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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스님과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불자들은 스님을 보면 예경한다. 신심 깊은 불자라면 스님에게 삼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길거리에서 스님을 마주치면 합장으로서 ‘반배’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리에서 스님을 마주쳤을 때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불자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정서적 불자이었으나 정식으로 불자가 된 것이다. 교양대학에서 법사스님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스님에 대한 예우이다. 지나가는 길에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과 마주치거든 반드시 합장하고 반배의 예를 올리라고 하였다. 그런 교육의 영향이어서일까 거리에서 스님을 마주치면 반배를 하였다. 그러면 상대스님도 반갑게 반배로 응대하였다.
반배의 예를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것은 출가자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스님에게 반배의 예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출가자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다. 설령 그 스님의 계행이 엉망이라도 일단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불자의 기본적 예절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법사스님의 가르침대로 한때 지나가는 스님에게 반배의 예를 올렸다.
스님들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단지 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 이상을 말한다. 목숨마저 버린다는 뜻도 있다. 그것은 현재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가 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삭발한다는 의미가 지금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삭발하고 승복입은 스님들은 이전의 자기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부모형제와 인연이 끊어지는 것으로 본다.
왜 공동체생활을 해야 하는가
스님들이 사는 공동체를 승가라 한다. 최소 네 명 이상으로 구성된다. 네 명 이상의 승가공동체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이렇게 공동체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익’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라는 출가의 목적을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승가공동체는 스승과 수행처와 도반이라는 세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여 살아야 ‘향상(向上)’을 이룰 수 있다. 만일 나홀로 산다면 큰 향상을 이룰 수 없다. 요즘 TV에서 보는 ‘자연인’과 같은 삶이다. 자연인들은 산에서 홀로 산다. 그러다 보니 생존에 급급한 것 같다.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아 이 산 저 산 헤매는 것 같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을 하면 역할이 분담 되어 먹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더구나 탁발에 의존하면 오로지 자신의 향상을 위하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더구나 모여 살면 스승의 지도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반들로 부터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모여 사는 것이 독살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향상이 빠르다. 그래서 스님들은 모여서 공동체생활을 해야 한다.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Munisutta, Sn1.12)’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면 향상이 빠르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해탈과 열반이라는 출가의 목적도 신속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가자의 삶과 비교하여 월등하게 유리한 점이다. 재가자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 많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다. 그럼에도 재가자에게도 깨달은 자 즉,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가의 성자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할까? 특히 재가의 성자와 이제 갓 입문한 새내기스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이제 갓 입문한 사미는 재가의 성자에게 예경해야 할까? 재가의 성자는 예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Sn1.12)’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ikhī yathā nīlagīvo vihaṅgamo
Haṃsassa nopeti javaṃ kudācanaṃ,
Evaṃ gihī nānukaroti bhikkhuno
Munino vicittassa vanamhi jhāyatoti.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전재성님역)
공작새와 백조, 재가자와 수행승을 비교하고 있다. 즉 공작새(Sikhī)는 재가자 (gihī)를 비유한 것이고, 백조(haṃsa)는 수행승(bhikkhu)을 비유한 것이다.
공작과 백조, 그리고 재가자와 출가자
날개를 펼치면 마치 부채처럼 멋진 모습의 공작새는 컬러풀하여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나는 재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는 백조와 비교 되고 있다. 백조는 희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나는 것에 있어서 공작과 비교 되지 않는다.
게송에서는 공작을 재가자로 비유하였다. 여기서 재가자라는 말은 ‘gihī’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어 ‘gihī’는 ‘a layman; one who leads a domestic life’라 번역된다. 일반적 의미에서 재가자를 말한다. 대게 가정을 이루어 사는 속인을 뜻한다.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재가불자를 의미하는 upāsaka(청신사)와 upāsikā(청신녀)와는 다른 뉘앙스이다.
게송에 따르면 재가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수행승을 넘어 설 수 없다. 그래서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라 하였다. 여기서 수행승(bhikkhu)과 성자(muni)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출가하여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자는 성자와 동급으로 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출가하여 빅쿠가 되면 성자가 됨을 말한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리고 따라 잡을 수도 없다. 이를 공작과 백조로 비유하였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공작이 희고 고결해 보이는 백조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비록 지상에서 공작이 화려 해 보여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창공을 날게 되었을 때 백조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재가가자 제 아무리 재산이 많고 명예가 높고 권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번뇌가 소멸된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재가불자 즉,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 중에 성자가 출현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 갓 입문한 사미는 재가의 성자에게 예경하여야 할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Prj.II.276에 따르면, 세존께서 까삘라밧투에 계실 때에 싸끼야 족들 사이에 논쟁이 ‘먼저 진리의 흐름에 든 자는 나중에 든 자 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먼저 흐름에 든 자가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을 받아야 한다.’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탁발하던 어떤 수행승이 듣고 부처님에게 전했는데, 부처님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라도 재가에 있다면,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면서 재가자가 먼저 흐름에 들었더라도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할 것을 가르치고, 수행승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를 읊었다.
(1858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재가의 성자라도 출가한 자에게 예경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깨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재가에서 성자가 출현하면 출가자로 재가의 성자에게 예경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숭산스님이 설립한 무상사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승속의 구별이 없는 무상사
무상사에 다녔다는 법우님에 따르면 무상사에는 수 많은 외국인들이 안거철에 모여 든다고 한다. 세계각국에서 온 숭산스쿨의 재가수행자들이다. 그런데 무상사에서는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똑같이 수행하고 똑같이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출가자가 재가수행자중에서 나오기 때문에 승속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무상사에서는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모두 영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론하는 과정에서 경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체험한 것을 토론함으로서 정신적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가 출가자 보다 더 높은 정신적 능력이 높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럴 경우 출가자라도 재가자에게 예를 갖춘다고 하였다. 그 예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존중해 주는 의미로 알고 있다.
왕이라도 수행승에게 예경해야
주석에 따르면 출가자는 모두 예경의 대상이라 하였다. 설령 그가 이제 갓 입문한 사미일지라도 예경의 대상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재가의 불환자도 사미에게 예경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빌어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라도 재가에 있다면,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그 증거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의 성자들은 아라한이 아닌 한 출가 수행자에게 모두 예경해야 한다.
재가자가 아무리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있더라도 출가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런 논리라면 한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출가비구에게 예경을 해야 한다. 실제로 초기경전에서 그렇게 표현 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꼬살라국의 아자따삿뚜왕과 대화 하였다. 대화의 요지는 이렇다. 왕의 한 하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하인은 “아자따삿뚜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D2) 라 생각하였다. 그런 왕은 신과 같은 생활을 하는데 자신은 하인으로서 지시만 받고 사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인생역전’ 해보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출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인은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하였다. 열심히 정진하여 마침내 출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자가 된 것이다.
부처님이 아자따삿뚜에게 물어 보았다. 하인에서 성자로 인생역전을 이룩한 수행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면 폐하께서는 이와 같이 ‘여봐라, 그 일꾼인 하인을 내게로 데려오라. 다시 그 일꾼인 하인에 대하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고 무슨 일에도 순종하고 유쾌하게 일하고 사랑스럽게 말하고 짐의 안색을 살피게 하라.’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D2) 라고 왕에게 물었다. 이에 아자따삿뚜왕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자따삿뚜]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나 환영하고 자리를 권하고 의복, 음식, 처소, 필수약품을 마련해 초대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법에 따라서 그에 대한 보호와 안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D2)
한나라의 왕인 아자따삿뚜는 하인 출신의 수행승에게 예를 갖추겠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라도 수행승 위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왕이라도 수행승에게 예경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는 재가자에게 예경의 대상이다. 설령 재가자가 먼저 성자의 지위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이제 갓 입문한 사미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승려의 위치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왕도 수행자에게 예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말을 뒤집어 말하면 수행자는 왕에게 예경하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수행자가 왕의 신하처럼 명령이나 지시받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와 일반재가자와의 관계이다. 그러나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 되면서 크게 달라진 듯하다.
중국에서는 승려가 왕에 종속 되는 현상이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왕조가 바뀜에 따라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유교를 중시하였를 때 폐불행위가 만연하였다. 중국불교사에서 네 번에 걸친 폐불사건이 잘 말해 준다. 이처럼 통치이념이 바뀌고 왕권이 강화되었을 때 불교수행자는 더 이상 예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불교탄압이 있었을 때 스님들이 천민과 다름 없는 대우를 받은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에서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 stn221번 게송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상식으로 생각했던 것이 뒤집어 진 듯 하였기 때문이다. 재가자가 성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아직 범부 단계에 머물고 있는 출가자는 재가성자에게 예를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무너졌다. 경에서는 물론 주석에서도 “재가의 불환자라도 이제 갓 입문한 사미에게 예경해야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말이 타당할까?
사미라면 성자의 지위가 아니라 이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예경하라고 했다. 마치 지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아무 스님에게나 예경하라는 말과 같다. 설령 그가 재산가이고 권세가일지라도 계행이 엉망인 스님에게 조차 예를 갖추라는 말과 같다. 이처럼 재가불환자라도 사미에게 예경하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색해 보았다. 나까무라 하지메 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譬えば青頸(あおくび)の孔雀が、空を飛ぶときには、どうしても白鳥の速さに及ばないように、在家者は、世に遠ざかって林の中で瞑想する聖者・修行者に及ばない。」 (STN221, 나까무라 하지메역)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것이 법정스님의 숫따니빠따이다. 법정스님역을 보면 ‘stn221’에 대하여 “마치, 하늘을 날으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를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집에 있는 이는 세속을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성인이나 수행자에게 미치지 못한다.”라 하였다.
의문점이 풀렸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키워드로 검색하니 해당 게송에 대한 설명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この偈には次のような由来の話があります。シャカ族の人々の間で「最初に預流者になった人の方が、後から預流者になった人よりも、法の上ではより先輩だ。だから後から預流者になった出家者は、最初に預流者になった在家者に敬礼などをするべきだ。」という議論が始まりました。その話をある比丘が世尊に申し上げました。
それに対して世尊は「比丘達よ。たとえ在家者が不還者であっても、その人はその日に出家した沙弥(未成年の出家者)であっても、敬礼など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なぜならば、在家者はたとえ最初に預流者になっても、解脱の道を観察する智慧の速さは比丘にはついていけない。在家者は妻子などのしがらみに縛られているので智慧が遅いからである。ところが出家者はそのしがらみがないから智慧が鋭いのだ。」と述べ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青頸の孔雀と白鳥の譬えで述べられたこの美しい偈は、私が10年前にテーラワーダ仏教の比丘として出家をする切掛けの一つになった思い出であるものであります。それまでは、在家でも熱心に修行すれば悟れ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ました。確かにその通りでしょうが、速さが違うのだと思いました。またブッダは修行者に出家を進めておられるのだと思ったのです。
(飛ぶ時は 孔雀白鳥に 及ばない 在家修行は 出家に遅れる<221>, 2013-09-09)
일본어 사이트에서 가져 온 것이다. 소년소녀를 위한 숫따니빠따에 대한 이야기이이다. 글을 읽어 보니 의문점이 풀렸다.
글에서 “在家者はたとえ最初に預流者になっても、解脱の道を観察する智慧の速さは比丘にはついていけない”라 하였다. 재가자가 가장 먼저 예류자가 되어도 해탈도를 관찰하는 지혜의 속도는 비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동체생활을 하는 출가수행자가 훨씬 더 빨리 성자의 과위에 오를 수 있음을 말한다.
또 글에서 “在家者は妻子などのしがらみに縛られているので智慧が遅いからである”라 하였다. 재가자는 아내와 자식 등을 부양해야 하므로 속박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속박되는 삶으로 인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었어도 언제 수다원, 아나함, 아라한이 될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재가의 불환자라도 사미에게 예경해야 하는 이유
재가자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더디게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재가자가 하는 일을 접어 두고 수행처에서 몇 달 또는 몇 년 보낼 수 없다. 가르침을 접하여 흐름에 들었더라도 이후 단계는 수행의 단계이기 때문에 언제 향상이 이루어져 보다 높은 과위를 달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최대 일곱생 이내에는 가능하다고 하였다. 아무리 둔한 지라도 일단 흐름에 들면 일곱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출가수행자는 재가자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에 대해서 매여 있지 않은 출가자들은 수행처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 그래서 재가자 보다 빠르게 과위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막 입문한 새내기 사미라도 흐름에 들었다면 상위 과위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재가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다함과 아나함은 수행도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통해서 과위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에 묶여 있는 재가가자 수행에 전념할 수 없다. 그래서 재가자가 먼저 흐름에 들었을지라도 이제 갓 입문한 사미에게 공경의 예를 표해야 하는 이유라 본다. 그래서 재가자는 느리고 출가자는 빠르다고 하였다. 또 ‘출가자의 묶여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예리한 것이다.( 出家者はそのしがらみがないから智慧が鋭いのだ)’라고 하였다.
재가의 삶과 출가의 삶은 다르다
일본어로 된 설명문을 보고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재가의 삶과 출가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가는 처자식에게 묶여 있어서 지혜가 더디게 얻어지고, 반면 출가자는 묶여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빨리 성숙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 stn221의 바로 앞 게송에서 확인 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smā cubho dūravihāravuttino
Gihī dāraposī amamo ca subbato,
Parapāṇarodhāya gihī asaññato
Niccaṃ munī rakkhati pāṇino yato.
“재가자는 아내를 부양하고, 덕행자에게는 내 것이 없어,
둘은 처소와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
재가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지 어렵지만,
성자는 항상 섬기며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stn220, 전재성님역)
재가자의 특지은 아내와 자식을 부양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재산이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오계를 어기는 삶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재가자들에게서 성자가 출현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느 재가자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만 접하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수다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는
각산스님의 영상강의에 따르면 수다원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세 가지 즉, 유신견과 의심과 계금취를 타파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해’ 차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 가지 조건에서 의심이 있다. 이는 법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열반은 가능할까?”라든가, 업과 내생을 말씀 하였는데 “정말 윤회는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법에 대한 의심은 다름 아닌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그래서 업과 내세, 그리고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속된 말라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
견도(見道), 수행도(修行道), 무학도(無學道)
꼰단냐가 부처님의 최초 설법, 사성제를 이해하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 라 하여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이를 수다원 오도송이라고도 한다.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제 진리의 맛을 보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견도(見道)’라 한다. 견도 다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도(修行道)’이다. 견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수행이 시작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승과 수행처와 도반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재가의 삶에서는 힘들다는 것이다. 출가의 삶이 매우 유리하다.
수행도 다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학도(無學道)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를 말한다.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이 되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 라는 앎(知)과 봄(見)이 생겨나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무학도’라 한다.
재가의 삶에서 흐름에 든 경지에 이를 수는 있어도 그 이상 성취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출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먼저 흐름에 든 재가자라도 사미에게 예경을 올리라 하였을 것이다.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우리속담에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젊은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사미도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빠세나디왕과 대화에서 “대왕이여, 수행승은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S3.1) 라 하였다.
어리다고 무시해서 안되는 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수행승과 함께‘왕족’과 ‘뱀’과 ‘불’이다. 그래서 왕족이나 뱀, 불, 수행승은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비록 나이 어린 사미일지라도 수행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성자의 과위를 얻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어떤 뛰어난 재가자라도 그가 아라한이 아닌한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래서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라고 하였을 것이다.
스님과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불자들은 스님들에게 예경해야 한다. 그렇다고 삼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존경한다면 삼배가 아니리 ‘구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만일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면 인사할 필요가 없다.
출가자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아름다운 미덕이다. 길거리에서 삭발하고 승복입은 스님을 마주치면 그 자리에 서서 합장하며 반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 그러면 스님도 합장하며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장면은 매우 아름답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불교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가 있다.
거리에서 스님에게 예를 올리는 것은 출가 그 자체에 대한 예경이 크다고 본다. 지금 반배의 예를 받고 있는 스님이 어떤 스님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계행이 청정한지, 계행이 엉망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렸다는 출가정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비록 재산가이고 권력자일지라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일반사람들도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한다. 감각적 욕망을 포기할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버린 사람들이다. 일반사람들과 달리 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스님에게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불자로서 예의일 것이다.
다행히 계행이 청정한 스님이라면 복전이 될 것이다. 설령 계행이 엉망인 스님이라도 거리에서 반배의 예를 받으면 자신을 돌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스님을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맞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본다.
2015-10-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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