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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일단 향락하고 수행은 나중에 늙어서 한다 ?
범부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나보군요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妓女)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쳐다 봅니다. 꽃을 쳐다보기만 해도 욕망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쳐다보면 이미 갈애에 물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꽃을 자신의 것을 만들기 위해 꺽어가기도 합니다. 자신만이 볼 수 있도록 꽃병에 담아 놓고 감상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 보는 것도 욕망에 기인합니다. 자꾸 쳐다 보면 갈애가 생긴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꺽고 싶듯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갈애의 단계를 넘어 집착단계입니다.
성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식물에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인은 도를 이루어 과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성자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마치 꽃이 피면 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듯이, 여인은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을 꺽고자 합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Alaṅkatā suvasanā,
māladhārī vibhūsitā;
Alattakakatāpādā,
pādukāruyha vesikā.
“장식하고, 좋은 옷을 입고
화환을 두르고, 치장하고,
발에 붉은 염료를 바르고,
신발을 신은 기녀가 다가왔다.”(Thag.459)
Pādukā oruhitvāna,
purato pañjalīkatā;
Sā maṃ saṇhena mudunā,
mhitapubbaṃ abhāsatha
“그녀는 신발을 벗고
내 앞에서 합장하고,
나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먼저 미소지으며 말을 건넸다.” (Thag.460)
Yuvāsi tvaṃ pabbajito,
tiṭṭhāhi mama sāsane;
Bhuñja mānusake kāme,
ahaṃ vittaṃ dadāmi te;
Saccaṃ te paṭijānāmi,
aggiṃ vā te harāmahaṃ.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
이와 같은 게송은 대승경전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화엄경 입법계품에 기녀(妓女)가 등장합니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는 기녀에게 찾아가 배웁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성자가 기녀에게 배우는 일은 없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꺽고 싶듯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듯이, 기녀는 성자를 내버려 두지 않고 있습니다. 지족선사는 황인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했지만 테라가타에서 성자는 다릅니다.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妓女)
기녀는 성자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성자에게 접근하여 젊었을 때 즐기자고 말합니다. 더구나 전재산까지 주겠다고 말합니다.
율장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암바빨리는 하룻밤 화대가 오십금이었다고 합니다. 오십금이면 황소가 너댓마리 분량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암바빨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왕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할까 봐 모두의 소유로 하기 위하여 기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녀는 고급매춘부라 볼 수 있습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은 베쌀리의 암바빨리를 벤치 마킹하여 자국내에 공창을 두었습니다. 기녀를 두어 돈벌이 활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 기녀 중에 살라바띠는 하룻밤에 백금을 벌었다고 합니다. 암바빨리에 비하여 두 배나 많은 금액입니다.
기녀들은 미모도 아름다웠지만 돈도 많았습니다. 왕자 등 귀공자들만 상대한 기녀가 성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도와 과를 이룬 성자에게 아름다운 미모와 화려한 차림으로 유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꺽어 자신의 만이 보고 싶어 하듯이, 기녀가 도와 과를 이룬 성자를 꺽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의 신(aggi)에게 맹세하며
기녀는 성자를 유혹합니다. 왕자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왕자들은 하루 밤 화대로 오십금 또는 백금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주고서 기녀와 즐깁니다. 그러나 기녀는 정반대로 청정한 삶을 사는 성자에게 자신과 살면 그 동안 모은 전재산을 주겠다고 합니다. 또한 젊어서 출가했으니 더 늙기 전에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자고 유혹합니다. 여의치 않을 것 같자 “내가 불을 가져 오겠소”라며 불(aggi)에 대고 맹세하겠다고 합니다.
기녀는 불에 맹세하겠다고 합니다. 기녀는 모든 남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돈만주면 언제든지 싫으면 떠날 수 있습니다.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의 입장에서 성자를 꺽기가 쉽지 않은 듯합니다. 말로서는 안되니 불을 앞에 놓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자 합니다. 게송에서 불의 의미는 “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라고 내가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킨다. 만약에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불을 가져와 불(火神)에 대고 맹세하겠다.”(1844번 각주) 라는 의미입니다.
성자를 유혹하여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파계한 성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출세간적 삶을 살게 된다면 복밭으로서 성자의 대우를 받지만, 계를 파하여 세속에서 살면 지위가 낮은 하층 생활인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에게 기녀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산을 주겠다고 불의 신에게 맹세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 둘이서 출가하면
고급매춘부라 볼 수 있는 기녀는 왕자 등 수 많은 남자들과 상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루밤 화대를 받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녀가 성자를 유혹하여 함께 살고자 한다면 더 이상 기녀로서의 직업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녀는 화신에게 맹세하고자 합니다. 기녀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Yadā jiṇṇā bhavissāma,
ubho daṇḍaparāyanā;
Ubhopi pabbajissāma,
ubhayattha kaṭaggaho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Thag.461)
기녀는 성자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평생 먹고 살 재산도 있으니 늙을 때까지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함께 살자고 합니다. 수행은 늙어서 해도 늦지 않다고 합니다. 더구나 둘이서 함께 출가하자고 합니다. 이 젊음을 최대한 즐기고 나이 들어 힘이 빠져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함께 출가하자고 합니다.
기녀는 둘이서 함께 출가했을 때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ubhayattha kaṭaggaho)”라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팡이에 의지할 때까지 즐기면, 이 세상에서도 환락을 잃지 않고, 나중에 출가하면, 저 세상에서도 환락을 잃지 않을 것이다.”(1846번 각주)라는 뜻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꿩 먹고 알 먹고’‘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라는 것입니다.
젊음은 즐겨야 한다?
수행자를 유혹하는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수행자를 유혹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은 늙어 콜록거리는 비참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수행승이여, 그대는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1.20) 라고 말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대부분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특히 젊음은 즐겨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요 중에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가사가 있듯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젊을 때 놀고 젊을 때 즐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어서 출가한 자들에 대하여 측은하게 바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입니다. 수행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
젊은 수행승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은 바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배운대로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승은 늙은 성직자로 변신한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수행승을 보면 측은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미남형의 잘생긴 수행승을 보면 어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 염려아닌 염려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출가한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인하여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초기경전에 따르면 출가자를 유혹하는 장면은 대개 비슷합니다. 그것은 젊었을 때는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 나이 들어 출가해도 늦지 않음을 말합니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에 따르면 여러 부인을 둔 랏타빨라가 출가하려 할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우리는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M82)
랏타빨라의 어머니는 출가를 반대했습니다. 여러 명의 부인까지 두고 있는 입장에서 더구나 가업을 이어가야 할 가장이 출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재가자라로서 공덕 짓고 살아도 훌륭한 삶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쾌락도 마음껏 즐기고 동시에 공덕도 많이 지으라고 합니다.
노년출가의 어려움
테라가타에서 기녀는 노년출가를 이야기합니다. 늙어서 더 이상 욕망을 즐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둘이서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공덕도 쌓고, 늙어서 지팡이 짚을 나이가 되면 그 때 함께 출가해도 늦지 않음을 말합니다.
노년에도 출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일을 다 해 마친 자가 노년에 출가하여 새로운 인생을 산다면 인생을 두 번 살게 되어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바라문 인생사주기 같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노년출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총명을 얻기가 어렵다. 위의를 갖추기가 어렵다. 박학하기가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하기가 어렵다.”(A5.59)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A5.60)
앙굿따라니까야에는 두 개의 노년 출가가 어려움에 대한 경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지팡이에 의지하는 자가 출가 했을 때 앉아 있기도 힘들 것입니다. 힘이 없으니 수행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팡이 짚고 구부정한 모습은 위의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랜 재가의 생활로 인하여 계율을 지키기도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이 들어 노년에 출가하면 출가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기녀가 애원했을 때
기녀는 성자에게 함께 살자고 하면서 노년에 출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출가하면 힘이 없어서 도와 과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수행해야 출가목적을 달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성자는 기녀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Tañca disvāna yācantiṃ,
vesikaṃ pañjalīkataṃ;
Alaṅkataṃ suvasanaṃ,
maccupāsaṃva oḍḍitaṃ.
“기녀가 합장하여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
장식하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Thag.463)
기녀는 같이 살자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수행승이라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옷을 입은 기녀를 보자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라 했습니다. 성자는 기녀의 하려한 옷이 자신을 옭아 매어 꼼짝 할 수 없게 만드는 올가미로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기녀에게서 위험을 본 것입니다.
“아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테라가타에서는 여인에게서 위험을 본다는 게송이 다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가까이 있지 않은 것이 최상이다.”(Thag.34)라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여성은 가까이 다가와서 현세와 미래에서 해탈의 의취를 망가뜨리고 큰 불이익을 낳는다. 그래서 사나운 코끼리, 말, 황소, 사자, 호랑이, 야차, 나찰처럼, 여성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최고이고, 최상이고, 불익을 가져 오지 않는다.”(ThagA.I.103) 라 했습니다. 테라가타에는 이런 게송도 있습니다.
“은장식으로 치장하고
시녀들의 무리의 시중을 받으며
허리에 아이를 업고
아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Thag.299)
“그것을 보니, 가까이 다가오는
내 아이의 엄마
치장하고 잘 차려 입었으나,
죽음의 왕의 족쇄에 잡힌 것과 같다.”(Thag.300)
전처가 아이를 업고 다가 온 것에 대하여 죽음의 왕 족쇄에 잡힌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Dhp.345)와 같은 맥락입니다.
“엄청나게 고생하더라구요”
수행승은 기녀가 눈물로 애원했다면 넘어 갔을지 모릅니다. 앙굿따라니까에서 “ 여자는 울음으로 남자를 묶는다.”(A8.17) 라 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자 역시 남자의 눈물에 약합니다. 만일 수행승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 갔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또는 수행승이 여자에게 반하여 파계했다면 어떤 삶을 살까요? 현웅스님의 일요법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르면 호기심이 가고 좋게 뵈요. 결혼안하고 들어 오면 세상사람이 참말로 좋은 것 같아요. 특히 여자들. 남자스님들이. 그러면 발심이 안되겠지요. .. 관계가 되면 복잡해지거든요… 스님들은 승복을 입고 머리깍고 계를 받아 놓으면.. 이중적인 압박감이 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잘못하면 세상인연으로 나가서 고생엄청나게 하더라구요. 중하다가 여자 만나서 나가 산데 가서 보면 스님들이 사회사람보다 훨씬 더 고생해요. 왜냐하면 부처님을 배워서 이상이 높은데 현실에 가서 안통하는 사람들과 적응하며 살려고 하는데 괴롭거든요. 일부러 가보거든요. 그러면 죽을려고해요 죽을려고해. 또 친구를 못사귀어. 그러니까 이중적인 방황을 해요. (2017년 4월 30일 發心에 대하여)
스님으로 살다가 여인과 눈이 맞아 산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스님으로 살 때는 대접받았을지 모르지만 환속하여 세상 속에 살 때 별 볼일 없음을 말합니다. 특별한 직업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자가 힘겹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나게 고생하더라구요”라 했습니다.
영화 삼사라 (samsara)에서
영화 ‘삼사라 (samsara, 2001)’를 보면 파계한 스님의 환속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 선정수행자가 여인의 모습에 반하여 계를 파하고 세상속에서 살아 갑니다. 그러나 세속에서 삶을 보면 세상사람들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수행만 하다가 세상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살지만 사회적 지위는 낮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영화속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하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사람을 속이는 행위도 서슴지 않습니다. 오계를 어기며 거의 ‘잡놈’처럼 살아갑니다.
스님으로 살다가 환속하면 무능력자가 되기 쉽습니다. 별다른 능력이 없다면 낮은 지위로 살아 가야 합니다. 더구나 아내와 자식이 있다면 부양의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도 없고 지위도 없는 환속자가 세상 살아가기가 무척 힘겨운 것입니다. 영화 삼사라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기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녀는 성자를 유혹하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기녀가 많은 재산을 준다고 화신에게 맹세했으나 넘어 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자는 마침내 기녀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성자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64)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465)
성자는 위험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만일 기녀의 유혹에 넘어 갔다면 자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녀가 불의 신에게 재산을 주겠다고 맹세했지만 여러 남자들을 겪은 기녀가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릅니다. 또한 자식을 낳고 살았을 때 족쇄가 될 것입니다. 이런 위험성을 본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초기경전을 보면 젊은 수행승이 감각적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기녀나 악마들은 이런 욕망을 부추깁니다. 세상사람들이 살아 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사는 수행자들에게는 위험한 일입니다. 또 다시 재생하는 삶, 윤회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나이 어려서 출가한 자들은 이전 생의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즐기기에 바쁘고 인습과 관습에 따라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따라갑니다. 다만 재가자의 삶을 살되 공덕짓는 삶을 살아갑니다. 공덕 지으면 천상에 태어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 가는 성자들은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여깁니다. 이번 생에서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면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발판을 마련해 놓고자 합니다.
젊어서 출가한 자들은 이전 생에서 수행공덕을 쌓은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의식의 주체의 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어떤 비참한 존재들처럼, 신체의 다양성을 지니고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A7.44)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욕계에 속한 존재들의 다양성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지각의 다양성이라 했는데 이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3가지 원인 있는 유익한 업’과 관련 있습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3가지 원인 있는 유익한 업은 무탐, 무진, 무치를 말하며, 이러한 3가지 원인 있는 유익한 업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통찰지를 계발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전생에 수행한 과보가 공덕으로 현생에 공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전 생에서 발판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입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S1.20)’에 따르면 하늘사람이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고 나서 걸식하시오.”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 재가의 삶을 살며 공덕 쌓다가 늙어서 출가해도 늦지 않음을 말합니다. 앞서 언급한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과 병행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수행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Kālaṃ vo'haṃ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ṃ kālo upaccagāti.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게송에서 시절(kāla)이 두 번 나옵니다. 주석에 따르면 하늘사람이 말한 시절은 ‘청춘의 시절(yobbnakāla)’에 대한 것이고, 싸밋디존자가 말하는 시절은 ‘죽음의 시간(maraṇakāla)’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사람이나 악마나 기녀나 일반사람들은 모두 청춘을 즐기자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은 수행승에게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고 나서 걸식하시오.”라며 노년출가를 권유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는 수행승은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Kālaṃ vo'haṃ na jānāmi) ”라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은 어느 번역서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석에서 싸밋디가 말한 시절은 ‘죽음의 시간(maraṇakāla)’이라 한 것에서 단서를 잡을 수 있습니다.
수행승이 말한 시절은 죽음의 시간입니다. 수행승은 죽음의 시간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시간에 대하여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라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살아 갑니다. 이 젊음이 천년 만년 될 것처럼 여기고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또 하나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은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건강하게 젊게 살아 있다고 하여 이런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기대수명이 90세, 100세가 된다고 해도 말그대로 기대수명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90세, 100세 까지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니 당장 한시간 앞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는데, 오로지 즐기는 삶만을 살았는데 지금 죽음이 닥쳤다면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라며 후회할 것입니다.
기녀는 젊었을 때 향락을 누리며 살다가 나이 들어 출가해도 늦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악마도, 하늘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만일 지금 이순간에 죽음이 닥친다면 어느 누가 반갑게 맞이 할 수 있을까요? 즐기는 삶을 살며 악하고 불건전한 일만 저지른 자가 지금 이순간 죽음에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법문의 경’에 따르면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라 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지금 이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자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 했을 때 틀림 없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합니다.
늘 깨어 있을 때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4.37)라 했습니다. 늘 깨어 있다면 계행은 저절로 지켜 질 것입니다. 늘 깨어 있을 때 죽음이 온다고 해도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수행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반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 아디뭇따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Pāragū anupādāno,
katakicco anāsavo;
Tuṭṭho āyukkhayā hoti,
mutto āghātanā yathā.
“피안에 이르고, 집착을 여의고,
할 일을 다 해 마치고, 번뇌를 여읜 님은
형장에서 풀려난 것처럼,
목숨이 다한 것을 기뻐한다.”(Thag.711)
2017-06-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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