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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이나 보시한다고? 과학의 시대와 유물론적 허무주의

우공(友空) 2018. 9. 27. 12:35


 행복에서 힐링으로


http://blog.daum.net/bolee591/16158917


아래는 원문



 

바보들이나 보시한다고과학의 시대와 유물론적 허무주의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한 말입니다.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어느 수학자의 간난아기론

 

허무주의자들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말합니다. 육체가 파괴되면 정신도 함께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단멸론입니다. 이와 같은 단멸론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합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사회과학이니 인문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제외한 자연과학을 말합니다.

 

어느 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난아기는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름 붙이자면 간난아기론이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이 생에서 공덕을 쌓아도 아무리 이 생에서 악업을 지어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윤회를 부정합니다. 설령 윤회가 (眞實)’이라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윤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수학자의 간난아기론에 따르면 허무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일까 수학자는 이 생에서 단지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 합니다. 죄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바른 심성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외도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외도스승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도 없다.”(S24.5)

 

 

단멸론자이자 허무주의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모든 것이 없다(natthi)’고 합니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무()자 행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물질에 기반하여 사유를 했을 때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래서일까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S24.5)라 했습니다.

 

지수화풍 사대와 정신으로 이루어진 이 몸과 마음은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는 허무주의자들의 견해입니다. 더구나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라고 했는데 이는 철저하게 유물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유물론자들에 따르면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종단멸론자들은

 

유물론자들의 말대로 정신이 물질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물질이 파괴되었을 때 당연히 정신도 파괴 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즘 신종단멸론자들에 따르면 연기송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연기송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 합니다. 여기에 육체와 정신을 대입하면 육체가 있으므로 정신이 있다.’라 하여 상호의존으로 봅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은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라는 연기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육체가 없다면 정신도 없다라고 봅니다. 상호의존적 연기법을 단멸론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발생연기도 있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 조건발생적 연기입니다.

 

연기법으로 논파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부처님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동시에 설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설했다면 단멸론이 되어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동시에 조건발생적 연기도 설하여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논파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이 대표적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짤막한 두 문구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논파되었습니다.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여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여 영원주의가 논파된 것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십이연기 유전문과 환멸문을 동시에 설합니다.

 

과학의 시대와 유물론적 허무주의

 

요즘은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탐구하면 할수록 무신론자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리차드 도킨슨과 같은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유물론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적 견해를 설한 아지따 께사깜발린과 같은 부류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고 합니다.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들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물질에 기반을 둔 단멸론적 허무주의자들은 내생과 윤회를 부정합니다. 따라서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dattūpaññattamida dāna nāmatuccha tesa tuccha musā vippalāpo)”(S24.5)라 합니다. 보시공덕을 강조한 부처님 가르침과는 정반대입니다.

 

유물론적 견해를 가진 자에게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육체에서 파생된 정신도 죽게 되어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견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일까 선업공덕 쌓는 것에 대하여 부질 없는 짓이라 합니다. 더구나 내생이나 윤회라는 말에 대하여 조롱하기 까지 합니다. 과학의 시대에 유물론적 허무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바보는 주고 현자는 받는다고?

 

보시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자들은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보시는 어리석은 자들의 교설일 뿐이니 누구든 [보시 등의 과보가]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은 공허하고 거짓되고 쓸데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 번역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따르면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원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관련 구절을 보면 “nāmatuccha tesa tuccha musā vippalāpo”라 했는데, 이는 그와 같이 공허한 것을 설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을 설하는 것과 같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시공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Giving is a doctrine of fools. When anyone asserts the doctrine that there is [giving and the like], it is empty, false prattle.”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교설이다. 누군가 [보시하는 것과 이를 좋아함을] 이렇게 교설한다면 이는 공허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고 마구 지껄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가 됩니다. 번역해 놓고 보니 초불연 번역과 유사합니다.

 

유물론자에 따르면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고 합니다. 죽으면 모두 끝나기 때문에 내생에 선처에 나기를 기대하며 보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 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보시한다.’라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보는 주고 현자는 받는다.( bāla denti, paṇḍita gahanti)”(Srp.II.339)

 

 

이 말은 부처님 당시부터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격언입니다.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남에게 베풀어 그 공덕에 대한 과보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로 봅니다. 오로지 살아 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그뿐인데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보시는 보시의 과보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고, 현명한 자라면 취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누군가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풍족하게 쓰고 갚지 않아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유물론자들은 내생과 윤회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부정합니다. 이는 행위와 행위의 과보를 부정하는 무작론(無作論: akiriyā-diṭṭhi)’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단멸론은 영원주의보다 더 악한 견해입니다.

 

견해는 정신적으로 사유된 망상

 

상윳따니까야 견해의 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ye keci atthikavāda vadanti bāle ca paṇḍite ca kāyassa bhedā ucchijjanti vinassanti, na honti parammaraā)”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견해가 잘못된 것일까?

 

부처님은 오온이 무상하다고 했습니다. ,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난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유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 또한 이렇게 보이고, 들리고, 감지되고, 인식되고, 파악되고, 탐구되고, 정신적으로 사유된 것은 영원한가 무상한가?”(S24.5)라고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단멸론 등 견해가 생겨 나는 것에 대하여 오온이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추가하여 정신적으로 사유된 것(anuvicarita manas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사유된 것은 다름 아닌 견해입니다. 견해는 정신적으로 사유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희론 또는 망상입니다. 이와 같은 망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라며 물어 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무상한 것이라 답합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라며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두 가지 바른 견해(正見)에 대하여

 

유물론에 바탕을 둔 단멸론적 허무주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되는 사견(邪見)입니다. 그런데 사견에 빠지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생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생도 괴로움에 빠집니다.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 막행막식하며 살았다면 그 과보로 인하여 두 세상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이 여섯 가지 경우에 대한 의혹을 끊었고, 나아가 괴로움에 대한 의혹도 끊었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의혹도 끊었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의혹도 끊었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의혹도 끊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고귀한 제자를,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S24.5)

 

 

부처님은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함을 말씀 했습니다. 바른 견해는 다름 아닌 사성제입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정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올바른 견해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에 영향을 받는 정견에 대하여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kammassakatādiṭṭhi)이라 합니다. 반면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여 사성제라 합니다. 업자성정견을 세간적 정견이라고도 하고, 사성제를 출세간적 정견이라고도 합니다.

 

견해의 경에서는 사성제라는 출세간적 정견을 설했으므로 여섯 가지 의혹을 끊었을 때 흐름에 든 님(預流者:  Sotāpanna)’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세간을 사는 자들에게는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의 가르침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로지 행복론만 이야기한다면

 

누군가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다면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보시를 해서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이 세상을 즐겁게 살다 가면 될 것입니다.

 

행복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왕 태어난 세상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즐기면서 살자는 말과도 같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라는 말 자체에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이야기한다면 단멸론이 되기 쉽습니다. 이세상을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만 산다면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로 귀결되기 쉽습니다.

 

오로지 행복론만 이야기한다면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는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힐링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보시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나는 거지 뭐.”라고 말합니다. 허무주의자이기 쉽습니다. 또 누군가 죽은 자에 대하여 돌아 가셨다.”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에 따르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라고 했으므로 유물론자이기 쉽습니다.

 

누군가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 단멸론자이기 쉽습니다.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단멸론자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은행복론입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게 살자!”라 하는데, 이 말은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을 사는 자에게 보시공덕 이야기는 와 닿지 않습니다. 현명한 자들이 감언이설로 보시를 유도하여 취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물론에 바탕을 둔 단멸론적 허무주의자들은 늘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받는다.”라며 보시하는 자들을 경멸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즐기는 삶에는 열심이지만 남에게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절반 이상은 유물론적 허무주의자들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보시

 

 

 

2018-09-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