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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깨달음타령하나요? 하사문도 대소지(下士聞道 大笑之)

우공(友空) 2017. 11. 22. 20:09


http://blog.daum.net/bolee591/16158139

아래는 원문




그래서 어쩌라구요?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도를 듣고 크게 웃어 버리는 자

 

 

오래 전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함부로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함부로 도 닦는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이런 말 해 보았자 본전도 뽑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사하고 이해는 커녕 비난 듣지 않으면 다행이라 했습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절대 수행을 한다느니 도를 닦는다는 등의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깨달음타령하나요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매일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가 생활화 되다 보니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글을 실었습니다. 쓴 글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블로그에서 어느 법우님이 비판 글을 실었습니다. 법우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초기경전을 공부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우매한가
난 경전공부 안해도 잘 살고 있는데요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깨달음타령하나요 뭣이 그렇게 괴로운가
또 좀 괴로우면 어떤가요
세상 살면서 불편한 일이 없으면 물론 좋겠지만
괴로움이 없으면 좋음도 모르겠죠
맨날 진리를 알린다고 애타하는 그 자체가 괴로울 것 같은데
남들이야 어찌 살던 그냥 내버려 두면 안될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르침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내 생각을 전해봅니다.”(S법우님)

 

 

S법우님은 종종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글에 공감하는 글 보다는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을 때 비판합니다. 그런 S법우님은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중요시 여기는 듯합니다. 굳이 힘들게 수행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는 현세적인 행복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글에서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깨달음 타령하나요라며 비난 했습니다.

 

어디 가서 도 닦는다고 말하지 말라

 

페이스북을 보면 저잣거리 같습니다. 시장에 가면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듯이, 페이스북에서도 눈길을 끄는 글이나 사진, 동영상이 많습니다. 시장에서 골라 골라라며 박수와 함께 외치는 것처럼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자신의 것을 보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진지한 글은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긴 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감각적인 것들로 넘쳐 나는 페이스북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하는 글은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이는 좋아요와 댓글 숫자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강에 초치는 듯한댓글을 보았습니다. 어느 법우님이 진지하게 작성한 글에다가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며 댓글을 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앞서 언급된 S법우님이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깨달음타령하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이 빨리 지나가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대개 개인과 가족 등의 행복과 안위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대기도라 하여 건강, 학업, 사업, 치유라는 키워드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깨달음이니 도이니 하는 말들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있는 곳에서 수행을 한다느니 도를 닦는다느니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 보았자 본전도 못 건지기 때문입니다.

 

도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이 있는데

 

몇 해전 EBS에서 최진석 교수의 노자에 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최교수에 따르면 도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사도, 중사도, 하사도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상사도입니다. 이는 상사문도 권이행지(上士聞道 勤而行之)’라 하여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라는 뜻입니다. 도를 믿고 묵히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최고 수준의 지식인은 도를 들으면 근면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를 믿기 때문에 받아 들이고 따르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사도입니다. 이는 중사문도 약존약망(中士聞道 若存若亡)’이라 하여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말은 되는 것 같은데..” 라든가, “듣기는 참 좋은데..”와 같은 말을 합니다. 이는 반신반의하는 것입니다. 도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사도입니다. 이는하사문도 대소지(下士聞道 大笑之)’라 하여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소(大笑)’는 문자 그대로 크게 웃는 것을 말합니다. 도를 들어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웃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웃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구분은 요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 합니다. 상사는 상근기라 볼 수 있는데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열에 한두 명 정도일 것입니다. 중사는 중근기로서 열에 두 세 명 될 것입니다. 하사는 하근기로서 열에 칠팔 명 정도일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하사에 해당될 것이라 봅니다.

 

버러지 같은 삶

 

대부분 사람들이 하근기이기 때문에 이들 앞에서 깨달음이니 도이니 하는 말을 하면 크게 웃어 버립니다. 한마디로 놀고 있네라 할 것입니다. 또 “수행한다는 사람이 뭐그래?”라든가, “수행한다며 언행도 일치안되네?”라며 비난할 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라든가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 봅니다. 이와 같은 하근기의 사람들을 하사라 하는데 김성철 교수는 보리도차제론에서 하사도의 하하(下下), 즉 하중의 하의 사람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사도에서 제일 마지막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심히 일해 갖고 돈 벌어 갖고 가족을 잘 먹여 살리고, 잘 키우고, 시간 나면 놀러도 가고, 그런데 절대 나쁜 짓은 안해요. 착하게 사는데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이 하하에요.”(김성철교수, 해인사 2003중론김성철 13 20:37)

 

 

티벳불교의 보리도차제론에 따르면 재가불자가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닦는 도가 ‘하사도’라 합니다. 하사도는 세 가지로 나누는데 하상, 하중, 하하라 합니다. 그런데 ‘하하(下下)’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속이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오계를 어기며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등외(等外)’ 라 합니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처자식을 부양하며 착하고 사는 자에 대하여 ‘하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 대하여 ‘버러지 같은 삶’이라 하였다. 왜 버러지 같은 삶인가? 이어지는 강연을 들어 보면 “사회에서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 가지고 밤새며 돈 벌어서 자식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살리면 좋은 아버지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게 버러지 같은 사람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것은 짐승도 그렇게 한다 이렇게 말해요.”라 했습니다.



L법우님의 체험 이야기

 

김성철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하하(下下)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마치 짐승처럼 살아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때 되면 먹고 번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짐승이 새끼를 낳으면 정성스럽게 키우듯이,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 그것 이상 관심 없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대부분 관심 갖지 않습니다. 열에 하나 둘 정도 귀 기울여 들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반신반의 하거나 웃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이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깨달음과 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크게 웃어버리거나 말거나 반신반의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갈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깨달음의 맛, 도의 맛, 수행의 맛을 아는 자들입니다. L법우님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정평불 창립법회를 마치고 L법우님과 함께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L법우님은 채식주의자입니다. 단 계란은 허용한다고 합니다. 영양을 위하여 최근에 수용 했다고 합니다. L법우님은 고기를 일체 먹지 않습니다. 어류도 먹지 않습니다. 일곱 가지 채식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인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 vegetarian)’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 단계는 유제품과 동물의 알을 먹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L법우님은 유제품을 먹지 않고 계란만 먹는다고 하니 네 번째 단계에서도 반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L법우님이 채식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십년 전쯤 집중 수행에 참석하고 나서 부터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이른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수행처에서 호흡에 집중하고 있을 때 빛이 보였고 빛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것 이상 없는 궁극의 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몸을 던져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죽어도 좋아일 것이라 합니다. 이후로도 수 많은 체험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의식이 끊어진 것이라 합니다. 3분 가량 끊어졌다가 돌아 왔는데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들을 과천에 있는 위빠사나 스승에게 이야기 했더니 아무 말 않고 미얀마에 가서 더 수행하면 어떻겠느냐고 권고 했다고 합니다.

 

L법우님이 지하철에서 들려 준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것들입니다. 내면의 무한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고 볼품 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마치 맑고 투명하고 청정한 곳에 있는 이물과 같아서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현실의 세계에서 비추어 보니 현실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불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한한 자비심이 절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사물을 보아도 있는 그대로 보였다고 합니다. 장미를 보아도 이것이 장미이다라는 인식이 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선시를 10수 가량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지은 것인데 나중에 선어록 등을 보니 유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나서부터 자연스럽게 오계를 지키게 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L법우님은 머리가 허옅게 세서 마치 도인처럼 보입니다. 촛불법회에서 연사로 연설하기도 했는데 주로 승려의 계행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선정 체험을 하게 되면 계행은 자연스럽게 지켜 질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쌍둥이아빠이니 성폭행이라는 말이 회자 되는 것은 스님들이 계행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인데, 근본적으로는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섹스의 쾌감보다 100배는 황홀한

 

수행을 하여 체험을 하게 되면 세상의 즐거움이 부럽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초기경전에도 등장합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

 

 

부처님은 최상의 즐거움에 대하여 선정삼매에 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경에서는 상수멸에 이르기 까지 아홉 가지 선정단계에 대하여 동일한 정형구를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과 귀 등 오감으로 얻는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은 오감으로 얻는 행복입니다. 일종의 거친 행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 묘사된 신체의 접촉에 따른 감촉의 행복에 대한 것을 보면 “촉각으로 인식되는 감촉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S36.19)라 했습니다. 이런 행복은 힘과 노고가 들어 갑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욕망을 내려 놓으면 탁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오욕락의 행복이 욕망에 바탕을 둔 ‘거친 행복’이라면, 선정삼매의 행복은 욕망을 내려 놓음에 따라 얻어지는 ‘잔잔한 행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가장 쉽게 설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호주의 테라와다 빅쿠이자 세계적인 명상가인 ‘아잔 브람’은 오욕락과 선정삼매에 대하여 “ 불교 명상의 즐거움이 대학 시절 여자친구와 나눈 섹스의 쾌감보다 100배는 큰 황홀함이었어요. 그러니 어찌 출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한겨레신문, 2015-10-17) 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 갑니다. 오욕락의 추구가 최고로 행복인 줄 압니다. 그래서일까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에서 죽어도 좋아가 있었습니다. 나이 든 노인이 섹스 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내면에서 경험하는 행복은 이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잔브람은 섹스의 쾌감보다 100배는 큰 황홀함이라 했습니다. L법우님은 무한한 희열과 행복감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라 합니다.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계행은 자연스럽게 지켜지게 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것과 선정삼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정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은 감각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궁극의 경지를 체험 했다면 오로지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못배운 일반 범부들은 도에 대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경청하기는커녕 반신반의하거나 크게 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깨달아서 뭣에다 쓸려고라고.

 

 

2017-11-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