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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종교 계통 신흥교단의 출현과 전개 / 조성환

우공(友空) 2026. 5. 2. 22:48

출처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1

 

민족종교 계통 신흥교단의 출현과 전개 / 조성환 - 불교평론

1. 들어가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한국 철학사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공백기’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위정척사 사상’이나 ‘개화사상’이 다루어지는데, 양자는 모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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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의 신종교 지형과 미래

1. 들어가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한국 철학사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공백기’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위정척사 사상’이나 ‘개화사상’이 다루어지는데, 양자는 모두 서구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찬반양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종교사로 눈을 돌리면, 이 시기야말로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한국 종교가 우후죽순으로 탄생한 일종의 ‘제자백교(諸子百敎)’ 시기에 해당한다. 현대 한국을 ‘종교백화점’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현상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흔히 ‘민족종교’ 내지는 ‘민중중교’라고 일컬어지는 이 신흥종교들은 그때까지 ‘성인의 가르침[聖敎]’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던 한국 민중의 세계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특히 민족종교의 물꼬를 튼 동학(東學)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을 통해 민(民)이 주인이라는 ‘민주(民主)’ 의식을 드높였고, 원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이 아니라 은혜이다”라고 하는 독특한 불교 교리를 제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인 ‘사회참여’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는 1920년에 《개벽》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대종교는 같은 해에 만주에서 종교적 수양과 항일 투쟁을 겸하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을 실천하였다. 이처럼 근현대 한국의 민족종교는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문화적, 사상적 정체성을 알려주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동학을 비롯한 근현대 한국 민족종교의 탄생 과정과 그것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민중이 서구적 근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신흥종교의 출현

1) 동학, 민족종교의 시작을 알리다

동학은 가히 ‘민족종교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동학은 천도교, 시천교, 상제교 등 다양한 신종교로 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 이외에도 강증산이나 소태산(원불교 창시자)과 같이 동학이 제창한 개벽의 이념을 표방하는 민족종교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들 신종교는 하나같이 ‘서세동점’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동학이 탄생한 1860년은 동아시아가 일대 전환을 맞이한 해였다.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베이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세계정세를 발 빠르게 내다보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국으로 견문을 떠나고, 1868년에는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의 국운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당시의 정세를 동서 문명의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요청되는 ‘다시개벽’의 시기로 인식하고, 종래의 유학을 대신해서 ‘나라를 돕고 백성을 살릴[輔國安民]’ 새로운 신념 체계[道]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도’를 추구하는 방식에서도 조선 성리학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성인의 가르침[聖敎]’이 아닌 ‘하늘의 가르침[天敎]’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동학을 창시하기 전에 시도했다고 하는 천제(天祭),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기도’는 이 점을 시사한다. 최제우가 보기에 당시 문명의 위기는 하늘님을 모시고 공경하는 인간의 원초적 영성이 약화한 데에서 초래된 인간 이기주의[各自爲心]의 결과였다. 

이런 고민을 하던 1860년 4월, 마침내 그는 신비체험을 통해 하늘님으로부터 계시를 얻고, 그것으로 새로운 ‘학’과 ‘도’를 창도했다. 그 이름은 하늘님을 모신다는 점에서는 ‘천도’이고, 그 도를 한반도에서 받았다는 점에서는 ‘동학’이다. ‘동학’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고, ‘천도’는 1905년에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할 때의 개념적 근거가 된다. 최제우가 동학=천도를 창도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한 일이었다. 이것은 그가 종래의 유교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을 실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새로운 도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로서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인간과 하늘 사이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하늘 도덕’이다. 구체적으로는 내 안에도 하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섬기는 시천주(侍天主)의 도덕이다. 시천주의 인간관을 깨달은 최제우는 그것의 구현 일환으로 노비를 해방하였고, 이런 그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은 민중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유학자나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정부가 보기에는 종래의 질서를 뒤흔드는 이단(異端)에 불과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지 4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 뒤를 최시형이 잇게 되었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한편으로는 동학의 조직과 체제를 체계화하고 확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체험과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해석했다. ‘다시개벽’을 ‘후천개벽’으로 개념화하면서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물질 개벽’에 대비되는 ‘인심 개벽’으로 제시했다(‘인심 개벽’은 이후에 원불교에서 ‘정신 개벽’으로 개념화된다). 또한 ‘하늘님’의 의미를 ‘천지(天地)’로 재해석하고, 천지야말로 인간과 만물의 부모라고 하는 ‘천지부모설’을 제창했다. 나아가서 도덕의 범위를 비인간 존재(nonhuman)로까지 확장하여, ‘사물을 공경하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도덕이 완성된다’라고 하는 경물(敬物) 도덕을 설파했다. 제사의 형식에서도 천지부모의 시조론(始祖論)과 시천주의 인간관을 근거로, 죽은 조상이 아닌 산 나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는 ‘향아설위(向我設位)’ 법을 제기했다. 

한편 조직의 측면에서도 종래의 ‘접(接)’ 이외에 그보다 더 큰 ‘포(包)’ 조직을 창시했는데, 이것은 이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데 물리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당시에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기포(起包)’ 즉 ‘포를 일으켰다’고 부른 점이 이를 방증한다.

지금까지 동학의 탄생 배경과 창시자 최제우와 후계자 최시형의 사상적 특징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들은 당시를 구질서에서 신질서로 넘어가는 문명 전환기로 인식하면서 종래에 ‘천지개벽’을 의미하던 ‘개벽’을 사상 용어로 재해석하였다. 나아가서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하늘님을 모시는 영성의 실천을 강조하는 신도덕(新道德)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측면들은 20세기까지만 해도 학계나 시민사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20세기는 개벽이 아니라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 하면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릴 정도로 동학은 사상이나 종교보다는 ‘역사적 사건’으로만 주목받았다. 다만 1980년대 중반에 선구적으로 ‘한살림’ 운동가들에 의해서 최시형의 사상이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철학으로 부각되었고, 학계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최시형의 생태철학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 2019년에 삼일독립운동 100주년을 전후로 ‘개벽사상’이 학계와 시민사회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개화파’ 이외에도 ‘개벽파’가 있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동학을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지지를 받으면서, ‘동학농민혁명-삼일독립운동-4·19-5·18-촛불혁명’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보는 역사 인식도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사회에서는 ‘사상으로서의 동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여, 종래와 같은 동학 기념행사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동학 텍스트를 읽거나 배우는 동학 공부 모임이 활성화되는 상황이다. 

2) 천도교, 근대화 운동에 뛰어들다 

1898년, 최시형이 35년간의 도망자 생활을 마감하고 최제우의 뒤를 따라 처형당하자, 의암 손병희(1861~1922)가 동학 교단을 이끌었다. 손병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의 최고 지도자였고, 일본군에게 패한 이후에는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근대적인 종교 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하였다.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교단 조직을 새롭게 하였으며, 사범강습소를 운영하여 교리와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최제우의 ‘시천주’ 인간관을 ‘인내천’으로 재해석하여(〈대종정의〉 1907), ‘인내천’을 천도교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을 살려서 삼일독립운동을 기획하였고, 체포된 후에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종교였다. 신자 수가 100~300만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기독교 인구는 대략 20~30만 명 정도였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1910년에는 본격적인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하여, 한편으로는 천도교 교리를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잡지에는 ‘교리부’ 외에도 ‘학술부’를 두어서 ‘물리학’ ‘화학’ ‘지리학’ ‘경제학’ ‘양돈학’ ‘삼림학’과 같은 신학문을 소개하였다. 또한 순한글로 쓴 원고 중에서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하’과 ‘하님’ 개념에 변화가 나타난다. 1911년을 전후로 ‘한울’ 개념이 정착되고, 이어서 동학 창도 60주년이 되는 1920년에는 ‘한울님’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또한 1920년에는 천도교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대중적인 《개벽》 잡지를 창간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개벽》의 주필을 역임한 소춘 김기전은 방정환 등과 함께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 여성해방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니체나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같은 서양의 현대철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개벽》의 편집인 이돈화는 《천도교회월보》와 《개벽》에 다수의 글을 발표하면서 ‘천도교의 철학화’ 작업의 선봉에 섰다. 특히 1931년에는 자신의 생각을 종합한 《신인철학(新人哲學)》을 출간하여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철학’이라는 틀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던 ‘한울’의 철학화를 시도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울은 ‘큰 우리’를 의미하는데, 그것의 철학적 의미는 ‘우주’와 ‘대아(大我)’를 나타냄과 동시에 ‘지기(至氣)’와 생명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한울은 한편으로는 내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명제를 함축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물의 생성과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본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이돈화는 ‘한울’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만물, 우주를 통합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동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돈화의 이러한 작업은 해방 이후에 ‘한사상’이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천도교 사상가 백세명은 1956년에 쓴 《동학사상과 천도교》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한’이다”라고 하면서, ‘한’을 천도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 사상 전반으로까지 확장하였다. 나아가서 “한은 만물의 본체”를 말하는데, 그것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인격화해서 ‘한님’이라고 불렀고, 이후에 ‘한’은 ‘한울’이나 ‘한울’로, ‘한님’은 ‘하느님’이나 ‘한우님’ 등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로 〈단군신화〉를 들면서, 환인(桓因)은 ‘한’의 한자어 표현이고, ‘환웅대왕(桓雄大王)’은 ‘한우님’을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한’이나 ‘한울’을 한국 철학사 전체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서, 이후에 실학자 이을호나 신학자 김상일, 공공철학자 김태창 등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최시형의 수제자 중에는 손병희 이외에도 이용구(1868~ 1912)와 김연국(1857~1944)이 있었는데, 이들은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칭하자 독자적으로 시천교(侍天敎, 1906)와 상제교(上帝敎, 1907)를 창건했다. 최초의 동학 분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 시천교, 상제교 등은 ‘신동학’ 내지는 ‘후기 동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천도교와 달리 시천교나 상제교에서는 ‘하’에서 ‘한울’과 같은 천명(天名)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사상을 현대화하거나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힘쓰기보다는 동학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3) 대종교, 수행과 전쟁을 병행하다

시천교나 상제교가 탄생한 직후에 동학과는 또 다른 계열의 민족종교가 호남에서 탄생했는데, 바로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하는 신종교로, 창시자는 홍암 나철(1863~1916)이다. 나철은 손병희와 동시대의 인물로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제우와 마찬가지로 유학적 소양이 풍부하였다. 10세 무렵에는 구례의 왕석보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0대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구한말의 고관(高官) 김윤식에게 직접 배웠다. 

나철은 대부분의 민족종교 창시자들과는 달리 관직에 올라 벼슬까지 하였다. 29세 때(1891)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 권지부정자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05년에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자 해학 이기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연대를 촉구하는 등 대일 외교를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비밀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의거가 실패하자 무안군으로 유배되었는데 고종의 특사로 5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 무렵 나철은 단군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대종교 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단군 신앙을 전개하던 백봉신사(白峯神師) 주변 인물들과 교류하며 수도하던 중, 46세가 되던 1908년 12월에 영적 계시를 받는 체험을 한다. 이어 1909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례를 봉행한 뒤 ‘단군교’의 포명(佈明)을 선포하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자 나철은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다. 여기서 ‘대(大)’는 우리말의 ‘한’을 의미하고, ‘종(倧)’은 ‘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대종’은 ‘한얼’이나 ‘한검’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한글’이라는 개념도 탄생하였는데, 1911년 천도교에서 ‘하’을 ‘한울’로 변경한 것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제우의 ‘다시개벽’에 해당하는 대종교의 개념은 ‘중광(重光)’ 또는 ‘개천(開天)’이다. ‘중광’은 ‘다시 빛낸다’는 뜻으로,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중흥시킨다는 의미이다. ‘다시개벽’이 태초의 인간의 영성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잇듯이, ‘중광’도 단군 신앙을 부활시킨다는 의미이다. 백봉신사의 제자들이 썼다고 하는 〈단군교포명서〉에 의하면 “단군교는 4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다.” 그동안 〈단군신화〉와 같이 이야기의 형태로만 전해지던 단군이 한 교단의 교조로 격상된 것이다.

동학이 시천주, 천도교가 인내천의 신관을 취하고 있다면 대종교의 신관은 ‘삼신일체(三神一體)’이다. 삼신일체란 환인·환웅·단군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삼위일체’에 해당한다. 하지만 작용의 측면에서는 각각 조화(造化)와 교화(敎化) 그리고 치화(治化)의 역할을 담당한다. 조화는 생성에, 교화는 도덕에, 치화는 정치에 각각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삼신의 관계는 체용으로 설명된다. 나철이 쓴 《신리대전(神理大全)》에 의하면, 삼신은 체(體)의 측면에서는 하나이지만 용(用)의 측면에서는 셋이다. 삼신의 호칭도 순한글을 사용하여 ‘한인·한웅·한검(한배검)’이라고 부른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천지인 삼재를 원방각(圓方角)으로 이미지화하는데 원은 동그라미를, 방은 정사각형을, 각은 삼각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배검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의 모양은 모두 원방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천도교와 마찬가지로 대종교도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종교는 천도교와는 다른 대응 방식을 취했다. 1914년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길림성 청파호로 총본산을 옮기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확장하여 교도 수가 3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포교규칙〉(일종의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의 종교 활동을 차단하자, 이듬해 1916년에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올라가 제천의례를 행한 뒤에 스스로 호흡을 끊어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구월산은 단군이 수도로 삼아서 나라를 다스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철이 죽기 전에 남긴 〈순명삼조(殉命三條)〉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한배검 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고 한겨레의 멸망을 구하지 못하여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나철의 죽음에 대해 종교학자 박광수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나라와 대종교를 구하고자 했던 일종의 ‘희생제의’였다”라고 해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나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6년에는 나철이 태어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홍암나철기념관’이 건립되었는데, 나철이 죽기 전에 한글로 딸에게 쓴 유서가 전시되어 있다. 

나철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식도 국권회복 운동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노길명은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나철의 순명(殉命)이었다고 본다. “제천의례와 홍암의 순명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온건한 방법에서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급격히 전환되기 시작한다.”

제2대 교주 김교헌은 1919년 12월에 대종교인들로 구성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교단의 지도자인 백포 서일을 총재로 임명하였다. 서일은 1920년에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후에 시베리아에서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을 겪고 마적단의 습격을 당해 큰 타격을 입자 서일 역시 나철의 뒤를 따라서 자결하였다(1921).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김교헌도 사망하였다. 길림성 화룡현에는 나철과 김교헌 그리고 서일의 무덤이 한자리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나철과 함께 서일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에는 김교헌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은 독립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이자 사상가였다. 그가 쓴 《회삼경(會三經)》이나 《삼일신고강의》 《삼문일답(三問一答)》 등은 대종교의 핵심 교리인 ‘삼일철학’을 해설한 주석서이다. 특히 《회삼경》은 중국철학에 나오는 ‘회삼귀일’의 방법론을 빌려 와서 대종교의 삼신일체 사상을 철학적으로 풀이한 경전이다. 

 

4) 강증산, 해원상생(解冤相生)의 길을 찾다

증산 강일순(1871~1909)은 손병희나 나철보다 약 10여 년 뒤에 전북 고부에서 태어났다. 고부는 지금의 정읍으로, 1894년에 전봉준의 봉기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던 증산은 31세 때인 1901년, 전라도 모악산 대원사에서 득도하였다. 하지만 최제우나 나철과는 달리 교단이나 종교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모악산 아래 구릿골에서 ‘광제국(廣濟局)’이라는 조그마한 한약방(일명 ‘동곡약방’)을 차리고 병든 중생들을 치유하였다. 이 활동을 증산은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하였는데, 천지공사란 선천의 상극의 질서를 후천의 상생의 질서로 바꾸는 종교적 행위를 말한다. 

증산은 선천의 질서를 ‘묵은 하늘’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타고난 모습대로 소탈하게 살 것을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고, 나는 의례가 간소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예절이 번잡하고, 나는 웃고 기쁘게 대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위엄을 주장하느니라. 나는 다정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정숙하고 점잖은 것을 높이고, 나는 진실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허장성세를 세우고, 나는 화락(和樂)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싸워 이기기를 주장하느니라. 앞 세상에는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없어 천하는 대동세계가 되고, 모든 일에 신명이 수종 들어 이루어지며 따뜻한 정과 의로움이 충만하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리라. 묵은 하늘은 이것을 일러 상놈의 세상이라 하였느니라.”

이에 의하면 선천의 질서에서 ‘상놈의 세상’이라고 부르던 사회가 오히려 ‘대동’의 이념이 이루어진 ‘새 하늘’에 해당한다. 

증산은 동학과도 관련이 깊은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김개남 부대를 따라서 청주까지 진격하였다.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울러 일본군에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의 산더미 같은 주검들을 보고서 몇날 며칠을 대성통곡하였다. 득도한 후에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이야말로 ‘참동학’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자신이 세상에 보낸 사자(使者)인데, 세상을 구원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직접 내려왔다는 것이다. 

증산의 가르침의 핵심은 ‘원한을 풀고 서로를 살린다’고 하는 ‘해원상생(解冤相生)’으로 집약된다. 이 외에도 앞으로의 시대는 하늘이나 땅보다 사람이 존귀한 ‘인존(人尊) 시대’라고 하면서, 남녀의 권리를 동등하게 해야 한다는 ‘남녀동권(男女同權)’을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실천의 하나로 부인 고판례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1907년 고판례와 혼인하였는데, 혼례를 마친 뒤 증산은 “천지대업을 너에게 밝히리라”라고 하였다. 실제로 증산 사후 2년 뒤인 1911년, 고판례는 증산 성령이 접령하는 신비체험을 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고판례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고판례는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했다. 여기에 이종 동생인 차경석의 도움으로 교단이 점점 확장되었는데, 1914년 무렵에는 차경석이 실질적인 교주로 등극했다. 

이 무렵부터 여러 교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데, 1914년에는 증산의 첫 제자인 김형렬이 이끄는 미륵불교가 등장하였고, 1921년에는 차경석이 자신을 ‘천자’로 자처하며 천제(天祭)를 행하였고, 이듬해에는 ‘보천교’로 개명하였다. 1923년에는 조철제가 이끄는 태극도가 등장하였고, 1927년에는 강순임의 선불교, 1928년에는 이상호의 동화교, 1970년대에는 박한경이 이끄는 대순진리회, 안경전이 이끄는 증산도 등으로 분화되었다. 

이 중에서 차경석의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천도교와 더불어 민족종교계를 양분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 보천교 연구자 안후상에 의하면, 일명 ‘워싱턴회의’(1921)를 앞두고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대(對)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이 참가하였고, 1922년에는 김좌진에게 자금 지원을 한 정황이 있다. 1923년에는 보천교 간부 2명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독립운동단체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에는 실력 양성 운동에 뛰어들어,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인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하였다.  

하지만 교세가 커진 만큼 일제의 견제도 심하였다. 특히 1920년대 초에 경상북도 안동과 청송 등지에서 보천교의 조직이 빠르게 확장되자, 일제는 이들을 ‘종교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보천교 간부 이정립은 이것을 ‘청송사건(靑松事件)’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기소된 보천교 관계자들은 222명에 달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견제와 함께 교단의 분열도 일어나서 결국 보천교는 1936년 차경석의 사망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안후상의 연구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추서된 보천교와 보천교계 신종교 관련 독립유공자는 150명에 이른다. 최근에는 보천교를 정읍의 정체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2023년에는 정읍에서 ‘보천교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동학농민운동의 변현(變現),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5) 원불교,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조화를 꾀하다

원불교는 1916년에 전남 영광에서 소태산 박중빈이 시작한 ‘저축조합’ 운동에서 기원한다. 이후 1924년에 전북 익산으로 옮겨와서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 오늘날의 ‘원불교’(1948)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불교의 슬로건(개교 표어)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원불교가 천도교나 증산계 신종교와 마찬가지로 최제우의 ‘개벽사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원불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김기천이 여쭙기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최제우)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강일순) 선생의 행적은 그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박중빈)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럴듯하니라.” 

이 대화는 당시의 원불교 내부에서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를 하나의 ‘개벽파’로 보는 인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서양과 근대에 대한 대응에서 ‘개화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유학과는 다른 질서를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개화파와 입장이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불도 삼교의 수양론을 적극 수용하였고, 그동안 불교나 유교에 가려졌던 ‘하늘님’이나 ‘단군’과 같은 토착 전통을 발굴하였다. 또한 서구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일방적인 수용이나 찬양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위험성을 경계하자는 입장이었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의 힘이 강력한 만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도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원불교가 다른 민족종교에 비해 수양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불교는 유불선 삼교의 수양론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체계적인 수양법을 갖고 있다. ‘물질 개벽’ 시대에는 정신의 힘을 기르는 ‘정신 개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는 이것을 도학과 과학의 병행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원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천지의 은혜’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천지가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報恩)의 삶을 살 것을 권하는데, 그런 점에서 원불교는 가장 생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본질이 아닌 ‘조건’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그런 점에서는 최시형의 ‘천지부모설’과 상통한다.  

 

3. 맺으며

지금까지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대표적인 민족종교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이들 민족종교는 당시의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두된 개념이 ‘개벽’인데(대종교의 경우에는 ‘중광’이나 ‘개천’), 개벽은 역성혁명(유학)이나 시민혁명(유럽)과는 달리 정신적 수양과 영성의 수련을 강조하였다. 대종교와 같이 무장투쟁을 전개한 그룹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그것을 상징하는 개념이 ‘도덕’이다. 민족종교에서 말하는 ‘도덕’은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物],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天]의 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동학은 만물까지도 공경하라는 경물 도덕을 설파하였고, 전봉준은 “적과 싸울 때는 가급적 살생하지 말라”는 규율을 내렸다. 천도교에서는 기독교와 연합하여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원불교에서는 정신과 마음의 수양을 쌓아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도덕 문명을 건설할 것을 제언하였다. 또한 이승여(1874~1934)가 창시한 금강대도에서는 도덕으로 세상을 개화한다는 의미에서 ‘도덕 개화’ 사상을 설파하였다.

이 외에도 제천의례는 민족종교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요소이다. 동학, 증산계 신종교, 대종교, 원불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구도 과정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고 하늘에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중국에서는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제천이 국가 행사의 하나로 전래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중단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민족종교에 의해서 부활된 것이다. 이것은 권력에 의해 독점되었던 ‘하늘’을 민중들이 되찾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글의 ‘하늘’과 그것의 변형어인 ‘한’ 개념이 대두되었다. 종래에는 한자어로 철학을 했는데, 민족종교에 들어와서는 한글을 사용해서 최고 존재를 가리키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울’이나 ‘한얼’과 같은 새로운 개념도 탄생하였다. 이 외에도 최고 존재를 지칭하는 공통 개념으로 ‘님’이 사용되기 시작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운의 〈님에 대하여〉(1925)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은 ‘님’ 개념에 새로운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경우에 ‘님’은 서양어의 ‘God’에 해당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같이 신이 아닌 존재에게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 점에서는 ‘님’은 존재론적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상대방을 대하는 종교적, 윤리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는 서양의 ‘신학(Theology)’과 대비되는 한국의 ‘님학(Nimology)’이 태동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조성환 hansowon70@nate.com
서강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원광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기후인문학연구소 소장, 《사상계》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근대의 탄생》 《K-사상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인류세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다.