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bolee591/16158919
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 아따나띠야와 구마사(驅魔師)
매일 아침 보호주를
매일 아침 보호주를 듣습니다. 이미우이가 현대음악으로 부르는 라따나경(寶石經)입니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의 공덕을 찬탄하고 예경하는 아름다운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터로 갈 때 듣는 라따나경은 벌써 십년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보호주 자야망갈라가타(吉祥勝利偈)는 일터에 도착해서 듣습니다. 역시 이미우이음악입니다.
두 보호주는 음악이 좋아서 매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더 좋습니다. 모두 빠알리어로 외운바 있습니다. 이 밖에도 보호주로서 멧따경(慈愛經)과 망갈라경(祝福經)을 외운바 있습니다.
초기경전에는 수많은 보호주가 있습니다. 전재성박사가 편역한 예경지송에 따르면 ‘수호경전품’에 열다섯 개의 경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과거칠불수호경’입니다.
‘과거칠불수호경’은 빠알리어로는 ‘아따나띠야빠릿따(āṭānāṭiyaparitta)’라 합니다. 디가니까야 32번경에도 실려 있는 이 보호주는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비인간, 즉 귀신들로부터 해코지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한역에는 볼 수 없는 보호주입니다.
어느 법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어느 법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사와 빙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제사와 관련하여 불교경전에도 근거가 있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초기경전에서 본 부처님의 제사공덕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특히 쿳다까니까야에서 ‘담장밖의 경’(Khp.6)은 제사를 지내는 근거가 되는 경이라 했습니다. 배고픈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면 큰 공덕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법우님은 또 한가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빙의’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육도중에서 교감할 수 있는 계는 아귀계라 합니다. 제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빙의 된 것도 아귀계의 존재들이 해코지 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에 따르면 아귀계의 존재가 인간을 괴롭히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악하고 저급한 신들의 존재인 야차일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아따나띠야경(D32)에 따른 것입니다.
비인간(非人間: amanussa)에 대하여
아따나띠야경에 따르면 북방을 지키는 사대천왕중의 하나인 벳싸바나(Vessavana) 대왕이 등장합니다. 대왕은 “어떤 비인간이든, 곧 야차나 야차녀나 야차동자가 야차동녀나..”(D32)로 시작되는 비인간(非人間)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비인간이라는 말은 아마눗사(amanussa)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비인간은 ‘1. a demon; a ghost; 2. a deity’로 설명됩니다. 저급한 신들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귀신(鬼神)’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귀신의 범주에 들어가는 저급한 신들의 존재로서 야차(yakkha)뿐만 아니라 건달바(gandhabba), 꿈반다(kumbhaṇḍa), 나가(nāga)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비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말합니다. 라따나경(寶石經, Sn2.1)에서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여기 모여든 모든 존재들은”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존재들은 부따니(bhūtani)를 번역한 말입니다. 법정스님은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중역하여 ‘귀신들’이라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부따니(bhūtani)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주석을 보면 “일반적으로 비인간을 뜻한다. 비인간에는 신들, 야차, 나찰, 다나바, 건달바, 긴나라, 마호라가가 있다.”(숫타니파타, 1861번 각주)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따니는 비인간을 뜻하는 아마눗사(amanussa)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귀신이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호법신장이 되었을까?
귀신은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마다 귀신의 모습은 다릅니다. 이는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귀신 이미지는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흉측한 모습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니(オニ: 鬼)’라 하여 도깨비이미지입니다. 유럽의 경우 악마(demon)나 유령(ghost)의 이미지입니다. 이처럼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귀신의 이미지가 제각각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의 귀신은 우리나라 절에서 볼 수 있는 호법신장으로 있는 ‘야차, 나찰, 다나바, 건달바, 긴나라, 마호라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귀신과 같은 비인간들이 어떻게 호법신장이 되었을까?
야차와 같은 비인간들은 저급한 신들이지만 인간보다 능력이 월등합니다. 대부분 포악하여 인간을 해코지 하거나 해치려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아따나띠야경에서 벳싸바나 대왕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나 대부분 야차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지 않고,…”라 하여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을 가르침에 따라 사는 야차들도 있습니다.
경에서는 야차가 비인간을 대표하여 등장합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흉폭한 야차라도 청정한 믿음을 가진 야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야차에게도 오계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계를 갖추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야차는 호법신장이 됩니다.
벳싸바나 대왕의 간청으로
아따나띠야경은 북방을 지키는 사대왕천 벳싸바나 대왕이 부처님을 찾아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부대중을 비인간으로부터 보호 해 주겠다고 간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벳싸바나 대왕은 부처님에게 “수행승들과 수행녀들과 재가의 남자신도들과 재가의 여자신도들이 수호되고 보호되고 해코지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세존께서는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수용해 주십시오.”(D32)라고 간청합니다.
벳싸바나 대왕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바이스라바나 Vaiśravaṇa 라 합니다. 한역으로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 합니다. 일본에서는 ‘전쟁의 신’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 Bishamonten)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에서 사천왕상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호법신장입니다.
인간 바로 위의 천상이 사대왕천입니다. 욕계천상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사대왕천 중에서도 북방의 벳싸바나 대왕이 부처님에게 호법신장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침묵으로 허락하셨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왜 침묵으로 허락했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그런데 세존에게 명료하지 않은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일까?”(Smv.962)라고 의문합니다. 실제로 초기경전에는 아따나띠야 보호주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볼 수 없습니다. 귀신 같은 비인간으로부터 해코지 당할 위험에 빠졌을 때 저급한 신인 야차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벳싸바나 대왕은 부처님에게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수용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왜냐하면, 그는 보호주를 듣게 할 기회를 만들면서 말했기 때문이다.”(Smv.962)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스승에 의해서 언급되자 그 보호주가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Smv.96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벳싸바나 대왕은 부처님이 침묵한 것에 대하여 허락으로 간주하고 부처님 앞에서 보호주를 읊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부대중은 누구든지 비인간으로부터 해코지 당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보호주입니다. 이 보호주를 외면 오계를 지키며 가르침을 따라는 야차가 나타나 보호해줄 것이라 합니다.
‘과거칠불의 수호경’을 보면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보호주는 매우 길지만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보호주는 짧은 길이입니다.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과거칠불의 수호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 있는 님, 지복의 님인
비빳씬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시는
씨킨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목욕재계하신 님, 고행의 님인
벳싸부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
까꾸싼다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고귀한 님으로서 궁극에 이른
꼬나가마나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모든 것에서 해탈하신
깟싸빠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싸끼야 족으로 아들로 빛나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원리를 가르쳐주신 님이신
앙기라싸님께 예경하나이다.
세상에서 적멸에 들어서
있는 그대로 통찰하신
그 부처님들은 두 말을 하지 않으니
두려움을 여읜 고귀한 님들이시나이다.”
(예경지송, 과거칠불의 수호경)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수호경은 긴 길이의 아따나띠야 보호주에서 첫 부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벳싸바나 대왕이 이렇게 과거칠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모두 눈 있는 님(具眼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구안자는 어떤 님일까? 주석에 따르면 과거칠불에 대하여 “모든 부처님은 눈 있는 님이고 뭇삶을 가엾게 여기는 님이다. 모두가 번뇌를 씻어냈기 때문에 목욕재계한 님이다. 모두가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 님이고, 모두가 성취하신 님이고, 모두가 지체에서 빛을 발하는 님이다. 부처님들은 이러한 일곱 가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이름이 있고 덕이 있으므로 위대한 선인이다.”(2412번 각주)라 했습니다.
벳싸바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 칠불의 이름과 특징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칠불이전에도 무수한 부처님이 출현했습니다. 이는 정법이 오래 가지 못함을 말합니다.
정법이 머무르는 기간이 극히 짧습니다. 따라서 정법이 살아 있을 때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해야 합니다. 이처럼 과거칠불의 덕성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해도 비인간, 즉 귀신들은 함부로 해코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가 일곱조각 날 것
만약 귀신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해코지 하려 한다면 벳싸바나가 거느린 호법신 야차에 의해서 격퇴당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러한 비인간은 그의 머리를 일곱조각으로 분쇄할 것입니다.”(D32)라 했습니다. 이는 야차가 들고 있는 금강저에 따른 것입니다.
야차에 의해서 머리가 일곱조각 난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 부처님은 니간타교도 삿짜까에게 “악기베싸나여, 자,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M35)라 했습니다.
머리가 일곱 조각 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머리를 일곱조각 내는 것이 아니라 호법신장 야차가 일곱 조각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야차 바지라빠니가 불타고 불꽃이 이글거리고 빛을 방출하는 쇠로 된 금강저를 가지고 니간타의 교도 쌋짜까의 머리 위에 공중에서 서서 말하길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그대의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M3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따르는 사부대중을 비인간이 해코지 하려 한다면 호법신장들에 의해서 머리가 일곱 조각 날 것이라 했습니다.
‘귀신 붙었다’고 하는데
아따나띠야 보호주는 비인간, 즉 야차, 건달바, 꿈반다, 나가 등과 같은 저급하고 흉폭한 악신들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따나띠야의 경에 따르면 비인간들이 인간을 해코지 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야차가 붙잡는다.
이 야차가 들어온다.
이 야차가 괴롭힌다.
이 야차가 해악을 끼치고,
이 야차가 상처를 입히고,
이 야차가 놓아 주지 않는다.”(D32)
사악한 비인간이 인간에게 달라 붙습니다. 어떻게 달라붙을까? 경에 따르면 “가면 따라서 가고, 서면 따라서 서고, 앉으면 따라 앉고, 누우면 따라 눕는다.”(D32)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흔히 말하는 ‘귀신 붙었다.’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빙의 되었다.’라 할 것입니다.
빙의되었을 때
퇴마사(退魔師)가 있습니다. 구마사(驅魔師)라고도 합니다. 귀신을 쫓아 내는 일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엑소시스트(exorcist)라 합니다. 퇴마이야기는 공포영화 소재로도 많이 등장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귀, 악마,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악령에 지배당한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퇴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디가니까야 아따나띠야의 경에 실려 있는 비인간(amanussa)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저급한 신이 사악한 마음으로 인간에게 접근 하여 그 사람을 지배했을 때 ‘빙의되었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빙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빙의 되었을 때 호주를 송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처음부터 아따나띠야경이 송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자애의 경’과 ‘깃발의 경’과 보배의 경’이 칠일간 송창되어야 한다.” (Smv.969)라 합니다.
퇴마의식에도 순서가
초기경전 주석에 따르면 퇴마의식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빙의된 자를 앉혀 놓고 처음부터 야차의 머리를 일곱 조각 낼 정도로 강력한 아따나띠야 보호주(D32)를 송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자애경(Sn1.8), 깃발경(S11.3), 보배경(Sn2.1)을 송출하는데,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의 공덕을 먼저 찬탄하고 예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애경, 깃발경, 보배경은 테라와다불교에서 모두 예불문이자 수호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수호경을 송창해도 비인간이 떠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따나띠야 경이 외워져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최종순간에 사용되는 강력한 효력을 가진 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퇴마의식을 행하는 수행승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것을 외우는 수행승은 가루나 고기를 먹지말고, 묘지에 살아야 한다.”라 했습니다. 몸을 청정하게 한다음 비인간이 출몰하는 음습한 곳에 거주 해야 함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호주의례의 장소에 신선한 쇠똥을 바르고 청정한 자리를 마련하여 앉아야 한다. 호주를 행하는 수행승은 승원에서 안내하는 방패와 무기를 갖춘 자들에게 둘러싸여, 안내되어야 한다. 노지에 앉아서 말해서는 안된다. 문이나 창을 닫고 앉아서 무기를 손에 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자애의 마음을 선구로 말해야 한다.” (Smv.969)
빙의된 자에게 퇴마의식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자애의 마음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악행을 저질러 악처로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나 퇴마사가 될 수 없다
아무나 퇴마사가 될 수 없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여러 가지 학습계율을 배우고, 계행이 확립된 자의 호주가 행해져야 한다.” (Smv.969)라고 했습니다. 청정한 계행을 갖춘 자만이 악령을 물리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도 비인간이 떠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묘지에서 행한 퇴마의식에서도 효과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그와 같이 해서 비인이 떠나지 않는 경우, 승원으로 인도하여 탑묘의 정원에 눕히고 자리정화의식을 행하고 등불을 점화하여 탑묘의 정원을 정화하고 길상의 이야기를 말해야 한다.”(Smv.969)라 했습니다.
퇴마의식은 사원에서 밤중에 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원은 가르침의 도량입니다. 정법이 살아 있는 사원에서 비인간은 위축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 사리 등이 모셔져 있는 탑묘가 가장 기운이 강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원의 탑묘에 빙의된 자를 데려 오는 것이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으로 비인간을 부르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승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는 장소에서 ‘수행승의 상가가 그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전갈을 보내야 한다.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오지 않을 수 없다.” (Smv.969)라 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나무는 땅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밤중에 불을 밝히고 수많은 수행승들이 초대했를 때 비인간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다음은 빙의된자와 수행승과의 대화에 대한 것입니다.
퇴마의식을 하는 수행승은 빙의된 자, 즉 비인에게‘그대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해야 말합니다. 이름이 말해지면, 이름으로만 불러야 합니다. 이때 수행승은 다음과 같이 비인에게 말합니다.
“어떤 자여, 그대는 화만과 향 등의 공양의 이득이 있고, 자리정화의례를 한 이득이 있고, 수행승의 승단을 위해 그대가 받친 시물을 위해 대길상의 이야기가 말해지고 있다. 수행승의 승단에 대한 존중을 통해서 이 자를 떠나시오.” (Smv.969)
수행승은 비인간에게 빙의된 자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의례를 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음에도 만약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신들에게 고하여 떠나 보내야 한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 호법신을 말합니다.
수행승은 빙의된 자에게 떠나지 않는 비인간에게 보호주를 들려 주어야 합니다. 주석에따르면 “그대들은 아시오. 이 비인은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호주를 행해야 한다.”(Smv.969)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주는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보호주에 대하여 부처님의 명령이라 했습니다. 사실은 부처님이 침묵으로 허락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와 비구니, 청신사와 청신녀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부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직접 나타나서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북방을 지키는 사대왕천 중의 하나인 벳싸바나 대왕이 읊은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외면 호법선신에 의해서 비인간, 즉 귀신들로 보호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대승불교 수호주와 어떻게 다른가?
초기불교에서도 보호주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더구나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수호경전이라 하여 라따나경(보석경), 멧따경(자애경), 다작가경(깃발경) 등과 함께 15가지 수호경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부처님 가르침과 관련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근거를 둔 수호경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수호주는 이와 다릅니다.
대승불교에서 수호주로 유명한 것은 천수대비주와 능엄주입니다. 천수대비주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시바와 비시누 신을 찬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바신(神)과 성관자재(聖觀自在), 인도신화로 본 신묘장구대다라니’(2010-09-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능엄주에서도 수많은 신들과 비인간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아따나띠야 보호주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능엄주는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아따나띠야 보호주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내용을보면 대상이 다릅니다. 능엄주는 직접 여러 호법신장에게 귀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따나띠야 보호주는 호법신장에 귀의하지 않습니다. 아따나띠야 보호주는 호법신장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위력을 지닌 야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 능엄주와 다른 것입니다.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
흔히 귀신들린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귀신은 있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마, 도깨비, 귀신, 야차 등으로 불리는 저급한 신적 존재들은 있었습니다. 육도윤회라 하지만 육도에 들어 가지 못한 존재로서 초기경전에도 수없이 등장합니다.
귀신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각 종교마다 이러한 귀신들을 퇴치 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는 것이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라따나경(寶石經), 멧따경(慈愛經)과 같은 예불문입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면 가장 강력한 주문이 아따나띠야 보호주입니다.
만일 비인간들이 해코지 하려 한다면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외면 됩니다. 만약 야차와 같은 비인간이 해코지 하려 한다면 “이 야차가 붙잡는다. 이 야차가 들어온다. 이 야차가 괴롭힌다. 이 야차가 해악을 끼치고, 이 야차가 상처를 입히고, 이 야차가 놓아 주지 않는다.”(D32)라고 크게 외쳐야 함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호법신장 야차가 달려 와서 보호할 것이라 합니다.
아따나띠야 보호주는 강력한 주문입니다. 그렇다고 호법신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호법선신들이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보호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호법신장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처럼 강력한 보호주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접촉은 느낌입니다. 느낌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S22.77)라고 하여 자만과 갈애와 자아를 버렸을 때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
2018-09-27
진흙속의연꽃
'관심통 > 인문·예술·종교·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덟 가지 청법(請法) 요건 (0) | 2018.12.26 |
---|---|
축생 : 상윳따니까야 ‘물의 경’ (0) | 2018.12.14 |
바보들이나 보시한다고? 과학의 시대와 유물론적 허무주의 (0) | 2018.09.27 |
[2]찬나에 내려진 엄벌 브라흐마단다(梵罰), 왕따 (0) | 2018.09.06 |
좋은 심소(心所)를 얻는 것이 수행, 경행, 설법 조건 (0) | 2018.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