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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율장을 통해 본 성욕과 성윤리//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한국인의 성윤리

우공(友空) 2018. 7. 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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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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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을 통해 본 성욕과 성윤리 / 이자랑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이자랑 jaranglee@hanmail.net

1. 서론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나도 그랬어’, 일명 ‘미투(Me too) 운동’이 최근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성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안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언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 같다는 누군가의 푸념이 어찌 한 사람만의 일일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비교적 가벼운 언어적 · 신체적 성적 수치심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성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기본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성욕은 다른 욕망과 달리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예로 보아도,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가하고 있다. 상대방이 겪을 심리적 · 육체적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하다. 절제되지 못한 성욕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도 성적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재가불자의 기본 실천 규범인 오계에서는 ‘불사음계(不邪婬戒)’라고 하여, 자신의 배우자 이외 사람과의 성행위를 금지한다. 사음은 자신의 배우자를 배신하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배우자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 모든 생류에 대한 자애심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용납될 리 없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율장(律藏)을 보면 출가자의 경우에는 모든 성관계, 나아가 이성과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나 음담패설 등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 더구나 그것은 모두 중죄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가장 중대한 죄로 분류되는 바라이의 경우 제1조가 ‘음행’, 즉 성관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비구 ·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구족계(具足戒) 첫머리를 ‘음계’가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 성욕을 가장 강렬하고 위태로운 욕망으로 인식하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지만, 이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갖가지 환난(患難)은 수행자로서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 이 글에서는 율장에 나타난 성 관련 조문과 그 인연담 등을 검토하며 불교가 출가자의 성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성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 규정을 고찰하고자 하는데, 이 규정은 출가자의 성적 범계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히고 있다. 출가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욕이라는 욕망이 갖는 특징과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

비구 · 비구니가 지켜야 할 규범인 율(律, vinaya)을 가리켜 흔히 ‘오편칠취(五篇七聚)’라고 한다. 오편이란 바라이(波羅夷) · 승잔(僧殘) · 바일제(波逸提) ·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 악작(悪作, 突吉羅)의 5종이며, 칠취는 이 5종에 투란차(偸蘭遮)와 악설(悪説)을 추가한 7종이다. 오편칠취에는 비구 · 비구니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바라이와 승잔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중죄(重罪), 그 이외는 경죄(輕罪)로 취급된다. 경죄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한 명이나 두세 명의 비구 앞에서 혹은 마음속으로 혼자 참회하면 죄에서 벗어나 청정 비구(니)로서의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지만, 중죄의 경우에는 다르다. 바라이죄를 저지르면 ‘불공주(不共住)’라는 처분을 받고 더 이상 비구(니)라는 정식 승려의 신분으로 머물 수 없게 되며, 승잔죄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 별주(別住)하며 속죄한 후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승가에서 동의를 얻은 후에야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성에 관한 모든 행위는 중죄인 바라이와 승잔에서 취급한다. 이로 보아 율장에서 성문제는 중대한 범계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관련 조문인 바라이 제1조 ‘음계(婬戒, methuna-dhamma)’를 먼저 살펴보며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 조문은 ‘음을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음을 행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하며,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암컷, 심지어 비인녀(非人女)까지 포함된다. 율이 수범수제(隨犯隨制), 요컨대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행동을 금지하는 형태로 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행이 승가에서 나타난 최초의 악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행자에게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본능적으로 무엇보다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문의 인연담에 의하면, 수딘나(Sudinna)라는 비구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걸식이 어려워지자 친족을 찾아 고향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가 환속하여 보시 등을 통해 공덕을 쌓으며 재가자로 살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수딘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후손이 없으면 모든 재산을 왕이 몰수해 간다며, 대를 이을 후손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애원하였다. 수딘나는 차마 그 청까지 거절하지는 못하고 출가 전의 처와 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조문이 아직 제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딘나의 행위는 불범(不犯)이었지만, 그는 심한 자책과 후회에 시달리며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료 비구들의 질문에 수딘나는 음행 사실을 고백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비구 승가를 소집한 후 “음욕법을 행하는 비구는 바라이이다.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학처를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한 비구가 음식으로 암컷 원숭이를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금지한 것은 인간과의 음행일 뿐 축생과의 음행은 대상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붓다는 “어떤 비구라도 음욕법을 행한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조문에 추가했다. 조문 해설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내지’에는 축생만이 아닌 비인녀, 3종의 황문(黃門), 3종의 이근자(二根者), 3종의 남자 등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다 포함된다. 황문과 이근자는 각각 성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가지거나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갖춘 자를 가리킨다. 남자란 비구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남자, 즉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종의 황문이란 인(人)황문 · 비인(非人)황문 · 축생황문을 가리키며, 3종의 이근자 역시 인이근 · 비인이근 · 축생이근을, 3종의 남자도 인남 · 비인남 · 축생남이라고 하여 사람(女 · 男)과 비인, 축생으로 분류한다.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다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의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제되지 못한 인간의 성욕이 어디까지 대상을 넓혀가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웨살리에 머물고 있던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원하는 대로 먹고 자고 씻었다. 욕망대로 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국 난잡한 마음으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 결과 친족도 재산도 잃고 병까지 들자 후회하며, 아난다 존자에게 만약 자신들이 다시 구족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열심히 수행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그들을 위해 이미 제정한 학처를 번복할 수는 없다고 하며, 대신 한 구절을 추가하여 음계 학처를 확정한다.

어떤 비구이든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 음욕법을 저지른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라는 구절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구로서의 수행은 지속하고 싶지만, 성욕의 유혹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겠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학과 규율’, 즉 붓다가 율로 제정한 학처를 버린다는 의지를 표명하라는 것이다. 즉, 사계(捨戒)의 의지를 표명하면 더 이상 비구가 아니기 때문에 음행을 저질러도 바라이가 되지 않는다. 비구의 신분으로 음계를 어겨 바라이로 처벌받게 되면 두 번 다시 비구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지만, 환속한 후의 행위는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율장에서는 환속이 몇 번까지 가능한지, 그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환속 후 몇 번이라도 다시 구족계를 받고 비구로서 수행이 가능하다. 결국 이 한 구절의 추가는 바라이죄를 저질러 비구로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종의 배려이자 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이 조문은 음계 외에, 5전 이상의 도둑질을 금지하는 도계(盜戒)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살인계(殺人戒),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하는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넣어 총 네 개로 구성되는데, 사계의 편법이 인정되는 것은 음계뿐이다. 이는 성욕이 매우 절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사계의 과정은 간단하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저는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버립니다.” “저는 법을 버립니다.”라는 등의 간단한 말을 하면 된다. 누군가 특정인의 동의도 승가의 동의도 필요치 않으며, 본인이 결심하고 그 뜻을 타인에게 전달하면 된다. 다만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 앞에서 한 사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계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비구로서 수행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은 본인의 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처 사계하지 못하고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범계 후 숨기려는 마음 없이 곧바로 승가에 참회의 뜻을 밝히면 ‘바라이학회(波羅夷學悔)’라는 신분으로 승가에 머물러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비구의 신분이 아닌, 사미와 유사한 낮은 신분으로 머물게 되므로 사실상 비구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면 원래의 비구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원칙에는 변함없다.

이상의 인연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음계는 수딘나 비구의 부정행→축생과의 음행→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이라는 세 단계에 걸쳐 완성되고 있다. 이는 성욕이 매우 강렬한 욕망으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 규정은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 그리고 율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출가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이상, 성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바라이라는 극중죄로 다스려질 만큼 출가자의 성행위는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사미 역시 음행을 저지르면 멸빈(滅擯)당한다. 다만, 사미의 경우 멸빈당한 후의 재출가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출가자의 직접적인 성행위 외, 성욕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갖가지 행위 역시 율장에서는 금지한다. 바라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죄로 간주되는 승잔에서는 제1조부터 제4조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행위가 총 네 가지 금지된다. 승잔 제1조 고출정계(故出精戒), 제2조 촉여신계(觸女身戒), 제3조 추악어계(麤惡語戒), 제4조 구음욕공양계(求婬欲供養戒)이다. 고출정계는 스스로 정액을 흘리는 행위, 즉 자위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며, 촉여신계는 비구가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이다. 손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 모두 금지된다. 추악어계는 남녀의 성에 관한 말이나 여성의 성기에 관한 말 등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구음욕공양계는 성욕을 갖고 음욕공양,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훌륭한 수행자에게 음욕을 공양하면 공덕이 있다고 여인 앞에서 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이처럼 율장에서는 직접적인 성관계를 비롯하여 자위행위, 성욕을 갖고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행위, 성과 관련된 말을 하는 행위, 음욕 공양을 부추기는 행위 등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바라이와 승잔이라는 중죄로 헤아리며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3. 성적 행동은 왜 금지되는가?

사계라는 일종의 구제책을 마련해줄 만큼 욕망으로서 성욕이 갖는 강렬한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출가자의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율장에서는 무슨 이유로 출가자의 성적 행위를 이토록 기피하는 것일까? 단 한 번의 성관계로 비구 혹은 비구니라는 신분을 완전히 박탈당한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율장에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관련 조문들에 보이는 부분적인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바라이 제1조 ‘음계’의 인연담을 보면, 수딘나의 음행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행동을 꾸짖는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는 부적절하고, 부적당하며, 어울리지 않으며, 사문답지 못하고, 합당하지 않으며,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렇듯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고도 어찌하여 너는 평생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지 못한단 말이냐.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탐욕을 가지라고 설하지 않았다. 속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속박당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집착을 없애라고 법을 설했지 집착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탐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너는 탐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속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속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집착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을 떠나라고 법을 설하고, 교만의 파괴를 위해, 갈증의 제어를 위해, 집착의 근절을 위해, 윤회의 단절을 위해, 갈애의 소멸을 위해, 탐욕으로부터의 떠남을 위해, 멸진을 위해, 열반을 위해 법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실로 많은 방법으로 감각적 욕망의 단멸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의 개념 작용에 대한 완전한 앎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증의 조복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의 근절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병의 가라앉힘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맹독을 지닌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검은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타오르고, 활활 불타며,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어리석은 사람아, 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죽음이나 죽음과 거의 유사한 괴로움을 받게 될지언정,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이로 인해 결코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사람아, 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와 똑같은 구절이 승잔 제1조 고출정계의 인연담에서도 등장한다. 성욕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된 셋야사까(Seyyasaka)라는 비구는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고, 그 결과 육체의 조화를 잃어 점차 몰골이 초췌해져 갔다. 그러자 우다이라는 장로는 “만약 범행을 닦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목욕해라. 그래도 기쁘지 않고 정욕이 일어나 마음이 괴롭다면 손을 사용하여 정액을 흘려라.”라고 충고했다. 욕망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셋야사카는 찜찜하게 여기면서도 우다이 장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것이 허용되는 행위라 생각하고 따라 했다. 그 결과 셋야사까는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이 좋아졌다. 이를 이상히 여긴 비구들이 연유를 물었고, 결국 셋야사까가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위의 인용문과 동일한 내용으로 셋야사까의 행동을 꾸짖고 있다.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타인과의 성관계 혹은 자위행위 등을 똑같은 이유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발언을 보면 왜 출가자에게 성적 행동이 금지되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성욕과 같은 감각적 욕망의 배후에는 탐욕과 속박, 집착 등 수행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요소들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지속하는 데에 큰 방해 요소이다. 감각적 욕망의 제어와 깨달음의 상관관계는 초기경전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문제로 양자는 밀접한 관련하에 언급된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 제467게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이겨낸 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끝을 알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으니, 여래는 헌과(獻果)를 받을 만하십니다.”라고 하여, 감각적 욕망을 이겨내었을 때 완전한 열반의 성취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또한 《담마빠다》 제215게에서는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망을 벗어난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슬픔과 두려움이 욕망에서 비롯됨을 설한다. 이 외, 니까야나 아함 등에서도 애욕을 떠난 생활이 평안하며, 안락하다는 점을 누누이 설하고 있다.

불도 수행이 계 · 정 · 혜 삼학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탐욕이나 집착, 갈애 등으로 인해 어떤 욕망보다 심하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는 성욕은 지양해야 할 욕망임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왓지족 출신 비구의 예를 보면,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기본적 욕구의 제동이 풀어졌을 때 온몸이 해이해지면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는 욕구인 것 같다. 즉, 성욕의 힘이 증대하는 것이리라.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육체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선정의 힘을 요구하는 정학을 실천하고, 나아가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는 혜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계학이란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 이면에 존재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육체가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육체 위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될 때 선정을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난다. 이러한 힘, 다시 말해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육체의 안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정학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행을 극중죄의 첫 번째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율장에서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도 성욕을 탐욕이나 갈애, 집착 등의 불선법을 내포한 가장 위험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성욕이 식욕이나 수면욕 등의 다른 감각적 욕망과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더 강렬하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계 제정의 단초를 제공한 수딘나 비구의 경우를 보면, 어머니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목적은 자신의 후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자손 번식의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갖게 되는 가장 본능적이고도 강렬한 욕망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성욕과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성욕은 성행위의 대상, 결과물로 태어나는 자식 등으로 집착의 영역을 확대해 간다. 단지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 차원에서 끝나는 욕망이 아닌 것이다. 고의 원인인 갈애가 어떤 욕망보다 치열하게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욕망이 바로 성욕이다. 처자식을 두고 출가를 감행해야 했던 고따마 붓다에게, 성적 욕망은 단지 개인의 성욕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는 강렬한 본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욕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붓다이기에 성적 행위에 대해 이처럼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4. 성소수자의 입단과 차법

단음(斷婬)을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아울러 성욕을 부추기지 않는 주변 여건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율장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소수자(性少數者, sexual minority)의 입단 금지 규정 역시 이런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장에서는 성소수자의 입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구가 되기 위해 구족계를 받을 때는 차법(遮法), 요컨대 비구가 되는 데 결격 사항은 없는지 승가로부터 확인받아야 한다. 차법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당 사항이 있으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차법 리스트 중 성소수자에 관한 항목이 눈에 띈다. 즉, 황문(黃門, paṇḍaka)과 이근자(二根者, ubhatovyañjanaka)의 출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황문은 빤다까의 한역어로, 빤다까는 기존에 ‘거세자(去勢者, eu-nuch)’나 ‘성적 불능자’ 혹은 ‘동성애자’ 등으로 해석되어 왔다. 율장에 등장하는 용례를 보면, 대부분 변태성욕을 지닌 동성연애자로 묘사되지만, 주석서에서는 5종의 황문을 언급한다. 즉, 다른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핥아 사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āsitta-paṇḍaka), 다른 사람들이 성교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질투심을 일으켜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usuyya–paṇḍaka), 특별한 도구를 이용해서 정자를 빼내야 하는 자(opakkamiya-pa-ṇḍaka), 보름 동안만 황문으로 사는 자(pakkha-paṇḍaka), 태아일 때부터 성기가 존재하지 않는 자(napuṃsaka-paṇḍaka)이다. 이를 보면, 황문은 항상 혹은 일시적(보름)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적 자극을 얻거나, 태어날 때부터 성기가 없어서 사정도 불가능하고 생식 능력도 없는 성적 불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문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근자란 양성구유(兩性具有), 즉 태어날 때부터 여성의 성기도 남성의 성기도 함께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이 외, 원래 남성이었던 자가 비구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여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거나, 여성이었던 자가 비구니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남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는 경우에 대해서도 율장은 언급한다. 이 경우에는 그 혹은 그녀가 받은 구족계나 그 시점까지의 법랍(法臘)이 모두 인정되며, 바뀐 성에 따라 다시 수행을 지속하면 된다고 한다. 즉, 이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황문과 이근자처럼 성적으로 문제를 지닌 이들의 출가는 왜 허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인도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억압받았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조차 받아들이면서 평등을 강조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원칙이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의 입단 불가 원칙을 일각에서는 차별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규정이 처음에 왜 생겼는지 율장에 전해지는 인연담을 살펴보며 그 진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율장에 의하면, 어떤 황문이 승가에 출가했는데 그는 젊은 비구들이나 사미, 코끼리 조련사 무리 등에게 다가가 자신을 더럽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련사 무리 등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이를 알게 된 세간 사람들은 ‘석자 사문은 황문이다. 황문이 아닌 자들도 황문을 더럽혔다’라며 비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문의 출가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황문은 처음부터 입단이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여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금지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수동적 동성연애자로서 난잡한 생활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황문은 출가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출가했다 하더라도 황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즉시 승가로부터 추방당한다. 이근자의 입단 금지 인연담도 황문과 유사하다. 이들 역시 출가 후 동료 비구 · 비구니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갖게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 등 승가에서 문란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입단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출가 후에 발각되면 승가 추방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근자의 경우에는 신체상 남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중 어느 쪽에 소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양쪽을 다니며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어 황문보다 한층 더 폭넓게 성적 문란을 일으킬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율장에서 황문이나 이근자와 같은, 이른바 성소수자의 입단을 금지하는 이유는 승가에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승가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공동체 생활을 전제로 하는 승가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성적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승가를 형성하여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교의 출가자들이 이러한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음계’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승가 운영에서도 큰 문제이며, 승가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와의 관계라는 시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의 행동이 일반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 승가 전체가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공동체로서 비난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장 곳곳에서 붓다는 율을 제정하는 이유, 다시 말해 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을 열 가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제계십리(制戒十利)’라 불리는 것이다. 제계십리는 승가의 구성원이 안락하게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재가자의 신심을 일으키고 증대시키며, 정법을 확립하는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즉, 승가의 발전과 영원한 존속을 기대한다. 따라서 승가 운영에 있어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한다.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찾아와 출가를 청원했을 때 붓다가 거절했던 배경에는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무엇보다 성욕의 직접적인 대상인 여인들이 승가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에는 이성이기 때문에 따로 승가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또한 성욕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자들이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성소수자는 다르다. 이들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절제하기 힘든 성적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므로 승가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수행에서 그토록 기피되는 성적 문제가 수행자들 간에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만큼 주변 여건 역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성해가야 한다. 이 점에서 이들의 입단 금지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후대가 되면 성소수자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경전들도 등장하지만, 적어도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가 승가의 규범으로 정착하게 된 과정을 율장에서 보면, 이 규범은 출가자들의 수행 여건에 대한 배려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불교에서 성욕은 다른 어떤 욕망보다 진지하게 다루어진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용납함으로써 성욕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삿된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된다. 이는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에게도 해나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에는 성욕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모든 성적 행위가 철저하게 금지된다. 사계를 통한 편법을 인정해 줄 만큼 성욕에 내재한 강렬한 욕망을 인정하지만, 출가자의 성행위는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성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위행위나 성적 접촉, 음담패설, 음욕공양을 부추기는 말 등과 같은 행동 역시 모두 중죄로 다스려진다. 이것은 성욕 뒤에 탐욕, 속박, 집착, 갈애 등과 같은 불선법이 존재하며, 이러한 악한 감정은 수행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욕망과 달리 성욕은 성행위를 하고자 하는 혹은 이미 한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애증 혹은 후손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등으로 이어지며, 어떤 욕망보다 강렬하게 인간의 심신을 지배하고 번뇌 속에서 고통받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계 · 정 · 혜 삼학을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출가자라면 성욕은 반드시 제어하고 끊어야 할 욕구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최근에 성 피해와 관련된 미투 운동이 여기저기서 불붙듯 일어나고 있다. 정치계, 문학계, 예술계, 교육계, 체육계, 종교계 등 어느 분야도 예외가 없다. 고발당한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도 다양하다. 각자의 지위에서 조금이라도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남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성욕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이기에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때로는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빠져드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탐욕하고 집착하며 그 감정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성욕 뒤에 숨겨진 위험한 감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절제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범죄자로 고발당한 후에도 깊은 죄의식이나 진심 어린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은 것을 보며 욕망이 때로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욕망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못 보는 장님과 다름없다.

모두가 출가자처럼 일체의 성욕을 끊고 단음하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초래하게 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욕망이든 절제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특히 성욕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주의해야 한다. 일시적인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주변 사람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겨주고 스스로도 언젠가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 · 불교학 전공 석사 및 박사과정 졸업. 〈초기불교교단의 연구-승단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초기불교 교단사 및 율장에 관한 50여 편의 논문과, 《나를 일깨우는 계율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등의 책을 썼다. 본지 편집위원.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이필원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이필원 nikaya@naver.com

1. 미투로 이슈화된 성욕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요즘 사회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뜨겁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태평양을 넘어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다. 반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한국만큼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도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왜 한국에서 유독 이 문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그만큼 왜곡된 성의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훨씬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성적 욕망이 왜곡되어 드리워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일본보다는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적 장치가 훨씬 더 잘 마련된 것일까? 아마 이런 문제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선을 불교로 돌려보자. 불교의 제일 명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이다. 필자는 개고(皆苦)의 의미를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이 제일 명제의 근거는 바로 ‘욕망’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통을 욕망으로 분석하여 드러내고, 이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 키워드는 ‘고통’과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필자는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바로 이 두 키워드를 통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고통(dukkha)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불만족’이다. 한편 욕망 역시 그 특징은 ‘불만족’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경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해서 탐욕이 생겨난 사람이 만일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자처럼 괴로워한다.(Sn. 767)

황금 산의 황금 모두가 두 배나 세 배가 되어도 한 사람에게조차 충분치 않네. 이렇게 알고 바르게 살아야 하리라.(SN. I, Rajjasutta, p.117)

욕망은 그 본질이 불만족이기에,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향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욕망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욕의 문제 또한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통한 올바른 이해의 시도가 될 것이다.


2. 욕망의 관점에서 ‘성’

어떤 사람은 불교를 출가주의 종교라고 한다. 과연 불교는 출가주의일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출가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출가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표현이 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집(agāra)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란 ‘소유와 욕망의 포기’를 의미한다. 소유와 욕망은 우리를 속박된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출가는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도 제시된다. 만약 출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가 맞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출가를 말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맛지마니까야에 《마하왓짜고따숫따(Mahāvacchagottasutta)》가 있다. 이 경전은 왓차고따가 붓다를 찾아뵙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보다는 소유와 욕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몸의 출가보다는 마음의 출가가 더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추구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떠남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이욕(離欲)이라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욕망은 철저하게 파악되고,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욕망으로서 성욕은 통제되고 제어되며, 나아가 떠남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 된다.

이제 붓다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욕망의 대상은 넘기 어려운 수렁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인용된 경문은 《숫따니빠따》의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ṇḍasutta)》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인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보통 까마(kāma)는 성적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남성에게는 여성이, 여성에게는 남성이, 동성애자의 경우는 동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넘기 어려운 수렁(paṅka duraccayo)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빵까(paṅka)는 수렁, 늪, 진흙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깊은 뻘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한번 빠지면 좀체 빠져나오기 어려운 수렁이나 뻘이다. 성적 욕망의 강력함을 너무나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경문이 아닌가 싶다. 수렁은 다른 말로 ‘중독’의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년 미국 매케이 연구팀의 연구 내용을 소개해 보자.

연구팀은 사귄 지 9개월이 지나지 않은 ‘열정적 사랑’ 단계에 있는 대학생 커플을 모집했다. “열정적 사랑 단계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시기를 뜻합니다. 상대를 향해 강렬한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거죠. 상대에게 온통 집중하고 상대를 항상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괴로운 단계죠.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것도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렵다. 담배 끊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가까이 있으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고통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용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를 실험대상으로 했지만,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연인에 대한 집착과 속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즐거움에 너무 도취되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된다.

욕망의 대상에서 위험을 보고서,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기 위해 갑니다.(Sn. 424)
위 내용은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pabbajjāsutta)》의 경문이다. 막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에게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이 정치적 제안을 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포함하면서, 보다 넓은 의미로 감각을 통해 추구하는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욕망의 대상을 ‘위험(ādīnava)’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즉 성적 욕망은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결국 이는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즐거움이 우리에게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에 탐닉하다 보니 결국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성행위로 인해]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성행위를 끊도록 배워야 합니다.(Sn. 862)

성행위(methuna)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이 경문은 수행자로서 홀로 살다가 성욕에 탐닉하게 되면 직면하게 되는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 일 하나로 그동안 애써 쌓았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말을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의 연구실까지 불쑥불쑥 찾아와 수치스러운 염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친구의 깊은 우정도 순식간에 끊어 버리며 건강과 부귀영화도, 높은 지위나 권력도, 참으로 소중한 행복도 간단히 파괴하는 위력적인 폭약이다.

이 문장을 보면, 쇼펜하우어가 붓다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말한다. 그는 아무리 로맨틱한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고 자부해도 본질적으로는 성욕을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목도하는 수많은 일을 보면, 붓다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됨을 알게 된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성욕에 사로잡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소중한 행복도 간단하게 그 앞에서는 부수어지고 만다.


3. 욕망의 특징을 통한 성욕의 이해

앞서 성욕을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이제 욕망의 특징을 통해 성욕을 이해해보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욕망으로서 성욕은 위험이며 넘기 어려운 수렁이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은 없다. 굳이 헤어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일부러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성욕은 제어되어야 하고, 나아가 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욕이 아름답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성욕이 ‘사랑’이란 말로 포장되고, 로맨틱이란 이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욕이란 말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성욕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가 도드라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욕망을 욕망으로서 바르게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을 버리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볼 때, 욕망이 나에게 나아가 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된다. 바르게 보아야[正見] 바르게 알게 된다. 바르게 알아야, 그에 알맞은 대처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욕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도 버리고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성욕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나에게 나쁜 것은 멀리하고 버린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옆에 두거나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성욕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성욕은 나쁜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욕망이 지닌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욕망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욕망은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성욕, 재물욕, 식욕, 명예욕(권력욕), 수면욕 등이 있다. 이들 욕망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겠지만,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그것을 주체가 지배하는 ‘소유’의 관념이 이들 욕망의 배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我)’와 ‘아소(我所)’로 설명한다. 이를 간단한 명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명예를 갖고 싶다.
나는 잠을 자고 싶다.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
나는 재산을 갖고 싶다.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위의 명제는 주체와 주체가 갖고 싶어 하는 소유, 즉 욕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구의 내용이 충족되지 않으면, 이것을 ‘결핍’으로 설명하게 된다. 결핍은 불만족의 특징이기도 하며, 이것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욕구의 주체인 ‘나’가 욕구의 결핍을 통해 대단히 불만족하고, 불유쾌하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불만족과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강력하게 욕구의 충족을 갈망하게 되고, 이를 통해 욕망에 지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욕망에 지배되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카오스의 상태가 된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탐욕(gedha)은 거대한 거센 흐름이라고, 열망(jappā)은 끌어들임이라고, 집착(ārammaṇa)은 혼돈(pakampana)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거센 흐름에 휘말리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기란 좀체 쉽지 않다. 그 흐름은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당겨 결코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힘들다. 그리고 그 욕망에 사로잡힘, 즉 집착은 우리를 커다란 혼돈과 떨림으로 몰아넣게 됨을 이 경문은 말하고 있다. 이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혼돈이 지속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 혼돈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붓다는 욕망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성욕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온갖 성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kāmesu) 탐욕하고, 열중하고, 미혹되고, 비열하며 바르지 못한 행위에 빠진 사람들……(Sn. 774)

성적 욕망의 대상에 정신을 잃고 빠져드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 미혹되어 해서는 안 될 행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모든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는 욕망 자체가 악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주의함과 어리석음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것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그러한 욕망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굴에 집착하고, 온갖 것에 덮여 있고, 유혹 속에 빠져 있는 자, 이러한 사람은 멀리 떠남과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세상에서 욕망의 대상들은 잘 포기되지 않는다.(Sn. 772)

‘잘 포기되지 않는다(na suppahāya)’는 말은 성욕에 사로잡히면 생각처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욕이란 다양한 모습으로 덮여 있어, 그것이 정확하게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성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잘못된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때,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성욕이 포장되기 쉽다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유혹되며, 자기 편리한 대로 정당화시키면서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붓다는 ‘파멸’이란 말로 경계한다.


4. 통제되지 않는 성욕은 파멸의 문

《숫따니빠따》에는 《파멸의 경》이라는 작은 경전이 있다. 이 경에 성욕과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 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6)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8)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10)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깨끗하지 못한 행위를 삼가라. 만약 깨끗한 행위를 닦을 수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Sn. 396)

위의 경문을 보면, 이는 재가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제기되는 다양한 성문제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초기경전에서 성 혹은 성욕과 관련된 문제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성욕이라는 욕망 자체가 나쁘다는 입장보다는 그것이 갖는 중독성과 흡인력이 강력하기에 충분하면서도 확고하게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여색에 미친다(itthidutto)’는 주석서에서 “여자에 매혹되어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점점 여자에게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매매를 한다던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파멸로 가는 것이며,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인을 좋아하여 희롱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또한 파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욕이 갖는 특징의 또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질투’라는 정서이다. 질투는 중요한 번뇌 가운데 하나이다. 질투는 분노를 야기하며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말룽까뿌따경(Māluṅkyaputta-sutta)》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혼란된 사띠로 형체(rūpa)를 보고 나서,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으로 물든 마음을 지닌 자는 그것에 집착하여 경험하고 머문다. 그 집착된 마음을 지닌 자에게 다양한 형체에서 기인한 감각(vedanā)들이 자라나고, 탐애와 분노가 마음을 파괴한다.(SN. IV, p.73)

사띠란 ‘(바른) 알아차림’ ‘(바른) 기억’ 등을 의미한다. 반면 혼란된 사띠(sati muṭṭhā)란 ‘잘못된 알아차림이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으로 대상을 보면, 우리는 대상에서 욕망과 관련된 부분에 시선이 가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욕망으로 대상을 물들이기에, 대상/상대는 본인의 의지와 관련 없이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욕망이 해소되기까지 욕망에 물든 자는 욕망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를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은 그것이 조금 있더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에 매이듯, 그와 같이 그의 마음은 속박된다.(Dhp. 284)

반대로 ‘여자의 남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욕망의 덤불(vanatha)이란 ‘애욕의 숲’이라고도 이해된다. 잡목이 무성히 자란 곳에 들어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상상해 보면 성적 욕망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하는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적] 욕망의 즐거움에 물들고 [성적] 욕망의 탐욕에 홀려서 마음을 빼앗겨 사람들은 과오를 깨닫지 못하네. 사슴이 쳐진 그물을 모르듯, 과오는 나중에 쓴 맛이 된다네. 결과가 악하기 때문이라네.(SN. I, Appakāsutta, p.74)

오늘날 ‘미투 운동’에서 폭로되는 내용,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가해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위 경문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함을 보게 된다. 핵심은 스스로의 잘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욕망에 마음이 홀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의 과보가 어떤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5. 판타지의 성욕을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성문제는 성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성에 개방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성에 대한 이상하리만치의 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에 덧씌워진 관념들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데이비드 로이의 견해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오늘날 (성과 관련된) 그 문제는 죄책감이나 억압 같은 게 아니라 포르노그래피 중독과 같은 여러 유형의 강박이다. ……중략……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성에게 성욕을 배출할 통로를 개방하고 여성의 성과 출산은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우리의 문화는 성으로 푹 젖어 있다. 성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적 만족에 몰두하면 삶의 커다란 의미들이 붕괴되는 데서 오는 공허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의 중요성은 부풀려졌다.

앞서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랑은 중독과 같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성은 중독성을 갖는다. 하지만 성행위를 경험한 모든 사람이 중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중독은, 로이의 해석처럼 그 의미가 부풀려지거나 왜곡과 억압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성 자체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상업화’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어 ‘성욕’은 판타지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리는 성욕을 그저 ‘스포츠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대단히 쿨(cool)한 척하지만, 그것이 바로 판타지이다.

왜 이런 판타지가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잘못된 ‘자아’에 대한 관념과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즐긴다’ ‘내가 경험한다’와 같은 관념이 성을 ‘관계’가 생략된 단순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욕망으로서 성욕’에는 대상화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된다. 대상화된 욕망의 내용은 ‘즐거움’ ‘쾌락’과 같은 것이다. 포털에서 ‘성생활을 즐겨라’와 같은 검색어를 넣으면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에 대한 잘못된 억압과 왜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은 분명 왜곡된 성의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즐겨라’와 같은 것은 또 다른 왜곡과 억압의 표상일 수 있다.

충분히 억압되었기에 이제는 즐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논리이다. 우리는 하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왜곡을 범하는 잘못은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비만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이나 음식에 대한 조절장애, 기타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잘못된 식습관이나 기름진 음식에 대한 노출에서 찾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에 자주 노출되거나 또는 성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자연히 성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미 충분하게 성이 노출된 사회이다. 그런 상황에서 ‘즐겨야 한다’는 것을 성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한 축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불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성적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성적 욕망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경(Kāmādhivacanasutta)》이 있다. 여기에서는 성적 욕망(kāma)과 관련하여 ‘두려움, 괴로움, 질병, 종기, 화살, 애착, 진흙, 모태’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이 내용은 용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충분히 강하다. 왜 그럴까. 성욕은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성욕에 대한 갈망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쾌락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에 속박된다. 그 속박에서 성에 대한 다양한 왜곡과 판타지가 생겨난다. 그렇기에 성적 욕망이 갖는 내적 특징과 사회적 특징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앙굿따라니까야의 경문을 비롯한 불교의 비판적 입장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적 쾌락이 주는 달콤함과 그 이미지들로부터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욕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쾌락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학습되는 것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성욕은 바르게 이해되고, 학습되어야 한다. 그럴 때 판타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6. 성욕은 통제되어야 하는 욕망

불교의 관점은 일관된다. 즉 모든 욕망은 올바르게 이해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제의 의미를 억압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앞서 주체와 소유란 측면에서 간단하게 언급하였는데, 바로 주체와 소유의 해체가 통제의 의미가 된다. 욕망하는 주체와 소유에 대한 비판적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Sn. 916)

눈으로 탐내지 말아야 하고, 저속한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 해야 하고, 맛에 탐착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Sn. 922)

보고, 듣고, 맛보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욕망하는 주체에 대한 관념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된 것들이 내 것이라는 소유의 관념이다. 즉 주체와 소유는 모두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희론(papañca)이라고 한다. 희론은 개념적 확산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확산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관념이 욕망을 왜곡하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성욕이 이해될 때, 비로소 통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욕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욕망이다. 그런 만큼 성욕은 자칫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성욕에 사로잡히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를 혹은 남자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되어야만 성욕은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대반열반경》에 참조할 만한 내용이 전한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어떻게 여인을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DN. II, p.141)

이는 수행자로서 올바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성욕의 근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여기에 붓다는 ‘사띠를 확립할 것’을 말한다. 사띠의 확립이란 올바른 기억이며 올바른 알아차림이다. 여인을 여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남자나 여자는 모두 사람이다. 여기에 성별을 붙여서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부분적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온전한 이해는 성별에 구속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때 가능해진다. ‘사띠의 확립’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띠가 확립될 때 욕망은 통제된다. 하지만 혼란된 사띠를 갖게 되면, 대화를 나누는 앞의 사람이 여자나 남자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 보이게 됨을 의미한다. 앞의 사람이 여자 혹은 남자의 이미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성욕이란 욕망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사띠의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몸과 말과 뜻으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란 가르침이다.

몸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말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뜻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부끄러워하는 자는 보호받는 자라고 말해진다. (SN. I, Attarakkhitasutta, p.73)

위의 경문은 부처님과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의 대화이다. 좋은 것 혹은 훌륭한 것(sādhu)은 우리의 행위가 자제될 수 있을 때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몸으로, 말로, 생각/뜻으로 행위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방식이다. 그 모든 행위의 방식은 자제될 수 있어야 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내가 보호받기 위해서이다. 앞서 《숫따니빠따》의 《파멸의 경》 경문을 통해서 보았듯이, 자제하지 않으면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존경의 눈이 경멸의 눈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리고 성욕에 물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쉽고 간단하다. 쉽고 간단하기에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욕의 힘을 너무 간과하게 되면, 그 힘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우리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성욕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필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청주대학교 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북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阿羅漢の研究〉(박사논문)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 〈초기불교의 연기이해: 수행론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접근〉 등이 있으며, 저서로 《불교 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공저)와 번역서 《사성제 팔정도》 등이 있다.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한국인의 성윤리 / 박병기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박병기 bkpak15@knue.ac.kr

1. 머리말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번식의 욕구를 통해 그 종의 존속을 이어간다. 자신의 몸 안에 음양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어 자체적으로 생식을 해내는 생물도 있지만, 대체로는 암컷과 수컷이라는 서로 다른 두 종의 성(性, sex)을 전제로 그들 사이의 결합을 통해 생식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하는 포유동물의 경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성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없다면 당대에서 종말을 맞는 비극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성(sexuality)은 이러한 생물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의 특성을 더하게 되면서 복잡성과 복합성을 지니게 된다. 우선 사회구조와 권력의 출현과 맞물리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회과학적 의미의 성(gender)이 등장한다. 인류 역사가 대체로 남성 중심의 흐름으로 정착하면서 남성은 우월하고 강하며 여성은 열등하고 약하다는 이미지가 자리 잡고, 그것은 다시 일부일처제 중심의 결혼제도와 만나면서 남성에게는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의 차별적 역할분담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성은 다른 한편 돈으로 사고팔거나 전쟁의 승리에 대한 대가로 챙길 수 있는 전리품 같은 형태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것이 여성의 위상 강화로 인한 축첩제의 철폐 등으로 이어지면서 음성적인 형태로 바뀌었고,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그러한 음성적인 성매매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나라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수준의 성담론이 전통적인 기반의 성윤리를 근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할 정도의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성윤리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일 수 있고, 이러한 성담론의 표층과 심층 사이의 괴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부각되는 ‘미투(me too)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어떤 관점을 지닐 수 있을까? 성문제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문제이지만, 동시에 사회과학적 문제이자 윤리적 문제이다. 권력관계에 근거한 성적 괴롭힘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최근의 사태는 그중에서 주로 사회과학적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관계 속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입장 또는 관점을 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이 작은 글의 목적이다. 그중에서도 윤리의 관점을 중심으로 삼아 생물학적 차원과 사회과학적 차원을 포괄하는 입장을 택해보고자 한다.

이런 입장을 택하고자 할 때 지닐 수 있는 한계는 지나치게 윤리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도덕주의의 위험성에서 생길 수 있다. 도덕주의는 모든 문제를 도덕으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완고한 입장을 의미하고, 성문제를 윤리의 문제로만 한정 지음으로써 다른 차원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성윤리 또는 성의식을 바라보고자 할 때도 이런 위험성이 수반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불교윤리를 ‘붓다의 가르침 또는 그가 발견한 진리에 근거한 윤리적 관점과 실천 지침’이라는 넓은 의미로 정의하고 출발할 경우, 성에 관한 생물학적 관점과 사회과학적 관점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2. 한국인의 성의식과 성윤리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단구조와 세계화, 자본의 지배라는 현재의 질서 속에서도 불교와 유교로 상징되는 전통의 영향 또한 일정 부분 공유하면서 하루의 일상을 영위해가고 있다. 각자의 성장배경 등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영향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차이점이 부각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공통점이 더 많이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성의식과 성윤리는 모두 한 개인 또는 집단이 지니는 성 관련 의식들을 전제로 성립되는 개념들이다. 그중에서 전자는 가치중립적으로 그 의식을 조사하여 기술(記述)할 때 주로 사용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고, 후자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할 때 사용되는 윤리학적 개념이다. 당연히 이 둘은 서로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성의식을 고려하지 않는 성윤리 담론은 공허해지고, 성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성의식 조사발표는 실천력을 결여한 정보제공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21세기 초반 한국인의 성의식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러 조사연구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 포함된 성의식이다. 미투 운동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삼아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성적 괴롭힘에 대한 총체적인 고발과 성찰 운동이다. 그런데 이 운동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서 다양한 성의식이 표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출의 과정 속에는 서로 충돌하는 성윤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다시 인터넷 기반 의사소통의 장이 지니는 즉시성과 감정적 대응 등이 더해지면서 비정상적인 담론이 펼쳐지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2018년 3월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미투 운동 관련 여론조사 결과가 그런 성의식의 표출과 성윤리의 충돌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여성이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은 동의한 것이다.’ 등 성폭력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의견에 동의하는 비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성이 있다. 동의 비율이 남성 50.8%, 여성 41.9%로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었지만, 연령별 차이가 더 큰 점이 인상적이다.

20, 30대의 동의 비율은 24.0%, 27.9%인 데 비해, 40대는 46.4%, 50대는 58.0%, 60세 이상은 64.9%에 이른다. 60세 이상은 여성의 경우에도 동의 비율이 60.4%로 나타나 남녀 차이보다는 세대별 차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여성은 조신하고 단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윤리가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성에 주목하면서 자율적인 성결정권을 중심에 두는 윤리관인 자유주의적 관점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특별히 부각시키면서 성관계의 과정과 결과에서 그 책임을 더 부각시키는 보수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성윤리와 함께 한국인들의 성윤리를 규정지을 수 있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성윤리에는 결혼과 출산 중심의 보수주의 성윤리와 합의와 쾌락 중심의 자유주의 성윤리, 사랑 중심의 중도주의 성윤리가 있다. 류지한은 인간의 성욕이 지니는 특성을 본능의 차원을 일부 넘어설 수 있는 폭넓은 성적 자유와 책임, 다른 인간존재와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로서 인격적 차원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특히 “인간의 성이 지닌 인격적 차원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독특한 특징”이다. 성윤리가 성욕이라는 본능적 차원과 함께 성관계를 통한 인격적 만남의 차원을 지니는 점에 주목하는 관점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다만 그때의 ‘인격’이 어떤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의 여지가 남는다.

우리 한국인들의 성윤리를 형성하는 윤리관을 셋으로 나누어보고자 할 때, 그 윤리관의 내포(內包)는 성욕의 발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의 문제이다. 즉 그 핵심 내용은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 문제인데, 그것은 다시 제도적인 근거와 기능적인 근거로 나뉜다. 보수주의 성윤리의 경우, 성욕 발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제도적인 근거는 결혼이고 기능적인 근거는 생식, 즉 자식 출산이다. 자유주의 성윤리의 경우는 각각 합의와 쾌락이고, 중도주의의 경우는 계약과 사랑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성윤리는 결혼 제도 내에서 출산을 위해 발휘되는 성욕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자유연애 사상의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도입된 이후로 역시 우리 한국인의 성윤리관 중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자유주의 성윤리는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제도적인 기반으로 삼아 성욕의 쾌락 기능에 집중하는 윤리관이다. 그 사이에 중도주의 성윤리가 자리하고 있고, 현재 우리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중도주의를 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윤리관의 기본 요건이 일관성이라는 점의 확인이다. 하나의 윤리관이 윤리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는 판단과 적용, 실천의 일관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물론 윤리관이 곧 행동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후퇴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복원력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보완책이 전제될 때라야 용납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성윤리관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일관성에서 생겨나고 있다. 자신의 딸과 다른 여성에게 적용하는 윤리관이 다를 경우 그 사람의 윤리관은 온전한 것일 수 없다.

자유주의 성윤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이른바 즉석만남이나 성매매를 통한 성관계의 정당화 수준이다. 이 비율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자유주의 성윤리관의 정착 여부를 짐작해볼 수 있다. 2015년 질병관리본부에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의뢰하여 실시한 ‘전국 성의식 조사’에 따르면, 특히 20대 남성층에서 이런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성의식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와 맞물리면서 성윤리관의 미성숙 또는 훼손을 가져와 자신과 타인에게 적용하는 성윤리관이 달라지는 비일관성으로 나타날 가능성 또한 높다.

특히 한국 남성들의 경우, 대부분 군대 경험을 통해 성매매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고 그 경험 안에 포함된 남성 중심적인 성 상품화 경향과 성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혼 이후에 적극적으로 요구받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윤리관, 즉 결혼과 출산을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로 삼는 윤리관과 만나는 과정에서 왜곡과 혼재 양상으로 자리 잡아 지속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들의 성의식은 여성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쳐 한국인들 모두의 성윤리관을 왜곡된 형태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각각 다른 유형의 성윤리관을 적용하고자 하는 이 땅의 많은 어머니의 경우가 그 사례이다.


3. 불교의 성윤리관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인의 성의식과 성윤리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불교는 어떤 관점을 취할 수 있고 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문제가 지니는 일상에의 파급력이 큼에도 지금까지의 불교윤리 논의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불교윤리 논의 자체가 극히 미흡한 현실 속에서 특히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고, 이 상황은 국외의 불교윤리 관련 논의까지 확대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를 묻는 성윤리관 논의에 대해 불교가 소극적인 이유는 성욕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취해 온 불교 전통 때문으로 보인다. 욕망 추구는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지속적으로 확대 · 심화하는 것일 뿐이어서 경계해야 하고, 특히 자신의 소유 욕구에서 벗어남이 깨달음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불교 전통에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욕망과 같은 불은 없고
증오와 같은 죄악은 없다.
이 몸과 같은 괴로움은 없고
평화로움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다.

성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문제이다. 식욕과 함께 성욕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기본 욕망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맹자와 고자(告子) 사이의 인간 본성 논쟁에서도 식색(食色)이라는 개념으로 다루어졌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욕망, 특히 몸에 기반한 욕구는 경계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고, 현재까지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다. 불처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성욕은 당연히 억제와 절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수행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음행(淫行)은 승단 추방죄라는 가장 큰 벌로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다만 재가불자들에게는 대상과 장소, 시간 등을 한정 짓는 성행위가 허용되었고, 그것은 우바새계라는 형식으로 제정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몸에 대해서도 ‘이 몸과 같은 괴로움은 없다.’고 강조하는 경전을 보면, 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괴로움의 원천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불교는 중도(中道)의 윤리를 말하지 않는가? 자신의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는 수행이나 약물 등을 통해 몸의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 모두 붓다는 경계하였음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관점들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받아들여야할까?

이 문제 말고도 불교 교리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실제로도 일정 부분 충돌할 수 있는 가르침이나 계율이 꽤 많이 존재한다. 경전의 시간적 · 공간적 허용성이나 진제와 속제의 구분을 통한 일상과 깨달음의 불이적 관계설정 등이 그러한 충돌을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 실천적 틀로 제안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혼란이 쉽게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윤회의 굴레를 어둠[無明]으로 묘사하는 불교철학의 핵심 전제를 떠올릴 필요와 마주한다. 윤회는 어둠 속에서 인간이 짓는 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존재의 굴레이자 비극이다. 이러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자 그 결과인 열반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과 열반은 존재의 비극적인 수레바퀴인 윤회로부터의 탈출이자 극복인 것이다. 성욕은 그런데 이러한 윤회의 굴레를 지속시켜주는 생식의 수단이자 통로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교에서는 극복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 성욕 발휘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재가불자들에게도 음욕과 관련되는 계는 여타 계율과 다른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재가자들이 지켜야 하는 오계 중에서 불사음계(不邪淫戒)는 다른 네 개의 계와는 다른 성중지계(性重之戒)인 것이다.

(우바새는) 마땅히 오계(五戒)를 마음으로 받아 지녀야 한다. 이 오계 중에서 넷은 후세에 특별히 더 강조되지 않았는데, 끊기가 어려워 쉽게 지킬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계는 음욕으로 인한 모든 인연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방일하지 않아야만 지킬 수 있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출가는 어렵고 거기서 기뻐하기도 어렵다.
가정생활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사는 것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윤회의) 떠돌이에게 생긴다.
그러므로 (윤회의) 떠돌이가 되지 말고
괴로움이 빠진 자가 되지 말라.

우리는 이 두 경을 비교해봄으로써 우선 자신이 윤회의 떠돌이임을 직시하는 깨달음의 구현과 그것을 극복하는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과 마주하게 된다. 그다음으로는 그러한 윤회의 원천이 자신이 어둠 속에서 짓는 업이며 그중에서도 음욕으로 인한 업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임을 말하는 가르침과도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재가자의 성욕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우호적인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출가자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성과 관련된 행위는 대체로 가장 무거운 벌인 승단 추방죄로 다스리는 율장의 많은 사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불교의 성윤리는 현대 윤리학의 분류 중에서 보수주의 성윤리에 가까운데, 그중에서도 매우 엄격한 사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출가자의 성욕은 그 자체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고, 재가자의 경우에도 윤회의 떠돌이를 면치 못하게 하는 핵심 요인이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로 성욕 문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불교의 성윤리관은 몸에 근거한 쾌락 추구를 죄악시하면서 영혼의 열망에 기반한 사랑만을 긍정하는 플라톤적 관점, 즉 플라토닉 러브를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에게 온전한 사랑은 영혼 또는 정신의 사랑이고, 몸에 기반한 성욕이 개입된 사랑은 타락한 것일 뿐이다.

물론 불교의 성윤리를 이처럼 극단적인 금욕주의로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도(中道)의 윤리 또한 불교의 핵심 윤리이고 이 윤리를 성문제에 적용할 경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의 성윤리가 자유주의보다는 보수주의에 가깝고, 그것도 좀 더 강화된 보수주의 윤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성윤리관을 현재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불가피해진다.

4. 불교 성윤리관에 대한 현재적 해석과 한국인의 성윤리

21세기 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성윤리관은 온전하지 않다. 유교윤리에 기반한 보수주의 성윤리와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성윤리 사이를 편의에 따라 오가면서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온전한 의미의 성윤리관이 정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엄숙주의 성담론과 ‘성을 가장 쉽게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상반된 평가로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성윤리관의 혼란은 당연히 외형적인 시민사회의 정착에 걸맞은 시민윤리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민주화 여정을 성공적으로 밟아온 현대 한국인들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와 형식적 민주주의 정착의 동시 성취라는 세계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불행히도 저항적 시민사회가 지닐 수 있는 도덕적 해이가 함께 수반하면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도덕성에서는 그다지 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최근의 미투 운동을 통해 확인하는 중이다.

이런 혼란상은 당연히 한 개인의 차원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에 대해 충분히 유념해야 하겠지만, 그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한 요인 중에는 우리 사회 전반의 성의식 수준과 성윤리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같이 성윤리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 동시에 유념하면서, 그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할 때 불교의 성윤리관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가) 한국인의 성윤리 문제 해결을 위한 불교의 지혜

한국인의 성윤리 문제를 불교 성윤리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연결 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인의 성윤리에 전통의 이름으로 포함된 성윤리관 속 불교의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에서 불교 성윤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점 또는 내용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중요한 쟁점이지만, 이 작은 고찰에 담기에는 큰 주제여서 일단 제외하고 두 번째 쟁점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불교의 성윤리관은 수행과 깨달음, 열반이라는 불교 고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여정의 하위 변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수행과 깨달음, 이를 통한 열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면서 권장되는 데 비해, 방해가 되는 것들은 피해야 할 것이거나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성욕 또한 이러한 회피와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불교 성윤리관의 핵심이다. 우리는 일단 이 핵심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성욕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을 불교 성윤리관에 따르는 삶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이 지닐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상처럼 성이 상품화되고 그것이 다시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채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욕 자체를 다스림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많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욕 속에 담겨 있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감안하면 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성욕은 한 번으로 충족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더 크고 자극적인 충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것에 탐닉하지 않고 아예 멀리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성욕은 맹자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고자의 적절한 주목과 같이,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타고난 본성일 뿐이다. 그 흐름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가만히 흐르게 놓아두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느 지점에서 막고자 하거나 억지로 떨쳐버리고자 할 경우 더 큰 욕망으로 발전하여 우리를 압박해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욕에 관한 금기와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불교의 성윤리관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불교의 성윤리가 보살의 두 형태를 이루는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구별을 전제로 해서 성욕 발휘의 정당화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와 우바새는 욕망의 부름에 응하지 말고 항상 그 생겨나는 마음에 응하지 말라. ……만약 음욕이 생겨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해도 아직 합하지 않았다면 참회가 가능하고, 합했더라도 음행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참회가 가능하다.

이 계경(戒經)에서는 우바새와 비구를 구별하지 않고 음욕을 비롯한 욕망의 부름에 응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지만, 《우바새계경》에서는 보살을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나누고 그 차이를 전제로 해서 계율을 설하고 있다.

만약 재가보살이 참회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면, 스승으로서 두 명의 제자를 얻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선남자여! 재가보살이 스스로 이 능력을 갖추고 큰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면, 백성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호하고 모든 악업으로부터 벗어나 선행을 할 수 있게 가르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재가보살들에게 성욕의 발휘는 부분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당화 근거가 제공된다. 그 근거는 삿된 음행이 아닌 경우이고 그것은 다시 결혼제도 속에서 부부 사이에 발휘되는 음욕 중에서 장소와 시간을 가리는 것으로 구체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재가보살의 성윤리관은 양반 가문을 전제로 해서 혼례를 치른 부부가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발휘하는 성욕에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교 성윤리관과 상당 부분 닮아 있지만, 그것보다는 범위가 넓다고 볼 수 있다. 양반 가문에서 부부의 성행위는 주로 시어머니가 정해주는 날짜, 다시 말해서 며느리의 생식이 가능한 날짜에 한해 허용되었지만, 재가보살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의 청정성만 보장되면 어떤 경우든 허용되기 때문이다.

나) 불교 성윤리관의 현재적 해석 과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토대로 불교 성윤리관의 현재적 의미와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불교 성윤리관은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불교 고유의 목적에 포섭되면서 성욕을 수행의 과정에서 직시(直視)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서 출발한다. 이 출발점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재가보살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성욕 발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주는 차별성이 나타난다. 이 성윤리관에 따르면, 성욕은 무명(無明)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면서 동시에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다. 이러한 성윤리관은 성욕의 상품화와 이데올로기화를 중심으로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성 관련 상황을 성찰해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일차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상황의 직시라는 부분에서 문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 직시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서 성욕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실천적 함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불교의 성윤리관은 전반적으로 성욕을 금기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전통적 성윤리관을 형성하고 있는 보수주의의 그것과 가깝다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성윤리는 한편으로 결혼제도가 무너지고 있고 성을 생식의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현대의 일반적인 성윤리관에 비추어볼 때, 시대착오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불교의 성윤리 또한 금욕과 극복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성을 통한 쾌락 추구와 연대의식의 확충을 소홀히 하게 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의 성윤리는 좀 더 시야를 확대하고 적극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와 만나게 된다. 이 요구는 특히 성을 인격적 만남과 유대의 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중도주의 성윤리의 관점에서 부각될 수 있다. 불교의 성윤리가 보수주의의 틀을 넘어서서 성을 인격적 만남과 합일(合一)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통로로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윤리의 핵심 전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상호 연기성이고, 이 연기성(緣起性)은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과 유대, 합일의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의 근원이다. 성관계는 그러한 연기성을 자신의 체험 세계 속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관계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불교의 성윤리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여 사회 속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성욕과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인 인식과 수용은 당연히 출가보살과 재가보살 사이의 차별성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출가자의 경우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결혼과 독신을 선택함으로써 성욕에 대한 보다 엄격한 통제와 제한된 통제 사이의 선택 또한 가능하다. 재가자의 경우도 결혼과 독신의 선택이 가능하지만 성욕의 통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승려의 결혼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만해의 경우가 불교 성윤리관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의 성욕에 대해서도 긍적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자연스러운 본능의 억압일 뿐만 아니라 포교와 교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꼽고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의 승가공동체 또한 은처자 의혹과 승려의 유흥업소 출입 등으로 세간의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는 점을 감안하면, 만해의 제안을 적극적인 고려의 대상일 수 있다.

셋째, 불교의 성윤리관이 지니는 일상적 의미에 주목하면서 그 의미와 현재적 해석의 과제를 제안해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각자도생의 이념과 일상적 풍요와 편의의 추구라는 지향을 기반으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성욕은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의 중심으로 부각되어 있고, 윤리를 전제로 하는 법률과 이 욕구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성윤리 교육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불교의 지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상 차원의 그것은 걸림없음[無碍]이다. 우리는 성욕을 비롯한 본능의 충족을 통해 생존을 보장받는다. 그런 점에서 식욕과 성욕으로 대표되는 욕구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적절한 충족의 대상일 뿐이다. 불교의 지혜를 통해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그 ‘적절함’이다. 욕구충족의 적절함은 다시 양의 문제와 함께 그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의 문제로 귀속된다. 먹는 양의 적절함은 그것이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앞에 놓였는지에 대한 평가에 의존한다. 성욕의 경우 그 양의 문제는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상대방의 숫자와 함께, 그 인격적 만남의 수준이라는 질적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 적절함이 갖추어져 있다면 성욕의 추구와 성취는 정당화될 수 있고, 불교계에서는 재가자에게 일차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일상적 깨달음을 위해 권장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5. 맺음말

현대 한국인의 성윤리는 성윤리 성립의 기본 요건인 적용의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전제이다. 성욕 발휘 과정과 결과에서 도덕적 정당화 근거를 찾기보다는,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와 무책임성이 발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요건과 출산이라는 성욕의 기능적 요건에 초점을 맞추던 유교 중심의 보수주의 성윤리가 급속도로 무너진 곳에, 각각 합의와 쾌락 중심의 자유주의 성윤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 글의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상은 한국인 개개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해결되어야 하는 수많은 문제를 양산하는 요인이 되고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 대안 모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불교의 성윤리관이 줄 수 있는 지혜를 함께 찾아보고자 했다. 우선 불교의 성윤리관은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전제로 삼는 수행의 과정에서 성욕의 크기와 강도를 직시하면서 금욕과 극복의 대상으로 제안한다. 그러면서도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일정한 차별성을 인정하여 재가자에게는 장소와 시간의 삼감을 전제로 성욕 발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불교의 성윤리관이 현재 상황에 맞게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특히 일상에서의 걸림없음이라는 불교의 지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본능으로서 성욕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격적 만남과 합일의 경험을 통해 연기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의 성욕 발휘 과정은 구 자체로 금기의 대상이 아닌 수행의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의 성윤리관이 이러한 일상의 지혜로 재해석되면서 수용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현대 한국인들의 성윤리 문제는 물론 그들의 일상에 의미 있는 제안이자 실천지침으로 살아날 가능성 또한 열릴 수 있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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