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은 http://blog.daum.net/bolee591/16159076
아래는 원문, 밑줄 강조는 내가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 여덟 가지 청법(請法)에 대하여
책 선물을 받았을 때
이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구든지 선물을 주면 기뻐합니다. 청탁 등 뇌물의 성격이 아닌 한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은 주어서 기쁘고 즐겁고 받아서 기쁩니다. 아무리 원한 맺힌 사이라도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종종 책을 선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저자로 되어 있는 책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받아만 놓을 뿐입니다. 책장에 있지만 언제 읽어 볼 지 알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읽어 보아야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결국 못 읽게 됩니다. 그런 책이 한 두 권이 아닙니다. 책은 아무에게나 선물로 주어서는 안됩니다. 마치 법을 청하는 자에게 설법하듯이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불교에 청법가가 있습니다. 법회에서 법사가 법문할 때, 법문하기에 앞서 법을 설해 주기를 바라는 노래입니다. 불교에서는 ‘청하기전에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하려 한다면 마치 길거리전도사가 ‘예천불지’를 외치는 것처럼 피곤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여덟 가지 청법
청법의 원류가 앙굿따라니까야에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뿐니야의 경(A8.82)’경에서 존자 뿐니야가 “세존이시여, 어떤 때는 여래께서 가르침을 기꺼이 설하시고 어떤 때는 설하지 않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설법의 조건입니다. 청문 조건이 맞아야 법을 설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여덟 단계로 설명했습니다.
청법자의 첫 번째 조건은 법에 대한 ‘믿음(saddha)’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법을 설함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법을 설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법자가 찾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에 청법자의 첫번째 자세입니다.
청법자의 두 번째 조건은 ‘찾아 가는 것(upasaṅkamitā)’입니다. 스승에게 찾아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만일 스승이 먼저 청법자에게 찾아 간다면 스승이 아니라 선생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과외선생을 스승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더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그 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세 번째 조건은 ‘가까이 앉는 것(payirupāsitā)’입니다. 부처님이 대중을 위하여 설법 할 때 멀리 앉아 있다면 잘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집중도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앉으면 집중도 잘 되고 잘 새겨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까이 앉지 않으면, 그 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네 번째 조건은 ‘질문하는 것(paripucchitā)’입니다. 스승을 찾아 가는 것은 궁금한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어야 합니다. 스승이 마음을 헤아려 알려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는 말이 있듯이, 법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자가 부처님을 찾아 묻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까이 앉더라도 질문하지 않으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다섯 번째 조건은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는 것(ohitasoto ca dhammaṃ suṇāti, sutvā)’입니다. 학생이 선생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선생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생은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죠?”라고 말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행승 박깔리는 부처님의 32상에 매료 되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S22.87)라며 나무랐습니다. 그리고서는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S22.87)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여섯 번째 조건은 ‘들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sutvā ca dhammaṃ dhāreti)’입니다. 법문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트를 할 것입니다. 또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필기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귀 기울여 듣고, 들을 것을 기억해 두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학문은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것도 기억하기 위한 것이고,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일곱 번째 조건은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dhatānañca dhammānaṃ atthaṃ upaparikkhati)’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않됩니다. 가르침의 의미를 사유하고 탐구해야 함을 말합니다. 분명히 알고 식별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리뿟따는 분명히 아는 것에 대하여 “무엇을 분명히 압니까? ‘이것은 괴로움이다.’고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M43)라 했습니다. 또 사리뿟따는 식별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무엇을 식별하여 아는 것입니까? 즐거움이라고 식별하여 알고, 괴로움이라고 식별하여 알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라고 식별하여 아는 것입니다.”(M43)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청법자의 여덟 번째 조건은 ‘의미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atthamaññāya dhammamaññāya dhammānudhammapaṭipanna)’입니다. 이는 사성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성제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철저하게 이해면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번뇌는 남아 있습니다. 번뇌를 소멸하기 위하여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팔정도를 닦으면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선재동자의 구도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53선지식을 찾아 다니며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험한 여정 끝에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성자시여, 저는 이미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으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어떻게 해서 보현행을 속히 성취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며 먼저 자세를 낮춥니다. 이어서 “듣자오니 성자께서는 잘 가르쳐 주신다 하오니, 자비를 드리우사 저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떻게 하면 보살이 위없는 보리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입법계품)라고 물어 봅니다. 이것이 대승경전에서 보는 청법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청법자의 자세는 초기경전 도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초기경전 도처에 있습니다. 우다나에 ‘바히야의 경’(Ud.6)이 있습니다. 바히야는 변경인 쑵빠라까 해안에 살았습니다. 하늘사람으로부터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떠납니다. 제따와나에 도착하여 “세존이시여, 제가 오랜 세월 유익하고 안녕하도록,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올바로 잘 가긴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Ud.6-10)라며 법을 청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탁발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히야여, 지금은 알맞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도시로 탁발하러 가는 길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히야는 끈질기게 세 번이나 청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세 번 청법하는 원류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탁발중임에도 짤막하게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이렇게 배워야 한다.”(Ud.6-10)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붙잡고 법을 설한다면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책 선물을 많이 하지만 책이 필요로 한 사람에게 선물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선물했을 때 거의 읽어 보지 않게 됩니다.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습니다. 가르침에 갈증이 나는 자가 찾게 되어 있습니다. 스승을 찾았다면 가까이 앉아 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입니다. 들은 것을 기억해야 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처님은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를 종식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공양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D16)
2018-12-26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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