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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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동국대 강의교수 |
현대 한국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크게 3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제1기에 해당하는 박경준의 논쟁은 대승불교 흥기 배경과 인도와 중국, 근대 일본의 대승(大乘) 불설·비불설론 논쟁의 대두와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과 저술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대승경전관의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2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흐름은 김용표가 〈법보신문〉 647호에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제2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에 대한 논쟁, 대승불교의 기복신앙, 대승 위경설에 대한 관점 차이,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 한국불교의 정체성 등이었다. 제2기 논쟁에서 홍사성, 마성 스님, 조준호, 전재성 등은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으며 김용표, 진현종, 김성철, 주명철 등은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나름대로 대승불교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논쟁의 주제가 너무나 큰 담론이고 논쟁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의 부재와 논쟁의 장이 교계 주간지라는 제약적인 한계로 더 큰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셋째, 제3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은 권오민이 〈법보신문〉 1008호에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탓”이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법성[진실]에 의지할 것을 전제로,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제3기 권오민이 촉발한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정법 기준에 대한 논쟁, 불설·비불설에 대한 관점 논쟁, 제 부파불교의 불설·비불설 논쟁, 대·소승 간의 불설·비불설 문제,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논쟁 등이었다.
권오민이 아함과 니까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주장에 대해 친설론을 가지고 반대하는 마성, 전재성, 황순일 등과 앞의 관점과는 별개의 입장에서 논평하는 조성택, 조인숙, 안성두, 이영철 등의 의미 있는 글들이 있었다. 이 논쟁과 논평은 불교학계에서 보기 드문 이변의 논쟁이었으며, 학자의 범위를 넘어 불교 일반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권오민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문의 본래 여러 주제와는 상관없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친설·비친설론으로 변질되어 종파적 입장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1기부터 3기까지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이 결국은 21세기의 새로운 교판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역할을 위해 필요한 접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주제, 범위, 방법 등에 많은 구체적 접근이 결여된 것이 아쉽다. 즉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의 핵심은 첫째, 불설·비불설 논쟁에서 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 교학과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에 대해 불교 신행의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1)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고래로 불교의 제 경론을 그 뜻이 불완전한 것[不了義]과 완전한 것[了義], 은밀한 것[密義]과 분명한 것[顯了], 나아가 방편설(方便說)과 구경설(究竟說) 등으로 분별하게 되었고 급기야 후자로 해석된 경전에 근거하여 불교교파나 종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불교사상사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이러한 불설·비불설의 문제의 흐름에 대해 김호성은 반복사관(反復史觀), 퇴보사관(退步史觀), 발달사관(發達史觀)으로 분류한다.
즉 퇴보사관은 초기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발달사관은 대승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반복사관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동등한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종파적 견해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마성 스님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퇴보사관적 관점에서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이다.”라고 한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성 스님의 이와 같은 관점에 대해 김성철은 발달사관적 입장에서 “대승불전이 설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리는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과 같은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퇴보사관이나 발달사관과는 달리 권오민은 “대·소승 경전 또한 모두 불설을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으로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하면서 문헌적 사료와 경전 형성의 역사적 한계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오민의 이러한 주장은 반복사관적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3가지 다른 관점에 대해 제1기부터 제3기까지의 학문적 접근방법을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경전해석학적 접근, 양 접근으로 구분하기가 애매한 경우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이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근대불교학적 관점으로 합리주의(rationalism) 사상과 실증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2)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까야 또한 비불설이라고 하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라 보면서,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오민은 마성 스님의 비평을 학문보다 상식에 기댄 것이라 비판하면서 아함과 니까야에 대해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상좌부에 대한 정통성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마성 스님의 주장에 대해 상좌부가 전승한 니까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은 사대주의라고 논평했다.
전재성은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을 토대로 아함과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로서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라고 논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권오민은 전재성의 논리 근거인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고층/신층의 문제를 서로 개입시키는 것은 전혀 엉뚱하다고 보았다. 뒤이어 황순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제를 놓고,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권오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지만 양 경전은 편찬 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 전통에서 왜 전문 암송 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다양성의 시대에 법성의 획일적 사유, 교조적 획일화, 믿음의 한계 등에 대해 지적하며 현대의 새로운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3)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
〈법보신문〉 648호에서 홍사성은 김용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대승의 다신적 신앙은 불설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김용표의 주장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대승불교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셋째는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 시대에 제시된 관음·정토·지장·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뒤이어 〈법보신문〉 649호에서 진현종은 부처님 친설 고집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초기불교의 이성-합리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성 스님은 역사적 붓다를 외면하면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대승불교의 포용과 관용성 때문에 순수불교가 갈수록 희석되고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는 한국불교는 타락한 대승불교라고 지적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해 ‘대승 옷 입은 힌두교’라고까지 신랄하게 지적했다.
김성철은 홍사성과 마성 스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기복-다불 사상도 엄연한 불교이고, 초기불교의 논리가 대승으로 귀결되었으며, 대기설법 정신이 새 사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 보았다. 조준호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 대승이 아니며, 기복을 대승이라고 보는 김성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고, 기복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다만 기복에서 작복으로 지향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전재성은 대승경전이 무상, 고, 무아의 니까야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정신을 계승한다고 보면서 대승을 비불교로 보는 것은 역사·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주명철은 대승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석존 정신에 충실한 재해석이라고 전제하고 대승유신론의 폄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대승의 여래 또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김호성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과거7불’의 존재를 소개하고, 이러한 ‘과거7불’ 사상은 고타마 붓다라는 일불(一佛)에서만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의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3.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
1)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부정하고, 상좌부 아가마와 니까야만이 친설이자 정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승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두 가지 전개 방향을 설명한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는 앞에서 설명했고,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 반해 현대학자들의 경전해석학에서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에서 발로하였지만, 그 가르침을 각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 온 노력의 역사적 총체로 보는 관점이다. 먼저, 박경준은 친설론과 정법론에 대해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을 토대로 종파와 교판적 관점을 벗어난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붓다보다도 진리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경전의 권위는 ‘붓다의 직설(直說)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대승열반경》에서는 “사람과 말과 식(識)과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과 뜻[義]과 지혜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친설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법론의 의미에 대해 사람[人]의 종파적 입장이 아니고 불법 자체의 관점, 말[語]의 언어적 입장이 아니라 의미론적 관점, 식별적 입장이 아니라 지혜의 관점, 불료의적 입장이 아니라 요의(了義)로 판단된 경의 진실의(眞實義) 관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권오민은 불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는 원래 4대교법이었지만 그들은 여기에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이다”는 말을 더하여 수정하였고 나중에 다시 이를 근거로 “4의[依: 人·語·識·不了義]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에 의지하라”를 추가하였다고 설명했다. 즉 이 4가지를 통합하여 갖춘 것이 법성을 갖춘 것으로 불설 편찬의 근거는 불설이 아니라 법성이라고 하였다.
2)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이후로 승가와 재가는 시대에 따라 불교 신행의 정체성 내지 이상적인 신행 행태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대·소승의 유부, 경량부(성실론), 중관, 유식 계통의 논서가 표면의 학설은 달리하였지만 불설의 정의에 관한 한 정확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먼저 신행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확고한 이해의 기반 위에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한 적극적인 대응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신행활동을 강조하는 종단의 소아적인 발상이나 이익집단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들의 신행생활은 타파되어야 한다. 결국 불교 학문을 토대로 하는 신행 시스템 구축은 불교 고래의 그리고 불교 본연의 자리이타 지향적인 교리를 구현하는 자발적인 믿음과 수행을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학자 가운데 한 명인 김용표는 대승경전의 본성에 대한 해석학적 탐색을 기초로 하여 현대 불교를 위한 창조적 대승해석학의 방향을 사상의 역사성 문제, 경전적 진리의 상황과 맥락적 진리(contextual truth) 성격, 무한히 열린 자유로운 해석 정신[불의 四種釋義]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특히, 진리란 세간의 전통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간 언어의 형태로 나타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론의 해석도 언제나 현대 서양해석학에서 말하는 선이해(先理解)와 일련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에 조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호성은 대승경전에는 신화적·설화적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성적인 초기경전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로 반박하였다.
① 연기이므로 허(虛)이고 실(實)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가공의 형식-예술적 형식-을 통해서 더욱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보인다는 점에서 대승경전은 미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詩) 〈그림자 극〉을 통해서 말해보았다. ②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현실의 이야기는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가공의 이야기는 불변의 것으로서 더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와 실이 서로 역전될 수 있음을 다시 시 〈드라마〉와 〈극락에서 온 메일〉을 통해서 중송(重頌)해 보았다. 시로 말한 것 역시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즉 대승경전의 신화적/설화적 가공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는 실로 초기경전의 교설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인해서 그 세계는 실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3)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
원래 경(經)의 원어(原語)인 Sūtra는 동사 siv 또는 sīv(꿰매다의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실, 끈, 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위로는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꿰고[貴穿] 아래로는 중생(의 고통과 미망)을 거둔다는[攝持] 것이 경의 ‘근본 기능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상류층의 언어인 베다(Veda)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족어(民族語)로 전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초기불교가 친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언어 인식과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되어 중생들의 개아적 언어 인식과 한없는 거리와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법[진리]을 자각게 하려고 했을 뿐이지 자신의 말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박경준은 “본래가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고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 오기도 한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하여,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호성은 철학적, 해석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4가지 다른 관점에서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를 논증하고 있다. 첫째, 초기경전은 저자가 있고 대승경전은 저자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저자의 표기에 의해서 저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유명사를 실체의 드러남으로 바라보는 미망일 뿐이며, 초기경전의 내용 즉 연기의 관점에 서게 되면 고유명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둘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대승경전을 제작해서 후대에 많은 평지풍파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이데거-가다머 사제(師弟)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보르헤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를 살펴봄으로써 전 주장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함/니까야를 똑같이 베낀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공간의 컨텍스트가 반영되어서 이해될 수밖에 없으므로, 아함/니까야와는 다른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다르게 이해된 의미의 생성을 문자화(文字化)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의 제작은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셋째, 대승경전을 불설이라 칭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보르헤스의 또 다른 소설 〈틀뢴, 우크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전거로 내세워 “모든 책은 익명이며, 오직 한 사람의 저술”이라는 점을 말하였다. 넷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스스로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붓다의 권위를 빌려서 그 책의 권위를 넓히고 자설(自說)을 좀 더 쉽게 널리 펼치기 위한 사욕(私慾)에서였다는 주장에 대해 심성사적(心性史的) 방법론과 ‘정황증거’를 가지고 논박하였다.
4.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
1)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
앞에서 언급했던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화엄에서는 언어인식적 관점으로 3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첫째, 법(法)과 의(義)에서 법 자체의 언어론과 의미론적 입장에 대해 상입(相入)의 무아론적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무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중문(中門)의 상호포섭적 관계로 능구(能具)와 소구(所具)처럼 명칭[名稱: 言說]과 내포[內包: 意義] 간의 상호 주관적인 관계[否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무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상호 경합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의의를 가지고 언설을 삼으므로 언설이 의의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언설이 언설이 아니다. 내포도 언설로써 의의를 삼으므로 의의가 언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의의가 의의가 아니다. 둘째, 지(智)와 요의(了義)에서 지란 자신의 아뢰야식에 의거한 알음알이를 지양하고 지혜로 보는 개인적 깨달음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하면 요의는 깨달음 자체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 상즉(相卽)의 중도론적(中道論的)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언어적 표현과 깨달음의 중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즉문(卽門)의 상호 환원적 관계로 근본[根本: 깨달음]과 지말[枝末: 언어] 간의 상즉인 관계[肯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중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근본과 지말의 상호 협력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지말은 오증(悟證)된 의의(意義)가 언어에 속한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설명한 것이다. 근본도 언설이 오증(悟證)의 표상(表象)에 속한 것으로 작용하면서도 늘 고요하고, 설명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언어 매개를 통한 자비 실행이 교분(敎分)의 입장이라면, 언어가 단절되고 증득해서 얻는 경지가 증분(證分)의 입장이다. 하지만 증분의 침묵은 중생에게 들리지 않고, 교분의 언어는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의 의미를 담고 표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제불보살의 대자비 본원력의 바탕이 되는 부주중도적(不住中道的) 언어는 중생들의 눈높이에 따라 침묵과 언어가 공존하는 언어표현이다. 즉 연기분과 증분의 관계에서 언어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가 드러난 것이 부주중도의 언어인식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가 친설이고, 대승불교가 불법이라고 하면 친설은 일(一)이자 증분, 법설은 다(多)이자 교분이 되어 상입상즉의 원융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
2) 학제간 연구와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현시대까지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소승과 대승, 상종(相宗)과 성종(性宗), 교종과 선종 등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거나 다만 어느 일방에 의한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방편(方便)과 구경(究竟)의 관계로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서로 간의 허심탄회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권 자체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방법도 좋겠지만, 초기불교의 가치와 대승불교 및 대승경전관 및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논쟁의 방향 설정을 위해 학제간 연구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학제간 연구에는 다양한 분과가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화엄원융의 3가지 언어인식적 관점을 바탕으로 3가지 접근을 제안한다. 첫째, 4대교법 가운데 법과 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심리언어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인지과학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신경·심리언어학의 접근법에서는 1968년 초개인심리학 이전의 서양철학과 서구심리학의 개아를 강화하는 언어인식의 심리언어학적 의미를 평가한다. 그리고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 제공을 위해 유식불교의 12연기 언어인식 메커니즘과 무아의 정문훈습을 통한 제8식의 변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아와 무아의 의식 및 무의식의 관점에서 언어인식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성과 한계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둘째, 4대교법 가운데 지와 요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통합적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통합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는 서양과학의 심리학과 동양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불교학의 만남이자 진정한 융합을 시도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통합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각 층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한국불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접근할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즉 인간존재의 구성 요소인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1차원적 상호침투의 이질적 등계층의 홀로그래프적 언어인식, 다차원적 상호침투의 홀로키적 온우주론의 언어인식, 절대정신 등이 중요한 테마이다. 1차원적 상호침투는 화엄의 상입, 다차원적 상호침투는 상즉, 절대정신은 법성과의 비교고찰이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4대교법을 아우르는 법성의 현시대적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집단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과학철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왜냐하면 현시대에 경험주의적 과학지상주의자와 유물론적 실증주의자의 전통 경험과학적 진리관이 일반인들을 혼미하게 오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 정체성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제간 연구 가운데 하나인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ofscience)은 과학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철학과 과학을 대비해 생각해볼 때 몇 가지 점에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
3)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필요성 제기
오늘날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에 대한 통합시각을 제안하고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개념 설정을 위해 신행(信行)의 의미를 교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고, 신행의 관점에서 교학을 평가할 수도 있으며, 양쪽 모두 동등한 가치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서 제기되는 ‘신행’ 관련 논의의 틀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서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의 속성으로 야기되는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에 대한 불교 신행의 역할과 역량 정립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유용한 접근이 문화(심리)학이 될 수 있다. 원래 문화학이 발생한 의의는 개별 학문들로부터 나온 개별사건들을 다시각적 관점에서 네트워킹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는 초과학적 프로그램으로 학문들 간, 학문과 실천 간을 연결하는 지평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문화학의 한 범주로서 ‘믿음과 실천’의 연구목적은 ‘문화적 지향’의 인문철학으로서 불교학에서 자신의 학문영역과 이론적 태도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전체’ 속에서 ‘믿음과 실천’의 의미를 추구하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을 위한 방향타의 구실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란 좁은 의미로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불교란 “석존을 개조로 하여 열반 혹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최고 구극의 가치 또는 목적으로 하고, 그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문화의 종합적 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문화로써 존재하고 문화로써 표현되며, 문화로써 기능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불교문화’라는 프리즘은 현대 신행생활의 기본방향으로 첫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자리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개인수행 및 정신건강의 측면과 종교 의례문화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그리고 둘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이타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사회적·역사적·철학적·교육적·예술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여기서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정신수양과 종교적 행위의 특수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며,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사회실천 행위의 보편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5. 맺음말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 역사학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철학적, 해석학적, 종교체험과 신행적 접근 등을 통한 선행연구들이 있었다. 대승불교(경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의 논쟁을 주제별로 보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불설·비불설,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개념 정의와 범위 설정, 초기경전과 대승경전과의 관계, 대승불교(경전)가 지녀야 할 가치와 속성 및 기능, 존재론·인식론·실천론 등의 다각적 관점들이 있었다. 시기별로 보면 대승불교 정체성 주요 논쟁의 제1기에는 대승 불설·비불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의방향 제시, 제2기에는 대승불교의 비불교적 요소에 대한 관점 차이, 제3기에는 상좌부의 아가마와 니까야 친설 여부가 주요 쟁점이었다.
이 글에서는 3기에 걸쳐 펼쳐진 이러한 논쟁에 대해 2장,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서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3장,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에서는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의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합적 접근에서는 첫째,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화엄의 언어인식을 기저로 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원융적 시각을 제공하였다. 둘째,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을 보조적 활용하여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확인을 제안하였다. 셋째,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제공을 위해 문화학과 문화심리학의 활용을 통해 불교권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 해결을 제안하였다.
결국, 이 논문은 경전해석학적 접근을 기반으로 하는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을 통해 불교경전이 현대의 다원주의와 통합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정체성과 역할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즉 경전해석학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무분별적 화엄원융의 언어관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인식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의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 문화심리학 등의 접근을 보조로 하는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신대승불교 운동의 방향 모색을 위한 통합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는 더욱 많겠지만, 이 글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은 차후 과제로 남겨둔다. ■
이홍구 / 동국대 강의교수. 대구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의상 화엄관행의 연구〉(석사논문) 〈신라 의상의 엄정융회적 신행 연구〉(박사논문) 〈의상계의 엄정융회적(嚴淨融會的) 일승정토관〉 등이 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다.(본지 1008호~1012호)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해오고 있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마성 스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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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굽타시대 조성된 초전법륜상(5세기). |
최근에 법보신문에서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 사이에 대승불교 경전과 초기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사이의 불설비불설 논쟁이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대승비불설 논쟁은 테라바다 불교권이나 니까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권 자체 내에서 제기된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도(富永仲基, 1715~1746)가 북전의 한역 팔만대장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책을 출간, 일체경은 불설이라 일컬어지지만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後人)의 가탁이라고 했다. 그의 대승비불설론은 일본불교계에 심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한역경전 가운데 오히려 소승이라고 여겨졌던 아함 경전류야말로 유일한 불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이고 극단적인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권오민 교수가 ‘대승경이 비불설이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비불설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논리는 마치 까마귀의 살이 검은 색이 아니므로 까마귀의 뼈도 검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너무 거칠고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에 마성스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미타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도 극락조가 부르는 노래는 “무상‧고‧무아”-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수경의 다라니인 신묘장구다라니의 핵심 사상은 탐진치의 소멸-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비불설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 교수의 말대로 한편 대승불설론의 모든 아비달마적 이론은 아함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명료하지 않은 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명료한 경(了義經)에 의지하라.’라는 네 가지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논사들은 아함에 의거하여 대승불설론을 합리화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적어도 대승아비달마 논사들이 불멸후 천년 경에 단지 주어진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法性)이나 정리(定離)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대승도 불설임을 입증했다는 권 교수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은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주장에 대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각 부파나 아비달마 논사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경전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오민 교수는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했는지 기원전 1세기까지 300여 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에 이미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권오민 교수는 위의 주장에서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 사이에 대승경전의 편찬이 아함‧니까야 보다는 신층인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함‧니까야가 대승경전 보다도 고층의 경전임을 암시하는 역사적인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논쟁은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 역사적인 고층‧신층의 문헌문제로 대체하여 접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아직까지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은 아쇼카 왕의 비문이다. 인도에서 오래된 고층의 문헌이라면 당연히 아쇼카 왕의 비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아쇼카 왕(대략 B.C. 268~232년)은 그의 캘컷타 바이라트(Calcutta-Bairāṭ) 비문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선설하신 것으로 그 선법이 오래 지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의 여러 경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완역하면 아래와 같다.
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① ‘제어에 대한 선양(Vinayasamukkasse)’, ② ‘고귀한 삶(Aliyavasāni)’,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Anāgatabhayāni)’, ④ ‘성자의 노래(Munigāthā)’,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Moneyasūtte)’, ⑥ ‘우빠띠싸의 질문(Upatissapasine)’,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Lāghulovāde)’.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재가의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러운 경들을 듣고 사유하여야 합니다. 존자들이여, 이 기록은 이와 같은 목적 즉 백성들이 짐의 의도를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일곱 경이 인용되어있다.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④ ‘성자의 노래’는 이 숫타니파타의 ‘성자의 경(Stn. 207~221)’을 말하고, 꼬삼비나 빈터닛쯔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의 경’의 후반부(Stn. 699~723)를 말한다. 찰머에 의하면, 날라까 경은 실제로 ‘성자의 삶에 대한 경(Moneyyasutta)’이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쌈비에 의하면, ⑥ ‘우빠띠샤에 대한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싸리뿟따의 경’을 말한다. 우빠띠샤는 싸리뿟따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라훌라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맛지마니까야의 ‘라훌라에 대한 교훈의 작은 경(MN. 147: Cūlarāhulaovādasutta)’을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① ‘제어에 대한 선양’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올바른 유행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서두름의 경’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제어라는 말의 어원인 비나야로 보면, 율장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하면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장의 초전법륜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② ‘고귀한 삶’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DN. III. 269~271)에 나오는 ‘열 가지 성스러운 삶(dasa ariyavāsā: 十賢聖居)’ 또는 앙굿따라니까야(AN. II. 27~28)에 나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전통(四聖種: cattāro ariyavamsā)’과 일치한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앙굿따라니까야(AN. III. 100~110)의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五種怖畏: pañcanaṃ anāgatabhayam)’을 말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 언급된 일곱 경들 가운데 적게는 세 경, 많게는 다섯 경이 숫타니파타에서 유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대승불교 경전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아쇼카 왕의 비문에 직접 언급된 유일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니까야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두고 권오민 교수가 불멸후 30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승경전들이 당시에 존재했다면, 전세계에 불교를 홍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쇼카왕의 비문에 어떻게든 경명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대승아비달마논사들은 경전만을 접하고 불설비불설 문제를 다루었을 뿐 이러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세친이나 청변, 중현이 제일결집은 모두 산실되었고 그 후 무량의 경전이 은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몰된 무량의 경전이 아쇼카 재위시까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지금 인도에서 고대사로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아쇼카왕의 비문과 니까야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통치와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니까야는 단순히 편집되거나 편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서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구성을 통해 수집된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대부분 입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함‧니까야가 후대에 편찬된 대승불교의 경전보다 오리지널하고 고층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권 교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구전을 수집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하거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부파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테라바다의 전승은 단지 상좌부라는 부파의 전승만은 아닌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불멸후에 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수행승의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행승들-수많은 부파불교의 교단에 속한-가운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어떤 자들은 불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고행에 열중했다. 어떤 자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법과 율을 파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수행승들 가운데는 포살과 안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쇼카 왕은 이러한 스캔들을 궁극적으로 끝내기위해 장로 목갈리뿟따 딧싸(Moggalliputta-Tissa)로 하여금 교단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의 잘못된 교리 즉, 영원주의(sassatavāda)와 허무주의(ucchedavāda)를 세심하게 배제하여 제일결집이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빠알리 니까야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을 단지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함은 원래가 범어로 쓰여졌고, 설일체유부의 것이라고는 하나 빠알리 니까야와 3분의 2가 일치하고 나머지도 유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경전 가운데 니까야와 함께 고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의 게송언어는 언어학적으로도 베다어에까지 소급하는 경전으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임이 입증된지 오래되었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대로 법성을 불설의 준거로 삼는다면, 극단적으로 『명심보감』에 법성이 있다면, 그것도 불설일 것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법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는 대소승을 합하여 방대한 경전 군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신층과 고층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분하여. 아함‧니까야와 다른 경전으로 구분한다면, 확실히 아함‧니까야가 고층에 속하며, 다른 논서나 대승경전은 그것을 토대로 성립되었거나 아함‧니까야의 본래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신층의 경전임이 자명하다. 단지 아함‧니까야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고, 대승경전은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제불의 가르침을 담은 신층의 경전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으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도 니까야는 창작이 아닌 여러 지역서 수집된 ‘리얼리티’ 자료로 권 교수는 고고학‧문헌학적으로 입증된 사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본지 1008호~1013호) 이에 권오민 교수가 전재성 회장의 반론을 다시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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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인도 부드가야의 석상. |
반론자가 바뀌었지만 반론의 내용은 역시 놀랍다. 우리나라 불교학에서 ‘신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기불교 연구자조차 이토록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연성[調柔]은 불타의 7선(善) 중의 하나라는데. 필자의 명색의 전공은 아비달마불교이다. 아비달마는 아함과 니카야로 대변되는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이다.
필자는 지난 삼십 년 간 이 불교를 포함하여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진 초기불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구호로 점철된 우리 불교학계의 경직된 사고에 대해 비판해왔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러한 내용의 몇 편의 글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투정’이라 자조하였다. 헌대 거의 모든 인도불교사에 기술된 ‘니카야는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이라니.
거듭 말하건대,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사족에서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음에도 반론자마다 그것을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카야도 비불설이다”고 오독하여 필자를 물귀신(Lokāyata의 vitandā sattha)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힐난할까 두렵다. 딴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신념이 두려운 것이다.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한정사는 불설의 기준이 ‘친설’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말로서, 필자는 오로지 이를 밝히기 위해 4백 매에 달하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논거만도 30여 종의 대․소승의 경론 상에서 200개 이상을 제시하였다.
전재성 회장은 필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을 친설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알고 있다면 ‘명심보감 운운’하며 희화할 것이 아니라 필자가 제시한 논거를 비판했어야 하였다. 필자는 이미 논문의 본문에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법성에 부합하면 불설이다”는 중관학파의 대표논사인 청변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또한 “도미나가의 대승비불설 충격으로 인해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하였다”고 하여 필자의 논문을 그것의 아류로 여기고 있지만, 중현은 대승불교권도 아닐 뿐더러 일본의 어떤 이가 소승의 아비달마논서를 이용해 대승불설론을 펼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제의 논문에서 소승의 부파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불설/비불설론을 통해 ‘불설=친설’이라는 종래의 상식을 비판하고 대‧소승이 다같이 수용한 불설론의 자취를 탐구하였다. 헌대 전 회장은 엉뚱하게도 여기에 고층/신층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다.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쇼카왕 비문에 기록된 7가지 경설을 통해 볼 때 아함․니카야는 고층임이 명백하다”고 하였는데, 이 때 ‘고층’은 친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쌍윳따』 하나만 해도 경의 수는 3천에 이른다) ‘까마귀 운운’의 로타야타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초기경전이나 『숫타니파타』 안에서 고층과 신층을 나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아함‧니카야는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다.
한편 전 회장은 『아미타경』도 무상․고․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라니도 탐진치의 소멸이기 때문에 비불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설하고, 번뇌소멸만 설하면 불설(=친설)인가? 무아설 등이 불설의 기준인가? 그러나 독자부나 정량부에서는 무아를 설하는 제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가 아니다”고 한다면 필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현장이 인도에 체류할 무렵 유부에 버금가는 세력의 부파였다.
또한 4의설(依說) 자체가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증거라고 하였지만(4의설은 아함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좌부에서는 4의설을 인정하는가?(마성 스님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은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도 경과 율에 위배되면 비불설로 버려야 하고, 경과 율과 논모를 지닌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도 이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다만 설한 사람인가,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인가?
전 회장은 이에 따라(다시 말해 부파마다 불설/비불설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마성 스님의 반론은 탁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 성립의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성(史實性)’을 무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일찍이 『인도불교사』(1985, 경서원)라는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는 대개 경전성립에 관해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밧지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과 상좌부/대중부의 근본분열) 아쇼카왕 시대 목갈리풋타 팃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이는 모두 남방 상좌부 전승에 따른 것으로, 결집과 분파에 관한 한 제 전승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제2결집의 경우, 우리는 대개 장로 야사가 밧지 비구들이 행한 금은수납 등의 열 가지 일을 비법으로 지적하자 도리어 거갈마(擧羯磨, 교단에서 일시축출)에 처함에 따라 이를 서방의 장로들에게 알려 이른바 제2결집을 단행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도 대결집을 단행함으로써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하고 이후 18개 부파로 지말분열하였다고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수납을 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역시 비법으로 배척한다. 그렇다면 근본분열에서의 ‘대중부’ 정체는 무엇인가?
제2결집을 근본분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4~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사서 『디파밤사』뿐이다. 여기서는 계속하여 불멸 100년과 136년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제3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āvatthu)』를 지었으며, 불멸 236년에도 다시 제3결집을 단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성 스님도, 전 회장도 이에 근거하여 상좌부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니카야를 친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사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난한다.
“아쇼카왕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제3결집)을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한 다른 부파의 사적인 경전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훈계하였는데, 불교의 전승 상에 도대체 몇 명의 아쇼카왕이 등장하는지 알고 한 말인지, 무슨 근거에서 ‘사적 경전 운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쇼카왕 때 대천(大天)의 5사송에 의한 근본분열이나 카니시카왕의 후원으로 실행된 유부의 결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사송 또한 대천과 관련지어 설한 것은 오로지 『이부종륜론』뿐이다. 『디파밤사』든 『이부종륜론』이든 일차사료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경 스님도 “가상적 사서인 『디파밤사』를 역사적 증언으로 수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라모트 같은 이는 “결집의 전승은 성전문헌과 그 후의 여러 부파의 성전들(양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학계에 자주 회자되었던 사사키 시즈카는 부파분열을 비롯한 초기불교 교단사에 관한 한 서로 상충되는 거의 모든 정설(定說)은 후대 개변되거나 가탁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인도불교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유래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이에 관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시대적으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혹자는 여기에 불타 재세시의 불교라는 뜻의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든 근본불교든 그것을 전하는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였지 반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카야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문자로 작성되며, 스리랑카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도 팔리어 삼장의 분류와 구성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황순일 교수는 곰브리치 교수의 불교학 방법론을 전하면서 “우리는 팔리 니카야 또는 한역 아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문헌일 것이란 환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하며,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교리적 영향 아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 또는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모트 역시 말하였다. 모든 성전들이 부파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초기불교시대에 이미 고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제1결집 이래 3~4백여 년 간 면면히 구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사자상승의 계보도 전할뿐더러 경은 송경자(誦經者, sūtrāntika)라 불린 전문집단에 의해 전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율상수나 법사들의 계보는 부파마다 다를뿐더러 후대 작성된 것이다. 송경자 또한 다수의 부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도 확인된다.
그런데 왜 송경자가 필요하였을까? 다만 경을 암송하는데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인가? 필자는 이들이 정법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잡아함』제640경을 비롯한 다수의 전승에서는 샤카․야바나 등 서방에서 침입한 왕들의 무자비한 파불(破佛)과 불교 내부의 분쟁으로 인한 정법의 멸진을 전하고 있으며, 논서에서는 “불타 교법은 누구에 의해 유지 전승되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불교에 누가 될지라도 불교학은 그것이 ‘학’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전 회장은 니카야는 아무런 단절 없이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목갈리풋타가 비판하였던 이설자는 누구인가?
『디파밤사』에서는 외도 적주라고 하였지만, 리스 데이비드 부인은 『카타밧투』의 이설자로서 독자부, 정량부, 설일체유부, 대중부, 안다카, 계윤부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들은 왜 외도 적주로 불렸을까? 그들은 상좌부의 무엇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상좌부의 대응논리는 무엇이었던가? 상좌부는 그들을 끝끝내 배척하여 불교교단에서 몰아내었던가?
이상과 같은 학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오로지 상좌부 전승의 니카야만이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으로, 이를 상대로 논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쟁의 생명은 모름지기 논거의 제시와 상대방 논거(또한 비유)의 비판적 검토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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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으며, 조성택 고려대 교수도 “최초 경전 편찬은 구술이 아닌 문자에 의해 성립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안성두<사진> 서울대 교수가 이번 논쟁에 대한 평가 등을 정리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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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고행상. |
권오민 교수(이하 논자)의 「불설과 비불설」이란 논문을 둘러싸고 지난 두어 달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불교학자들 간의 논쟁은 참으로 직접적인 논쟁문화가 드문 불교학계에서 하나의 이변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을 것이다. 이 논쟁의 경과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면서 필자가 받은 인상은 우리 학계가 얼마나 이런 종류의 진지한 문제제기와 이를 둘러싼 토론을 갈구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토론에 있어 질문 자체가 갖는 보다 긍정적 역할은 대답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질문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번 논쟁과정에서 누구의 입장이 옳은가 하는 것은 부차적이며, 중요한 점은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를 그것이 논자의 입장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든 또는 확장된 이해에 의거하든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풍토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필자가 뒤늦게 이 논쟁에 대해 끼어든 이유는 논자의 문제제기에 대해 적어도 당시의 대승불교를 전공한 학도의 일인으로서 옳건 그르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다시금 「불설과 비불설」을 몇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서, 재삼 논자의 원전읽기의 깊이와 이차문헌에 대한 폭넓은 독서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실로 이 논문은 아비달마에 대한 논자의 오랜 학문적 연찬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역작으로서, 「경량부와 비유자의 의미와 관계」(2008), 「구사론에서의 경량부 (I)+(II)」(2009) 등의 논문에서 행했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불설(佛說, buddha-vacana)이 논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명쾌하게 논의하고 있다.
논자는 이제까지 그 난해함과 방대함으로 인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텍스트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지렛대로 삼아 이전 시기에서 행해진 불설에 대한 논의가 가진 해석학적 함의를 풀어내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논자가 보여준 원전자료의 섭렵과 비판적 논의는 한국불교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논의를 통해 필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불설의 논의가 오로지 대승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파 내부에 있어서도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고 하는 논자의 지적이다. 논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대승의 기원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불설로서의 ‘경(經)’을 ‘창작’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내부자적 시각에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자의 주장은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 논의지평을 확장하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중복되는 점은 있겠지만 이 논문의 가치와 논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먼저 논자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하겠다.
필자가 논문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논자의 주장의 핵심은 세 가지 점에 있다. (1)불설은 석가모니불의 친설(親說)뿐 아니라 법성(法性)에 부합되는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불설이란 법성/도리에 부합되는 ‘잘 설해진 것(subhāsita)’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전승된 체계로서의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한 학파소속성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즉 각 학파에 의해 도리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수용된 것이다.
(2)이러한 전승된 ‘성교(聖敎)’와 불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부파불교시기에 확정되었다. 양자의 차이는 이미 이종철 교수 등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상기논문의 가치는 이를 여러 텍스트 개소의 인용을 통해, 특히 세친과 동시대인인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제시하고 증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논자에 따르면 불설은 『대반열반경』에서의 네 가지 ‘위대한 교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후 경과 율에 따른다는 규정을 넘어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함에 의해 주로 유부의 문헌에서 인(人)·문(文)·미요의경(未了義經)·지(知) 대신에 법(法)·의(義)·요의경(了義經)·지(智)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四依)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불설의 내용과 진리성은 역사적 붓다로서의 석가모니의 친설 여부가 아니라 그의 언어적 교설이 붓다의 원의도와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 불설의 확정기준은 올바른 논리와 부합되는 것이다. 논자는 이 차이가 이미 유부아비달마 문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었고, 대승의 선구자들도 이런 구별에 기본적으로 입각해서 대승불설론을 주창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3) 이러한 중현의 유연한 입장과 대비되는 인물이 경량부의 조사 슈리라타이다. 논자에 따르면 슈리라타는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성교(聖敎, āgama) 중에서 불타가 직접 설한 것만을 경(불설)으로 인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경량부라 호칭했을 것이다.” 『순정리론』의 진술에 의거해 경량부는 일종의 경전근본주의자의 관점을 가진 학파로 간주하면서 여기서 이 학파의 명칭도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논자의 해석은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는 매우 창의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논문의 위험성(?)은 읽어가면서 너무나 논지가 뚜렷하기 때문에 원전과 비교해 논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가지 않는 한 거의 논자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논자의 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용하는 여러 자료들, 특히 『순정리론』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범본이나 티베트역이 없는 이 논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이 책을 들출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겠다.
사실 그것이 어찌 필자뿐이겠는가? 논자가 지적하듯 이 시기의 아비달마사상을 전공한 학자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논서를 본격적으로 연구에 반영한 이는 아마 오래전 타계한 사사키 겐쥰(佐佐木現順) 교수나 이 책의 심불상응법에 대해 연구했던 콕스(C. Cox)를 제외하고는 드물 것이다. 논자의 『순정리론』번역이 빨리 출간되기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이하는 위의 세 가지 점과 관련해 논자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의 문제제기이다.
논자는 『대반열반경』의 이본(異本) 중에서 “법상 중에 있는 것” 또는 “아비담과 상응해야 한다”는 규정을 첨가한 이본의 편찬연대가 후대일 경우라고 추정한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진행은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의 추정에는 일면 타당성도 있지만, 법성이나 법상 등의 추가가 이본들의 학파소속성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의 여부도 검토할 소지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이나 법상 등과 부합된다고 할 때 그것은 후대에 편찬된 아비달마문헌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말하기보다는 논모(論母, mātṛkā)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경장의 편찬이 최초기 논모의 성립시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자는 도리 혹은 정리(yukti)를 법성의 동의어로 간주하지만 과연 이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불설의 확대된 정의에 포함되는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불설의 기준을 청변의 『중관심송』의 설명과 관련시켜 ‘도리=법성’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법성을 표현하는 정형구는 “붓다가 세상에 나건 나지 않건 그러한 것”이지만, 그러나 청변이 제시하고 있는 반대론자의 대승비불설의 근거는 “다른 도리를 설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청변이 불설/비불설의 판정기준으로 삼은 것은 정리(正理, yukti, nyāya)와 추론(anumāna)”이었고, 이를 다시 『중관심송』의 구절에 따라 부연설명하면서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론적 타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 진실지와 해탈을 지향하는 논리적 사고와 상응하는가, 상응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고” 이를 검토하는 방법이 추론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잘 설해진 것이 불설”이라는 유부와 유식에서 확립된 경전관이 청변에게도 타당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대승은 정리에 따른 성전과 모순되지 않기에 불설”이며, 따라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올바르게 설해진 것은 모두 불설”인 것이다.
청변이 정리와 추론을 같은 차원에서 하나의 인식수단(量)으로 언급한 것은 전통적으로 인식수단을 직접지각(現量)과 추리 또는 성언량을 포함시켜 설명하는 방식에서 볼 때 분류상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만, 여기서 필자의 문제제기는 논자가 제시하는 ‘도리=법성’의 등식이 아니라 도리(道理, yukti)라는 단어의 의미 내지 외연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도리는 법성과 동의어가 아니라 법성은 4종 도리의 하나에 포함될 뿐이다. 4종 도리란 관대(觀待)도리, 작용(作用)도리, 증성(證成)도리, 법이(法爾)도리로서, 마지막 법이도리가 즉 법성으로서의 이치를 말한다. 이 4종의 도리는 성문지를 위시한 여러 유식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도리란 제법을 관찰하는 방법(yoga), 방편(upāya)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면 도리가 추론과 같은 논증수단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세 번째 증성도리에 국한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논거에 의해 증명하는 도리’이다. 성문지에 따르면 증성도리는 제법의 무상성 등의 불교적 진리를 신뢰할만한 전승을 얻은 사람, 직접지각, 추론의 세 가지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논리적 증명을 행하는 것이다. 반면 법이도리란 “제법의 진실성을 [세간에서] 인정된 사물의 성질(법성)로서, 불가사의한 법성으로서, [수행자가] 안주하는 법성으로서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리=법성’의 등식은 외연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이며, 다만 이런 추론 등의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관학파에 속하는 청변의 경우 유식학파가 사용하는 도리의 개념을 달리 이해하고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논자가 인용하는 청변의 문장은 법이도리의 맥락이 아니라 증성도리의 맥락에서 불설의 진리성을 확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의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독창적 부분은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의 성전관과 유부의 그것과의 용해할 수 없는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논자가 슈리라타를 경전근본주의자로 해석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떠오르는 의문은 논자의 해석이 옳다면 그러한 경량부적인 엄격한 경전관으로부터 어떻게 ‘종자설’과 같은 ‘새로운’ 이론이 제안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경량부도 ‘독립된’ 학파로서 삼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에 의거해서 논장의 진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제기된다.
중국주석가들에 의해 경량부설로 귀속되는 『유가론』의 여러 이론 중에서 예를 들어 104 번뇌설은 적어도 『유가론』의 설명에 따르는 한 역시 번뇌를 삼계와 사제 및 견소단(見所斷), 수소단(修所斷)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 분류틀은 슈리라타에 의해 부정되지 않았던가? 나아가 종자설이 알라야식 등의 유식학 이론의 발전에 끼친 결정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왜 현장은 슈리라타의 저작은 번역하지 않고 중현의 것을 번역했는가 하는 의문도 남는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논문 전체의 취지에 비하면 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논자의 불설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불교는 다양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의 교단사적 연구에 못지않은 중요한 포인트를 해명해 주고 있다. 논자가 논문의 ‘사족’에서 말하고 있듯이 ‘불교의 개방성’이야말로 학문적 차원에서는 물론 실천적 차원에서도 우리 시대 불교(학)의 가장 중대한 과제일 것이다. 이에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 불교학과 불교계의 앞날이 달려있을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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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비불설 주장은 교만심 발로”김호성 교수, 불교출판협회서 주장 초기불교도 대승처럼 多佛의 종교 무아의 공심으로 대승경전 찬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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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대승불교는 불설(佛說)이 아니라 사적인 주의·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또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승비불설 주장이 독선과 오류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 중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와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가 대표적으로 권 교수는 문헌학과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김 교수는 철학적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니까야와 아함이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일 수는 없지만 모두 ‘불설’이 될 수 있음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호성〈사진〉 교수는 불교출판협회가 5월 4일 동국대 영상센터에서 개최한 ‘고전과 미래’ 특강에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화쟁론’이란 주제강연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모든 경전은 불설로 봐야 한다”며 “어느 경전은 친설이고 어느 경전은 비불설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교판론에 떨어져서 타자를 배제하는 교만심의 발로가 아니라면 희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교수는 ‘연기라는 것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란 초기경전 구절을 인용한 뒤 일부 학자들이 최초의 ‘원음’을 불교의 기원으로 보고 그 저자로 붓다로 보고자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니까야나 고타마 붓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초기경전에서 붓다 스스로 연기(=법)의 이치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함과 니까야가 원음(진리)에 대한 해석이듯 대승경전도 동일하게 원음에 대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또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과거7불’의 존재를 소개하고, 이러한 ‘과거7불’ 사상은 고타마 붓다라는 일불(一佛)에서만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의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불교는 이미 대승 이전에도 많은 붓다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불(多佛)의 종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가 “불교에는 오직 역사적 인간 붓다의 일불만이 있을 뿐이고, 그런 맥락에서 일불의 가르침인 니까야와 아함은 허구적 존재인 다불을 설하는 대승경전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초기경전의 가르침과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어 일각에서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지 않고 불설로 가탁함으로써 책의 권위를 높여 보다 넓게 퍼뜨리려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의상대사가 화엄일승법계도를 완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나 후대 어느 찬술자가 의상대사의 이름으로 ‘백화도량발원문’을 썼던 것처럼 대승의 찬술자들이 불설로 가탁한 것은 정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아(無我)와 연기사상에 충실하려 했던 ‘무아의 공심(公心)’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대승경전의 저작자들이 가졌던 생각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기원은 역시 붓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 ‘불설’이라고 했던 것”이라며 “여기에는 이 가르침을 전해주신 붓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의 마음이 배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당시 논사들이 자신의 저서에 이름을 썼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 교수는 이와 관련 “대승경전의 저작자들은 붓다의 교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붓다‘의’ 입장에서, 즉 주체적으로 ‘불설’을 다시 한번 재현해 보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대승경전이 가공의 신화적 설화적 이야기로 점철돼 있어서 이성적 현실적인 초기경전보다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입장과 관련해서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는 실로 초기경전의 교설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우리에게 일러주셨던 우리 존재의 비(非)실재·법무아(法無我)라는 교설로 인해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특히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인해 그 세계는 실재하게 되고, 우리가 아공·법공이 되지 못하면 그 세계 역시 실재할 수 없게 된다”며 “우리가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환상, 환영, 허깨비, 마야, 그리고 공 속에서’ 존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어떤 특정한 교설만을 불설로 인정할 경우 다른 수많은 교설들은 비불설이 될 수밖에 없다”며 “불교에는 대승과 소승이 있을 수 없으며 다만 포용성 있는 불교와 포용성 없는 불교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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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기원논쟁 주도 학자들 한국 강단에 선다
사사키·가라시마 교수 방한 중앙승가대·금강대서 강연 대승불교 기원론 논쟁은 세계 불교학계 핵심 이슈 한국에 신선한 자극될 것
대승불교 기원 문제가 세계 불교학계의 핵심 이슈로 자리 잡은 가운데 그 논쟁의 한 가운데 서있는 학자들이 잇따라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이론을 펼친다.
중앙승가대는 10월6일 오후 3시40분 김포 중앙승가대 본관 4층에서 일본 하나조노대학 사사키 시즈카(左左木閑) 교수를 초청해 ‘대승불교 기원에 대한 제문제’를 주제로 강연회를 연다. 또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도 10월8일 오후 2시 논산 금강대 본관 5층 사이버강의실에서 일본 창가대학국제불교학고등연구소 가라시마 세이시(辛島靜志) 교수를 초청해 ‘누가 대승문헌을 편찬했는가’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한다. 이에 따라 대승불교 기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한국 불교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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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0년간 많은 학자들이 대승불교 기원과 관련된 획기적인 이론들을 제기했으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사진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이 설해졌다는 인도 기원정사터. |
대승불교 기원 논란은 근대 유럽학자들이 팔리어로 기록된 초기경전을 연구하면서 시작됐다. 그들의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붓다가 대승불교를 말하지 않았다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의혹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인도 역사 관련 사료가 극히 부족한 탓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대승불교를 둘러싼 육하원칙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일본 마에다 에운(前田惠雲)이 ‘대승불교성립사론’(1903년)에서 ‘대중부 기원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승불교 기원 논쟁의 효시에 해당하는 이 학설은 대중부가 제시하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교의와 출세간부에서 설하는 붓다의 초월적 성격이 대승불교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의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65년 뒤 이를 뒤집는 획기적인 학설이 나왔다.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가 ‘초기대승불교의 연구’(1968)라는 저술에서 재가불자가 중심이 된 불탑신앙집단이 대승불교를 주도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 대승경전에 빈번히 언급되는 선남자·선여인을 대승불교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간주했다. 즉 다른 교의를 버젓이 내세우는 자가 동일한 승단에서 지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대승이 소승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학설은 대승불교 담지자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 받았다. 동시에 경전과 논장에 의존하지 않고 율장에 근거했다는 점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그의 학설은 일본 학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한때 그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10여년도 되지 않아 강력한 반론에 부딪쳤다. 그레고리 쇼펜(G. Schopen)은 비문을 비롯한 고고학적 성과들을 검토하면서 4세기 이전의 대승불교 증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975년 쇼펜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대승불교가 독립된 집단으로서 4세기까지 출현하지 않았으며, 일부 소수 승려들에 의해 진행된 주변부 불교운동에 불과했다는 주장을 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폴 해리슨(P. Harrison)도 ‘반주삼매경’ 등 한역 초기 대승경전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 대승불교가 외지고 험한 곳에서 수행했던 소수의 승려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승불교 기원은 도시에 기반을 둔 재가불자의 헌신적 종교운동과는 거리가 먼 엄격한 수행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이론과 이들 서양 학자들의 학설이 상반된 가운데 또다시 놀라운 주장이 나왔다. 이번에 방한하는 사사키 시즈카의 학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아쇼카왕 파승(破僧) 비문과 ‘마하승기율’ 등 율장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통해 의견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포살이나 갈마 등 중요행사를 같이한다면 승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곧 붓다 교설을 상반되게 이해하더라도 함께 머물 수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히라카와 아키라 이론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반론이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승불교 기원론의 물줄기를 새롭게 돌리고 있는 학자가 가라시마 세이시다. 대승경전의 세계적 권위자로 산스크리트, 팔리어, 간다라어를 비롯한 인도 여러 고전어에 능통한 그는 오랫동안 낡은 학설로 취급돼 온 대중부와 대승불교와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엄밀한 문헌고증을 통해 대중부와 대승불교 문헌의 밀접한 관련성을 증명하고, 대승불교가 대중부에서 기원했음을 재주장함으로써 세계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김성철 금강대 HK교수는 “대승불교의 기원론에 대한 논쟁은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둘러싼 핵심적인 문제들을 담고 있다”며 “이들 학자들의 강연은 치열한 학문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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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까지 인도에 대승불교 교단 없었다”폴 윌리엄스의 ‘인도불교사상’
대승은 교단 분열과 무관 내적 동기나 통찰 차이뿐 대승 시원 재가자와 무관 관상수행서 대승경전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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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이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설했다고 전해지는 인도 슈라바스티 기원정사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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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승불교 기원은 부처님 입적 100년 무렵 분파된 대중부에서 비롯됐다거나 이론적인 탐구에만 몰두한 스님들에 반대해 재가자와 그들의 염원에 호응하는 출가자들에 의해 대승불교운동으로 전개됐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탑과 사리신앙에서 대승불교가 비롯됐다거나 ‘초기→부파→대승’이라는 도식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대승불교 초기부터 독립된 교단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문헌학적 검토와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들이 쏟아지면서 이러한 학설과 견해들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오히려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대승불교의 기원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번역한 영국 브리스톨대학 폴 윌리엄스 교수 등의 ‘인도불교사상’(씨·아이·알)은 대승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준다. 대승불교는 출가 수행자 중심의 운동이었으며, 그 대승을 지향하는 스님들 또한 적어도 4세기까지는 독립된 교단에서 활동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인도불교를 전공한 저자가 근래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반영해 집필한 이 책에 따르면 불교에 있어 ‘교단분열’은 대승이냐 소승이냐 하는 교리적 불일치와는 무관하며 승원의 계율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다. 승단에서 중시한 것은 기독교 전통과는 달리 ‘교리의 조화’가 아니라 ‘행위의 조화’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비구가 특정 학파의 율장에 의해 수계 받고 그 율장에 따라 생활하는 한 그는 그 학파의 승려로 규정될 뿐 그의 사상이나 주장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승을 따르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고통을 겪는 중생을 버리는 어떠한 열반 속에도 안주하지 않겠다’는 궁극적인 동기와 수행자의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통찰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통찰은 부파의 소속과 상관없이 다양하게 전개됐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 별도의 율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과 대승경전에서 아라한만을 추구하는 소승의 해탈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승단 제도에 대해선 어떠한 적대감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 동아시아 구법승들이 인도에 갔을 때에도 여전히 대승의 비구와 비대승의 비구가 한 공간에 생활했다고 기록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은 어떻게 편찬됐던 걸까? 혹시 대승불전 편찬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마치 붓다의 말로 포장했던 아닐까? 저자는 먼저 폴 해리슨 등 학자의 연구결과를 인용해 초기 대승불교도들의 다수가 산림에 거주하는 철저한 수행자들이었음을 명시하고, 경전은 그들 자신의 견해가 아닌 초기부터 알려졌던 ‘불수념(佛隨念)’ 수행에 의한 깊은 명상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불수념 수행은 부처님을 관상(觀像)하는 명상법으로 그것을 통한 깊은 통찰에서 붓다의 영상과 메시지를 거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를 체계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비로운 붓다는 열반 후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열반에 들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또 당시 많은 승원에 붓다의 사리가 모셔져 있었고, 그 사리를 통해 붓다가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승단의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으로 그는 분석했다.
저자는 또 일각에서 대승불교 기원이 재가자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와 관련해 특정 경전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나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읽은 데에서 비롯된 오류로 간주했다. ‘유마경’ ‘승만경’ 등 경전은 경쟁관계에 있는 승려들과 연결된 비대승적인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재가 설시자의 수사적 기교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그레고리 쇼펜이 ‘대승불교의 기원 혹은 성장과 재가자와의 광범위한 관련성을 입증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고고학적 사실을 언급하며 인도 비문에 대승불교에 대한 언급이 기원 후 5~6세기까지도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은 점과 대승경전에 비구니와 재가자가 등장하지만 비구들의 이미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그 증거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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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사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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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책은 대승불교의 성격과 기원을 비롯해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초기불교, 그리고 인도의 주류불교(부파불교)와 주요 학파들의 철학적 견해, 대승불교의 종교적·철학적 발전은 물론 그동안 외면되거나 잘못 이해된 탄트라 불교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열린논단] 불설비불설 논의에 대한 검토 / 마성 |
-대승경전 찬술 어떻게 볼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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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원래 불설․비불설 논쟁은 대승경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의는 대승불교 흥기와 동시에 제기되었다. 그 증거는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불설․비불설 논쟁은 대승경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의는 대승불교 흥기와 동시에 제기되었다. 그 증거는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승경전의 진위 여부는 판가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대승경전이 ‘불설’이라고는 하지만 ‘친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의 성립과 대승경전의 편찬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위상이나 권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1901년 ‘大乘非佛說論’을 제기하여 승적을 반환할 수밖에 없었던 무라카미 센조(村上專精, 1851-1928)는 “대승경이 역사적인 불타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확립은 대승비불설론과 관계가 없다.”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필자가 ‘대승비불설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관한 논의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諸學說을 검토해 보고, 제3장에서는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본 뒤, 제4장에서는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저술을 佛說로 假託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의는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이 직접 설한 친설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II.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諸學說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대승경전이 찬술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대승경전이 찬술된 뒤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그 독자적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승경전은 일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고 여러 역사적 발전 단계를 거쳐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형태로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면 대승경전의 성립에 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이른바 대승불교의 원류 혹은 기원에 관한 탐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불교의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첫째,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러한 작업을 시도한 학자는 헨드릭 케런(Hendric Kern, 1833-1917), 막스 뮬러(Max Müller, 1823-1900), 케이트(A. B. Keith, 1879-1944), 체르바스키(Th. Stcherbatsky, 1866-1942) 등이었다. 케런은 대승불교가 우빠니샤드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大衆部는 대승과 공통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대승은 ?바가바드 기따(Bhāgavad Gītā)?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바가바드 기따?와 ?法華經?의 유사한 偈句를 대조함으로써 ?바가바드 기따?의 박띠(Bhakti) 신앙이 대승경전 불타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윈터니츠(Maurice Winternitz, 1863-1937)도 케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이들은 대승불교가 대중부에서 기원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외부적 요인도 영향을 받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체르바스키는 대승불교는 經量部에서 발전한 것이며, 대승불교의 汎神論的 佛陀觀은 힌두교의 神觀과 우빠니샤드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무르티(T. R. V. Murti)는 神性, 信愛(Bhakti), 절대에 관한 힌두교적 관념으로부터 대승불교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케런, 막스 뮬러, 케이트, 체르바스키 등의 견해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외부적 요인은 간접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도 힌두교의 사상․종교․문화가 대승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명확한 흔적은 아직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샴(A. I. Basham)은 최근에 대승불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 배경과 이란 종교와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고, 슝가 왕조, 쿠산 왕조를 거치면서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전통적인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혼란의 시대는 실로 새로운 종교운동, 즉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는 대승불교나 인도의 비쉬누 신앙, 시바 신앙 등의 종교적 헌신 운동의 시작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아미타불(amitābha), 보살 등의 사상은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특히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 사상의 형성에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증거를 네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바샴은 결론적으로 보살 사상의 여러 측면에 걸쳐 이란 종교의 영향이 인정될 뿐 아니라 보살 사상 자체도 그 출발점은 부분적으로 이란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둘째,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은 대승불교의 뿌리를 ‘역사적 붓다’에서 찾고자 시도된 것이다. 그 결과 도달한 대표적인 두개의 가설은 대중부 기원설과 재가불탑 기원설이다. 먼저 대중부 기원설부터 검토해 보자.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기원을 대중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그의 저서 ?大乘佛敎史論?에서 대승불교의 원류를 대중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1결집의 전설과 부파불교의 교리를 설한 자료 등에 의해 菩薩藏이 존재하였음과 大衆部系의 諸部派 교리가 대승불교의 교리와 공통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멸 100년간의 대승에 관한 소식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탄식했다.
나리나끄샤 둣뜨(Nalinaksha Dutt)는 상좌부계의 說一切有部가 대승불교의 발전에 공헌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대중부가 곧 대승의 선구자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는 佛身論, 阿羅漢을 인간적으로 보는 점, 空思想, 法無我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의 기원에 기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대승불교가 어떤 것에서 파생되었다면, 그것은 대중부로부터이다.
이것조차도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어떤 혁신을 가져오기는커녕, 전통적인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측면들을 새롭게 강조한 것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빠윳또(P. A. Payutto)도 대중부가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대중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교리적인 공통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중부 외에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는 부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교리적 유사점은 단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와의 관련성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승불교의 대중부 기원설이 비판받기 시작했다.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은 ?大毘婆沙論?을 연구하여 그 중 설일체유부에 의해 격렬히 비판되는 譬喩者(Darṣṭāntika) 교리를 명확히 하여 비유자의 설에는 대승불교와 공통되는 교리가 보이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아카누마 지젠(赤沼智善)은 대중부의 교리로 밝혀졌던 自性淸淨心說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에도 보이며, 팔리 니까야(nikāya)에도 이미 설해져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九分敎․十二分敎․十地說․頭陀說 등을 단서로 하여 대승경전에 이용되고 있는 부파교리를 상세히 추구하여 化地部와 法藏部 등이 대승경전과 관계가 있음을 명확히 밝혔다. 또한 心理說의 발전에 대해서도 대승불교 특히 有部의 心理說과 관계가 깊음도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로 인해 대중부 기원설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한편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대승의 기원은 교리의 기원임과 동시에 교단의 기원이기 때문에 교단으로서의 대승불교가 초기에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였으며,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대승의 ‘교단으로서의 기원’을 문제 삼았다. 그는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불탑 숭배이고, 그 중심은 재가신자의 활동이었으며,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佛傳文學과 佛塔信仰이 대승불교의 원류라고 주장했다.
대승불교는 대중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시즈타니 마사오(靜谷正雄)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를 기반으로 原始大乘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또한 폴 윌리엄(Paul Williams)도 히라카와 아키라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설과는 정반대로 대중부 혹은 다른 진취적인 사상을 가졌던 부파불교의 승가 집단에서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를테면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폴 해리슨(Paul Harrison), 조나탄 실크(Jonathan A. Silk),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등이다. 이들의 연구 방법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쇼펜과 해리슨은 비문의 증거를 바탕으로 대승불교운동은 출가수행자 집단에서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모다 마사히로는 쇼펜의 연구 방법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헌적 중심의 연구가 간과해 온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파겔(Ulrich Pagel)은 ?大寶積經?에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은 수적인 면에서 거의 대등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거로 쇼펜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안성두는 쇼펜의 논의는 어느 집단이 대승경전의 찬술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고, 또한 쇼펜이 의거하는 소수의 비문적 자료가 대승불교의 광범위한 시기를 커버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운동의 주체가 부파교단의 출가자 집단이었다는 주장과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그룹, 즉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을 주도했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두 가설 모두 그 뿌리를 ‘역사적 붓다’에 연결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시모다 마사히로는 “전자는 교설이나 교의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는 것이며, 후자는 교단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아 불교사 안에 위치 설정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즉 ‘역사적 붓다’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그 의미를 측정하려 하고 있는 점에서는 양자가 완전히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가 부파불교 시대의 대중부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대승경전의 연원은 붓다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어떤 집단에서 비롯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보면 대승경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보면 대승불교는 대중부를 비롯한 諸部派에서 유래했다는 증거와 불전문학과 불탑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흔적이 동시에 발견되고 있다. 특히 교단사적으로 보면 ‘비구승가(Bhikkhu- saṅgha)’와는 별도로 ‘보살가나(Bodhisattva-gaṇa)’가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출가자 집단에서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주도했다고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만일 대중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대승불교 교단이었다면 굳이 별도의 大乘戒經을 찬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부는 이미 ?摩訶僧祇律?이라는 율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집단이 대승불교의 성립을 주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대승불교는 다양한 외적인 요인과 불교 내적인 복합적 요소가 얽혀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전된 사상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다른 이질적 요소를 통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III.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親說論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佛說論이다. 그러나 대승의 논사와 많은 학자들은 친설론과 불설론을 구분하지 않고 논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친설론과 불설론을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친설론에 관한 논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아니면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지어낸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대승경전은 석가모니불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부파교단의 비구들은 대승경전은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그러자 대승불교도들은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찾아와서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비난하더라도 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내부를 단속함과 동시에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임을 증명해 나갔다. 그 증거는 ?大品般若經?, ?大智度論?, ?大寶積經(Mahāratanakūṭa)?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대승경전이 친설임을 언급한 문헌은 한역 ?增一阿含經? 권1 「서품」, ?菩薩處胎經? 권7, ?大智度論? 권100, ?金剛仙論? 등이다. ?증일아함경? 권1 「서품」에 “세존의 설법은 제각기 다르다. 보살은 뜻[菩提心]을 세워 대승을 따른다. 여래는 이런 갖가지 차별을 모두 설하며,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 六度無極(六波羅密)을 설한다. … 契經은 一藏, 律은 二藏, 阿毘曇經은 三藏, 방등과 대승의 뜻은 깊어 여러 契經을 雜藏으로 삼는다.” 또한 ?보살처태경? 권7에 “迦葉이 阿難에게 말하되, ‘菩薩藏이든 聲聞藏이든 戒律藏이든, 佛陀가 설한 敎法은 一言一字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한 ?대지도론? 권100에 “붓다 입멸 후, 문수와 미륵 등 諸大菩薩이 阿難을 이끌고서 이 摩訶衍(大乘)을 結集하였다.” 그리고 ?금강선론?에 “여래는 철위산 밖에 머물러 있되, 다른 세계에도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여래는 그러한 二界의 중간에서 無量한 諸佛과 함께 모여 佛話의 經을 설해 마치고 大乘의 法藏을 결집하기 위해 다시 大衆을 불러 모았다.” 이러한 經證은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니까야나 有部의 論書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 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하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 대표적 논사는 無着(Asaṅga, 310-390), 世親(Vasubandhu, 400-480), 淸辨(Bhāvaviveka, 500-570) 등이다. 무착은 그의 저서 ?大乘莊嚴經論? 제2 「成宗品」에서, 세친은 ?釋軌論(Vyākhyāyukti)? 제4장에서, 淸辨은 ?中觀心頌(Madhyamaka hṛdaya kārikā)?과 ?중관심송?의 自註 ?思擇炎(Tarkajvārā)?에서 대승이 불설임을 적극적으로 논증해 나갔다.
그런데 도쿠가마(德川) 시대 중기에 최초로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가 그의 저서 ?出定後語?(1745)에서 이른바 ‘大乘非佛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불교경전은 시간을 두고 발달했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차츰 발전해 갔다는 이른바 加上說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대승경전은 불멸한 지 500년 뒤에 차례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결코 붓다의 친설이 아님을 지적했다. 이 책의 출판 이후 많은 반박서가 저술되었다.”
한편 자이데와 싱하(Jaideva Singh, 1893-1986)는 체르바스키의 ?열반의 개념? 解題에서 붓다는 통속적 교리(vyakta-upadeśa)와 심오한 교리(guhya-upadeśa)를 동시에 설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심오한 교리란 곧 대승을 뜻한다. 붓다는 두 가지 교설을 동시에 설했지만 심오한 교리는 통속적 교리보다 심오하기 때문에 뛰어난 제자들에게만 가르쳤다고 했다.
그는 대승경전이 친설론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경전을 ‘역사적 붓다’에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주지하다시피 대승불교운동은 기원전 100년경에 일어났으며, 그때 ?般若經?의 원형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부파분열이 끝난 시점이다. 그리고 기원후 1년부터 초기대승경전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대승이 붓다의 친설임을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불멸 100년간의 대승에 관한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된 신화는 ?대지도론?에 언급되어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승경전은 불멸후 보살과 신들에 의해 은밀히 보관되어 왔는데, 불멸후 500년경에 용수 등의 보살이 출현하여 깊은 바다에서 꺼내왔다는 것이다. 청변은 ?사택염?에서 “대승경전은 성문이 아니라 보현․문수․미륵 등에 의해 결집되었다거나, 혹은 龍(Nāga)들에 의해 결집되어 용궁(Nāgaloka) 등에 보관되었다가 그것을 인간세계에 퍼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 자체가 대승경전은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이라는 주장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초기경전인 아함경도 불멸 후 3-400년 이상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설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아함경 이후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더구나 불설일 리가 없다. 대승경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경전은, 현재의 형태는 어찌되었든 역사적으로 보면 그 원천은 붓다의 설법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대승경전은 사정이 다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불멸 후 50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욱 붓다의 직접적인 설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대승불교의 특징은, 거기에 나타나는 붓다가 ‘역사적 붓다는 아니다’라고 하는 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대승의 기원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으려는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수로를 파서 ‘역사적 붓다’라고 하는 원류에 다다르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아직도 결실을 보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는 “대승경전은 불멸후 배출된 여러 불교학자가 자기들의 깨달은 바를 佛說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뒤에 여기에 다시 여러 학자가 고치고 보태어 정리한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째 불설론에 관한 논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이 논의는 대승경전의 정통성(orthodoxy)과 정법성(authenticity)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Nikāya, 尼柯耶)와 아가마(Āgama, 阿笈摩)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첫째,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설의 기준’이었다. 불설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설의 기준인 ‘四大敎法’(Mahāpadesa)과 ‘四依’(catuṣ-pratisaraṇa)이 등장하게 된다. 현대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대승경전에 대한 해석학적 방법론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불설론은 대승경전은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대승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음을 논증함으로써 대승경전이 니까야나 아가마보다 오히려 위대한 가르침임을 강조한다.
명치(明治) 이후 일본의 불교학계는 서구 학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불교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센조(村上專精, 1851-1928)와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7-1930)은 서구 학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 논의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村上는 1901년 출간된 ?佛敎統一論?에서 ‘대승비불설’을 주장하여 불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뒤 村上의 ?佛敎統一論?에 대한 비판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村上는 승적을 반환하게 되었지만 그는 결코 대승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대승비불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대승이 붓다의 直說임을 대장경에서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大乘佛敎史論?(1903)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대승불설론을 옹호하고 있으나 일반인들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불설․비불설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의 ?根本佛敎?(1910), 이토 기켄(伊藤義賢)의 ?大乘非佛說論の批判?, ?續大乘非佛說論の批判? 등의 저술을 통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가장 최근에는 와타나베 쇼코(渡辺照宏, 1907-1977)의 ?お經の話?(1967),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의 ?佛敎經典成立史論?(1977),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1901-)의 ?經典―その成立と展開?(1980) 등이 출판되었다. 이 3권은 모두 국내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후자의 불설론을 증명하기 위해 논증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도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이라는 논증은 신화적 논증에서부터 문헌적 고증, 역사적 고증, 사상적 해석, 해석학적 논증 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친설론은 대승경전을 ‘역사적 붓다’에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니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비록 ‘역사적 붓다’의 친설은 아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논의는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강조하기보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에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부각시킨다. 이 주장은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 또한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친과 청변이 당시에 근본결집(mūlasaṅgīti)이 산실되었다는 주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제 부파 간의 결집 전승의 상위를 다룬 것도 이에 해당된다. 권오민은 ① 전승자의 오류나 자의적 개변을 지적한 경우, ② 불설의 오류를 지적한 경우, ③ 견해가 달라 誦持하지 않는 경우, ④ 독자적으로 편찬한 경이라고 한 경우 등의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와타나베 쇼코(渡辺照宏)는 자신의 저서 ?お經の話?(1967)에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전승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는 제1결집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성전의 편집형식에 문제가 있으며, 다른 부파가 전승한 아함과 비교할 때 니까야가 가장 古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제1결집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 증거로 가밤빠띠(Gavāṃpati, 憍梵波提)의 설화를 끌어들인다. 그는 그때 天界의 시리사(Siriśa)殿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하깟싸빠(Mahakassapa, 大迦葉)가 使者를 보내 결집에 참여하라고 했지만, 붓다가 입멸했다는 말을 듣고 그도 곧바로 입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증거로 뿌라나(Purāṇa, 富樓那)의 일화를 소개했다. 뿌라나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교여행을 마치고 마가다국의 수도로 돌아왔을 때, 500명의 장로들이 편집한 성전을 승인해 달라고 권유하였으나, 뿌라나는 자신이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그대로 수지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의 결집에 참가하지 못한 다수의 수행승들이 별도로 집합하여 성전을 편집했다는 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玄奘이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교외의 다른 장소에서 대중부가 결집한 유적을 보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500명의 회의와는 별도의 성전 전승을 가지는 집단이 몇 개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증거로 제시한 가밤빠띠의 설화나 뿌라나의 일화는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하며, 玄奘의 여행기 또한 수세기가 지난 일이라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주장은 니까야나 아가마의 전승에 대한 의문만 증폭시킬 뿐,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하는데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최근 권오민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비불설이다. 대승경이 대승론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 역시 유부 등에 의해 취사되고 개변 증광 찬술된 제경의 집성으로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받았을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불타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비담마(abhidhamma) 논장을 승법(勝法)으로 간주하는 상좌부의 니카야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설․비불설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김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실익은 없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처음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의 친설 논쟁에서부터 니까야와 아가마도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경전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IV.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
이 부분은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는 왜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자신의 저작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假託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이며, 그들의 태도는 바람직했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믿거나 經典成立史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논의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제2장에서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집단이 어느 그룹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 실제로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유포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출가자 집단이었을까? 아니면 재가자 집단이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는 초기 대승경전 작가들이 재가자였을 것이라는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의 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신자나 재가자는 물론 각자가 아니다. 신자는 붓다에게 귀의하여 ‘佛說’을 믿고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가 쓴 책을 불설이라는 체제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또한 이른바 재가자가 가령 재가의 구도자로서의 보살이라 하여도 그들도 또한 구도자이며 이미 도에 다다른 사람은 아니다. 스스로 자각을 갖지 않은 자가 覺者(佛)라는 입장에서 쓰여진 대승경전을 자작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일이다.
그는 대승경전을 직접 편찬한 자들은 출가자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승경전은 스스로 불타가 되었다고 하는 자각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깨달은 것, 즉 자기의 경험을 사상으로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승경전 작가가 스스로 각자가 되었다는 논거로서 미륵의 ?大乘莊嚴經論? 및 그에 대한 世親釋의 기술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논에) 성립하고 있으므로(siddhes) 라는 것은 만약 다른 사람이 正覺하여(abhisambuddhaya) 설하고 그것이 불설인 것(buddha-vacanatva)으로서 성립하고 있으면 지금 정각하여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곧 부처(buddha)이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彌勒․世親 무렵에는 석가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현재 正覺하여 그 설하는 것이 佛說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라면 그 說者는 곧 불타라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미륵․세친의 말을 인용하여 대승경전이 자기는 정각한 자, 즉 불타라는 자각을 지녔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책이 佛說이라는 체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스스로 정각했다는 자각이 없는 자, 가령 신자나 재가자가 어떤 사상을 佛陀의 眞意라고 확신하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經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대승경전은 부처를 믿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된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며, 기존 연구의 공통된 잘못은 바로 이점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우에다 요시부미의 견해에 동의한다. 비록 처음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가 재가자 집단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증득한 覺者라는 자각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스스로 覺者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깨달은 자가 설하는 것은 곧 불설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을 불설로 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성두도 “불교에서 해탈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기에 만일 누가 반야바라밀이나 진실재로서의 진여에 대한 불가언설적 인식을 통해 석가모니불과 동일한 해탈적 인식을 얻고 또 이를 스스로 자각했다고 한다면, 삼매 속에서 획득된 자신의 ‘해석’의 확실성을 ‘불설’과 동일시하고 ‘불설’로서 선언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직접 붓다로부터 친히 법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은 스스로 ‘깨달은 자’ 혹은 ‘붓다로부터 직접 법을 들었다’라고 하는 자각을 가진 자들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어떤 수행법을 통해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선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붓다에 대한 상기(buddha-anusmṛti)와 같은 수행법은 초기부터 매우 잘 알려져 왔고 그것이 주는 효과는 수행자가 마치 지금 붓다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주삼매경?에서 수행자는 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하루 종일 나아가 일주일 내내 관하는 관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아미타불의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아직 듣지 못했던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경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학파에서 붓다의 우월성에 근거한 새로운 종교적 이념이 등장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항시 현존하는 붓다의 대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붓다가 됨으로써 이런 불멸성을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정 속에서 살아 있는 붓다를 친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거나 대승경전을 받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불설의 기준인 잣대를 확대 해석하였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근에 권오민은 “유부에 의해 불설의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대승경전이 찬술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불설의 眞僞 기준인 四大敎法과 四依에 의해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이와 같은 근거로 대승경전을 찬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직접 붓다로부터 친히 설법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 찬술자가 ‘반주삼매’와 같은 종교적 체험 상태에서 직접 붓다로부터 들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이라고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불설로 가탁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대승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차단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설로 가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불설의 진위 기준에 의한 대승경전 찬술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전자의 경우는 불설로 가탁하면서도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후대에 거짓말쟁이로 비난받을 것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증일아함경? 권1 「서품」에 “아난다가 말하기를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여래께서 설법하심을 보았지만 그런 법은 여래에게 듣지 못하였나니 어찌 그런 법에 의심이 없겠는가. 비록 내가 보았다 말하여도 그 뜻은 잘못이요 미래의 중생에게 거짓말이 될 것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후대의 비난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에 대해 김철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위경은 보통 진경과 쉽게 구별할 수 없게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들 위경제작자는 독특한 사상을 펼 정도로 지적인 한편 쉽게 위경임을 의심받게 만든 어리석음도 가졌다고 추리해야 한다. 또 만일 그가 새 깨달음을 전할 뜻이었다면, 그는 실제는 석존을 능가함에도 굳이 석존을 의탁해 주장을 폈거나, 아니면 논서에 불과한 내용을 권위를 높이려 위경을 편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진리를 전하면서 가장 기본적 진실이 필요한 배경 설주 등[六成就]을 거짓으로 꾸민 이중성이 문제되며, 본 내용이 진리라 해도 결국 거짓말쟁이의 진실과 같은 결점이 있게 된다.
김철은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 즉 “진리를 전하면서 가장 기본적 진실이 필요한 배경 설주 등을 거짓으로 꾸민 이중성이 문제되며, 본 내용이 진리라 해도 결국 거짓말쟁이의 진실과 같은 결점이 있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자신이 체득한 것이 있으면 자기 목소리로 표현하면 된다. 이를테면 팔리 七論이나 有部의 七論은 물론 復註書까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독 대승경전의 찬술자들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설로 가탁했다. 후대의 대승논사들도 자신이 저술한 책에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학문으로 말하면 해석학에 해당된다. 즉 어떤 교설에 대해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것을 불설이라 생각하고 저것은 비불설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견해나 철학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 붓다의 가르침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밝히는 해석학은 어느 시대 누구나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사상은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대승경전 찬술자가 종교적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했을지라도 스승인 붓다의 가르침과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구분해서 전해야 후대의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았기 때문에 스승인 붓다와 동격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불설의 기준에 의해 대승경전을 찬술했다고 해서 불설로 가탁한 것까지 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불설로 가탁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초래하였고, 후학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V.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친설론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불설론이다.
친설론은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대승경전인 ?대품반야경?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 및 ?대보적경?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임을 주장함과 동시에 비구들의 비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니까야나 유부의 논서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후대의 대승 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임을 적극적으로 논증해 나갔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도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대승경전과 ‘역사적 붓다’와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설론은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설의 기준이었던 四大敎法을 四依로 대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변론했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 덕택에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은 아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불설로 받아들인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강조하기보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 또한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성립 연대나 대승경전이 성립된 연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나 아가마와 대승경전은 그 전승의 계보나 체계․사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논리 전개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이 점을 간과하고 불설․비불설 논의를 이렇게 전개하는 것은 모두에게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끝으로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자신의 저서를 불설로 가탁했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여 붓다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붓다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저술을 전승된 경전과 구별하지 않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잘못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위로 인해 후대에 불필요한 논쟁과 혼란을 초래시켰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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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니까야나 아가마와 대승경전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김철은 이러한 주장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듯 “이 논의는 불교 본질면에서는 독화살 출처를 찾는 것처럼 그 실익이 적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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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법보신문 [ 사대교법,사의,법성,불설,불교,성교 ]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까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다.(본지 1010호 10면)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필자의 반론문에 대한 권오민 교수님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평소 학문하는 자세나 열정과 성실함을 잘 알고 있기에 존경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려 작성한 논문을 필자가 오독한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문제의 논문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급히 읽고 반론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임을 인정한다.
이 논문의 가치는 불설/비불설 혹은 요의/불요의(유부와 대승)의 논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막연히 각 부파간은 물론 대·소승 간에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논문에서 유부의 불설론은 물론 하리발마나 슈리라타 및 무착·세친·청변의 불설론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밝힌 점은 높이 평가한다. 만일 여기서 논문을 끝내고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필자가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논자는 반론문에서도 이 논문이 ‘종파적 논쟁’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논자의 주장 자체가 종파적 논쟁이다. 오늘날 학자들의 논문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설/비불설을 간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온갖 학문적 방법론을 동원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설/비불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논문에서 불설/비불설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상, 이 문제는 결국 종파적 신념을 초월할 수 없다.
논자는 반론문에서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승단에서는 법맥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에 따라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생명줄과 같다. 현재 상좌불교에서 단절된 비구니 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교단사를 무시한 연구는 철학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승단의 전승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단이 단절되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논자는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불설이라고 주장했던 논리적 근거는 타당했는가. 전통을 계승한 상좌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불설의 근거로 삼았던 잣대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 잣대만 제시하고 있지만, 후술할 세 번째 잣대는 전통성에 대한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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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했던 인도 녹야원. | 첫째, 불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원래의 잣대는 ‘사대교법(Mahāpadesa)’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의(四依)를 추가함으로써 기준이 되는 잣대를 변경시켰다. 그래야 불설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팔리본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면 불설이다’였지만, 유부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며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다’로 잣대를 약간 수정한다. 나중에는 다시 이를 근거로 사의를 추가하게 되었다.
둘째, 상좌부를 제외한 제 부파와 대승에서는 ‘불설(佛說)과 성교(聖敎)’를 엄격히 구분했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래야 이를 근거로 법성과 정리에 합치하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좌부에서는 처음부터 ‘불설과 불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팔리어 ‘붓다와짜나(Buddha-vacana)’는 ‘붓다의 말씀’(佛說, the word of the Buddha)이고,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는 ‘붓다의 가르침’(佛敎, the teaching of the Buddha)이다. 즉 불설이 곧 불교라는 뜻이다.
그런데 후대에 Buddha-sāsana(佛敎)를 성교(聖敎, Skt. buddha-śāsana)로 변경시키고, 여기에 아함이나 니까야를 포함시킨다. 팔리어 대문자 Buddha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뜻하지만, 소문자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상좌부 전통에 의하면, “붓다 재세시 그의 가르침은 Buddha-vacana, Buddha-sāsana, Satthu-sāsana(스승의 가르침), Sāsana, Dhamma와 같이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었다.” (Walpola Rahula, 『One Vehicle for Peace』 참조) 이와 같이 ‘붓다와짜나’와 ‘붓다사사나’는 원래 같은 의미로 쓰였다. 상좌불교에서는 지금도 불교를 ‘붓다사사나’로 부르고 있다. ‘불설과 성교’를 구분한 자체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상좌불교에서는 팔리문헌을 정전(正典)과 비정전(非正典)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전(canon)은 붓다로부터 전승된 정법이라는 뜻이고, 비정전은 불제자들이 불설을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결집과 마찬가지로 정법을 고스란히 전승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단사적으로는 파승(破僧, sanghabheda)의 정의가 잣대가 된다. 파승은 승단의 분열을 말한다. 붓다는 파승을 오역죄에 포함시켰다. 승단의 분열은 정법의 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상좌부를 제외한 다른 부파에서는 교리적 논쟁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분열의 명분 혹은 파승의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첫째와 둘째의 잣대는 불설/비불설 혹은 정법/비법에 관한 논쟁이었다면, 셋째의 파승은 전통/비전통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단사적으로는 세 번째 잣대가 가장 중요하다.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는 글자 그대로 ‘장로들의 정교(正敎)’라는 뜻이다. 즉 불멸 후 제1결집을 주도했던 500명의 장로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붓다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다. 그들은 파승으로 떨어져 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상좌부가 부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좌부 장로들은 그러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했다. 역사적으로 상좌부의 계맥이 단절되었을 때, 다른 나라의 장로를 초빙하여 계단을 복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소승 논사들은 상좌부를 여러 부파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자기 부파나 대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이에 대해 전혀 반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반론 자체가 없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통을 고수한 원래의 상좌부만 살아남고, 다른 부파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따라서 니까야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상좌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논자는 ‘아가마(Āgama, 阿含)’와 ‘니까야(Nikāya, 部)’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엄격히 말해서 ‘아가마’와 ‘니까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아가마는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전승한 것이다. 부파 간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가마와 니까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아가마와 니까야를 같은 분류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자체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논자는 필자가 대승을 모른다고 혹평하고 있지만, 대승의 근원은 붓다에까지 소급된다. 붓다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대목은 대승의 이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교단사적으로 말하는 대승교단(보살가나)는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불교였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부파교단 내에서의 불설/비불설의 논쟁과 부파교단과 보살가나와의 논쟁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현재의 조계종은 상좌부에, 군소종단은 부파교단, 전통과는 계통이 다른 원불교는 대승교단(보살가나)에 해당될 것이다.
끝으로 논자가 반론문에서 지적했듯이 초기경전의 전승과정에 대해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성립 과정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논자는 그러한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현존하는 니까야가 불설이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한 학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논자 스스로 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팔리문헌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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