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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극락

우공(友空) 2014. 8. 12. 11:26

 

다음까페 "초기불전연구원" 검색결과

 

Re:아미타경을 읽다가 여쭙니다|묻고 답하고 모음
초불 | 조회 943 |추천 0 |2008.01.11. 14:54 http://cafe.daum.net/chobul/1ApY/1748 
질문 감사합니다.

몇몇 법우님들이 좋은 댓글을 달아주셨고 저도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별달리 해야할 말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질문을 하셨고 하니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관점을 간단하게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분명히 초기경에는 극락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상세계에는 괴로움 혹은 고통이 거의 없는 곳이고 특히 삼매 수행을 통해서 태어나게 되는 색계천상과 무색계천상에는 고통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상도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수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 수명이 다하면 다른 곳에 태어나야합니다.

색계 천상 가운데 절정은 정거천입니다. 정거천은 불환과를 얻은 성자들만 태어날 수 있는 아주 수승한 천상입니다. 불환과를 얻은 성자들은 여기에 태어나서 머물다가 아라한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정거천은 수승하고 행복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삼계에 속하는 한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불환과라는 수승한 경지를 얻은 성자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그것은 무상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극락도 삼계에 속하는 한 그것도 무상한 곳입니다. 물론 극락이 삼계에 속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만일 극락이 삼계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극락이 타방정토로 언급된다면 그것은 삼계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고 유심정토에 속하는 것이라면 열반과 동의어가 되겠지요. ...

물론 삼계에 속하든 안속하든 일단 극락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극락에 있는 동안은 분명히 행복만이 가득하겠지요. “극락에 머무는 동안은” 분명 행복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상락아정입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상락아정이 없다는 것이 불교의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둘째, 초기경과 후기경을 섞어서 이해하는 것은 지양해야합니다. 대승경을 초기경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좋은 태도이겠지만 둘이 조화되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는 버려야합니다. 특히 여래장계열의 가르침과는 그런 면이 많습니다.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법우님께 달린 것이겠지요. 형성된 것은 모두 상락아정이 아닙니다.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부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특히 초기불교의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이 상식을 무시하고 자꾸 다른 것과 섞어서 이해하려는 것은 불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확신이 있으면 단호하게 버려야합니다. 버리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버리면 자유로와집니다.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된 수행 한번 못해보고 혼란스럽게 횡설수설하면서 귀중한 삶을 다 보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열반은 무상고무아부정의 영역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열반은 상락아정이라는 우리의 산냐로 사량복탁할 대상도 아닙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형성된 유위적 삶에서 벗어나 이런 열반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로 실현해야하는 것이지 무상한 우리의 사량복탁으로 계교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셋째, 물론 불교는 행복으로 가득한 선처 특히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도덕적인 삶(지계)과 봉사하는 삶(보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상세계든 극락세계든 혹은 선처든 그곳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물론 색계와 무색계천상은 보시와 지계만으로는 안됩니다. 삼매를 닦아야합니다. 색계삼매를 닦아 본삼매를 성취하면 그 힘으로 색계천상에 태어날 수 있고 무색계 삼매를 닦으면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천상들은 그 수명이 엄청나게 길고 그곳에서 죽으면 선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아주 크지만 무상한 곳입니다. 무상이지만 고통이 많은 우리의 측면에서보자면 엄청난 수명과 엄청난 행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러한 천상이나 극락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보시와 지계와 삼매를 닦으면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십시오. 극락세계에 나고자하면 그렇게 발원하고 지극한 신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실천을 하면 됩니다. 극락이 삼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무상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보자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에 해당하고 또 지극한 행복뿐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나고자한다면 그렇게 발원하고 지계와 보시와 삼매를 닦으면 될 것입니다. 말로만 염원으로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해탈열반이라면 모든 것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도록 해야합니다. 자꾸 사량복탁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초기불전연구원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극락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함을 법우님이 잘 알고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논의를 하다보면 자칫 소설을 쓰게 되고 본의 아닌 비판도 하게 되니 저도 내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정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자신의 신념으로 가지신다면 상락아정은 버리십시오. 극락과 상락아정이라는 외도의 가르침을 연결짓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일 극락에 의미부여를 하신다면 그것을 확신하고 그곳에 태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십시오. 문제는 간단명료합니다. 모든 것은 법우님이 어떻게 분명하고 명쾌하게 자신의 태도를 정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초기불교든 극락이든 아니다 싶은 것은 버리십시오. 버리면 자유로와집니다. 버리기 싫으면? 짊어지고 가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것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간곡한 말씀입니다.

적다보니 현문우답이 아닌가합니다. 잘 섭수해주십시오.

각묵 합장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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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미타경을 읽다가 여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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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 08.01.11. 17:59
스님 답변 감사합니다. _()_ 일상에서도 뭔가를 잘 버리지 못하는 저의 습이 불자로서 법을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 듯하여 저의 우매함을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로 실현해야하는 것이지 무상한 우리의 사량복탁으로 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특히 와닿습니다. 사량복탁으로 계교하는 저의 업을 소멸하는 것은 탐진치 소멸로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의 일치로 스님께서 최근에 불교신문에 쓰신 글 '불자라고 떳떳하게 말하라'와 '아니면 버려야 하지 않는가'를 읽고 감명 받아서 제가 다니는 절의 카페에도 올려놓고 여러 법우님에게 알렸는데, 거기서 답을 주셨다 생각되는군요
 
 
상정 08.01.11. 18:00
우문에 현답을 주심에 감사하고, '아니다 싶은 것을 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을 저의 어깨를 내려치시는 죽비소리로 삼고 정진하겠습니다.
 
 
소요유 08.01.11. 18:37
합장하옵고.()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새삼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평행선이 부각되어 옵니다.^^ 이것이 선택의 문제로만 해결된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기도 하구요. 삼계를 떠나 부처님이 없는데, 스님 말씀대로 서방 정토가 이미 방위가 있음에 어찌 삼계를 벗어나 있겠습니까? 다만 삼계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초기불교가 대승의 극락세계 등을 버리라고 한다면 대승이 초기불교와 다른 점이 다 없어지고 말겠지요.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도 와서 보라 와서 법대로 수행하면 반드시 열반을 보게 된다.하셨듯이
 
 
소요유 08.01.11. 18:46
대승의 가르침도 믿음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있으나 실로 그렇게 하여 그렇게 된다면 우매한 중생을 위한 상락아정의 과자는 그만두고라도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불법일 것입니다. 대승의 꽃이라는 선불교도 믿음을 통해 들어가니 대승은 믿음의 체계를 버릴 수가 없을 듯 싶습니다. 저는 이것을 초기불교와 다른 가풍이라 보고 싶습니다. 실로 그렇게 됨을 보이신 분들이 스승으로써 증명하시니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 우매한 중생들의 입증처가 될 듯합니다. 말로는 할 수 없지만 몸소 물을 마셔보면 알 듯이 그런 것이 대승에 많은 듯 싶습니다. 스님의 밝으신 초불의 안목은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데 새로운 활력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상정 08.01.11. 23:41
물맛을 갖고 달다느니 시원하다느니 미리 사량할 게 아니라 샘 있는 곳으로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갖고가던 표주박을 버리고 손으로 떠먹을지 끝내 지니고 가다 표주박으로 떠먹을지는 저의 그릇과 인연이겠지요. 두 경우 다 물맛은 여일할 것입니다 ()
 
 
초불 08.01.12. 14:41
소요유님 댓글 감사합니다. 소요유님은 대승을 말씀하나 대승안에도 전혀 천차만별의 다른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냥 대승이라는 하나의 말로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저희 까페를 통해서 수십번은 적은 듯한데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반야중관-유식은 법을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대동소이하지만 같은 선상에 있는 가르침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여래장계열은 법이 아니라 믿음을 중심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중심한 체계와는 입각처가 다릅니다. 저는 이점을 수십번 강조하였지만 대부분 귀기울이지 않고 그냥 대승대승하면서 대승은 같은 가르침인양 착각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초불 08.01.12. 14:45
물론 법을 중심한 체계에서도 믿음은 강조됩니다. 믿음없는 종교나 수행체계가 어디 존재하겠습니까? 법을 중심한 체계에서는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래장 계열에서는 일심이라든지 여래장이라든지 불성에 대한 믿음을 더 강조합니다. 이렇게 믿음도 벌써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이런 믿음은 여래장계열에서만 강조되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우리불교가 여래장계열을 중심하고 있다고 해서(한국은 그런데도 법을 중심한 금강경이 소의경진이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이런 믿음이 대승의 근본믿음체계라 보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일이라생각됩니다. 여래장을 믿는 것이 대승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초불 08.01.12. 14:48
각자의 믿음과 신념체계는 중요하고 존중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체계가 대승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는 말하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점을 강조할 뿐입니다. 대승에서도 일심, 불성, 여래장에 대한 믿음을 빼면 대승의 믿음도 결국은 불교보편의 믿음체계와 같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듭말씀드리지만 저는 소요유님의 믿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래장을 바탕한 그런 믿음이 대승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이점을 잘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소요유 08.01.12. 20:29
예 잘 알겠습니다. 스님의 바른 말씀에 합장 드립니다.() 언젠가 스님을 뵙고 긴 시간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불법을 제대로 전하시려는 스님같은 분이 계시기에 저희 같은 불자들이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찍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