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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아서 장로가 아니라

우공(友空) 2021. 3. 12. 21:46

원문  blog.daum.net/bolee591/16160472

 

 

2021. 3. 12.

나이가 많아서 장로가 아니라, 최상자로서 부처님 아눗따라(無上士)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이는 대통령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할지 모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스승이라고 할지 모른다.

 

불교인인들은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고 말한다. 이를 무상사(無上士)라고 말한다. 더 이상 위가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로는 아눗따라(anuttara)이다.

 

아눗따라는 여래십호 중의 하나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또한 자기보다 덕성으로 더욱 뛰어난 자가 없기 때문에 그 보다 높은 자가 없으므로 위없이 높으신 님이다.”(Vism.7.46)라고 정의해 놓았다. 뛰어난 자와 높은 자가 키워드이다.

 

자신 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지만 자신보다 뛰어났을 때 높게 본다. 이는 베란자의 경에서 부처님이 바라문들에게 나는 무명에 빠진 계란의 존재와 같은 뭇삶들을 위하여, 둘러싸인 무명의 껍질을 깨고 홀로 세상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히 깨달았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A8.1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스스로 손위이고 최상자라고 했다. 이 말은 젯토(jeṭṭho)와 셋토(seṭṭho)를 번역한 말이다. 젯토(jeṭṭho) ‘eldest’의 뜻이고, 셋토는 ‘supreme’의 뜻이다. 세상에서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늙고 연로하고 고령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일어서서 맞이하지도 않았고 초대하지도 않았다. 고령의 바라문들은 괘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병아리 비유를 들어서 누가 손위이고 누가 최상자인지 설명했다.

 

병아리 비유

 

사람들은 나이로 자리를 따진다. 나이가 많으면 상석에 앉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간의 방식이다. 출세간에서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는지 들어가지 않는지로 따진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부처님은 병아리 비유로 설명했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킬 때, 어떤 병아리가 병아리들 가운데 첫 번째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알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그 병아리를 손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아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 (A8.11)

 

 

병아리가 부화할 때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가 된다. 알을 낳은 순서는 다르다. 먼저 낳은 알이라고 해서 품었을 때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늦게 낳은 알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깨고 나올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가와 출가에서 상자(上者)?

 

세상에서는 나이로 따진다. 말다툼하다가 나중에 그럼 주민등록증 까봅시다.”라고 말하는 것도 나이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따른 것이다. 이런 경향은 TV에서 자막으로 나이를 숫자로 표시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TV에서 유명인사의 경우 자막에 나이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지위나 직책을 표시한다. 지위도 직책도 없는 사람들은 단지 나이숫자를 표시한다. 서로 비슷비슷할 때는 나이를 우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기라도 생일이 앞서면 선임이 된다.

 

출세간에서는 나이와 무관한다. 출가하면 세속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언제 구족계를 받았는지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 나이가 어려도 일찍 출가했다면 선임이 된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고 해서 순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늦게 출가한 자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고 해서 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출가에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것과 관계없이 법랍으로 따진다.

 

세간에서 순위 셈법은 출가에서의 셈법과 다르다. 재가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가 있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상자가 된다. 이는 아나타삔디까 장자의 딸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이다. 딸은 장자에게 동생이라고 했다. 혼미한 상태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딸은 사다함과였고 장자는 수다원과였기 때문이다.

 

재가에서는 성자가 되면 상자(上者)가 된다. 그러나 출가에서는 성자가 되더라도 상자가 되지 않는다. 재가에서 범부들은 나이로 따진다. 그러나 재가성자가 되면 나이와 관계없이 상자가 된다. 그러나 출가에서는 성자의 지위와 관계없이 법랍으로 따진다. 그래서 법랍이 높은 수행승이 성자의 지위와 관계없이 상석에 앉는 것이다.

 

출가에서 성자의 지위보다 법랍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출가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기 쉬움을 말한다. 모두 성자일 때 무엇으로 상자의 기준을 삼아야 할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것은 누가 인가해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이다. 대부분 사향사과의 성자일 때 상자의 기준은 법랍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재가자는 출가자를 공경해야 하는가?

 

여기 재가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가 있다. 이럴 경우 이제 갓 출가한 사미는 재가의 성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 그런가? 이는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재가자가 제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출가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다. 재가의 성자라도 출가 사미를 공경해야 한다. 왜 그런가?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사미가 곧 성자의 흐름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하게 되면 재가자와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한철 안거에 들어 가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재가자들은 바쁘다. 늘 생업에 쫓겨 살기 때문에 집중수행 할 수 있는 시간을 내기 힘들다. 일주일 또는 열흘 집중수행하려면 휴가를 내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생 수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출가를 하면 마음껏 수행할 수 있다. 사미라도 한철 수행하고 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이라 하여, 수행승을 백조로 비유하고 재가자를 공작새로 비유했다.

 

어리다고 깔보아서는 안돼!

 

부처님은 외도들의 스승과 비교하면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의 교단이 커져 가자 뿌라나 깟싸빠, 막칼리 고쌀라, 니간타 나타뿟따, 싼자야 벨라뿟따, 빠꾸다 깟짜야나, 아지따 께싸깜발린과 같은 외도스승들의 제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했다.

 

외도들은 하물며 존자 고따마께서는 나이도 젋고 출가한지도 얼마 안되었지 않습니까?”(S3.1)라며 빠세나디 왕에게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어리거나 작다고 깔보거나 어리거나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될 네 가지가 있습니다.”(S3.1)라고 말했다. 네 가지는 왕족, , , 수행승을 말한다. 이 중에서 수행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으로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알지 못하리.

자손이 없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들은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네.”(S3.1)

 

 

어린 왕자는 왕이 되었을 때 무서운 권력자가 된다. 새끼 뱀은 컸을 때 독을 품은 독사가 된다. 불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해도 큰 불이 될 수 있다. 사미승은 나이가 어려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 아라한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무시해서도 안되고 업신여서도 안된다.

 

부처님이 최상자인 이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누구나 먼저 깨달으면 상자가 된다. 마치 병아리가 부화할 때 먼저 낳은 알이 먼저 부화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베란자의 경에서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 명지로 설명했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숙명통에 대해서는 나에게 한 밤의 초야에 첫 번째 밝음을 얻자 무명이 부서지고 명지가 생겨나고 어둠이 부서지고 광명이 생겨났습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나의 첫 번째 깨고 나옵니다.”(A8.11)라고 했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차례로 천안통과 누진통에 대해서도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들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최상자인 것은 과거 모든 부처님도 동일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과거 부처님들의 탄생에 대하여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라고 선언한 것을 말씀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상자라고 했다. 이는 ‘가장 뛰어난 자(aggo), ‘가장 훌륭한 자(seṭṭho), ‘가장 선구적인 자(jeṭṭho)’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최상자를 뜻하는 아눗따라(無上士)에 대하여 세 가지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첫째는 상윳따니까야 존중의 경’(S6.2)이고, 둘째는 앙굿따라니까야 최상의 청정한 믿음의 경’(A4.34)이고, 셋째는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이다.

 

, , 혜 삼학과 해탈, 해탈지견에 있어서

 

첫째, 부처님은 부처님이 최상자인 것에 대하여 계, , 혜 삼학과 해탈, 해탈지견에 있어서 견줄 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이 중에서 계행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S6.2)

 

 

상윳따니까야 존중의 경에 실려 있는 계행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계행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견줄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까지 미친다. 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견줄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이는 육사외도 스승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계행뿐만아니라 삼매, 지혜, 해탈, 해탈지견에 있어도 견줄 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견줄 만한 자가 없다는 말은 빠알리삼장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라따나경을 보면 삼매와 관련하여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는 깨달은 님들 가운데 뛰어난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이니, 그 삼매와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Stn.226)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계, , , 해탈, 해탈지견에서 견줄 만한 자가 없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최상자로 존중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나는 내 스스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이 어떨까?”(S6.2)라고 생각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과거의 부처님들도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의지했음을 말한다.

 

위없이 높으신 부처님도 의지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깨달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진리를 말한다. 과거 부처님도 그랬고 현재의 부처님도 그랬다. 이런 진리는 오늘날 문자화 되어서 전승되어 왔다.

 

믿음에 있어서 견줄 만한 자가

 

둘째, 부처님은 자신이 위없이 높은 분인 것에 대하여 믿음에 있어서 견줄 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이를 최상의 청정한 믿음이라고 했다.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발이 없거나, 두 발을 지녔거나, 네 발을 지녔거나, 많은 발을 지녔거나, 형상을 지녔거나, 형상을 지니지 않았거나, 지각이 있거나, 지각이 없거나,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건 그들 가운데 이른바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 그들 가운데 최상이다.”(A4.34)

 

 

앙굿따라니까야 최상의 청정한 믿음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경을 보면 온갖 종류의 존재가 등장한다. 여기서 두 발을 지닌 것은 인간을 말한다. 네 발은 개나 소, 돼지와 같은 축생이다. 많은 발을 지녔다면 지네와 같은 곤충을 말한다. 그런데 형상이 없는 중생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무색계의 존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은 삼계와 육도의 모든 존재 가운데 최상이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지혜로 최상의 진리를 깨달았는데 이에 대하여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라고 했다.

 

앙굿따라니까야 최상의 청정한 믿음의 경에 따르면 네 가지 믿음이 있다. 첫째로, 부처님은 존재중의 최상으로서, 최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로, 유위법으로는 팔정도가 유위법 중에서 최상이라는 믿음이다. 셋째로, 무위법으로는 사라짐이 무위법 중에는 취상이라는 믿음이다. 넷째로, 무리로는 부처님 제자들의 모임인 상가가 최상이라는 믿음임을 말한다.

 

스승이 없이 깨달은 분이어서

 

셋째, 부처님은 자신이 가장 높은 분인 것에 대하여 나의 스승은 없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스승 없이 깨달은 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것이 없네.”(M26)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유행자 우빠까가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무엇을 위해서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라고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이다.

 

부처님은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라고 했다. 그리고 일체를 아는 자라고 했다. 이는 스승없이 이룬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다.”라고 했다. 더구나 인간과 천상에서 견줄 만한 자가 없다고 했다. 바로 이런 점이 부처님을 최상자, 위없이 높은 분(Anuttara)으로 보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서 장로가 아니라

 

부처님은 이세상뿐만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이다. 부처님을 능가하는 사람은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는 없다. 그래서 위없이 높은 분이라고 하여 아눗따라(無上士)라고 한다.

 

불교인들이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찬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많은 예경과 찬탄이 있다. 인간과 신들 가운데에서도 최상자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장로 바라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더구나 젊은 수행자가 어른을 몰라보는 듯한 무례를 범했을 때 불쾌하고 불편해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병아리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부처님은 나이 많은 바라문들에 대한 태도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 제자 중에 깟짜야나가 있었다. 깟짜야나 역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이든 바라문으로부터 무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깟짜야나는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그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장로의 지위와 청년의 지위에 대하여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바라문이여, 태어난 이래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 바라문이여,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부릅니다. (A2.37)

 

 

깟짜야나는 어리석은 장로와 지혜로운 수행자에 대해서 말했다. 나이가 백살이 되어도 감각적 욕망에서 머물러 있다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새내기 수행승 보다 못하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서 장로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장로임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자가 어른

 

나이만 들었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화를 낸다면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나이는 적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감각적 욕망을 극복했다면 그가 바로 어른인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부처님만한 어른이 없다. 이세상과 저세상 그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 만한 어른이 없다. 부처님과 견줄 만한 자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에 대해서 불교인들은 아눗따라(無上士)라고 한다.

 

 

2021-03-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