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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와 고소멸(苦消滅)에 대하여
“부처님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말씀 하셨지 그 밖에 것에 대해서는 말씀 하지 않으셨다.” 흔히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말은 타당합니다. 그렇다고 내세와 윤회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고와 고소멸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초전법륜경(S56.11)을 들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고와 고의 원인, 고의 소멸,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성제입니다. 코끼리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섭하듯이, 사성제의 가르침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합니다.
사성제에서는 고와 고소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반이 보이지 않습니다. 멸성제에 대한 것을 보면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S56.11)라 했습니다. 해탈(mutti) 입니다. 여기서 해탈은 열반과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닦으면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S56.11)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여열반의 경우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고디까의 경’을 보면 죽음의 신이라 볼 수 있는 악마 빠삐만이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S4.23) 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Appatiṭṭhitena ca bhikkhave viññāṇena godhiko kulaputto parinibbutoti)” (S4.23) 라 했습니다. 여기서 의식(viññāna)은 결생식, 즉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어야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마음이 없으니 세상을 인식할 수 없어서 세상이 생겨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Sn5.2)’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식이 소멸(Viññāṇassa nirodhena)하면 명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반입니다. 의식(Viññāṇa)이 소멸 되면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상태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열반에 대한 언표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고소멸은 다름 아닌 열반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열반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무위의 모음(asaṅkhata saṃyutta, S43)’에서는 부정적 언표와 긍정적 언표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열반을 무위로 묘사 했을 때, 무위는 모든 조건 지어진 상태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이 밖에 열반에 대한 부정적 언표로서, 무루, 불로, 무견, 무희론, 무재난, 무재난의 상태, 무애, 이탐, 불사가 있습니다. 긍정적 언표로서는 궁극, 진리, 피안, 극묘, 극난지, 견고함, 조견, 적정, 승묘, 지복, 안온. 희유, 미증유, 청정, 해탈, 섬, 동굴, 피난처, 귀의처, 구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발생과 괴로움의 발생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다양한 언표로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 주로 말씀 하신 것은 열반을 실체화 하는 것에 대한 경계라 합니다. ‘열반이 섬이다’라거나, ‘열반이 피안이다’라고 했을 때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종착지가 ‘있다’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는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하여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 라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면 접촉이 일어나는데 이때 느낌이 발생합니다. 느낌을 분별하면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습니다. 이런 분별의식이 생겨남으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리도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일어나는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합니다. 삼사화합에 따른 느낌의 발생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괴로움의 발생이 세상의 발생이고, 세상의 발생이 괴로움입니다.
접촉이 없다면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리는 시각과 형상과 시각의식에 따른 삼사화합이라 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능력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S12.24)라 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이교도들에게 한말입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한말입니다. 이런 이교도들에게 부처님은 “벗들이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괴로움을 경험할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S12.24)
부처님은 괴로움은 접촉에 따른 것이라 했습니다.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접촉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 합니다. 만일 접촉이 없다면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해 설했습니다.
고와 고소멸 근거의 경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고와 고소멸에 대해 설했습니다. 누군가 ‘부처님은 오로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설했다’라 했을 때 근거가 되는 경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이 바로 그것입니다. 관련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선언한다.”(A3.61)
괴로움의 발생은 접촉을 시발점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따져 가면 입태를 조건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입태는 결생식(paṭisandhiviññāṇa)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입태의 과정은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서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암수의 교합, 적당한 시기,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있어야 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이 세상을 인식할 수도 없고 괴로움도 없습니다. 결생식은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이 입태를 조건으로 한다고 했을 때 이는 결생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일생윤회라 볼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순간윤회로 설명합니다.
왜 느낌을 알아차려야 하는가
괴로움은 접촉에 따라 발생합니다. 접촉이 없다면 괴로움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은 접촉을 조건으로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A3.61)라 하여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단순히 ‘느낌을 경험하는 자에게’라는 것뿐만 아니라 ‘아는 자에게’를 의미한다. 따라서 느낌에 대한 새김을 하는 것과 관계된 표현이다.”(Mrp.II.282) 라 했습니다.
누구나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크게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을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느낌에 대한 새김’이라 했습니다. 즐거운 느낌이라 하여 거머쥐려 하거나, 괴로운 것이라 밀쳐 내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탐욕과 성냄이 없는 삶입니다.
즐거운 느낌은 소멸될 때 괴로운 느낌으로 됩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느낌을 정반대로 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곳,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모든 수행은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좋거나 싫은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 차렸을 때 고의 소멸에 이릅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소멸에 대하여 해탈(mutti)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열반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오온을 가진 상태에서 해탈은 유여열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열반에 대한 표현은 매우 다양합니다. 무위 등 부정적 언표로 표현 된 것과 궁극 등 긍정적 언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두 합하여 보면 무위, 무루, 불로, 무견, 무희론, 무재난, 무재난의 상태, 무애, 이탐, 불사, 궁극, 진리, 피안, 극묘, 극난지, 견고함, 조견, 적정, 승묘, 지복, 안온. 희유, 미증유, 청정, 해탈, 섬, 동굴, 피난처, 귀의처, 구경입니다. 이런 언표는 고소멸에 대한 표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Dhp 204) 이라 했습니다.
열반을 행복이라 합니다. 또 이고득락이라 합니다. 여기서 행복이나 락(樂)은 빠알리어 수카(sukha)를 말합니다. 그런데 수카라는 말은 감각적 쾌락에 따른 즐거움도 수카라 합니다. 수카라는 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합니다. 사선정 상태에서의 행복도 수카라 합니다. 경전에서는 열반도 수카라 했습니다. 이렇게 활용도가 높은 수카를 열반이라는 말에 사용했을 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A9.34)’를 보면 사리뿟따와 우다인의대화가 있습니다. 열반과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사리뿟따가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sukhamidaṃ āvuso nibbānaṃ sukhamidaṃ āvuso, nibbānant)i” (A9.34)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우다인은 “벗이여, 사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사리뿟따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 (āvuso sukhaṃ, yadettha natthi vedayitaṃ.)”라 말합니다.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
열반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히 느낌(vedanā)이나 지각(saññ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리뿟따가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라 했을 때 감각적으로 느끼는 행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사선정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우다인에게 오욕락에 따른 행복과 네 가지 선정에 있어서 행복을 설명합니다. 이어서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 까지 단계들에 대하여 정신활동이 묶이는 것에 대하여 ‘질병’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행복한 자에게 질병에 해당하는 불행이 생겨나듯”이라 했습니다.
질병은 불행입니다. 지금 행복한 자라도 질병이 발생한다면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오욕락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까지 행복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열반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더 이상 열반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상수멸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Puna ca paraṃ āvuso bhikkhu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paññāyaṃ vassa disvā āsavā parikkhīṇā honti. Imināpi kho etaṃ āvuso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sukhaṃ nibbānanti.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고 느낌이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써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상수멸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saññāvedayitanirodha’라 합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의 영역에서 볼 수 있다(paññāyaṃ vassa disvā)’고 했습니다. 모든 번뇌가 부수어진 것을 말합니다.
지각도 하지 않고 느낌도 없을 때 마음이 일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온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열반은 아닙니다. 유여열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은 ‘열반은 있어도 열반에 든 자는 없다’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상수멸 (saññāvedayitanirodha)은 열반과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열반이고 행복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열반이라는 행복은 지각되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열반이 행복이라 했을 때, 이는 지각이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자각될 수 있다’라는 말은 ‘veditabbaṃ’ 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veditabba’는 ‘should be known’의 뜻입니다. 알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열반의 상태는 지각되거나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보아서 자각될 수 있는 것, 알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잔여가 있는 열반과 잔여가 없는 열반
열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잔여가 있는 열반과 잔여가 없는 열반입니다. 이는 이띠붓다까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열반의 세계, 잔여 있는 열반의 세계와 잔여 없는 열반의 세계가 있다.”(It.38)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잔여란 갈애와 업에 의해서 생겨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의 복합체, 즉 오온을 말합니다. 잔여가 있는 열반에 대하여 한자어로 유여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살아 있는 동안 아라한이 획득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뜻합니다. 잔여가 없는 열반에 대하여 무여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아라한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의 남김 없는 소멸을 뜻합니다.
유여열반이든 무여열반이든 열반에 이르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소멸입니다.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이 실현 되는 것입니다.
열반은 실재한다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고소멸상태가 해탈이고 열반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열반은 여러 가지 언표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열반을 피안(pāra)이라 했을 때 윤회의 고통스런 세상을 건너 따로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열반을 언표로서 표현하면 열반을 실체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나는 ‘고와 고소멸만을 설한다’라 한 것입니다. 그런 열반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의 게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atthi bhikkhave ajātaṃ abhūtaṃ akataṃ asaṅkhataṃ.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Ud.80)
부처님은 열반에 대한 게송에서 열반이 ‘있다(atthi)’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열반이 없다’가 아니고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열반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열반을 언어로써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느낌 등과는 달리 원인과 조건의 결합을 의미하는 원인들의 조화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원인 없이 나타나지 않거나 스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는 것’이고,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는 것을 본질로 하는 명색 등의 형성된 것들은 형성되지 않은 것을 본질로 하는 열반을 보여주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UdA.395)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열반은 항상하다
청정도론에 ‘열반에 논의(nibbāna kathā)’가 있습니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의 장에 따르면 열반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열반에 대한 논의
1)
만약 ‘열반은 없다. 마치 토끼 뿔처럼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적절한 도닦음이라 불리는 방법을 통해서 열반을 얻는다. 마치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남들의 출세간적인 마음을 알 수 있듯이. 그러므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은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얻지 못하는 것이라 해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반을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도닦음이 무익하게 될 것이기 대문이다. 열반이 없다면 바른 견해를 제일로 하고 계의 무더기 등 세 가지 무더기(즉 계 ․ 정 ․ 혜)를 포함하는 바른 도닦음이 무익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도닦음은 무익한 것이 아니다.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
2)
만약 ‘도닦음이 무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음에 도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오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서 열반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만약 ‘그럼 현재들(현재의 존재인 오온)이 없는 것이 열반인가’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그들의 없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을 땐 이미 현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존재들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현재 무더기들을 의지하여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유여열반의 요소를 얻지 못하는 결점이 생길 것이기 대문이다.
4)
만약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성스러운 도가 나타나는 순간의 이전에도 오염원들은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는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내세운] 이유는 합당하지가 않다.
5)
만약 “도반이여, 탐욕이 다한 것이 열반이다”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다한 것이 열반이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아라한 됨이 단순히 다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도반이여, 탐욕이 다한 것이 …”라는 방법으로 [아라한 됨을] 설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반이 일시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결점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열반은 일시적인 것이고 형성된 것의 특징을 가지며 바른 노력과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성된 것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형성된 것에 포함되고 말 것이며, 형성된 것에 포함되기 때문에 탐욕 등의 불로 탈 것이고, 타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되고 말 것이다.
6)
만약 ‘다한 뒤로 다시 일어남이 없는 그런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하면 결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그런 다함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앞서 말한 결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도가 열반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는 번뇌를 다하게 하므로 다함이라고 했다. 성스러운 도 다음에는 다시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열반은 다시 일어남이 없는 소멸이라 불리는 다함에게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열반은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유적으로 열반을 다함이라 했을 뿐이다.
7)
만약 ‘왜 직접적으로 설하지 않으셨는가’라고 한다면 ― 아주 미묘하기 때문이다. 아주 미묘하다는 것은 세존께서 [열반을 있는 그대로 설하기를] 주저하셨고, 또 성스러운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증명이 되었다. 이것은 도를 가진 자만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시작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8)
만약 ‘도가 있을 때 열반이 일어나는데도 이것이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도가 이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로써 증득하는 것이지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생긴 것이 아니다.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늙음도 죽음도 없다. 생김, 늙음,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
9)
만약 ‘열반도 원자 등이 가지는 그런 항상함을 가진다’라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그것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10)
만약 ‘열반이 항상하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당신들이 내세운] 이유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11)
만약 ‘열반처럼 생김 등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고 한다면 ― 그렇지 않다. 원자 등은 [항상한 것으로]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Vism.16.67-72)
청정도론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11가지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앞서 말한 논법이 실재하므로 오직 열반만이 항상하다. 이것은 물질의 고유성질을 초월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다.”(Vism.16.73)이라 했습니다. 열반은 항상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열반이 항상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원자 등이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열반이 항상하다는 것이 그것(원자등이 항상하다는 것)을 증명할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청정도론 2권, 361번 각주)라 되어 있습니다.
열반은 구경법(paramattadhamma)에 속합니다. 구경법은 물질 28가지, 마음부수 52가지, 열반 1가지, 마음 1가지라 하여 아비담마에 따르면 82법이라 합니다. 구경법을 궁극적 실재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를 빠라맛따담마(paramattadhamma)라 합니다. 중국에서는 승의(勝義)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ultimate realitiy’라 합니다. 구경법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빠라맛따담마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선법, 불선법 등을 말합니다. 이는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입니다. 연기법에 대해서는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 합니다.
궁극적 실재 중에서도 선법과 불선법이 있습니다. 마음부수 52법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탐욕은 거머쥐려 하는 고유한 성질이 있고, 성냄은 밀쳐 내려는 고유한 성질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어서 항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는 법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궁국적 실재 중의 하나로서 열반이 있습니다. 그런 열반은 실재하는 것이고 항상합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것은 물질의 고유성질을 초월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다.”(Vism.16.73) 라 했습니다. 이는 열반에 대한 논의 8번 항에서 설명됩니다.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그렇다고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업이 남아 있는 한 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생한다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재생연결식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야 명색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일생윤회가 전개됩니다.
윤회는 일생윤회와 순간윤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순간윤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날 때 마다 세상도 일어나고 동시에 괴로움도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고와 고소멸을 말씀 하신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도 동시에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입니다.
고소멸 상태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해탈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여러 가지 언표로 표시된 열반은 실체가 있는 것은 어닙니다. 그러나 실재하고 항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이렇게 감흥으로 노래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Ud.80)
2017-08-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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