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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과 자결, 예류자와 여인

우공(友空) 2015. 11. 24. 09:57

 

아라한과 자결

 

http://blog.daum.net/bolee591/16155228

 

http://blog.naver.com/msrh/20059169943

 

 

 

 

예류자와 여인

 

http://blog.daum.net/bolee591/16155309


아래는 요약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가족처럼)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가족처럼 생각해도 동요되면?          부정관을 닦으라.

부정관을 닦아도 욕망이 생기면?      감각기관 문단속을 하라.(특징과 속성을 취하지 말라)





아래는 각각의 원문 - 2번째 링크[네이버]는 제외






 

아라한의 자살과 사마시시, 불리한 내용까지 기록된 니까야의 위대성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막연하게 죽음을 동경하던 때가 있을 것이다. 주로 청소년기 때 일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고 괴로우면 막연하게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낭만적이고 막연한 죽음에 대한 동경은 극한에 이르는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극기훈련같은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 하는 듯한 극기훈련을 겪고 나면 언제그랬느냐는 듯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하나의 갈애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갈애는 크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여기서 갈애라는 용어는 사전적 의미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존재의 근원적 욕망이다. 마치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실 때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이런 갈애는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는 나의 것’ ‘나의 몸’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죽고 싶다는 것 역시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 대하여 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말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

 

오월이 오면 생각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다. 노대통령이 죽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그 때 당시 두 가지 커다란 시각이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이고, 또하나는 노무현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서 선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하여 굳이 자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의 살신성인또는 투신공양등으로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설령 자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자결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노무현의 죽음이 단지 괴로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의로운 죽음으로서 대의를 위하여 희생한 우국지사의 충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에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표현 하였다. 견디다 못해 괴로워서 자살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추모의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 되고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급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워 하였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나 아쉽게 생각한다. 노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해 본다. 한나라에 대통령을 지낸 어른이 살아 있다는 것은 후임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두고 두고 아쉬운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죽었다. 그런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 선택에 대하여 살신성인, 투신공양, 자결 등으로 불러주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결단을 내려 죽었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본다면 자살이 맞다.

 

노무현대통령이 자살했다고 하여 노무현의 가치가 결코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살했다는 그 것 자체는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자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마음 하나 잘못 먹으면 존재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장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매번 부딪치는 문제에 대하여 네 탓, 내 탓이라 하고,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니까야에 있다고 하였다.

 

내 탓이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수 많은 괴로움을 겪는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네 탓또는 내 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 괴로움의 원인이 남의 탓 또는 내 탓에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범부들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좀 양식이 있는 사람들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내 탓이라고 한다.

 

내 탓이라는 말은 최근 가톨릭에서 자주 쓰고 있다. 그래서 내 탓이오!” 하는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내 탓으로 보는 것은 남의 탓으로 보는 것에 비하여 진일보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내 탓으로 보는 견해는 대승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발원문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으로 보는 견해이다. 자신이 지은 업대로 그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내 탓 으로 보는 견해는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경전적 근거가 없는 말이라 한다.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내 탓으로 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건이 발생하여 괴로움이 발생하고 슬픔과 상처가 생겼을 때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보는 것은 정견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 고통에 대하여 올바른 생각 즉 정견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사람 탓이라고 하였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적을 받은 사람은 원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서로 상처받을 것이다. 이런 상처의 본질에 대한 것이 법구경에서 그 사람은 나를 욕했고 나를 때렸다(Dhp3)”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욕하고 때리고 굴복시고 더구나 빼앗아 갔을 때 사람들은 상처 받는다. 그래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탓으로 돌려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문제 또한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말한다.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이를 남의 탓이라고 하지 않고 내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하면 어떨까. 그렇게 가슴을 치면 괴로움이 좀 더 나아 질까?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질까?

 

부처님제자의 자살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에서 자살하면 좋지 않은 곳으로 간다고 한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등 악처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 허용하였을까. 전재성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탁발하다가 남의 준 것을 먹다 보면 콜레라 등 병에 걸렸을 경우가 있습니다. 경에도 있지만 치유 될 수 없는 병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부득이하게 뱀에 물린다든가 해서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 자결을 할 때 부처님이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라한에 한해서.. 아라한이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탐욕이 없고, 분노가 없고, 미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허락을 했어요.

 

조금이라도 남을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원망할 수 없었어요. 수행이 완전한 경지에 오른 사람,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에 한해서 자살이 허용된 것이지 다른 사람은 자살할 수 없었어요.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거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전재성박사의 법문에 따르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 아라한에 한해서라고 한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미워하는 감정이 없이 때문에 남의 탓 또는 내 탓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디까비구의 자결

 

이와 같이 부처님은 번뇌 다한 제자에 한해서 자살을 허용 하였는데, 초기경전에서 제자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실려 있다. 상윳따니까야 고디까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벨루바나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고디까가 이씨길리 산 중턱의 검은 바위 위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다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두번째에도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세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세번째에도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네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네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다섯 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여섯 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일곱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때 존자 고디까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제 나는 여섯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

 

그때 악마 빠삐만이 존자 고디까가 품은 생각을 알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 이야기했다.

 

[빠삐만]

그대는 위대한 영웅,

크게 슬기로운 자 초자연적인 힘과 명예로 빛나네.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초월한 자 눈 있는 자여, 그대의 발에 예배드리네.

 

위대한 영웅이여,

죽음을 초극한 분이여 그대의 제자가 죽음을 원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네. 빛의 주인이시여, 그를 말리게.

 

세존이시여,

세상에 알려진 분이여 어떻게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채

가르침에 기뻐하는 그대의 제자가 배우는 자로서 죽고자 하는가?”

 

그때 존자 고디까가 칼을 들었다.

 

한편 세존께서는 그가 악마 빠삐만인 것을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네.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열반에 들었네."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우리들은 지금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간다. 거기서 양가의 자제 고디까가 칼을 들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행승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존자 고디까가 평상 위에 존재의 다발에서 해탈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너희들은 저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수행승]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모과나무로 만든 황색의 비파를 들고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써 말했다.

 

[빠삐만]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세존]

 "슬기를 갖춘 영웅은 항상 선정을 즐기면서 참선하네.

목숨에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으로 정진하네.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

 

[송출자]

 "악마 빠삐만은 슬픔으로 가득찬 나머지

허리의 비파를 떨어뜨리고 우울해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네."

 

(고디까경-Godhikasutta,상윳따니까야 S4.3.3, 전재성님역)

 

  고디까경(S4.3.3).docx  고디까경(S4.3.3).pdf

 

 

 

 

 

 

 

Sona Hill and Udaya Hill, Rajgir, Bihar, India

 

 

 

경에서 고디까비구는 여섯번에 걸쳐 일시적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번뇌를 소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섯차례에 걸쳐 퇴전불퇴전을 반복하였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고디까는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라고 생각하여 자결을 결심한다. 그래서 칼로 자신의 목의 정맥을 끊어 자결하였다. 그렇다면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한 고디까 비구는 어디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고디까의 자살소식을 듣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고디까비구가 자결한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고디까 비구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즉 고디까 비구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하였다.

 

사마시시(samasisi)

 

부처님은 아라한에 대하여 자살을 허용하였다. 고디까의 자살 역시 그런 범주로 볼 수 있다. 고디까비구가 여섯번에 걸쳐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살한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 사마시시란 무엇일까. 그리고 부처님이 아라한에 한해서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느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사마시시는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 처음 나타나는 단어로 여겨진다. 이것은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 문자적으로는 머리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가지 목적이란 최고의 성위인 아라한됨과 완전한 열반(반열반=입멸)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입적한 것을 말한다.

 

주석서들은 병이 낫거나, 자세가 끝나거나, 목숨이 다하면서 아라한과를 얻고 바로 반열반에 드는것을 사마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출처: S4.23 고디까 경 - 제자의 자결을 말리라 vs 갈애를 뿌리뽑아 열반에)

 

 

고디까경에서 부처님은 고디까가 자결하여 죽었을 때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디까 비구가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하였으므로 아라한이 되었고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은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동시에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그래서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에서도 사마시시에 대하여 동시(sama)’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디까비구는 아라한이 되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석서에 따르면 사마시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isi)’  병의 사마시시 (rpoga-samasisi)’  목숨의  사마시시 (jivita-samasisi) ‘ 그리고 느낌의 사마시시이렇게 4가지의 사마시시를 말한다.

 

아라한의 인생관

 

부처님은 번뇌 다한 자에 한하여 죽음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탁발한 음식을 잘 못 먹어 콜레라 등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부처님은 자살을 허락한 것이다.

 

이러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12연기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라한의 인생관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

 

삶이란 크게 보아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을 뜻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오취온의 부담은 끊임없이 보살핌과 돌봄을 요구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정신-물질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나면 아라한의 삶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법문집에서)

 

  12연기법문-마하시사야도.hwp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번뇌 다한 자인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하였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자살은

 

 마하시사야도의 근로자에 대한 비유는 어디서 근거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쑤씨마]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스승의 예찬을 받을 만한 거룩한 이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그때 세존께서 존자 싸리뿟따에 관해서 하늘아들 쑤씨마에게 이와 같은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고용인처럼 때를 기다리는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수시마경-Susīmasutta., 상윳따니까야 S2.3.9,  전재성님역)

 

  수시마경(S2.3.9).docx  수시마경(S2.3.9).pdf

 

 

 

경에서 잘 훈련된 고용인처럼이라는 말은 경의 주석에 따르면 붓다고사에 의하면, 번뇌를 끊은 자는 여러 다른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리므로 고용인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마하시사야도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법문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처럼 아라한은 마치 근로자가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완전한 열반을 기다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병이 생긴다든가 하여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부처님은 아라한에 한하여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자살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불교에서 자살은 허용되었다. 단 번뇌 다한 자에 한해서 이다. 그러나 번뇌가 남아 있는 자가 자살하였을 때 미움과 원망 등의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결코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할 것이라 한다.

 

니까야에 그 해결방법이

 

지금 괴롭다고 하여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거나 내 탓이오하면서 내 탓으로 돌려 본들 괴로움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네 탓 또는 내 탓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로 본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의 본질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하여 니까야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우빠바나경을 예로 들었다. 우빠바나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빠바나]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관해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제가 만약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세존을 허위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진리에 일치하는 바대로 설명하는 것이며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비난의 여지를 남기지 않겠습니까?”

 

(우빠와나경-Upavāasutta, 상윳따니까야 S12.3.6, 전재성님역)

 

  우빠와나경(S12.3.6).docx  우빠와나경(S12.3.6).pdf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남의 탓이라거나 또는 내 탓이오!’하며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네 탓 또는 내 탓으로 해서 괴로움이라는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에 그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2600년 부처님은 그 해답을 알려 주었다.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우빠와나 존자가 부처님께 괴로움이 네 탓인지 또는  내 탓인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이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겁니까 남이 만든겁니까라고 묻는 것은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이에요. 이게 그냥 공부하기 위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살아남기 위해서 절박한 문제이었어요.”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초기경에서 제자가 부처님에게 질문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절박한 문제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잘 못 한다면,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생각할 수 있고 더구나 번뇌가 다하지 못한자가 자살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우빠와나경(Upavāasutta,S12.3.6)애서

 

이렇게 제자가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을 때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을까.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이와 같이 내가 말한 바를 설명한다면 허위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진리에 일치하는 바대로 설명하는 것이며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비난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우빠와나경-Upavāasutta, 상윳따니까야 S12.3.6,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접촉때문이라 하였다. 네 탓 또는 내 탓으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지로 인하여

 

접촉이 없으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이즈 걸린 사람이 에이즈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이 남의 탓 또는 내 탓이 아니라 접촉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에이즈 걸린 사람은 자기가 잘 못해서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느낌이다. 자아는 없는데 자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자기가 잘 못해서 결렸더라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일까. 그것은 접촉에 기인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접촉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의 원인에 대하여 정확하게 짚어 내는 것이라 한다.

 

괴로움이 네 탓이나 내 탓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촉에 의하여 일어 났고, 이는 결국 12연기적으로 보았을 때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 날 수 밖에 없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팟상 빠띳짜(Phassa paicca, 접촉을 연유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위대한 것이다. 불쌍한 사람이나 부자를 보았을 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라는 처님의 가르침은 초등학생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와 같이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탓이라 따지고 내 탓이오하며 자살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우빠바나가 부처님에게 질문한 것은 자신의 생사를 가를 정도로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Paiccasamuppanna kho upavāa   빠띳짜사뭅빤나낭 코 우빠와나

dukkha vutta mayā.            둑캉 웃땅 마이야

Ki paicca?                     낑 빠띳짜

Phassa paicca.                 팟상 빠띳짜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Upavāa,

I have said that unpleasantness is dependently arisen.

Dependent on what is unpleasantness?

Dependent on a contact.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되는 이유에 대하여 팟상 빠띳짜(Phassa paicca, 접촉을 연유로 하여)’라 하였다.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이 네 탓이라거나 내 탓이라거나 우연히 일어난다든가 누군가 벌주기 위해 만든 것 등이 아니라 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진리를 말씀 하신 것이다.

 

너 때문이야!”내 탓이오!”의 허구성

 

그렇다면 이제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그 인간 때문에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접촉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모든 것이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이다..” 하며 괴로움을 내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지만 이는 모두 접촉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너 때문이야!” 또는 내 탓이오!”라고 외치는 것은 철저하게 ()’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나 또는 나의 몸,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해서 네 탓, 내 탓이 생겨 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괴로움은 끊이지 않고 자살 또한 끊임 없이 일어난다. 지금 죽어 버리면 모든 괴로움이 끝 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역시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불교식 용어를 빌리면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죽고 싶은 것도 갈애로 보는 것이다. 그런 갈애는 나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일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득세하지만 자살이 끊이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전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고민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법을 내 놓으신 분이다. 그런 가르침이 니까야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니까야에 부처님 제자들의 자살기록이 실려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고디까경에서 고디까비구의 자살을 비롯하여 왁깔리경(Vakkali sutta)에서의 왁깔리비구의 자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번뇌 다한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것이다.  

 

불리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된 니까야

 

이처럼 초기경전에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모두 다 들어 있는데,

4부 니까야를 완역한 전재성박사는 니까야의 위대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니까야가 위대한 이유는 부처님 불리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예는 전세계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세계의 모든 경전이 미사여구에다 화려하고 장엄한 묘사 위주로 되어 있지만 초기불교경전의 경우 숨기고 싶은 사항들도 솔직하게 기록 되어 있는데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니까야가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니까야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형없이 지켜 온 것이라 한다.

 

 

 

2012-05-04

진흙속의연꽃





 

 

노출의 계절에 중노릇 하기 힘들다고? 어느 스님의 글을 읽고

 

 

 

 

중노릇 하기 힘들다는데

 

불교포커스에 다음과 같은 칼럼이 실렸다.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이다. 도시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화장을 멋지게 하고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옷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산속에 사는 수행자가 어쩌다가 도시에 나갈 일이 있어 이런 여성들과 마주치는 것은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도시 포교당에 사는 스님들은 산속에 사는 스님들보다 더 근기가 수승한 분들인지도 모르겠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중노릇 힘들다.docx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

 

 

 

조신이라는 익명으로 실린 칼럼이다. 글의 내용을 보니 스님이 작성한 글이다. 산속에 사는 수행자가 어쩌다 도시에 나왔을 때 마주치는 여성들을 쳐다 보기가 민망하다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의 과도한 노출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과도한 노출은 필연적으로 성적욕망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적욕망은 탐진치 중에서 탐욕에 해당한다. 이 성욕이라는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과를 얻어야 없어지게 된다고 한다. 일반 범부는 물론이거니와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성욕은 아나함이 되어야 없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에 근거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나함이 되어야 성욕이 없어질까.

 

왜 아나함이 되어야 성욕이 없어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면 성자가 될 수 있는데, 가장 첫번째 단계가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유신견, 법에 대한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끊어졌을 때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도둑질이나 성폭행을 할정도로 탐진치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렇게 수다원이 되면 비록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지라도 탐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정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예류자가 된 재가자가 많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다음으로 사다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은 매우 옅어진다고 한다. 단지 매우 옅어졌을 뿐 탐욕 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가정생활 역시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탐욕과 성냄은 언제 완전히 뿌리가 뽑히게 될까.

 

담마딘나 비구니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인연담에 나온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전남편 위사카가 아나함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가정생활을 유지 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탐욕이 완전히 뿌리 뽑혔기 때문이다. 아나함이 되면 탐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므로 가정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경우 출가를 하여 궁극적으로 아라한 되는 공부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아나함(불환자)이 되어야 더 이상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계를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는 다고 한다. 그런데 글을 쓴 스님은 범부는 물론이거니와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성욕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일반 범부나 성인의 흐름에 들어간 자를 성적 욕망에 있어서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열반이 보장된 존재가 예류자인데

 

성인은 범부와 다르다. 왜 다를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 즉, 예류자(수다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갈 것이라고 초기경전 도처에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류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
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
Kiñc
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They that develop the noble truths, preached with deep wisdom,

Even if they live negligently, would not have an eighth birth.

This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보배경 9번 게송, 숫따니빠따 Sn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Imee Ooi창송

经与吉祥利偈慧音

 

 

 

경에서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이는 여덟번째 윤회를 받지 않는다(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would not have an eighth birth)고 하였다. 이렇게 열반이 보장된 존재가 예류자인데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멈추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라는 말이다.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성자가 되어 윤회의 종식이 보장 되어 있다면 설령 잘못을 하였더라도 성폭행과 같은 행위는 절대로 일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예류자가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성폭행을 하였다면 악처에 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코 예류자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는 말에 대한 영문은 ‘Even if they live negligently’로 되어 있다. 영어 ‘negligently’는 태만하게, 부주의하게, 무관심하게, 소홀하게 라는 뜻이다. 그런 뜻으로 보아 악처에 나게 할 정도로 커다란 잘못이 아니리 작은 실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성자의 흐름에 든 자에게 있어서 잘못이라는 것은 매우 사소하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성자에게 있어서 그런 잘못도 커다랗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고 해석 하였을 것이다.

 

예류자의 번뇌란?

 

그런데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티끌과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드신 티끌은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신 티끌을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 on the Nail- 손톱 끝 경, S12.1.10.1)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S12.1.10.1).docx

 

 

 

나가시카경에 따르면 성자에 흐름에 든 자의 번뇌는 매우 미미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최대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종식 되는 예류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손톱 끝에 있는 티끌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경의 이름도 손톱 끝 경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예류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 on the Nail- 손톱 끝 경, S12.1.10.1)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은 거의 대부분의 번뇌는 파괴 되었고 남아 있는 번뇌는 매우 미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는 이미 파괴되어 버린 번뇌의 십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 한다. 손톱끝에 있는 때 보다 적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만 되어도 어지간한 번뇌는 다 제거 되거나 약화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수다원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덟번째는 윤회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신이라는 필명의 스님은 범부나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성적 욕망에 대하여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글을 썼기 때문이라 판단 된다.

 

여인을 보거든

 

이렇게 범부와 성자의 흐름에 든 이의 성적 욕망을 동일시하고 글을 쓴 스님은 성적 욕망이 일어 났을 때 대처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디가 니까야에서 부처님과 아난다존자가 말씀하신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스님은 첫번째인  여인을 쳐다보지 말라  두번째인 여인과 말하지 말라는 정확한 처방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三界 導師이시며 四生 慈父이신 부처님도 여인을 대처하는 방법에는 뾰쪽한 수가 없나보다라고 토를 달았다. 그리고 세번째인 마음 챙김을 확립해야 한다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현실을 감안한 최선의 방법은 세 번째 답변처럼 여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뿐이다. 여인이 늙었거든 어머니 같이, 나이가 조금 많으면 누님같이 생각하고, 적으면 여동생 같이 생각하면서 대화를 하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여인을 보거든 나이가 많이 먹었거든 어머니같이, 조금 많으면 누님같이, 적으면 여동생 같이 보라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다. 대체 어느 경에 있을까.

 

어머니처럼, 자매처럼, 딸처럼

 

이와 같은 이야기를 법문이나 칼럼에서 종종 보았다. 대부분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사십이장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하여 글 (여인과 수행자,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지나)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늘 경전적 근거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경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상윳따니까야 이곳 저곳을 보다가 눈에 확 들어 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위에 언급된 여인을 보았을 때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다. 경전적 근거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상윳따니까야에 어떻게 표현 되어 있을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바라드와자경(S34. 13. 4).docx

 

 

 

상윳따니까야 바라드와자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경에서 부처님의 제자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의 말을 빌어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고 대왕에게 말하고 있다. 앞서 스님이 말한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

 

스님은 어머니, 누님, 여동생이라고 하였으나 부처님은 어머니, 자매,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딸이 다른 것이다.  , ‘딸 뻘 되는 여인을 보면 딸 같이 생각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과 스님의 말과 다른 것이다. 

 

가족처럼 생각해도 동요 되면

 

이처럼 여인을 보았을 때 어머니처럼, 자매처럼, 딸을 보는 것처럼 마음을 일으켜도 동요 되면 어떻게 할까. 이에 대하여 대왕이 묻자 바라드와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오라.

그대들의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 가지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와 같이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 근육, 신경, , 골수, 신장, 심장, , 늑막, 비장, , 대장, 소장, , ,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바라드와자는 부정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 몸안에는 피, 고름, 오줌 등 온갖 더럽고 부정한 것 들로 가득차 있다고 관찰 하라는 것이다. 이런 부정상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 도처에 등장하는데 숫따니빠따 위자야경(승리의 경, Sn1.11)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부정상을 닦아도 욕망이 생기면

 

이렇게 부정상을 닦아도 여인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오라. 그대들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해야 한다.

 

형상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시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소리를 듣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청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청각능력을 보호하고 청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냄새를 맡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후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후각능력을 보호하고 후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맛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미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각능력을 보호하고 미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감촉을 느끼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촉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촉각능력을 보호하고 촉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사물을 인식하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신능력을 보호하고 정신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라고.

 

대왕이여,

젊은 수행승들이 아직 어리고 머리카락이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꽃다운 시절에 쾌락을 즐기지 못하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만하고 깨끗한 청정한 삶을 살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다른 원인은 이것이고 다른 조건은 이것입니다.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마지막으로 감각의 문을 단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 코 등의 감각기관을 말한다. 그 중에 눈에 대한 것을 보면 형상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자다” “예쁘다 매력적이다 눈이 크다

 

 

 

사람이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보여 지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 특징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것은 전체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남자라든가 여자라든가 하는 전체적인 표상을 말한다. 여자라면 예쁘다거나 아름답다” “매력적이다라는 개념이 달라 붙는 것을 말한다. 이런 특징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속성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것은 부분상을 취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 “코가 높다든가 눈이 크다든가 하는 부분적이고 세세한 것들을 말한다. 이렇게 여인에 대하여 전체상과 부분상을 취하면 번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다. 여인을 보았을 때 단계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가 가족처럼 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부정상을 닦으라는 것이고, 세번째는 감각의 문을 수호하라는 가르침이다.

 

왜 빠알리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포커스에 칼럼을 쓴 조신이라는 필명의 스님은 오로지 여인을 볼 때 가족처럼 보고 마음챙김하는 것 한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그 이전에 일반 범부와 성자의 흐름에 든 이의 성적 욕망이 같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에 대한 모욕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이는 늦어도 일곱생 이내에 열반이 보장 되어 있는데, 범부들과 똑 같이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라고 단정한 것은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글을 보았을 때 왜 출가자니 재가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이 들어가 있는 빠알리 니까야를  보아야 하는지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2012-08-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