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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 - "마음"의 분석 및 사식

우공(友空) 2017. 1. 18. 10:56


http://blog.daum.net/bolee591/16157366


불선심, 선심, 과보심[업이숙심], 작용심[아라한의마음]

세간의마음 81가지, 출세간의마음 8가지

불선심-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개, 성냄 2개, 어리석음 2개


사견과 결합한=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평온이 함께 한=맹하고 지둔한[사선정에서의 평온이 아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7480

사식 -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재생연결식]






 

 

평범한 일상이 왜 불선(不善)일까? 아비담마 마음도표와 불선한 마음 8가지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마음, 마음한다. 유행가 가사에서 내마음 나도 모르게~”라는 구절도 있다. 변심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가사도 볼 수 있다. 유행가에서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마음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유행가의 가사도 그렇고 선사들이 말하는 것도그렇다. 선사들은 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들라고 말한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막연한 것이 마음이다. 또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기뻐하다가 슬퍼한다. 아기들처럼 울었다가 금방 웃기도한다. 어제 말한 것과 오늘 말하는 것이 다르기도 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대체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일까?

 

마음의 구조를 알면 마음에 대해 어는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논장을 알아야 한다. 빠알리 삼장 중의 하나인 논장을 공부해야 마음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 수 있다. 아비담마가 대표적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아비달마구사론이라 한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정교하고, 수학의 공식을 보는 것 같다.

 

불선심(akusala), 선심(kusala), 과보심(vipaka), 작용심(kiriya)

 

예로부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이야기 했다. 인간에게 내재 되어 있는 근본마음이 본래부터 선하다든가 본래부터 악하다는 이론이다. 아비담마에서도 선설과 악설을 말한다.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 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크게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불선심(akusala), 선심(kusala), 과보심(vipaka), 작용심(kiriya)이다.

 

불선심 과 선심은 문자 그대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과 착하고 건전한 마음을 말한다. 잘 이해 가지 않는 것은 과보심과 작용심이다. 과보심은 업이숙심이라 하며 전생이 지은 업의 결과로서 내재 되어 있는 마음이다. 전생에 악업을 지었다면 악업이 과보의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 악업과 관련된 대상을 만나면 악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과보심에는 불선과보심과 선과보심이 있다. 작용심은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어떤 대상을 만나도 업이 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무기의 마음을 말한다.

 

마음이란?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왜 이렇게 마음이 자꾸 변하는 것일까? 그것은 대상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이 자꾸 바뀜에 따라 마음 역시 자꾸 바뀐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제1의 불교적 정의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 대상이란 무엇일까? , , , , , 법이다. 이를 육경이라 한다. , , , , , 의라는 육근이 육경과 접촉 하였을 때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 하여 육식이라 한다. 이렇게 매순간 육근이 육경과 접촉하여 육식이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아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중의 또 하나는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고, 그런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의 지도

 

마음의 구조와 마음의 작용을 알려고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탐진치에서 벗어나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한 마음인지 무엇이 불선한 마음인지 알아야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89가지이다. 여기서 수다원도 등 출세간의 마음 8가지를 빼면 모두 81가지 마음이다. 사람들은 이 81가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이 81가지 마음 때문이다.

 

89가지 마음에는 선한마음도 있고 불선한 마음도 있다. 대체 마음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아비담마를 보면 초기경전을 근거하여 마음의 지도를 만들었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 89가지

不善心 12

善心 21

無記心 56

異熟無記心 36

唯作心 20

세간

마음

54

원인

재생연결

(19)

등록

(11)

貪根 (8)

不善業異熟 (7)

(1) , 邪見○, 行×

(13) , 眼識

0

(2) , 邪見○, 行○

(14) , 耳識

0

(3) , 邪見×, 行×

(15) , 鼻識

0

(4) , 邪見×, 行○

(16) , 舌識

0

(5) , 邪見○, 行×

(17) , 身識

0

(6) , 邪見○, 行○

(18) , 領受

0

(7) , 邪見×, 行×

(19) , 조사

0

(8) ,邪見×, 行○

善業異熟 (8)

(20) , 眼識

0

無因 (3)

瞋根 (2)

(21) , 耳識

0

(28) , 오문전향

(9) , 瞋○, 行×

(22) , 鼻識

0

(29) , 의문전향

(10) , 瞋○, 行○

(23) , 舌識

0

(30) , 미소짓는

(24) , 身識

0

痴根 (2)

(25) , 領受

0

(11) , 의심상응

(26) , 조사

0

(12) , 들뜸상응

(27) , 조사

0

善業異熟 (8)

有因 (8)

(31) , 智○, 行×

(39) , 智○, 行×

3

(47) , 智○, 行×

(32) , 智○, 行○

(40) , 智○, 行○

3

(48) , 智○, 行○

(33) , 智×, 行×

(41) , 智×, 行×

2

(49) , 智×, 行×

(34) , 智×, 行○

(42) , 智×, 行○

2

(50) , 智×, 行○

(35) , 智○, 行×

(43) , 智○, 行×

3

(51) , 智○, 行×

(36) , 智○, 行○

(44) , 智○, 行○

3

(52) , 智○, 行○

(37) , 智×, 行×

(45) , 智×, 行×

2

(53) , 智×, 行×

(38) , 智×, 行○

(46) , 智×, 行○

2

(54) , 智×, 行○

15

(55) 初禪定

(60) 初禪定

3

(65) 初禪定

(56) 第二禪定

(61) 第二禪定

3

(66) 第二禪定

(57) 第三禪定

(62) 第三禪定

3

(67) 第三禪定

(58) 第四禪定

(63) 第四禪定

3

(68) 第四禪定

(59) 第五禪定

(64) 第五禪定

3

(69) 第五禪定

무색계 12

(70) 空無邊處定

(74) 空無邊處定

3

(78) 空無邊處定

(71) 識無邊處定

(75) 識無邊處定

3

(79) 識無邊處定

(72) 無所有處定

(76) 無所有處定

3

(80) 無所有處定

(73) 非想非非想處定

(77) 非想非非想處定

3

(81) 非想非非想處定

출세간 마음

출세간

8

(82) 수다원 도

(86) 수다원 과

3

(83) 사다함 도

(87) 사다함 과

3

(84) 아나함 도

(88) 아나함 과

3

(85) 아라한 도

(89) 아라한 과

3

 

 

마음 89가지.docx

 

 

 

이것이 마음의 지도이다. 마음은 크게 세간의 마음 81가지와 출세간의 마음 8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세간의 마음 8가지는 성자들의 마음이므로 그다지 동요가 없다. 그러나 세간의 81가지는 불선한 마음, 선한 마음, 불선업과보심(불선업이숙) , 선업과보심(선업이숙) 등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89가지 마음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이다. 한순간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면 나머지는 잠재적인 마음으로 된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라면 매순간 다른 마음이 된다. 마음이 자꾸 변하는 것도 대상에 따라 마음이 달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서 마음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번호와 함께 말하는 경우가 많다. 89가지 마음에다 고유의 번호를 매겨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번 마음의 경우 ‘(1) , 邪見, ×라 되어 있는데, 이는 기쁨이 함께 하고 사견이 있고 자극받지 않는 마음 하나라고 설명된다. 불선한 마음 8가지 중에 첫 번째로 설명된 마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건에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 출세간을 막론하고 89가지 마음이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가지

 

마음의 도표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불선심이다. 이는 도표에서 1번에서 12번까지이다. 89가지 마음 중에서 앞에 배치해 둔 것은 그 만큼 의미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 , 치에 대한 것이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소멸해야 될 것이 탐, , 치이다. 그렇다면 탐, , 치의 마음이라 무엇일까?

 

마음도표를 보면 불선심 12가지 마음은 크게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8),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2), 어리석음을 뿌리(2)로 하는 마음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흔히 말하는 탐, , 치는 불선한 마음의 대표주자라 볼 수 있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는 8가지가 있다. 마음도표에서는 “(1) , 邪見, ×, (2) , 邪見, , (3) , 邪見×, ×, (4) , 邪見×, , (5) , 邪見, ×. (6) , 邪見, . (7) , 邪見×, ×, (8) ,邪見×, 라 되어 있다. 마치 암호문을 보는 것 같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을 빠알리어와 함께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Somanassasahagata diṭṭhigatasampayutta asakhārikameka

Somanassasahagata diṭṭhigatasampayutta sasakhārikameka

somanassasahagata diṭṭhigatavippayutta asakhārikameka

somanassasahagata diṭṭhigatavippayutta sasakhārikameka

upekkhāsahagata diṭṭhigatasampayutta asakhārikameka

upekkhāsahagata diṭṭhigatasampayutta sasakhārikameka

upekkhāsahagata diṭṭhigatavippayutta asakhārikameka

upekkhāsahagata diṭṭhigatavippayutta sasakhārikameka

 

1)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3)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5)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6)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7)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8)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akusala

 

 

 

이것이 누구에게나 내재 있는 불선심이다. 언제든지 조건만 형성되면 발현될 수 있는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을 보면 기쁨과 평온, 사견이 결합되었는지, 자극받았는지로 구분된다.

 

사견(diṭṭhi)에 대하여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견(diṭṭhi)’이다. 사견은 빗나간 견해를 말한다. 정견(samma diṭṭhi)과 반대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견이라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견은 어떤 것일까?

 

사견은 업(kamma)과 업의 과보(vipaka)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과보가 즉각적으로 올 수도 있지만 나중에 올 수도 있다. 과보가 익을 조건이 되어야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물건을 훔쳤을 때 그 즉시 들켰다면 그 즉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발각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과보를 받게 된다. 먼 후일 조건이 형성이 되면 훔친 것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생에서 받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받고, 차차기생에서도 받을 수도 있다. 한번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다만 달리 익기 때문에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한다.

 

업은 달리 익는다. 업이 달리 익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도 업이 달리 익기 때문이다. 한번 행위를 하면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따른다. 다만 언제 업보로 나타날지 모른다. 이와 같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 정견(samma diṭṭhi)이다.

 

부처님은 업에 대한 정견을 설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며,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M135) 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라 하여 업이 정견임을 설하였다.

 

사성제를 출세간의 정견이라 한다. 반면 세간의 정견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업정견은 부처님 당시 숙작인론, 존우화작설, 우연론 등 소위 삼종외도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탐욕에 뿌리박은 8가지 마음의 가장 큰 특징은 사견(micchā diṭṭhi)’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견과 관련하여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가지를 보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사견과 결합한(diṭṭhigatasampayutta)것이고, 또하나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것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사견과 결합한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것이다.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알긴 알지만 탐욕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불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법륜법사의 아비담마 강좌에서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 즉 마음도표에서 1번부터 8번 까지 마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강좌가 있다. 지견선원 법륜법사의 아비담마 강좌가 그것이다. 유튜브와 카페에 올려져 있는데 카페에 올려져 있는 동영상 탐욕에 뿌뿌리박은 마음강좌에서는 8가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 대하여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1)

 

마음도표 1번은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 邪見, ×)이다. 마치 암호문 같은 이 말은 어떤 뜻일까? 법륜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누구나 다 해당될 수 있다.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라는 말은 사견과 결합한 것(diṭṭhigatasampayutta)’을 뜻한다. ‘즐겁게라는 말은 기쁨이 함께(Somanassasahagata)’ 하는 것을 말한다.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라는 말은 스스로 그냥 즐긴다라는 말로서 자극받지 않은 것(asakhārikameka)’임을 말한다. 따라서 식당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욕망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한다. 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욕망으로 음식이나 술을 접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 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즐기기 위해 그냥 먹고 그냥 마시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살아 간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술이 땡기면 술을 마시고 성적 욕망이 일어나면 성적교섭을 행한다. 이런 행위를 분석해 보면 크게 탐욕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로 목표로 하기 때문에 욕망 충족을 위한 즐기는 삶은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를 마음도표 1번에 위치해 놓았을 것이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2)

 

마음도표 2번항은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邪見, )이다. 1번과 차이가 있다면 자극 받은 것(sasakhārikam)’이다. 1번 마음에서는 자극받지 않는 마음이라 하여 그냥 스스로 음식을 즐긴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극 받은 것이란 무엇일까?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친구에게 설득을 받은 후에

영화를 즐겁게 본다.”

 

 

친구에게 설득을 받은 후에라는 말이 자극받은 마음이다. 친구가 영화보러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가서 영화를 즐긴 것이다. 여기서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사견과 결합한 것을 말한다. ‘즐겁게본다는 것은 기쁨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견이다. 욕망을 즐기는 것이 업을 짓는 것이고,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3)

 

 

한 여자가

유쾌하게 새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옷에 대한 집착이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쾌하게는 기쁨(somanassa)을 뜻한다. 소마낫사는 정신적 행복이라 번역된다.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도마낫사(domanassa)라 한다. 빠알리어 so good의 뜻이고, 빠알리어 do bad의 뜻이다. manassa는 정신을 뜻한다. 따라서 somanassa는 정신적 행복, domanassa는 정신적 괴로움으로 번역된다. 

 

한 여자는 자신이 좋아 하는 옷을 입고 즐거워 하고 있다. 그러나 옷에 대한 집착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것(diṭṭhigatavippayuttaṃ)이다. 유쾌하게 새 옷을 입는다라 했을 때 스스로 입는 것이다. 이는 누가 권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입는 것이다. 그래서 자극받지 않은(asakhārikam) 마음이다 

 

좋아 하는 옷을 입고 즐거워 하고 있는 것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때문이다. 마치 술이 해로운 것임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과 같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 도둑질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한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4)

 

 

한 소녀가

업과 업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친구들의 요청에 순응하여

현대적인 음악을 즐겁게 듣는다.”

 

 

한소녀가 음악을 듣고 있다. 기본적으로 기쁨이 함께 하는 (somanassasahagataṃ)’ 마음이다. 친구들이 좋다고 말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이는 권유받고 자극받은(sasakhārikam)’ 마음이다. 그런데 업과 업에 대한 과보는 알고 있다. 이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마음이다.

 

누구나 즐거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친구들이 권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다. 누구나 술을 마실 수 있다. 친구들이 술 마시자고 권유했을 때 유쾌하게 술을 즐길 수 있다. 누군가 음행을 할 수 있다. 술마시면서 친구들이 외딴 곳 관사에 있는 여교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강간을 하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친구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즐겼다면 마음도표 4번 항에 해당될 것이다. 모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고,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볼 수 있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5)

 

 

한 소년이

약간의 집착을 가지고 있지만

기쁨이 없이 업에 대한 지혜도 없이

소박한 밥을 소금과 함께 먹는다.”

 

 

마음도표 5번 항부터는 기쁨(somanassa)이 평온(upekkh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마음이 된다소년이 기쁨이 없이 밥을 먹는 것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마음이다그렇다고 사선정에서와 처럼 평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맹하고 지둔한 상태를 말한다.   업에 대한 지혜도 없이라는 말은 사견과 결합한(diṭṭhigatasampayuttaṃ)’ 마음이다. ‘소박한 밥을 소금과 함께 먹는다라는 것은 그저 맹하니 밥먹을 때가 되서 먹기 때문에 자극받지 않는(asakhārikam)’ 마음이다.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다. 지둔한 삶을 사는 자가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업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고 욕망으로 사는 자의 평온은 기본적으로 불선한 마음에 기반한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6)

 

 

한 소녀가

그녀의 새 옷이 아름답다는 설명을 어머니가 한 후에

그 옷에 대한 진가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립적인 느낌을 갖고 있고

업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

 

 

맹하고 지둔한 평온이 함께 하는 소녀에 대한 것이다. 소녀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옷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자극받은(sasakhārikam)’마음에 해당된다. 중립적인 느낌이라는 것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것을 말한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견이 함께 함 (diṭṭhigatasampayuttaṃ)’ 을 말한다.

 

평온이 함께 하는 마음은 중립적인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 느낌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에 해당된다. 이런 중립적인 느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조건에 따라 즐거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고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지둔하고 맹한 평온한 느낌도 즐거운 대상을 보았을 때 거머쥐려 하고, 싫은 대상을 보았을 때 밀쳐 내려 할 것이다. 욕망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립적인 마음은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7)

 

 

업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신은 평온한 느낌을 가지고 커피를 마시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맛을 감상하고 있다.”

 

 

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것을 말한다업과 업의 과보를 알고 있음을 말한다.  ‘평온한 느낌을 가지고라는 말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것으로써 맹하고 지둔한 평온을 뜻한다.   여전히라는 말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asakhārikam)’을 말한다.

 

누구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러나 맛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면 욕망으로 마시는 것이다. 맛을 감상하며 마시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가 비록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잘 알지라도 맛에 대한 갈애로 커피마시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면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때문이다. 술도 마찬가지이고 담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8)

 

 

한 여자가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여성 판매원에게서

많은 설득을 받은 후에 마지 못해 새옷을 산다.

 

 

판매원에게 설득당해 옷을 샀다는 것은 자극 받은(sasakhārikam)’ 것이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음 (diṭṭhigatavippayuttaṃ)’ 을 뜻한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에도 설득당해 옷을 샀다는 것은 지둔하고 맹하다고 볼 수 있다. ‘평온이 함께 하는 것 (upekkhāsahagataṃ)’은 중립적인 평온으로서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설득하면 그대로 넘어 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치면 실천이 되지 않는다. 착하게 사는 사람도 누군가 꼬드기면 넘어 간다. 누군가 도둑질 하자고 제안했을 때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멈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득에 넘어갔다면 탐욕에 뿌리를 둔 지둔하고 맹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 ,邪見×, )’라 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왜 불선(不善)인가?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 간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평온하게 살아 가는 일상을 보면 대게 먹고 마시고 입고 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모두 불선(不善: akusala)이라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그렇다.

 

평범한 일상이 불선이라는 것은 마음도표에서 확인 되고 있다. 기쁨과 함께 하는 또는 평온과 함께 하는 사견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또는 자발적인 것인지 권유받은 것인지에 따라 생겨나는 마음은 모두 불선한 것으로 본다. 특히 8가지 불선심이 그렇다.

 

8가지 불선심을 보면 공통적으로 탐욕이 뿌리박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탐욕이 뿌리박은 마음은 모두 불선으로 본다. 이때 탐욕은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다. 이는 유아로도 설명 될 수 있다. , , 치에 뿌리박은 마음은 모두 유아라 볼 수 있다.

 

탐욕의 마음을 내는 것은 즐거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한다. 이는 욕망이다. 따라서 즐거움과 욕망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은 결국 즐거움으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8가지 불선심중에서 첫번째 항을 보면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라 했다. 이와 관련된 예문이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이다. 음식 먹는 것 자체가 불선심이라는 것이다. 왜 불선심이라 했을까? 즐기면서 먹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욕망으로 먹는 것이다. 누가 먹는가? 내가 먹는 것이다.

 

마음도표를 보면 하나의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마음도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표를 보면 불선심 12가지와 함께 선심이 21가지 소개 되어 있다. 선심 21가지 중에 욕계에 대한 것은 8가지이다. 나머지는 색계와 무색계, 출세간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선심12가지와 선심 21가지 차이는 무엇일까? 크게 보시, 지계,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불선심 12가지에는 보시, 지계, 수행에 대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불선심 12가지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로 한 것이다. 보시하지 않고, 지계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고 것은 모두 불선심이다. 평범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 특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그만이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시, 지계, 수행이 없다면 모두 불선심에 해당된다.

 

불선심은 불선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뿌리내린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평범한 일상이 불선이고 불선업이 되기 쉬운 것은 자아관념때문이라 볼 수 있다.

 

보시, 지계, 수행으로

 

우리 주변에는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평생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일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모두 불선업을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그런가? 일상의 삶이라는 것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마음 도표는 부처님가르침을 한눈에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크게 불선심, 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불선심과 선심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에서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아비담마 마음도표는 결국 무아의 삶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단지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살자는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통찰하여 무아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유아론적 삶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불선하게 사는 것이 된다. 반면 무아론적 삶은 보시, 지계, 수행으로 살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유아론자들이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결국 불선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무아론자들은 지혜롭게 살기 때문에 선한 삶을 살게 된다. 아비담마 마음도표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2016-10-15

진흙속의연꽃

 







 

청정한 음식

 

 

만악의 근원

 

송년회 시즌입니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의 지역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초청한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부부팀 2팀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 모였습니다. 모두 나이가 든 법우님들입니다. 문제는 술이 과해서 탈이 났습니다. 한 법우님이 과도한 주사를 한 것입니다. 오랜 만에 참석한 모임의 끝을 흐려 놓았습니다.

 

음주가 만악의 근원입니다. 대부분 사건이나 사고가 원인을 추적해 보면 음주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음주를 하게 되면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고, 말이 많아지고 결국 실수를 저지르고 말게 됩니다. 음주도 일종의 음식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음주를 하는 것은 청정하지 못한 식사라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의 경에서

 

상윳따니까야에 음식과 관련된 경이 있습니다. ‘음식 경(S12.11)’이 그것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하라 숫따에 대하여 음식 경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자양분의 경이라 했습니다.

 

음식 경 또는 자양분의 경이라 불리우는 아하라경에는 네 가지 음식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로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識食)이라 합니다. 단식은 딱딱한 음식으로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합니다. 촉식은 느낌이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하고, 의사식은 의도의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하고, 식식은 정신-물질의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합니다.

 

네 가지 음식은 모두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식식(識食)에 대하하여 몰리야팍구나 경에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서 다시 태어남[再生]의 발생이라 [불리는 정신-물질]의 조건이 된다.”

(몰리야팍구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각묵스님)

 

 

초불연 각묵스님의 해석을 보면 대괄호와 한자어를 사용하여 번역했습니다.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형식입니다.

 

각묵스님 번역을 보면 한자어로 ‘[再生]’이라는 말이 보입니다. 이는 식식이 재생연결식임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주를 보면 여기서 알음알이의 음식은 재생연결식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은 이 알음알이와 함께 일어난 정신-물질이다.”(SA.ii.31)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식식은 재생연결식임에 틀림 없습니다. 특히 초불연 각주를 보면 앙굿따라니까야 존재 경(A3.76)’을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재 경에 따르면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A3.76)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식은 내생의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재생연결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식(識食)은 명색의 조건

 

몰리야팍구나의 경에 따르면, 몰리야팍구나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잘못 이해고 있었습니다. 몰리야팍구나는 부처님의 네 가지 음식에 대한 설법을 듣고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은 잘못 된 것입니다. 식식을 누군가 섭취한다고 보면 이는 아뜨만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질책하면서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연기법적으로 질문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viññāāhāro āyati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 bhūte sati saāyatana, saāyatanapaccayā phassoti.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고,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

 

(몰리야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전재성님역역)

 

 

paisandhicitta

 

 

의식의 자양분식식(識食)’을 말합니다.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의 음식이라 했습니다. 식식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성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존재는 빠알리어 부따(bhūta)’를 번역한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부따는 오온을 지칭하는 것이라 합니다.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 나기 때문에 식과 명색을 갖춘 것에 대하여 부따로 본 것입니다. 식식은 명색의 조건이 됩니다.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

 

몰리야팍구나의 경을 보면 연기는 육촉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른바 8지연기를말합니다. 그러나 식식을 조건으로 부따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했습니다.

 

 

 “Srp.II.31에 따르면, 의식의 자양분은 재생의식[結生識: paisandhicitta]를 말한다.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은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을 말한다. 이 명색이 생겨나서 존재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있게 된다. AN.I.223-224에 따르면, 업은 밭이고 의식은 씨앗이다. 갈애는 습기로서 낫거나 중간이거나 높은 영역에서 의식이 정초되면서 미래의 새로운 존재가 탄생된다.”

 

(상윳따니까야 2 50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식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거로 드는 것은 앙굿따라니까야 존재의 경(A3.76)’입니다. 존재의 경에 따르면 의식은 씨앗이라 했습니다. 업이라는 밭에 씨앗이 떨어지면 발아할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분입니다. 만일 수분이 없다면 발아 하지 않고 말라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분은 갈애를 의미합니다. 갈애는 다름 아닌 갈증과도 같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갈애입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씨앗이 성장하여 잎이 나고 줄기가 커져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자양분의 경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자양분은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S12.11) 라고 연기가 시작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은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을 말한다.”라고 주석의 견해를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재생연결식에 대한 심오한 설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일한 의식이 그렇습니다.

 

재생연결식이란?

 

재생연결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백미라 볼 수 있는 인식과정에 대한 부분을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동일한 의식이라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요?

 

최근 어느 법우님으법부터 선물 받은 체계적으로 배우는 아비담마를 열어 보았습니다. 재생연결식이 동일한 마음이라 하는데 관련된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의 삶은 재생연결심으로 시작된다. 이 마음이 무너진 후에 죽음이 생명연속심의 기능을 수행할 때까지 생명연속심이 계속해서 일어났다가 무너진다.

 

마지막 생명연속심은 죽음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죽음의 마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이 3가지 마음, 즉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은 세상 또는 종류(Jati)에서, 마음부수에서, 그것들이 취하는 감각대상에서 동일하다. 보통사람들에게는 8가지 큰 과보의 마음 가운데 하나가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의 기능을 한다.

 

3가지 마음은 한 가지 큰 유익한 마음과 결합한 동일한 의 과보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동일하다. 만약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와 결합하며 자극받지 않은 큰 유익한 마음이면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와 결합하며 자극받지 않은 큰 과보의 마음이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의 기능을 할 것이다.

 

이 마음들이 취하는 감각대상은 전생의 죽음 직전에 나타났던 죽음 직전의 표상이다. 이 표상은 또는 업의 표상으로 태어날 곳의 표상의 형태이다.

 

(체계적으로 배우는 아비담마, 4장 인식과정, 불광출판사 김종수님역)

 

 

아비담마에서 동일한 의식이란 재생연결심(paisandhicitta)’, ‘생명연속심(bhavagacitta)’, ‘죽음의 마음(cuticitta)’ 이렇게 세 가지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 마음은 모두 같은 마음이라 합니다. 동일한 마음을 말합니다. 재생연결식은 일생에 있어서 최초의 마음이라 하는데 십이연기에서 식에 해당됩니다. 생명연속심은 한 존재의 일생의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지속되는 마음이라 합니다. 빠알리어로 바왕가찌따라 합니다. 죽음의 마음은 한 존재의 최후의 마음입니다.

 

생명연속심(bhavagacitta)이 윤회한다

 

한 존재에 있어서 몸과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도 생명연속심(bhavagacitta)’이라는 한마음 때문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에 의해 생명연속심이 역시 오로지 한번만 일어나는 죽음의 마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연속심, 즉 바왕가찌따가 윤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재생연결식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물론 조건 발생되는 식, 연기되는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증장된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음식의 경 또는 자양분의 경이라 일컫는 아하라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이 어떻게 윤회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는 논장의 가르침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 논장에 실려 있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다.

 

해피법당의 해피스님은 식이 윤회한다는 경전적인 조건이에요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부처님은 식이 갈애를 조건으로 해 가지고 오염된 행위의 조건에서 생겨난 업식이 머물면 그것이 식식이고, 그것이 윤회하는 조건입니다.” (해피스님) 라 합니다.

 

해피스님은 아비담마논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하라경을 설명할 때 재생연결식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두 번역서의 각주에 언급되어 있는 주석의 견해를 전혀 인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니까야 본문에 실려 있는 대로 파악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장황합니다. 그리고 난해합니다. 칠판에 도표 식으로 가득 써 놓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중표 교수 역시 아하라경에 대하여 재생연결식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 봅니다. 그러다 보니 연기법을 오로지 삶에 대비하여 설명하려 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부처님은 오로지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씀했다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네 눈으로 보았느냐?”

 

십이연기, 십지연기, 팔지연기에 대하여 오로지 현존하는 삶에 대비하여 설명한다면 삼세양중인과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현존하는 삶 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삶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현존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이중표교수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았느냐?”라는 말입니다. 드러난 것이 아니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은 대상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중표교수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도로 설명합니다. 이는 용수의 중론에 따른 것입니다. 근본불교가 중론과 만났을 때 십이연기는 삶의 과정에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어적으로 개념화 된 것이기 때문에 개념 타파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말합니다. 그결과 논장을 전면 부정합니다. 당연히 삼세양중인과도 부정됩니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댔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현세적인 것이 됩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 보이지 않은 것은 단지 개념이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했다거나,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만 설했지 내생은 말씀 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네 눈으로 보았느냐?”고 말합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송년회 시즌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함께 음식을 즐기며 담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주가 과하면 다음날 최악의 컨디션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반복되는 것은 음식절제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하라경에 따르면 음식은 먹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의 조건이 되는 촉식이 있고, 행위의 조건이 되는 의사식이 있습니다. 또 명색의 조건이 되는 식식이 있습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접촉으로 살고 행위를 하며 살며 알아야 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갈애에 따른 것으로 윤회하는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청정한 음식

 

업은 들판이고, 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라 했습니다. 업의 들판에 식이라는 씨앗이 뿌려졌을 때 적절한 수분만 있으면 자랍니다. 그런데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씨앗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수분이라는 갈애는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 이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네 가지 음식에 대한 갈애가 새로 태어남의 조건이 됨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설했습니다. 감관을 수호하고 늘 깨어 있는 마음과 음식절제를 동급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음식절제를 강조한 것은 음식에 대한 갈애가 재생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음식은 반드시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접촉하는 것, 의도하는 것, 의식하는 것이 모두 음식이라 했습니다.

 

매일 점심이 기다려집니다. 요즘 새로 생긴 셀프식당입니다. 한끼에 오천원합니다. 정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대하면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청정한 음식이가 때문입니다. 접촉하는 것, 의도하는 것, 의식하는 것 역시 음식입니다. 청정한 음식을 대했을 때 청정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 마음까지 청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2016-12-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