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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여래장, 초기불교

우공(友空) 2014. 8. 12. 13:00

 

다음까페 초기불전연구원 검색결과

 

Re:대승기신론에서 보면|묻고 답하고 모음
초불 | 조회 752 |추천 0 |2007.06.11. 05:46 http://cafe.daum.net/chobul/1ApY/1507 
질문 감사합니다. 저의 소견을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저술된 논서가 아닌 것으로 강하게 의심을 받는 중국불교에만 특유한 논서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승기신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논서이거나, 적어도 중국에 들어온 인도나 중앙아시아 역경사들의 가르침을 듣고 역경에 참여한 중국인 역경사들이 정리한 것으로 간주가 되는 논서입니다. 산스끄리뜨 원전이 발견되지 않은 논서입니다. 만일 인도에서 중시된 논서라면 반드시 산스끄리뜨 원전이 남아있거나 적어도 티벳 대장경에 나타나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주류 흐름인 초기불교-아비담마-반야중관-유식의 관점과는 다른 여래장 계열의 이론서입니다. 그러므로 기신론을 <대승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간주하는 법우님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기신론은 단지 대승불교의 하나의 가지인 여래장 계열의 이론을 체계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후대의 그것도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대승기신론의 관점으로, 그리고 그것도 불교의 주류에 들지 못하는 여래장 계열의 이론으로 불교의 주류에 있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의 가르침을 평가하는 것은 그 방법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모두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승 안에서도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 선종 등은 그 계통이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가르침이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온존하며 서로 많은 이론투쟁을 하여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공, 법공, 구공이라는 관점은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이론이지 절대로 초기불교의 이론은 아닙니다. 초기경들에 공(sun$n$a, s#uunya)이라는 술어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공이니 법공이니 구공이니 하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을 가지고 초기불교를 평가하는 것은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에 너는 나쁜 놈”이라는 어거지 주장과 꼭 같은 오류에 빠져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중론에서 말하듯이 공을 무아와 동의어로 간주한다면 아공과 법공은 각각 아무아(인무아)와 법무아로 대치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실제로 인무아와 법무아라는 술어도 대승논서들에는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것(아, 인)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개념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초기경과 아비담마에서 제법무아는 항상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공히 인무아와 법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도 아공법공을 설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승에서 말하기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아공법유를 말하기 때문에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스스로 너는 나쁜 놈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나서 너는 나쁜 놈이라고 고함치는 우스운 논리와 같습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어디에도 법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법유를 설한다는 것은 상대를 폄하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어거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 아래의 답글들에서 많이 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법유나 아공법유 등으로 검색을 해보시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공부하시려면 부디 초기경들과 아비담마 논서들을 먼저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시라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소승이라고 폄하하기 위해서 후대에 억지로 만들어진 아공법공이니 아공법유니 하는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이론으로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를 평가하지 마시라고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자신이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한 뒤에 후대의 대승논서들이 아공법유니 법체항유니 하면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폄하하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아닌가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객관세계조차 일심임을 깨달아야> 운운하신 것은 전적으로 여래장 계열에서만 그것도 중국의 논서들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임을 아셔야합니다. 초기경의 어디에도 객관세계가 일심의 소현이라거나 일체유심조라거나 하는 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식에서는 대상을 식전변에 의한 사현으로 설명하고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식전변을 찰나생/찰나멸로 설명합니다. 그런 것이지 유식은 일심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초기경과 불교의 주류의 흐름에 없는 이런 부정확한 언어표현은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을 외도의 가르침으로 만들고 마는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모든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합니다. 일심이니 일체유심조니 하는 표현은 연기/무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언어표현입니다. 만일 이런 경지를 가지고 깨달음이라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대승논자들은 말합니다. 일심이야말로 연기고 무아라고. 이야말로 참으로 우습고 유치한 표현입니다. 연기와 무아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일심이란 언표는 마음을 실체화하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이 둘이 같을 수 있습니까?

초기경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간주하고 유위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설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연기적 존재요 무상한 존재며 그래서 실체가 없으며 그래서 무아입니다. 그러나 일심이라는 표현은 마음을 절대화하는 표현입니다. 만일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은 즉시에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불교에서 마음은 절대화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이 절대화되면 그것은 외도들이 설하는 마음이 되고 자아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고요 실체가 없으며 조건발생(연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불교의 마음이 아닙니다. 대승의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으로 표현되는 제8식도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며 실체가 없으며 무자성이며 조건발생이며 대상을 가지는 것이며 무아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뢰야식은 절대로 일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독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일심이니 하면서 마음을 절대화하는 듯한 애매한 언어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래장 혹은 불성은 연기요 무아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지 않으면 여래장이나 불성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 외도의 자아(아뜨만)와 같아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 不空여래장을 말합니다만 그들이 불공여래장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空을 연기와 무아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공을 허무나 단멸로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을 허무로 이해했기에 다시 불공이라는 술어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평천장 교수의 말처럼 진정으로 공이라면 불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래장 계열의 경론들은 잘 못 이해하면 완전히 외도의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여래장 계열을 경론을 좋아하는 분들은 반드시 명심하고 조심해야할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적고 싶은 말은 ... 깨달음의 경지도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표현되어야한다는 점입니다. 비불교적인 언표를 사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라느니 최상승이라느니 하는 것은 단지 감언이설일 뿐입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깨달아봐야 스스로 안다느니 하는 것도 깨달음을 호도하는 무지몽매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창시자며 불자들의 스승이고 사표인 분입니다. 그분 부처님께서는 결코 애매한 언표나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어떤 언어표현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 오온/12처/18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12연기를 순관/역관하는 것 등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대승기신론과 같은 후대의 논서를 절대시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불교를 잘못이해하거나 폄하하거나 깨달음을 절대화 하는 듯한 태도는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의지해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자 하시면 그대로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신론을 가지고 초기불교나 아비담마를 평가하거나 섣불리 우열을 비교하려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라고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초기불교나 아비담마를 평가하고 싶으시면 부디 먼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공부하시고 난 뒤에 평등한 입장에서 평가하실 것을 권합니다. 아니면 오히려 불교만대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과연 대승기신론은 부처님 원음을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는 논서인가를 먼저 평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라고 여겨지므로 이렇게 평가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기신론을 읽고 음미하는 것이상으로 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두서없이 답글을 마무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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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대승기신론에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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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준 07.06.11. 23:37
스님의 견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교에서 논이란 보살마하살로 불리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라한을 넘어선 경지에서 풀이하는것으로 경에 대해서 자세히 안내해주는 길잡이라고 알고있습니다. 기신론을 쓰신 마명보살도 또한 그와같은 분이라 알고 있고, 우리나라에선 신라의 원효 스님이 기신론에 대한 길잡이로 기신론소를 쓰셔서 오랫동안 후학들의 길잡이로서 긴요한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깊이 가슴에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만약 기신론의 가르침이 스님 말씀처럼 부처님의 원뜻과는 다르며, 불교를 왜곡시킨것이라면
 
 
크리스토퍼 준 07.06.11. 23:39
기신론을 강조하셔서 론소까지 덧붙혀 남기신 원효스님의 가르침이란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아함이 생기는군요 물론 수행도 경에 대한 지식도 미천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불교 역사에서도 수많은 종파가 발생하여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여 끊임없는 대립이 있는 가운데,원효스님은 그 모든 대립이란 궁극적으로 화쟁으로서 귀결된다고 하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범부의 견해로서 불교에 대한 저마다의 대립이 있을지언정 참된 깨달음의 경지에선 백가의 가르침이 모두 한가지로 만난다는 것이라 할 때 어느편이 옳고 어느편이 그르다는 편가르기보다는
 
 
크리스토퍼 준 07.06.11. 23:31
보다 깊고 넓은 경과 론에 대한 공부와 궁극적으로는 수행으로서 그 실증을 밝혀야 하는 것으로삼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외람되나 저의 견해도 이와같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무상고무아 07.06.12. 07:31
크리스토퍼 준님의 '아라한을 넘어선 경지' 라는 표현을 접하니 '아라한'이 무엇이고 '아라한을 넘어선'의 의미가 궁금해 집니다.
 
 
무상고무아 07.06.12. 07:48
자식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가지고 서로 옳다고 싸우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보다 깊고 넓은 경과 론에 대한 공부와 궁극적으로는 수행으로서'-> '부처님의 직설인 초기경의 이해를 기반으로' 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크리스토퍼 준 07.06.12. 09:47
제가 아는 바의 경에 관한 지식으로는 아라한이란 흔히 무학이라는 다른 칭호로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소승 사과의 마지막 경지로서 더이상 배울것이 없다하여 무학이라는 표현을 붙였다합니다
 
 
크리스토퍼 준 07.06.12. 10:10
소승 사과의 과정에서, 번뇌장을 끊고, 소지장을 끊어 아공,법공을 요달하였으나 다시 육바라밀에 더하여 사바라밀을 행하여 대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보살 십지의 과정을 지나 구경에는 아뢰야식상의 미세한 번뇌를 끊어 구경원만각인 대각을 마쳐야 부처님의 경지에 계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지로 아라한,보살(마하살),부처님의 깨달음의 깊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오래동안 우리나라 불교전통에서 배워온 대승경전들 (화엄,법화,능엄등)에서는 이와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확인 할 수 있습니다.그와같은 가르침속에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나온 전통을, 배워가는 초심들의 입장에서 어찌 위경이다하며 부정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준 07.06.12. 10:08
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그와같은 권위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어찌 안생길 수 있겠습니까마는, 궁극적으로 배우는 초심들은 늘 외적인 잘못에 휘말리기보다는 자신의 채찍을 놓지말고 수행에 임하는것이 보다 현명하게 배우는 자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운자라 할지라도,, 수행의 분상에선 결국 초심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설촌 07.06.12. 10:10
그리스토퍼 준님.. 대승경전이 부처님 직설이 아니라는 것은 1967년 성철스님 백일법문에도 나옵니다. 삼법인을 담고 있으면 부처님 본뜻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직설은 아닌 것입니다. _()_
 
 
크리스토퍼 준 07.06.12. 10:34
부처님의 직설이다,아니다를 떠나 궁극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생로병사의 벗어남이라면..그것은실로 문자에서 찾아야 할것이 아니라 하겠지요 물론 그와같은 선의 전통에서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지금과 같은시비가 끊이지 않는 점도 있겠으나 그와같은 선의 전통이란 늘 이어져야할 절대적 요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않다면 육조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육조단경이나, 그밖의 많은 논서들..
 
 
크리스토퍼 준 07.06.12. 10:31
이 부처님의 직설이 아닌것인데... 그와같은 법문에 의지해서 수많은 발심자들이 배워왔고,몸소 그 이치를 증명하였던것은 그 법문이 또한 부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가능하였던것이 아닐까 합니다. 문자의 적확한 탁마도 중요하겠으나 또한 문자를 통해서도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 없을 수 없겠으나 수행의 문에서궁극적으로 문자란 뗏목과 같은것이라고 하는것이 저의 개인적인 견해라 하겠습니까? 합장.
 
 
신시다물 07.06.12. 13:26
_()_ 몸도 마음도 평안 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크리스토퍼 준"님! 님게서는 부처님의 직설이다 아니다를 떠나 이야기를 하실것이면 왜 후대 만들어진 대승경전을 기준으로 부처님의 직설인 초기경을 재단하려 하시는지요??? 부처님 직설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말씀 하시려면 님께서 먼저 자신의 후대에 만들어진 대승 경전에 대한 아집부터 내려 놓으시고 불교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하시지요. _()_
 
 
신시다물 07.06.12. 13:29
_()_ 부처님께서 단 한번도 말씀 하신적이 없는 아라한 위의 보살, 보살위의 부처라는 깨달음 단계의 등식을 스스로 고착화 시켜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말씀하시면서 "부처님 직설이고 아니고를 떠난" 이야기를 논하시면 님의 말씀 자체가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_()_
 
 
신시다물 07.06.12. 13:35
_()_ "크리스토퍼 준"님! 확실하고 분명한것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단계를 아라한 다음에 보살, 그리고 보살 다음에 부처라고 말씀 하신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에 자칭 대승이라고 한 북방불교가 전개 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런 것들을 절대 기준으로 님 스스로 고착화 시켜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부처님 말씀을 대하게되면 당연히 부처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_()_
 
 
신시다물 07.06.12. 13:41
_()_ 시조 어른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후대에 어떤 증손자가 그유언 내용을 스스로 뜯어고쳐서 따로 자신의 후손에게 전했더니 그것을 보고 배운 후손이 시조 할아버지의 유언장 원문을 보고는 "내가 본 유언장에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이 유언장은 그것과 틀리니 이 유언장은 잘못된 유언장입니다"라고 하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_()_
 
 
무상고무아 07.06.12. 13:42
그리스토퍼 준님의 대승경전(화엄,법화,능엄경)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아셔야 그 경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선에 드실 것 같군요.
 
 
신시다물 07.06.12. 13:46
_()_ "크리스토퍼 준"님! 부디 님께서 보았고, 알고있는 내용들을 주장하시기 전에 먼저 부처님의 직설인 초기경을 먼저 공부하시고, 또 그것을 주석한 "아비담마 길라잡이"와 "청정도론"을 그것도 빠알리 경전을 직접 번역한 것으로 공부하시고 나서 지금까지 님께서 배운 북방불교의 경책내용과 초기불교의 경책내용을 비교 분석하셔서 님 스스로 지금 님께서 제기하시는 문제를 재단해 보심이 타당할듯 합니다. _()_
 
 
신시다물 07.06.12. 13:56
_()_ 지금 여기서 북방불교를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단지 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있는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다른지를 지적하시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좋게 보아서 후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한 일이라 하더라도 잘못된것은 여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부디 부처님의 맑고 밝은 법을 바르고 깊게 공부 하셔서 몸도 마음도 평안해 지시기를... 행복해 지시기를.... _()_
 
 
소요유 07.06.12. 14:11
크리스토퍼 준님의 견해는 대승불교의 전형적인 견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전개된 역사를 보면 초기, 중관, 유식, 여래장 이렇게 전개되는데, 기신론은 여래장계열의 론서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초기불교의 삼장은 제가 알고 있기로도 역사적 전승으로 볼 때 불멸후 2,3백년 후인 BC3세기, 부파불교로 갈라지기전 상좌부불교에서 세일론에 전한 것을 BC1세기에 팔리어로 서사하여 결집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직설에 가장 가까운 경론인 것입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지극히 완비된 이 三藏을 배우지 않는 것은 대승불교의 뿌리를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꼭 보시기를...()
 
 
신시다물 07.06.12. 14:18
_()_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첨언 한다면 여기 각묵스님도 그러하시고, 여기 초불 카페의 회원 대다수도 북방불교인 우리나라 불교에 입문하고 공부하던 사람들입니다... 참고하시기를.... ^_^&
 
 
slashmoon 07.06.15. 12:25
처음에 대승기신론,유식30송 등을 읽고 원효대사나 다른 대승논사들의 큰 이름을 접했을때 항상 존경심이 일었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인줄 알았습니다.그러나 항상 마음 한구석이 찜찜함을 느꼈습니다.용어나 한문 구절 특유의 모호함이 명료한 이해를 가로막았습니다.우연히 접한 것이 아비담마와 니까야 경전들이었는데,불교의 지파중 이렇듯 담백 명료 합리적인 가르침이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역사학 사료학 고고학으로 따지고 회의주의 비판론을 적용하면 부처님 직설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하지만 직접 경전과 논을 접하다보면 납득하게 되실 겁니다.대승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려면 단경이나 대승기신론 외에도 티벳불교경론을 읽어보
 
 
slashmoon 07.06.15. 12:32
시는 것도 도움이 되실겁니다.(람림, 수습차제 등) 초기경전군과 아비담마, 위빠사나 수행은 불제자의 기본이고 생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부처님의 복된 말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시리라 장담합니다. 대승기신론은 대승이라는 큰 바다의 작은 한부분이고, 또한 그 대승을 90프로 이해하려면 니까야와 상좌부 아비담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크리스토퍼 준 07.06.16. 13:05
소승은 낮고,대승이 높다,또는 대승은 위경이 많으며, 초기불전만이 부처님 직설이다라는 주장들은 진정으로 갈 길을 찾는 수행본분자의 입장에선 굳이 시비할 거리가 아닐거라생각합니다. 보다 겸허한 초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널리 깊이 삼장을 배우고 익혀서 시비로 세월이 가는 것을 조심하고자 합니다
 
 
향운 07.06.23. 19:27
토론 자체에도 배울 것이 많네요. 진지한 견해 피력을 읽으며 제가 느낀 점은 - 상형문자인 한자로는 도저히 부처님 말씀 ,세밀 하고 핵심을 가르쳐주는 , 언어 만의 고유한 기능 ,그대로를 도저히 전달 할 수 없었다 - 는 것 입니다./ 지금이라도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들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