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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원문[불교신문]
밑줄,강조는 내가
- 김성철 교수
- 승인 2011.08.2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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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불전은 <반야심경>, <금강경>, <아함경>, <법화경>, <화엄경> 등이지만, 이는 대장경 전체와 비교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는 우리의 ‘감성’보다 ‘인지’를 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불전들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불자들의 경우 ‘깨달음’을 ‘지적인 각성’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도불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깨달음의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 뭇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다. 12세 어린 나이에 농경제에 참석하여 쟁기에 패인 흙더미 사이에서 꿈틀대는 벌레와 그 벌레를 물고 날아가는 작은 새와 그 새를 잡아채는 큰 새의 모습을 보고 비감에 젖었던 싯다르타 태자의 마음이나, 35세에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신 후 중생 제도를 위해 발걸음을 옮기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 모두 자비심 그 자체였다.
불교의 핵심은 ‘비폭력’에 있다. 계율에서도 물리적 폭력을 멀리하지만, 불교수행자들이 가부좌 틀고서 통찰하는 ‘탈(脫)이분법의 중도(中道)불성’ 역시 ‘이분법적인 이성(理性)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비심과 비폭력은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설일체유부의 율장 가운데 ‘살바다비니비바사(薩婆多毘尼毘婆沙)’를 보면, 수행 도중에 천안(天眼)의 신통력이 생긴 사리불이 허공 가득한 벌레를 보고서 식음을 전폐했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천안으로 보니까 ‘물가의 모래알’이나 ‘그릇에 가득한 좁쌀알’과 같이 허공이든 음식이든 주변에 벌레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불전에서는 이런 벌레를 ‘호충(戶蟲)’이라고 부른다. ‘방(戶, Cell)처럼 생긴 벌레(蟲)’로 현대의 지식으로 풀면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의 세균에 해당할 것이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승가의 율은 물론이고 재가불자의 오계 중에도 첫 번째로 삼을 정도로 중요한 윤리지침이다.
그 날 이후 사리불은 물이든, 음식이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 목숨을 버릴지라도 남의 목숨을 해치지 않겠다”는 철저한 비폭력의 실천이었다. 그리곤 2, 3일이 지났는데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식사를 하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무릇 여수낭(濾水囊)에 걸리는 크기의 벌레가 든 물을 마시지 말라는 것일 뿐이지 천안에 보이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여수낭은 살생을 예방하기 위해서 벌레를 걸러내는 여과 주머니다.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根本說一切有部百一磨)’에도 같은 맥락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천안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셨다고 한다.
만일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 절체절명의 조항이라면, 천안을 얻은 사리불이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음식도 먹지 말고 굶어 죽어야 할 것이다. 숨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음식이든, 공기든 도처에 ‘박테리아’와 같은 생명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일상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극한의 사안’에 대해 불교윤리적 지침을 마련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란 ‘주관적 인식이나 동기’를 의미한다.
<화엄경>에서 가르치듯이 산(主山神)이든 바다(主海神)든, 해(日光菩薩)든 달(月光菩薩)이든 모든 것이 생명이며 이는 인식의 궁극에서 만나는 무차별의 통찰이다. 그러나 율장에서 보듯이 불교의 생명윤리는 그런 무차별의 통찰이 아니라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분별’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런 분별의 선은 유동적이며,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에 의해 그어진다.
[불교신문 2746호/ 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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