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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참고.
불선법(不善法)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성질대로 산다면
남한테 비난이나 비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비판을 받아도 마음이 불편한데 비난이나 비방을 받으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대게 맞대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 그 때문에 더욱 악해지리 .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 라 하여 화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 이를 참지 말고 발산하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홧병’ 같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나는데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 이야기 입니다. 만일 이세상에서 자신의 성질대로 산다면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빠라맛타담마(paramatthadhamma)
화가 날 때 화내는 그 마음을 보라고 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를 내서 해소 하는 것이 아니라 화내는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법(法)’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담마(dhamma)입니다. 담마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빠라맛타담마(paramatthadhamma), 즉 궁극적 실재로서 담마를 말합니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82법 중의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인 성냄(dosa)입니다.
성냄은 해로운 마음부수 14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해로운 마음부스를 나열해 보면 어리석음, 양심없음, 수치심없음. 들뜸, 탐욕, 사견, 자만, 성냄, 질투, 인색, 후회, 해태, 혼침, 의심 이렇게 14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해로운 법은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징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냄이나 탐욕 등 해로운 마음이 일어 났을 때 법이 보입니다. 그래서 “아, 나에게 성냄이 일어났구나” “아, 나에게 탐욕이 일어났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알아차리면 더 이상 성냄이나 탐욕으로 전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는 자들은 대개 휩쓸려 가게 됩니다.
빠라맛따담마에는 해로운 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띠, 양심, 수치심 등 아름다운 마음부수들도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모두 25가지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법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서 선법 보다는 불선법이 더 알아 차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믿음(saddha)이 일어 났을 때 “아, 나에게 믿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기 보다는, 후회(kukucca)가 일어났을 때 “아, 나에게 후회가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가 나에 대하여 비난하고 욕하고 비방했을 때 불선법이 일어난다면 법을 알아차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봅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사람들 대부분은 탐욕으로 성냄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이라 합니다.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은 강력한 자아를 바탕으로 합니다. 화를 내도 내가 화를 내는 것이고 욕심을 부려도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개념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근 원담스님은 자아개념에 대하여 이런 글을 카페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我)라는 주어를 넣어서 사고하고 있다. 맞았다고 하자. 그것은 ‘나를 때렸다.’거나, ‘내가 맞았다.’이다. 아프다. 그것은 ‘내가 아프다.’인 것이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보인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본다.’이다. ‘들린다.’가 아니고 ‘내가 듣고 있다.’이다.
이와 같이 편의상 ‘나’라는 주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맞은 것도 사실이고 아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간단히 ‘나’라는 주어가 끼어든다. 불교는 ‘신체에 어떤 단단한 대상(물체)이 닿았다. 아픔이라는 감각이 생겨났다.’는 것이 된다. 원인이 있어서 아픔이 생겼던 것이다. 그 원인이 없어지면 아픔도 사라진다. 그 와 같이 분석하여 ‘자아’는 편의상의 개념으로 실체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세상의 지식으로 ‘아픔이란 무엇인가?’라고 분석하자. 예를 들면 얼굴을 얻어맞으면 얼굴에 굉장한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 때의 전기신호가 뇌로 가고, 뇌가 그것을 판단한다. ‘아, 이것은 피하는 쪽이 좋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 이 감각을 <아픔>으로 하자.’라는 식이 되고, ‘아픔’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장소를 맞아도 그다지 압력이 강하지 않다면 ‘그럼, 이것은 <기분이 좋다.>라는 식으로 하자’라고 결정할 것이다. 얼굴에 압력이 가해질 때마다 아프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가 성을 내어 때린 것이라면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고 결정해 버리고, 지극한 애정을 갖고 애정의 표현으로서 딱 하고 때렸다면 아파도 전연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픔>은 존재하는 것인가?’라고 묻고도 싶어진다. 같은 장소에 같은 힘으로 때려도 그 때, 그 때의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의 여러 조건에 의해서 ‘아픔’으로 할까, ‘기분 좋았다.’로 할까,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까지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앗, 맞았다. <나>는 아팠다.’라고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고 만다. ‘<나>는 아팠다.’라는 것은 본인에게는 실체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그 ‘나·眞我(진아)’를 찾는다.
(원담스님, 我의 개념이 생겨나는 구조, 2017-07-31)
자아 개념이 생겨나는 구조에 대하여 접촉으로 보고 있습니다. 접촉이 없으면 어떤 생각이나 망상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을 조건으로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서,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접촉인데,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M148) 라 했습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나서 세상이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상을 아는 그놈을 상정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놈, 그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놈에 대하여 진짜 나, 또는 참나, 진아라 하며 “나는 누구인가?”라며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지며 탐구합니다.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 분노의 감정이 절정입니다. 분노가 온통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 나는 분노와 동일체가 됩니다. 내가 분노이고 분노가 곧 나가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한숨 푹자고 났을 때 분노의 감정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그토록 분노했던 나의 마음은 진짜 나의 마음이었을까요?
분노는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 대하여 비난했을 때, 더구나 공개적인 망신을 주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을 때 분노의 감정은 사그라집니다.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합니다. 그럼에도 분노를 자신의 마음으로 알아 분노했다면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아는 자라면 이렇게 관조할 것입니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상윳따니까야 ‘나꿀라삐따의 경(S22.1)’에서 사리뿟따존자가 나꿀리삐따 장자에게 한 말입니다. 오온을 자아로 여기고 있는 한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헤어 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나의 몸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나의 몸이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면 슬플 것입니다. 만일 정말 우리 몸이 나의 몸이라면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을 보면 몸이 나의 몸인 것 같지만 통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몸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몸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유신견(有身見)’이라 합니다. 유신견 정형구는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M44) 입니다. 물질을 예로 든 것입니다. 모두 네 가지 유신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자아로 여기고, 우리 몸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우리 몸이 있다고 여기고, 우리 몸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우리 몸과 자아를 동일시 한다면 얼굴에 뽀드락지 하나만 나도 안절부절합니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얼굴을 자아라 여길 것입니다. 팔 다리를 잃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 하여 삶을 포기할 줄 모릅니다.
유신견 정형구는 물질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온에 대하여 네 가지 경우의 수를 대입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됩니다. 20가지 유신견은 접촉에 따른 망상으로 보는 영원주의 허무주의 등 62가지 견해와 함께 버려야 할 대표적인 사견입니다.
분노를 자아와 동일시 하면
지금 화가 났을 때 유신견 정형구에 대입하면 이렇게 됩니다.“그는 분노를 자아로 여기고, 분노를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분노가 있다고 여기고, 분노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가 됩니다. 분노와 자아를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도 ‘내가 화를 낸다’가 됩니다.
분노를 자아를 동일시 하면 분노를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분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대상이 바뀌면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여 살인한다면 그 분노에 지배된 것이 됩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죄에 대한 엄청난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분노가 나의 분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노를 나와 동일시했을 때 사고납니다. 사고 나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후회 해 보았자 소용없습니다.
교도소에 장기 복역하고 있는 자들 역시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격분해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분노는 온데 간데 없고 지은 행위만 남아 있습니다. 분노에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꿀리삐따의 경에 실려 있는 정형구에 분노를 집어 넣으면 이렇게 됩니다.
“분노를 자아로 여기거나, 분노를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분노가 있다고 여기거나, 분노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분노이고 분노는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분노이고 분노눈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분노는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분노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라고.
여기에서 분노 대신 욕망, 질투 등 14가지 불선법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불선법이 일어날 때 불선법대로 행위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일어 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조건이 사라지면 불선법 역시 사라질 것이라 아는 것입니다. 욕망, 분노, 질투, 의심 등 온갖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법을 보기 좋은 기회입니다.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부처님은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여섯 감역에서 접촉이 일어났을 때 세상이 생겨나고, 접촉이 사라졌을 때 세상이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변치 않는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은 망상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는 이것이다”라고 여긴다면 ‘망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군가 ‘시각이 자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각의 생성과 소멸이 시설된다. 그 생성과 소멸이 시설되기 때문에, ‘나의 자아가 생성되고 소멸된다.’라는 생각이 그에게 따라온다. 그러므로 누군가 ‘시각이 자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시각은 자아가 아니다.”(M148) 라 했습니다.
불선법이 일어나면 불선법에 끌려 간다면 유아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불선법을 관찰하는 자는 무아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입니다. 무아론 적 사고방식을 가졌을 때 이 세상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화가 나면 “아, 나에게 화가 일어났구나”라고 알면 그뿐입니다. 여기서 나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관습적 표현입니다.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의 단계로 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2017-08-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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