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
찬나에 내려진 엄벌 브라흐마단다(梵罰)
어느 모임이든지 골치 아픈 존재가 있습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등 안하무인격의 사람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마부출신 찬나(Channa)가 그랬습니다.
브라흐마단다(brahmadaṇḍa: 梵罰)
초기경전을 보면 찬나에 대한 이야기가 도처에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디가니까야를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여, 수행승 찬나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수행승들은 그에게 이야기 하거나 충고하거나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D16.123)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왜 마지막 말씀에서 찬나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했을까? 더구나 상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왕따’입니다. 모임이나 단체에서 아무도 관심 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야기 하지도 말고, 충고하지도 말고, 가르쳐 주지도 말라 하는 것에 대하여 브라흐마단다(brahmadaṇḍa: 梵罰)라 합니다.
장로 찬나와 관련된 이야기(Channatheravattthu)
찬나가 왕따 당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법구경 78번 게송 인연담을 보면 ‘장로 찬나와 관련된 이야기(Channatheravattthu)’가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로 찬나(Channa)는 두 위대한 제자,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하여 “나는 고귀한 아들과 함께 위대한 출가를 결행했다. 그때 다른 누구도 없었으나 지금은 ‘내가 싸리뿟따다, 내가 목갈라나이다. 우리가 최상의 제자이다.’라고 떠들며 돌아다닌다.”라고 비난 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장로 찬나를 불러 훈계했다. 그는 그 순간에는 말없이 듣고 있다가 다시 돌아가서는 장로들을 비난하곤 했다.
부처님께서는 두 세 번 그를 불러 ‘찬나여, 두 명의 최상의 제자는 그대의 선한 벗이고 위없는 참사람이다. 이와 같은 선한 벗을 섬기고 사귀라.’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악한 벗과 사귀지 말고 저속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 선한 벗과 사귀고 최상의 사람과 사귀어라.’라고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나는 부처님의 충고를 듣지 않고 예전처럼 두 장로들을 비난했다. 수행승들이 다시 부처님께 알리자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이여,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들은 찬나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가능하리라.’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존자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장로 찬나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장로 아난다에게 하느님의 벌(brahmadaṇḍa)’이라는 처벌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신 뒤에 그를 불러 처벌을 내리자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용서받고도 가르침을 어긴 것을 회상하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존자여, 나를 파멸시키지 마시오.’라고 울부짓었다. 그 후 그는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여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Channatheravattthu-장로찬나와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78번 인연담)
찬나는 승단에서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만에 기인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할 때 말을 타고 함께 성문을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누군데”라며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마저 무시했습니다. 부처님은 생전에 찬나의 못된 버릇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방법은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일체 말을 걸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죄갈마, 권리정지조치
부처님은 찬나에게 말 걸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은 어떻게 찬나에게 대처해야 했을까?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찬나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습니다.
“Once, when in the Ghositārāma inKosambī, Channa committed a fault but was not willing to acknowledge it. When the matter was reported to the Buddha, he decreed that the ukkhepaniya-kamma (act or resolution of suspension Vin.I,49, 53, 98, 143, 168; II,27, 226, 230, 298: A.I,99. (Page 126)。) be carried out against him, forbidding him to eat or dwell with the Sangha. He therefore changed his residence, but was everywhere ”boycotted,” and returned to Kosambī subdued and asking for reprieve, which was granted to him. Vin.ii.23ff. His obstinacy and perverseness are again mentioned elsewhere - e.g., Vin.iv.35, 113, 141. A patron of his once erected a vihāra for him, but he so thatched and decked it that it fell down. In trying to repair it he damaged a brahmin’s barley field (Vin.iii.47). See also Vin.iii.155f., 177.”(Channa, 빠알리사전 PCED194)
빠알리사전에 언급된 처벌을 보면 ‘ukkhepaniya-kamma’라는 말이 보입니다. 이 말은 한역으로 ‘거죄갈마’라 합니다. 다른 말로 ‘권리정지조치’라 합니다. 화합을 해치는 수행승에 대하여 승가에 머무르고 먹는 것을 금하는 조치를 말합니다. 그래서 율장소품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가중처벌을 받아야 할 수행승은 일반수행승과 함께 동일한 지붕아래에 있는 처소에서 살아서는 안되고,”(Vin.II.35)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
부처님 사후 찬나는 어디에 가든 보이콧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 존자 만큼은 그를 자비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와 찬나의 대화는 상윳따니까야 ‘찬나의 경(S22.90)’과 율장소품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논의(Vin.II.290)’에 실려 있습니다.
먼저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찬나가 장로들에게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훈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주십시오.”(S22.90)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찬나에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충고하지도 말고, 가르침을 베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아난다는 장로들에게 부처님이 찬나에게 하느님의 처벌(brahmadaṇḍa: 梵罰)을 내린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또 찬나에게도 “벗이여, 찬나여, 참모임은 그대에게 하느님의 처벌을 내렸습니다.”(Vin.II.291)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찬나는 하느님의 처벌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처벌이란 무엇입니까?”라며 물어 봅니다.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들은 대로 “벗이여, 찬나여, 수행승들에게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수행승들은 그대에게 말을 걸거나 충고하거나 가르침을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Nanvāhaṃ, bhante ānanda, hato ettāvatā, yatohaṃ bhikkhūhi neva vattabbo, na ovaditabbo, nānusāsitabbo
“존자 아난다여, 제가 수행승들로부터 말을 받을 수 없고 충고를 받을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면 저는 죽는 것이 아닙니까?” (Vin.II.291)
찬나는 아난다의 말을 전해 듣고 충격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안하무인격으로 “내가 부처님과 함께 성문을 나선 사람인데”라며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을 무시하기 일쑤이었는데 승가에서 권리정지조치 당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찬나는 “저는 죽은 것이 아닙니까? (Nanvāhaṃ hato ettāvatā)”라 했습니다.
찬나는 충격받았습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tattheva mucchito papato)”라 되어 있습니다. 결국 찬나는 브라흐마단다로 인하여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율장소품에서는 “수행승 찬나는 하느님의 처벌을 고통스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싫어하여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했다.”(Vin.II.292)라 되어 있습니다.
왜 괴로움을 설하지 않았을까?
찬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장로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찬나의 경(S22.90)’에 따르면 장로수행승들은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S22.90)
장로들은 찬나에게 무상과 무아에 대해 설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道]도 괴롭고 경지[果]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Srp.II.1810라 했습니다.
누군가 일체개고라 했을 때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 할 것입니다. 아직 지혜가 무르익지 않은 찬나에게 삼법인 중에 고만 빼고 무상과 무아에 대해서만 설한 것은 깨달음 마저 괴로운 것으로 여길 염려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空)하다고 보았을 때
찬나는 장로들에게 무상과 무아의 설법을 듣고 정진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짧은 찬나에게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인 것에 대하여 이해 하기 어려웠습니다. 찬나는 독백하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파괴, 사라짐, 소멸, 열반에 뛰어들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대신에 동요와 집착이 생겨나 나의 마음은 퇴전하여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S22.90)
찬나는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atha kho carahi me attā)’라며 고민했습니다. 찬나는무상, 고, 무아 삼특징 중에서 고를 빼고 오온의 무상과 무아에 대하여 통찰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아라면 ‘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법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장로는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고 통찰에 대한 명상을 했다.”(Srp.II.181)라 했습니다.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인 것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한 것임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았을 때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그의 허약한 통찰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할 수 없었다. 형성들이 그에게 공(空)으로 드러나자 ‘나는 단멸하고 파괴될 것이다.’라는 허무주의적 혼란이 생겨났다.” (Srp.II.181)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깟짜야나 곳따의 경(S12.15)’의 중요성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연기에 대한 통찰 없이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고 무아인 것으로 생각했을 때 찬나와 같은 허무주의가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에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이 깟짜야나 존자에게 가르침을 준 ‘깟짜야나 곳따의 경(S12.15)’을 들려 줍니다.
초기경전에서 초기경전이 인용되는 케이스는 매우 희귀합니다. 종종 숫따니빠따의 제4품과 제5품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재가의 여신도 난다마따가 피안가는 길을 암송을 끝내고 침묵했다.”(A7.53)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숫따니빠따 제5품이 매우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찬나의 경에서는 아난다가 ‘깟짜야나 곳따의 경’을 그대로 인용하여 찬나에게 설명합니다. 한역으로 ‘가전연경’으로 알려져 있는 ‘깟짜야나 곳따의 경’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깟짜야나 곳따의 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이 경에서 언급된 짤막한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했기 때문입니다. 찬나가 조건 발생의 성찰 없이 단지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인 것만을 관찰했을 때 허무주의적 견해에 빠진 것은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하여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세상의 발생’입니다. 세상이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 발생을 말합니다.
연기송에 따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로 설명됩니다. 이와 같이 조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허무주의가 발 붙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부처님이 설한 깟짜야나곳따의 경을 찬나에 들려 주어 공에 빠진 찬나에게 조건발생 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집착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장로들은 찬나에게 오온에 대한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만 알려 주었지 괴로움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도 괴로운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 여긴다면 굳이 도와 과를 이루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난다는 ‘깟짜야냐 곳따의 경’에서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의 연기법을 인용하면서 괴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줍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구속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형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S12.15)
부처님은 집착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괴로움도 나의 괴로움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조건발생일 뿐입니다. 조건이 다하면 괴로움도 소멸됩니다. 오온에 대한 괴로움이기 때문에 일체개고라 하여 ‘책상도 괴롭다’거나 ‘도(道)도 괴롭고 과(果)도 괴롭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된 찬나
찬나는 아난다의 깟짜야나곳따의 경 법문을 듣고 마침내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경에서는 “저는 아난다 존자의 설법을 듣고 진리를 꿰뚫었습니다.”(S22.90)라 했습니다. 그런데 율장소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알았다.”(Vin.II.291)
이 문장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는 정형문입니다. 여기서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라는 정형문을 아라한 선언이라 합니다.
아라한 선언을 분석하면
그런데 선언문에서 ‘태어남은 부수어졌다.(Khīṇā jāti)’라 했습니다. 어떻게 태어남이 부수어질 수 있을까? 어법상 맞지 않습니다.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즉, 그의 과거의 태어남이 부수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의 태어남이 부수어졌기 때문에 미래의 태어남이 부수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길(magga)이 실천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생겨난 존재에 있어서 존재의 태어남은 이미 길이 실천되기 때문에 무생법성(無生法性: anuppādadhamma)에 도달하여 부서진 것이다.”(smv.225)라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길의 실천에 의해서 번뇌가 끊어진 그는 그것을 관찰하여 번뇌가 없다면, 업이 현존하더라도 미래의 재생은 없다고 분명히 안다.” (smv.225)라는 뜻입니다.
아라한 선언에서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vusitaṃ brahmacariyaṃ)’라 했습니다. 이 말은 범행이라 하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청정한 삶, 고결한 삶을 뜻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길의 범행으로 범부의 선행과 학인의 범행의 삶이 있고, 번뇌를 부순 자에게는 범행이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smv.225)라 합니다.
아라한 선언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kataṃ karaṇīyaṃ)’는 것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지단증수(止斷增修)라 하여 알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 사향사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라한 선언에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nāparaṃ itthattāyā)’라는 말의 원래 뜻은 ‘더 이상 이러한 상태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16가지 해야 할 일을 말하는데, 이는 “오염을 부수기 위한 길을 닦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상태가 없다.”(smv.226)는 뜻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오온의 상속보다 후에 오온의 상속은 없다는 뜻입니다. 오온이 다 알려졌을 때 불처럼 소멸할 것이고 또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 합니다.
발심출가자가 아니어서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출신입니다. 찬나는 부처님과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찬나는 부처님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 집안의 하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출가를 도왔지만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카필라성에 왔을 때 부처님의 친척들과 함께 출가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빠알리 사전에서는 “It is said that he begged for leave to join Gotama as a recluse, but this leave was refused (J.i.64f). He therefore returned to Kapilavatthu, but when the Buddha visited his Sākiyan kinsfolk, Channa joined the Order.”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찬나는 처음부터 발심출가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마부로서 부처님과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이 열반할 때 까지 수행의 진척은 거의 없었고 골칫덩어리 같은 존재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열반후에 브라흐마단다라는 일종의 왕따를 당하고 나서 큰 충격을 받고 그제서야 공부를 했습니다.
브라흐마단다의 철회
마부출신 찬나는 아난다의 배려로 마침내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깨달은 자로서 찬나는 아난다에게 “존자여 아난다여, 나에에 하느님의 처벌을 철해 주시오.”라며 간청했습니다. 이에 아난다는 “벗이여 찬나여, 그대가 거룩한 경지를 실현했을 때에 그때부터 하느님의 처벌은 철회된 것입니다.”(Vin.II.292)라 했습니다.
찬나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브라흐마단다는 철회되었습니다. 자아관념이 사라진 무아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내가 부처님과 함께 담을 넘은 사람인데”라는 자만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 사후에 깨달음을 얻은 장로 찬나는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위대한 님으로부터 광대한 맛의 진리,
일체지자, 최승지자에 의해 설해진 진리를 들었으니,
나는 불사의 성취를 위한 길에 들어섰다.
그 님은 멍에로부터의 안온의 길에 아주 밝다.”(Thag.69)
2018-09-04
진흙속의연꽃
'관심통 > 인문·예술·종교·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까야 보호주 (0) | 2018.09.27 |
---|---|
바보들이나 보시한다고? 과학의 시대와 유물론적 허무주의 (0) | 2018.09.27 |
좋은 심소(心所)를 얻는 것이 수행, 경행, 설법 조건 (0) | 2018.09.01 |
[2]구분교(九分敎), 초기경전에서 본 십우도 견우(見牛)의 모티브 (0) | 2018.08.09 |
[2]수범수제, 과거6불 정법기간 (0) | 2018.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