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통/인문·예술·종교·철학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모음 - 불교평론, 법보신문 연재

우공(友空) 2015. 10. 17. 20:57

 

 

 

밑줄, 강조는 내가 ....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 / 황순일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황순일 sihwang@dgu.edu

1. 논쟁의 시작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많은 중요한 교리적 논쟁들이 단순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기불교의 시원론(始原論) 논쟁 또한 일종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2009년 권오민 교수는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 게재된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이란 논문에서 불설·비불설 논쟁이 부파와 대승 사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있었던 논쟁이었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통해서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친설을 기준으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함경과 니까야(nikāya) 또한 불설일 수 없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했다.

빠알리 니까야를 예로 들어보자. 빠알리 삼장은 오랜 구전 기간을 거친 후 기원 전후에 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빠알리 삼장이 남아 있는 초기경전들 중에서 유일하게 경·율·논의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고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빠알리 삼장이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친설을 가감 없이 기록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AD 4~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붓다고사(Buddhaghosa)의 활동 시기까지도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해서 첨가되었고,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된 흔적들이 빠알리 삼장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빠알리 경전은 300~400여 년간의 구전 시기를 거치고 400여 년간의 문자화 및 수정 시기를 거친 800여 년이란 장구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 경전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는 친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초기경전을 대승경전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해온 초기불교 중심주의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빠알리 경전을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연구해온 많은 학자를 치열한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 이 논쟁은 교계 신문인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대론(對論)의 형식으로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치열하고 치밀한 학문적 토론이 단순히 학자들 사이의 사변적 토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불자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불설·비불설 논쟁은 불교 토론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초기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논쟁의 쟁점

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원음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아련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이래 많은 불자들이 이러한 희망 속에서 남방불교의 빠알리 경전들을 접하게 되었고 남방 위빠사나(vippasana) 명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빠알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에서 출판된 빠알리 삼장(Pali tipitaka)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빠알리 삼장을 유지하고 보존해온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는 초기불교의 연장선 위에서 받아들여졌다. 당시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인도어 원전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연구를 중시하는 태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반대급부로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 대승비불설이 폭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도도한 초기불교 중심주의적 흐름 앞에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기초한 한국불교는 점차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사실상 권오민 교수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라는 인도 북서부의 부파불교 논서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초기불교 중심주의적 흐름에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권오민 교수 또한 넓은 의미에서 초기불교 전공자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왜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가 대승불설론을 옹호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승불교에 의해 혹독하게 비판되었던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문헌을 연구하면서 오히려 대승불교의 입장을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대승비불설이란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이며 교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진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북서인도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실례를 보여주면서 초기경전이 각 부파의 교학적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때론 불설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편찬된 경전들로 대승경전의 편찬방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는 친설을 잣대로 한다면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초기경전도 동일하게 비불설일 수밖에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서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대승경전과 다른 초기경전의 특성을 바탕으로 신문지면을 통해 반박했다. 스리랑카에서 공부했던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을 후대에 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담긴 빠알리 니까야와 다르며, 초기경전이 가감과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원래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는 원조 논쟁을 통해서 대승경전이 부파불교를 ‘비구의 복색을 한 악마’라고 비난하고 있음에도 남방 테라와다 교단을 비롯한 부파불교 쪽에서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한 전통의 입장에서 대승경전의 주장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빠알리 삼장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며, 빠알리 경전은 지난 2,500년간 단일 부파에서 계승해 온 정통성이 있는 경전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남방 테라와다 교단을 ‘장로들의 정교(正敎)’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불멸 직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본결집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보고 있다. 사실상 남방불교 교단은 스스로를 ‘붓다의 적자’로 생각하고 있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으며, 파승으로 떨어져 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른 부파들과 결코 동일한 선상에서 보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남방 테라와다의 전통이 고수되었으며 빠알리 삼장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마성 스님의 반론에 대해 권오민 교수는 특정한 부파에 의해 승인된 경전은 특정한 부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전일 뿐이며 붓다의 친설이 담겨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했다. 그는 남방 테라와다 교단이 그토록 자랑하는 근본결집에 대해서 북서인도의 유명한 논사인 세친, 청변, 중현 등이 이미 산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근본결집에서 송출된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문자로 작성되기까지 30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 전승한 빠알리 삼장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라는 것은 맹목적이고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으로, 객관적이고 타당한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전재성 회장은 마성 스님이 대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에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쇼까 왕의 깔껏따 바이랏(Calcutta-Bairāṭ) 비문에 나타난 몇몇 경전의 명칭들과 빠알리 삼장의 연관관계를 살펴보면서 남방 테라와다 교단의 정통성에 관련된 까타왓투(Kathāvatthu)의 제3결집과 관련된 언급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알리 경전의 완성은 일종의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수평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초기경전은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고층에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겨 있고 신층에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여러 후대 부처님들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결론지었다.

권오민 교수는 여기에 대해서 인도불교의 다양성을 언급하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전승만이 불설 또는 친설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전의 성립과 관련해서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 밧지 족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 아쇼까 왕 시대 목갈리뿟따 띳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남방과 북방의 분파에 대한 전승들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이 문제가 이렇게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제3결집과 관련해서 아쇼까 왕의 권위를 내세우는 부분에 대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역사서에 나타난 내용이 학계에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 또한 이 논쟁에 끼어들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사이에는 전승의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빠알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구전 전통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 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지적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기간 동안 합송을 통해 개인적 견해가 들어가기 어렵고 변형이 쉽지 않은 구조를 지니면서 전승되었다면, 후자는 개개인이 홀로 사경하는 것으로서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지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점차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번잡해져 버렸지만, 초기경전의 어디엔가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권오민 교수는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설일체유부의 논사 중현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여러 부파들 사이에서 각자가 전승한 경이 다를 경우 어떻게 진짜 불설을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불설·비불설 논쟁이 부파불교 교단들 사이에서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마련된 것이 불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서 대승·소승 모두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는데 그것은 붓다의 교법을 관통하는 정신으로서 법성이 불설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의 시대적 도식화를 비판하면서 부파불교와 구분되는 독립된 실체로서 대승불교를 보기 어렵다는 점을 일본과 서구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하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어서 다양성의 시대에 하나의 진리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을 또한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3. 논쟁의 결과

한국에서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서구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문헌학적 분석과 인도 대륙의 북서부 산악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불교 문헌들의 영향으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그동안 누려왔던 독점적인 지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불교권에서 빠알리어는 마가다어(Magadhi)로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이자 친설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아쇼까 비문·석주와 빠알리어의 문헌학적 비교연구를 통해서 빠알리어는 붓다가 활동했던 인도 동부지역의 동부방언(Eastern Prakrit)이 가지는 언어적 특징보다 인도 중서부 지역의 서부방언(Western Prakrit)적 요소들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또한 네팔과 인도 중남부 지역에 발견된 몇 장의 패엽경과 금석문들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빠알리어 경전들은 17세기 이후에 동남아시아 불교의 영향하에 새롭게 필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원전 2세기까지 연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간다라 불교문헌들의 발견은 초기불교 학자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록 북서인도에서 발견되는 불교문헌들은 빠알리 삼장과 같이 단일하고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코탄 간다리 《담마빠다(Dhammapada)》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된 근본설일체유부(Mūlasarvāstivāda) 장아함경(Dīrgha āgama) 등과 같이 거의 완전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사실상 이러한 일련의 흐름의 통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현존하는 경전들 중에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누려왔던 독점적인 지위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사실상 국내에서 벌어진 불설·비불설 논쟁은 한국적인 형태로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가지는 권위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로 간주될 수 없다면 동일한 논리로 남방 초기경전도 또한 붓다의 친설로 간주될 수 없다는 언급을 통해서 대승경전과 빠알리 경전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되었다. 그리고 몇몇 초기불교 학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다른 경전들에 비해서 더 높은 권위와 정통성을 가진다는 결정적인 논거는 도출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방대하고 번잡한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가르침 즉 친설을 가려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빠알리 삼장은 많은 장점과 함께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빠알리 삼장은 구전 기간 동안 합송이라는 자체적인 정화장치를 통해서 오류와 변형이 최소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문자화 이래 붓다고사가 현재의 형태로 빠알리 삼장을 가다듬고 주석서를 번역하는 5세기까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정되고 보완된 빠알리 삼장이 단계적으로 미얀마와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로 전해졌고 그곳에서 또다시 심각한 형태적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 이후 스리랑카의 빠알리 삼장이 1500년경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불교전통의 쇠약과 함께 거의 사라지게 되자, 1750년경 태국으로부터 빠알리 삼장이 스리랑카로 역수입된다. 현존하는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은 이렇게 역수입된 태국과 미얀마의 빠알리 경전을 다시 필사한 것으로서 스리랑카의 단일한 전통에서 중단 없이 보존해온 경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현존하는 빠알리 삼장이 수천 년에 걸친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단계적인 가감과 변형 그리고 일정한 단절을 겪었던 빠알리 경전에서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인 친설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반성이 이 논쟁을 통해서 확인된 것이다.  

4. 논쟁의 추가적 해명

불설·비불설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권오민 교수, 마성 스님, 전재성 회장이 가지는 입장의 차이는 이들의 주장에 바탕이 되는 각각의 부파들이 초기경전에 관해 가지는 태도를 통해서도 확실하게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로 대표되는 북서인도 부파들의 초기경전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와수반두(Vasubandhu)는 자신의 성업론(Karmasiddhiprakaraṇa)에서 석궤론(Vyākhyāyukti)를 언급하며 근본결집이 이미 파괴되었다(mūlasaṃgītibhraṃśa)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북서인도의 부파불교 전통에서 경·율·논의 형성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근본결집(mūlasaṃgīti)의 내용이 더 이상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북서인도의 몇몇 부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 스리랑카의 불교교단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빠알리 삼장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마하위하라는 스스로를 테라와다로 칭하면서 자신들은 거대한 니그로다나무와 같고 나머지 부파들은 니그로다나무에 생겨난 가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이자 친설을 오직 자신들만이 빠알리 삼장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마하위하라 전통에 있어서 근본결집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빠알리 삼장이 바로 근본결집이고 근본결집이 바로 빠알리 삼장이 된다. 사실상 마하위하라의 존재 이유가 자신들이 보존하고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삼장에 있는 것이다.

붓다고사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5세기, 마하위하라는 아와야기리(Abhayagiri)와 제타와나(Jetavana)라는 부파들과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마하위하라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경전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아비담마(abhi-dhamma) 교리체계를 재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실상 붓다고사는 마하위하라의 빠알리 아비담마 논서들을 붓다의 가르침에 포함시켜 다른 부파들의 논서에 대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붓다고사가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에 의해 경·율·논의 체계가 갖추어진 빠알리 삼장을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붓다고사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는 스리랑카의 가장 보수적인 교단이었던 마하위하라의 수계전통과 이들에 의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보존되어온 빠알리 삼장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랑카중심주의적 태도(Lanka Centric attitude)를 키우게 된다. 이들에게 남방 테라와다 불교는 초기불교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붓다 당시의 불교가 거의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의 진정한 의의는 마하위하라로 알려진 스리랑카의 가장 보수적인 교단이 1,500년에 걸친 장기간의 노력을 통해 치밀하게 만들어온 빠알리 삼장의 권위와 정통성이란 체면으로부터 한국불교가 깨어나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논쟁의 의의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은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서 두 달 넘게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사변적인 담론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다양한 문헌들과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풍부한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분량이 제한된 신문의 지면을 통해 논쟁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다. 또한 서로가 상대방의 주장을 정면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주제에 대한 논박은 논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신문의 댓글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측면은 불교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비쳤으며 불교계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학계에는 새로운 바람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 논쟁은 당시 학계와 불교계에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의 빠알리 삼장(Pali tipiṭaka)의 대한 연구와 위빠사나 수행이 널리 확산되는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시대적 당면과제를 재검토할 수 있는 단초를 흥미진진하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상 이 논쟁은 난해하고 방대하며 접근이 어려웠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번역한 권오민 교수의 학문적인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치밀하고 학문적인 태도는 불설의 기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가진 함의를 이해하기 쉬운 용어들로 풀어내고 있으며 풍부한 원전자료의 인용과 날카로운 비판적 논의를 통해 한국불교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

 

황순일 /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영국 옥스포드대 졸업(박사). 태국 출라롱콘대, 카자흐스탄 알파라비 국립대학 교환교수와 일본 사이타마대학 객원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무기설을 통해본 무여열반의 의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개념과 명칭〉 등이 있고,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 The Doctrinal History of nirvana, Sermon of one Hundred Days: Part one 등이 있다.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 이홍구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이홍구 dagamsa27@hanmail.net

1. 머리말

 

   

이홍구
동국대 강의교수

 

현대 한국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크게 3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제1기에 해당하는 박경준의 논쟁은 대승불교 흥기 배경과 인도와 중국, 근대 일본의 대승(大乘) 불설·비불설론 논쟁의 대두와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과 저술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대승경전관의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2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흐름은 김용표가 〈법보신문〉 647호에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제2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에 대한 논쟁, 대승불교의 기복신앙, 대승 위경설에 대한 관점 차이,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 한국불교의 정체성 등이었다. 제2기 논쟁에서 홍사성, 마성 스님, 조준호, 전재성 등은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으며 김용표, 진현종, 김성철, 주명철 등은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나름대로 대승불교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논쟁의 주제가 너무나 큰 담론이고 논쟁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의 부재와 논쟁의 장이 교계 주간지라는 제약적인 한계로 더 큰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셋째, 제3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은 권오민이 〈법보신문〉 1008호에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탓”이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법성[진실]에 의지할 것을 전제로,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제3기 권오민이 촉발한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정법 기준에 대한 논쟁, 불설·비불설에 대한 관점 논쟁, 제 부파불교의 불설·비불설 논쟁, 대·소승 간의 불설·비불설 문제,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논쟁 등이었다.

권오민이 아함과 니까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주장에 대해 친설론을 가지고 반대하는 마성, 전재성, 황순일 등과 앞의 관점과는 별개의 입장에서 논평하는 조성택, 조인숙, 안성두, 이영철 등의 의미 있는 글들이 있었다. 이 논쟁과 논평은 불교학계에서 보기 드문 이변의 논쟁이었으며, 학자의 범위를 넘어 불교 일반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권오민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문의 본래 여러 주제와는 상관없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친설·비친설론으로 변질되어 종파적 입장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1기부터 3기까지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이 결국은 21세기의 새로운 교판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역할을 위해 필요한 접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주제, 범위, 방법 등에 많은 구체적 접근이 결여된 것이 아쉽다. 즉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의 핵심은 첫째, 불설·비불설 논쟁에서 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 교학과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에 대해 불교 신행의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1)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고래로 불교의 제 경론을 그 뜻이 불완전한 것[不了義]과 완전한 것[了義], 은밀한 것[密義]과 분명한 것[顯了], 나아가 방편설(方便說)과 구경설(究竟說) 등으로 분별하게 되었고 급기야 후자로 해석된 경전에 근거하여 불교교파나 종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불교사상사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이러한 불설·비불설의 문제의 흐름에 대해 김호성은 반복사관(反復史觀), 퇴보사관(退步史觀), 발달사관(發達史觀)으로 분류한다.

즉 퇴보사관은 초기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발달사관은 대승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반복사관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동등한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종파적 견해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마성 스님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퇴보사관적 관점에서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이다.”라고 한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성 스님의 이와 같은 관점에 대해 김성철은 발달사관적 입장에서 “대승불전이 설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리는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과 같은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퇴보사관이나 발달사관과는 달리 권오민은 “대·소승 경전 또한 모두 불설을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으로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하면서 문헌적 사료와 경전 형성의 역사적 한계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오민의 이러한 주장은 반복사관적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3가지 다른 관점에 대해 제1기부터 제3기까지의 학문적 접근방법을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경전해석학적 접근, 양 접근으로 구분하기가 애매한 경우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이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근대불교학적 관점으로 합리주의(rationalism) 사상과 실증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2)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까야 또한 비불설이라고 하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라 보면서,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오민은 마성 스님의 비평을 학문보다 상식에 기댄 것이라 비판하면서 아함과 니까야에 대해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상좌부에 대한 정통성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마성 스님의 주장에 대해 상좌부가 전승한 니까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은 사대주의라고 논평했다.

전재성은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을 토대로 아함과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로서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라고 논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권오민은 전재성의 논리 근거인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고층/신층의 문제를 서로 개입시키는 것은 전혀 엉뚱하다고 보았다. 뒤이어 황순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제를 놓고,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권오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지만 양 경전은 편찬 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 전통에서 왜 전문 암송 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다양성의 시대에 법성의 획일적 사유, 교조적 획일화, 믿음의 한계 등에 대해 지적하며 현대의 새로운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3)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

〈법보신문〉 648호에서 홍사성은 김용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대승의 다신적 신앙은 불설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김용표의 주장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대승불교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셋째는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 시대에 제시된 관음·정토·지장·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뒤이어 〈법보신문〉 649호에서 진현종은 부처님 친설 고집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초기불교의 이성-합리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성 스님은 역사적 붓다를 외면하면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대승불교의 포용과 관용성 때문에 순수불교가 갈수록 희석되고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는 한국불교는 타락한 대승불교라고 지적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해 ‘대승 옷 입은 힌두교’라고까지 신랄하게 지적했다.

김성철은 홍사성과 마성 스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기복-다불 사상도 엄연한 불교이고, 초기불교의 논리가 대승으로 귀결되었으며, 대기설법 정신이 새 사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 보았다. 조준호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 대승이 아니며, 기복을 대승이라고 보는 김성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고, 기복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다만 기복에서 작복으로 지향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전재성은 대승경전이 무상, 고, 무아의 니까야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정신을 계승한다고 보면서 대승을 비불교로 보는 것은 역사·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주명철은 대승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석존 정신에 충실한 재해석이라고 전제하고 대승유신론의 폄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대승의 여래 또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김호성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과거7불’의 존재를 소개하고, 이러한 ‘과거7불’ 사상은 고타마 붓다라는 일불(一佛)에서만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의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3.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

1)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부정하고, 상좌부 아가마와 니까야만이 친설이자 정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승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두 가지 전개 방향을 설명한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는 앞에서 설명했고,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 반해 현대학자들의 경전해석학에서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에서 발로하였지만, 그 가르침을 각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 온 노력의 역사적 총체로 보는 관점이다. 먼저, 박경준은 친설론과 정법론에 대해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을 토대로 종파와 교판적 관점을 벗어난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붓다보다도 진리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경전의 권위는 ‘붓다의 직설(直說)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대승열반경》에서는 “사람과 말과 식(識)과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과 뜻[義]과 지혜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친설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법론의 의미에 대해 사람[人]의 종파적 입장이 아니고 불법 자체의 관점, 말[語]의 언어적 입장이 아니라 의미론적 관점, 식별적 입장이 아니라 지혜의 관점, 불료의적 입장이 아니라 요의(了義)로 판단된 경의 진실의(眞實義) 관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권오민은 불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는 원래 4대교법이었지만 그들은 여기에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이다”는 말을 더하여 수정하였고 나중에 다시 이를 근거로 “4의[依: 人·語·識·不了義]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에 의지하라”를 추가하였다고 설명했다. 즉 이 4가지를 통합하여 갖춘 것이 법성을 갖춘 것으로 불설 편찬의 근거는 불설이 아니라 법성이라고 하였다.

2)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이후로 승가와 재가는 시대에 따라 불교 신행의 정체성 내지 이상적인 신행 행태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대·소승의 유부, 경량부(성실론), 중관, 유식 계통의 논서가 표면의 학설은 달리하였지만 불설의 정의에 관한 한 정확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먼저 신행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확고한 이해의 기반 위에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한 적극적인 대응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신행활동을 강조하는 종단의 소아적인 발상이나 이익집단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들의 신행생활은 타파되어야 한다. 결국 불교 학문을 토대로 하는 신행 시스템 구축은 불교 고래의 그리고 불교 본연의 자리이타 지향적인 교리를 구현하는 자발적인 믿음과 수행을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학자 가운데 한 명인 김용표는 대승경전의 본성에 대한 해석학적 탐색을 기초로 하여 현대 불교를 위한 창조적 대승해석학의 방향을 사상의 역사성 문제, 경전적 진리의 상황과 맥락적 진리(contextual truth) 성격, 무한히 열린 자유로운 해석 정신[불의 四種釋義]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특히, 진리란 세간의 전통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간 언어의 형태로 나타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론의 해석도 언제나 현대 서양해석학에서 말하는 선이해(先理解)와 일련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에 조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호성은 대승경전에는 신화적·설화적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성적인 초기경전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로 반박하였다.

① 연기이므로 허(虛)이고 실(實)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가공의 형식-예술적 형식-을 통해서 더욱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보인다는 점에서 대승경전은 미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詩) 〈그림자 극〉을 통해서 말해보았다. ②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현실의 이야기는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가공의 이야기는 불변의 것으로서 더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와 실이 서로 역전될 수 있음을 다시 시 〈드라마〉와 〈극락에서 온 메일〉을 통해서 중송(重頌)해 보았다. 시로 말한 것 역시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즉 대승경전의 신화적/설화적 가공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는 실로 초기경전의 교설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인해서 그 세계는 실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3)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

원래 경(經)의 원어(原語)인 Sūtra는 동사 siv 또는 sīv(꿰매다의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실, 끈, 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위로는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꿰고[貴穿] 아래로는 중생(의 고통과 미망)을 거둔다는[攝持] 것이 경의 ‘근본 기능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상류층의 언어인 베다(Veda)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족어(民族語)로 전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초기불교가 친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언어 인식과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되어 중생들의 개아적 언어 인식과 한없는 거리와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법[진리]을 자각게 하려고 했을 뿐이지 자신의 말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박경준은 “본래가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고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 오기도 한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하여,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호성은 철학적, 해석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4가지 다른 관점에서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를 논증하고 있다. 첫째, 초기경전은 저자가 있고 대승경전은 저자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저자의 표기에 의해서 저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유명사를 실체의 드러남으로 바라보는 미망일 뿐이며, 초기경전의 내용 즉 연기의 관점에 서게 되면 고유명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둘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대승경전을 제작해서 후대에 많은 평지풍파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이데거-가다머 사제(師弟)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보르헤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를 살펴봄으로써 전 주장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함/니까야를 똑같이 베낀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공간의 컨텍스트가 반영되어서 이해될 수밖에 없으므로, 아함/니까야와는 다른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다르게 이해된 의미의 생성을 문자화(文字化)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의 제작은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셋째, 대승경전을 불설이라 칭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보르헤스의 또 다른 소설 〈틀뢴, 우크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전거로 내세워 “모든 책은 익명이며, 오직 한 사람의 저술”이라는 점을 말하였다. 넷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스스로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붓다의 권위를 빌려서 그 책의 권위를 넓히고 자설(自說)을 좀 더 쉽게 널리 펼치기 위한 사욕(私慾)에서였다는 주장에 대해 심성사적(心性史的) 방법론과 ‘정황증거’를 가지고 논박하였다.

4.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

1)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

앞에서 언급했던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화엄에서는 언어인식적 관점으로 3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첫째, 법(法)과 의(義)에서 법 자체의 언어론과 의미론적 입장에 대해 상입(相入)의 무아론적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무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중문(中門)의 상호포섭적 관계로 능구(能具)와 소구(所具)처럼 명칭[名稱: 言說]과 내포[內包: 意義] 간의 상호 주관적인 관계[否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무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상호 경합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의의를 가지고 언설을 삼으므로 언설이 의의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언설이 언설이 아니다. 내포도 언설로써 의의를 삼으므로 의의가 언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의의가 의의가 아니다.
둘째, 지(智)와 요의(了義)에서 지란 자신의 아뢰야식에 의거한 알음알이를 지양하고 지혜로 보는 개인적 깨달음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하면 요의는 깨달음 자체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 상즉(相卽)의 중도론적(中道論的)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언어적 표현과 깨달음의 중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즉문(卽門)의 상호 환원적 관계로 근본[根本: 깨달음]과 지말[枝末: 언어] 간의 상즉인 관계[肯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중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근본과 지말의 상호 협력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지말은 오증(悟證)된 의의(意義)가 언어에 속한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설명한 것이다. 근본도 언설이 오증(悟證)의 표상(表象)에 속한 것으로 작용하면서도 늘 고요하고, 설명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언어 매개를 통한 자비 실행이 교분(敎分)의 입장이라면, 언어가 단절되고 증득해서 얻는 경지가 증분(證分)의 입장이다. 하지만 증분의 침묵은 중생에게 들리지 않고, 교분의 언어는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의 의미를 담고 표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제불보살의 대자비 본원력의 바탕이 되는 부주중도적(不住中道的) 언어는 중생들의 눈높이에 따라 침묵과 언어가 공존하는 언어표현이다. 즉 연기분과 증분의 관계에서 언어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가 드러난 것이 부주중도의 언어인식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가 친설이고, 대승불교가 불법이라고 하면 친설은 일(一)이자 증분, 법설은 다(多)이자 교분이 되어 상입상즉의 원융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

2) 학제간 연구와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현시대까지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소승과 대승, 상종(相宗)과 성종(性宗), 교종과 선종 등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거나 다만 어느 일방에 의한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방편(方便)과 구경(究竟)의 관계로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서로 간의 허심탄회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권 자체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방법도 좋겠지만, 초기불교의 가치와 대승불교 및 대승경전관 및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논쟁의 방향 설정을 위해 학제간 연구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학제간 연구에는 다양한 분과가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화엄원융의 3가지 언어인식적 관점을 바탕으로 3가지 접근을 제안한다. 첫째, 4대교법 가운데 법과 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심리언어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인지과학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신경·심리언어학의 접근법에서는 1968년 초개인심리학 이전의 서양철학과 서구심리학의 개아를 강화하는 언어인식의 심리언어학적 의미를 평가한다. 그리고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 제공을 위해 유식불교의 12연기 언어인식 메커니즘과 무아의 정문훈습을 통한 제8식의 변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아와 무아의 의식 및 무의식의 관점에서 언어인식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성과 한계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둘째, 4대교법 가운데 지와 요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통합적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통합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는 서양과학의 심리학과 동양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불교학의 만남이자 진정한 융합을 시도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통합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각 층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한국불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접근할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즉 인간존재의 구성 요소인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1차원적 상호침투의 이질적 등계층의 홀로그래프적 언어인식, 다차원적 상호침투의 홀로키적 온우주론의 언어인식, 절대정신 등이 중요한 테마이다. 1차원적 상호침투는 화엄의 상입, 다차원적 상호침투는 상즉, 절대정신은 법성과의 비교고찰이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4대교법을 아우르는 법성의 현시대적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집단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과학철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왜냐하면 현시대에 경험주의적 과학지상주의자와 유물론적 실증주의자의 전통 경험과학적 진리관이 일반인들을 혼미하게 오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 정체성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제간 연구 가운데 하나인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ofscience)은 과학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철학과 과학을 대비해 생각해볼 때 몇 가지 점에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

3)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필요성 제기

오늘날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에 대한 통합시각을 제안하고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개념 설정을 위해 신행(信行)의 의미를 교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고, 신행의 관점에서 교학을 평가할 수도 있으며, 양쪽 모두 동등한 가치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서 제기되는 ‘신행’ 관련 논의의 틀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서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의 속성으로 야기되는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에 대한 불교 신행의 역할과 역량 정립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유용한 접근이 문화(심리)학이 될 수 있다. 원래 문화학이 발생한 의의는 개별 학문들로부터 나온 개별사건들을 다시각적 관점에서 네트워킹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는 초과학적 프로그램으로 학문들 간, 학문과 실천 간을 연결하는 지평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문화학의 한 범주로서 ‘믿음과 실천’의 연구목적은 ‘문화적 지향’의 인문철학으로서 불교학에서 자신의 학문영역과 이론적 태도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전체’ 속에서 ‘믿음과 실천’의 의미를 추구하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을 위한 방향타의 구실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란 좁은 의미로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불교란 “석존을 개조로 하여 열반 혹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최고 구극의 가치 또는 목적으로 하고, 그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문화의 종합적 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문화로써 존재하고 문화로써 표현되며, 문화로써 기능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불교문화’라는 프리즘은 현대 신행생활의 기본방향으로 첫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자리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개인수행 및 정신건강의 측면과 종교 의례문화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그리고 둘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이타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사회적·역사적·철학적·교육적·예술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여기서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정신수양과 종교적 행위의 특수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며,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사회실천 행위의 보편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5. 맺음말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 역사학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철학적, 해석학적, 종교체험과 신행적 접근 등을 통한 선행연구들이 있었다. 대승불교(경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의 논쟁을 주제별로 보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불설·비불설,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개념 정의와 범위 설정, 초기경전과 대승경전과의 관계, 대승불교(경전)가 지녀야 할 가치와 속성 및 기능, 존재론·인식론·실천론 등의 다각적 관점들이 있었다. 시기별로 보면 대승불교 정체성 주요 논쟁의 제1기에는 대승 불설·비불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의방향 제시, 제2기에는 대승불교의 비불교적 요소에 대한 관점 차이, 제3기에는 상좌부의 아가마와 니까야 친설 여부가 주요 쟁점이었다.

이 글에서는 3기에 걸쳐 펼쳐진 이러한 논쟁에 대해 2장,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서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3장,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에서는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의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합적 접근에서는 첫째,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화엄의 언어인식을 기저로 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원융적 시각을 제공하였다. 둘째,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을 보조적 활용하여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확인을 제안하였다. 셋째,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제공을 위해 문화학과 문화심리학의 활용을 통해 불교권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 해결을 제안하였다.

결국, 이 논문은 경전해석학적 접근을 기반으로 하는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을 통해 불교경전이 현대의 다원주의와 통합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정체성과 역할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즉 경전해석학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무분별적 화엄원융의 언어관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인식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의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 문화심리학 등의 접근을 보조로 하는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신대승불교 운동의 방향 모색을 위한 통합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는 더욱 많겠지만, 이 글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은 차후 과제로 남겨둔다. ■

 

이홍구 / 동국대 강의교수. 대구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의상 화엄관행의 연구〉(석사논문) 〈신라 의상의 엄정융회적 신행 연구〉(박사논문) 〈의상계의 엄정융회적(嚴淨融會的) 일승정토관〉 등이 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다.(본지 1008호~1012호)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해오고 있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마성 스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인도 굽타시대 조성된 초전법륜상(5세기).

최근에 법보신문에서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 사이에 대승불교 경전과 초기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사이의 불설비불설 논쟁이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대승비불설 논쟁은 테라바다 불교권이나 니까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권 자체 내에서 제기된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도(富永仲基, 1715~1746)가 북전의 한역 팔만대장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책을 출간, 일체경은 불설이라 일컬어지지만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後人)의 가탁이라고 했다. 그의 대승비불설론은 일본불교계에 심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한역경전 가운데 오히려 소승이라고 여겨졌던 아함 경전류야말로 유일한 불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이고 극단적인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권오민 교수가 ‘대승경이 비불설이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비불설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논리는 마치 까마귀의 살이 검은 색이 아니므로 까마귀의 뼈도 검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너무 거칠고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에 마성스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미타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도 극락조가 부르는 노래는 “무상‧고‧무아”-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수경의 다라니인 신묘장구다라니의 핵심 사상은 탐진치의 소멸-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비불설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 교수의 말대로 한편 대승불설론의 모든 아비달마적 이론은 아함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명료하지 않은 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명료한 경(了義經)에 의지하라.’라는 네 가지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논사들은 아함에 의거하여 대승불설론을 합리화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적어도 대승아비달마 논사들이 불멸후 천년 경에 단지 주어진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法性)이나 정리(定離)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대승도 불설임을 입증했다는 권 교수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은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주장에 대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각 부파나 아비달마 논사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경전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오민 교수는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했는지 기원전 1세기까지 300여 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에 이미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권오민 교수는 위의 주장에서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 사이에 대승경전의 편찬이 아함‧니까야 보다는 신층인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함‧니까야가 대승경전 보다도 고층의 경전임을 암시하는 역사적인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논쟁은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 역사적인 고층‧신층의 문헌문제로 대체하여 접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아직까지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은 아쇼카 왕의 비문이다. 인도에서 오래된 고층의 문헌이라면 당연히 아쇼카 왕의 비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아쇼카 왕(대략 B.C. 268~232년)은 그의 캘컷타 바이라트(Calcutta-Bairāṭ) 비문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선설하신 것으로 그 선법이 오래 지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의 여러 경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완역하면 아래와 같다.

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① ‘제어에 대한 선양(Vinayasamukkasse)’, ② ‘고귀한 삶(Aliyavasāni)’,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Anāgatabhayāni)’, ④ ‘성자의 노래(Munigāthā)’,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Moneyasūtte)’, ⑥ ‘우빠띠싸의 질문(Upatissapasine)’,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Lāghulovāde)’.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재가의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러운 경들을 듣고 사유하여야 합니다. 존자들이여, 이 기록은 이와 같은 목적 즉 백성들이 짐의 의도를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일곱 경이 인용되어있다.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④ ‘성자의 노래’는 이 숫타니파타의 ‘성자의 경(Stn. 207~221)’을 말하고, 꼬삼비나 빈터닛쯔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의 경’의 후반부(Stn. 699~723)를 말한다. 찰머에 의하면, 날라까 경은 실제로 ‘성자의 삶에 대한 경(Moneyyasutta)’이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쌈비에 의하면, ⑥ ‘우빠띠샤에 대한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싸리뿟따의 경’을 말한다. 우빠띠샤는 싸리뿟따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라훌라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맛지마니까야의 ‘라훌라에 대한 교훈의 작은 경(MN. 147: Cūlarāhulaovādasutta)’을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① ‘제어에 대한 선양’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올바른 유행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서두름의 경’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제어라는 말의 어원인 비나야로 보면, 율장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하면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장의 초전법륜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② ‘고귀한 삶’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DN. III. 269~271)에 나오는 ‘열 가지 성스러운 삶(dasa ariyavāsā: 十賢聖居)’ 또는  앙굿따라니까야(AN. II. 27~28)에 나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전통(四聖種: cattāro ariyavamsā)’과 일치한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앙굿따라니까야(AN. III. 100~110)의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五種怖畏: pañcanaṃ anāgatabhayam)’을 말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 언급된 일곱 경들 가운데 적게는 세 경, 많게는 다섯 경이 숫타니파타에서 유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대승불교 경전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아쇼카 왕의 비문에 직접 언급된 유일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니까야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두고 권오민 교수가 불멸후 30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승경전들이 당시에 존재했다면, 전세계에 불교를 홍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쇼카왕의 비문에 어떻게든 경명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대승아비달마논사들은 경전만을 접하고 불설비불설 문제를 다루었을 뿐 이러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세친이나 청변, 중현이 제일결집은 모두 산실되었고 그 후 무량의 경전이 은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몰된 무량의 경전이 아쇼카 재위시까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지금 인도에서 고대사로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아쇼카왕의 비문과 니까야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통치와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니까야는 단순히 편집되거나 편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서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구성을 통해 수집된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대부분 입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함‧니까야가 후대에 편찬된 대승불교의 경전보다 오리지널하고 고층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권 교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구전을 수집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하거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부파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테라바다의 전승은 단지 상좌부라는 부파의 전승만은 아닌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불멸후에 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수행승의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행승들-수많은 부파불교의 교단에 속한-가운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어떤 자들은 불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고행에 열중했다. 어떤 자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법과 율을 파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수행승들 가운데는 포살과 안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쇼카 왕은 이러한 스캔들을 궁극적으로 끝내기위해 장로 목갈리뿟따 딧싸(Moggalliputta-Tissa)로 하여금 교단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의 잘못된 교리 즉, 영원주의(sassatavāda)와 허무주의(ucchedavāda)를 세심하게 배제하여 제일결집이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빠알리 니까야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을 단지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함은 원래가 범어로 쓰여졌고, 설일체유부의 것이라고는 하나 빠알리 니까야와 3분의 2가 일치하고 나머지도 유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경전 가운데 니까야와 함께 고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의 게송언어는 언어학적으로도 베다어에까지 소급하는 경전으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임이 입증된지 오래되었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대로 법성을 불설의 준거로 삼는다면, 극단적으로 『명심보감』에 법성이 있다면, 그것도 불설일 것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법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는 대소승을 합하여 방대한 경전 군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신층과 고층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분하여. 아함‧니까야와 다른 경전으로 구분한다면, 확실히 아함‧니까야가 고층에 속하며, 다른 논서나 대승경전은 그것을 토대로 성립되었거나 아함‧니까야의 본래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신층의 경전임이 자명하다. 단지 아함‧니까야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고, 대승경전은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제불의 가르침을 담은 신층의 경전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