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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 "소금덩이의 경"에 있었네요..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효력을 상실한 업
장미의 계절입니다. 아파트 담장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꽃의 무게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입니다. 싱그럽고 상쾌한 오월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높고 날씨는 따사롭습니다. 여기에 몸의 컨디션까지 좋아 날아 갈 것 같습니다. 몸이 가벼우니 마음까지 편안합니다. 몸과 마음이 경안한 것은 이전 날 무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물일 것입니다.
아침의 경안은 이전날 행위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소욕지족의 삶을 산 자에게 아침은 축복입니다. 정신이 청정하면 말과 행위도 청정해서 깃털처럼 가벼운 삶을 살아 갑니다. 그림자가 자신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아침이 괴로운 자들이 있습니다. 이전날 욕망으로 분노로 산 자들입니다. 정신이 오염되었을 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행위가 무르익으면 과보로 나타납니다. 아침이 불편한 자들은 이전날 오버한 것에 대한 과보로 벌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수레바퀴가 황소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황소는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갑니다. 황소는 오로지 앞만 보고 갑니다. 옆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 하면 멍에가 목을 조르고, 뒤로 가려 하면 바퀴가 엉덩이를 도려 내려 합니다. 오염된 정신에 따라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하면 항상 고통이 그를 따라다닙니다.
나쁜 짓을 했어도
살아 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짓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맞아야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 업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모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지은 죄업을 상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테라가타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Yassa 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dhīyati;
Somaṃ lokaṃ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2)
앙굴리말라 장로가 읊은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의 경(M86)’과도 병행합니다. 게송에서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Yassa 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dhīyati)”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착하고 건전한 일(kusala)이란 거룩한 길(阿羅漢向)과 관련된 것입니다.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 하듯
악을 선으로 덮는 다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 것을 대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
악하고 불건한 행위는 반드시 고통을 유발하고 맙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날 때, 마치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쳐 내듯이, 착하고 건전한 사유를 하면 막을 수 있습니다.
정신(mano)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했습니다. 정신이 오염되면 고통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이미 지은 악하고 불건한 행위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로 덮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악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덮여지는 것입니다.
소금덩이를 강물에 넣으면
악행을 덮으려면 악행보다 더 큰 선행을 하면 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소금덩이의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M3.99)
작은 물컵에 소금 한스픈 넣으면 짜서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대야에 소금 한스픈은 마시는데 문제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강에 소금덩어리를 넣었을 때 짠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죄악도 악처로 인도한다
소금은 짠 맛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소금알갱이라도 짠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똥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아주 소량만 있어도 똥은 악취를 풍긴다.”(A1.348)라 했습니다. 죄악은 똥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작은 소량의 소금이 짠 맛을 내고 아주 소량의 똥이 악취를 풍기듯이,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죄악도 악처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사람은 똑같이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A3.99)
아주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이제 까지 살인 등 중죄를 져야만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소금덩어리가 짠 맛을 내듯, 매우 적은 똥이라도 악취를 풍기듯,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은 충격적 가르침입니다.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
배가 고파서 빵을 하나 훔쳐도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과 탈법으로 엄청난 불로소득을 취한 자는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악행을 했지만 적은 죄악을 지은 자가 감옥에 가고, 더 많은 죄악을 지은 자가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마치 무전유죄이고, 유전무죄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없어서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자는 감옥에 집어 넣는 등 가혹한 처벌을 합니다. 그러나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 자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로도 감옥에 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무전유죄, 유전무죄 현상이 적은 죄악을 저질로도 처벌받고, 큰 죄악을 저질로도 처벌 받지 않는 현상이 앙굿따라니까야 ‘소금덩어리의 경’에 살려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재물이 없고 재산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재물이 많고 재산이 많거나 왕이거나 대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두려움에 떨며 합장하여 이와 같이 ‘주인님, 제게 양이나 그 양의 값을 돌려 주십시오.’라고 빌 것이다.”(A3.99)
이런 예는 극단적인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무전이면 유죄이고, 유전이면 무죄인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가 생계를 위하여 양을 한마리 훔쳤다면 가혹한 처벌 받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아들이 양을 한마리 훔쳤을 때 양의 값을 지불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권세도 있기 때문에 처벌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부처님은 소금의 비유와 양의 비유를 들어 죄업을 설명했습니다. 죄업을 지으면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죄업을 짓고도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소금을 갠지스강에 넣으면 짠 맛을 느낄 수 없고, 양을 훔쳤어도 부유하다면 처벌 받을 수 없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Kathaṃrūpassa bhikkhave puggalassa appamattakampi pāpaṃ kammaṃ kataṃ tame'naṃ nirayaṃ upaneti?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abhāvitakāyo hoti abhāvitasīlo abhāvitacitto abhāvitapañño paritto appātumo appadukkhavihārī. Evarūpassa bhikkhave puggalassa appamattakampi pāpaṃ kammaṃ kataṃ tamenaṃ nirayaṃ upaneti.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인 그를 지옥으로 이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 협소하고 작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작은 것에서 유래한 큰 고통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A3.99)
어떤 이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면 되죠 뭐?”라 이야기합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법 잘 지키고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 합니다. 그러나 닦지 않았을 때, 즉 수행하지 않았을 때 죄업을 짓기 쉽습니다. 단지 착하게만 살며 지혜를 계발하지 않았을 때 언제 어떻게 악행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수행하지 않는 삶을 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악행도 악처로 이끈다고 했습니다.
적은 죄악을 짓고도 처벌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배가 고파 빵한조각 훔쳐도 절도죄로 가혹하게 처벌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돈이 있다면, 부유하다면 훔쳐도 문제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훔친 것을 갚아 주면 됩니다. 더구나 권세가 있다면 없었던 일로 무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배고 고파 빵을 훔쳐 감옥에 가는 것과 남에게 폐끼치 않고 착하게 사는 자가 사소한 죄업을 지어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합니다.
돈이 없을 때 무전유죄가 되듯이, 몸과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계발하지 않으면 적은 죄업을 지어도 지옥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에 대하여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 협소하고 작은 도량을 지닌 자”로 묘사했습니다. 착하기는 하지만 선업을 쌓지 않았을 때 적은 죄업으로 지옥에 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선업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십선행’을 말합니다.
아꾸살라(akusala)와 꾸살라(kusala)
초기불교에서는 악행과 선행을 아꾸살라(akusala)와 꾸살라(kusala)로 설명합니다. 아꾸살라는 십악행에 대한 것이고, 꾸살라는 십선행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꾸살라행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분노를 품고,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M84)를 말합니다. 꾸살라행은 아꾸살라행의 반대입니다.
십악행을 보면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살기가 극히 힘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나는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악처로 이끄는 열 가지 악행을 보면 어디 하나 걸리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열 번째 항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를 보면, 이는 사견에 대한 것으로 정견인 사성제, 즉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때 악처로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모두 빗나간 견해로서 사견입니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등 이 세상의 신앙과 종교,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 다면 모두 사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견에 빠지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로 이끌 것이라 했습니다. 착하게 폐끼치 않고 산다고는 하지만 꾸살라행, 즉 십선행을 하지 않으면 아주 적은 죄악이라도 지옥으로 이끌고 말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작은 것에서 유래한 큰 고통을 산다.(paritto appātumo appadukkhavihārī)” (A3.99) 라 했습니다. 적은 죄업을 지어도 수행을 하고 공덕을 쌓아 놓지 않으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냄새나는 것 같고, 소금은 소량만 있어도 짠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똥이나 소금을 큰 강물에 넣는다면 구린내나 짠맛은 전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는 삶으로 가능합니다.
효력을 상실한 업
불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죄업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업이 덮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죄업 보다 더 큰 선업을 지었을 때, 마치 소금덩어리를 강물에 넣는 것이나 같습니다.
앙굴리말라 경에서는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M86)라 했습니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이전에 지은 죄업은 덮여진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형성되면 어쩔 수 없이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이전에 죽은 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친척들이 나타나 돌팔매질을 했을 때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은 죄업이 익지 않았을 때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되어 버립니다.
기계적인 업의 법칙
모든 행위가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은 시설되지 않는다.”(A3.99)
물리법칙에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는 것은 즉각적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나 업의 법칙은 반드시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과보로서 나타남을 말합니다. 이를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합니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했다면 모두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차를 두고 인과 연이 맞아 떨어졌을 때 비로서 과보로서 나타납니다. 그 과보가 이번 생이 될 수 있고, 내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먼 후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업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어떠한 업을 지어도 과보를 받는다’라는 말은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된것입니다. 만일 ‘어떠한’ 업을 지어도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고 했을 때 이전에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결코 성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업을 단지 기계적으로 적용했을 때 성자가 나올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계적인 업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기계적 업의 법칙에 대하여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은 시설되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중죄를 저지른 자들도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자였지만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지었던 살생업을 꾸살라행, 즉 선업으로 덮은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Thag.872)이라 했고, 또 “예전에 방일 했어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1)라 했습니다. 중죄를 저지른 자들도 청정한 삶을 살아가면 죄업이 덮여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중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은폐하면 발각되기 전까지는 처벌 받지 않듯이, 이전에 지은 죄업이 반드시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이 달리 익기 때문입니다. 익는 시기가 이번 생일 수도 있고, 다음 생일 수도 있고, 아니면 먼 후생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무슨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생에서 지은 행위는 기억할 수 있지만 이전 생에서 어떤 죄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더 이전 생에서는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인과 연이 되면 과보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지은 업대로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면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하여 열반하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된다.” (A3.99)
부처님은 괴로움의 종식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탈과 열반에 대한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재생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지은 업이 문제가 됩니다. 더구나 알 수 없는 이전 생에 지었던 수 많은 업, 그것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의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면 괴로움의 종식, 즉 윤회의 종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에 대하여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라 했습니다.
이전에 지은 업에 대하여 반드시 과보를 받아야 된다고 믿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업보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이나교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 하여 ‘어떠한 업을 짓던지’를 강조한다면 외도사상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라 하여, 지금 과보로서 나타나 ‘겪어야 하는 업’이라고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중죄를 저지른 자들도 청정한 삶을 살면 이전에 지은 업이 효력이 상실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여 지혜를 계발하면
부처님은 외도의 업사상으로는 결코 청정한 삶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업사상으로는 청정한 삶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소금의 비유와 양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냄새가 나고 소금은 소량이라도 짠 맛이 나듯이, 적은 죄업이라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적은 똥이나 소금덩이를 강물에 던지면 구린내도 짠맛도 나지 않듯이, 수행을 하여 몸과 마음과 지혜를 계발하는 삶을 산다면 이전에 지은 업은 모두 효력이 상실 될 수 있습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면 이번 생은 물론 알 수 없는 이전 생에 저질렀던 모든 죄악이 덮여질 수 있습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흉악한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 되어 이전에 지은 죄업이 모두 덮였습니다.
“예전에 방일했어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1)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Thag.872)
2017-05-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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