 고출정계는 스스로 정액을 흘리는 행위, 즉 자위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며, 촉여신계는 비구가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이다. 손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 모두 금지된다. 추악어계는 남녀의 성에 관한 말이나 여성의 성기에 관한 말 등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구음욕공양계는 성욕을 갖고 음욕공양,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훌륭한 수행자에게 음욕을 공양하면 공덕이 있다고 여인 앞에서 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이처럼 율장에서는 직접적인 성관계를 비롯하여 자위행위, 성욕을 갖고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행위, 성과 관련된 말을 하는 행위, 음욕 공양을 부추기는 행위 등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바라이와 승잔이라는 중죄로 헤아리며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라이 제1조 ‘음계’의 인연담을 보면, 수딘나의 음행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행동을 꾸짖는다. 붓다의 발언을 보면 왜 출가자에게 성적 행동이 금지되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성욕과 같은 감각적 욕망의 배후에는 탐욕과 속박, 집착 등 수행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요소들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지속하는 데에 큰 방해 요소이다. 감각적 욕망의 제어와 깨달음의 상관관계는 초기경전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문제로 양자는 밀접한 관련하에 언급된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 제467게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이겨낸 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끝을 알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으니, 여래는 헌과(獻果)를 받을 만하십니다.”라고 하여, 감각적 욕망을 이겨내었을 때 완전한 열반의 성취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또한 《담마빠다》 제215게에서는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망을 벗어난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슬픔과 두려움이 욕망에서 비롯됨을 설한다. 이 외, 니까야나 아함 등에서도 애욕을 떠난 생활이 평안하며, 안락하다는 점을 누누이 설하고 있다. 불도 수행이 계 · 정 · 혜 삼학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탐욕이나 집착, 갈애 등으로 인해 어떤 욕망보다 심하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는 성욕은 지양해야 할 욕망임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왓지족 출신 비구의 예를 보면,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기본적 욕구의 제동이 풀어졌을 때 온몸이 해이해지면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는 욕구인 것 같다. 즉, 성욕의 힘이 증대하는 것이리라.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육체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선정의 힘을 요구하는 정학을 실천하고, 나아가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는 혜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계학이란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 이면에 존재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육체가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육체 위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될 때 선정을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난다. 이러한 힘, 다시 말해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육체의 안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정학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행을 극중죄의 첫 번째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율장에서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도 성욕을 탐욕이나 갈애, 집착 등의 불선법을 내포한 가장 위험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성욕이 식욕이나 수면욕 등의 다른 감각적 욕망과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더 강렬하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계 제정의 단초를 제공한 수딘나 비구의 경우를 보면, 어머니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목적은 자신의 후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자손 번식의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갖게 되는 가장 본능적이고도 강렬한 욕망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성욕과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성욕은 성행위의 대상, 결과물로 태어나는 자식 등으로 집착의 영역을 확대해 간다. 단지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 차원에서 끝나는 욕망이 아닌 것이다. 고의 원인인 갈애가 어떤 욕망보다 치열하게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욕망이 바로 성욕이다. 처자식을 두고 출가를 감행해야 했던 고따마 붓다에게, 성적 욕망은 단지 개인의 성욕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는 강렬한 본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욕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붓다이기에 성적 행위에 대해 이처럼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황문은 빤다까의 한역어로, 빤다까는 기존에 ‘거세자(去勢者, eu-nuch)’나 ‘성적 불능자’ 혹은 ‘동성애자’ 등으로 해석되어 왔다. 율장에 등장하는 용례를 보면, 대부분 변태성욕을 지닌 동성연애자로 묘사되지만, 주석서에서는 5종의 황문을 언급한다. 즉, 다른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핥아 사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āsitta-paṇḍaka), 다른 사람들이 성교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질투심을 일으켜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usuyya–paṇḍaka), 특별한 도구를 이용해서 정자를 빼내야 하는 자(opakkamiya-pa-ṇḍaka), 보름 동안만 황문으로 사는 자(pakkha-paṇḍaka), 태아일 때부터 성기가 존재하지 않는 자(napuṃsaka-paṇḍaka)이다. 이를 보면, 황문은 항상 혹은 일시적(보름)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적 자극을 얻거나, 태어날 때부터 성기가 없어서 사정도 불가능하고 생식 능력도 없는 성적 불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문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근자란 양성구유(兩性具有), 즉 태어날 때부터 여성의 성기도 남성의 성기도 함께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이 외, 원래 남성이었던 자가 비구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여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거나, 여성이었던 자가 비구니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남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는 경우에 대해서도 율장은 언급한다. 이 경우에는 그 혹은 그녀가 받은 구족계나 그 시점까지의 법랍(法臘)이 모두 인정되며, 바뀐 성에 따라 다시 수행을 지속하면 된다고 한다. 즉, 이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황문과 이근자처럼 성적으로 문제를 지닌 이들의 출가는 왜 허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인도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억압받았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조차 받아들이면서 평등을 강조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원칙이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의 입단 불가 원칙을 일각에서는 차별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규정이 처음에 왜 생겼는지 율장에 전해지는 인연담을 살펴보며 그 진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율장에 의하면, 어떤 황문이 승가에 출가했는데 그는 젊은 비구들이나 사미, 코끼리 조련사 무리 등에게 다가가 자신을 더럽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련사 무리 등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이를 알게 된 세간 사람들은 ‘석자 사문은 황문이다. 황문이 아닌 자들도 황문을 더럽혔다’라며 비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문의 출가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황문은 처음부터 입단이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여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금지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수동적 동성연애자로서 난잡한 생활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황문은 출가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출가했다 하더라도 황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즉시 승가로부터 추방당한다. 이근자의 입단 금지 인연담도 황문과 유사하다. 이들 역시 출가 후 동료 비구 · 비구니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갖게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 등 승가에서 문란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입단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출가 후에 발각되면 승가 추방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근자의 경우에는 신체상 남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중 어느 쪽에 소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양쪽을 다니며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어 황문보다 한층 더 폭넓게 성적 문란을 일으킬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율장에서 황문이나 이근자와 같은, 이른바 성소수자의 입단을 금지하는 이유는 승가에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승가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공동체 생활을 전제로 하는 승가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성적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승가를 형성하여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교의 출가자들이 이러한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음계’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승가 운영에서도 큰 문제이며, 승가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와의 관계라는 시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의 행동이 일반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 승가 전체가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공동체로서 비난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장 곳곳에서 붓다는 율을 제정하는 이유, 다시 말해 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을 열 가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제계십리(制戒十利)’라 불리는 것이다. 제계십리는 승가의 구성원이 안락하게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재가자의 신심을 일으키고 증대시키며, 정법을 확립하는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즉, 승가의 발전과 영원한 존속을 기대한다. 따라서 승가 운영에 있어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한다.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찾아와 출가를 청원했을 때 붓다가 거절했던 배경에는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무엇보다 성욕의 직접적인 대상인 여인들이 승가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에는 이성이기 때문에 따로 승가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또한 성욕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자들이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성소수자는 다르다. 이들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절제하기 힘든 성적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므로 승가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수행에서 그토록 기피되는 성적 문제가 수행자들 간에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만큼 주변 여건 역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성해가야 한다. 이 점에서 이들의 입단 금지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후대가 되면 성소수자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경전들도 등장하지만, 적어도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가 승가의 규범으로 정착하게 된 과정을 율장에서 보면, 이 규범은 출가자들의 수행 여건에 대한 배려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최근에 성 피해와 관련된 미투 운동이 여기저기서 불붙듯 일어나고 있다. 정치계, 문학계, 예술계, 교육계, 체육계, 종교계 등 어느 분야도 예외가 없다. 고발당한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도 다양하다. 각자의 지위에서 조금이라도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남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성욕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이기에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때로는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빠져드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탐욕하고 집착하며 그 감정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성욕 뒤에 숨겨진 위험한 감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절제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범죄자로 고발당한 후에도 깊은 죄의식이나 진심 어린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은 것을 보며 욕망이 때로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욕망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못 보는 장님과 다름없다. 모두가 출가자처럼 일체의 성욕을 끊고 단음하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초래하게 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욕망이든 절제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특히 성욕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주의해야 한다. 일시적인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주변 사람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겨주고 스스로도 언젠가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
이자랑 |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이필원 | ||||||||||||||||||||||||||||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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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투로 이슈화된 성욕
요즘 사회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뜨겁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태평양을 넘어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다. 반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한국만큼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도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왜 한국에서 유독 이 문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그만큼 왜곡된 성의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훨씬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성적 욕망이 왜곡되어 드리워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일본보다는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적 장치가 훨씬 더 잘 마련된 것일까? 아마 이런 문제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선을 불교로 돌려보자. 불교의 제일 명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이다. 필자는 개고(皆苦)의 의미를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이 제일 명제의 근거는 바로 ‘욕망’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통을 욕망으로 분석하여 드러내고, 이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 키워드는 ‘고통’과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필자는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바로 이 두 키워드를 통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고통(dukkha)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불만족’이다. 한편 욕망 역시 그 특징은 ‘불만족’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경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욕망은 추구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떠남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이욕(離欲)이라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욕망은 철저하게 파악되고,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욕망으로서 성욕은 통제되고 제어되며, 나아가 떠남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 된다. 이제 붓다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성욕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나에게 나쁜 것은 멀리하고 버린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옆에 두거나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성욕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성욕은 나쁜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욕망이 지닌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욕망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욕망은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성욕, 재물욕, 식욕, 명예욕(권력욕), 수면욕 등이 있다. 이들 욕망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겠지만,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그것을 주체가 지배하는 ‘소유’의 관념이 이들 욕망의 배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我)’와 ‘아소(我所)’로 설명한다. 이를 간단한 명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성욕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잘 포기되지 않는다(na suppahāya)’는 말은 성욕에 사로잡히면 생각처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욕이란 다양한 모습으로 덮여 있어, 그것이 정확하게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성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잘못된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때,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성욕이 포장되기 쉽다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유혹되며, 자기 편리한 대로 정당화시키면서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붓다는 ‘파멸’이란 말로 경계한다. ‘여색에 미친다(itthidutto)’는 주석서에서 “여자에 매혹되어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점점 여자에게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매매를 한다던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파멸로 가는 것이며,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인을 좋아하여 희롱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또한 파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욕이 갖는 특징의 또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질투’라는 정서이다. 질투는 중요한 번뇌 가운데 하나이다. 질투는 분노를 야기하며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말룽까뿌따경(Māluṅkyaputta-sutta)》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왜 이런 판타지가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잘못된 ‘자아’에 대한 관념과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즐긴다’ ‘내가 경험한다’와 같은 관념이 성을 ‘관계’가 생략된 단순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욕망으로서 성욕’에는 대상화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된다. 대상화된 욕망의 내용은 ‘즐거움’ ‘쾌락’과 같은 것이다. 포털에서 ‘성생활을 즐겨라’와 같은 검색어를 넣으면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에 대한 잘못된 억압과 왜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은 분명 왜곡된 성의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즐겨라’와 같은 것은 또 다른 왜곡과 억압의 표상일 수 있다. 충분히 억압되었기에 이제는 즐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논리이다. 우리는 하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왜곡을 범하는 잘못은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비만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이나 음식에 대한 조절장애, 기타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잘못된 식습관이나 기름진 음식에 대한 노출에서 찾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에 자주 노출되거나 또는 성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자연히 성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미 충분하게 성이 노출된 사회이다. 그런 상황에서 ‘즐겨야 한다’는 것을 성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한 축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띠가 확립될 때 욕망은 통제된다. 하지만 혼란된 사띠를 갖게 되면, 대화를 나누는 앞의 사람이 여자나 남자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 보이게 됨을 의미한다. 앞의 사람이 여자 혹은 남자의 이미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성욕이란 욕망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사띠의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몸과 말과 뜻으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란 가르침이다.
이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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