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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이 대수냐? 오온무아인자에게 - 삶, 죽음

우공(友空) 2017. 6. 30. 06:28



http://blog.daum.net/bolee591/16157855


앙굿따라 -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

원담스님 수행일기



 

죽는 것이 대수냐? 오온무아인자에게 죽음은

 

 

노후에 대한 두려움

 

유튜브에서 일본 고령화에 대한 프로를 보았습니다. NHK에서 방영된 프로에 따르면 일본에서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3,300만명 가량이라 합니다. 전인구의 26%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절반정도로 현재 약 13%정도라 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었을 때 노인들 대부분 빈곤층으로 전락됩니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 증가하는가 하면 각종 질병에 시달려서 방송에 따르면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는 식의 인터뷰기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노후를 위하여 열심히 모으는 삶을 살아갑니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옆도 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대수명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애써 모은 노후자금은 도중에 바닥 나고 맙니다.

 

아무리 연금을 많이 받는 자라도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 조정된다면 누구나 노인빈곤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나이에 남은 것은 형편 없이 늙어 버린 육체와 질병뿐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인 시대가 머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노령화시대를 맞이 하여 돈을 버는 것 보다 자기계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마음을 닦아 놓으면 돈이 없어도 그다지 빈곤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돈은 없어도 마음이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부자인자는 오래 살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이 생에서 해야 할 일을 게으르지 않게 하면 그만입니다.

 

언제 죽음과 맞닥뜨릴지 모르는 세상에서 수행자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1(A5.77)’에 따르면 다섯 가지 죽음의 위험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여기 단지 홀로 숲에 산다. 그런데 한적한 숲속에 야만적인 귀신들이 있어서 , 그들이 나의 목숨을 빼앗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 나는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에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진을 도모해야 겠다.’라고 관찰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번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관찰함으로써,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승은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에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A5.77)

 

 

경에서는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홀로 숲에서 사는 수행자에게 언제 든지 죽음이 예고 없이 들이닥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1)뱀이나 전갈 등에 물려 죽을 수 있고, 2)넘어져 죽거나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죽을 수 있고, 3)호랑이 등 짐승을 만나 죽을 수 있고, 4)도둑을 만나 죽을 수 있고, 5)귀신을 만나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각종 사고사에 해당될 것입니다.

 

죽음이 장애가 될 때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기대수명까지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각종 사고사 등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런일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에서나 접하던 일이 실제로 나에게 닥쳤을 때 매우 당황해 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오는 동안 악행이 선행 보다 더 많을 때 심하게 느낄 것입니다. 죽음이 갑자기 닥쳤을 때 그 사람에게 아직 미안하다는 말 안했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때 후회와 회환이 먼저 일어나며 해야 할 일이 많은데..”라 할지도 모릅니다.

 

경에 따르면 숲속에서 사는 수행하는 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입니다. 도와 과를 실현하여 불사의 경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전에 죽음이 엄습했을 때입니다. 불시에 찾아 오는 죽음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것은 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불시에 찾아 오는 죽음은 장애가 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죽임이 들이 닥쳤을 때 방해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죽음이 닥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관찰함으로써,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승은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에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A5.77)라 했습니다.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일반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수행자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상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대수명을 기대하면서 기대수명대로 살 때까지 자금을 마련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수행승은 미래를 위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도와 과를 실현하기 위한 정진을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죽을지 몰라 불확실하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죽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리오?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실려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7622()맑음

 

일주일째 폭염 기승, 연일 불볕더위, 계속되는 가뭄. 이런 타이틀이 실시간 검색 1위를 달린다.

 

모든 만남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으며, 이별이 예상되는 불안을 항상 안고 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관계라도 언제든 변질될 수 있다. 정들었던 것과 미리 정을 떼는 연습을 하라. 자신에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얼버무리거나 건성으로 지나치지 말라.

 

어느 땐가 헤어질 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 그것이 필연적이든 우연이든,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오랫동안 이어지든 관계라도 한 순간에 깨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여라.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다음 순간에도 계속 유효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다음 날도 똑 같이 주어질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 쉬는 숨이 다음 순간에 멈출 수 있다는 걸 아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음을 받아드리는가? 현재 내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들이 샅샅이 흩어져 근저부터 허물어지고 있음을 아는가? 당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받아드리든 받아드리지 않든 당신이 밟고 있는 다리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리는 가라앉는 다리를 밟고 서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드린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이 세상이 지금 바로 끝날 수도 있다. 세상이 끝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끝나면 끝나는 것이지.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세상과 잠시 어울려 살아주는 것이다. 세상은 이내 떠날 곳이지 죽치고 머물 곳이 아니다. 세상은 다리라, 건너가야지, 다리위에다 집을 짓지 말라.

 

죽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리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죽음 앞에 약해지거나 비굴해지지 말라. 죽음을 친구삼아 같이 가라. 구차하게 살기 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택하라. 비루한 생존보다는 깨끗한 퇴진과 청정한 멸진을 택하리라.

 

2017623()맑음

 

살아서 죽는 사람은 없다. 죽고 나서야 죽음이다. 산 사람은 죽은 게 아니므로 죽음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죽어버렸으니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러면 누가 죽음을 아는가? 죽음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죽음을 모른다.

 

죽음은 산 자의 망상이다. 그것이 피해망상이든, 학습된 망상이든, 생태계의 단백질순환의 결과이든 간에. 죽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끝맺음을 위해 산다.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곳이 바로 죽을 곳이다.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다시 어디로 가야할 곳도 없고 다음으로 미룰 일도 없다. 거기서 그렇게 끝나지 않으면 죽음은 다음으로 미루어진다.

 

다음이 있다는 것은 덤으로 다음을 얻는 것이 된다. ‘다음은 항상 덤으로 주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다음에 다른 곳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때까지는 덤에서 덤으로 이어지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죽음은 지금에서 다음으로 유예된다. 삶은 죽음이 집행유예된 것이다.

 

남쪽으로 열린 창에 아침 햇살이 가득하다. 죽음은 삶을 감싸는 여백이 되고, 삶은 죽음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린다.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르게 그린다. 매일 새로운 그림이다. 밤마다 죽고 아침마다 다시 태어난다. 하루살이 같은 삶으로 충분하다.

 

  오늘로 결제한지 반이 지났다. 반 결제 날이라 해서 대중이 유행을 간다. 절 옆에 있는 광릉수목원을 구경하러 갔다 오다.

 

(원담스님, 수행일기 2017 하안거-5, 2017-06-07)

 

 

 

 

스님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 들이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자연사이든 사고사이든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대부분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지만 수행자에게 수행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욕망을 여의며 사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애착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Thag.607)라 했습니다.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자에게 죽음은 무서운 것이지만 청정한 삶을 산 수행자에게 죽음에 대한 무서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자에게는 갖가지 죽음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청정한 삶은 산 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리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라 했을 겁니다.

 

죽는 것이 대수냐?”

 

어느 영화에서 본 대사가 생각납니다. 미국 영화인데 죽는 것이 대수냐?”라 했습니다. 다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죽음을 회피 하지만 옆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본 사람에게는 죽음이 뭐 대단한 일인가 싶나?’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무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만약 전장에서 병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면 싸움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장에서 병사들은 죽으면 죽는 것이다.”라는 마음 자세입니다. “죽음에 대수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유능한 장수는 전장에서 전쟁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수행자는 전장에서 전쟁하는 장수와 같습니다. 장수들이 적을 무서워 하지 않고 싸움을 두려워 하지 않듯,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정진합니다. 오히려 수행하다 죽는 것을 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수행하다 죽으면 자신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죽어는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알아차림을 유지했을 때 아라한이 되고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이를 사마시시(Samasisi)라 합니다. 죽음과 함께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한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낸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패자는 말이 없듯이 죽은 자는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합니다. 그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갈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온에 집착 되어 죽은 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음 세상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청정한 삶을 산 자에게는 죽는 것은 대수가 아니고 죽음이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청정한 삶을 산 자에게 죽음은 대수가 아닙니다.

 

일반사람과 수행자는 무엇이 다른가?

 

일반사람들과 수행자들은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욕망입니다. 일반인들은 욕망으로 살지만 수행자는 욕망의 여읨으로 살아 갑니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살아 갑니다. 만일 일반인들에게 욕망을 포기하는 삶을 살라고 하면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정반대입니다. 수행자는 욕망의 여읨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따뿟싸 장자의 경(A9.41)’에서 일반인과 수행자와 차이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장자 따뿟사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존자 아난다여, 저희는 재가자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향유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기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환희합니다. 존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향유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기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환희하는 저희 재가자들에게 여읨은 심연처럼 두려운 것입니다.

 

존자여, 그런데 저는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젊디젊은 수행승들이 이것이 평온이다.’라고 보면서 여읨 가운데 마음을 내고 기쁨을 찾고 확립을 찾고 해탈을 얻는다고 들었습니다. 존자여,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수행승들이 많은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바로 이 욕망의 여읨입니다.”(A9.41)

 

 

일반 범부들과 수행자 들의 가장 큰 차이가 욕망의 여읨이라 했습니다. 이는 선정 정형구에서도 표현 되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네 가지 선정에 들고자 할 때 반드시 욕망의 여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초기경전에는 초선정에 들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 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D2) 라는 정형구입니다. 이런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가수행자이든 재가수행자이든 수행자는 욕망의 여임을 목표로 합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을 때 절대로 선정에 들지 못함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욕망으로 사는 일반사람들과 수행자들의 차이라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오온이 무아(無我)인 자들은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일반사람들의 죽음에는 갖가지 죽음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죽으면 죽는 것이지 죽음이 대수가 아닙니다.

 

무아를 실현한 자는 더 이상 오온에 집착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시설되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오온의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오온이 무아(無我)인 자에게 있어서 애초부터 죽음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온무아인 자에게 죽음은 불사(不死)입니다.  

 

 

그것이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에 나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지금 버린다.”(A7.55)

 

 

2017-06-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