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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이 천상보다 나은가?

우공(友空) 2017. 8. 8. 09:25



http://blog.daum.net/bolee591/16157953


 

왜 인간이 천상보다 나은가?

 

 

바람이 붑니다. 어제 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는데 오늘은 바람이 붑니다. 비보다 바람입니다. 바람이 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태풍의 영향일 것입니다. 새로 형성된 태풍이 우리나라를 비켜 가기는 했어도 간접 영향권에 들어서일 것입니다.

 

폭염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무엇 보다 괴로운 것은 잠자는 것입니다. 밤에 기온이 떨어지지 않고 25도 이상 유지 했을 때 괴로운 밤이 됩니다. 그저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럴 때는 숲이나 계곡, 산중에서 사는 삶이 부럽습니다. 한증막과 같은 무더위도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날씨가 매일 바뀌는 것처럼, 조건이 다하면 찬바람이 불 것입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열대의 밤을 보냅니다. 도심에서 열대야는 괴롭기 그지 없습니다. 찬바람이 분다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열대의 밤은 찾아 올 것입니다. 앞으로 열대야가 점점 많아진다고 하니 살아 가야 할 날이 많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넘어야 할 산입니다.

 

환희동산(nandana: 歡喜園)

 

더위도 추위도 없는 이상향이 있습니다. 늘 봄이나 가을 같은 쾌적한 날씨입니다. 꽃이 피고 바람은 살랑이는 곳입니다. 괴로움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곳, 그곳은 환희동산입니다. 상윳따니까야 환희의 경에서는 환희동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영예로운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S1.11)

 

 

환희동산(nandana)은 욕계천상에 있습니다. 삼십삼천(tāvatisa)에 있는 동산입니다. 경에 따르면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여 갖가지를 구족하고 즐기면서”(S1.11)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요정은 앗차라(accharā)라 하는데 천녀를 말합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압사라라 하는데, 앙코르왓트에 압사라춤을 추는 천녀들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가락과 손목, 팔을 구부리는 동작으로 춤추는 것이 특징입니다.

 

 

apsara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에서는 압사라 춤을 추는 천녀의 시중을 받으면 오욕락을 즐긴다고 했습니다. 오욕락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로서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을 말합니다. 천녀와 함께 오감으로 온갖 욕망을 즐기는 곳이 환희동산(歡喜園)입니다.

 

욕망이 극대화 된 곳이 욕계천상입니다. 화락천의 경우 무엇이든지 원하면 즉시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즐거움을 원하면, 그 즐거움을 즉시 얻을 수 있습니다.”(A8.4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삼십삼천에는 환희동산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괴로움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곳, 환희동산은 누구나 꿈꾸는 곳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기에는 부적절한 곳입니다.

 

왜 인간이 천상보다 나은가?

 

어느 종교이든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도 재가자들이나 초심자들에게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남을 강조합니다. 다름 아닌 천상에서 행복입니다. 그런데 천상이 반드시 인간보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천상의 장점도 있지만 인간의 장점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측면의 경에 따르면 천상이 인간보다 나은 점에 대하여 하늘의 수명을 지닌 것, 하늘의 용모를 지닌 것, 하늘의 행복을 지닌 것”(A9.21)이라 합니다. 수명, 용모, 행복에 관한한 천상입니다. 천상에서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도표에 따르면 인간의 수명은 미정이지만 천상의 경우 계층별로 수명이 명기 되어 있습니다. 수명대로 산다는 것이 천상의 가장 큰 장점일 것입니다. 또한 용모와 행복에 있어서 인간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은 늘 즐거움만 있는 곳입니다. 반면 인간이 천상 보다 더 나은 장점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잠부디빠의 인간들은 웃따라꾸르 인간들과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을 능가한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용기가 있는 것, 새김이 있는 것,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잠부디빠의 인간들은 웃따라꾸르 인간들과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을 능가한다.”(A9.21)

 

 

인간이 삼십삼천 보다 더 능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가 있는 것(surā), 새김이 있는 것(satimanta), 청정한 삶을 사는 것(brahmacariyavāso)이라 했습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에서는 수명, 용모, 행복이 가장 큰 장점이지만 인간의 경우 용기, 사띠, 청정한 삶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신들은 오로지 즐거움만 있기 때문에 새김이 강력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지옥의 뭇삶들은 오로지 괴로움만 있기 때문에 새김이 강력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만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 있기 때문에 새김이 강력하게 발달한다.”(Mrp.III.188)

 

 

키워드는 사띠입니다. 인간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조건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적절하게 섞여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지옥에서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 합니다.

 

환희동산에서 앗차라, 천녀의 시중을 들며 오욕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감각적 쾌락의 재난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서는 희로애락이 있어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번갈아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오래 지속되지 않아 괴로움을 겪습니다. 또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움도 커져 갑니다. 욕망으로 사는 한 욕망이 삶의 장애가 되어 재난이 되어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괴로움을 알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살아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오로지 행복만 있는 천상과 다른 점입니다.

 

괴로움을 모른다면

 

천상에서는 오로지 즐거움만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사성제를 알 수 없습니다.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천상에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입니다. 키워드는 괴로움입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에서는 깨달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지옥에서는 괴로움 그 자체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괴로움만 있고 즐거움이 없다면 오로지 괴로움만 있게 되어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아야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가능합니다.

 

깨달음의 최적 조건이 인간입니다. 잠부디빠(인간)에서 부처와 벽지불이 태어납니다. 부처가 출현 하는 곳에 팔정도가 있습니다. 팔정도가 있어서 청정범행을 닦습니다. 부처가 출현하는 인간에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가 있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있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용기가 있는 것(surā), 새김이 있는 것(satimanta), 청정한 삶을 사는 것(brahmacariyavāso)이라 했을 것입니다.

 

삼십삼천에 화생한 빅쿠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곳이 천상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자라면 천상의 삶을 꿈 꿀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는 곳을 천상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벌 때는 천한 일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탈법을 불사하며 돈을 모아 천상처럼 즐기는 삶을 사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있어서 욕계천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곳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요정의 경을 보면, 하늘사람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S1.46)

 

 

또 요정(accharā)이 등장합니다. 앙코르왓트 부조에서 손가락과 손목을 이용하여 춤을 추는 압사라입니다. 환희의 경에서는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여 갖가지를 구족하고 즐기면서”(S1.11)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라며 벗어나고자 합니다. 더구나 환희동산에 대하여 무명의 숲이라 하는가 하면 천녀들에 대하여 유령들(pisāca)이라 합니다.

 

삼십삼천 환희동산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루 빨리 벗아나고자 하는 하늘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살아 있을 때 수행승이었던 한 하늘사람의 아들에게 첫 번째 시가 귀속된다. 그는 잠자는 것이나 먹는 것을 무시하고 고행을 닦다가 풍병을 만나 갑자기 죽게 되어 도리천에 태어나 새로운 거처가 될 천궁의 문 앞에서 깨어났다. 하늘나라의 정원에 사는 요정들이 음악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그는 전생의 승려생활을 기억하며 천상의 즐거움을 실망하고 무시한다. 요정들에 둘러싸여 그는 부처님께 이 윤회하는 존재의 숲[무지의 숲]에서 벗어나는 길을 묻는 것이다. 유령들은 악마적 존재이지만 여기서는 요정들과 동의어로 쓰인 것이다.”(Srp.I.85, 368번 각주, 전재성님)

 

 

하늘사람은 수행자였습니다. 풍병으로 갑잡스럽게 죽었을 때 삼십삼천에 재생했습니다. 죽자마자 곧바로 태어났으므로 화생한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천녀들입니다. 환희동산의 앗차라입니다. 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오욕락을 즐기는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수행승이었던 하늘사람은 이런 환대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위하여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을 무시하며 고행을 해 왔는데 고작 환희동산에서 즐기려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행승은 자신이 천신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풍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욕계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런 것은 전혀 바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행승은 아라한이 되고자 고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작스럽게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죽었는지 조차 모르고 자신이 여전히 빅쿠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극단을 벗어나

 

지금 여기 천상과도 같은 삶을 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천상이 부럽지 않은 삶입니다. 대개 즐기는 삶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즐기는 삶만 있다면 즐거움에 빠져 살기 때문에 깨어 있지 않은 삶이 되기 쉽습니다. 지금 여기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린다든가 법정다툼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움이 더 많습니다. 역시 깨어 있지 않은 삶이 되기 쉽습니다.

 

천상은 오로지 즐거움만 있고, 지옥은 오로지 괴로움만 있어서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양극단에서는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양극단을 벗어나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는 삶에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양극단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 라 했습니다. 이른바 고락중도(苦樂中道)’입니다.

 

고와 락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삶이 인간의 삶입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기 때문에 오욕락에 대하여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 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겨지네.”(S35.136)라는 통찰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 라 합니다.

 

부처님의 법과 율이 있어서

 

청정한 삶을 살기에는 천상보다 인간이 유리합니다. 이는 부처님도 인정한 것입니다. 이띠붓따까 징조의 경에 따르면 어떤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곳은 어떤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천신들이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천신들이 안착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It76)라고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수행승이여, 인간으로 있으면서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믿음을 성취한다면, 그것이 천신들의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믿음을 확립하여 뿌리가 생겨나 확립되어 수행자나 성직자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계의 어떠한 자에 의해서도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천신들의 안착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It76)

 

 

천신은 수명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죽기전에 징조가 있습니다. 이를 천신의 징조라 하는데 경에 따르면 그의 화환이 시들고, 그의 의복이 바래고, 그의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르고, 그의 몸이 추악해지고, 자신의 하늘보좌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It76)라 되어 있습니다.

 

천신이 수명과 공덕이 다 하면 윤회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다시 천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락만 누렸을 뿐 새로운 공덕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악처이기 쉽습니다. 이전에 지은 악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업공덕은 다 찾아 먹어 버려 남은 것이 없고 남은 악업이 과보로 나타난다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천신은 죽음에 임박하여 가장 태어나고 싶어 하는 곳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믿음을 성취라 했습니다. 인간세상에서만 부처와 벽지불이 출현하고 인간세상에서 깨달은 자가 출현합니다. 깨달은 자가 출현한다는 것은 팔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락중도로 실현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상태가 가장 좋은 곳이라 했습니다.

 

 

천신이 목숨을 다하여

천신의 몸에서 죽을 때에,

천신들은 그 천신을

세 가지 말로 고무한다.

 

존자여, 여기서 가라.

인간의 동료가 되어 좋은 곳으로,

인간이 되어 올바른 법에

위없는 믿음을 성취하라.

 

믿음이 정착되고

뿌리가 생겨나 안착되면

목숨이 다하도록

잘 설해진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다.

 

신체적 악행을 버리고

언어적 악행을 버리고

정신적 악행을 버리고,

다른 악의와 관계된 것을 버린다.

 

신체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행하고

언어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행하고

정신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행하고,

실로 취착을 여읜 무량한 것을 행한다.

 

그래서 보시로써, 생의 의취로 이끄는

공덕을 많이 쌓아서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가르침에 입각한

청정한 삶에 들게 하라.

 

천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 때에,

천신들은 이러한 연민을 통해서

항상 기쁘게 맞이한다.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라고.”(It76)

 

 

2017-08-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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