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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열린논단] 한국불교 어디로 가야 하나 - 포스텍 수학과 교수 강병균

우공(友空) 2018. 2. 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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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72호

밑줄은 내가

연꽃님을 통해 알게된 바로 그사람 글이네요..





[열린논단] 한국불교 어디로 가야 하나
[0호] 2018년 01월 18일 (목) 강병균 포스텍 수학과 교수
1. 무아연기와 진화론

  

강병균
포스텍 수학과 교수

무아연기(無我緣起)에 반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과학이론 중 (다윈의) 진화론은 가장 불교 무아연기에 맞는 이론이다. 생물체의 몸과 마음이 환경에 맞추어 변화를 한다는데 이보다 더 훌륭한 무아연기론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남 진제 북 송담’으로 유명한 진제 조계종 종정과 송담 스님은 진화론을 부인한다. ‘과학자들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누가 뭘 모르는지 모를 일이다.

진제 스님에 의하면 ‘개·소·말은 원래부터 개·소·말이었다’는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소위 종불변론(種不變論)이다. 송담 스님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는 법은 없지만 사람이 윤회를 해서 원숭이가 되는 법은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도가 높다는 게 무얼 일러 높다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들이다. 이분들이 어떤 도를 깨달았는지 궁금하다. 전생을 다 볼 수 있다면, 수겁씩 볼 수 있다면, 어찌하여 수십만 년이면 충분한 생물의 진화과정을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 점에서 윤회론의 허점을 볼 수 있다.

진화론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지만, 무아연기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이론이다. 진화론의 사상적 배경이 무아연기론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쌍둥이 이론이다. 하나는 물질적인 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마음에 대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뇌과학의 발달에 따라 양자가, 즉 몸과 마음은 통합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음은 몸과 독립적인 존재로 알았는데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존재는, 몸과 무관한, 참나라고 생각했는데) 마음 역시 뇌라는 물질에서 나타는 현상이고 기능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뇌를 쓸데없는 기관으로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은 보관하고 뇌는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는 심장의 열을 식혀주는 냉각기관 정도로 간주했다. 뇌는 꾸불꾸불 접혀 표면적이 넓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지금도 힌두교도들은 심장에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승려들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특히 티베트 밀교에 빠진 사람들 중에 많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은 가장 탁월한 진리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리이다. 진화론의 근거이다.

진화론은 ‘설계자 없는 설계(design without designers)’이고 ‘경쟁자 없는 경쟁(competition without competitors)’이다. 이는 정확히 무아연기이다. 식물과 동물은 16억 년 전에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식물의 유전자는 반 정도가 동물과 일치한다. 식물의 유전자를 동물이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달팽이와 진딧물 중에는 식물의 엽록체를 빌려와 광합성을 하는 경우가 있고, 극지방 물고기에서 부동(不凍)유전자를 빌려와 추위에 얼지 않는 토마토를 만들기도 한다. 식물은 동물과 세포 구조도 비슷하다.

자이나교에는 윤회도(輪廻道)에 아귀와 아수라 대신 식물과 미생물이 들어간다. 윤회가 참이라면, 윤회도에 있어서는, 자이나교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인이 진화론을 발견하여 불교 무아연기론이 옳다는 걸 증명했는데, 이른바 불교승려들이라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헛소리라고 비웃는다. 도가 가장 높다는 종정이라는 분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수행자라는 분이 그리한다. 이게 다 힌두교적인 유아론인 참나론에 빠져서 그렇다.

  



오온에 수가 먼저 나옴
오온의 순서는 진화의 순서. 색: 일단 몸이 먼저 생겼다. 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생겼다(그에 대한 의식은 없다). 상: 생각(의식)이 생겼다. 행: 의지가 생겼다. 식: 자의식이 생겼다. 자의식은 기억에 기초한다.

2. 이성적 감성. 반야지적 자비

차가운 이성인 반야지, 이걸로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님. 지고 우는 이세돌 그게 사람이다. 알파고는 울지 않는다. 이세돌에게 한 판 졌을 때, 물컹한 살덩어리 인간에게 졌다고 울지 않았다.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지혜가 어우러져야 한다. 불교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인 이유이다. 이성적 감성과 반야지적 감성을 개발해야 한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감성이 먼저 출현하고 이성은 뒤에 출현했다. 자비는 감성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감성적 자비의 시초는 피붙이에 대한 사랑이다. 혈연에 기초한 가족·씨족에 대해서는 운명공동체이므로 즉각적으로 발현하는 감성이 효과적이지만, 혈연이 옅어지는 또는 거의 없는 현대적 초대형 집단에서는 불가능해진다. 이때 이성에 기초한 자비가 등장한다. 피터 싱어의 합리적 이타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성적 이해가 자선행을 촉발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리해야 겠어요'가 여기에 해당한다.

삶은 앎에 선행한다. 앎은 삶에 후행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부모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부모가 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부모됨이 먼저 있고 사랑과 부모됨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깨닫는다. 깨달음이란 삶과 앎을 역행시키는 것이다. 모르고 살지 말고, 알고 살자는 것이다.

반야지의 확장
거짓·조작·선동에 안 넘어가는 지력을 개발해야 한다. 정의라는 포장지 안에 정의만 들어있는 게 아니다. 현상은 코끼리 같다.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 (사람도 그렇다.) 누가 어떤 사람이나 현상의 나쁜 면만 보고 ‘나쁘다’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덩달아 ‘저놈 잡아라’ 하고 외치며 따라간다.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더 좋은 면이 많은데 그 면을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법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경우, 사람들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 하지만, 그의 모든 면이 나쁜 것은 아니다. 도둑이 알고 보니 오래전에 행인을 치한으로부터 구해준 사람이었다. 세상의 현상에도 수많은 면이 있다. 지식 지혜가 없이 정의롭기만 하면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기 쉽다. 인류역사상 나타난 공산주의(스탈린 모택동 폴 포트)와 종교(십자군 전쟁, 30년 전쟁,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4차례 중동전쟁, 마녀사냥)가 일으킨 학살이 그런 예들이다.

사유와 분석지(分析智) 개발
속고 속이는 걸 방지해야 한다.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감추고 끝없이 속고 속인다. 선동에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지식·지력 증강. 알량한 정의감은 오히려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대한민국의 위증 무고가 일본의 수천 배라고 한다. 사기도 18배나 된다고 한다. 불교도들이 나서서 ‘정직한 국민정신’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세상일에는 즉 사람과 사건과 현상에는 수많은 측면이 있다. 그에 따라 수많은 호오(好惡)가 있다. 각각의 측면에 대해서 호(好)와 오(惡)가 갈린다. 최소한, 중요한 측면은 동시에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리하려면 지식과 지력(분석력·논리력·비판력 등)이 필요하다. 단지 선하고 정의감에 불탄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말처럼,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살기 나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종종 무지한 선인(善人)들이다. 이들은 유식한 악인들보다 세상을 더 악화시킨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비전문가가 다루면 안 된다. 이미 부상당한 경추나 척추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부상자의 입장에서는, 도우려다 부상을 악화시키는 무지한 선인보다 오히려 돕지 않는 악인이 더 나을 수가 있다.

판단중지.
많은 경우에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영원한 중지가 아니라, 증거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10, 14무기.

한탕주의 지양
우주적 지식창고가 있다고 믿고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그 창고에 접근하여 과학기술적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내 물리학 교수들 중에도 있다. 인류역사상 그런 식으로 과학기술이 발견된 적은 없다. 비밀은 사물 자체에 허공에 있다. 모두 드러나 있다. 단지 인간의 지식·지력·지성이 부족해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다수의 중요한 진리가 이미 발견된 걸 모르는 승려들이 사람들을 몽매주의의 길로 오도한다. 배움·지식·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의지하여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지성의 상징 부처님이 통곡할 일이다.

총론불교와 각론불교
부처님의 무아연기·삼법인·고집멸도 총론이고, 제자들의 진화론 뇌과학 생물학 심리학 각론이다.
생명체는 시공에서 변하는 존재이다. 의식도 고락(苦樂)도 변한다. 그 구체적 해결책도 변한다. 국가의 책임은 새로운 현상이다. 예전에는 생산을 노동력에 의지해 노예제도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기계화와 자동화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노예도 사라졌다.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 인권향상을 가져오는 예이다.
각론의 심화에 힘써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각론에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2프로 각론에 있다. 유전자가 98로가 같으므로 2프로 차이에 있다.

지력향상
무념무상으로는 안 된다. 부처님은 무념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다. 사유의 달인이셨다. 분별에 능하셨다. 부처는 당시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당시 인도의 모든 학문에 밝았다.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불교계도 최고 수준의 현대적 지식인을 배출해야 한다. 부처는, 당신의 조상들이 불변의 진리로 추앙하며 의지하던, 수천 년 케케묵은 과거의 환망공상(幻妄空想)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때려 부수었다. 수구파가 아니라 개혁파였다. 오래된 집을 때려 부수었다. 환망공상의 집을.

사량분별을 금기시하는 한국불교의 풍토는 참나불교의 영향이다. 힌두교 브라만과 같은 존재를 설하는 한국불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처럼, 모든 게 참나(眞我 true atman)이므로 참나 이외의 것을 논하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부들 중에는 세속 학문 박사학위자들이 있다. 천문학 박사인 바티칸 천문대장 신부는 '그런 걸 누가 믿어요?' 하며 대놓고 천국·지옥을 부인한다. 승려들 중에 물리학·천문학·생물학·진화론·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모든 세속학문은 무아연기의 구현이자 증명이다.) 윤회론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삼법인·사성제·연기법을 제외한 모든 게 방편이라면 못 할 게 없다. (그런데 불교학자인 한자경 교수 같은 사람은 ‘무아론을 방편설’이라고 주장한다. 책까지 썼다. ‘불교의 무아론’인데, 그 결론이 ‘무아론은 방편설’이다. 이분은 대행의 사상을 옹호하는 논문까지 썼다. 대행은 우리 태양계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에서 외계인들이 비행접시를 날려 지구인들을 조사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다. 주인공에게 맞기면 모든 소원이 성취되고 병이 낫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도 비판을 안 한다.)

  



3. 윤회론

윤회론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다.

윤회론은 ‘종 쇼비니즘’이고 ‘생명계의 카스트 제도’이다. 동물을 도덕적으로 더 열등한 존재로 과거에 즉 전생에 더 나쁜 짓을 한 존재로 만드는 만행이다. 한 해에 수백억 마리의 짐승을 살해하면서 벌이는 위선이다. 서로 대량살상을 하고 고문을 하는 생물은 인간뿐이다. 윤회론은 진화론과 위배된다. 1.5억년이나 지속된 공룡이었다는 전생담이 없다. ‘내가 과거 생에 공룡 왕 티라노사우루스였을 때’라고 시작하는 경전이 없다. ‘내가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었을 때’라고 시작하는 경전도 없다. 그래서 제가 경전을 두 개 만들어 보았다. ‘티라노사우르스 경’과 ‘보타니카 수트라(식물윤회 경)’이다.

100억 원과 기억상실을 교환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아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다. 수십 명에게 물어봤다. ‘내가 당신에게 100억 원을 주겠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돈을 받는 즉시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문자 그대로 일체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돈을 받겠느냐?’ 모두 거부한다. 거의 즉각적이다.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돈을 신처럼 섬기는 미국’에서 온 미군 병사 불교도도 있었는데 거부했다. 어떤 사람은 ‘어, 그거 윤회하고 같은 얘기네요?’ 하면서 거부했다. 기억이 없다면 윤회는 의미가 없다.

대승불교와 유아론
일부 대승은 영원히 원력수생하며 존재하는 영혼 같은 걸 인정한다. 같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과거의 경험을 다 유지한다. 알라야식(藏識 창고식)이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되면 참나론이 된다. 한자경 교수가 전형적인 예이다.

인간의 정의
불교는 모든 생명 있는 행성에 6도윤회가 있다고 가정한다. 인도(人道)라 할 때 인간의 정의는 무엇인가? 몸의 모양인가? 아니면 지력인가?

불경은 다른 행성에도 인간모습을 한 생물이 살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든 부처는 32상을 지녔다. 타방불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타방불은 지구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달라이 라마는, 1981년에 하버드대에서 행한 연속강의에서, ‘중음신의 이동속도는 빛보다 빨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행성에 가서 태어날 때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침팬지 보노보가 구석기 시대 혹은 북경원인 혹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또는 600만 년 전 인간보다 더 지력이 높으면 인간으로 칠 것인가? 즉 인도로 칠 것인가?

6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도(人道)에 속한다면 그보다 더 진화한 오늘날의 침팬지는 왜 인도에 속하지 않는가? 인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불합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인도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로부터 불연속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니다. 시공을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모든 동식물은 서로 유전자가 반 이상 일치한다.) 진화론이 바로 이런 이론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서로 불연속적인 인도와 축생도를 생각했다. 동물의 몸과 마음이 인간으로 진화를 한 것이 35억 년간 윤회이지, 몸과 독립적인 (진화를 하지 않는) 마음이 동물의 몸을 들락날락하는 게 윤회가 아니다.

타방불은 인간인가
타방불(他方佛)도 지구인과 같은 모습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불경에 의하면 누구나 다 32상을 갖기 때문이고 32상은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체의 몸은 환경에 의해서 결정 나므로, 다른 고등 행성에 반드시 인간 모습의 생물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지구만 하더라고 물짐승과 길짐승과 날짐승은, 사는 환경에 따라, 서로 모습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고래와 하마와 황새가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예도 있다. 그곳 생물들은 외딴 섬들에 고립되어 살다보니 기이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생명체가 환경에 따라 몸의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 무아연기론이다. 그러므로 다른 행성에는 인간과 같은 모습의 생명이 있을 필요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러므로 무아연기는 총론(總論)이고 진화론은 각론(各論)이다. 각론에 밝아야 한다. 학문이란 각론을 발견하고 심화하는 과정이다. 이름하여 총각론이다. 불자들은 총각론에 밝아야 한다.

지옥과 유물론
지옥은 유물론이다. 지옥중생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지 정신적 고통이 아니다. 펄펄 끓는 물 날카로운 칼을 세운 산 등에서 육체적 고문을 받는 곳이다. 산채로 항문에서 입까지 꿰임을 당하거나, 산채로 가죽을 벗김을 당하기도 한다. 정신적 고통을 받는 곳이 아니다. 이는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는 주장이므로 유물론의 일종이다. 정신적 고통인 번뇌는 (축생계·아귀계·지옥에는 없고) 인간계에나 있으므로, 만약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라면, 축생계로 추방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환생하게 해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없다. 지옥이 유물론의 산물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있다. 마취제에는 육체적 마취제와 정신적 마취제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정신적 마취제이다. 종교로 마음을 마취하고, (인문·자연과학으로 마음을 분해·수술을 하며) 정신을 강화한 다음, 종교에서 깨어나면 된다.

참나론의 탈피. 윤회론의 탈피. 더 큰 의미로서의 윤회론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도 인권과 사회와 공동체의 이익을 논한다. 자아의 영속성을 믿어야만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점에서 자아의 비소멸(非消滅)을 전제로 하는 윤회론은 저차원의 가르침이다. 아함경이 저차원의 경전이 아니라 '개인의식의 영속성에 자비와 해탈의 기반을 두는 사상'이 저차원이다. 이기적인 사상이다.

개인의식 탈피
편협한 개인의식을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인과응보를 벗어나야 한다. 통계적·집단적 인과응보를 보아야 한다. 통계역학처럼 통계인과를 보아야 한다. 수십조 개나 되는 입자들의 움직임은 일일이 하나씩은 알기 힘들어도, 전체적으로는 알기 어렵지 않다. 인과응보도 마찬가지이다. 73억 명이나 되는 인간들의 인과응보를 일일이 알기는 어렵다. 전체 집단의 인과응보를 보게 보면, 우연과 개별적인 예외의 역할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아서, 평균적인 인과응보를 알게 된다. 보험과 같은 이치이다. 고객이 많으면 우연성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된다. 큰수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깨달음과 인구
깨달음도 인구의 힘이다. 인구가 작으면 의식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식도 발달하지 않아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 부처도 나올 수 없다. 부처는, 세인의 이해와 달리 산골의 산물이 아니라, 도시문명의 산물이다. 침팬지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이다. 침팬지 집단은 잘해야 200마리 정도이기 때문이다.

  



4. 불교 우주론

달라이 라마는 2011년에 다람살라에서 태국 불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교 우주론을 안 믿는다’고 했다. ‘수미산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우주론을 믿는다고 했다. 구사론은 해와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 한 가운데에 수미산이 있다고 하지만, 훨씬 더 발달한 현대과학적 우주론을 믿지 구사론적 우주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수미산이 없어지면 그 정상에 있는 지거천(地居天)인 도리천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그러면 천계신화(天階神話)가 구라가 된다. 부처님이 어느 해 하안거 석 달 동안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 환생한 어머니 마야부인을 뵙고 내려왔다는 일화이다. 수미산이 없어서 도리천도 없다면 마야부인은 어디로 환생했을까? 부처님은 석 달 동안 헛것을 보신 것일까?

무량수경에도 수미산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이 ‘극락에는 수미산이 없다’고 하자, 아난이 묻는다. '그렇다면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무척 흥미로운 문답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달라이라마는 현대과학을 증거로 들어 염부제의 수미산도 부정하고 있다. '불경을 맹신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너무 오래된 것은 약이라도 몸에 해롭다.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불경도 마찬가지이다. 그중에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솎아내야 한다. 지옥·아귀·동물계·아수라·천국을 말하는 통속적 윤회론도 거기에 속한다.

5. 말뿐인 보살행 실천
자비희사의 사회적 실현


손양원 장기려 등 기독교 목사들과 의사들. 손양원 목사는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반군 쪽에 선 18살 청년에게 살해당했다. 손 목사는 그를 자기 양자로 받아들여 키웠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의사인 장기려는 고신병원을 세워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으며,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들어 (자신이 무료로 치료해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볼 수 있게 했다.

숨어서 자비행을 하는 스님들도 많겠지만 부처님 제자들이라면 더 큰 행이 필요하다. 타종교인들이 ‘불교는 과연 자비의 종교구나’ 하며 감탄할 정도의 실천이 필요하다.

엉터리 목사들이 자기 교회 호화스러운 큰 교회를 탐착한다면, 엉터리 승려들은 자기 토굴 호화스러운 토굴을 탐착한다. 토굴이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처럼, 토굴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사는 곳인 양, 군다.

대만불교는 계행과 자비행의 실천이 뛰어나다고 한다. 인도성지 순례만 갈 것이 아니라 대만불교 순례도 해야 한다. 엉망진창인 한국불교는 착실한 대만불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

수나라 신행 스님(540-594)이 일으켜 송나라까지 400년을 유행한 삼계교가 있다. 그는 무진장을 설립하여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손양원 등 기독교 성직자들은 자비 사랑을 실천하는데 불교의 자비 사랑은 전생담에만 있다. 신도가 주는 이유이다. 대만을 본받아야 한다. 국민성이 이유일 수 있다. (고정불변한 게 없으므로 국민성도 바뀐다. 국민의 마음에 나쁜 면이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속고 속이는 걸 막아야 한다. 일반인들은 서양인들이 오히려 순진하고 착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방생은 사기이다. 방생을 할 양이면 평소에 물고기와 육고기를 줄이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 년에 소비하는 닭이 몇 억 마리에 달할 것이다. 이들을 놔두고 물고기 몇 마리 방생하는 것은 양이 찰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불교가 아니다. 불교도들이 크게 반성해야 한다. 스님들만 바라볼 게 아니라 신도들이 변해서 스님들을 교화해야 한다. 참나나 믿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은 교화의 대상이지 교화의 주체가 아니다. 승복이 아니라 (거룩한) 행이 스님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그렇다.

6. 제도의 투명성

승려들을 돈에서 멀어지게


주지가 모든 돈을 관리하는 게 부패의 원인이다. 만악의 근원이다. 성직자들의 물질적인 타락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불교가 국교인 태국도 심각하다고 한다. 태국 불교도에 의하면, 한국은 그나마 폭로하는 언론기관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태국은 정치권과 결탁한 언론이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한다.
한국 승려들은 불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절집문화를, 그중 특히 한국적인 절집문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신도들 역시 불법보다는 산중에 위치한 환경과 절집이 풍기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7. 주체적인 당당한 신도들의 마음자세

신도들의 절 운영 참여
절의 주인은 신도들
승려들은 신도들(불제자)의 일부분
신도들도 사원이사처럼 경영에 참여해야.
조계종 직책 중에 신도부장 신설되어야
종회에도 신도의원들이 있어야 한다.

8. 평등한 승가의 구현. 비구니 처우 개선

모든 부처를 낳는 것은 여성이다. 모든 부처의 몸속에는 여성의 유전자가 반이다. 이 유전자 중에 깨달음의 유전자는 없다. 사람의 정신적 능력은 뇌를 만드는 (생체·사회) 유전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사람의 정신적 능력은 육체와 무관하게 정신에 있는 줄 알았다. 전생에 선업을 지은 사람들이 전생의 마음(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남자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모든 부처를 10달 동안 배속에 키우고 낳아서 젖을 물려 키우는 것이 여성이다. 비구니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 세속에서는 여자들의 참정권이 확보된 지 오래이고, 여성 대통령·수상·총리·장관·판검사들이 숱하게 배출되었는데, 종교계만 예외이다. 하나님이 남자이고 부처님이 남자이기 때문인가? 종회가 깨달음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절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비구니들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40년 동안 학력 위조를 한 남자 승려가 총무원장을 하는 세상에 어느 비구니가 이분보다 못할 것인가?

9. 승려들의 정치활동 금지

승려들은 자기 분야 일이나 잘할 일이다. 말로는 불법은 출세간의 일이라면서 세간의 일에 뛰어들어 간섭을 한다.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 정치이야기다. 불과 십여 년 세월만 흘러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일들이다.

세속의 정치는 불법보다도 더 어렵다. 불법이야 선(good)만 닦으면 다이지만 세속의 일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일에도 수많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어,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가 힘들다. 정의감에 불타는 스님들이 '이게 나라냐' 하고 씩씩대다가는 한 면만 보는 단견에 빠지기 쉽다. 현대 사회는 분업의 사회이므로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종교는 가장 큰 분업 중 하나이다. 부처님이 승려의 정치활동을 금하신 것은 탁원한 선택이다. 어느 쪽 편을 들건 반대쪽의 원한을 사서 세상에 평화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증오와 분쟁과 싸움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문제의 승려가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펼지라도 반대편 사람들은 반감으로 귀도 기울이지 않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길이 막힐 것이다.

불세출의 천재 뉴턴은 주식투자를 했다가 망했다. 자그마치 30억 원을 날렸다. 그는 ‘천체의 운동은 예측을 할 수 있지만 대중의 광기는 예측할 수 없다(I can calculate the motions of the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the people)’고 한탄했다. 주식가격을 결정하는 제일 요인은 수급이고, 수급은 대중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속일은 어렵다. 오히려 물리학 등 첨단학문이 더 쉬워 보일 정도이다.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이 말했듯이 ‘투자자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불교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아직 자기를 이기지 못한 자가,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가, 정치판에 뛰어들면 크게 망한다.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대중을 지옥으로 인도한다.

역사적 불교
인구가 희박할 때 무속이. 인구가 적을 때 개인주의적 불교. 종교인구가 많을 때 집단주의적 불교 종교. 단순한 의식에서 복잡한 의식으로 발달. 의식의 다인구적 성격.
불교와 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사상은 역사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지혜와 자비가 그렇다.

무력과 자비
무력은 남이 나쁜 짓을 하는 걸 막음. 터지면 나쁘다. 이명래 고약의 예가 있다. 성난 부분을 곪게 해 터뜨린다. 덕분에 죽지는 않지만, 여러 날 고생하고 흉터가 남는다는 단점이 있다. 항생제는 이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항생제를 복용하며 체력을 기르면 다음에 종기에 잘 걸리지 않는다. 이제 인간이 종교적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동안 과학을 복용하며 지력을 향상시켜 종교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이런 힘도 불성의 일종이다.

자비는 무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무력이란 남이 자기를 잡아먹으려면 상당히 피를 흘려야 하는 방어력이다. (밧지족 일화.) 내가 약하면, 어리석으면, 사람들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한다. 신한 섬 사건. 다는 못 막아도 상당히 막는다. 모든 악이 반드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 악의 발현을 막고 부처가 된다. 물리적인 힘과 물리적인 지혜(검술·총검술)도 악의 발현을 막고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세포도 생명, 병든 기관도 생명, 기생충도 생명이지만 죽인다. 부처가 될 생명과 더 진화한 수없이 많은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악한 일이 선업을 낳는다. 세상일에는 수없이 많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 면으로 모든 면을 재단할 수 없다.

II. 한국불교는 불교인가

이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불교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이다.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이다. 탐진치를 제거해 윤회의 흐름을 끊으면 더 이상 육체적 고통도 없다. 윤회란 시시때때로 다양한 대상에 빙의하여 사는 의식의 흐름을 말한다. 이걸 의식의 지향성(指向性)이라고 한다.

불교신도들과 일반인들은, 불교 경전이라는 텍스트를, 전문가들인 승려들의 해석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승려들이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큰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천 년 케케묵은 미신이 승려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미신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게 윤회환생이지 다른 게 윤회환생이 아니다.

빅데이터 불교
조류독감 이동경로를 발견한 빅데이터(Big Data) 기술을 이용하면 불자들이 좋아하는 사주팔자와 풍수와 점의 실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미신불교
금타화상, 백성욱, 탄허, 대행, 무비, 한암대원의 예가 있다.
우리나라 유명한 승려들의 사상은 힌두교적 유아론과 미신으로 가득하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신도들 역시 그렇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부처님 가르침은 멀고 살아있는 승려들(의 환망공상)은 가깝다.

청화 스님의 스승인 금타화상은 달이 지구보다 6배나 크다고 했고, 지구가 달에서 빠져나왔다고 했다. 달은 전면은 원형이지만 뒷면은 고깔 모양이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모아 청화 스님의 ‘금강심론’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불교텔레비전에서 만든 청화스님 특집에서 이 책을 펼쳐놓고 찬탄하면서 이 부분을 클로우즈업하는 통에 경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일지반해한 현대과학 지식으로 금타 스님을 비판하면 방불훼불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금타 스님이 선정 중에 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비 스님은 절 뒷산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두 사람이 선암사 경내 두 그루 나무로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해인사 방장 후보였던 한암대원 스님은 공사장에서 큰 돌을 깨뜨리면 돌이 피를 흘리며 복수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욱은 겨울이며 제비가 물속에 들어가 조개가 되었다가 몸이면 다시 제비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걸 미신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게 진짜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난생(卵生)에 대해서 부끄러운 생물들이 자기 몸을 가리느라 알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탄허 스님은 ‘1977년에 김일성이 죽는다. 2000년경에 포항에서 석유가 난다, 일본열도가 가라앉는다, 서해안이 융기한다, 만주가 우리 땅이 된다, 통일이 된다’고 예언했지만 다 틀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예언가인 줄 안다. 그런 예언 능력이 불교수행을 통해서 나오는 줄 안다. 그가 점치기를 즐겨하고 점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소문이 있다.

대행 스님은 수성·금성·화성·목성에서 외계인이 비행접시를 지구로 날린다고 주장했다. 주인공(참나)에게 맡기면 못 고칠 병이 없다고 가르쳤지만 치매에 걸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약탕기를 달고 사는 큰스님들을 폄하했지만 자신도 자리보전을 하다 죽었다. 이런 예들은 불법을 공부하면 병과 죽음을 이길 신비로운 힘이 생기는 줄 오해하는 망상의 소산이다.

승려들이 신비한 지식이 있는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이 몇 달만 살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신비한 능력으로 귀뚜라미 보일러나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고치는 법이 없다. 법률지식에도 무지하다. 도대체 무얼 아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 안다는 선언만 있을 뿐이지, 다 안다는 내용이 없다. 그나마 안다고 하는 것도 대부분 환망공상이다. 진제 스님과 송담 스님처럼 진화론을 부인하고 종불변론을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현대과학에 역행하는 역행 보살들이다. 이판도 사판 못지않게 대한민국 불자들을 고문한다. 뇌에 기생하고 놔주지를 않는다.

참나불교
청담·서암·서옹·진제·송담·원담·혜국·대행·혜민·한자경의 불교는 무아연기론이 아니라 참나불교이다.
이들이 가르치는 참나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존재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화를 내는 존재이고 꼬집으면 아파하는 존재이다. 이 몸 저 몸 들락날락하는 존재이다. 힌두교 하레 크리슈나 운동의 창시자인 프라부파다가 말하는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 가는’, 즉 이 몸을 빠져나와 저 몸으로 옮겨가는 존재이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후에도 있는 영원한 존재이다. ‘모든 것은 무아이지만 모든 것이 무아인 줄 아는 존재는 무아가 아니다.’ 혜민 스님의 주장이고 한자경 교수의 주장이다.

이에 비하면 기독교의 이신(理神)은 아주 점잖은 존재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법도 없다. 중력의 법칙, 상대성 원리, 열역학법칙, 전자기학, 베르누이의 법칙 등 우주의 이법(理法)일 뿐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는데, 즉 인신공희를 받고 인종말살을 자행하던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잔인한 야훼라는 인격신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이신으로 진화하는데, 불교는 거꾸로 더 나쁜 방향으로 퇴화하고 있다, 즉 우주의 이법인 무아연기론에서 참나라는 일체종지를 가진 베다교적 인격신으로 퇴화하고 있다.

문화로서 불교, 진리로서 불교
문화로서 불교를 하는가? 진리로서 불교를 하는가? 학자들은 문화현상으로서 불교를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리인지 아닌지는 잘 논하지 않는다. 심하게는 직업으로서, 호구지책으로서 불교를 한다. 연구비를 받고 맞춤형 논문을 쓰기도 한다. 권력자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그래서 결국 한국에서 불교를 진리로서 논하는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는 사라진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신도들을 소·돼지 취급하는 성직자들
사악한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깨이는 걸 원치 않는다. 소·돼지처럼 우민(愚民)으로 만들어 놓고 부려먹고 뜯어먹고 잡아먹고 싶어한다. 정확히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復)’ 작전이다. 말로는 지극히 높은 분에게 대신 청원을 넣어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도와준다고 하지만, 엄정한 인과의 세계일진대 간청한다고 일이 풀릴 리는 만무하므로 (삿된 마음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소원을 빌지만 재물만 낭비하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충기심 허기복(充其心 虛其腹)’이다.

사람들은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문화로서 불교를 말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진리로서 불교는 팔만대장경을 몰라도 가능하다. 5비구는 팔만대장경을 모르고도 아라한이 되었다. 오히려 (특히 현대인들은) 팔만대장경의 숲에서 길을 잃고 불교적 진리를 더 모를 수 있다. 진리는 불교 밖에도 있다. 모든 진리는 불교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게 무아연기(無我緣起)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는 무아연기의 춤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떠난 신비한, ‘도가도 불상도’의 도(道)의 춤이 아니라 무아연기의 춤이다. 사량분별을 벗어난 초월적인 참나(眞我 true atman)의 춤도 아니다. 수백만 년 인류역사에서 (신이나 참나 등) 초월적인 것이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준 적이 없다. 인간 삶을 구원한 것은 인간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이다. 부처님의 설산 6년 고행도 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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