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과 ‘안티’ 네티즌들 양쪽에서 모두 맹목적인 주장들만을 내놓고 있는 듯하군요.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예전에 여러 차례 답변을 올린 적이 있어, 제 과거 답변들의 내용을 인용하고 좀더 보충하여 답변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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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논하려면, ‘종교’라는 것의 의미, 그리고 각 종교의 ‘교리’와 ‘경전’의 의미에 대해 먼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 종교가, 또는 그 종교의 교리나 경전이 과연 ‘진리 그 자체’이고 절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죠.
한국 개신교의 주류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미국에서 유래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교파들입니다. 이러한 근본주의 성향 교파들은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에 의거하여 “성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라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입장을 취할 경우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근본주의 신학의 신봉자는 미국에서도 전체 개신교인의 1/4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근본주의적 교파가 개신교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현대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그 수준을 인정받는 신학자 중 그러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란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인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섭리에 접근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든 이슬람교든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스스로가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를 ‘진리의 세계(Dharma Dhatu)’ 등으로 표현해 왔고, 유대교와 기독교-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야훼 신앙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신(人格神)으로 표현해 왔습니다(현대인들이 인격신 개념에 지나치게 속박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러나 각 종교가 추구하는 바는 결국 ‘궁극적 실재’라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각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결국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이러한 고등종교들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들의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봅니다.
“궁극적 실재는 반드시 하나의 ‘인격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인격신’을 전제하지 않는 불교는 거짓 종교다”라고 주장하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그러한 주장 역시 진리를 인간의 인지능력 안에 가두어 놓고 생각하려는 편협한 사고의 산물일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내에서도 종래의 인격신 관념의 한계를 통찰하고 극복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종교철학자이자 조직신학자라 할 수 있는 파울 틸리히가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a Being)’보다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 즉 ‘존재의 무한한 심층이자 헤아릴 수 없는 근거’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점을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유래한 ‘인격신’이라는 특정 개념에 가두어 놓을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실재(實在; Reality)’, 즉 ‘진리’란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완벽하게 인지하고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무한하고 절대적, 궁극적인 것인데 인간의 인지능력과 언어는 유한하고 상대적이니까요. 노자(老子)가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통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인간의 인지능력 안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교리와 경전이라는 수단이 동원됩니다. 따라서 종교 자체나 그 교리 및 경전은 어디까지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매개체이지,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특히 교리와 경전은 무한한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표현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지식과 통찰력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종교인들은, ‘불완전하게나마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교리와 경전을 ‘진리 그 자체’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와 기존 교리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진영에서 주로 이러한 왜곡된 신앙행태가 나타나 왔고, 다른 종교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 종교를 절대화하는 행태를 보이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를 비롯한 비(非)근본주의적 신앙인들 역시, 성서의 내용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성서는 과거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신앙관을 정립해 왔는지를 알려 주고,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체계를 유지시켜 주었으며,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귀중한 책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일차적 차원에서는 어디까지나 ‘계시에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해석의 결과물’이며 결코 ‘계시 그 자체’는 아닙니다.
성서는 하늘에서 어느 날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문화적 여건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의 체험과 사고의 틀을 토대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서술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내용은 기록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지식과 의식 수준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 내용은 과학적 ·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각 구절의 내용이 상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교 반대자를 자처하며 ‘성서 내용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엉터리인지 증명해 보겠다’라는 취지의 글을 인터넷에 열심히 올리는 사람들이나, ‘성서가 왜 문자적으로 정확한지 증명하겠다’라는 취지의 반박을 하는 신자들이나 이러한 측면에서 공통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 근본주의적 개신교의 성서관이 마치 그리스도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성서관인 것처럼 오해된 데에서 비롯됩니다.
근본주의적 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성서 내용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실이라야 한다’라는 강박관념과 ‘우리와 똑같이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라는 식의 배타성입니다. 이들의 관념 하에서는 성서가 가치를 가지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신 것과 같은 것’이어야 하고, 만약 그 내용 중 한 부분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사실’과 같지 않다면 성서 전체의 권위,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신뢰성 자체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 반대자들조차 성서 내용에 대하여 그렇게밖에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성서의 내용 중 실제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닌 구절이 있거나 각 구절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은 그러한 유치한 공격에, 역시 유치한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죠.
성서의 내용 중 신화적 모티브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 많다는 점 역시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종교적 언어에 공통되는 현상이며, 결코 그러한 이유로 성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서가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성서 내용 중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 있다는 사실과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종교학자로 평가받는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신화와 현실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그 둘은 함께 진행된다. 신화는 궁극적으로 실재를 말해 주고 있으며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도 진실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조직신학자였던 파울 틸리히는 '종교적 언어에 있어서 신화는 유일한 표현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종교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그러한 종교적 언어의 표현수단으로서의 신화를 ‘무가치한 거짓’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현대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려 드리기 위하여, 윌리엄 페이든(William E. Paden)의 저서 『종교의 세계』(Religious worlds : the comparative study of religion)의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이 책은 저자의 독창적이고 특별한 학문적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종교학의 정설을 일반인들에게 난해하지 않게 설명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 다르다. 과학적 담론은 객관성을 열망하지만 종교적 상징은 본질적으로 참여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지닌다. 종교적 체계는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하는 위대한 근원적인 힘에 관한 권위 있는 설명에 항상 근거하고 있다. 종교인은 이러한 설명들을 우주에 대한 단순한 시적 사변이나 합리주의적 사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을 인도하는 성스러운 언어와 모델로 받아들인다. 종교적 삶은 항상 이러한 모델들의 진리를 추구하며 이러한 진리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와 대상을 향한다. 여기서 그러한 근본적 원형들 - 구전 문학의 성스러운 이야기 속에 구현되어 있든 역사적 종교의 경전 속에 구현되어 있건 -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고유한 언어가 바로 신화(myth)이다.」
「현대의 일상 회화에서 신화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이야기와 자주 관련되어 사용된다. ‘인종적 우월성의 신화’라든지 ‘암에 관한 10가지 신화’ 등의 표현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학은 신화라는 말에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살아 있는 종교적 전통 안에서 신화적 언어가 행하고 있는 현실적 기능 때문이다.」
「종교는 신화적 언어에 근거해 있다. 신화적 언어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은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힘과 원리 그리고 세계의 토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신화적 언어는 근원적 성격을 가진 언어인 것이다. 신화는 중립적이고 수학적인 객관성을 전달하는 매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재창조하는 궁극적인 힘을 설명하는 분명한 목소리이다. 즉, 신화는 원형적 사건 - 창조, 부활, 붓다의 깨달음 같은 - 과 원형적 존재와 원형적 가르침 - 이후의 모든 종교적 삶의 기준이 되는 - 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목소리이다.」
「살아 있는 종교의 텍스트와 프로그램은 외부자에게는 허구에 불과하지만 내부자에게는 신화이다. 바이블 전통의 문화에서 경전은 신화이며 신은 신화적인 언어 자체이다.」
「신화는 전례(前例)와 규범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삶을 재창조하고 변형시킨다. 예를 들면, 신에 대한 신앙 - 신은 신화의 살아 있는 부분이다 - 은 그러한 신앙이 없는 경우와는 매우 다른 일상적 삶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화는 바이블 전통에 속하지 않는 종교들에게만 적용되는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에 적용될 수 있는 범주이다. 과학의 언어와 달리 모든 종교적 언어는 신화적이다.」
Paden, William, 이진구 역,『종교의 세계』(파주 : 청년사, 2004), pp. 97~104에서 발췌
불교와 힌두교 등의 전승과 경전은 매우 많은 부분이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문자적 정확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야훼 신앙에 기반을 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역시 신화를 종교적 언어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해 왔으며, 이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근대 이후 종교적 언어로서의 신화가 갖는 이러한 특성이 재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전승을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측면에서 옹호하는 데에 집착하는 무지몽매한 행태를 보이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주로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에서 이러한 행태가 나타났는데,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미국에서도 소수파인 이 근본주의 신학이 유독 철저하게 이식되었습니다.
그 결과, 근본주의자들은 ‘다니엘서와 에스더서는 일종의 문학작품이다’, ‘창세기는 기본적으로 신화적 전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등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이 내린 결론을 ‘성서는 거짓이다’라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이 절대다수인 한국 개신교계의 특성 때문에, 한국에서는 기독교 비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성서의 내용 중 신화나 문학작품의 성격을 가진 부분이 있고 성서 각 구절의 내용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성서는 거짓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성서는 일차적 의미에서는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과 해석의 결과물’이지 결코 ‘계시 그 자체’는 아닙니다. 따라서 성서는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을 반영하고 있으며, 성서는 다른 종교의 전승 및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상당부분이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성서라는 경전의 내용을 절대시하고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민족 종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타종교는 사탄숭배 내지 사탄의 흉계이다’, ‘비(非)기독교인은 내세에 지옥에 가게 된다’라는 관념은 절대성을 갖는 도그마(dogma)입니다. 그 도그마를 절대시하는 관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이상 종교 간의 화합은 요원합니다.
‘구원’에 관한 근본주의자들의 관념 역시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의미를 ‘내세에 지옥이 아닌 천당에 가는 것’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보통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영적 구원’보다는 ‘역사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고 이 땅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복음화’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관점 역시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관에서는 복음화를 ‘비(非)기독교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정의해 왔고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관념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현대신학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는 복음화는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삶의 방식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종 강요는 더 이상 복음화의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6)」,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등의 성서 구절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교리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내용 역시 상대적인 것이며, 성서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계시에 대한 기록자 나름대로의 증언과 해석의 결과물’이며 결코 ‘계시 그 자체’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구절들은,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의 ‘고백’의 표현입니다. 또한, 설령 이 구절들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의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은 사탄의 미혹에 빠진 것이며 내세에 지옥으로 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이없는 비약임을 쉽게 알 수 있죠.
현대의 신학자들은, 서기 1세기의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선포했던 메시지는 “이제 나를 신으로 숭배하는 기독교라는 새 종교를 창설했으니 이 종교의 신자가 되어야만 내세의 구원이 보장된다”라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 하층민 출신이었던 예수는, 오히려 유대교 영성의 틀을 기반으로 진리를 새로이 통찰하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해야 할 것임을 선포하는 자였던 것이죠. 그런데 점차 헬라(그리스) 사상의 ‘로고스(Logos)’관념이라는 틀 안에서 복음이 재해석되고 ‘선포하는 자’였던 예수가 ‘선포의 대상’이 되면서, 기독교의 성격이 예수를 ‘따르는’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교가 되어 간 것이죠. 물론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는 애당초 실수로 잘못 태어난 종교이다’라는 식의 유치한 주장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창세기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지구 역사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 것, 노아 시대에 실제로 온 지구상을 물이 뒤덮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따위의 일에 집착하는 것,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개인적 입장은, 예수를 ‘신’으로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길을 추구하고, 그를 통하여 진리를 발견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봅니다. 저는 특정한 종교만이 진리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든 불교나 이슬람교든, 완전무결하지는 않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종교에는 진리가 없다는 식의 오만하고 편협한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진리의 생명수만으로도 충분히 목을 적셔 왔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신자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종교’에서 ‘예수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그가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집착하여 ‘타종교인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겠다’라는 목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기보다 타종교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 땅 위에서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기존 교리에 대한 맹종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행태가 사라질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제 답변 내용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시거나 의견을 제시하고 싶으신 분들은 쪽지나 메일을 통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의 저서 『성경을 해방시켜라(Rescuing the Bible from fundamentalism)』와 오강남 교수의 저서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에서 한 부분씩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경험을 설명하는 것을 우리 시대를 포함한 어느 특정 시대의 언어 속에 동결시키는 것은, 마침내 그 경험의 진실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 세대는 다른 세대의 언어나 개념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는 마치 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싸움을 자원했던 다윗의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것과 같다. 그 당시의 전사들은 그들이 친숙하게 입어 온 그 전 세대들의 갑옷을 다윗에게도 입혀 주려고 했다. 그들의 전투 형식의 부담에 짓눌려서 움직일 수 없게 된 다윗은, 자기 방식대로 할 수 있게 되지 전까지는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오늘의 기독교 신학이라는 것은 다윗이 그의 세계의 현실에 부딪치려고 나아가고자 할 때 어른들이 그에게 입혀 주려고 했던 구시대의 갑옷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는 단순히 갑옷 또는 신학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그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한 시대를 위하여서는, 매우 훌륭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그들 시대의 논쟁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또 어떻게 그들의 살아 있는 범주를 활용하여 진리를 이해하려고 했는가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우리는 고대인들의 진리 이해방식을 우리들의 정신을 옥죄는 족쇄로 삼을 수 없다.』
『나 또한, 우리의 종교적 전통을 제도화하였기에 그 전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만약 우리의 경험을 서술한 성경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우리의 공통된 전승을 집약한 신조가 없었더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오래 전에 이미 지구상에서 소멸하였을 것이다. 내가 논쟁하려 하는 바는 성경이나 신조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도구들을 시간 속에 동결시켜 버리는 일, 그리하여 성경이나 신조들이 그것들을 만들어낸 당시의 주관성과는 무관하다는 가정에 대하여 논쟁하려는 것이다. 성경이나 신조는 진리를 향한 창문일 뿐이며, 그것들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에서 정립한 귀중한 작품들이다. 그것들은 진리를 위한 매개변수(parameter)를 제시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매개변수를 진지하게 다루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성경이든 신조든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어찌어찌하여 객관적인 진리가 인간의 언어들 속에 잡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해의 장벽을 넘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성경이나 신조들이 동터오는 21세기의 존경받는 진리의 원천 혹은 생생한 선택이 될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Spong, John Shelby, 한성수 역, ,『성경을 해방시켜라』(서울 :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pp. 318~320에서 발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특정 시기에 특정한 필요성에 따라 채택한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을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믿는 것, 예수님을 따라 믿는 것, 예수님처럼 믿는 것,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같이(Christ-like)'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도 인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삶에서 승리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를 따라가는 것, 그리하여, 그가 실존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자유의 세계를 향해 나가겠다는 마음이 그 핵심이라고 본다.』
오강남,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서울 : 현암사, 2002), p. 165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