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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 합리적인 종교, 성스러운 철학 / 권서용

우공(友空) 2024. 8. 21. 21:50

출처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2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 합리적인 종교, 성스러운 철학 / 권서용 - 불교평론

1. 낡은, 새로운 철학과 종교이 세상 모든 흐름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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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1. 낡은, 새로운 철학과 종교

이 세상 모든 흐름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감소는 생명에로의 약동(躍動)이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죽음에로의 고사(枯死)이다. 철학과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에도 낡은, 새로운 철학이 있으며,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낡은, 새로운 종교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철학이 낡은 철학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도 새로운 종교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덥다 춥다, 밝다 어둡다, 아름답다 추하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 신과 인간, 부처와 중생과 같은 것들은 상대적 개념을 사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이 상대적 개념은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정도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니체의 언급처럼, ‘낡은 것’과 ‘새로운 것’도 언어유희에 의한 상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주관적 느낌의 정도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낡은 철학과 종교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실체적 존재’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관계적 양상’에 대한 느낌의 정도 차이를 표현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낡은, 새로운 철학은 무엇이며, 무엇이 낡은, 새로운 종교인가? 우선 존재론의 측면에서 보면, 낡은 철학과 종교는 ‘실체(我, 아트만)’를 궁극적 존재로 인정하는 반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생성 중인 ‘과정(無我, 비실체)’을 궁극적 존재로 간주한다. 다음으로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낡은 철학과 종교는 ‘인식’을 선재(先在)하는 주관에 의해 객관이 파악되어 구성된다는 ‘주객 인식’을 표방한다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객관에 의해 주관이 생성된다는 ‘객주 인식’을 피력한다. 마지막으로 종교론의 위상에서 보면, 낡은 철학과 종교는 ‘신’을 부동의 동자이자 탁월하게 실재적인 초월적 ‘존재’로 보는 반면, 새로운 철학과 종교는 ‘신’을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여러 계기에 의해 구성되고 실현되며,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는 ‘생성’이라는 과정적 존재로 본다. 또한 전자는 ‘신’을 시간 밖의 절대적 초월자로서 해석하는 반면, 후자는 ‘신’을 시간 속의 사물에 내재하며 그들을 완고한 사실로부터 초월하게 하려는 초월적 내재자로 해석한다. 

7세기의 인도불교 인식논리학을 완성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도불교 철학을 집대성한 다르마키르티(600~660)와 20세기 유기체 철학을 완성한, 진정한 의미에서 서구의 극단적인 철학적 입장을 화쟁(和諍)하고 회통(會通)한 화이트헤드(1861~1947)는 새로운 종교와 철학을 추구한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실체(아트만, 我)존재가 아니라 과정(無我)존재를 근거로 새로운 존재론, 주객 인식이 아니라 객주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인식론, 탁월하게 실재적이고 전지전능한 초월적 존재로서 신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내재자로서 신을 해석하는 새로운 종교론을 모색했다. 

 

2. 존재-실체존재와 과정존재

세계와 자기를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론에서 묻게 되는 근본적 질문이다. 또한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러한 궁극적 존재의 본질과 존재 방식을 근거로 철학의 체계를 분류한 뿔리간들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실체와 과정 즉 존재와 생성의 철학으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다. 외견상의 변화와 다양성, 그리고 존재의 다수성 저변에 놓인 불변의 영구적인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을 ‘실체존재론’이라 한다. 다른 한편 인간 내면이건 외부이건 간에 영구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정존재론’ 혹은 ‘양태존재론’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론에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실체존재론이며, 또 하나는 과정존재론이다. 전자는 존재인 ‘실체’를 궁극적 존재로 간주하는 한편, 후자는 ‘생성’인 과정[적 존재]을 궁극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대체로 실체존재론에 입각한 철학을 실체철학이라 부르는데, 인도적 버전으로는 아트만 철학 즉 아론(ātma vāda, 我論)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과정존재론에 입각한 철학을 비실체 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안아트만 철학 즉 무아론(anātma vāda, 無我論)이라 부를 수 있다.

뿔리간들라는 철학을 실체존재론에 입각한 실체철학과 과정존재론에 근거한 비실체철학으로 나눈 다음,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의 주요 철학자와 흐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서양에서는 파르메니데스 · 아리스토텔레스 · 데카르트 · 라이프니츠 · 스피노자 · 로크 · 칸트의 철학이 실체존재론의 몇 가지 사례이며, 반면 헤라클레이토스 · 베르그송 ·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과정존재론의 예들이다. 인도철학의 무대에서는 자이니즘 · 상키야학파 · 베단타학파가 실체존재론의 대표이며, 붓다의 가르침[佛敎]은 과정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서양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칸트까지는 주류철학의 철학자들이며, 인도철학에서 상키야나 베단타 그리고 그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요가 · 니야야 · 바이세시카 · 미망사 등도 실체철학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들 학파 도 모두 인도의 정통 주류철학들이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철학이나 베르그송의 생명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등은 서양에서 비주류철학이며, 인도불교도 인도 정통 육파철학의 내도(內道)가 아닌 외도(外道)로 취급되었다. 철학이 기원전 5세기에 발생했다고 한다면, 인류 정신사에서 거의 2천 년간이나 실체철학이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서양과 인도의 상부구조를 형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실체철학의 사변적 연원을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다. “원리(인 것, 제1원인)는, 그리고 ‘있는 것(사물)들 중 으뜸가는 것’은 그 자체로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딸린 방식으로도 움직이지(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단일한 으뜸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움직여지는 것은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제1원인이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로서의 제1실체이다. 이것은 ‘어떠한 주체에 대해서도 술어가 되지 않으며, 다른 어떠한 주체 속에도 들어가지 않는’ 궁극적 존재이다. 이러한 제1실체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신학을 넘어 데카르트와 칸트의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용되면서 존속해 왔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실체존재에 대해서 과정존재를 피력한다. 그는 자신의 주저 《과정과 실재》에서 “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궁극적 존재, actual entity)의 생성이라는 것”이라고 세계를 설명한다. 그는 과정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현실적 존재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다. 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생성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에 의해 생성되는 타자 의존적 존재이며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실체철학의 연원은 ‘베다의 끝’이라고 명명되는, 베다문학에서 철학적 사유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에 있다. 그 가운데 《찬도기야 · 우파니샤드》에 있는 웃다라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인도 실체철학의 연원을 잘 보여 준다. “아들이여! 태초에 이 세계는 ‘있는 것(sat)’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자로서 존재하고 두 번째를 지니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태초에 이 세계는 없는 것(asat)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자로서 존재하고 두 번째를 지니지 않았다. 그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겼다’라고.” 여기서 “‘없는 것’은 비존재가 아니라 근원적 일자로서의 없는 것, 요컨대 그것으로부터 질서 지어진 세계(코스모스)가 생겨난 바의 구별이 없는 혼돈의 실체”이자 ‘원초적 일자’이다. 이 ‘근원적 일자’는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우주 최고 원리로 간주되며, 뒤의 인도 사상 전개 속에서도 항상 절대적이며 영원불변의 실재로서 위치를 점하는 ‘브라흐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브라흐만과 함께 중요한 것은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근원적인 존재로서 ‘브라흐만’의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오로지 현상계의 사물들 각각이 가진 개체로서의 본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체에 대한 ‘혼’, 타자에 대한 ‘자기’ ‘그것 자신’ ‘개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파니샤드 사상의 중심에 있는 것은 브라흐만(梵)과 아트만(我)의 동일화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말해지지만,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원리와 개체의 원리의 일체화라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범아일여 사상은 그 뒤 인도 정통 주류철학의 실체철학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면 다르마키르티는 존재를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생성하는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본질을 찰나멸(소멸)이라 간주한다.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것도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은 모두 소멸(찰나멸)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 언명은 “모든 것은 무상이다(諸行無常).”라는 명제에 대한 다르마키르티의 재해석이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어떠한 것’은 ‘모든 것(諸行)’을, ‘모두 소멸하는 속성(찰나멸)을 갖는 것’은 ‘무상(無常)’을 재해석한 것이다.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란 모든 존재는 과정적 · 연기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한 생성을 본질로 하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궁극적 존재, vastu)이며, 소멸을 성질로 하는 것이란 찰나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의 명제는 ‘현실적 존재는 찰나멸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가 찰나멸’이라고 할 때, 현실적 존재와 찰나멸의 관계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가 곧 찰나멸이라는 의미이다.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멸은) 그 (존재하는 사물의) 어떤 것(속성)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소멸(찰나멸)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 존재는 생성하자마자 소멸하는 찰나멸을 본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는 모두 실체철학의 기반이 되는 실체존재를 부정하고, 부단히 생성하고 생성하자마자 찰나멸하는 과정존재를 근간으로 비실체적 존재론을 구축한다.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 모두 ‘과정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 그리고 ‘연기의 원리’ 를 근간으로 실체철학의 실체존재를 비판하고 과정존재, 연기존재를 통해 비실체철학(무아철학) · 과정철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사유를 근거로 다음 절에서는 인식의 문제로 넘어가 실체철학과 비실체철학이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해 가고자 한다. 

 

3. 인식-주객인식과 객주인식

상주하는 불변의 실체를 궁극적 존재라 하는 실체철학은, 필연적으로 선재하는 인식주관이 대상을 인식한다는 주객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실체철학에 기반 한 주객 인식은 칸트철학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주객 인식을 피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감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 직관은 오성에 의해 사유되며, 이로부터 개념이 생겨난다.” 주객 인식이란 인식주체(주관)가 인식 대상 즉 객관에 선재하며 이 선재하는 인식주체에 의해 인식 대상이 알려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칸트는 인식 대상 즉 객관은 감성이라는 우리의 주관적 능력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이렇게 선재하는 주관에 의해 객관이 파악되어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 주객 인식론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을 성립시키는 것은 객관 즉 외계 대상이 아니라 인식주관의 능력인 감각 인상이다. 이 감각에서 유래되고 인식 질료와 순수직관이라는 감성의 형식과 순수사유라는 오성의 형식을 근거로 개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개념과 관련하여 그 유명한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고 할 때, 그에게서 개념을 떠난다면 인식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유아주의적 주관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화이트헤드는 칸트의 인식론을 그의 과정철학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칸트에 있어 경험을 성립시키는 과정은 주관성으로부터 현상적인 객관성으로의 과정이다. 유기체 철학은 이러한 분석을 역전시킨다. 그래서 과정을 객체성으로부터 주체성에로, 즉 외적 세계를 여건으로 만드는 객체성으로부터 하나의 개체적 경험을 성립시키는 주체성에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유기체 철학에 따르면 어떠한 경험의 행위 속에도 인식을 위한 객체가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인식에 있어 화이트헤드와 칸트의 본질적 대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칸트에 있어 세계는 주관으로부터 출현하지만, 유기체철학(화이트헤드)에 있어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는 것’은 인식론 상에서 말하면 인식주관은 인식객관(대상)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주관은 이미 선재하는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 인식론에서는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종래의 인식론과 달리 의식이 경험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화이트헤드도 경험의 주객 구조를 반대하고 경험의 객주 구조를 취한다. 그에 의하면 주관이 먼저 실체로서 있고, 그것이 객관을 구성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객관이 주관을 한정하는 데서 경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도의 정통 주류철학도 마찬가지로 실체철학을 전제로 주객 인식을 피력하는데, 대표적으로 상키야철학의 인식론을 통해 주객 인식의 구조를 확인해 보자. “상키야에 따르면 자아(아트만)는 감관과 마나스(manas) 그리고 마하트(mahat)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식을 갖게 된다. 감각과 인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 결과로써 일어난다. 마나스는 감각과 인상을 갖가지로 분석하여 마하트로 넘긴다. 그리하여 마하트는 특수한 대상의 형태로 변형된다. 그러나 마하트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의식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인식을 생성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마하트는 사트바적인 성질이 지배적이므로 자아 즉 푸루샤의 의식을 반영한다.” 상키야철학에서 궁극적 존재로서 자아(아트만)는 순수정신이자 순수의식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존도 하지 않으며, 불변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 순수자아는 관조자이기 때문에 현상적 사물에 대한 인식은 순수물질 원리인 프라크리티의 자기 전변인 감관과 마나스 그리고 마하트라는 수단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인식주관에 해당되는 감관, 마나스, 마하트라는 인식 수단 내지 인식주체는 이미 선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 이러한 감관과 대상이 접촉하여 감각과 인상이 결과로써 발생한다는 주객 인식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감각과 인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이라는 언급이 중요하다. 감각과 인상은 직접적 인식인 지각의 내용에 해당되는데, 이 지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 결과라는 것이 상키야의 인식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인식론에 의하면 대상과 감관과 인식(지각)이 동시에 존재하여 발생한다는 ‘인식과 대상의 동시설’에 입각해 있다. 이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찰나 : 감관지각의 대상 + 감관 + 주의집중 → 감관지각(인식)

 

이러한 ‘인식과 대상의 동시설’에 대해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은 ‘인식과 대상의 이시설’을 주장한다. “모든 원인들은 [결과의 생성보다] 이전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결과의 생성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과의 생성에 대해서 인과적 효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결과의 생성과 동시에 있는 것은 자기의 생성과 동시에 결과도 생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뒤에 작용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지각(인식)의 원인은 대상과 감관과 빛 등의 여러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결과인 지각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들은 시간적으로 결과인 지각보다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지각이라는 결과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찰나 : 감관지각의 대상 + 감관 + 주의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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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찰나 : 감관지각(인식)

 

지금 보고 있는 하얀 종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식하는 나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종이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순간 전의 과거의 찰나에 존재했던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종이가 빛과 함께 나의 망막 속에 진입하고 그것이 뇌수를 거쳐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되어 역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종이에 투사하고 있는 형상 그것을 우리는 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종이는 과거의 대상이며 이 종이에 대한 지각은 현재의 인식이다. 이렇게 해서 다르마키르티도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객주 구조에 입각해 그의 인식론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존재로서 신과 생성으로서 신

기원전 5세기 이전 신화의 시대에서 신은 자연이었다.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하는 자연현상 내지 힘 그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자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외계의 자연현상이나 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자각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가져온 기원전 5세기 이후는 인문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성인의 시대이기도 하며 철학이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성인들의 사유에 의해 인격 종교와 인격신이 배양된다. 이 인격신의 관념에는 부동의 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이 깔려 있다. 부동의 동자이자 탁월하게 실재적인 것으로 기술되는 이러한 신의 관념은 기독교 신학이 애호하는 학설이다. 탁월하게 실재적이며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에 대한 관념이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황제와 같은 이미지로서의 신의 출현이 바로 기독교의 하느님 즉 신이었다. 이러한 실체이자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중세신학의 주된 과제였다. 신의 존재 증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논증 가운데 하나가 안셀무스의 다음 논증이다. “완전한 것은 존재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완전한 것만이 존재하며 오직 신만이 완전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성은 그의 완전성에 있고 그의 완전성은 그의 존재성에 있다는 순환논리에 입각한 안셀무스의 신의 존재 논증은, 이미 신은 절대적으로 그 어떠한 존재와도 관계없이 독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로서 신’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현실 세계와 현실적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이라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피조물이며 현실적 계기라 불린다.” 이 세계는 궁극적 존재인 현실적 존재들로 구성된다. 신도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다.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의 현존도 현실적 존재이다.” 먼지와 같은 ‘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의 현존’도 현실적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다. 따라서 신도 현실적 존재인 한,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일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신도 생성하는 과정의 존재임을 신의 본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모든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의 본성은 양극적이다. 신은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갖고 있다. 신의 본성의 한 측면(원초적 본성)은 신의 개념적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험은 그것이 전제하는 어떠한 현실태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세계 내의 원초적 사실이다. 신의 본성의 이러한 측면은 자유롭고 완전하며 원초적이고 영원하며 현실성을 결하고 있고, 또 무의식적이다. 다른 한쪽의 측면(결과적 본성)은 시간적 세계에서 파생된 물리적 경험과 더불어 생겨나고 이어서 원초적 측면과 통합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고, 불완전하며, 결과적이고, 영속적이며 완벽하게 현실적이면서 의식적이다.” 시간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여건으로서 계기들에 대한 물리적 파악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시간적인 세계의 현실적 존재인 신은 영원한 객체들의 비시간적 영역에 대한 그의 개념적 파악과 더불어 생겨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신도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여러 계기에 의해서 구성되고 실현된다. 요컨대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도 선재(先在)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되는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도의 정통 육파철학도 무신론을 제외한 유신론을 표방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신을 ‘존재’로 이해하고 ‘생성’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육파철학 가운데 불교 인식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인식논리학을 중시한 니야야학파의 우다야나는 다음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질료인은 질료인에 대한 지식과 그 질료인이 지향하는 목적, 그 목적을 실현할 힘을 부여받은 목적인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 그 목적인은 또한 전지전능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각 불가능하고 극미한 원자에 대해 직접적이고 완벽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그 질료인을 지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목적인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씨앗이 싹이 되고, 싹이 성장하여 줄기와 잎 그리고 가지를 형성하여 마침내 꽃과 열매를 맺는 생명현상은 질료인인 원자의 힘에 의해서는 설명 불가능하다. 씨앗에서 싹이, 싹에서 꽃과 열매가 맺는 생명의 질적 변화는 비정신을 본질로 하는 원자가 아니라, 정신을 본질로 하는 작인의 목적적 의지가 개입되어야 가능하다. 그 생명의 결실에로의 목적으로 추동해 가는 지적인 작인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신들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하며 불변인 절대적 ‘존재’이다.

다르마키르티는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부처라는 신적 존재는 긍정한다. 그렇지만 그가 긍정하는 부처는 ‘존재’로서 이미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것(지각과 추론)과 마찬가지로 세존은 인식 수단(종교적 권위)이다. ‘생성’이라는 말은 불생(不生, 상주)인 존재의 배제를 위한 것이다. 인식 수단은 결코 상주[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상(찰나멸)을 본질로 하는]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인식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식은 대상에 의해 구성되는 인과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식의 정합성과 새로움을 갖추어야만 인식 수단이 되듯이 신적 존재인 붓다가 바른 인식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상주를 본질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상을 본질로 하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식 수단이 된’ 세존이란 바로 불변하고 상주하는 본질을 가진 절대적 고정적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고 무상한 찰나멸을 본질로 하는, 현실적 존재에 의해 생성됨과 동시에 찰나멸하는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붓다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5. 절대적 초월자로서 신과 초월적 내재자로서 신

이 세계는 다음과 같은 역설, 즉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친숙했던 것들과 사랑했던 것들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과거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한시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끊임없이 소멸해 가는 무상한 시간 속에서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잊기 위해서 유동의 시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존재지만, 그는 시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 있는 존재가 시간 속에 있는 존재를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 밖의 존재가 시간 속의 존재를 구원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간 밖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념과 결합한다. 하나는 ‘부동의 동자’이며 또 하나는 ‘탁월하게 실재적인 존재’이다. 이 두 관념이 결합되어 초월적이며 탁월하게 실재적인 창조주인 신이 탄생하게 된다. 신의 명령으로 세계가 존재하게 되고 그의 의지에 의해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 창조주라는 관념은, 서구의 종교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된다. 이러한 신의 관념에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황제와 같은 이미지가 덧씌워져 신은 절대적 힘을 가진 현실 권력 속에 구현된다. 이러한 신은 구원의 주체이고 창조주이며 완전하고 불변이며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하는 일체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시간적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우상숭배의 유신론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거부한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은 여타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 존재의 하나이다. 신이 현실적 존재인 한 타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존적이라는 것은 내재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개개의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내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되 외적으로는 자유롭”듯이, 신은 원초적 본성에서 세계 속에 객체화되고 내재하지만, 결과적 본성에서 세계를 심판함과 동시에 구원한다. 여기에 신의 초월성이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초월적 내재로서의 신과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세계가 신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요컨대 세계는 신에 있어서 의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며, 신은 세계에 있어서 의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월적 존재라 할 수 있다.

한편 인도 육파철학 가운데 가장 정통적 학파인 베단타는 신을 2종으로 나눈다. 하나는 속성을 지닌 브라흐만이며, 또 하나는 속성을 여읜 브라흐만이다. 전자인 신은 저차적 · 인습적 · 상대적인 인격신이다. 이슈바라로 상징된다. 반면 후자인 신은 언어의 규정을 떠나고 사유의 한정을 넘어선 절대적 초월자이다. 이 신은 순수존재이며 순수의식이며 순수희열인 유일실재이다. 두 신 모두 전지와 전능과 편재와 불변을 본질로 하는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은 ‘마음의 현현[唯識]’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철학에 입각해 있다. 유식이란 오직 존재하는 것은 식뿐이라는 사유체계이다. 이 식이 전변하여 ‘나’와 ‘세계’가 현현한다고 하는 것이 유식의 식전변설 혹은 심상속설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수 없이 많은 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종자가 계기적으로 다음 종자를 낳으며 현행을 낳는데, 만약 그 마음이 선한 종자로 충만해 있다면 그것의 현행은 인격으로 말하면 선한 사람이 될 것이요, 그 마음이 악한 종자로 충만해 있다면 그것의 현행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는 존재를 ‘부처’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중생’이라 한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은 마음의 현현의 두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는 심상 속의 현현 속에 내재하지만, 일체의 고로부터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윤회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인 사제(四諦)라는 인과법을 체득한 불(佛)은 자비와 지혜를 근거로 그것을 중생에게 설하는 존재이다. “자비를 증대하고 나서 타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에서] 솟아나는 대비자(dayāvān)는 [중생의] 고통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방책을 궁구한다. 얻어야 할 것(고의 소멸)과 그 원인(고를 소멸하는 길)을 보지 못하는 자가 그것을 설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불은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하는 자비의 마음을 본성으로 할 뿐만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는 길을 아는 지혜를 본성으로 한다. 

다르마키르티에 의하면 지혜의 구체적 내용은 고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과 고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인식이다. 고의 발생은 존재가 ‘나’와 ‘나의 것’이 아닌데 ‘나’라고 하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아견(我見) 및 아소견(我所見)에 기인한다고 아는 것이 고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바른 인식이며, 고의 소멸은 일체의 존재가 무아(無我)와 공(空)을 본질로 한다고 아는 것이 고를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쉽게 말하면 아견과 아소견을 원인으로 고가 발생하고, 무아견과 공견에 의해서 고가 소멸된다고 아는 것이 지혜이다. 만약 이러한 자비의 마음과 지혜의 마음이 없다면, 중생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사제(四諦)를 설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불은] 자비에 의해서 가장 수승한 것을 설하고, 지혜에 의해서 추론인을 동반한 진실을 설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려고 노력하는 분이기 때문에 바른 인식(종교적 권위)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스스로 체득하는 것은 불의 자리(自利)일 뿐 이타(利他)가 아니다. 자리를 넘어 이타로 나아갈 때 진정한 불 즉 깨달은 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제의 진리를 중생의 고통의 구제를 위하여 몸소 실천하는데, 그 실천을 위한 내재적 덕목이 바로 불의 자비와 지혜이다. 결국 불은 사제를 아는 일체지자일 뿐만 아니라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와 무아견과 공견을 내용으로 하는 지혜를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세상과 인간을 벗어난 다른 세상이나 다른 존재에로의 전변을 초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상태에서 지혜로운 상태에로의 인식의 근본적 전환을 초월로 본다는 점에서 붓다의 초월은 내재적 초월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 머물고자 서원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초월적 내재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와 다르마키르티는 공통적으로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부정하고 초월적 내재자이자 내재적 초월자로서의 신을 긍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합리적 종교와 성스러운 철학

우리는 앞에서 인간 정신이 품기 쉬운 불변의 실체라는 관념, 주관 중심의 주객 인식이라는 관념, 초월적 신의 관념을 전제하는 철학과 종교를 ‘낡은 철학’ ‘낡은 종교’라 규정했다. 이러한 철학과 종교는 상호 간에 내재적 관계를 부정하고, 종교가 전제되지 않는 철학, 철학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 종교로 이분화해 버린다. 이렇게 이분화될 때 고립무원의 철학, 독단적인 종교가 되기 십상이다. 또한 이러한 낡은 철학과 종교는, 현실에 대해, 개개인의 삶에 대해 무기력하게 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철학과 종교가 무기력하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내재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철학은 종교나 과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때, 무기력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철학은 종교를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한다. 종교란 본래 관념적 사고에만 속하던 저 무시간적 보편성을 정서의 집요한 특수성 속에 주입시키려는 근원적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 유기체에 있어, 이와 같은 지고한 융합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정서와 관념적 경험 사이의 템포 차이는 삶의 권태를 낳게 된다. 이러한 유기체의 두 측면은 정서적 경험이 개념적인 것에서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은 정서적인 것에서 예시되는 그런 화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두 가지 경험의 복합체이다.

하나는 정서적 경험이며 또 하나는 개념적 경험이다. 그런데 이 두 경험이 분리되고 갈등하고 반목할 때, 철학과 종교는 무기력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반면 그러한 두 경험이 화해될 때 무기력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정서적 경험이 개념적인 것에서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이 정서적인 것에서 예시될 때’ 화해가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종교가 개념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철학에 의해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철학이 정서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종교에 의해 예시될 때, 종교와 철학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공동체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다르마키르티도 정서적 경험과 개념적 경험의 상호 내재적 연관을 다음과 같이 갈파한다. “그것(고통)은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무아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무아의] 공견에 근거하는 것이야말로 해탈이 있는 것이며, 그 외의 수습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은] 실로 그런 까닭에 무상성에 근거하여 고통을, 그리고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이 직면한 현재의 고와 그러한 고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적 경험이며 또한 어떤 것을 취하려고 하거나 버리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정서적 경험들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이러한 정서적 경험인 고통과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존재에로의 귀의나 맹목적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욕망 즉 고를 야기하는 욕망 일체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인연에 의해 소멸한다는 연기의 진리에 대한 무지, 일체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또한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는 진실에 대한 무지, ‘일체가 공’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초래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가 연기이며, 무아이며, 공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가 지양해야 할 모든 욕망과 증오와 같은 정서적 경험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경험과 개념적 경험의 완벽한 화해를 실현한 존재가 부처임을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세존은] 자비에 의해서 가장 오묘한 것을 말하고 지혜에 의해서 [고와 고의 소멸이] 성립하는 요인을 포함한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하시려고 노력하시기 때문에 [붓다=세존은 중생에 있어서의] 인식 수단(종교적 권위)이다.”31)

자비는 깨달은 존재의 정서적 경험이며, 지혜는 깨달은 존재의 개념적 경험이다. 이렇게 붓다 속에서 두 경험은 화해되고 서로 의존하여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서적 경험이 개념적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고 개념적 경험이 정서적인 경험에서 예시되는, 고가 올바른 인식에 의해 정당화되고 올바른 인식은 다시 자비라는 정서적 경험에 의해 예시되는, 일상적 삶 속에서 그러한 삶을 초월하려는, 삶의 수레바퀴를 초월한 깨달음에서 다시 현실적 일상적 삶 속에서 다시 보임(保任)하려는, 내재적 초월의 철학과 초월적 내재의 종교가 화해될 때, 비로소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과 종교에서는 합리적이면서 성스러운 인간, 성스러우면서도 합리적 인간이 구현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인간상을 가장 잘 구현한 철학자가 바로 다르마키르티와 화이트헤드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미래의 철학자이자 종교인이다. ■

 

권서용 jungy5182539@hanmail.net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주요 논문으로 〈원시불교의 오온설 연구〉(석사), 〈다르마끼르띠의 인식론 연구〉(박사), 〈다르마키르티와 화이트헤드 사상의 접점(1)〉 등이 있다. 저 · 역서로 《무상의 철학》 《인도인의 논리학》 《티베트불교철학》 《다르마키르티와 불교인식론》 《불교인식론과 논리학》 《아포하》 《인식론평석-지각론》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평석-종교론》 《깨달음과 자유》 등 다수. 현재 다르마키르티사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