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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

우공(友空) 2017. 6. 1. 08:24


http://blog.daum.net/bolee591/16157785


우다나 메기야의 경

"탐욕, 분노, 사유,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메기야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얻는다."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하느니라.



팔만사천법문 은-팔정도-계정혜(삼학)-사띠 로 요약.


37조도품에서 정진(9개)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 사띠(8개)


아난다에 당부 (여자) : 쳐다보지 마라, 말하지 마라, 사띠하라 (어머니[자매, 딸]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왜 무상관이 가장 수승한가? 예경지송 무상관의 경송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

 

흔히들 수행한다’ ‘수행한다라고 말합니다. 대게 가부좌하고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좌선수행이 연상됩니다. 정말 수행은 가부좌를 해야 하고 호흡만 관찰하는 것일까요? 좌선이나 호흡관찰 외에는 수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Asubhā bhāvetabbā rāgassa pahānāya,

mettā bhāvetabbā byāpādassa pahānāya,

ānāpānassati bhāvetabbā vitakkupacchedāya,

aniccasaññā bhāvetabbā asmimānasamugghātāya.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 부정을 닦아야 한다.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사유의 제거를 위해서 호흡을 닦아야 한다.

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한다.”(Ud.36)

 

 

부처님은 네 가지 수행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을 말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호흡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원리에 네 가지 원리

 

부처님이 네 가지 수행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은 올바른 수행방법을 일러 주기 위한 것입니다. 대중생활을 마다 하고 아름답고 경치 좋은 망고동산에서 홀로 수행하는 메기야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났을 때 부처님은 단계적으로 가르침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가지 원리에 네 가지 원리로 설명됩니다.

 

다섯 가지 원리란 1) 착한 벗을 사귀는 것, 2) 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 3) 소욕지족 등 열반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듣는 것, 4) 열심히 정진하는 것, 5)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사항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홀로 수행할 정도로 역량이 되지 않았을 때 대중과 함께 계를 지키며 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며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네 가지 원리는 위에 언급된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을 말합니다. 착한 벗을 사귀는 등 다섯 가지 원리가 확립된 다음 이른바 사대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졌을 때 수행을 해야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말합니다.

 

호흡관(ānāpānassati)만 수행인가?

 

상윳따니까야 고양이의 경에 따르면 탁발나가는 빅쿠가 매혹적인 여자를 보았을 때 심리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경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 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탁발나가는 빅쿠가 사띠를 확립하지 않았을 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을 당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수행에는 호흡만 관찰하는 수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한다고 가부좌하며 앉아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경행도 수행이라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간에도 수행이라 합니다. 탁발 나갔을 때 사띠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수행시간입니다. 반드시 가부좌틀고 호흡만 관찰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탁발중에 매혹적인 여인을 보더라도

 

빅쿠가 하루 종일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 경행도 해야 하고 음식을 얻어 먹기 위해 마을로 탁발도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탁발하는 과정에서 매혹적인 여인과 마주쳤을 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욕망이 엄습하여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 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Tasmātiha bhikkhave, eva sikkhitabba: "rakkhiteneva kāyena rakkhitāya vācāya rakkhitena cittena upaṭṭhitāya satiyā savutehi indriyehi gāma vā nigama vā piṇḍāya pavisissāmā"ti. Eva hi vo bhikkhave, sikkhitabbanti.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리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S20.10)

 

 

 

 

 

 

 

부처님은 탁발중에도 사띠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경에서 새김을 확립하고 (upaṭṭhitāya satiyā)”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사띠(sati)라는 말이 좌선전용 용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띠라는 말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이때 사띠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탁발중에 매혹적인 여인을 보더라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기억하면 이겨 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띠의 중요성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사띠(sati)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띠에 대하여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이 사띠하나에 포커스에 맞추어진다고 했습니다. 팔만사천가르침은 팔정도로 요약되고, 팔정도는 계정혜삼학으로 요약되고, 계정혜는 사띠 하나로 요약된다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팔마사천법문이 마음 심()자 하나로 표현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팔만사천법문이 사띠 하나로 요약된다고 했습니다.

 

사띠의 중요성은 37조도품에서 두 번째로 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37개 항목 중에 정진(viriya) 9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사띠(sati)로서 8개로 2위 입니다. 지혜(pañña) 5개로서 3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띠는 사념처(4), 5(1), 오력(1), 칠각지(1), 팔정도(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사띠는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Sati ānanda upaṭṭhapetabba)

 

사띠는 좌선중에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 모든 일상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의 큰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아난다가 얼굴이 잘생기고 사귐성이 있어서 여자들에게 인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수행녀의 경(A4.159)’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난다를 유혹하는 수행녀에게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A4.159)라는 충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아난다를 불러 특별히 당부합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쳐다보지 말라” “말하지 말라” “사띠하라입니다.

 

최상책은 여자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았거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을 하게 되면 친밀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말했다면 사띠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띠 하는 것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어머니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자매 연배 여성에 대해서는 자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딸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Smv.583) 라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은 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상윳따니까야 바라드와자의 경에 따르면 바라드와자 존자가 우데나 왕에게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35.127)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Sati ānanda upaṭṭhapetabba)라고 한 것은 일상에서 사띠 하기 입니다. 반드시 가부좌하고 호흡관찰 했을 때의 사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사띠라는 것입니다.

 

무상관과 무아에 대한 지각

 

불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은 반드시 가부좌하여 호흡명상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호흡관 뿐만이라 이른바 사대명상이라 하여, 호흡관을 포함하여 부정관, 자애관, 무상관이 있습니다.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가장 수승한 것일까요? 우다나 메기야경에 따르면 무상관일 것이라 봅니다.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서 무상관은 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한다. (aniccasaññā bhāvetabbā asmimānasamugghātāya)”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상관이 자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독특한 무아의 가르침과 관련 있습니다.

 

무상관은 ‘aniccasaññā bhāvetabbā’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상관이 가장 수승할까요?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무상관에 대하여 특별히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Aniccasaññino Meghiya anattasaññā saṇṭhāti, anattasaññi asmimānasamugghāta pāpuāti, diṭṭheva dhamme nibbānan.

 

메기야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이룬다.”(Ud.36)

 

 

무상관을 하면 열반을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상관을 하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무아론입니다. 이제까지 전세계 어떤 종교도 무아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내가 있다는 유아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만이 무아를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불교는 무아의 종교입니다.

 

오온이 무아인 것은

 

부처님은 오온이 무아임을 초기경전 도처에서 설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무아를 설명하고 있는 상윳따니까야 존재의 다발모음(S22)’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상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무상한 것이다.”(S22.12)라 하여 오온이 무상한 것을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rūpa bhikkhave, anicca, yadanicca ta dukkha, ya dukkha tadanantā, yadanattā ta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

 

 

이것이 무상관입니다. 무상관을 하면 자연스럽게 무아의 가르침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무아를 알게 되면 열반을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자애관이나 부정관, 호흡관을 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상관을 하면 열반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무상, , 무아 순으로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상, , 무아로 설명되는 삼법인이라는 잣대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불교인 것처럼 보여도 삼법인에 맞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누군가 상, , 아를 말한다면 외도의 견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상, , 무아,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부정의 가르침입니다. 무상, , 무아, 부정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은 무상입니다.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면 세월이 무상하다고 합니다. 낙엽이 질 때 센티멘탈 해지는 것도 무상감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느끼는 무상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무상, 세월무상을 느껴도 내가 슬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무상한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는 죽은 자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것은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 따르면 죽은 자 앞에서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비탄해 한다고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 했습니다. 무아의 성자에게 자아관념이 없기 때문에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떠남도 이와 같으니, 저 자연의 이치를 보십시오.”(stn588) 라 했습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상의 가르침이고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라는 견해를 가진 유아론자에게 자연무상, 인생무상은 슬픈 것입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 슬픔의 화살을 맞아 괴로워 합니다. 그러나 오온이 무상함을 아는 부처님 제자들에게는 내가 있다라는 견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아이어야만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유아론자에게 궁극적 실재 내지는 존재의 근원과의 합일에 따른 해탈은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열반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개념이 없어야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도 일어나지 않아서 열반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마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러나 무상을 지각하여 내가 없다라는 무아가 되었을 때 어느 것에도 걸림 없어서 대자유인이 됩니다. 무상, , 무아의 순인 것도 무상이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상관의 경송(aniccasaññāpāha)

 

불교에 사대명상이 있습니다.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입니다. 이중에서도 무상관이 가장 수승합니다. 무상관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예경지송에는 무상관의 경송이 있습니다. 무상관 수행을 위하여 상윳따니까야와 법구경에서 뮤문구를 모아 후대 신심 있는 불자가 편집한 것입니다. 무상관 수행용으로 적합한 무상관의 경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관의 경송(aniccasaññāpāha)

 

[I. 무상에 대한 지각(aniccasaññā)]

 

1.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2.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농부가 큰 쟁기날로

쟁기질을 하며느 쟁기질만으로도

모든 뿌리들이 파헤쳐져 없어지느니라.

 

3.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4.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골풀을 베는 사람이 골풀을 베면

꼭대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좌우로 흔들어 털어버리느니라.

 

5.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6.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망고더미가 달린 나무줄기를 자르면

그 줄기에 달린 망고들이

모두 그 줄기를 따라 잘려지느니라.

 

7.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8.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누각의 어떤 서까래든지

모두 용마루로 향하고

용마루로 기울고, 용마루로 모이고

용마루를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9.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10.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뿌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흑단향을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11.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12.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나무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적단향을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13.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14.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꽃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재스민향을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15.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16.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군왕이 있든지

그들 모두는 전륜왕의 신하들이니,

그들 가운데 전륜왕을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17.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18.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별이 비추는 광명이든

그것은 달이 비추는 광명의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 가운데

달이 비추는 광명을 최상이라고 하느니라.

 

19.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20.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을 때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올라

허공의 일체 어둠을 없애면서

빛나고 불타고 빛을 방출하느니라.

 

21.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22.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는가?

 

1)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물질의 발생이고

이것이 물질의 소멸이다.

 

2) 이것이 느낌이고

이것이 느낌의 발생이고

이것이 느낌의 소멸이다.

 

3) 이것이 지각이고

이것이 지각의 발생이고

이것이 지각의 소멸이다.

 

4) 이것이 형성이고

이것이 형성의 발생이고

이것이 형성의 소멸이다.

 

5)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발생이고

이것이 의식의 소멸이다.

 

23.

이처럼,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뿌리째 뽑아버리느니라.

 

 

[II. 무상에 대한 새김(Aniccanusati)]

 

1.

보라! 아름답게 꾸며진 영상

상처투성이로 세워진 몸

고통스럽고 망상으로 찬 것

영원하지도 견고하지도 않느니라.

 

2.

이 영상은 마침내 노쇠하고

질병의 소굴로 쉽게 부서지고

이 부패한 축적물은 파괴되니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니라.

 

3.

참으로 가을에 버려진

이 호리병박들처럼

회백색의 해골들이 나뒹구니

그것들을 보고 누가 기뻐하겠는가?

 

4.

뼈로 만들어지고

피와 살로 덧칠해진 도시

여기에 늙음과 죽음과

자만과 위선이 감추어져 있느니라.

 

5.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하느니라.

 

(무상관 경송, 예경지송 명상수행품, 전재성님역)

 

 

이 경송은 상윳따니까야 무상에 대한 지각의 경(aniccasaññā sutta, S22.102)’과 법구경 Dhp.147-150, 153, 154, 170이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무상관을 닦으면 누구든지 일체의 감각적 욕망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일체의 무명을 없애고, 일체의 라는 자만을 없애고 근절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이룬다.”(Ud.36)라는 우다나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무상관을 닦으면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명상수행의 공통점은

 

불교에 사대명상수행이 있습니다.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 실려 있는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이 그것입니다. 부정관을 하면 몸을 부정한 것으로 보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제거 됩니다. 자애관을 하면 원한과 악의를 여의기 때문에 분노가 제거 됩니다. 호흡관을 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제거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상관을 하면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제거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수행이 하나로 통합된 경전이 대념처경입니다. 그래서 예경지송 명상수행품 마지막 경송이 대념처경입니다.

 

모든 명상수행의 공통점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4.37)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jāgariya: Waking)’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A4.37)라 했습니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앉아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삶의 전과정이 수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 대념처경 등 모든 수행방법은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간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누군가 자연무상을 인생무상을 이야기 한다면 범위를 벗아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시종일관 오온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잘 알아야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상, , 무아입니다.

 

오온을 관찰했을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온이 무아일 때 비로서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한마음이 아니라 조건 발생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세상도 일어납니다. 반대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열반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만일 마음이 한마음으로 죽 연결 되어 있으면 궁극적 실재와 합일을 이룰 수 있지만 마음이 끊어진 곳이 없기 때문에 결코 열반은 실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하나의 일만 하고,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마음은 끊어져 있습니다. 재생의 업이 없으면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아 열반이 실현 됩니다. 부처님은 오온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무아라고 했습니다. 만일 오온이 무상하지 않다면 무아는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할 때 무상하고 무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간이었습니다. 대승에서는 자연과 우주로 확장하기도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은 오온으로 집적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별호 중에 조어장부(調御丈夫)’라는 말이 나옵니다. 조어장부는 ‘purisadammasārathī라 하여 ‘guide of men who are to be restrained’의 뜻으로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 무상관이 가장 수승한가?

 

모든 불교수행의 시작과 끝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교수행 중에 가장 수승한 것을 들라면 무상관입니다. 무상관을 하면 무아를 지각할 수 있어 열반이 실현됩니다. 또 삼법인의 순서는 항상 무상, , 무아입니다.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이라는 불교의 사대수행에서 무상관이 가장 수승한 수행으로 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다리꼬고 앉아서만 수행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초기불교에서나 대승불교에서나 다음과 같은 오온무상의 게송은 늘 회자되고 있습니다.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2.20)

 

 

2017-05-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