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통/인문·예술·종교·철학

[2]망상! 멍때리라? 내버려두라? 차라리 잠을 자라!

우공(友空) 2017. 11. 16. 22:20

http://blog.daum.net/bolee591/16158123


이하는 원문


 

생각하느니 차라리 잠을, 생각을 중지하려면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잘 못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제서야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실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maññanti)이 일어나는 과정

 

사람들은 생각대로 삽니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 hoti aññathā)”(stn587)라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만냐띠(maññanti)를 말합니다.

 

생각을 뜻하는 만냐띠는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 등장합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특별법문한 것입니다. 대개 제자들이 질문하면 답하는 형식으로 경이 구성되어 있지만 이렇게 부처님이 모이게 하여 법문한 케이스는 드문 현상입니다. 그래서일까 뿌리가 ‘mūlapariyāya’라 하여 뿌리가 되는 되는 법문 또는 근본이 되는 법문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뿌리가 되는 법문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M1)

 



 

땅 대신에 어떤 것을 대입해도 됩니다. 경에서는 물, , 바람 등 지수화풍을 대입했습니다. 또 존재, 신들, 창조주, 하느님 등 신들을 대입했습니다. 또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를 대입했습니다. 보여진 것, 들려진 것, 감각된 것, 인식된 것, 하나인 것, 모든 것, 심지어 열반을 대입했습니다. 열반에 대해서는 열반을 열반으로 여기고 열반을 열반으로 여기고 나서, 열반을 생각하고 열반 가운데 생각하고 열반으로부터 생각하며 ‘열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열반에 대해 즐거워한다.(M1)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쉽게 설명했지만 좀더 들어가 보면 심오하기 그지 없습니다. 맛지마니까야 1번 경인 근본법문의 경이 그렇습니다. 경에서는 생각을 뜻하는 만냐띠가 어떻게 전개되어지는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생각의 왜곡입니다. 생각이 왜곡 되는 과정을 밝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대상은 시각능력일 수도 있고 청각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을 만났을 때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을 마음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생각은 빠알리어 만냐띠(maññanti)로서 마음을 뜻하는 찟따(citta)와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생각은 왜곡된 사유에 대한 것입니다.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왜곡된 사유 때문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때 사유의 왜곡이 발생함을 말합니다. 사유의 왜곡이 일어나면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대상을 보았을 때 인식론적 왜곡이 발생하는데 이는 자아의 관점이 침투했을 때 발생합니다. 이전의 경험이나 학습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자아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한눈에 다 들어 오지만 그 중에서 포착되는 대상은 이전의 경험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왜곡이 일어납니다. 대상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 하는 등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와 집착입니다.

 

망상(papañca)이 일어나는 과정

 

갈애와 집착은 자아관념이 있을 때 발생합니다. 대상에 대하여 좋은 느낌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움켜 쥐려는 갈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갈애가 일어 났을 때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됩니다. 이것이 왜곡된 사유입니다. 이와 같은 왜곡된 사유(생각)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에서는 빠빤짜(papañca)라 했습니다.

 

빠알리어 빠빤짜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희론이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사량분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 빠빤짜는 어원적으로 빵터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역에서는 망상이라고 번역되는 빠빤짜는 일종의 정신적 혼돈(카오스)를 뜻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주석에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사유의 개념의 확장이다.”(355번 각주)라고 설명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에서는 희론 또는 사량분별 또는 망상이라고 불리우는 빠빤짜가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삼사화합부터 시작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접촉했을 때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때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은 곧바로 오염되어 버립니다. 대상을 보는 순간 이전에 경험했던 것이 떠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느낌에 따른 것입니다.

 

대개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즐거운 느낌이라면 거머쥐려 합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은 십이연기에서 연기의 순관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망상이 일어날 때는 다릅니다. 느낀 것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십이연기회전의 길과 망상의 길은 느낌 이후 단계에서 갈라집니다.

 

대상에 대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다면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기 전에 알아차리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버립니다.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넌 것과 같고 위화도 회군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문지방을 넘어선 것과 같습니다. 망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대상과 관련된 이전의 경험 했던 것이 영향을 주어서 사유가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M18)라 했습니다. 이미 문지방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망상이 전개 됩니다. 마치 허공속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유의 개념적 확장이라 하는데 경에서는 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라 한 것입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보았을 때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생각(maññanti)과 망상(papañca)이 일어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본법문의 경(M1)’에서는 왜곡된 사유로서 생각에 대한 것이고, ‘꿀과자의 경(M18)’에서는 사유의 근거 없는 확장인 망상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면 이는 자아개념에 따른 것입니다. 보아도 내가 보는 것이고 들어도 내가 듣는 것입니다. 대상을 접할 때 항상 자아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로 대상을 접할 때 인식론적 왜곡이 일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식론적 왜곡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인식론적 왜곡은 크게 갈애(tahā), 자만(mana), 견해(diṭṭhi)에 따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면 왜곡된 사유가 발생하는데 이를 생각(maññanti)이라 합니다.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갈애는 이를 테면, 내적인 땅의 요소인 머리카락 등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만은 그 욕망과 탐욕의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에 따라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견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13번 각주)라고 설명했습니다. 왜곡된 사유(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자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땅을 예로 들어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M1)라 했습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왜곡된 생각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일어 났기 때문에 인식론적 왜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왜곡은 네 가지로 발생합니다. 그것은 대격, 처격, 탈격, 소유격의 형태입니다. 예를 든 땅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하여 X로 본다면 대격(나는 X를 생각한다), 처격(나는 X가운데 생각한다), 탈격(나는 X로부터 생각한다, 소유격(나는 X를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13번 각주)가 됩니다.

 

생각이라는 왜곡된 사유가 일어나는 것은 철저하게 자아관념에 따른 것입니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나의 입장에서 대상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즐거운 것이면 거머쥐려 하고, 대상이 괴로운 것이면 밀쳐 내려 하는 것입니다. 거머 쥐려 하는 것이 탐욕이고, 밀쳐 내려 하는 것이 성냄입니다. 이렇게 자아관념에 따라 탐욕과 분노로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합니다.

 

사유를 중지하려면

 

생각은 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항상 현재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쉽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합니다. 모두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망상을 줄이기 위해서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즐거운 느낌인 줄 알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는 괴로운 느낌인줄 알면 그만입니다. 그럼에도 느낌에 대하여 갈애가 일어나면 왜곡된 사유가 발생한 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사유가 확장 되어 공간에 집을 지으면 망상이 됩니다.

 

생각이 일어 났을 때는 생각을 멈추어야 합니다.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서는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2) 그 인상과는 달리 선하고 건전한 어떤 다른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자신에게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이렇게 ‘이러한 사유는 불건전하다.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라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3) 그가 이러한 사유 속에서 위험을 성찰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말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4) 그 수행승이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않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았으나,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에 대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5) 그 수행승이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켰지만,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려야 한다.(M20)

 

 

대개 생각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많습니다. 생각이 일어 났을 때는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M20)이라 하여 그 인상에 관해 정신활동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사유중지 네 번째 항을 보면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에 대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함으로써 완성된다.”(372번각주)라 했습니다. 사유중지라 해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생각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을 따져 가는 도중에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은 사라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불건전한 생각의 비활성화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일처리한다는 마음의 원리가 잘 적용된 케이스라 보여집니다.

 

사유중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M20)라는 문구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참선수행의 자세를 말합니다. 용맹정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려야 한다.”(M20)라 했습니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최후의 수단은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착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제압해야 한다.”라는 첫 번째 방법과도 일치합니다.

 

세간에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난무합니다. 어떤 이는 몰라 몰라하며 멍 때리듯이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다릅니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중지할 수 있는 법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생각에 빠지느니 차라리 잠을 자라

 

생각은 늘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제멋대로입니다. 생각을 제어하지 못하고 생각에 끄달려 가게 되면 망상이 됩니다. 실제와는 멀어진 것입니다. 실제를 보기 위해서는 생각을 중지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느낌이 갈애로 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느낌이 지전개되지 않게 하여 연기가 회전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면 망상이 일어납니다. 이를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M18)이라 합니다.

 

생각이나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곡 되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사유는 느낌에 대한 갈애, 비교에 따른 열등감이나 우월감이나 동등감이라는 자만,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견해에 따른 것입니다. 결국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 왜곡된 사유와 망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생각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에 대하여 부처님은 파리떼와 같다고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더럽힘의 경(A3.126)’에 따르면 눈과 귀를 보호하지 않고 감관을 수호하지 않으면 탐욕적 사유를 따라서 파리들이 그를 쫓으리라.”(A3.126)라 했습니다.

 

파리떼와 같은 생각을 멈추려면 부처님이 제시한 사유중지 다섯 가지 방법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면 차라리 잠 자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비록 잠자는 것은 생명의 불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불결실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몽매함이라고 나는 말하지만,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사유에 사로잡혀, 참모임의 화합을 파괴할 정도로 사유 속에서 사려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S35.235)라 했습니다.

 

마음의 항복을 받고

 

부처님은 생각을 중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다섯 가지 방법을 말씀했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면 차라리 잠 자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왜곡된 사유와 망상을 극복했습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늘 현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들뜸이 없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관념이 사라진 아라한은 마침내 마음의 항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이여, 어떠한 경우이든 그대의 말을 들었다.

다생에 걸쳐 그대는 내게 항복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생겨난 것은 그대의 은혜를 입었고,

그대로 인한 고통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윤회했다. (Thag.1132)

 

마음이여, 그대가 우리를 사제로 만들고,

그대가 전사도, 왕도, 선인도 만드는 것이니,

언젠가 우리가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고

하늘사람이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Thag.1133)

 

“우리가 그대 때문에 아수라가 되고

그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니,

언젠가 축생의 존재가 되고

아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4)

 

“시시각각 가면놀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대는 거듭해서 나를 해치려 하지 않겠는가?

광인을 희롱하듯, 나를 희롱하지 않겠는가?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Thag.1135)

 

“일찍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 마음은 즐거움을 쫓아 다녔다.

사나운 코끼리를 조련사가 갈고리로 제어하듯,

오늘 나는 그것을 철절히 제어하리라. (Thag.1136)

 

“스승께서는 나에게 세상을

무상, 무견실, 무실체로서 시설하셨다.

마음이여, 승리자의 교법에 나를 들게 하라.

건너기 어려운 크나큰 거센 흐름을 건너게 하라. (Thag.1137)

 

“마음이여, 이제 예전과 같지 않으니,

그대의 지배 아래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위대한 선인의 교법에 나는 출가했으니,

나와 같은 자들은 파멸을 겪지 않으리. (Thag.1138)

 

 

 

2017-1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