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통/인문·예술·종교·철학

제일의공경 有業報而無作者 는 허무주의적 견해

우공(友空) 2017. 1. 31. 10:32


http://blog.daum.net/bolee591/16157565


http://blog.daum.net/bolee591/16157787


영화 - 쇼생크 탈출의 명대사





 

제일공의경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은 허무주의적 견해

 

 

 

식물을 키워보니

 

세상은 경이롭고 불가사의 합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하지 못하는 일을 목격 했을 때 신비롭다거나,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실에 있는 식물이 그렇습니다. ‘홍콩대엽야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작은 오엽의 새순이 돋았습니다. 몇 주 지나서 보니 쑥 자라서 기존의 오옆잎파리를 제치고 가장 높이 솟았습니다. 행운목이 있습니다. 키운지 10년 되었습니다. 어느 날 꽃대가 쑥 솟아 올랐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합니다. 마침내 꽃을 피워 냅니다.

 

 

 

 

 

 

사무실에 열대식물이 많습니다. 키우기 쉬운 것이 특징입니다. 물만 주면 자랍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물을 주는 것 외 다른 것 없습니다. 물만 주어도 새순이 돋고 쑥 자라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경이롭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성장하게 만들었을까요? 준 것은 물밖에 없는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물만이 아니었습니다. 화분에 흙이 있기 때문에 땅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지대입니다. 수분이 있어서 수대가 있습니다. 사대 중에 남은 것은 화대와 풍대입니다. 화대는 온기입니다. 식물은 너무 추우면 얼어 죽습니다. 그러나 난방이 잘 되어 있다면 얼어 죽지 않습니다. 이로써 화대가 성립됩니다. 다음으로 풍대입니다. 풍대는 공기라 볼 수 있습니다. 공기기 통하지 않으면 식물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식물에게 준 것은 물밖에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7일 만에 물을 한번 줄 뿐임에도 식물은 잘 자랍니다. 그리고 꽃을 피워 냅니다. 단순하게 물만 주어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흙도 있고 온도도 있고 공기도 있습니다. 결국 지수화풍 사대의 작용으로 인하여 식물이 자라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식물이 지수화풍 사대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람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육사외도의 견해입니다. 사람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사대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부처님당시 외도 스승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사대)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5.5)라 했습니다. 사람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사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식물과 달리 정신기능이 있습니다. 유물론에서는 정신도 물질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S25.5) 라고 하여 정신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합니다. 사대가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 가는 것 역시 돌아간다.’라 합니다. 이는 초기경에서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S25.5) 라 한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말에 대하여 허무주의적 견해라 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5.5) 라는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말을 인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돌아가셨다라는 말은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단멸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일까 종종 사람들은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치명적 문제점 세 가지

 

유물론에서 한단계 더 발전된 것이 칠요소설입니다. 지수화풍 사대에다 고와 락, 그리고 영혼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 , , , , , 명이라 합니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로서 역시 단멸론에 속합니다. 비록 영혼이라는 뜻의 지바(jiva)가 있어서 이원론적으로 보이지만, 영혼(생명)도 물질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외 육사외도의 가르침에는 운명론, 불가지론, 숙명론 등이 있습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둔 견해는 거의 대부분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물론은 바라문의 영원론에 대항하여 생겨난 견해입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바라문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최고신 브라흐마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른바 영원주의입니다. 그런데 바라문교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는 초기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 똑 같은 것에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초기경전에 묘사된 브라흐마사를 보면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M49) 라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유일신과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바라문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지’와 ‘고통’과 ‘죄악’이라는 세 가지 문제입니다. 전능하고 전지하고 전선한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에서 일어 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유일신교도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특히 고통과 죄악의 문제는 유물론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연기법으로 사상의 평정을

 

창조론과 유물론에서 해결 하지 못한 문제점은 인간의 ‘무지’와 ‘고통’과 ‘죄악’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의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연기법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논파 되었습니다. 연기법으로 사상의 평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상윳따니까야 제2권에 니다나상윳따(S12)’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인연상윳따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중에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가 있습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하여 허무주를 논파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라 영원주의를 논파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설명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회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로 설명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부처님의 연기법은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와 육사외도의 허무주의를 논파한 것이기도 합니다. 연기법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인 동시에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견해를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 중에 괴로움과 관련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구분별로 질문 했을 때

 

어느 날 외도 아쩰라 깟싸빠가 부처님에게 괴로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깟싸빠는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S12.17)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깟싸빠는 이번에는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깟싸빠는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라고 연속해서 묻습니다. 이른바 사구분별로 질문한 것입니다.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모두 그렇지 않습니다.”라 하여 부정했습니다. 그러자 외도는 이번에는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라며 질문합니다. 사구분별로 질문 했을 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괴로움은 있는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압니다.”“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는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괴로움을 가르쳐 달라고 청원합니다.

 

경어체를 쓴 이유는

 

부처님은 외도의 질문에 친절하게 그렇지 않습니다라든가,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봅니다.”라 하여 경어체로 말했습니다. 이는 전재성님 번역의 특징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는 그러하다’ ‘아니다등으로 번역 했지만 제자가 아닌 외도에게는 반드시 경어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 각묵스님역을 보면 그렇지 않다.” 라든가, “참으로 나는 괴로움을 본다로 번역하여 마치 제자들에게 말하듯이 했습니다.

 

번역은 그 나라의 어법에 맞게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법이 있어서 대화에 있어서도 엄격하게 적용됩니다. 타인에게는 비록 나이가 어려도 경어체를 써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친구에게 말하듯이 또는 하대하듯이 이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추근대듯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듯한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경어체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짜증내며 귀찮아 하는 뉘앙스를 줍니다. 제자에게 하는 말과 이교도에게 하는 말은 구별되어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내 탓이요!”

 

외도는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끈질기게 질문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닌 것은 아닙니다.”라 하고, 설명이 필요하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먼저 외도에게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성제가 아니라 누가 괴로움을 겪는 것인지 대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괴로움을 만들었다면 내 탓이오!”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괴로움이 외부에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네 탓이야!”라 할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과거에 지은 나에 의한 것이라면 내가 짓고 내가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과연 타당한 말일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So karoti s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 kata dukkha"nti iti vada sassat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행위하는 것(karoti)’감지하는 것(paisavediyatī)’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하다면 같은 사람입니다. 이를 현생 뿐만 아니라 과거생까지 확장하면 영혼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변치 않는 실체가 있는 영혼을 가정했을 때 이를 아뜨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 ‘괴로움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 처음부터 영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며 영원주의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원주의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하나이자 동일한 자라고 생각해서 유래하는 것이다.” (Srp.II.35-36) 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뜨만은 고정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행위 하는 자와 고통을 경험하는 자가 동일인이라면 영원주의적 견해라 했습니다. 다름 아닌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말합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와 같습니다.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 하여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로 봅니다. 그래서 내 탓이요!”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번역을 보면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은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에 떨어지고 만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So karoti so paisavediyatī”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라고 번역한 것과 비교하여, 각묵스님은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CDB를 찾아 보니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etemalism.”라 되어 있습니다. 각묵스님이 사용한 대괄호와 그 안에 있는 내용까지 유사합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역자는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123번 각주) 라고 설명했습니다. 빅쿠보디의 번역과 주석을 참조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묵스님이 빅쿠보디의 번역을 참조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빠알리구문 ādito sato”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전재성님도 이 구문이 들어간 문장에 대하여 난해한 구조를 갖고 있다”(84번 각주) 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CDB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pk glosses ādito sato as ādimhi yeva, and explains it as meaning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It seems to me more likely that this phrase is part of the eternalist view itself and means "of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i.e., of a being that has always existed. This interpretation can marshal support from the fact that the phrase is omitted just below in the corresponding restatement of the annihilationist view, which is otherwise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same logic and thus, if Spk were correct, should include ādito sato. Spk says "it should be brought in," but

the fact that the text replaces it by another phrase is strong evidence that it does not belong there; see n. 40.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n such a case the belief (laddhi) afterwards follows,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nd here, what is meant by suffering is the suffering of the round (vaṭṭadukkha).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eternalism, one grasps hold of eternalism. Why? Because that view of his amounts to this. Eternalism comes upon one who conceives the agent and the experiencer to be one and the same.

 

Spk-pt: Prior to the belief that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there are the distortions of perception and of mind (saññācittavipallāsaā) in the notion,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and then a wrong adherence to these distortions develops, namely,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 distortion of views, diṭṭhivipallāsa).

 

On the three levels of distortion with their four modes, see AN I1 52.

 

(CDB Vol1, 39번 각주, 빅쿠보디)

 

 

위 빅쿠보디 각주는 초불연 상윳따 2 123번 각주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각주에서 네 가지 형태와 관련된 세 가지 레벨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AN I1 52’를 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찾아 보니 전도의 경(A4.49)’입니다. 이는 무상, , 무아, 더러움에 대하여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라 하여 잘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A4.49)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네 탓이야!”

 

짓는 자(kāraka)와 경험하는 자(vedaka)가 하나라면 상견이며 이는 영원주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겪을 때 마다 내 탓이요!”라며 가슴을 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전 생에 행위한 자와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가 같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vedanāhitunnassa sato "parakata dukkha"nti iti vada ucched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괴로움에 대하여 타자가 만든 것이라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남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불효자식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어요?”라고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환경을 탓하며 부모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다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네 탓이 아닙니다. 언젠가 젊은 시절 그 놈이 저지를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지금 내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전생 언젠가 어느 놈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지금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네 탓이야!”라며 젊은 시절 자신이었던 그놈에게, 전생에 한 때 자신이었던 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타자로 돌리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괴로움은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 행위자는 파괴되어 버리고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주장하여 허무주의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Srp.II.35-36) 라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남탓으로 돌리는 것은 허무주의적 견해라 합니다. 만일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른 것이라면, 지금 나의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살인을 했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모 수학과 K교수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 했습니다. 전생에서 살인을 했어도, 현생에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살인에 대한 과보는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최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서는 행위자와 경험자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치하면 상견에 빠지기 때문에 영원주의적 견해이고, 불일치 하면 단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허무주의적 견해라 합니다. 그런데 대승경전 잡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잡아함 13 335)에서도 행위자와 경험자의 불일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有業報而無作者)”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니까야의 “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와 똑 같습니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제일의공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경에 대한 해설을 보면 이 구절에 대하여 중도실상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라 합니다. 니까에서는 분명히 허무주의적 견해라 하지만 대승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서는 중도를 설명한 것으로 바른 견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제일의 공경은 어떤 것일까요?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云何第一義空經諸比丘眼生時無有來處滅時無有去處如是眼不實而生生已盡滅有業報而無作者此陰滅已異陰相續除俗數法意亦如是說除俗數法俗數法者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如無明緣行行緣識廣說乃至純大苦聚集起又復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無明滅故行滅行滅故識滅如是廣說乃至純大苦聚滅比丘是名第一義空法經

 잡아합경》 제13권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한문본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이여,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이 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은 제외된다. ····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으며, …… (이 사이의 자세히 말은 앞에서와 같다.)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고 일어나느니라.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며 …… (이 사이의 자세히 말은 앞에서와 같다.) ……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나니, 비구들아, 이것을 제일의공법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위키백과, 제일의공경)

 

 

여기서 세속의 수법(俗數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세속에서나 통용되는 법을 말합니다. 연기법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단지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진리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제와 속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된 것이고, 덜 깨달은 것이 됩니다. 후대 용수 등 공사상과 유식사상이 출현하여 깨달음을 완성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는 끊임 없이 진화해 왔다고 합니다.

 

제일의공경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라 하여, 이를 세속법이라 하면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유전문과,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환멸문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유업보이무작자라는 말은 니까야에서 분명히 허무적인 견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의공경에서는 이 말이 중도실상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여 진제로서 바른 견해라 합니다.

 

니까야에는 없는 제일의공경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제일의공경은 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역 아함경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를 매우 소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는 아비달마구사론을 저술하면서 이 경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경의 내용을 무려 세 차례 인용했습니다. 인용한 이유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을 논파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니까야에는 없고 아함경에만 있는 것이 제일의공경입니다. 이 경이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흥기할 당시 최대 부파를 형성했던 설일체유부의 논거를 부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바수반두는 구사론에서 유부가 주장하는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존이 과거 업이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과보를 내는 효능, 즉 과거에 있었던 행위에 의해 상속(相續)가운데 있게 되는 힘을 고려한 것이다. 달리 해석하여, 과거 업이 그 자체로서 현재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과거로 볼 수 있겠는가? 더욱이 경전에는 아주 명백한 언명이 있다. 즉 세존께서는 <제일의공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한 비구들이여, 눈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곳(즉 미래)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 어떤 곳(즉 과거)에 축적되기 위해 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눈은 비존재였다가 생겨나며,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만일 미래의 눈[]이 존재한다면 세존이 눈은 비존재였다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바수반두는 주장하였다.

 

유부(有部)에 의하면, 삼세(三世)는 본체(本體)의 상태의 차이로 나타나며, 본체가 작용과 결합하여 현세적(顯勢的)일 때가 현재이고, 작용을 떠나 잠세적(潛勢的)인 상태로 있을 때는 과거나 미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에 의하면, 잠세적인 상태로 남아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게 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없었다가 생겨나 다시 사라져 버리는 생멸(生滅) 현상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수반두는 <제일의공경>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그의 지론을 펼쳤다.

 

(마성스님, 韓國佛敎》제630, 2014 11 20, 9)

 

 

제일의공경에서 키워드는 공()입니다. 공의 의미를 밝히는 경입니다. 그래서인지 니까야에서 이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유사한 경이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12.17)’이 있지만 내용이 다릅니다. 제일의공경에서 강조한 것은 업보는 있으나 업을 짓고 보를 받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일의공경에서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라는 구절은 단멸론 허무주의로 오해 받기 쉽습니다. 실제로 니까야에서는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라 하여 허무주의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대승논자들은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에 대하여 공으로 해석하여 연기의 실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눈을 예로 들어 ()이 생겨날 때에 온 곳이 없으며, 멸할 때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 은 실다운 것이 아니되 생기며, 생긴 후에는 다 소멸된다. 업보(業報)만이 있고 짓 는 자(作者)는 없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또 작자가 없다고 하여 윤회의 주체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권오민 교수에 따르면 업과 그 과보는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온이 멸하고 다른 온이 상속할 뿐이니, 일시 개념적으로 칭명된 자아는 예외로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합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로지 현재만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외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드러난 것만 의미가 있을 뿐 과거나 미래가 의미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 뿐이야라거나 이것 뿐이거든라며 이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대게 경전을 부정합니다. 논장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설령 경전을 인정하더라도 수행에 필요한 것 몇 가지와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인지 할 수 있는 경전 몇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합니다. 이는 가르침을 일부분만 수용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감각영역에 들어 오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당연히 윤회가 부정됩니다. 오로지 현존하는 것만 의미 있기 때문에 재생연결식도 부정되고 삼세양중인과도 부정됩니다.

 

아함경으로 중도체계를 말한 L교수가 있습니다. L교수는 논장을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아비달마불교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입니다. 아비달마불교가 부처님 근본가르침을 왜곡했다고 합니다. 이를 용수가 중론으로 바로 잡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대승불교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한편 즐겨 인용하는 말이 제일공의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그러나 바수반두는 이 경을 인용하여 아비달마구사론을 썼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L교수가 아비달마를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 됩니다.

 

L교수는 자신의 중도체계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아비담마논장을 비판합니다. 아마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따른 아비달마를 아비담마와 같은 반열에 올려 놓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의 아비담마는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따른 아비달마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L교수는 아비담마 논장에 실려 있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하여,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설정한 생물학적 윤회라고 비난합니다. 정말 아비담마에서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시간개념을 도입한 생물학적 윤회로 설명한 것일까요? 만일 L교수의 말이 참이라면 L교수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문외한이거나 아니면 아비담마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자입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생과 윤회를 부정합니다. 심지어 L교수는 유튜브 강연에서 천당에 갔다 온 사람 본 적이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믿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일체유심조로 설명합니다. 심지어 십이연기에서 명색(名色)’에 대하여 정신-물질이 아닌 이름-형태로 설명합니다. 색온조차 인식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자신의 생각대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강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을 종종 유튜브에서 봅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오로지 현재 존재하는 것만 이야기합니다. 이는 제일공의경에서 눈을 예로 들어 “눈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곳에서 오지 않았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 어떤 곳에 축적되기 위해 가지 않는다.” 라 하여 오로지 인식된 것만 의미 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오온의 무실체성을 설명한 것이긴 하지만 이를 잘못 활용하면 오로지 현존만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귀[]·코[]·혀[]·몸[]·뜻[]을 통해 지은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일의공경은 허무주의적 견해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은 무책임한 말입니다. 니까야에서는 단견으로서 허무주의적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서는 이 말이 제법실상을 잘 나타난 것이라 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공사상을 잘 표현 하는 말이라 합니다. 그런데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론이  단견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일까 속수법이라 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음으로..” 라 하여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붙여 놓았습니다.

 

제일공의경에서 속수법이라 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세속에서나 통용되는 가르침으로 폄하한 것이라 봅니다. 이는 진제와 속제로 구분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공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 진제이고, 십이연기로 설명한 것이 속제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니까야 그 어디에도 부처님이 진제와 속제로 구분하여 설명한 대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일의공경은 후대에 편집된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봅니다.

 

제일의공경은 한역 아함경에만 실려 있습니다. 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는지 불일치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에서는 오로지 불일치 개념으로만 사용됩니다. 불일치 되면 단견에 따른 허무적인 견해라고 니까야에서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의공경의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이유

 

니까야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에 대하여 명백하게 허무주의적 견해로 밝혀 놓았습니다. 물론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면 영원주의적 견해입니다. 그러나 두 견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니까야에서 ādito sato”라 하여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빠알리어가 들어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는 것과, 행위자와 경험자가 불일치 하는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가정한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17) 라 하며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합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의 허무주의를 논파 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 있는 태생학적 인과를 설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등으로 연기로 인과를 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태생학적, 생물학적 연기로 폄하하여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합니다. 교학에 대한 무지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으로 가르침을 폄훼 하는 자들의 수법이라 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에 대하여 허무주의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의공경에서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다.”라는 말은 허무적인 견해입니다. 비록 속수법이라 하여 십이연기가 따라 붙지만 이는 중도를 설명것이라기 보다는 ()’을 설명한 것입니다.

 

공병에 빠지면 본래 없다라거나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윤회는 없는 것이 됩니다. 윤회가 없다면 업과 내생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육사외도의 유물론에서도 확인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위자와 경험자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하여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숙명론과 운명론 등 부처님 당시 모든 사상을 논파하여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럼에도 행위자와 경험자의 불일치에 대하여 공의 논리로 설명한다면 공허한 것이 됩니다. 제일의공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은 분명히 단멸론적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2017-01-26

진흙속의연꽃






 

제일공경이 왜 단멸론적 견해인가? 작론(作論)을 설한 부처님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깨었습니다. TV를 켰더니 케이블채널에서 쇼생크 탈출(1994, The Shawshank Redemption)’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마침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장면이 보였습니다. 대사가 매우 인상 깊어서 글을 쓸 때 종종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인용하고 싶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대었으나 포착에 실패 했습니다. 기억나는 것을 스마트폰 메모에 쳐 두었습니다. 그 장면은 40년 수감생활을 한 흑인의 말입니다. 가석방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청문에서 흑인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해당 대사를 찾아 보니

 

다음 날 인터넷에서 해당 장면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유튜브에 영화 명대사 장면이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 된 장면이라서 우리말로 해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터넷에 쇼생크 탈출 명장면 명대사라는 키워드를 넣자 원하는 대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영문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 장면에 대한 영문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re's not a day goes by I don't feel regret. Not because I'm in here, because you think I should. I look back on the way I was then: a young, stupid kid who committed that terrible crime. I want to talk to him. I want to try to talk some sense to him, tell him the way things are. But I can't. That kid's long gone, and this old man is all that's left. I got to live with that.”

 

단하루도 내가 후회를 느끼지 않는 날이 없소. 내가 여기 있어서라거나 그래야 한다고 당신이 강요했기 때문은 아니오. 옛날의 나를 돌아보지. 젊고 바보 같은 녀석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야.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어. 지금 현실을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레드의 독백)

 

 

 

 

 

 

 

이것이 찾고자 하는 대사입니다. 40년을 복역중인 흑인 죄수 레드(Red)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레드는 마치 타인을 지칭하듯이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하여 그놈(him)’이라 합니다. 그놈은 젊고 바보 같은 녀석(a young, stupid kid)’이었습니다. 아마 스무살 안팍의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놈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로 인하여 40년을 복역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레드의 독백을 보면 인과의 엄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절 그놈과 현재의 레드는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대사를 보면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That kid's long gone, and this old man is all that's left)”라 한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에 대하여

 

영화속에서 젊은 시절 그놈은 오간데 없고 늙은 몸만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40년 전의 레드와 현재의 레드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So karoti s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 kata dukkha”nti iti vadasassata eta pareti.“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vedanāhitunnassa sato “parakata dukkha”nti iti vada ucched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행위자와 경험자에 대한 것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 하면 영원주의이고 다르게 보면 허무주의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행위자와 현재 경험자가 동일 하다고 보면 고정불변의 영혼을 가정하여 아뜨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르게 본다면 이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가 되어 고정불변한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에 떨어지고 만다.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에 떨어지고 만다.”(S12.17,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ādito sato’에 대하여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 번역했고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역자는 보디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초불연 상윳다2 123번각주, 각묵스님)라 각주했습니다.

 

빠알리어 ādito sato’에서 ādito’의 뜻은 ‘at first; from the beginning’의 의미입니다. 이는 처음을 가정한 것입니다. 하나의 원인을 가정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신이 있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작자)가 일치하면 영원주의(상견)이고, 반대로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면 허무주의(단견)입니다. 이는 양극단입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니

 

초불연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영역을 참고했다고 했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etemalism. But,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one,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s another,’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stricken by feeling: ‘Suffering is created by another.’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annihilationism.”(cdb.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을 보면 각묵스님번역과 스타일이 일치합니다. 빅쿠보디는 대괄호를 이용하여 ‘[if one thinks,]’라 했는데, 각묵스님도 똑같이 대괄호를 사용하여[괴로움을 상정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etemalism’이라 하여 영원주의로, annihilationism이라 하여 허무주의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이를 []’[]’이라 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달리 번역한 것이 차이날 뿐입니다.

 

빅쿠보디의 영원주의(etemalism) 각주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영역을 참고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는 초불연 각주에서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123번 각주)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 각주를 찾아 보았습니다. 영원주의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pk glosses ādito sato as ādimhi yeva, and explains it as meaning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It seems to me more likely that this phrase is part of the eternalist view itself and means “of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i.e., of a being that has always existed.

 

This interpretation can marshal support from the fact that the phrase is omitted just below in the corresponding restatement of the annihilationist view, which is otherwise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same logic and thus, if Spk were correct, should include ādito sato. Spk says “it should be brought in,” but the fact that the text replaces it by another phrase is strong evidence that it does not belong there; see n. 40.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n such a case the belief (laddhi) afterwards follows,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nd here, what is meant by suffering is the suffering of the round (vaṭṭadukkha).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eternalism, one grasps hold of eternalism. Why? Because that view of his amounts to this. Eternalism comes upon one who conceives the agent and the experiencer to be one and the same.

 

Spk-pt: Prior to the belief that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there are the distortions of perception and of mind (saññācittavipallāsā) in the notion,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and then a wrong adherence to these distortions develops, namely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a distortion of views, diṭṭhivipallāsā).

 

On the three levels of distortion with their four modes, see AN I1 52.

(cdb, 39번 각주, 빅쿠보디)

 

 

괴로움은 자신의 의해 만들어진다거나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영원주의를 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천주교에서 내 탓이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빅쿠보디는 각주 말미에 ‘see AN I1 52’라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A4.49)’입니다. 세 가지 전도에 대하여 네 가지 양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가지 전도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입니다. 네 가지 양상은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것, 실체 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라는 식으로 나머지 세 가지 양상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영원주의에 대하여 전도된 인식(diṭṭhivipallās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라 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인식을 말합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내 탓이요!”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빅쿠보디의 허무주의(annihilationism) 각주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요!”운동을 하 바 있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함으로 인한 영원주의적 관점입니다. 반면 누군가 네 탓이야!”라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일치 시키지 않는 단멸론에 입각한 허무주의적 관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In this passage the phrase ādito sato found in the preceding statement of eternalism is replaced by vedanābhitunnassa sato, which countermands Spk's proposal that ādito sato should be brought in here. Spk interprets the sentence as stating that the annihilationist view is held by one who experiences the feeling associated with the view, but I understand the point to be that the view is held with reference to one “stricken by feeling,” perhaps by painful feeling.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one,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s another,” in such a case afterwards there comes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another,” held by one stricken by-that is, pierced by-the feeling associated with the annihilationist view that arises thus: “The agent is annihilated right here, and someone else (‘another’) experiences (the results) of his deeds.”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annihilationism, one grasps hold of annihilationism. Why? Because the view one holds amounts to this. Annihilationism comes upon him.

(cdb, 40번 각주, 빅쿠보디)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타자에 의한 것이라면 네 탓이요!”가 됩니다. 주석에 따르면 괴로움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되어 버려 허무주의에 집착하게 됩니다.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른 자로 본다면, 경험자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타자에 의한 것으로 됩니다.

 

내 탓이요!” “네 탓이야!”

 

괴로움은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saya kata dukkha)”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parakata dukkha)”입니다. 전자는 내 탓이요!”가 되고, 후자는 네 탓이야!”가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견해는 극단적입니다. 전자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되어 영원주의적 견해가 되고, 후자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른 자가 되어 허무주의적 견해가 됩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쩰라 깟싸빠의 경따르면 부처님은 괴로움과 관련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하여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te te kassap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 avijjāpaccayā sakhārā)(S12.17)라 했습니다.

 

양극단은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 됩니다. 조건 발생하면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조건 소멸하면 영원주의가 논파 됩니다. 영원주의라는 극단과 허무주의라는 극단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괴로움을 겪는 자가 내 탓이요!”라고 해도 맞지 않고, 반면에 네 탓이야!”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할 뿐입니다.

 

중도와 중간

 

부처님은 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라 했습니다.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majjhena’입니다. 빠알리어 ‘majjhena’‘the middle’의 뜻입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중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초불연상윳따 2 108번 각주)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 중도와 중간으로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했을까요?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석서 문헌을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는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본경에서처럼 유무의 양극단의 중간이며 고락과 단상의 양극단의 중간으로 바른 견해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초불연상윳따 2 108번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은 ‘majjhena’를 중도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the middle)’입니다. 중도는 초전법륜경에서 등장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라며 중도가 팔정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도는 majjhimā paipadā’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유무중도나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에서 단상중도는 모두 ‘majjhena’로 되어 있고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팔정도를 설한 것과 대조됩니다. 이런 이유로 각묵스님은 중도는 팔정도를 말하고, 중은 양극단의 중간의 의미의 뜻이기 때문에 중간[]’으로 번역한다고 했습니다.

 

전재성님은 ‘majjhena’에 대하여 중도로 번역했습니다. 고락중도(S56.11)는 팔정도를 설하고 있지만. 유무중도(S12.15)와 단상중도(S12.17)에서는 십이연기를 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주장대로 중도는 팔정도이다라고 선언하면 중도는 오로지 고락중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모순입니다. 양극단은 모두 십이연기로 논파됩니다. 고락중도가 팔정도라고는 하지만,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이고, 사성제는 고와 고의 소멸이라는 연기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고락중도는 연기를 설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108번 각주)라 한다면 중도의 범위를 오로지 고락중도에 한정시켜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사성제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사성제를 확장하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됩니다. 부처님이 고와 락, 유와 무, ()과 단()이라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17)라 했을 때 이는 연기법을 말합니다.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고락, 유무, 상단이라는 양극단을 논파한 것입니다.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40년동안 복역하고 있는 흑인 레드는 젊은 시절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평생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행위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레드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 하듯이 젊고 바보 같은 녀석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야.”라 했습니다. 만일 그 상황으로 돌아 간다면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어.”라 합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말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 놈은 오로지 기억 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라 합니다.

 

영화속 대사를 보면 불교의 연기법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에게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했습니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럼에도 대승에서는 이를 부정합니다. 오로지 아함경에서만 보이는 제일공경에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제일공경이 왜 단멸론적 견해인가?

 

전남대 이중표교수는 강연에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다고 했습니다. 있다면 현재 행위하는 것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명사는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것으로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동사적인 행위만 의미 있을 뿐이라 합니다. ‘비가 온다고 했을 때 비가 와야 의미 있는 것이지 명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도 없고 도 없습니다. 오로지 단어로서만 존재합니다. ‘열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열반은 열반하다와 같이 동사로서만 의미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제일공경은 공()에 대한 교리를 설명해 놓은 경입니다. 오로지 대승경전 아함경에서만 볼 수 있고 빠알리니까야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는 단멸론적 견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문구는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서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 (S12.17)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견해에 대하여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공의 교리를 설명하는 제일공경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이는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이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라는 바수반두의 지론에 따른 것입니다.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명사로 된 것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반야심경에서와 같이 모두 무()자로 부정됩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난다’ ‘죽는다’ ‘열반한다는 있게 됩니다. 동사만 허용되고 명사는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현재만 인정되니 삼세양중인과가 부정됩니다. 당연이 윤회도 부정됩니다.

 

사건과 사건들로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40년을 복역한 흑인 레드는 마침내 가석방됩니다. 그러나 한정된 지역에서 살아야 합니다. 40년동안 복역해서일까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매니저에게 가도 좋은지 물어 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레드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것 보다 감옥이 더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으로 돌아 갈 궁리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범죄를 저질러야 합니다. 마침내 레드는 지역을 벗어납니다. 가석방 상태이기 때문에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수감됩니다. 탈출에 성공한 영화속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나갑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입니다. 내일은 오늘이 있기에 성립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지 선과 같은 시간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흑인 레드는 40년동안 복역한 것은 과거 젊은 시절 끔찍한 범죄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래서 젊고 바보 같은 녀석(a young, stupid kid)’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타자처럼 말하지만 동일인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동일인이 아닙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부처님은 작론자(kiriyavādin)

 

늘 현재를 살아 갑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나 미래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말한다면 단멸론적 견해가 되기 쉽습니다. 제일공경에서와 같이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하여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 하여 무작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명백히 단멸론입니다.

 

원인과 결과, 업과 업의 과보가 작용하지 않아 무작론(akiriyā-diṭṭhi)이라 합니다. 무작론은 해롭거나 유익한 업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숙작인설(pubbekatahetūvāda),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vāda),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무인론(ahetuavāda)입니다.

 

제일의 공경에 실려 있는 “유업보이무작자 (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도 역시 무작론입니다. 반면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설했기 때문에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in)’라 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작론을 설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괴로움에 대하여 내 탓이요!”라며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하면 영원주의 견해입니다. 또한 괴로움에 대하여 네 탓이야!”라며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르다고 본다면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양극단을 가지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합니다.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합니다.”(S12.17, 전재성님역)

 

 

2017-06-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